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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008. 10. 1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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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디의 생애와 사상

철학 2008. 9. 25. 18:08

간디의 생애와 사상

 

  지은이: 차기벽
  지은이 소개: 서울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클레어먼트 대학원을 수료(정치학
석사)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간디 평화재단 초청으로 인도를 시찰하였으며,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및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근대화정치론],
[자유와 책임], [한국민족주의의 이념과 실태], [민주주의의 이념과 역사] 등이 있고, 편저로는
[민족주의], [정치와 정치사상], [일제의 한국식민통치] 및 [일본현대사의 구조(공편)] 등이 있다.
 

 

    머리말
  이 책이 처음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에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이 책도 출판사를
세번째 옮기게 되었다.
  지문각에서 초판이 나온 1965년 당시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신생제국에서 군부나 일당에 의한
권위주의 정치가 판을 치고 있었지만, 인도에서는 용케도 민주정치가 견지되고 있었다.
태양문화사에서 재판이 나온 1977년 무렵에는 그 인도에서마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있어 인도
민주정치의 앞날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한길사 에서 3판이 나오게 된 1980년대 말인 요즘에는
제 3세계에서 민주화 도미노현상이 일고 있지만, 인도에서는 이보다 한 발 앞서 민주정치에로
복귀하고 있다.
  제 3세계, 특히 한국 민주화과정의 와중에 있는 우리가 인도 민주화과정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도 민주화과정이 남긴 기복이 덜 심한 발자취 때문이다. 인도가 그 같은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의 식민지정책과 이에 맞선 민족해방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인도를 알려면 지난날의 그 독립운동사론 알아야 하지만, 고전적인
식민지정책 밑에서 전형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인도 독립운동의 역사를 알려면 독립운동을
주도한 회의파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회의파의 역사를 알려면 그 위대한 지도자였던 간디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p14
  간디를 중심으로 하여 회의파의 역사, 독립운동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오늘의 인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게 할 준비작업을 해보자는 것 이 이 책의 목적이다.
  간디의 생애는 숱한 에피소드, 극적 사건, 감격적인 장면으로 차 있다. 그의 연설과 저술은
극히 방대할 뿐 아니라 인간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에 걸쳐 있다. 그는 참으로 특이한 인격의
소유자로 인도 문명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의 세대를 연결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또한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빈틈없는 현실정치가이면서도 자기탐구를 적어도 민족갱생과 국가재건만큼
중요시하던 종교인이었다. 실로 그는 좌절감에 사로잡힌 인도 민중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서구화한 엘리트와 전통적인 대중과를 하나로 결속시켜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민족해방투쟁에 총 궐기케 하는 동시에, 한평생 진리를 추구하며 자기 자신의 도덕적 성품을
향상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 책에서는 다면적인 간디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려고 애썼지만, 집필의 동기가 위와 같으므로
자연 정치면에 치중하여 역사적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제 1장에서는 간디가 인도
정치무대에 등장하기까지의 영국 식민지정책의 변천과정과 인도 민족운동의 전개과정을
개관하였고, 제 2장에서는 간디의 특이한 인격과 사상의 형성과정을 추적하였으며, 제 3장에서는
그렇게 해서 형성된 간디의 종교적 이념과 사회적 이상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제 4장에서는
그러한 이념과 매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실천방법과 그 구체적인 실천과정을 고찰하였고, 끝으로
제 5장에서는 간디주의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고 그 유산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나 역량이 의욕을
따르지 못하여 미비한 점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질정 있기를 바란다.
  출판 사정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쾌히 이 책을 내주신 한길사 김언호 사장과 여러 모로
수고해주신 편집부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1989년 4월 10일 저자

 @p15


    차례
  머리말-13p
  제 1장 영국 지배하의 인도-17p
 1. 인도는 왜 영국의 식민지로 되었나?-19p
 2. 영국의 식민지정책과 인도의 민족운동-27p
  제2장 간디의 반생-49p
 1. 학창시절-50p
 2. 남아프리카 시절-57p
  제 3장 간디의 사상-81p
 1. 종교적 및 도덕적 이념-85p
 2. 사회적 이상-102p
 3. 독립 후의 인도상-114p
  제4장 간디의 실천-l29p
 1. 세 가지 방법-133p
 2. 제 1차불복종운동-149p
 3. 재준비-172p
 4. 제 2차불복종운동-183p
 5. 제 2차대전과 분할독립-197p
  제 5장 간디 사후의 간디주의-223p
  간디의 연보-237p
  참고문헌-241p

 @p17


    제 1장 영국 지배하의 인도
  롤라트법( * 1919년 초에 제정되어 3월에 발효된 이 법의 목적은 전시입법 (즉, 1915년의 인도
방위법)의 실효에 즈음해서 일정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투옥할 수 있게 하여 정부의
민족운동 탄압력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과 아므리차르 대학살!(* 롤라트법의 실시에
반대해서 전국적으로 반영운동이 일어난 데 대하여 정부는 단호한 탄압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1919년 4 월 13일 펀잡 주의 아므리차르 시에서 대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즉 다이어 장군은
비무장의 군중에 발포를 명하여 379명의 사망자와 1, 200명의 부상자를 내게 했다.) 이것이
인도가 150만의 병사와 3억 파운드의 군사비를 제공하여 1차대전 수행에 적극 협력한 데 대한
전후 영국의 보답이었다. 전후 인도에 점차로 자치정부를 허용 하리라던 몬타규 성명의 약속을
믿고 '빵'을 구하던 인도는 '돌'을 얻은 셈이었다.
  어긋난 기대 속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인도 민중의 가슴속에서 북받쳐오르고, 쓰디쓴
굴욕감이 납덩어리처럼 인도 민중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전능의 괴물한테 사로잡혀
어떻게도 할 수가 없는 듯이 보였다. 수족은 마비되고 정신은 무감동이었다"(Jawaharlal Nehru,
The Discovery of India, p.310. 앞으로는 Discovery로약기함)고 네루는 그의 [인도의 발견]에서
당시를 기막힌 심정으로 회고하고 있다. 사실 오랜 세월에 걸친 가차없는 착취로 말미암아
민중의 빈곤은 날로 더해갔고, 민족의 활력은 메말라들고 있었다. 몇 세대에 걸쳐 '피와 고생과
눈물과 땀'을 몽땅 바쳐버렸기 때문에, 인도의 육체와 정신은 병들 대로 병들었고, 민중의
연대생활은 해독을 입지 않은 면이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는 가난과 기아 속에서 비굴감과
공포심의 포로로 되었고, 중산계급이나 인텔리는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p18
  농민은 그래도 수세기 동안에 걸친 가혹한 운명 속에 체념과 인내심이 생겨 있었으므로 빈곤과
기아 속에서도 일종의 침착성을 가지고 만능의 운명에 순종하고 있었으나, 인텔리는 그렇게 될
수도 얼었으니 그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농민보다도 더 비참했었다. 실망과 불만에 가득 찬 그들
인텔리는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할지를 몰랐다. 낡은 것도 새 것도 그들에게는 희망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도, 불타는 사명감도 가질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낡은
교양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요, 현대의 사상이 몸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낡은 것에 집착한다고 해서, 또는 창백한 얼치기 서양모방자로 된다고 해서 비참한 현실에서의
구원이 있을 리가 만무하여, 마치 난파된 배처럼 인도 생활의 암담한 대해를 정처없이 헤맬
수밖에 없었다. 빈곤과 패배주의, 일거에 결판을 내려는 모험주의로는 좀처럼 빠져나을 수 없는
너무나 깊은 구렁텅이요, 기만적인 엉터리 요법으로는 결코 고칠 수 없는 뿌리 깊은 질환이었다.
  간디가 인도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마치 한바탕 부는 서늘한 바람에다
비길 만하여, 우리는 가슴을 펴고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어둠을 비쳐주는 한줄기
빛과도 같아 우리의 눈에 낀 안개를 닦아냈다. 그는 또한 회오리바람처럼 많은 것을
뒤집어엎었지만, 특히 민중의 마음가짐을 변화시켰다"(Discovery, p.311)고 네루는 당시의 감격을
말하고 있다. 흥분과 희망의 급작스런 물결이 인도 민중의 마음속에서 일어나 이때부터 인도의
민족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지니게 되었다. 고원한 이상과 현실적인 실천을 하나로 결부시킨
간디의 영도하에 인텔리는 물론이요, 농민도 동원되어 이제는 일반 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인도의
민족운동이 성난 물결처럼 인도의 지평을 휩쓸게 되었다.
 @p19
  침체와 무기력,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헤매던 인도 민중을 이토록 각성시켜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전진하도록 발동을 건 간디, 그는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 그의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런 사상은 어떻게 실천에 옮겨졌을까 ?
  원래 간디의 사상은 독서를 통해 서보다는 그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형성되었지만, 그런 경험은 시대적 및 사회적 배경과 동떨어져 있을 수는 없으므로, 먼저 영국
식민지 지배하의 인도의 실정부터 개관하기로 한다.
    1. 인도는 왜 영국의 식민지로 되었나?
  1) 유럽 세력의 진출과 인도의 영국 식민지화
  15세기 말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한 인도항로가 발견된 후, 포르투갈은 인도 서안의 고아를
본거지로 하여 동양무역의 독점을 꾀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노린 것은 통상로의 확보에
있었으므로, 인도와 그 밖의 아시아 제국의 연안 요지는 점거했으나, 그 세력을 내륙 깊숙이까지
침투시키는 일은 없었다. 16세기 말부터는 네덜란드와 영국이 아시아에 진출하더니 마침내
양국이 각각 동인도회사를 창립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하자, 포르투갈의 세력은 점차
쇠퇴하였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처음에는 향료 등의 생산지의 점유를 꾀하여 자바, 말래카
등지에서 대립했으나, 17세기 전반에는 네덜란드가 강했기 때문에 영국은 후퇴하여, 포르투갈
세력이 약화돼 있던 인도에 주력을 기울이게 되어, 마침내 마드라스, 봄베이, 캘커타의 3대
거점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인도 진출이 적극화되었다.
 @p20
  한편 프랑스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인도회사를 설립했지만, 그 인도 진출은 영국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에도 인도에서의 영불 양국의 항쟁은 계속되었는데,
처음에는 뒤플렉스가 지휘하는 프랑스가 우세했으나, 영국 측에서 클라이브가 활약하게 되자,
프랑스를 압도하고, 1757년 플래시 전투에서 그 승리는 결정적으로 되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플래시 전투 후 인도의 통치기관으로 변모하여, 우선 벵골 지방을
회사령으로 하고, 그 후 남인도의 마이소르, 중인도의 마라타 동맹, 서북 인도의 시크교도 등의
권력을 차례차례로 타도하였다. 그 결과 이회사는 19세기 중엽까지에는 거의 전인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고, 1857년에서 1859년까지의 세포이의 반란을 계기로 무갈조는 완전히
멸망하고, 동인도회사에 의한 통치는 영국 정부의 직할통치로 되었다가, 1877년 새로
영령인되제국이 성립하여, 이에 인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독립을 상실하고 문자 그대로
외국에 지배당하게 되고 말았다.
