'철학'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08.04.15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 _ 가치론연습 참고자료
  2. 2008.04.15 The Fog of War _ 가치론연습 참고자료
  3. 2008.04.13 제네바 협약_가치론연습 참고자료
  4. 2008.04.13 베르사유조약 _ 가치론연습 참고자료
  5. 2008.04.12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military―industrial complex)_가치론연습 참고자료
  6. 2008.04.11 칸트의 영구평화론 _ 가치론 연습 발표자료
  7. 2008.04.09 칸트 영구평화론 _ 가치론 연습 자료
  8. 2008.03.30 칸트 영구평화론(Perpetual Peace) - 가치론 연습 자료 4
  9. 2008.03.30 [베니스국제영화제] 미국 대 존 레논(The U.S. vs John Lenon), 기록영화 _ 가치론연습 참고자료
  10. 2008.03.05 [중앙]세계적 철학자 7명 릴레이 인터뷰 ⑧·끝 김재권 미 브라운대 석좌교수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 _ 가치론연습 참고자료

철학/가치론연습 2008. 4. 15. 04:43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

 

       


1. 대통령의 죽음

“칠레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적들에 의해 내가 내던져지더라도, 그 적들이 미국이나 다른 누구라 할지라도, 그들은 이 나라의 발전을 다만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을 뿐이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칠레의 멸망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대통령을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한 사람의 개인일 뿐이다. 당신이 자유로운 칠레를 죽이려 한다면 당신은 모든 젊은이들을 죽여야만 할 것이다.”

1972년 스웨덴 교통통상장관 벵헷 놀링에게 아옌데는 말했다. 그리고 이듬해 대통령 아옌데는 모네다궁에서 미국의 사주를 받고 진격해오는 반군을 향해 소총을 들고 독전하다가 죽었다. 아옌데가 죽은 후 칠레는 긴 세월동안 납치, 고문, 암살, 처형을 자행한 피노체트 군부 독재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듯이 아옌데는 실패한 지도자가 분명하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칠레인들은 아옌데를 다시금 기억한다. 피노체트 실각 후 아옌데의 무덤에는 헌화들이 그칠 줄 모르고 사람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역사는 실패자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실임에도 칠레인들—아니 자유를 갈망하는 온 세계 사람들은 왜 아옌데를 잊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강대국의 침탈에서 조국 칠레를 지키려했던 지도자, 어두움 속에 신음하는 자와 굶주린 아이들과 병든 자들을 지키려했던 지도자의 진실을 사람들이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대함은 그곳에서 다시금 빛을 발한다. 그것은 또한 그러한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증거 한다. 그가 믿었듯이, 칠레의 모든 젊은이들이 죽지 않는 한 칠레는 다시 부활할 것이다.

평범한 개업 의사의 길을 가는 것으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던 또 한 사람의 의사가 자신을 불사르다 간 험난한 행로를 되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존경의 표시일 뿐이다.

2. 출생과 정치 입문

1908년 7월 26일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은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9세기부터 이름난 정치적 활동가의 집안으로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중상류층 가정이었다. 그는 14살 때 구두 수선공이며 무정부주의자였던 후안 데르마치와 친해졌고 그를 통해 아나키스트의 대부로 알려진 바쿠닌을 알게 된다. 이후 군에 자원 입대하여 카발리 부대의 장교를 지낸 후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의과대학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뚜렷한 자료들은 보이지 않지만 자료에도 있듯이, ‘그는 빈민들의 질병을 통해 빈곤층의 불행과 사회의 모순을 보았고, 민중들의 육신보다 그들의 정신을 먼저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맑시즘 정치활동에 참가한 그는 학생회장에 당선되고 반정부 활동으로 두 번 투옥된다. 수감 중 아버지의 임종을 맞아 가출옥한 그는 시신 앞에서 사회투쟁에 헌신할 것을 맹세한다. 그는 의과대학에서 퇴학당했다가 25살인 1933년에 졸업한다.

의대를 졸업하기 전인 1932년에 그는 사회당에 참여하고 그 후 치과대학 조교, 검시관 조수, 정신병원 의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고향에서 개인의원을 개업하기도 한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1933년부터 칠레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에서 눈에 띠기 시작한 아옌데는 1937년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첫 발을 내디딘다. 이 시기에 사회복지, 여성운동, 공중보건 같은 다양한 이슈를 다루었던 그는 1938년부터 42년까지 보건장관을 지내며 질병의 사회적 원인들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부터 1970년까지 네 차례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의장과 부의장을 지냈고, 1952년, 1958년, 1964년 연이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그러나 1970년 선거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공산당 대통령 후보 반려 등 진보진영의 후보 단일화와 진보정당들의 연합체인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3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아옌데와 네루다와의 우정은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다).


3. 칠레인의 길

그의 당선은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 출범이었다. 그 무렵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칠레는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극심한 빈부격차와 계급간,좌우파간 갈등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또한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부터 왜곡되기 시작한 경제구조는 미국과 기득권 세력의 이윤추구를 통해 더욱 왜곡되어 일명 '바나나공화국이란 별명으로 불리웠다(바나나공화국이란 산업구조가 바나나 같은 특정 작물이나 일차자원에 의존하고 있어 그 자원들의 작황이나 국제시장에서 시세에 따라 사회 경제가 좌우되는 구조의 국가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 후보 공약사항으로 모든 천연자원의 국유화, 어린이들에게 우유 무료급식, 의료혜택과 교육 무상 공급, 독자적 외교정책 채택 등 40개 조항을 내걸었다. 당선된 아옌데는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하는 동시 전통적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했다. 그의 정책은 빈곤층의 상황을 개선시키고 칠레 경제에서 민간회사 특히 외국회사의 역할을 감소시키는데 집중 되었다. 그는 이러한 노선을 일컬어, 소련이나 쿠바같은 폭력 혁명이 아니라 평화적 선거와 입법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로 가는 ‘칠레인의 길’이라 했다. 그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영세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석탄, 철강, 구리회사를 국영화했다(입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동광(銅鑛)회사의 국영화는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또한 물가동결, 임금인상, 우유보급과 아동의료와 교육을 현실화 했다. 이러한 개혁은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지만 중상류층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반면, 노조, 영세농민, 사회주의자들은  아엔데에게 더 많은 개혁을 요구했다.

근소한 표 차이로 취임한 아옌데는 칠레 대중으로부터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노암 춈스키에 따르면, 미국은 이 선거과정과 그 전후에도 아옌데를 방해했다. 친미적 후보에게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칠레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소련으로 보낸다는 등의 흑색선전을 했다.

