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세계적 철학자 7명 릴레이 인터뷰 ⑤ 주디스 버틀러 버클리대 교수

철학/세계철학대회 2008. 3. 5. 23:23

원본주소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028512


세계적 철학자 7명 릴레이 인터뷰 ⑤ 주디스 버틀러 버클리대 교수

“남자·여자 구분은 문화적 상징체계의 산물”


e-메일 대담=김혜숙 이화여대 교수

 주디스 버틀러(52·버클리대) 교수는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주의 철학자다. 푸코·들뢰즈 등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 영향을 받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대표 주자이기도 하다.

기존의 페미니즘은 남자와 여자의 성별(sex) 구분을 전제한 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했다. 이와 달리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질적으로 결정된 성적 정체성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버틀러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별(sex) 조차도 사실은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젠더·gender)처럼 반복적인 모방적 실행을 통해 문화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성별과 젠더의 구분을 거부하고 이들을 모두 제도적 지배 담론의 산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성 정체성의 해체는 이성애-동성애의 구분조차 권력 담론의 일부로 비판하면서, 동성애를 이성애의 권력적 입장에서 천시할 근거가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여성주의 이론이 여성의 권리 향상 차원을 넘어 남성까지 포함한 소수자의 성애(性愛·섹슈얼리티) 문제로 관심이 확대되는 지점이다. 동성애에 대한 버틀러의 새로운 인식론을 ‘퀴어(Queer)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버틀러의 철학에 대해 ‘여성 없는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김혜숙 교수가 버틀러 교수와 이메일·전화로 대담을 나눴다.

김혜숙(이하 김)=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생물학적 범주를 자연의 법칙, 혹은 천리(天理)로 여겼던 우리의 전통 문화 안에서 보면 당신의 주장은 매우 거북스럽다. 음양사상에 바탕을 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보았을 때 더욱 그러하다.

주디스 버틀러(이하 버틀러)=우리의 문화적 상징체계는 그 구조가 특정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매우 부당할 수 있다. 그것이 권력체계로 작동하며 부정의를 발생시킨다면 그에 관한 성찰과 저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이론의 핵심이다.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그 같은 권력체계의 대표적인 예이며, 나는 소수자 권리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본다. 나는 사람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 정체성이나 자신만의 내밀한 욕망조차 문화적 상징체계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김=당신의 이론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성별 범주는 그리 분명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버틀러=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은 인간을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성 범주로 나누는 문화의 상징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의미 부호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실천과 반복적인 흉내내기 행위의 과정 안에서 형성된 것으로, 성적인 범주는 우리의 선택과 실천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불안정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생물학적 성으로서의 성별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으며 새로운 방식으로 협상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김=성정체성의 불안전성이라는 당신의 주장은 여성주의 이론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성별이 불확실한 것이라면 어떻게 여성주의 운동이 가능한가.

버틀러=성별이 인간 이해에 기본을 이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성별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주어지는가.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염색체인가, 호르몬인가, 아니면 해부학 혹은 다른 생리학적 특징들인가.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성별과 젠더(사회적 성)라고 하는 것에는 ‘이름 붙이기’라는 강력한 실천적 행위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주의 운동은 바로 이 실천적 행위에 개입하여 미래의 젠더 용어들을 만드는 일이다.

김=그런 실천이 가능하려면 기존의 문화적 관습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의 문화 상황에서는 여성에 대한 직접적 억압보다 여성의 욕망을 부추기는 형태로 권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억압을 의식하기도 힘들고 비판이나 저항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 한국에는 소위 명품을 선호하는 ‘된장녀’라 불리는 여성들이 있다. 된장녀란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버틀러=글쎄, 알 것도 같다.

김=이 여성들은 자신이 억압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버틀러=내적 욕망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지 누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니까 그들은 억압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김=많은 여성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된장녀를 지향하는 욕망이 있다면, 어떻게 저항이 가능한가.

버틀러=된장녀의 욕망은 특권과 부를 상징하는 명품에 대한 욕망이다. 명품을 사면서 그들은 잠시 자신이 그 특권적 위치와 공간을 점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초국가적으로 기호화된 상품의 형식으로 권력은 은밀하게 그녀의 욕망 안에서 작동한다. 권력이 상품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권력은 지구화된 자본의 국지적인 형태로 작동하면서, 노동의 성별분업, 가정 내 낮은 여성의 지위를 공고하게 유지시키는 법적 제도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장치들이 여성에게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자각을 통해서 된장녀의 욕망은 더 많은 경제적 권리와 기회에 대한 요구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여성주의 운동이 한국에서는 가족중심의 전통 문화와 흔히 충돌하고 있다. 당신의 이론에서 가족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버틀러=가족은 내 이론 안에서도 중요하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확장된 친척관계와 공동체 네트워크는 전통적인 가족보다 넓은 개념이다. 출산·성장의례·결혼·노화·죽음(장례)처럼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소중한 것들이 좁게 정의된 가족형태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확장된 친척공동체, 사회제도, 의료제도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계를 보장하지 않을까.

김=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나 성전환자들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여러 형태의 사회적 압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실정이다.

버틀러=성별 전환자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왜 있는가. 내 생각에는 성규범이 바뀌면 통상적인 세상살이 감각을 잃게 되리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성별이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내 자신의 성별도 마찬가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다. 성적 소수자들이 이 세계 안에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하는가를 스스로 자문해보라. 나의 답은 ‘그렇다’이다.

김=당신의 페미니즘은 성적 소수자 뿐 아니라 모든 소외계층과 차별받는 이들을 위한 이론으로도 읽힌다. 국가나 사회의 통합이란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버틀러=오늘날 국가의 역할은 보다 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소수자 권리의 보호는 주요한 고려 사항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국가는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국가의 형태를 찾는 일이다. 다양성의 반대는 일체성 혹은 동일성이다. 일체성의 이념은 언제나 가치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가르는 형식을 제도화하면서 불평등을 지지하는 양상을 보인다.


정리=배영대 기자


◇주디스 버틀러=1956년생. 예일대 철학과에서 프랑스 철학 내 헤겔 해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UC버클리 비교문학·수사학과 교수. 후기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대표적 이론가로 손꼽힌다. 헤겔의 주체형성 이론, 푸코의 권력 이론, 알뛰세르와 라캉의 욕망이론, 오스틴의 일상 언어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작 『젠더 트러블』을 비롯해 『욕망의 주체들』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등의 저서가 있다.

 ◇김혜숙=1954년생. 시카고대 철학과에서 현대 영미철학 내 칸트철학의 방법론 해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철학방법론, 여성주의 인식론, 예술철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예술과 사상』,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편저)이 있다.

 ◇도움되는 책들=『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사라 살리 지음, 김정경 옮김, 앨피), 『안티고네의 주장』(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순 옮김, 동문선), 『여성주의철학 입문』 (우줄라 마이어 지음, 송안정 옮김, 철학과현실), 『여성주의 철학』(앨리슨 재거, 아이리스 마리온 영 편집, 한국여성철학회 옮김, 서광사)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