  2) 영국 식민지화의 원인
  그 면적 (오늘의 인도연방,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의 합계)이 유럽 대륙 (소련과
핀란드 제외)의 크기가 해당되며, 그 안에 3억의 인구를 가지던 아대륙 인도가 왜 유럽 대륙
주변의 왜소한 섬나라인 영국의 식민지로 되고 말았을까? 네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영국인이
인도의 지배에 성공한 것은 거의 우연한 일, 요행의 연속인 듯이 보인다. 여러 사태들 사이에
만일 무엇인가 약간의 변동이라도 있었더라면, 혹시 그것이 그들의 희망을 분쇄하고 그 야심을
종식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p21
  하기는 그들 영국인은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당한 일이 있었다. 조금만 더 운이 나빴더라면,
그들은 인도에서의 발판을 잃었을지도 모르고, 또는 기껏해야 어딘가의 해안지역을 간신히
지탱하는 데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루는 "더 깊이 음미해보면, 당시의 정세하에서는 그와
같은 사태진전에는 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부언하고는,
무갈제국의 분열로 인한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상태하에서 영국인은 제국지배를 위한 각축전에서
승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네루는 그들 영국인이 먼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들을 인도의 패권을 다툴 진정한 상대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그만 그들의 정체를 간파했을 때에는 이미 시기가 늦었었다고 통탄해 마지
않고 있다. 마치 어린애의 깜찍한 재간에 넘어간 방심하고 있던 씨름꾼처럼 졌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문제는 이러한 견해의 옳고 그름보다도 그러한 견해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자기 조국
인도에 대한 네루의 떳떳한 긍지에 있다. 원래 민족운동에 뛰어든 것은 "개인적 및 민족적인
자존심"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네루이지만, 유럽을 먼저 알고 난 후에 인도를 발견하게 된 네루가
인도에서 발견한 강점은 그에게 무한한 긍지를 갖게 하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찬란하게 꽃피던 고대문화, 힘차게 밖으로 뻗어 나가던 강성한 제국, 더구나
성쇄한 변천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그 근본적인 동일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케" 한
"인도문명의 비상한 지속력과 적응성"은 비단 네루뿐 아니라 인도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떳떳한 민족적 긍지를 가지게 할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과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류
문화의 발상의 하나인 인더스문명은 놔두고라도 기원전 1, 2천년간에 걸쳐서, 종교, 철학, 문학,
법전, 예술을 비롯하여 천문학, 수학 (* 수학에 있어서 고대 인도인은 몇 가지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특히 영의 기호, 십진법, 마이너스 기호의 사용, 대수에서 미지수를 표시하기 위한 알파벳
문자의 사용이 그것이다. 또한 인도인은 수에 대한 감각이 극히 예민하여 몹시 거대한 수(가령
10의 8승)와 반대로 극히 미세한 수 (가령 시간의 최소 단위는 대체로 17분의 1초였고, 또 최소의
척도는 대체로 1.3 * 7의 음수10승 인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를 다루고 있었다.), 의학 등 고도의
문화와 발달된 경제생활을 누리며 이미 기원전 4세기 말에는 거의 전인도에 걸친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인도, 특히 정력에 넘치고 약동하는 정신을 가지던 시대인 서기 최초의
1천년간에는 그 문화와 세력이 동남아 일대에 미쳐, 각지에 식민지가 산재하고, 이란, 중국,
그리스 및 중앙아시아와 활발한 접촉을 가지던 인도, 16세기에는 이슬람정권이나마 무갈족
밑에서 전국이 거의 재통일되었던 그 인도가 왜 19세기에 와서 영국의 식민지로 되고 말았을까?
 @p22
  18세기 초엽에 무갈제국의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자, 많은 지방적 세력이 대두하였으나
18세기를 통해서 인도의 패권을 다투던 진정한 경쟁세력은 영, 불의 두 외국세력과 마라타동맹
및 마이소르의 두 국내세력이었다. 18세기 말에 접어들자, 결국 이 쟁패전은 마라타와 영국의
양자로 줄어들었지만, 마라타의 수장들 사이의 불화로 인하여 영국인에게 각각 격파당하고
말았다.
  이 쟁패전의 과정을 피상적으로 관찰한다면, 영국인의 승리는 우연과 요행의 연속인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영국인은 언제나 존재가 희미하게 되어 있던 무갈황제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한 데다가 그들의 벵골에서의 약탈과 특수한 교역방법은 결국 약탈을 한 다음 고국으로
돌아갈 외국인으로 보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보았다면 그것은 당시 인도의
패권을 다투던 각 세련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국제정세에 어두워 세계적 안목을 갖지 못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데 불과하다. 실로 인도인은 당시 근대적인 의미에서 민족감정을 갖지
못하여 그 들의 충성심은 그 토지의 수장에게 바쳐지고 있었다. 따라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은
가지면서도 위기에 처하여 상호협력을 할 수 업었다. 이에 반하여 영국인은 극히 유능한 지도자
밑에 긴밀하게 결속된 고도의 정치적, 군사적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방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정보에 통해 있어 인도인 세력의 분열과 대림을 남김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영국인의 조직력은 기술적 진보에서 나왔고, 그런 기술적 진보의 배후에는 과학정신과 발랄한
생활감정이 있었다.
 @p23
  일찍이 십자군의 원정을 계기로 싹트기 시작한 유럽의 새 정신은 마침내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문예부흥은 기존 권위뿐 아니라 추상과 사변에도 도전하는 객관적 탐구의 새 정신을 앙양하여
안으로는 자연과학을 일으키고 밖으로는 대양 저편으로 모험의 손길을 뻗치게 하였다. 그 결과
신대륙과 신항로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유럽은 종교개혁, 시민혁명, 산업혁명 등의 일련의
과정을 밟으면서 발전하여, 드디어 온 세계를 제패하기에 이르렀다. 세계를 제패하는 데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다름 아닌 해군력이었다. 인도의 해군력은 13세기에 남부의
촐라왕국의 몰락을 계기로 쇠퇴하여 15세기에는 아랍인이 인도양 전역을 지배했지만, 그들은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을 선두로 하는 유럽 세력에게 구축당했고, 결국 인도양의 제해권은 영국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바다의 제패는 그들 영국인에게 안전한 기지와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일시적인 패배를 당해도 곧 회복하여 다시 공세를 취한 수가 있었다. 게다가 플래시의
승전으로 인한 벵골의 영유는 전비를 충당할 수 있는 거대한 부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발달한 스파이 제도와 교묘한 오열 조종으로 대개의 전쟁에서는 실제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승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영국인의 인도 지배는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제국지배를 위한 각축전의 과정에서 영국인은 많은 요행을 가졌지만, 영국인은 그런 요행을
충분히 이용하여 승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비단 영국과 인도의
경우뿐 아니라, 널리 유럽과 아시아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여태까지 많은 면에서 뒤져 있던
유럽에서는 발랄한 새 정신이 일어나 새 기술을 발달시켜 자연력을 개발, 이용한 데 대하여,
아시아는 지난날의 노력에 지쳐서 거의 혼수상태에 빠진 채 인력에 의거하는 전통적인
생산방식에 매달려 있었다.
 @p24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래 문명은 외부의 공격보다는 내부적인 결함 때문에 쇠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 문명을 담당하는 국민이 지치거나 질이 저하된다는 인간적인 요인이 주가 되는
경우도 있고, 사회제도가 새로운 전진을 가로막는다는 제도적인 요인이 주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경우를 보면 후자일 것 같다. 인도문명의 쇠퇴는 13세기의 이슬람교도들의 침입 이전에
이미 역연한 바가 있었다. 생기와 활력, 창의와 탐구심에 차 있던 인도, 기술(*)과 경제생활이
고도로 발달해 있던 그 인도도 대체로 서기 1000년을 전후하여 서서히 쇠퇴과정에 들어섰다.
약동하던 생명력은 점차 약화되고 창조적 재능은 고갈되어갔다. 모험에의 충동은 자취를 감추고
탐구의 합리성은 과거의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길을 비켰다. 이리하여 인도의 생활은 변화 없는
정체상태로 빠져들어갔다.
  * 예를 들면 고대 인도에서는 제철업이 상당히 발달하고 있었다. 델리 근처에 거대한 철주가
있는데, 그 산화작용을 막아온 제련법을 현대 과학자들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철주에 새긴 명문은 서기 4세기에서 7세기간에 사용된 굴타 문자로 씌어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철주 그 자체는 이 명문보다 훨씬 더 오래 된 것이며, 명문은 후에 새겨 넣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 특히 무갈의 지배는 인도의 생활에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자극에 의한 예술, 건축, 그
밖의 문화양식에 생기를 돌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본래의 활력과 창조적인 생기를 잃은
낡은 두 세계의 접촉의 결과였던만큼, 인도의 생활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못하고
지난날의 침체상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침체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카스트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인도
사회구조의 점점 더해가는 엄격성과 배타성에 있었다고 네루는 말하고 있다(Discovery, p. 188).
배타의 정신은 창조력을 약화시키고 집단적 편견을 조장시켰다. 인도의 생활은 기정의 틀로
세분화되고, 그 안에서 각 개인의 일은 항구적으로 고정되어 타인과는 거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
국방은 크샤트리아의 일이며, 무역과 상업은 브라만과 크샤트리아가 천시하는 직업인이었다.
교육과 발전의 기회는 하층 카스트에 속하는 이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다. 도시의 경제와 산업은
상당히 발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기구는 대체로 봉건적이었다.
 @p25
 * 카스트 제도: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 민족이 선주민족인 드라비다인을 정복하는 과정에 생겨난
제도이다. 고대에는 피 정복자를 근절시키거나 노예로 만들거나 했지만, 아리아인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 오래도록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일종의 복합사회적인
국가를 만들었다. 이 국가에서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또는 일반적인 규범에 따라, 각 집단에게는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며 각자의 관습과 희망에 따라 자기의 생활을 영위하는 자유가 부여되었다.
다른 집단에 간섭하거나 서로 싸우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실상의 유일한 금제였다.
당초에는 이 제도는 융통성이 있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래자나 낡은 집단 안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인원만 있으면, 언제라도 새 집단을 형성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기의 집단 안에는 평등과 민주주의가 존재하여 선거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들이
지휘하고, 무슨 중대한 문제가 일어나면 언제나 집단 전체와 협의했다. 요컨대, 카스트는 직무,
직능에 기초를 두는 하나의 집단제도였다. 그것은 공통된 교의 없이 각 집단에 완전한 자유를
인정하면서 모두를 포섭하려는 하나의 질서였다. 이 카스트는 기본적으로 브라만(승려계급),
크샤트리아(무사계급), 바이샤(상인계급), 수드라(노동계급)의 넷으로 나누어지나, 각 카스트는
수많은 아카스트로 다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이 카스트에 속하지 못하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불가촉천민 (untouchables)이라고 불린다. 이런 카스트제도는 처음에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목표로 서서히 완성 되었지만, 그것이 고정되어 융통성이 없어지자, 많은 불편과 폐해를
낳아 인도의 발전을 저해하는 질곡으로 되었다.
 @p26
  그러므로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그런 기구를 변혁하여 재능의 새 원천을 해방해야 했지만
카스트제도는 그와 같은 변혁을 완강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카스트제도와 촌락자치제(*) 및 합동가족(joint family)(**)을 3대 지주로 삼는 인도의
사회구조는 인도 사회에 질서와 안정을 주는 데는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단결은 주었으나, 팽창과 보다 큰 단결에는 장애로 되었다. 그것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다소의 자유를 주었으나, 보다 큰 자유의 발달을 회생시키고, 방대한 수의
사람들에게서 그 발전의 기회를 빼앗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한 사회기구는
발전과 팽창에의 길을 제공하고 있는 동안은 진보적이었으나 일단 팽창의 한계에 달하면
정체적이 되고, 그 후에는 필연적으로 퇴보적이 되고 말았다.
  * 촌락자치제: 먼 옛날부터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해온 특별한 사회조직인 촌락공동체는
광범한 자치제가 허용되어, 중앙 정부는 부과된 세금이 납부되는 한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관습법은 강한 힘을 가졌고, 정치적 내지 군사적인 권력도 관습법에 의거하는 권리에는
간섭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그리하여 이 공동체의 경계가 변경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심지어 전쟁과 흉작 또는 질병으로 촌락 그 자체가 파괴되는 경우에도, 같은 명칭, 경계,
이해, 같은 가족이 수세기에 걸쳐 그대로 남았다. 그것은 정체적이며, 카스트제도에
오염되어 때로 야만적인 자연숭배와 미신의 소굴로 되었다.
  **: 인도사회의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합동가족이다. 이른바 대가족의 동거생활이며,
가족 구성원은 제사를 같이하고, 식사를 같이하며 재산을 공유한다. 극히 일부의 지방(아삼
및 케랄라 주)을 제외하면, 대개 가부장제이며, 가부장의 권위에 종속함으로써,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생활이 보장된다. 합동가족의 장점으로서, 개인의 이기주의가 억제되고,
사유재산의 폐해를 수정하며, 양로, 실업의 면에서는 사회복지의 기능을 가진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 개인의 확립이 제약당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 해방된 개인을 단위로 하는 사회 내지 사회집단을 인정할 수 없는 점에서 인도에서
근대화가 뒤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합동가족이 재산의 공유와 그 연대책임제라는
경제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본과 사업경영의 면에서 가족 성원에 의한 합명, 합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합동가족이 몇 개 모여서 그대로 일종의
아카스트를 형성하고 있는 사실과 더불어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가족제도는 현재는
급속도로 붕괴되고 있다.
  그 결과 인도생활은 온갖 면에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또한 지방적, 봉건적인 감정이
발달하게 되어 전체로서의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게 되었던 것이다.