당시 국제정세로 볼 때 아옌데 정권의 출범은 곧 소련과 쿠바가 중남미 정복을 시작한 징후로 미국에게 인식되었다. 아옌데의 당선이 확정된 며칠 후 닉슨은 키신저와 CIA의 리쳐드 헬름스를 불렀다. 헬름스는 말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soft line으로 경제 압력을 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hard line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다.”라고(Secrets, Lies and Democracy―Interviews with Noam Chomsky, 1994, David  Barsamian). 당시 미국의 움직임은 수년 전 공개된 미국 CIA문서에도 상세히 나타나 있다(중앙일보 2000. 09. 21,워싱턴-연합 2000.11.14).

닉슨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구리시장을 교란하기 위해 미국 이 비축하고 있던 구리를 국제시장에 내놓았고 구리 가격은 15.7% 하락했다. 또한 칠레에 대한 투자를 억제하고, 국제구제금융(IMF)의 지원을 차단하고, 칠레 내 아옌데 반대자들에게 1,000만달러를 지원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천명한 당시 육군참모총장 레네 슈네이데르나 외무장관 올란도 레텔리에 같은 지도층 인사들의 납치와 암살을 도왔으며, 칠레에 수출되어야 할 각종 산업장비, 의약품 등 중요 기간물자의 수출을 중지시켰다.

그 결과 1973년 상반기에만 300%에 이르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맞고 식량과 생필품이 부족해지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기득권을 빼앗기게 된 자본가들이 유도 파업을 일으키는 등 전국적으로 자본가 지주 등에 의한 사보타주가 일어났다. 야당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으며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폭동과 소요가 증가하고 사회는 극좌와 극우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런 가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통령이 된 첫해에 빈민들의 상황은 나아졌다. 아이들은 우유 급식으로 배를 채웠고, 학교와 교실이 증축되어 교육을 받았다. 아옌데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아이들만이 특권을 가져야 하고 아이들만이 칠레의 희망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이들이 아침과 점심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랐고 그렇게 했다. 의사로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능력이 얼마나 떨어지고 그것은 곧 미래 칠레의 퇴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들에 대해 그가 강조할 때 그는 칠레의 밝은 미래를 꿈꾸었다. 그는 그가 추진한 모든 개혁을 통해서 못 먹고 고통 받는 아이들이 쑥쑥 자라나 칠레의 미래를 짊어져주기를 염원했다. 칠레의 기층 민중들은 그러한 아옌데를 믿었고, 1973년 3월 의회선거에서 아옌데의 인민연합은 과반수가 넘는 지지를 확보했다.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옌데의 개혁은 추진력을 얻었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기 전에 국민들로부터 재신임을 묻는 투표를 실시하려고 했다. 바로 그 투표를 하려던 날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혼란스런 과정 뒤에 미국이 가장 적극적으로 버티고 있었음은 기증사실이다. 이 시대의 양심이라 불리우는 노암 춈스키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닉슨이 사망했을 때 헨리 키신저는 송사에서 말했다. ‘세계는 리쳐드 닉슨 덕분에 더 좋은 곳, 더 안전한 곳이 되었다.’ 그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신문이 떠들어댔던 칠레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그리고 그곳이 얼마나 더 좋고 안전해졌는지를 보자” 춈스키는 칠레를 위해 칠레의 민중이 선택한 아옌데를 제거한 것이 미국이라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확신한다.


4. 칠레 만세―1973. 9. 11. 산티아고

칠레 산티아고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시민들은 아침부터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20세기 최대의 서정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손목이 잘려 죽은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와 아내 조안 하라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라디오 방송에서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음을 알았다. 오래전부터 반란의 공기가 감지되고 있었고 며칠 전에는 불발 쿠데타가 진압되기도 했다. 허망하게도 그 불발 쿠데타를 진압한 지휘자는 그 운명의 날 쿠데타의 주모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였다.

9월 10일 밤 칠레 해군과 미 전함들은 발파라이소에 집결해 있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칠레 육,해,공군과 경찰은 군사평의회를 구성하고 의장에 피노체트 육군 최고사령관을 선출했다. 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아옌데는 국방장관의 보고를 확인한 후 7시 30분 19명의 경호원과 함께 모네다궁에 들어갔다. 쿠데타군은 여러 방송국들을 점령해나가기 시작했고, 대통령은 점령당하지 않은 유일한 국영방송 마가야네스 라디오와 전화를 연결하여 마지막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마지막이 말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제 박해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려는 것은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점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목숨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조국의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방송 직후 대통령궁은 완전 포위되었고, 공중에는 칠레 공군 전폭기들이 선회 비행을 하고 있었다. 피노체트는 대통령에게 망명을 종용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아옌데는 거부했다. 오전 10시 40분, 아옌데는 경호대에게 대통령궁을 떠날 것을 명령했고, 대통령의 두 딸을 포함해 대부분의 여성들이 대통령궁을 빠져나갔다. 정오가 되자 쿠데타군 전폭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지상군도 탱크를 앞세워 진격했다. 쿠데타군이 모네다궁에 진입한 얼마 후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모네다궁 공격을 지휘한 쿠데타군 팔라시오스 장군은 군사평의회에 짤막한 전문을 보냈다. "임무 완수. 모네다 접수, 대통령 사망"


피노체트가 모네다를 접수한 이후 일주일간 3만여 명이 학살되었다. 군부는 사회주의자들이나 그 동조자들, 진보진영 인사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색출하여 체육관에 몰아넣고 집단 처형했다. 그 후로도 당시 1,000만 명이던 칠레 인구 간운데 사망자 3천여 명, 실종 1천여 명,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 추방자들이 100만 여명에 이르렀다. 피노체트는 미국과 주변 라틴아메리카 독재자들과 공모하여 반체제 인사, 진보진영 인사들을 납치, 구금, 살해, 암매장하는 ‘콘도르 작전’을 수행했다. 지난 73년부터 83년까지 군사통치 기간 중 400여 명의 스페인인과 군사 정권을 비판하던 수맣은 유럽인들도 이 악명 높은 작전으로 희생됐다. “나뭇잎 하나도 내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던 피노체트의 만행은 지속됐다.


5. 그를 기리며

조국을 자주국가로 세워 모든 민중이 풍요한 삶을 누리도록 하려는 아옌데의 원대한 꿈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의 소망대로 칠레는 다시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그는 패배했지만 역사 속의 영원한 승리자로 기억될 것임을 우리는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위대한 영혼들을 사악함의 제물로 바치는 어리석음을 인간들은 언제까지 지속 할 것인가? 