 @p27
    2. 영국의 식민지정책과 인도의 민족운동
  1) 영국지배의 의의와 그 모순
  영국의 인도 지배는 인도로서는 역사상 처음 겪는 외국에 의한 지배였다. 인도는 이전에도
이슬람의 침략자들에게 정복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아시아의 침략자들은
히르지건 투글라크건 혹은 무갈(모두 인도에 침입한 이슬람왕조)이건간에, 다 같이 인도의
국경 안에 정착하고, 침략자의 2세부터는 인도의 생활에 동화, 융합되어 인도인으로서 그
영토를 지배하였다. 또한 그들은 서방의 이슬람제국과는 거의 또는 전연 교섭을 갖지
않았다(K.M.Panikkar, A survey of Indian History, 제 2판 서문). 인도는 일찍이 중력의
중심이 그 국토 밖에 있는 정치적, 경제적 체제 속에 끌어넣어진 일은 한 번도 없었고,
기원과 성격에 있어서 이국적이며, 게다가 영원히 융합할 수 없는 지배계급에게 예속당한
일은 없었다. 인도의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지배가 외부에 의해서 행해지고, 그 경제는 멀리
떨어진 곳에 의해서 좌우되었으며, 또한 인도에 동화되려고 하거나 융합되려고 한 적이 없이
언제나 주의 깊게 이국적이었던 지배계급한테 통치당하게 되었다.
 @p28
  영국의 지배는 인도 사회에 심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인도로서는 여태까지의
어떠한 침략이나 정치적, 경제적 변화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전혀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렇듯 영국 지배가 인도 사회에 예전과는 전혀 다른 충격을 준 이유는 영국이 새로운
기계문명의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새로운 역사적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점을 자각하지는 못했어도, 변화와 변혁의 선구자이며
대표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가 자기들의 지위를 공고화하는 데 필요하거나, 자기들의 이
익을 위해 인도의 인적, 물적 자원을 개발, 착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온갖
수단을 다하여 변화를 저지시키려고 애썼다. 그것은 그들이 진보적인 변화가 인도 민중의
힘을 강화하여 결국 자기들의 입장을 약화시킬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일어났다. 진보적인 방향에서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문명의 새로운 충격은
너무나 강하여, "영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Discovery, p.269) 그런 변화는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런 변화는 인도 민중을 각성시켰고, 각성한 인도 민중은 민족적 자각을
갖게 되어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2) 세포이의 반란과 신식민지정책의 기조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대규모의 민족운동은 1857년에서 1859년까지의 세포이의
반란에서 시작된다. 세포이의 반란은 영국 산업자본의 지배와 수탈의 강화에 조응하는
것이다.
  영국의 인도 지배는 1600년의 동인도회사의 설립에서 시작되지만, 전기적 상업자본의
독점적 무역기관이었던 동인도회사는 주로 약탈적 무역에 종사해왔으나, 1757년의 플래시
전투를 계기로 통치권력으로 등장하여 인도 농민의 직접적 수탈을 주요 사업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p29
  이 때문에 인도의 부의 유출이 심하여, 인도 특히 벵골의 빈곤화가 초래되었지만, 이
벵골에서 수탈해간 부가 자본으로 되어 영국의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동인도회사를 통한 인도의 수탈을 발판으로 해서 성장한 영국 산업자본은,
산업혁명의 진전과 더불어 동인도회사의 무궤도한 수탈과 무역독점에 반대하고, 인도를
영국의 상품시장과 원료기지로 만들도록 요구하게 되어 그 한계 안에서 수탈의 합리화를 그
정책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 정책의 집약적 표현이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토지제도
의 설정(*)과 1813년 이래의 무역독점 해제요, 또한 농업원료품의 강제재배와
재식기업의 장려정책이었다. 이런 정책에 따라 영국 상품은 인도에 쇄도하여 자급자족적인
촌락공동체를 파괴하고, 인도의 농촌을 세계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 강제로 끌어넣게 되었다.
인도의 직물공업은 파멸되고, 수많은 수공업자는 직업을 잃고 몰락했다.
  * 토지제도의 설정: 영국인의 인도 지배가 확립됐을 무렵, 인도의 농촌에는 토지소유권이
국가에 있는지, 농민에 있는지 또는 촌락공동체에 있는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무갈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농민과 국가 사이에 있던 징세청부인인 자민다리의 수가 느는 동시에
사실상의 소유자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대개 오래된 귀족출신은 아니고, 사기나 폭력에
의해서 명의상의 소유자로 되어 있었던 것인데, 벵골, 비하르 연합, 북마드라스의 각 주에서
영국인은 그들을 영국법적인 의미에서의 지주로 결정했다. 영국인이 자민다리를 지주로
오인했는지 또는 알고 있으면서도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아무튼 이 영대차지제도(permanentsettlement)의 설정으로 인도 농촌사회의 전통인 농민의
일종의 자립적인 권리의 관습은 부인되고, 영국은 새로운 지주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동시에 여태까지 자급자족적 이었던 인도의 농촌에는 투기적인
상인이나 부재지주가 속출하는 한편 엄격한 지세 징수와 차금의 저당으로써 토지를 분할,
매도하는 일이 성행하여 토지소유의 영세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p30
  그런데 이런 영대차지제도(즉 자민다리제) 아래서는 지세는 고정되어 증액할 수가 없었으므로
영국인에게는 불리하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다. 그래서 인도의 다른 지방에서는 새로운
토지제도를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일정 기간에 한해서 지주로 인정하고 경우에 따라 지세의
증액도 행해지는 제도였다. 그리고 촌락공동체적 구성이 지방에서는 직접 소농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자작농소유(라이오트와리제)가 설정되었다. 그 방식은 어떻든, 그 결과 이른바
근대적 토지소유(지세징수) 제도가 강제로 도입되게 된 인도 농촌사회는 그 관습적
신분기관, 지주보유, 자치제의 전통적 제도가 은 타격을 입는 동시에 폐쇄적인 촌락사회가
자본주의 앞에 개방당하게 되고 말았다.
  한편 영국에 의해서 창출된 지주, 즉 자민다리(zamindari: 회교도 지주)와
타르쿠다르(tarqudar: 힌두교도 지주)는 봉건적인 공납과 부역을 농민에게 부과하여, 농민의
토지 생산물의 50퍼센트 또는 60퍼센트가 그들 지주 또는 정부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영국은
전통적인 경제제도를 파괴하면서 봉건적인 지주를 창출, 옹호하고, 자본주의를 인도에
도입하면서도 근대 공업의 발달은 극력 저지했다. 즉 영국은 한편으로는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노동력을 흡수할 공업의 발달을 억제했다. 실로
동인도회사는 영국 상품과 경쟁할 공업제품에는 국내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영국 상품과
대항할 수 없게 하고, 또한 영국 정부도 인도의 공업제품에 대해서 금지적인 수입관세를
부과하였다. 이 때문에 인도의 산업자본은 그 발달이 저해되어 인도는 1820년대에
공업제품의 수출국에서 수입 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인도의 농촌에는 공업의
저해로 인한 도시에서의 인구역류도 있고 하여, 가난한 농민들이 넘쳐 토지소유의 명세화가
촉진되는 동시에 영국과 결탁한 지주나 고리대금업자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소작인이
아니면 농노적인 농업노동자로 되는 자가 늘어 농업생산력이 저하되었다. 또한 영국은
예로부터 아시아의 군주의 중요 임무였던 관개시설의 신설, 유지를 전적으로 무시했으므로,
인도와 생활의 파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기근의 빈도와 그 재해의 정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증대해 갔다.
  * : 1769년에서 1800년 사이에는 대기근이 4회, 1802년에서 1838년 사이에는 12회,
1854년에서 1908년 사이에는 35회나 되었다. 그리고 1891년에서 1900년 사이의 10년간에는
무려 1, 900만 명이 아사했다.
 @p31
  이렇듯 산업자본이 우세해 짐에 따라 인도의 경제는 식민지적 상품, 원료 시장으로 재편성
당하게 되었거니와 이는 공공연한 약탈보다도 오히려 실제로는 훨씬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
합법적인 수탈방식이었다. 영국의 인도 정복이 완성에 가까워지던 때요, 또한 산업자본이
영국에서 패권을 확립하던 무렵인 19세기 중엽에는 영국의 인도 지배도 그 모순이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구매력의 감소로 인하여 영국 상품의 수입액은 격감되는 한편 인도인의
저항은 증대하여 인도의 재정은 파탄되고 말았다. 이를 구출하는 동시에 산업자본의 상품,
원료시장의 확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복전쟁과 영토연합정책이 강력히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856년까지에는 전체 면적의 약 60퍼센트, 전체 인구의 약 70퍼센트는
동인도회사의 직할령으로서 직접 영국의 영토가 되고, 나머지 지역은 대소 500여의 번왕국으로서,
조약에 따라 영국의 종주권 밑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 이 정복전쟁은 그 전비가 인도인의
부담으로, 세포이 (Sepoy)라고 불리는 인도인 용병을 주로 고용함으로써 단행되었지만, 그 정복의
완성과 정복 후의 주민의 곤경은 세포이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세포이의 반란 전후에는 인도 사회의 각층 즉 영지를 잃은 구번왕, 기타의 구지배자를
비롯하여, 부당한 대우에 고민하던 지식인, 정복전쟁이 끝나자 대우가 나빠진 세포이,
실직한 수공업자, 영국이 도입한 토지제도 때문에 고생하던 농민 등 영국인 지배자의
앞잡이로 되어 있던 일부의 계층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계층에 속하는 사랑들간의 불만이
충만되고 있었다. 각처에서 농민폭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p32
  이런 불만이 점차 응집하여, 세포이에게 종교적 계율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명령(*)을
내렸다는 극히 사소한 자극으로 전인도의 3분의 2를 정분 세포이의 반란이 폭발했다.
  * : 1857년 초부터 새 탄약통에 이슬람교도가 싫어하는 돼지기름과 힌두교도가
신성시하는 소의 기름을 발라서 세포이에게 사용케 했다.
  1857년 5월 10일, 미루트의 세포이 3개 연대가 봉기하여 영국인 사관을 죽이고 병사를
태우고 정치범을 석방하고는 델리로 진군했다. 미루트의 시민과 델리의 군대 및 시민도
이에 합류했는데, 이때 그들이 옹립하는 이는 무갈황제였다. 당시 유폐의 몸이었던
무갈황제는 무갈제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힌두교도, 이슬람교도의 구별 없이 모두 단결하여
영국인을 축출하라고 호소했다. 반란은 곧 서북주의 펀잡, 아우드, 라지푸타나, 봄베이,
하이데라바드에 까지 파급됐다. 그러나 이 반란도 본국의 원군과 구르카 및 시크, 그리고
일부 번왕과 대지주의 후원을 얻은 영국 신예 군대의 무자비한 반격으로 마침내 1859년
7월에는 완전히 진압당하고 말았다.
  이 반란이 실패한 이유로서는, #1 자본주의의 미발달로 인하여 중산계급이 성장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 반란은 봉건적 지배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말하자면 본능적인
배외반란이었고, 반란을 통일적, 조직적으로 지도할 짜여진 지도세력이 없었다는 점,
#2 지도권을 장악한 봉건적 지배자에게는 국민을 분기시킬 이상도 정책도 업었고, 그
지배자층과 농민 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이 반란도중에 표면화하여 나중에는 그들 지배자가
영국의 회유에 넘어갔다는 점, #3 영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강성하던 시기인데다가
국제정세가 19세기 중 영국에게 가장 유리하던 때였는 데 반하여, 인도의 민족운동에는
이를 원조할 국제세력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Discovery, p.279)
 @p33
  요컨대 이 반란은 불리한 국제정세하에서 일어난 본질적으로 봉건적인 봉기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단순한 봉건적인 정치운동과는 달라 인종, 종교, 카스트 등의 구별 없이 광범한
계층을 동원하여 공통의 정복자를 축출한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규합시킨 최초의
반영반란이었다는 점에서 인도의 해방운동사상 극히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이 반란은
영국의 조야를 진감시켜, 그 후의 인도 통치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동시에, 이
반란에서 나타난 인도 민중의 용기와 영국의 잔학한 토벌의 기억은 그 후의 인도해방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반란은 또한 영국의 세계정책을 근본적으로
동요시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영국령화를 간접적으로 방지하는 구실도 했던 것이다.
  세포이의 반란 후, 영국인은 인도를 정부의 직접통치하에 두고, 통치기구의 정비와 군대 및
경찰의 재편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지배력의 강화를 꾀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인도 지배의
수법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런 수법은 2차대전 후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1) 영국 지배와 밀착하는 특권계급 및 새 계급의 창출과 보호
 #1 번왕-영국은 번왕을 점진적으로 배제하여 영국의 직접 통치를 확립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으나 세포이의 반란은 그런 정책을 일변시켰다. 왜냐하면 이미 영지를 빼앗긴
예전의 번왕들은 반란에 적극 참가한 데 반하여, 아직 번왕으로 남아 있는 이들은 반란에
가담하기를 꺼리거나 혹은 영국측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원조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
을 통해서 영국은 그들 번왕으로 하여금 민중을 통제케 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점을
발견했으므로 그들은 그대로 존치하고 배후에서 조종하기로 했다.
 #2 지주-토지제도를 설정함으로써 유럽식 지주를 영국이 창출했다함은 전술한 바이다. 그들
지주 중에는 반란에 참가한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충성과 봉사'를 조건으로 다시 지주의 지위를 회복케 하여 그들을 계속
영국 지배의 지주의 하나로 삼았다.
 @p34
 #3 관리-번왕과 지주는 이렇게 해서 온존된 기본적인 특권층이거나, 이제는 영국 지배화
보다 밀착된 새로운 계층인 대규모의 인도인 관리층이 창출되게 되었다. 이전에는 인도인의
고용은 부득이한 경우 이외에는 회피되었지만, 반란의 경험을 통해서 그들 인도인은 영국의
통치에 의존하는 분자이기 때문에 신용할 수 있고, 영국 지배의 대행인으로서 대우 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래서 이른바, '인도 통치의 인도화'라는 행정개혁의 단행을 보게
되었다. 이에 새 교육을 받은 인도인이 하급관리로서 정부기관에 등용되었다. 그들은 대체로
영국 권력에는 아부하고 인도 민중에게는 존대한 중간적 매개자의 역할을 했지만, 관리로
취직한다는 희망과 예상이, 달리 취직할 길이 열려 있지 않던 많은 인도 지식인에게 널리
영향을 미쳐 도의를 타락시켰다. 요컨대 새로운 관리층의 창출은 식민지지배를 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되었다.
  (2) 분할통치정책의 강화
  세포이 반란의 경험은 영국 식민지통치상의 원칙인 분할통치의 효용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므로 영국은 카스트, 종교, 인종의 차이를 지나치게 존중하고, 특히 위에서 말한 번왕과
지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한편, 신관리에는 주로 힌두교도 (세포이 반란의 직접 목표가
무갈왕조의 복위에 있었으므로)를 등용함으로써 통일적인 반영세력의 결집을 막았고,
19세기 말부터는 반대로 회교도를 옹호하여 회교, 힌두교 양교도 사이의 대립을 조장시켰다.
이렇듯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봉건성 내지 후진성을 온존,
이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질세력 사이에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여 민족주의적인 역량을
약화시켰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수법을 통해서 영국은 자기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반면에 인도의 민족적
역량을 약화시킴으로써 인도 지배의 목적인 상품 (또는 투자), 원료시장화를 계속
추구했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정책으로 요약된다.
 @p35
  (1) 근대 공업발전의 방해. 영국 공업의 경쟁자로 될 인도의 근대공업의 발전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저지되었는데, 이에는 자유주의의 원칙이 원용되어, 요람기의 인도 공업은
아무런 국가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자유방임되었다. 실로 인도는 1882년에서 1894년까지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전한 자유무역을 채택했다. 그리고 철도부설과 그 운영도 인도
공업의 발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군사상 및 무역상의 편의라는 관점에서만 행해지고, 폐제도
언제나 인도 자본의 요망을 무시하고 정해졌다.
  (2) 원료기지화의 촉진. 관개, 수리공사는 원료생산지에서만 행해졌다. 그 결과 인도는
수출용 농작물에 의존하는 농업국으로 되고, 농민은 봉건적 착취와 아울러 세계시장의
변동에도 알몸을 드러내게 되고 말았다.
  한편 영국은 대외적으로는 인도 방위를 위하여 국경을 확대시켜나갔다. 즉 1860년부터
버마의 각 종족을 토벌하고, 1866년에는 부탄 지역을 보호국으로 하고, 1873년경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신강성까지를 그 세력 범위에 넣었다.
  3) 중산계급의 성장과 민족운동의 전개
  이상과 같은 영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현상을 타파하려는 강력한 새 세력이 나타나고,
새로운 사회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국 지배하의 인도의 정치적 통일, 유럽과의 접촉,
기술의 진보, 그리고 다 같이 피정복자라는 불행 등은 새로운 사조를 낳아 점차 근대적인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민족의 자유를 추구하는 새 운동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1844년의 철도부설은 인도에서 근대공업 시대의 도래를 의미했다. 이 철도의
부설과 철도에서의 수요때문에 인도의 탄광개발이 성행되고, 이어 아삼의 차, 벵골의 주트
등의 농장농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1860년에는 여태까지 수입기계에 부과되던 관세가
폐지되어, 대규모의 주트 공업이 주로 영국 자본에 의해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
말에, 영국 자본의 독점화가 진행되어 국내자본이 과잉상태에 빠지게 되자,
 @p36
  인도의 저렴한 노동력과 광대한 시장은 영국 자본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인에 의한
기업의 중대에 따라 많은 애로에도 불구하고 인도인의 기업도 증가했다. 생각해보면, 발달한
수공업적 기술과 능한 상업술의 전통(*) 을 자랑하는 이 인도에 철도와 근대공업이
들어온 이상 근대적인 상공업이 발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인도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는 고도로 발달한 수공업국므로, 그 제품을 유럽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널리 수출하고 있었다. 인도의 금융제도도 전국을 통해서 잘 조직되어
있어서 대업자와 대금업자가 발행한 수표는 인도는 물론이요, 이란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각처에서 통용되고 있었다. 상인자본도 발달하여 대리점, 청부업자와 중개인 등 잘 정비된
조직망도 있었다. 조선업도 발달하여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어떤 제독의 기선은
인도에서 인도인 업자의 손으로 건조된 것이었다. 인도는 공업상으로도 상업상으로도 또한
금융상으로도 산업혁명 이전의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은 진보된 나라였다.
  그리하여 1890년에는 인도는 50여 개의 방적공장과 많은 무역기업, 그리고 약간의 소규모
공업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 정부측의 방해는 여전히 계속되어 인도산 면제품에
대해서는 인도 국내에서까지도 랭카셔 섬유제품과의 경쟁을 막기 위하여 국내소비세를
부과하였다. 이 때문에 인도에서의 공업의 발달은 너무나 완만하여 진보의 인상은
주었을지언정 대중의 빈곤과 토지의 부담과중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무수한 실업자와 반실업자 중에서 공업에 흡수된 수는 20, 30만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도 대중의 빈곤은 날로 더해갔다. 농민은 지주와 고리대금업자에게 예속하는 극
빈농으로 전락하여 기근으로 아사자가 격증했다. 실로 세포이의 반란 직후인 1860년에서
1880년에 이르는 동안은 각처에서 농민반란이 이리를 물고 일어난, 말하자면 농민반란의
시기였다. 그런가 차면 새로 발생한 공장노동자의 상태도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궁핍한
농촌에는 산업예비군이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그들 노동자는 보잘것없는 저임금과 장시간노동,
청부제에 의한 중간착취, 압도적인 소년, 부인노동자 사용 등 최악의 노동조건 밑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p37
  이와 같은 실업자 빈곤이 인도의 노동인구로 하여금 굴욕적인 조건을 무릅쓰고 여러
외국에 대규모적으로 이주케 했는데, 그들은 남아프리카와 피지, 트리니다드, 자메이카,
실론, 버마, 말라야 등지를 향하여 이민의 길을 떠났다. 인도의 대중은 이처럼 절망적인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으나, 새 사태하에서 대두한 상공업자는 정치상의 개혁과 투자의
기회를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제 인도의 민족운동은 그들의 지도하에 통일적,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인도 자본가계급은 그들의 이익에 가장
직접적인 장해로 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식민지 지배권력임을 그 공업발전 저지정책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자본가 및 지주 출신인 지식층도 영국인에
의한 차별대우, 문관임용 제한 등으로 인하여 불평,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이러한 신흥중산계급의 반영감정은 우선 초기에는 문연, 종교 운동으로 나타났다. 유럽
문화의 충격은 일찌기 19세기 초엽부터 침체할 대로 침체해 있던 인도의 문화, 사상계에도
새로운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 유럽 문화에 대한 수용적인 경향과
반발적인 경향의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세포이의 반란 후 과거를 회고함으로써
위안을 얻고 자신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문화면에서는 인도 고전의 부활이
성행했다. 종교면에서도 아르야 사마지 같은 복고적인 종교단체가 생겨나고, 또한 보다
근대화된 사상을 가졌던 라마 크리시나와 비베카난다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전자는
힌두교의 순화와 그 우월성을 주장했고, 후자는 힌두교를 개혁함으로써 전통문화 특히
힌두교의 유산을 정화하여 고대의 위대성을 되찾아 이를 근대적인 요소와 융합시키려고
애썼다. 이러나저러나 이 양자는 다 같이 유럽 문명에 혼을 팔고 있는 인도인들에게 그들
자신을 재발견케 하여 민족적 자주정신을 회복시키려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신흥중산계급의 광범한 호응을 얻어 민족정신을 앙양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 : 람 모한 로이가 설립한 브라흐마 사마지는 기독교 또는 서구의 합리주의를
도입하여 인도의 종교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슬람의 와하브파와 힌두의 다르마 사바는
기독교에 대항해서 고대의 종교를 부활하고자 했다. 또한 영국에 의한 유럽 문화의 도입과
영어의 보급에 있어서 이를 자진해서 도입하여 인도의 근대화를 꾀하고자 하는 경향과 인도
고전의 부활, 토착어의 보급에 의해서 이에 대항코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p38
  민족정신이 앙양되자 자본가, 특히 구미문화의 세례를 받은 지식층은 영국의 인도 통치의
융합화를 꾀하는 동시에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정치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인도인연맹 (1876), 인도인협회 (1883)를 비롯한 몇 개의 정치단체가 이렇게 결성되었는데,
이런 단체들은 서로 협력하여 1883년에는 인도 국민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세포이의 반란 후 또다시 인도의 정치, 사상, 사회 등의 각 방면에서 현저하게 나타난
'일종의 발효상태'에 주목한 정부는 국제정세도 불안한 터라 그것에 출구를 마련해줄
필요를 느꼈으므로 영국인 흄과 인도인 바네르지 등의 협력하에서 정치단체의 대동단결을
꾀하게 하였다. 즉 1885년에 개최된 인도 국민회의가 그것인데, 이것이 곧 오늘의
국민회의파의 창시이다.
  이상의 결성동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회의파는 영국측에서 보면 중산계급의 대두에
따르는 인도의 민족주의적 움직임에 대한 유화요, 인도측에서 보면 인도의 지위향상을
꾀하기 위한 대영협조라는 타협적 의도에서 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성대회는 "영, 인
관계에 대해서는 인도에게 불공정하고 유해한 상태를 시정하여 영, 인 양국 관계를
긴밀화한다"는 것을 강령의 하나로 채택하였다.
  회의파의 이와 같은 온건한 성격은 결성에 참가한 각계 대표의 계층별 구성비율 (상공자본
및 고리대자본 대표 25퍼센트, 지주대표 25퍼센트, 지식인 대표 50퍼센트)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결성 이래 20세기 초에 걸쳐 회의파가 정부에 제출한 요구는 국가기관에의
인도인의 등용, 대의정치의 점차적 채용, 민족자본 육성을 위한 보호관세의 설정 등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회의파는 대영협조단체로서 출발했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은 규모와
조직면에서 인도에는 선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점차 구성원을 확충하여 정당적 조직으로
변모하는 동시에, 단순한 대영헙조 단체적인 성격을 서서히 지양하고, 인도 민족운동의 중추로서
활약하게 된다.
 @p39
  회의파로 하여금 협조단체적 성격 이외에 민족정당적 성격도 지니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는
1896년의 북인도의 대기근과 이에 뒤이은 봄베이주 푸나 시에서의 선페스트의 유행이었다.