출처 : [기타] http://kbj802.com/technote/read.cgi?board=comdrbrd&y_number=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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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g of War _ 가치론연습 참고자료

철학/가치론연습 2008. 4. 15. 03:32
   ▶ click play button
 
< 가늘고 푸른 선 The Thin Blue Line >(1988)의 탁월한 다큐멘타리 작가인 에롤 모리스(Errol Morris 1948~)의 올해 아카데미상 장편 다큐멘타리 부문 수상작인 < The Fog of War : Eleven Lessons from the Life of Robert S. McNamara >(2003)의 트레일러 입니다.  파란과 격동의 60년대 미국의 국방부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trange McNamara 1916~)가 직접 출연하여 증언하는 "살아있는 역사" 다큐멘타리 입니다. 재계에 있다가 케네디의 부름을 받아 국방부장관이 되어 베트남전을 기획했지만 존슨행정부시절 군사개입 확대을 반대하여 국방부장관에서 사임하고 이듬해 세계은행 총재가 되어 13년간 재직하는 등 현대사의 비극과 영광의 순간들을 겪은 그의 역정을 에롤 모리스가 깊이있는 연출로 담아냈다고 합니다.  물론 케네디, 존슨, 닉슨, 루즈벨트, 윌슨 대통령이 모두 캐스팅(?)되었고 빠질수 없는 카스트로도 나온다고 합니다.  트레일러에 보여지는 맥나마라옹의 표정자체가 드라마입니다.  사운드트랙은 필립 글래스의 음악입니다. 

[출처] The Fog of War |작성자 aha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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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협약_가치론연습 참고자료

철학/가치론연습 2008. 4. 13. 19:53

제네바 협약 (프랑스어: Conventions de Genève)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조인된 네 차례의 조약을 말하며, 인도주의에 대한 국제법의 기초가 된다. 솔페리노 전투를 목격한 앙리 뒤낭이 전쟁 희생자를 줄이기 위한 노력으로 협정이 이뤄졌다.

  • 제1차 제네바 협약: 전장에서 군대 부상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네바 협약1864년 처음 체결되었고, 1949년 개정되었다. 적십자(국제적십자 위원회, ICRC)가 창설된 이듬해에 이 조약이 각국 정부에 의해 제정되고 조인되었다.
  • 제2차 제네바 협약: 바다에서 군대의 부상자와 난파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네바 협약응 제1차 협약을 해전으로 확장한 것이다. 1907년 헤이그 협약 제10항으로 채택되었고, 1949년 개정되었다.
  • 제3차 제네바 협약: 전쟁 포로의 대우에 대한 제네바 협약1929년 채택되어 1949년 개정되었다.
  • 제4차 제네바 협약: 전시의 민간인 보호에 대한 제네바 협약1907년헤이그 협약 제4항을 개선하여 1949년 채택되었다.

위의 네 협약에 추가로 세가지 추가 의정서가 제네바 협약에 추가로 맺어져 있다.

  • 제1추가의정서: 국제적 무력 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대한 제네바 협정의 추가의정서
  • 제2추가의정서: 비국제적 무력 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대한 제네바 협정의 추가의정서
  • 제3추가의정서: 적십자 표장 추가 등 제네바 협정의 추가의정서. 적십자 표장(Red Cross Emblem)에 적수정(Red Crystal) 이 추가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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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조약 _ 가치론연습 참고자료

철학/가치론연습 2008. 4. 13. 15:41

베르사유 조약  요약

1.개요
 
베르사유 조약1919 6, 독일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1차 세계 대전의 강화조약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7장으로 이루워져있다. 이 조약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맺어졌다.

2.주요 내용

  • 독일 제국은 전 대륙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며, 국제 연맹이 결정한다.
  • 독일 제국은 공군잠수함을 금지하며 전차 36대를 남기고 나머지는 연합군이 차지한다. 육군과 해군은 10만명으로 단축하며 군함은 36척으로 한정한다.
  • 독일 제국은 전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배상금 1, 320마르크 10년 이내에 지불해야 한다.
  • 탄띠식 기관총의 개발 및 배치를 금지한다(탄창식 경기관총은 허용되었다).
  • 새로운 전차의 개발 및 배치를 금지한다.
  • 군대는 육해군을 합쳐 10만명으로 제한하며, 항공 전력은 금지한다.(독일 공군은 1935년에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3. 베르사유조약 (Treaty of Versailles)과정및 조문

1919 6 28일 파리 평화회의의 결과로 31개 연합국과 독일이 맺은 강화조약으로 전체 440조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거울의 방에서 조인된 것으로, 1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관계를 확정한 의의를 지닌 회의다. 중국도 참석하였으나, 산둥[山東]문제 처리에 반대하여 조인하지 않았다. 또 미국 상원은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였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잃고, 알자스 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으며, 유럽 영토를 삭감당하였다(면적에 있어서 13%, 인구에 있어서 10%). 그리고 단찌히(Danzig)는 자유시가 되어 대외 관계와 관세 등의 문제는 폴란드가 관할하고 대내 관계는 국제연맹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한 전쟁도발의 책임을 물어 연합국 손해에 대한 배상지불이 부과되었다. 즉 배상금액은 연합국배상위원회에 일임되어, 1921 3 1일까지 이 위원회에서 배상 총액을 1,30억 금마르크( 330억 달러)로 결정하였다.

군비에 대해서도 육군병력은 10만 이내 장교는 5,000명이내, 해군은 1 5천명에 군함보유량은 10 t 이내로 제한되었으며, 참모본부 ·의무병역제도는 폐지되고, 공군 ·잠수함의 보유도 금지되었으며, 육해군의 무장에 대해서도 엄한 제한과 감시를 받았다. 라인강() 좌안(左岸)은 비무장지대로서 15년간 연합국의 점령하에 두고, 자르지방은 15년간 국제연맹의 관리하에 두며, 15년 후에 주민투표에 의해 그 귀속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국제연맹규약은 베르사유조약의 제1편이 되었다. 파리강화회의 운영이 일방적이고,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독일 국민에 대한 압박이 컸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이 조약을명령이라 불렀다. 이를 교묘히 포착하여 이용한 것이 나치스이다.

이러한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각 국의 이해관계를 살펴보면 먼저

①미국

전 후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하게 되었고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도 강력하게 되었다. 미국은 다른 전승국들에 비해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부강해진 입장 때문에 영,프와는 이해관계가 대치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민족자결주의와 평화주의 입장에서 전후의 문제를 처리하고자 했기 때문에 독일에 대한 배상과 영토분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미국의 이상주의정책에 바탕을 둔 것이나 이 원칙이 회의에서 그대로 실현될 수는 없었다.