이 두 사건은 영국 통치의 냉혹성과 인도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을 단적으로 드러내어,
일종의 정치적 안전판의 구실밖에 못하는 회의파에 만족치 못하고, 그것을 민족주의적
정당으로 이 끌어가려는 움직임이 회의파 안에서 일어나게 했다. 이런 급진적인 움직임은
후의 벵골 분할반대투쟁시에는 과격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중산계급의 지도하에 최초로 전개된 전국적 민족운동이었던 벵골 분할반대투쟁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영국 독점자본의 수탈에 반항하는 것이었다. 산업자본이 금융독점자본으로
발전하여 상품수출 중심에서 자본수출 중심으로 전환되는 반면, 열강간의 경쟁으로 인하여
제국내 무역이 중대한 의의를 지니게 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인도는
영국에게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즉 인도는 영국에게는 무진장의 부의
보고이며,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상품시장 및 원료산지인 동시에 과잉자본의
투자시장인데다가 군사상의 쟁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영국은 안으로는 강, 온 양수단을
병용하여 확고하게 인도를 장악하고, 밖으로는 인도의 방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일련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하게 되었다.
 @p40
  19세기 말엽 인도 내부가 동요하고 있을 무렵에, 러시아와 프랑스의 세력이 점차 인도를
엿보게 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인도의 국경확대 정책을 또다시 채택하였다. 그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의 내정에 간섭하여 제 3차 아프간 전쟁 (1878-80)을 일으키고, 파미르 고원에
진출하여 러시아군과 충돌하고(1891-95), 버마에 도전하여 제 3차 버마 전쟁을
일으키고(1885-90), 태국의 영토를 다투어 프랑스와 대립하였다(1893-1902).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으로 되고, 파미르 고원은 분할되고, 버마는 인도제국령에
편입되고, 태국은 불령 인도차이나와의 완충국으로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국경확대정책은
인도를 기지로 하여 인도인의 부담에 의해서 감행되었다. 동시에 영국은 인도양과 인도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집트 및 수단(1882-83), 소마릴랜드(1884), 케냐(1888), 잔지바르(1891),
말라야(1874-1909) 등을 차례차례로 침략했다. 그 결과 인도양은 영국의 내해로 화했지만, 이런
정복도 모두 인도 정부의 감독하에 인도인의 부담에 의해서 단행되었다.
  그리고 인도를 안으로 더 확고하게 장악하려는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20세기의 초대
총독 카존 경(1899-1905재임)의 시대에 가장 노골적으로 강행되었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광산법을 개정하여 인도의 광물자원을 영국 자본에 개방하고, 루피 화를 파운드 화에
결부시켜 영국자본의 도입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어 군사, 경찰 기구를 확충하고,
검열제도를 편데다가 캘커타 시회를 해산하고, 인도 관리를 추방하고, 교육의 문호를 좁힌
이외에도 직접세를 인상하고 간접세를 증수하고, 공채를 남발하고, 기근을 역이용하여
임금을 인하하고, 공공사업비를 삭감하고, 토지의 수탈을 공인하는 등 난폭한 행동으로
나왔다. 또한 밖으로는 반란을 일으킨 서북 국경의 바탄 족을 잔인하게 토벌하고(1903),
티베트에 침입하여 달라이 라마에게 일방적인 조약을 강요하였다(1904).
  카존의 이와 같은 제국주의 정책은 자연 인도 민족의 반발을 샀지만, 그런 반영감정을
비등점에 까지 끓어오르게 한 것은 벵골의 분할 계획이었다. 1905년 카존은 힌두교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지조를 증수하기 위하여 벵골 주의 분할 계획을 세웠다. 즉 동부 벵골과
아삼을 서부 벵골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정부는 전자의 지역의 영구 자민다리제를 잠정제로 바꾸어
세입의 증가를 꾀하는 동시에 동부 벵골에 많이 사는 회교도 농민을 힌두 지주로부터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두 교도 사이의 이간을 꾀으로써 힌두교도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이에 이 해
8월에는 캘커타에서 분할 반대의 반영집회가 열리고 10만의 민중을 모아 영국 상품의 보이코트를
선언했지만,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0월에는 분할령이 공포되고 말았다. 때마침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와 1905년의 러시아혁명에 크게 자극받아 이 분할반대운동은 영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p41
  이때 사용된 주요 대항 수단은 영국 화폐 보이코트였다. 이는 인도 민족자본가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회의파도 1905년의 대회에서 이 보이코트를 지지하고, 이어 1906년의
대회에서는 보이코트 이외에 스와라지 (자치), 스와데시 (국산품 애용), 국민교육 진흥이라는
4대 목표를 내세우고 적극적으로 반영운동의 지도에 나섰다. 그러나 이 운동이 노동자,
농민도 사로잡아 급진적 성격을 띠게 되자, 민토 총독의 통치법 개정의 약속을 에워싸고
회의파는 스와라지를 영 제국내에서 자치령으로서의 지위 획득이라고 해석하는 온건파와
완전독립이라고 이해하는 급진파로 분열되었다. 이 두 파는 드디어 1907년의
회의파대회에서 충돌했다. 고칼레를 지도자로 하는 다수파인 온건파는 반영운동을 중지하고
합헌적인 방법으로 제국내에서의 자치를 획득하기로 목표를 바꾸었다.(*) 이에 급진파는
회의파에서 탈퇴하여 많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개인적 테러 행위에 호소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으나, 정부의 가혹한 탄압 아래 1908년을 고비로 하여 그 테러 행위도
1911년에는 종식되고 말았다.
  * : 대회출석자 1, 600명 중 900명이 별도로 회합해서 (회장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나
회의를 진행시킬 수 없었으므로) 온건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네루는 표면상으로는
온건파가 승리를 거둔 듯하나, 그 승리는 조직에 의한 통제와 당시의 회의파의 극히 제한된
선거자격의 덕택으로 얻어진 것이며,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도인의 대다수는
급진파에 동조하고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Discovery, p.306).
 @p42
  이 시기의 반영운동의 특징은 자본가와 지식층에 의한 조직적인 지도가 개시되었다는 점과
노동자도 정치투쟁에 참가했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그들 자신의 확고한 조직은 갖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정치적 파업(*)을 단행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했는데, 이들
노동자와 농민의 지도는 주로 급진파가 담당했다. 틸라크를 지도자로 하는 급진파는 소시민
지식층을 기반으로 하는 국수주의자였다. 틸라크는 일찍이 1896년의 회의파대회에서
"회의파여, 좀더 용기를 가지라"고 외치던 대담하고 공격적인 새로운 형의 지도자였다. 그는
또한 탁월한 베다학자로 고대 인도의 풍습에 열렬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틸라크를 지도자로 하는 급진파는 배외적인 애국심을 일반 대중에게 고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 1906년에는 동 벵골 철도의 노동자가 분할반대의 파업을 단행했고, 1907년에는
펀잡의 농민이 증세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펀잡 철도국의 노동자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수송을 거부하는 파업을, 이어 1908년에는 틸라크의 투옥항의 파업을
단행했다.
  이에 비하면, 온건파는 지식인이나 직능대표자로서의 엘리트의식이 비교적 강했고, 그
대표자 고칼레는 낡은 형의 지도자로서 "총독에는 민중의 요망을 전하고, 회의파에게는
정부의 난처한 입장을 설명하는"역할을 담당했다. 고칼레는 정부와 협조하면서 현존제도를
개량하려 했고, 틸라크는 정부와 싸우면서 현 제도를 새로 만들려고 했다. 이처럼
투쟁방식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은 다 같이 일평생을 조국에 바친 제
1급의 애국자였다. 그러나 고칼레를 중심으로 하던 온건파는 대중과 직결되지 못했고,
틸라크를 중심으로 하던 급진파는 지나치게 국수주의를 앙양하는 데 그쳐, 민중의
조직화라는 근대적 정치운동의 원칙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인도의 민족운동은 이 벵골 분할 반대투쟁을 통해서 크게 성장했다.
 @p43
  그간 정부는 틸라크를 비롯한 수십 명의 급진파 지도자를 체포하여 반영운동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분할통치의 원칙을 적용하여 인도인의 상층, 특히
자본가계급을 회유했다. #1 1909년의 몰레이-민토개혁. 총독의 연정참사회에 인도인 대표를
참여케 하고, 중앙 및 지방의 입법참사회의 민선의원을 증원했다. 그러나 유권자의 수는
아직도 전인도 인구 3억 중에서 수천 명에 불과했다. #2 1911년의 델리 천도와 벵골 분할법
폐지. #3 카존경 시대에 금지된 주산업부의 설치 허가.
  이 때문에 온건파만 남은 회의파는 현저하게 정부에 협조적으로 되었다. 한편 영국은
이번의 반영운동을 계기로 분할통치 정책의 하나로 회교도 옹호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회교도들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중산계급(*)이 성장해 있지 못했기 때문에,
19세기 말부터 인도 민족운동은 주로 힌두교도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은 세포이의 반란 후의 대회교도정책, 즉 이 반란이 무갈제국의 부활을 직접
목표로 삼았으므로 힌두교도보다도 회교도를 더 가혹하게 탄압하던 정책을 버리고,
1870년대부터는 점차 회교도를 옹호하는 방향을 취해 왔지만, 특히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회교도를 옹호하기로 했다.
  * : 회교도들은 일반적으로 극히 보수적이며 반영적이어서 오랫동안 영어교육을
기피한데다가, 봉건적인 사고방식과 고리대금 이자에 대한 회교의 금령 때문에 상공업에도
거의 종사하지 않았다. 더구나 세포이의 반란 후 회교도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힌두교도에
대해서 보다도 더 강경하고 주도하여, 특히 회교도간에 중산계급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던 것이 1870년대에는 대회교도정책이 서서히 변하여 보다 호의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는 물론 영국의 분할통치정책 내지 균형정책 때문이었지만, 이
전환과정에는 역시 서 사이드 아흐마드 한의 역할도 컸었다. 그는 회교도의 지위향상은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회교도간에 영어교육을 받아들이도록
하여 그들을 보수적 구각에서 탈각시키려고 무척 애썼다.
 @p44
  그 결과 우선 1906년 말에는 대귀족 아가 한을 지도자로 하는 회교도연맹을 결성케
했는데, 이 연맹은 회의파와는 달라서 종파의 이익을 내세우고 있었고, 그 주요 구성원은
회교도 지주와 자본가였다. 그런데 대다수의 회교도는 가난한 사람들이며, 또한 회교도의
자본가는 그 수가 적었으므로, 이 연맹내에서의 지주세력은 회의파보다도 훨씬 강하여, 이
점이 이 연맹의 대영협조주의의 한 원인으로 되었다. 그리고 상술한 몰레이-민토
개혁에서는 입법참사회 대표 선출의 선거자격의 제한에서 회교도는 현저하게 우대하였을 뿐
아니라, 회교도들에게만 별개의 의석수가 부여되어 종파적 선거제의 기원으로 되었다. 이런
선거제의 도입은 회교도연맹의 창설보다도 인도의 장래 발전에 더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도 국민 사이의 통일과 융합의 과정을 역전 시켜, 점차
사회생활의 전 구조에 어처구니없는 분열을 일으키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델리 천도도,
힌두교도가 많은 캘커타에서 회교도가 많은 델리로 옮겨진 것이었다. 요컨대 영국은 이런
정책으로 회교도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힌두교와의 대립의식을 앙양시켰다.
  4) 1 차대전과 고양기를 앞둔 민족운동
  벵골 분할 반대투쟁에 뒤이은 반영운동은 회유와 탄압으로 일단 진압되었다 하더라도
1차대전 때의 인도는 끝내 평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초기에는 네루의 말처럼
"정국의 움직임은 저조했으나"(Discovery, p.309) 말기에 접어들면서 민중의 정치의식은
점차 고조되어갔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국민의회파와 회교도연맹을 비롯한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은
영국의 전쟁수행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그것은 '제국의 위기'에 처하여 적극
협력해두면, 불원간 영국과 대등한 지위가 부여되리라는 선의의 기대 때문이었다.
 @p45
  그래서 대전 발발과 동시에 30만의 인도병이 유럽 전선에 파견되고, 그후 80만의 군인과
40만의 군노무자가 아프리카와 중근동지방에 투입 된데다가 전시공채의 인수 등에 의한
군사비 원조도 3억 파운드를 넘었다. 또한 인도는 영국의 중요한 군수품 공급기지로 되어
무기, 탄약 등의 생산에도 응했다. 물론 이렇게 전면적으로 협력한 것은 앞에서 말한 선의의
기대 때문만이 아니라 온건, 급진 양파로의 회의파의 분열로 인한 민족운동의 중추세력의
약화와 전시입법에 의한 강요 탓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시중 인도의 공업은 크게
발달하였다. 군사상의 필요에서 공업에 대한 압박이 완화되어 인도자본에 의한 면공업,
주트공업, 철강공업 등이 발달했지만, 특히 면공업은 현저한 약진을 보였다.
  한편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물가의 앙등, 해외시장의 상실, 가격의 통제 등으로 민생고가
심해 진데다가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선전도 있고 하여 점차 반영풍조가 높아갔다.
  미국에 기지를 둔 인도혁명 당은 호기가 도래했다고 보고, 독일과 결탁하여 인도에 잠입,
각처에서 무력반란을 시도하였다. 범이슬람주의의 영향을 받아오던 회교도들은 영국이
그들이 존중하던 터키의 킬라파(회교 교주로서의 터키 왕의 칭호)와 적대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동요하여, 그들 안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나 해방세력이 강화되었으며, 특히 새로
발흥한 중산계급은 점점 민족주의적 경향을 짙게 띠어갔다. 더구나 1915년의 인도 방위법의
공포 등에 의한 전시체제의 강화는 민족감정을 크게 자극했는데, 펀잡 지방의 반영
테러리즘의 격발은 그 첨예한 표시였다. 이에 영국은 자본가에게 대량의 군수품 발주와
약간의 보호관세의 설정을 통해서 그들을 포섭하려고 했으나 그 결과 실력과 자신을 갖게
된 인도의 자본가는 국내시장을 스스로 확보하고자, 이 불온한 상태를 자치권확대를 위해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1916년에는 두 개의 자치연맹, 즉 하나는 틸라크를, 다른
하나는 영국인이면서도 인도의 자치를 위해 싸우던 안니 베산트 여사를 중심으로 하는
자치연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p46
  이러한 정세하에 이 해 말에는 회의파와 회교도연맹이 라크노에서 동시에 대회를 열고,
베산트 여사의 자치계획안에 의거하는 '자치정부안'을 공동으로 채택하고, 그 실현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또한 이때 회의파대회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
틸라크(1914년 6월, 6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었다)도 회의파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렇듯 전국민이 '자치의 획득'이라는 단일한 목표로 결집되는 것을 보자, 영국은, 인도의
전시협력을 확보하고 또한 불온한 공기에 안전판을 마련하려는 의도하에서 1917년에는
'인도에서의 자치를 점차 확대하여 영제국내에서 자치령의 지위로 점진시킨다'는 몬타규
성명을 냈다. 그 후 인도 군무상인 몬타규는 직접 인도를 방문하고, 첼므스포드 총독과
더불어 1918년 6월 [인도 헌법 개혁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에 의거하여 1919년에는
새로운 인도 통치안이 제정되어, 1920년부터 실시하기로 되었다. 이것이 곧
몬타규-첼므스포드 개혁인데, 이 개혁은 지방자치를 목표로 하고, 이른바 '양두정치 '
(diarchy)를 도입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도 통치의 여러 기능을 중앙과 지방(주)으로 나누어
지금까지 중앙정부가 관장하던 행정사항 중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항, 이를테면 치안관계,
교육, 보건 등을 주정부에 이관하나, 중앙정치에는 인도인이 참여할 여지가 없고,
지방자치에는 인도인이 참여한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지사와 총독이 전권을 장악하는
제도에 불과했다.
  이 개혁의 보고서가 발표되었을 때, 그것은 일반 대중의 여론과는 물론이요, 회의파와
회교도연맹의 견해와도 거리가 먼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보고에 대한 회의파의 태도를
협의하려고 1918년 8훨(29일-9월 1일) 봄베이에서 임시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회의파와 회교도연맹의 '자치정부안'을 재확인하고, 중앙과 지방에 동시에 참된 책임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성명했다.
  한편 대전도 마지막 고비에 접어들자, 일반 대중은 전시생활의 압박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전선에서의 인도병의 회생과 그들에 대한 차별대우의 사실 등도 점차 명백해 짐에 따라 그
정치적 의식이 고양되어갔다.
 @p47
  따라서 그들은 5년 내지 늦어도 10년 안에는 자치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베산트 여사의
주장도 이제는 너무나 점진론이라고 물리칠 정도였으니 몬타규-첼므스포드의 개혁안에는
분격을 금치 못했다.
  1918년 11월 11일 1차대전은 끝났다. 몬타규 성명은, 요컨대 전시 비상사태하에서 인도인의
저항을 가능한 한 무마하려는 전술적 배려에서 나온 것에 불과했으므로, 그 약속이행은
몬타규-겔므스포드 개혁 정도로 그치고, 영국은 종전과 더불어 급격한 역공세로 나왔다. 즉
정부는 점점 불온해지는 인도 안의 분위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1919년 3월 전시 비상입법의
연장으로서의 를라트법을 공포하고 이어 4월에는 아무리차르시의 잘리안왈라 공원에서
를라트법에 반대하는 평화적인 군중집회에 발포하여 대량학살을 감행하고는 펀잡 주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러한 강압정책하에서 인도 민중은 절망상태에 빠졌다 함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그대로이다. 그들은 너무나 큰 실망 속에서 기진맥진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눈으로 볼 때 그렇지, 긴 눈으로 보면 점차 높아가던 인도 민족운동의
물결이 재차의 고양을 앞두고 잠시 가라앉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서 조직하고 지도한 독자적인 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인도에 돌아와,
앞으로의 투쟁을 위한 준비를 갖추고 마침내 1919년 롤라트법 반대투쟁을 계기로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전국적인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때는 이미 인도의
중산계급이 회의파에 속하건 회교도연맹에 속하건 또는 온건파에 속하건 급진파에 속하건
한결같이 자치의 획득이라는 단일한 목표 아래 결집하고 있었다. 하기는 그들이 대중 특히
인도 민중의 최대 다수인 농민층을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동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인도의
현실과 밀착해 있던 간디의 등장을 계기로 회의파는 대중정당으로 되는 동시에 종래의
논의를 일삼던 당에서 실천과 행동의 당으로 변해갔다. 간디가 민족운동을 지도한 독특한
방식은 사티아, 아힌사라는 특이한 사상에 입각하는 비폭력, 불복종, 비협력운동이었다. 그러면
간디의 그러한 사상은 과연 무엇이며 그런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p49
    제 2장 간디의 반생
  간디는 철두철미한 실천적인 인간이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인도인의 복지향상을 위해
그는 한시라도 실천활동을 그만둔 일이 없었다. 그와 같은 실천활동은 간디가 진리 내지
사랑 (또는 비폭력)의 법이라고 부르던 도덕률에 일관해서 의거하였고, 그런 도덕률은 그의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간디는 "본질적으로 종교인"(Discovery, p.315)이며 그의 "인생철학의 핵심은 종교"(S. Abid
Husain, The Way of Gandhi and Nehru.앞으로는 Husain으로 약기함. p.1)였다. 그러나
그의 종교는 인습적이거나 전통적인 것은 아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개인적
탐구와 직접적인 정신적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즉 고는 종교적 유산을 전해오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이성과 실천으로 검증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신적,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서 재해석하였다. 그 결과 그는 "종교의 본질은 도덕"(Mohandas K.Gandhi,
An Autobiography : The Story of My Experiment with Truth. 앞으로는 Autobiography로
약기함. p. 13)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간디에게서는 종교와 도덕은 서로 방향을 달리 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그의 실천활동을 밑받침해주고 있는 만큼, 그는 개인이나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언제나
종교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실제로는 "간디주의의 진수는 진리와 비폭력이라는 윤리적
원리(곧 도덕률)를 사회의 일상문제에 적용시키는 데에 있다"고 논해지는 것이다.
 @p50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여 그의 윤리적 원리 즉 종교적 및 도덕적 이념은 무엇이며
그러한 이념에서 나온 사회적 이상은 무엇일까? 그런 이념과 이상은 그가 "진리와 함께 한
나의 실험"이라고 부른 그의 생애를 통해서 성장, 발전하였다. 따라서 먼저 그의 생애를
훑어봐야 하지만, 그 기본적인 윤곽은 남아프리카 시절까지에는 대체로 확정되고 있으므로
우선 그의 반생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 학창시절
  1) 평범한 소년
  모한다스 카라므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현 구자라트 주의 카티아와르 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해안도시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카라므찬드 간디는
상처를 거듭하여 네 번 결혼했는데, 그 네 번째의 처인 파틀리바이와의 사이의 3남 1녀 중
간디는 그 막내동이였다.
  간디가 태어난 시기는 대체로 세포이의 반란(1857)과 국민회의파의 창립 (1885)과의
중간이며, 인도에서도 점차 새로운 중산계급이 발생하여 그들에 의한 종교적, 사회적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정치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하려는 무렵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방으로
말하면, 당시 카티아와르 번왕국은 수많은 소면왕국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런 나라들은
영국인 앞에서는 굽실거리면서도, 자기 백성들에게는 마치 전제군주와도 같이 대하던
번왕(raja 또는 rana)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포르반다르도 그런 나라들
중의 하나로 그 인구는 1872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7만 2, 077명(Louis Fischer,
Gandhi: His Life and Message for the World. 앞으로는 Fischer로 약기함. p.9)에 불과한
조그마한 나라였다. 원래 괴티아와르인들은 발랄하고 예기에 찬 활동적인 사람들로 가끔
내란도 일으키곤 했지만, 실제적이며 상재가 있어서 일찍부터 여러 외국과 통상을 하여
이름을 떨친 기업심 있는 상인 계급인 마르와리를 낳았고, 또 인도 자본에 의한 근대공업이
최초로 발달한 유일한 곳이 이 구자라트 지방이었다. 이렇게 보면 카티아와르 반도가 근대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간디를 낳은 것은 그저 우연으로만 돌릴 수도 없을 듯하다.
  다음에 간디의 가문을 보면, 간디가는 인도의 카스트상으로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다음가는
바이샤의 일종 바니아에 속해 있었다. 말하자면 상인계급이며, '간디'라는 말은 힌디어로
'곡물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간디 가에서는 간디의 조부도, 부친도, 숙부도
포르반다르 번왕국의 수상(diwan)을 지냈다.
  조부는 몹시 절조가 굳은 사람이어서, 그가 음모에 걸려 포르반다르의 수상 자리를 쫓겨나
주나가드 번왕국에 망명했을 때, 그는 그곳의 번왕(nawab)에게, 왼손으로 인사를 했다. 그
무례함을 따졌을 때, 그는 "오른손은 이미 포르반다르에 바치고 있다" (Autobiography,
p.3)고 말했다고 한다. 부친은 정력적이며 호탕한 기질의 사람이어서, 금전에는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아 거의 모든 재산을 자선사업에 바치고, 가족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양친이 모두 힌두교의 일파인 바이슈나바파에 귀의하고 있었지만, 특히 모친은
경건한 신자여서 종규에 따라 단식을 지키며 시물을 바치고 환자를 돌보았다.
  이와 같이 간디는 인도 중산계급의 대두라는 역사적인 물결을 배후에 가지며, 종교적,
사회적 개혁이라는 형태를 취한 새로운 종교적 각성을 앞에 두고, 모친으로부터 는 경건한
신앙심을, 양친이 귀의하고 있던 바 이슈나바파로부터는 특히 아힌사(*)의 정신을,
부친으로부터 는 재물에 대한 무욕을, (**) 조부로부터는 고결한 성품을, 그리고 바니아
계급인 간디가로부터는 실천적, 활동적 성격을 이어받고 태어났다.
 @p52
  * : 아힌사(ahimsa, 불상해, 비폭력). 인도 종교의 최고의 계율의 하나로, 특히 자이나교,
불교, 그러고 이 바이슈나바파의 힌두교가 이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 아힌사는 간디의
기본사상의 하나이다.
 **: 간디의 기본사상의 하나인 '비소유'(aparigraha)는 이런 부친의 성품으로부터
영향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년시절의 간디는 몹시 수줍어하고, 외모나 재능에서 다른 소년들과 구분
지을만한 이렇다 할 특질도 나타낸 바 없으므로 후년의 그의 위대성의 약속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양친에 대한효심과 의무에의 헌신,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씨와 타인의
결점을 꼬집기를 싫어하는 성품은 젊은 학생시절에도 뚜렷했다. 우리는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숱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위와 같은 그의 성품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7살 때
부친이 라지코트 번왕국의 법관이 되었으므로 그곳에 가서 곧 소학교에 들어가 12살 때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7살 때에는 바브나가르에 있는 사말다스대학에 입학했으며, 한편
같은 나이의 카스투르바이와 7살 때 약혼하고, 고등학교시절인 13살 때에 결혼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몹시 수줍음을 타 학우들과 어울리질 않고, "누가 나를 놀려 대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수업만 마치면 곧장 집에 달려오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맹목의
양친을 인도하며 순례하는 [효자 슈라바나]의 희곡을 읽고, 또 그 연극을 보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 자기도 그러한 효자가 되려고 마음 먹고, 병석에 누워 있는 부친을 간호하기
위해서 방과 후의 체육을 싫어했고, 또한 영국 유학의 길을 떠날 때 술과 고기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모친과의 약속을 끝내 지켰다.