윌슨 대통령은 전후 평화적인 국제질서를 정립하기 위한 외교를 추진할 목적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참가하였으나 그의 평화구상의 실현은 세 가지 문제점 때문에 장애를 받고 있었다.

첫째, 연합국들이 이미 미국이 참전하기 이전에 일련의 비밀조약과 협정을 맺어 놓고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는 종전 후 알자스-로렌의 반환, 자아르 점령, 그리고 라인강 이서의 독일영토의 완충국가화를 약속 받았다.

둘째,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 국민들 간에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팽배해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윌슨은 자신의 참가 결정이 국내정치와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18년 당시 공화당은 윌슨의 평화구상에 반대하였다. 공화당은 상원외교위원장인 롯지(Henry Cabot Lodge)와 루즈벨트의 강경한 강화조약 주장에 동조하여 독일에 대한 보복적인 성격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또한 공화당은 미국의 국제연맹과 같은 기구의 참여는 미국이 전통적으로 누려왔던 독자적인 자기발전의 기능을 박탈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당시 상원은 국제연맹에 있어서 세 집단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1그룹은, 베르사이유 조약의 비준을 지지하는 민주당의원으로 국제연맹가입지지하였고, 2그룹은, 국제연맹에 대한 완강한 반대자들로서 비타협파 공화당의원들이었으며, 3그룹은, 중도파로서 수정안이나 유보조건이 첨가되면 국제연맹에 찬성할 용의가 있는 유보주의자들이었다. 베르사이유조약에 문제가 되는 것은 제10, 즉 가맹국은 가맹국간의 영토보존 및 정치적 독립을 존중하고 또한 외부의 침략에 대해서는 집단적으로 대처할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원의 고립주의자들은 국제연맹 가입국들이 회원국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서 국제분쟁에 개입할 것을 규정한 국제연맹규약 제10조만은 유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윌슨은 조약내용의 수정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는 상원에 대해 여론의 압력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1918년 가을에 실시된 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여 상. 하원을 지배하게 되었고, 민주당의 윌슨이 제시한 베르사이유 조약의 비준을 상원이 거부하였다. 그것은 미국의 국내정치와 윌슨의 비타협적인 성격에도 그 원인이 있겠으나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미국이 국제무대와 외교에서의 경험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고립주의 회귀는 유럽 각국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전쟁 이전과 같이 영,프의 경제력이 유럽의 질서를 지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럽은 미국이 그 의무를 담당해주기를 희망했으나 고립주의는 전후 유럽의 질서를 약체로 만들었다. 이 점은 전후 미국의 전채 회수의 입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영, , 이탈리아 등 유럽각국은 전채를 미국의 협력의 한 수단으로써 종전과 함께 정치적으로 수정 또는 청산될 것을 바랐다. 그러나 미국은 전채를 단순한 채무의 관계로 파악하여 상환을 요구하였다.

전쟁이 끝났을 때 유럽의 對美부채는 백억 달러를 상회하였다. 미국이 연합국에 제공된 자금의 대부분은 자유공채의 판매를 통하여 모금된 것이다. 전후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전채는 말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장의 근거는 미국으로부터 차입한 자금은 모두 미국에서 사용되어 전시경제의 번영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채의 말소는 미국정부의 부채를 증가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납세자들이 이 전채를 부담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전채의 회수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었다. 1923년 미국은 채무국들과의 협상을 통해서 전채의 상환기간을 62년으로 연장하고 이자율도 낮게 책정하였다. 그러나 전채문제는 독일이 연합국에 지불해야될 배상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으로 해서 배상문제의 원만한 해결 없이는 궁극적인 해결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결국 미국의 전채와 배상금과의 상호의존관계를 해결하지 않음으로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독일과 유럽에서 경제적 파탄이 일어났다. 만약 초기에 미국이 전채를 말소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대한 배상금을 삭감했더라면 세계적인 공황은 피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② 영국

미국에 비해 영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영국의 지도자들은 단지 상징적이 아닌 실질적으로 막대한 배상을 치르도록 할 작정이었다. 로이드 죠오지는 유권자들에게 제시한 공약, "우리는 독일에게 전쟁의 모든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한다" 라는 주장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영국은 독일에게 전쟁피해의 배상만이 아니라 전시 연금의 재원까지 계산한 방대한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사상 최초로 전쟁범죄자의 처벌을 의회에 약속하였다. 독일영토 점령문제에 있어서도 영국으로서는 그들의 군사적 노력의 성과를 얻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영국으로서는 독일의 해외식민지를 차지하지 않으면 승리를 확인할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영국이 점령한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는 지금까지 독일로서도 재정에 막대한 부담이 되어왔고 아무런 전략가치도 없는 땅이었다. 단지 독일로 하여금 식민지를 가지지 못하도록 선고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강화 회의에 즈음하여 영국은 사실상 독일의 식민지를 점령하고 있었고 독일해군은 전승국에 인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래 독일에 대한 위협은 별로 느끼지 않고 있었다. 한편으로 영국은 독일에 대한 압박이 볼쉐비즘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요구를 억제하려 하였고 윌슨도 이에 동조하였다. 1919 1 16일의 회의에서 죠오지는 연합국의 러시아에 대한 무력간섭과 경제봉쇄가 실패했으며 오히려 그 정책이 러시아국민을 볼쉐비키의 주변으로 결집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했다고 인정했다. 이 때문에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러시아혁명을 둘러싼 내정간섭과 반볼쉐비키운동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일어났다. 영국이 프랑스의 요구를 억제하려는 이유도 독일과 볼쉐비키의 제휴라는 우려에서이며, 또한 독일을 볼쉐비키에 대한 완충국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로 죠오지는 독일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동맹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었고. 전혀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없는 폴란드는 러시아 속국이 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였다.

③ 프랑스

독일에 대한 응징을 가장 강경하게 주장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비밀조약에서 보장된 알사스. 로렌의 영유 및 자아르탄전의 영유를 요구하는 한편 라인강을 프랑스의 안전보장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요구는 윌슨과 죠오지에 의해 많은 부분이 수정되어 타협안이 만들어졌다. 타협안은 프랑스의 안보를 위해 독일이 프랑스를 침입할 때는 미, 영이 프랑스를 원조할 것이라는 보장으로 가능하였다.

타협안은 라인강 서쪽 좌안에 대한 15년 동안 점령, 라인강 동쪽 우안 50km 이내의 무장금지, 자아르 탄전의 프랑스 소유 및 채굴권, 자아르지방은 이후 15년 동안 국제연맹이 정한 특별한 제도의 적용을 받은 후 국민투표에 의해 그 귀속을 결정한다. 그러나 프랑스에 대한 미, 영의 보장은 미국이 그 인준에 실패하였고 따라서 영국과의 동맹에 큰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양국의 견해차이로 동맹조약의 체결에 실패하자 프랑스는 "소협상체제국가"(Little Entente, 채코, 유고, 루마니아 등)를 동맹체에 가입시켜 자금의 대여와 군편제를 지원하였다. 프랑스는 배상문제에 강경하였다. 독일이 현금지불이 불가능할 경우 영토의 할양을 요구하였다. 1923년 프랑스는 독일의 배상 불이행을 이유로 루우르지방을 점령한 바 있다. 그러나 점령지인들의 저항으로 기대한 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의 이러한 행동은 독일 내에 혁명적인 기운을 조장할 것이라 비난하였다. 프랑스 국내에서도 점령지에 대한 군사비 지출에 따른 재정의 타격으로 국민의 불만이 제기되었다.

④ 독일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유럽의 교전국들에 대한 채권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으며, 전쟁이 끝났을 때는 유럽 국가들의 대미 부채는 100억 달러를 상회하였다. 미국은 전시 중 연합국에 빌려준 이 방대한 자금을 전채(war debts)로 생각하여 상환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전후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전채는 모두 미국에서 사용되어 미국의 전시 경제의 번영에 크게 이바지했으므로 말소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은 1923 5월부터 1926 5월까지 유럽의 13개 채무 국가들과 개별적으로 협상하여 전채의 지불에 관한 협정을 마련하였다. 미국은 전채의 상환 기간을 62년으로 연장하고 이자율을 상당히 낮게 책정하여 전채의 규모를 크게 삭감하였다. 그러나 전채 문제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채 문제는 독일이 연합국에 지불해야 할 배상금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배상 문제의 원활한 해결 없이는 궁극적인 해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연합국들, 특히 프랑스는 독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 그 돈으로 미국에 진 전채를 상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파리강화회의는 연합국 배상위원회가 독일이 지불해야 할 배상금의 액수 및 지불 일정 등을 추후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21 5 1일 배상위원회는 독일이 1,320억 금마르크, 즉 약 330억 달러의 배상금을 추후 결정되는 시기동안 지불할 것을 확정했고, 독일은 연합국의 점령 위협 속에서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이렇게 방대한 배상금이 지불 능력이 없던 독일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됨으로써 독일에서는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이 야기되었다. 독일의 경제적 혼란은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을 그 기초로부터 흔들어 놓았고 히틀러(Adolf Hitler)의 집권을 위한 길을 열어 놓았다. 배상액의 책정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독일은 배상금의 지불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는 1923∼1924년 기간 동안에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했고, 격분한 독일인들은 폐업 등의 소극적인 저항으로 맞섰고, 독일의 경제는 심각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독일이 재정 파탄으로 배상금 지불 불능 상태가 되고 이에 따라 유럽 사태가 악화되자, 미국은 1924 9월 도즈안이라는 응급 조치를 통하여 독일의 합리적인 배상금 지불 방법을 제시하였다. 도즈안에 의하면 독일의 배상금 지불 방법은 잠정적으로 5년간에 걸쳐 첫 해에 10억 금마르크로부터 시작하여 5년째에는 25억 금마르크로 올려져 매년 지불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독일은 통화 및 경제의 안정을 위하여 2억 달러(8억 금마르크)의 국제 차관을 제공받기로 하였다.

 

 

4. 조약의 합당성및 타당성

 

이런 용어가 있습니다  "전리품은 승자의 것"

이 조약은  전승국과  패전국의 입장 문제입니다 결론은 합당성과 타당성은 전승국입장에서는 당연하고 타당성을 갖지만  패전국입장에서는 불합리하고 타당성이 없는것입니다 독일 입장에선 당연히 불합리한것입니다  즉 불복할수없는  현상을 타개할려는 욕구밖에 없는것이 인간이나 국가입니다 즉  연합국측에서의 특히 이 조약 체결에 가장 강력한 처방을 요구한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기회에  독일과의 모든 문제를 정리하고 청산하고 분명한 설정을 할려고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을 요구한것입니다  즉 돈낼 능력없는 독일에 부담을 줘서 프랑스에 녹녹한 상대국을 만들려는 프랑스의 의도였습니다

윌슨이 이를 방지하기위해 프랑스를  설득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프랑스는 이를 통해 완전 유럽의 강자

로 군림하고저한  프랑스 지배체제를 계획하였습니다  즉 쉽게 말해  고양이도 쥐 빠져나갈구멍을 두고  몰이하는것이 자연의 법칙인데 프랑스는 독일을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만든 결과가 나치의 등장 힛틀러의 등장 2차대전의 소용돌이 입니다  즉 역사가들이 말하는  베르사이유조약으로 인한 문제가 원만하지못한 결과가 유럽을 다시 대전으로 몰아갔다는  역사적 평가 입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이 조약은 합당하지못했고 타당성도 빈약했다는 연합국의  전리품이였습니다.

출처 : 네이버지식인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11&dir_id=110107&eid=LlhtS4NcCE73qzX53CoLaKrlv3cldE/3&qb=uqO4o7vnwK/Btr7gILnMsbmw+MittOc=&pid=fsbqKsoQZTVssscYSVwsss--314781&sid=SAGPKgZ5AUgAAGRxI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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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military―industrial complex)_가치론연습 참고자료

철학/가치론연습 2008. 4. 12. 14:17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military―industrial complex)



정부의 국방지출에 깊이 관여하는 군부·민간기업·정치가들이 각각의 이익을 위해 유형·무형의 제휴를 계속 유지하면서, 때로 언론계도 참가하여 국방지출의 증대를 도모하는 사회적인 유착(癒着)구조.

군산복합체란 용어는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가 1961년 1월 17일의 퇴임연설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거대하고 음험(陰險)한 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은 군산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는 위협"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이 군산공동체가 부당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 주목을 받았는데, 이후 이 군산복합체는 냉전 시대에 군비 경쟁에 전력하던 미국의 체제를 비판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즉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이면에는 군산복합체의 전쟁 음모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제 2 차세계대전에서 <민주주의의 무기창>이라 불린 미국은 연합군측의 전쟁자재(資材)공급에 큰 역할을 했고, 경제기구가 전면적으로 정부의 군사지출에 의존하는 체질로 변하면서 전후에도 평시(平時) 경제로의 전환이 곤란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의 경기후퇴, 한국의 6·25 발발에 의한 경기회복이란 사실이 사정을 잘 반영한다. 군인출신인 아이젠하워대통령이 이러한 경고를 하기에 이른 것은, 재임(1953~61)중 통상무기 외에 우주핵무기 등장, 소련과의 군비경쟁이 격화된 점, 그에 따라 매년 비대화되는 국방력에 의해 화학·전자·정밀기기 등 산업부문에까지 국방발주(發注)를 기대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을 걱정한 때문이다.