  고등학교 시절 육식은 종교상으로 엄금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구미에도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식을 하면 마음이 대담해지고 몸이 강해져서 능히 영국인을 몰아내고 인도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어린 마음에서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는 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으로
심히 고민하면서도, 애국자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일시나마 남몰래 한 친구와 더불어 육식을
했다.
 @p53
  그리고 이러한 의무감은 새로운 고등교육을 받고자 외국유학을 금하는 자기 카스트로부터
추방까지 당하면서도 영국 유학의 길을 떠나게 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소, 고등학교 시절에 선생이나 학우에게 거짓말을 한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어느 시험 때는 감독선생이 옆학생의 답안을 보고 베끼라고 넌지시 종용했으나,
컨닝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형한테서 꾼 돈을 갚을 길이 없어 형의
금팔찌를 조금깎아 팔아 빛을 갚고는 고민 끝에 부친에게 이를 고백하고 병석의 노부가
분노와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지켜보는 엄한 시련을 겪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끝으로 악우(육식을 같이 하던 그 친구)와 가까이하지 말라는 가족들의 충고를 물리치고,
그의 단점을 시정해주기 위하여 접촉을 계속했고, 또한 컨닝을 종용하던 그 선생은 점차
여러 단점이 눈에 띄었지만, 그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그대로 가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젊은 학생 시절의 그의 언동에서 효심, 의무감, 성실성, 관용의 성품을
찾아볼 수 있으나, 당시에는 누구도 이런 성품에서 그의 장래의 운명을 예측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심령 속에 깊숙이 깃들어 있던 이러한 성품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내용과 범위는 확충 되어갔다. 즉 양친에 대한 효심은 조국 인도에 대한 충성으로 되었고,
의무에의 헌신은 인류에의 봉사에 대한 일관된 헌신으로 되었으며,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씨는 평생을 통한 진리의 탐구로 되었고, 타인의 결점을 꼬집기 싫어하는 성품은 적에
대한 관용과 공정한 태도로 되었다. 맹목의 양친을 인도하며 순례하는 슈라바나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소년 간디는, 성장하여 맹목의 인도 국민을 이끌고 자유를 위한 순례에
나서게 되었다.
 @p54
  2) 마음의 창문이 열리다
  1888년 9월 4일, 그러니까 만 18살 때 간디는 처자를 고국에 두고 단신 봄베이를 떠나 영국에
유학했다. 그때만 왜도 인도에서 영국에 유학하는 데는 공사간에 까다로운 일이 많아 앞서 말한
대로, 모친에게는 육식과 주색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자기 카스트로부터는 추방을
당하고 나서야 유학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런던에 도착한 간디는 얼마 동안 마음이 들떠, 영국식 신사가 되려고, 값진 양복을 마구
맞추어 입고, 댄스와 웅변과 바이얼린을 배운다고 야단하면서 시간과 돈을 낭비했으나, 얼마
안 가서 마음이 가라앉아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면학에 힘썼다. 그는 변호사의 자격을
얻으려고 런던의 이너 템플 법학원에 다녔지만, 3년간에 걸친 이 영국유학은 간디로 하여금
마음의 창문을 열게 하여 그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실로 후년의 간디를 형성하는 그 기초적인 부분이 여기서 얻어졌는데, 사실 그는 영국에서
인도적인 요소, 유럽적인 요소, 인류적인 요소를 스스로 몸에 지니게 되었다.
  우선 그는 새로운 종교적인 접촉을 통하여 접신론자, 기독교인, 무신론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접신론자들은 그에게 인도의 정신적 유산의 가치를 드러내주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런던에서 [바가바드 기타](*)를 독신인 두 접신른자 형제와 더불어
산스크리트어의 원문과 에드윈 아놀드의 번역판(Thesong Celestial)을 대조해 가면서
읽었는데, 기타]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여한 그들 형제의 권유로 에드윈 아놀드의
[아시아의 빛](불타의 전기)을 읽고, 그는 [바가바드 기타] 이상의 흥미를 느꼈다. 이 두 권
이외에도 불라바트스키 부인의 [접신론입문]을 읽고, 이에 자극되어 힌두교에 관한 서적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 : [바가바드 기타] (Bhagavad Gita)는 성범가라고 번역된다. 전투에 임한 왕자
아르주나의 정신적 고뇌를 비시느의 화신 크러슈나가 풀어 준다는 형식으로, 전심전의 신을
믿도록 강조하고 있다. 인도의 2대 서사시 중의 하나인 [마하바라타]의 일부인데, 그것은
독립되어 있어서 그것만으로 완결된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간디에게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34살 였을 무렵, 파탈잘리의[요가 수트라]와 [바가바드
기타]를 같은 그룹의 친구들과 읽기 시작하고 준다. 특히 [기타]는 산스크리트 원문을
읽으려고 애쓰면서 매일 아침, 세면(15분)과 목욕(20분)에 드는 35분의 시간을 이용하여,
맞은편 벽에 매일 [기타]의 1, 2절을 써 붙이고 그것을 계속 암송했다. [기타]는 그에게는
"절대로 틀림없는 행위의 향도자"이며 일상적인 사건에 관한 "나의 사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령 영어 단어를 모를 때 사전을 찾듯이, 온갖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행위의 사전"에 의거했다고 한다(Autobiography, pp.264-65). 그러니까 런던에서는 [기타]를
읽었을 뿐 아직 연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같은 책, p. 67).
 @p55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원래 그는 라지코트에서의
학생시절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힌두교와 그 신들에 마구 욕설을 퍼붓곤 한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런던에서 만난 한 선량한 기독교
신자의 권유에 못 이겨 성서를 읽어보게 되었다. 구약에는 좀처럼 흥미를 가질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또 신약에 나오는 '산상수훈'특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는 구절은 직통으로 자기
마음에 들어왔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간디에게는 '인도의 마음'이 있었으므로, 샤말
바트의 "한 사발의 물에는 좋은 식사로 갚아라"를 상기하였다. 그래서 그는 젊은 마음에서
[바가바드 기타]와 불타, 그리고 산상수훈으로 표시된 그리스도, 이 3자의 가르침을
조화시키려고 하였는데, 우리는 이에서 종교적 진리에 대한 그의 탐구의 첫 모습을 볼 수
있다.
  간디는 무신론에 관한 책도 몇 권 읽었지만, 그들의 견해는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영국에서 무신론의 전형적 대표자요, 급진적 정치가이며, 인도의
우인이었던 잔스브라들로는 크게 존경하게 되었다.
 @p56
  그 이유는 브라들로가 성실한 목적의식과 뜨거운 인류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들로와 같은 무신론자에게는, 진리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신이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Husain, pp.2-3)는 것이 간디의 견해였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확고하게 뿌리 박은 "도덕은 만사의 기초이며, 진리는 모든 도덕의 실질이다"
(Autobiography, p.34)라는 확신은 이 경험으로 더욱 성장하여 그 후 30년간에 걸쳐서
'진리는 신'이라는 그의 도덕종교로 발전했다.
  또한 간디는 칼라일의 [영웅과 영웅숭배]중의 '예언자로서의 영웅'을 읽고, 마호메트의
위대성과 용감성 그리고 근엄한 생활에서 배운 바가 많아 후에 남아프리카에서 코란을 읽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간디는 모친과의 서약을 지키는 이외에 '경제와 위생 '의 관점에서 처음에는
채식주의에 들어갔으나, 솔트의 [채식주의의 변]을 읽고 나서 부터는 자진해서 채식주의자로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보급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게 되었다. 앞서 육식을 '애국자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일시나마 해본 일이 있다고 말했거니와, 그런 생각의 배후에는
개혁자적 기질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무신론자 브라들로를 존경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도 그 이면에는 브라들로의 진보적 사상에 공명한 점도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왜냐하면 간디는 1889년의 런던 항만 파업때, 나라만 헤므찬드라라는 그의 인도인
친구와 함께 마닝 추기경을 방문하여, 추기경이 파업을 도와준 데 대해 축사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급진적인 사상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가 유학하던 당시의
영국에서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사회주의의 물결이 팽배하게 대두하고 있었다. 즉
1887년에는 독립노동당이 창립되었는가 하면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 1권이 같은 해에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1889년에는 [페비안 논문집]이 나왔다. 또한 당시에는 다원의
진화론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잡지에 연재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간디는 그의 개혁자적 기질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인 정치운동에 대해서보다는
채식주의 운동에 더 마음이 끌렸다.
 @p57
  간디는 영국 유학 시절에도 수줍어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여, 남 앞 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여서 앞으로 변호사가 될 일이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인도를 떠날때 소개장을
받아간 다다브하이 나오로지를 방문하여 조언을 들으라는 우인의 권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나오로지는 국민회의파의 온건파에 속하며, 후 (1906)에 회의파 의장도 지냈지만, 당시
런던에서 인도인 학생들과 한 단체를 조직하여 그 뒤를 돌봐주고 있었으므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간디는 그 모임에는 자주 참석했으나 끝내 개인적인 상담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수파이긴 해도 친절하게 인도인 학생들을 돌봐주던 영국인 프레드릭
핀카트에게는 찾아가 상의했다. "보통 정도의 정직과 근면만 있으면 살아나가는 데
충분하다"는 핀카트의 말을 듣고 안심은 했으나, "군은 변호사에게는 필요불가결한 세상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인도의 역사조차 읽고 있지 않다. 변호사는 인간성을 알아야
한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어야 한다" (Autobiography, p.82)는 충고를
받고, 핀카트가 추천한 관상학의 책을 사 읽기도 했다. 우리는 이 점에서 간디의 실제적인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특히 금전문제에는 엄격하여 사소한 지출까지 일일이
출납부에 기입하곤 했는데, 이런 습관이 후일 방대한 공금을 다를 때에도 빈틈없이 할 수
있게 했다.
  이상에서 간디의 영국 유학 시절을 대강 훑어봤다. 우리는 후일의 간디의 성격과 사상의
싹을 이 영국 생활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변호사의 자격을 얻고 1891년 6월 12일,
인도를 향해 영국을 떠났다.
    2. 남아프리카 시절
  1) 생애를 전환시킨 두 충격
  1891년 7월 인도에 돌아온 간디는 라지 코트에서 봄베이로 나와 변호사 개업을 했으나
타고난 수줍음과 꼼꼼한 성격 때문에 변호사업이 시원치 못했다. 그러나 귀국하던 길에
봄베이에서 알게 된 젊은 보석상이요 시인이며 종교가인 레이찬드브하이와는 교우를
지속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p58
  간디는 자서전에서 "현대의 인물 중 세 사람이 나의 생애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즉,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레이찬드브하이, [신의 나라는 그대의 마음
안에 있다]는 책을 통해서 톨스토이, 그리고 띠 마지막 자에게도]를 통해서 러스킨이
그러하다"(Autobiography, p.90)고 쓰고 있다. 봄베이에서는 경비만 많이 들 뿐 변호사의
일을 제대로 얻을 수가 없었으므로, 라지 코트로 다시 돌아가 형의 협력을 얻어 일종의
법률대서 같은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일은 수입이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그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벌어졌다. 그의 형은, 포르반다르의 전 번왕이 태자로 있을 때
그 비서인 동시에 고문이었다. 그 당시에 그릇된 진언을 했다는 혐의로 새삼스레
고소당하여 그 사건의 처리가 형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그곳의 영국인 주재관에게로
넘어가 버렸다. 간디는 형의 간청으로 마음내키지 않으나마 자기가 런던에서 지면이 있는
그 주재관에게 부탁하러 찾아갔으나, 주재관은 간디의 청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하인을
시켜 간디를 사무실에서 내쫓고 말았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 분한 나머지 그 영국인을
고소하려고 했다. 때마침 인도 유수의 변호사인 페로제샤 메타가 우연히 라지 코트에
왔다가 영국인을 고소해 봤자 자기 신세만 망칠 뿐이니 무모한 짓을 하지 말고 세상을 좀더
알아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이 충고를 전해 듣고, "마치 독배를 드는 듯이 괴로웠다"
(Autobiography, p.99)고 간디는 술회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충격은 간디의
인생행로를 전적으로 바꾸게 했다. 라지 코트에서 개업을 계속한다면, 자연 간디의 사건은
대부분 그 주재관의 법정에서 처리해야 하는데, 간디는 그와 화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의
은고를 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더구나 일단 고소한다고 해놓고 가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있던 중에, 여러 소국들로 이루어져 있는 카티아와르국에서는 소소한 음
모와 책략이 부단히 행해지고 있음을 알게 되자 그 분위기가 싫어져서 간디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떠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러던차에, 형의 지인이며 남아프리카에서
크게 사업을 벌이고 있던 포르반다르 출신의 회교도 상사로부터 고문변호사로 와달라는
의뢰가 있었다. 간디는 처자를 두고 혼자서 남아프리카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p59
  1893년에 5월 간디는 나탈의 더반 항에 상륙했다. 이리해서 그의 생애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남아프리카 생활이 시작되었다. 거기서 그의 특이한 사상이 확립되고, 그런
사상에서 나온 독자적인 실천운동의 원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주로 나발에 약 7만 명의 인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대다수는
연기계약의 노동자 및 계약연기를 끝낸 자유노동자이고 나머지는 회교도 상인과 힌두교도
및 파르시 교도의 서기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수의 외국인의 유입은 백인 주민 사이에
외인배척 문제를 야기시켰다. 정부는 아시아인의 이주를 경원하고, 이미 그곳에 정주하고
있던 아시아인도 갖은 수단을 다하여 추방하려 하고 있었는데, 조직적인 박해가 인도인의
생활을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다.