지금은 미국 정부예산의 약 30%(1985), 국민총생산의 약 10%(1983)를 차지하는 방대한 액수의 국방비지출은 미국경제의 호황·불황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국방발주(發注)에 의존하는 기업은 자칫 안이한 경영에 빠져 독직(瀆職)을 범하기 쉽다. 또한 군부는 국방을 이유로 새로운 무기 개발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게 되고, 정치가는 국방예산의 획득이야말로 절호의 선거대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군산복합체가 존재하는 한, 군비축소는 이루어질 수 없다. 군산복합체가 형성되어 있는 나라는 현재 미국뿐이나, 일본·서독·프랑스 등의 선진공업국도 가능성이 보이며, 이윤동기를 제외하면 군사대국 옛 소련에서도 유사한 구조를 찾아낼 수 있었다.

군부(軍部)와 방위산업체 사이의 블록으로, 군산공동체(軍産共同體)라고도 한다.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가 1961년 1월 17일의 퇴임연설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거대하고 음험(陰險)한 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은 군산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는 위협"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이 군산공동체가 부당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 주목을 받았는데, 이후 이 군산복합체는 냉전 시대에 군비 경쟁에 전력하던 미국의 체제를 비판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즉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이면에는 군산복합체의 전쟁 음모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2000년 11월 부시(George Walker Bush)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국무장관 파웰(Collin Powell)은 미국의 군사력 동원을 최소화한다는 정책, 즉 '파웰 독트린'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군사비를 계속 증액하면서 이라크·북한 등 제3세계 반미(反美) 국가의 대량파괴무기 확산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물리적 위협을 가하는 한편, 자국의 방위산업체 역시 계속 육성하고 있다. 이렇듯 군부와 방위산업체가 밀착되어 있는 관계가 바로 군산복합체이다. 그러나 미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이러한 밀착 또는 협력 체제를 일반적으로 일컬을 때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출처 Alternative Plans | 독학자
원본 http://blog.naver.com/verthandi/80015694343

:

칸트의 영구평화론 _ 가치론 연습 발표자료

철학/가치론연습 2008. 4. 11. 01:17






















출처 :  김승국기자

:

칸트 영구평화론 _ 가치론 연습 자료

철학/가치론연습 2008. 4. 9. 20:00

Kant : Perpetual peace

 

Modern Liberalism and Its Discontents

Presented by Park Sang Won

 

1. Preliminary Articles

1) No conclusion of peace shall be considered valid as such if it was made with a secret reservation of the material for a future war.

2) No independently existing state, whether it be large or small, may be acquired by another state by inheritance, exchange, purchase or gift.

3) Standing armies will gradually be abolished altogether

4) No national debt shall be contracted in connection with the external affairs of the state

5) No state shall forcibly interfere in the constitution and government of another state

6) No state at war with another shall permit such acts of hostility as would make mutual confidence impossible during a future time of peace. Such acts would include the employment of assassins or poisners, breach of agreement, the instigation of treason within the enemy state, etc.

 

 

 

2. Appendix

Ⅰ. On the disagreement between morals and politics in relation to perpetual peace

 

- Morality and Politics

morality : a theoretical branch of right

politics : an applied branch of right

"there can be no conflict between moral and politics, a conflict between moral and politics can only occur if morality were taken to mean a general doctrine of expediency"

 

- Moral politician vs Political moralist

Moral politician : couple the concept of right with politics & limitation of politics by moral law

Political moralist : they regard politics just as expediency, concept of morality is eliminated

based on duty / consequentialism

progressive / anti progressive

comply with law / violate law

preservation of freedom / deprivation of freedom

Formal principle / Sophistries

Act in such a way that you can wish

your maxim to become a universal law (irrespective of what the end in view may be)

vs

① Do it anyway, and then excuse it.

② In case that you did it, deny that

the guilt is yours.

③ Disunite them among themselves

and set them at odds with people.

 

"A true system of politics cannot therefore take a single step without first paying tribute to morality"

 

※ Kant thought that a despotic ruling power is better than a violent revolution. Because a violent revolution or a premature reform might lead people to 'anarchy'.

 

 

 

 

Ⅱ. On the agreement between politics and morality according to the transcendental concept of public right

 

-Principle of publicity : 'All actions affecting the rights of other human being are wrong if their maxim is not compatible with their being made public'

 

-According to Kant, principle of publicity is a purely nagative test :

Q. Does an agent's principle fit 'ethical & juridical' criterion which can be discovered a priori within reason itself?

(Example : rebellion, ruler who act like a dual person, a pre-emptive strike upon a growing neighbour power, subjugating and annexing the smaller country)

 

-What the condition is under which its maxims will agree with international right?

☞ After a lawful state must already be in existence, a federative association of states can be reconciled with their freedom.

 

 

 

 

 

♠ Conclusion 

 

Perpetual peace : a federative association of states which can be made of lawful states

                                                            ↑

a state of pure principle of right with moral politics (genuine republicanism)

                                                            ↑

the will of all individual men to live

in accordance with principles of freedom

within a lawful constitution

General will :

Coercive authority as a single whole will

which overrules the differences

in the particular wishes of all individual

                                                            ↑

pure concept of rightful duty (a priori)

 

 

♠ Question

 

1. What is the role of 'mechanism of nature'? How can 'mechanism of nature' make human complete progress?

 

2. Can we expect possibility that every state would choose republicanism? Are we able to convince that the result of progress or enlightenment is realized in the political form of republicanism?

 

3. Does the progress mean "the progress of a political system" or "the progress of human nature" ?

[출처] 칸트 : 영구평화론|작성자 푸우

:

칸트 영구평화론(Perpetual Peace) - 가치론 연습 자료

철학/가치론연습 2008. 3. 30. 18:54
 

칸트 영구평화론


과연 인류는 칸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쟁을 통한 사악함이 인류로 하여금 많은 국가들이 상호 대립을 넘어 공적인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세계 시민적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지구의 환경악화만 보더라도 역사는 진보한다고 낙관적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인류는 그 땅을 파괴하여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비관론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냉전 후 세계정치에 대한 낙관론도 마찬가지다.

칸트는 파라다이스의 타락으로부터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법에 의한 인간의 자유와 질서, 즉 법치국가와 국제법, 그리고 세계시민법의 실현에 따른 정의의 공존에 의해 인류는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는 법질서의 진보를 믿었다. 그에 의하면 역사의 목적은 법질서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칸트는 국내법은 물론 국제법이 완성돼야 평화가 가능하다고 본 최초의 철학자였다. 즉 전쟁은 법에 반하는 불법 상태이므로 금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법질서의 실현을 위해 도덕적 행위가 필요하다고 보았기에 도덕과 자유의 최대 걸림돌인 전쟁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평화에 대한 그의 주장은 현재 UN과 EU의 결성으로 대변될 수 있다.
전쟁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21세기, 민족주의나 자국중심주의라는 프리모던, 해체주의라는 포스트모던이 혼재하는 우리의 정신상황에서는 칸트가 주장한 소크라테스적인 이성에 대한 신뢰, 다원주의·오류주의와 연결된 세계시민주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The Perpetual Peace


First Section
<국가 간의 영구평화를 위한 예비조항>
1. 장차 전쟁의 화근이 될 수 있는 재료를 암암리에 유보한 채로 맺어진 어떠한 평화 조약도 결코 조약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조약은 일시적 중지인 휴전에 불과한 것
→ 지금 국가들이 맺는 조약은 진정한 의미의 조약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함

2. 어떠한 독립 국가도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상속, 교환, 매매 혹은 증여에 의해 다른 국가의 소유로 전락될 수 없다.
→ 무능한 권력자나 폭정이 일어나는 국가의 국민은 차라리 다른 국가에 소유되어 자신의 행복을 누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3. 상비군은 결국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
→ 오늘날 군비경쟁의 딜레마. 신뢰구축은 필요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 생각됨

5.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된다.
→ 내정간섭 vs 인권의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하다


Second Section
제 1의 확정조항 <국가 간의 영구평화를 위한 확정 조항>
모든 국가의 시민적 정치 체제는 공화 정체이어야 한다
→ '시민적', '공화적'이란 용어는 현대의 용법과는 다름. 시민적이란 말은 부르주아적이란 의미가 아닌 자유로운 정치공동체 구성원으로 속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 공화제란 지배형식이 아닌 통치양식을 의미
지배자 수↓, 국가권력을 대표하는 인원의 수↑-점진적인 개혁으로 공화정체로 발전되기를 기대

제 2의 확정조항 <국제법은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방 체제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국제국가를 통한 해결방식을 개별국가들의 의지가 될 것인가, 현실성이 없고 자유의 이념에 반하는 것은 아닌가, 국가와 개인은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제3의 확정조항 <세계 시민법은 보편적 우호의 조건들에 국한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지구 땅덩어리를 공동으로 소유함의 권리를 갖는다
→ 세계시민주의를 이룩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지 않을까


First supplement <영구평화의 보증에 대하여>
자연이 인간으로 하여금 시민적 체제를 만들게 하고 영구평화의 목적에 접근한다고 봄(운명과 섭리와도 같은 것)
→앞에서 보았던 현실을 무시한 순수한 이념에 따라 구성된 이상주의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


Second Supplement<영구평화를 위한 비밀조항>
ㆍ공적인 평화의 실현 가능한 조건에 대한 철학자들의 준칙을 전쟁을 위해 무장한 여러 국가들은 충고로서 받아들여야 하지만, 법률가의 발언보다 철학자의 원칙에 우위를 두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ㆍ법률이라고 하는 학문은 학문적으로 낮은 단계이지만 , 법률가는 권력의 비호를 받는다.
→ 말에 모순이 있다. 결국 평화를 이룩하려면 자신이 하는 말, 자신의 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왕을 하늘이 준 권력자가 아닌 하나의 국민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권력의 소유를 자유로운 이성의 판단을 방해하기 때문에 질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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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국제영화제] 미국 대 존 레논(The U.S. vs John Lenon), 기록영화 _ 가치론연습 참고자료

철학/가치론연습 2008. 3. 30. 14:57

[개통특집] 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기록영화의 사실성과 인생의 진실성

<미국 대 존 레논>


 

    감독_데이빗 리프, 존 샤인펠드
   
제작년도_2006 / 상영시간_99분 / 국가_미국

<미국 대 존 레논(The U.S. vs John Lenon)>은 기록영화로서 존 레논이 평화운동으로 어떻게 미국정부의 눈엣가시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그가 처하는 미국정부와의 대립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한 개인의 예술과 사회활동을 기록영화(다큐멘터리)식으로 엮어서 그 주변 인물들 (친구들, 오노 요코, 당시 혁명운동가, 미국정치인, 언론인들, 사진작가 등)의 진술과 평가를 함께 보여주었다.  

1960년대 있었던 베트남 전쟁 그 후에 연이은 미국의 캄보디아공격, 닉슨대통령의 정치적 상황, 이 모든것들과 맞물린 존 레논(또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이라는 한 개인의 평화운동에 대해 마치 신문을 읽어 주듯이 설득력 있게 풀어나갔다.

전개방식은 반복되는 연출과 형식으로 틀에 짜여져 있으나 내용 자체는 대중과 비밀을 공유하는 듯한 메시지 전달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사이사이 나오는 비틀즈의 음악과 영상들, 자료 화면들, 그리고 진술들은 그 성공에 한몫을 톡톡히 한다.

한 개인의 작은 힘이 새삼 강하게 느껴지는 영화. 이것이야말로 허구가 아닌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사실 현실을 다루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칫 개인을 영웅화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서술(내러티브)적인 주변인들의 진술과 영상으로 담담히 그러나 좀 지리하게 풀어나갔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레논이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힘썼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로 인해 암살당하는 비극으로 끝남에도 비극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이유는 오노 요코의 말로 전해져온다. “실제로 미국정부는 존을 죽이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했어요.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를 죽일 수 없었어요. 그의 메시지가 여전히 살아 있거든요”

‘침묵한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존 레논은 말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 개인적인 혹은 전문적인 사람으로서의 결과가 어떠하던지, 무언가를 해야 그것이 보이고 현상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무엇을 했건 그것이 중요하다기보다 ‘무엇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영화가 아니기도 한- 이 기록영화는 기록영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에 대해,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했고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기록영화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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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세계적 철학자 7명 릴레이 인터뷰 ⑧·끝 김재권 미 브라운대 석좌교수

철학/세계철학대회 2008. 3. 5. 23:25

원본주소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8/03/04/3071932.html


세계적 철학자 7명 릴레이 인터뷰 ⑧·끝 김재권 미 브라운대 석좌교수

“인간의 마음이 동물보다 낫다고 단정 못해”


대담 = 김기현 서울대 교수

철학자 김재권(74·미 브라운대 석좌교수)씨는 현대 심리철학계의 거장이다. 서울대 불문과에 재학 중이던 1950년대 중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전공을 철학으로 바꾼 이래 심리철학 분야에서 주목할만한 이론을 계속 제시해 왔다.

심리철학은 영국과 미국을 주 무대로 발전해온 분석철학의 한 분야다. 주로 마음과 신체의 관계를 천착한다. 자연의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마음의 위치는 어디인가, 마음은 신체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가 등을 연구한다.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도 이 같은 심신 문제를 탐구, 마음과 신체는 다르다는 심신이원론을 제기한 바 있다.

현대 심리철학은 20세기 후반 인지과학과 뇌과학의 성과를 반영하며 마음의 본성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과학의 손이 닿지 않는 최후의 신비 영역으로 간주되던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분해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재권 교수가 있다.

김 교수는 정신현상을 물리현상에 귀속시키는, 이른바 ‘물리주의’(physicalism)를 강력히 옹호한다. 데카르트와 달리 심신일원론을 내세운다. 인간의 마음에 특별히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마음 또한 자연현상의 일부로 파악하면서, 정신적 사건의 대부분을 뇌의 사건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본다. 서울대 김기현 교수가 그를 만났다.


김기현=인간의 마음은 동서양을 떠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상가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철학자뿐 아니라 종교인의 화두이기도 하다. 마음을 물질에 귀속시키는 당신의 물리주의는 서양의 전통사상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사유에서 볼 때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김재권=마음처럼 신비스럽게 여겨지는 것도 없다. 우주는 물질이 격렬히 부딪치고 움직이는 어둡고 황량한 공간이고, 그 드넓은 공간의 아주 미세한 일부인 이 지구에 마음이 거주하고 있다. 이 드넓은 공간의 일부에 어떻게 이런 정신현상이 발생하게 됐는지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초자연적 존재나 초월적 힘에 의존하여 이를 설명하려 하지만, 이것은 한 수수께끼의 자리에 다른 수수께끼를 들여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은 자연현상이며 자연현상은 시공간계의 법칙과 사건, 그리고 인과관계 같은 것을 통해 자연계 내에서 설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현상 또한 신비로운 것이지만, 다윈의 진화론과 최근 분자유전학의 폭발적 발전을 통해 과학적으로 해명되고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신경과학·인공지능·언어학 등으로 이뤄진 인지과학을 통해 마음의 여러 측면이 연구되고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정보처리·언어처리 능력에 대한 이해가 커지면서, 그 기반이 되는 신경생물학적인 기제도 밝혀지고 있다.

김기현=마음현상이 신경생물학적 현상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모든 정신현상이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는가.

김재권=내가 최근에 낸 책 『물리주의, 또는 그에 충분히 가까운 것』에서도 주장했듯, 나는 여전히 정신적 사건의 대부분이 뇌의 사건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한가지 예외사항을 인정한다. 그것은 감각, 또는 의식의 영역이다. 우리는 커피 향을 맡을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여 인지할 뿐 아니라, 그와 동반하는 감각도 함께 느낀다. 이런 감각 또는 느낌의 영역은 인지 영역과 달리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신현상의 다른 부분인 인지적 상태는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과, 포괄적인 세계관으로서의 물리주의를 대체할 만한 대안적 세계관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김기현=인간은 우월한 정신세계를 갖춘 만물의 영장으로 간주되곤 한다. 인간의 마음과 동물의 마음의 차이에 대한 생각은.

김재권=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합리적·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으며, 예술품을 만들고 윤리적 규범을 구성하는 등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과 다른 동물의 마음 사이의 차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 이들 사이에 질적으로 구분되는 명확한 선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김기현=인간이 진화의 정도에서 다를 뿐, 정신적 차원에서 다른 동물에 비하여 근본적으로 우월한 존재는 아니라는 뜻인가.

김재권=그렇다. 인간의 마음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신적·지성적 능력을 사용해 다리를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의 이기와 예술품을 만들었지만, 그 ‘우월한 마음’이 전쟁·학살·잔혹 행위를 일삼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마음과 지능이 세계를 위해 좋은 것인지 아닌지, 축복인지 저주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인간은 자연계의 일부이며, 우리의 능력은 이 세계 다른 동물과의 능력과 연속선 상에 있다고 믿는다.

김기현=인간만이 언어를 구사할 능력이 있으며,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없으므로, 인간만이 사고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재권=동물의 언어와 의사소통에 대한 많은 과학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연구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인간과 동물의 마음 사이에 언어능력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정도의 차이일 수 있다. 또 인간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동물이 진화하지 못한 것은 단지 역사상의 우연일지 모른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적으로 가능한 입장임에도 아직 명백히 논의된 바가 없다. 이런 가능성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마음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김기현=영국의 논리학자 튜링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컴퓨터 공학이 발전하고 인간을 모델로 하는 사이보그에 관한 영화가 나오면서 이 질문은 철학자뿐 아니라 일반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생각하는 기계를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김재권=기계라는 말은 우리가 현재 또는 미래의 기술을 사용해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만약 이런 의미라면,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술이 마치 우리처럼 생각하고 대화하는 로봇을 만드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단서를 빼면, 이 질문은 그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인간은 세포·분자·원자 등으로 만들어진 물질적 존재다. 나라는 존재도 세포 단위로 해체됐다가 재조합될 수 있다. 초인간적 기술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초인간적 존재에게 나는 결국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 물론 나는 생물학적으로 번식된 존재이므로 엄밀한 의미의 기계는 아니다. 그러나 번식되지 않고 공장에서 생산됐을 경우에도 나는 여전히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천재에 의하여 만들어진 생각하고 느끼는 기계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전능한 신에 의하여 지어진 기계일지도 모른다.

정리=배영대 기자

◇도움되는 책 =『심리철학』(김재권 지음, 하종호·김선희 옮김, 철학과 현실사), 『물질과 마음』(처칠랜드 지음, 석봉래 옮김, 서광사), 『심리철학과 인지과학』(김영정 지음, 철학과 현실사), 『물리주의』(김재권 지음, 하종호 옮김, 아카넷)

◇김재권 =1934년 대구 출생. 서울대 불문과 2학년 재학 중이던 1955년 한미장학위원회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다트머스대로 유학을 떠나 철학을 전공. 프린스턴대에서 철학박사학위. 미시건대에서 오랫동안 철학교수로 재직했고, 미국철학회 중부지역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심리철학』『수반과 마음』『물리계 내에서의 마음』『물리주의, 또는 그에 충분히 가까운 것』 등이 있다.

◇김기현 =1959년생.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박사학위. 서울대 철학과 교수. 2008 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저서로 『현대인식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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