  간디는 상륙 제1보에서부터 인도인의 참상을 목격해야 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비통한 체험을 겪어야만 했다. 위촉받은 소송 사건 때문에 더반에서 프레토리아로 가는
도중, 그는 다만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말할 수 없는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즉 어떤
정거장에서 그는, 유색인은 1등차실에 탈 수 없다고 하여 백인 차장한테 차 밖으로
내쫓기였던 것이다. 이 경험은 간디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다. 남아프리카라 하더라도
고지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등불도 없는 대합실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생각하였다. 권리를 주장하며 싸워야 하나? 인도로 돌아가야 하나? 이 모욕을
참고 프레토리아에 가서 맡은 일을 끝내고 인도로 돌아가야 하나? 의무를 저버리고 인도로
돌아가는 것은 비겁하다! 이런 생각 끝에 그가 받은 모욕은 결국 인종적 편견이라는
뿌리깊은 질환의 한 징후에 지나지 않으니, 온갖 고통을 참으면서 이 질병을 근절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보통사람이라면 개인적인 모욕감에 사로잡혀 당장에
복수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장차의 복수를 계획했을 터이지만, 간디는 개인의 경험을
보편화하는 종교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렇듯 자기가 겪은 개인적 모욕을 전인도인, 아니
전인류의 모욕으로 전환시켰다. 그것은 어떻든간에, 인도의 상류계층으로 태어나 영국 유학
시절에도 잘 대우받던 간디, 비록 고국의 영국인 주재관한테는 모욕당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토록 노골적인 수모는 처음이므로 그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후일 일생을 통해
가장 창조적이었던 경험이 무엇이냐는 존 R.모트 박사의 질문에 대하여, 간디는 특히 이
사건을 들어, 그것이 자기 마음 속에서 사티아그라하(진리 파악)의 이념이 싹트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대답했다 한다(Husain, p.3)
  그러나 실제로 그는 나머지 여로에서 역마차의 백인 차장한테 더 심한 모욕을 당한 끝에
구타까지 당했으나, 간이 뒤집히는 듯한 분노를 꾹 참고 여행을 계속하여 프레토리아에
도착했다.
  2) 귀중한 체험
  "1년간에 걸친 프레토리아 체재는 평생을 통한 가장 가치 있는 체험이었다. 여기서 나는
공공사업이라는 것을 배울 기회를 가졌고, 또한 그것에 대한 나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에 있는 종교정신이 생동하기 시작한 것도 여기서 였고, 변호사업의 참된
지식을 얻은 것도 여기서였다" (Autobiofraphy, p.131)고 간디는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시절을 통해서 간디는 종교적 진리를 계속 추구했다. 특히 이 프레토리아
체재시에는 많은 선량한 기독교인들과의 밀접한 접촉(기독교인들과의 접촉은 후에도
계속되었지만)으로 크게 자극받아 종교 서적을 읽는 데 몰두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산상수훈은 이미 런던 시절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바 있었거니와 이제는 선량한
기독교인들과의 교우로 기독교 자체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기독교의 신앙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 끝내 기독교
신자로는 될 수 없었다(*).
  * : 이런 이유 이외에도 예수가 신의 외아들이라든가 기독교의 신을 ale는 사람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든가 하는 등등은 그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신이 아들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모두 신의 아들이다. 만일 예수가 신과 같다든가 신 자신이라면,
모든 인간이 신과 같든가 신 자신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 죽음과 피로써 세계의
온갖 죄를 속죄했다는 것을 그의 이성은 문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게 했다. 또한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만이 영혼을 가지며, 다른 생물은 영혼이 없고, 죽으면 아주 없어지고 만다고
하지만 이것도 그의 신념과는 배치된다 등등. (Autobiography, p. 136)
 @p61
  그는 예수를 순교자, 회생의 구현자, 신성한 교사로서는 받아들이나 이 세상에 태어난
최고의 완전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십자가 위의 죽음은 위대한 시범이기는 하나,
그런 죽음 속에 그 어떤 신비로운, 또는 기적적인 효능이 깃들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요컨대 기독교는 완전한 또는 세계 최고의 종교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동시에 그는 힌두교도 결코 완전하거나 세계 최고의 종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불가촉천민(*)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또한 [베다]나 기타 힌두 경전이 신의
영감에서 나왔다고도 믿을 수 없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도 코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 :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은 최하층민(pariah) 또는 추방당한 자(outcast), 혹은
하리잔(harijan)이라고도 불린다. 카스트의 최하급 수드라보다도 더 낮은 신분으로, 전적으로
사람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이다. 그수는 5천만 내지 6천만이라고 한다.
  회교도 친구들의 권유로 그는 코란을 사 읽고 큰 감명을 받았으므로 다른 회교에 관한
서적도 구해 읽었다. 그는 종교상의 고민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레이찬드브하이에게 서신을
보냈더니, 좀더 참을성 있게 힌두교를 깊이 연구하라는 회답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그는
힌두교의 여러 경전과 서적들을 많이 읽게 되었다.
 @p62
  또한 그는 이 무렵에 톨스토이의 [신의 나라는 그대의 마음 안에 있다]는 책을 읽고 평생
잊지 못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이에서 간디의 종교적 관용과 구도자적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프레토리아 시절의 이와 같은 그의 종교적 태도는 그 후에도 줄곧
계속되었다.
  간디는 이처럼 종교적 탐구에 열중하는 한편, 프레토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인도인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하였다. 도착한 직후에 간디는 우선 인도인 집회를 열고, 상인(프레토리아에
있던 인도인은 주로 상인들이었다)도 상행위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점, 인도인은 주위에
있는 영국인들에 비해 불결하고 비위생적이니 이 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모든 인도인은 그 종교나 출신 지방의 구별을 넘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시간을 내어 희망자에게는 영어를 자진해서 가르쳤다. 그리고 첫 집회에서
성과를 거둔 간디는 거의 정기적으로 인도인의 집회를 열어, 상호간에 자유롭게 토의케
하고, 그들의 고정을 당국에 호소하여 그 시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집회를 통해서 그는
그곳에 있는 인도인은 모두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바르에 거주하는
인도인의 실정을 잘 파악하게 되었다.
  오렌지 자유국에서는 그 이름과는 달리, 인도인은 1888년의 특별법에 의해서 일체의
권리가 박탈당하고 있었다. 인도인 상인들은 명목상의 보상만으로 국외로 추방당했고, 남아
있는 이들은 대개 하인이었다. 트란스바르에서는 인도인에 대한 극히 가혹한 법이 1885년에
공포되었는데, 그 다음해인 1886년에 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인도인은 입국료로서
3파운드의 인두세를 지불해야 하는 반면에 인도인은 선거권을 갖지 못한데다가 기본권마저
무시되어 밤 아홉 시 이후에는 외출할 자유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인도인들과 널리 직접 접촉하여 그들의 실정을 아는 동시에 그들에게 봉사하려는 간디의
이런 성격이 결국 계약기한이 지난 후에도 계속 남아서 그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싸우게
했던 것이다. 간디는 종교적인 탐구와 인도인의 지위 향상이라는 공공사업에 시간을 내는
한편 위촉받은 소송사건을 위해서 진상 파악에 힘을 들였는데, 결국 그는 그 소송사건을
사적 중재의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p63
  원래 원고와 피고는 친척간인데다가 재판의 비용도 엄청나게 드므로 간디는 자진해서
조정의 수고를 다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그는 "변호사는 인간성의 보다좋은 면을 찾아내어
인간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가야 한다"는 점과, "변호사의 참된 직무는 두 분쟁 당사자를
결합시키는 데 있다" (Autobiography, p.134)는 사실을 배웠다. 그는 자기가 종사해온
20년간의 변호사 개업기간 중에 수백 건의 사건을 중재하는 데 그 시간의 대부분을
바쳤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단지 소송사건에서뿐 아니라, 정치투쟁에서도 그는 이 방법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3) 민족자존을 위한 투쟁
  이처럼 간디는 프레토리아에서 많은 귀중한 체험을 얻었거니와 의뢰받은 소송사건도
해결을 보았으므로, 그는 1894년에 더반으로 돌아와 막 귀국하려던 차에 때마침 '인도인
선거권문제'가 야기되었다. 이 문제는 인도인에게서 나탈 입법의원 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법안이 나탈 의회에 상정됨으로써 일어났다. 간디는 인도인 유지들한테서 그 대책을
부탁받고 1개월간 출발을 연기하기로 했다. "이리해서 신은 나의 남아프리카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고 민족자존을 위한 투쟁의 씨를 뿌렸다"(Autobiography, p.140)고 간디는 술회하고
있다. 이 1개월간의 체재 연기가 도중 두 차례의 짤막한 귀국을 제외하곤, 장장 20년간의
남아프리카 체재로 되고 말았다.
  인도인 선거권 옹호를 위해서 출발을 연기한 간디는 당장 활동을 개시 했다. 그런데 당시
간디는 나탈의 식민지 정부도 그가 영국에서 목격한 본국 정부처럼 법과 정의의 기본
원리를 존중하리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법적 경로를 밟으면서 투쟁을 시작했다. 즉 나탈
입법의원 의장과 나탈 정부의 수상에게 항의하는 전보를 치고, 각계 각층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입법의회에 보내는 청원서에 서명운동을 벌였다.
 @p64
  이에 모든 인도인은 그 종교나 출신지방, 신분이나 지위의 구별을 잊고 하나의 모국
인도의 아들이요 봉사자로 되었다. 따라서 영국 식민지상에게 보내는 다른 청원서에는 단
2주일간에 1만 명의 서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사본을 여러 신문사에 보냈더니, [타임스
오브 인디아]지는 사설에서 크게 격려하고, [런던 타임스]지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간디는 나탈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여러 인도인들의 간청도 있고 하여, 그는
남아서 이 운동을 지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공공활동자금에서 자기의 생활비를 빼내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 간디는 자기의 생계를 위해서 변호사 개업을 하는 한편, 청원서
제출에만 만족하질 않고 지속적인 운동을 하기 위하여 그 해 5월에는 나탈 인도인회의를
조직하였다. 그 사업비는 회비(1개월 5실링)와 독지가의 기부로 충당했는데, 특히 그 회계는
엄격히 하였다. "정착한 계정 없이는 진리를 본래의 순수성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
(Autobiography, p.140)는 것이 간디의 신념이었다.
  이 회의는 정기적인 회합을 통해서 회원을 훈련하고 또 그 산하에 '식민지 출생의 인도인
교육협회'를 조직하여 그들의 동포애를 함양하는 동시에 활발한 선전활동을 폈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은 많은 벗을 얻게 되고 또한 인도내의 모든 당파들로부터
적극적인 동정을 사게 되었다.
  이 회의는 비교적 많은 회비 때문에 계약노동자를 비롯한 가난한 인도인은 포섭할 수가
없어서 간디는 항상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루는 노예에 못지 않은 악조건 밑에 있던 한
계약노동자가 백인 주인한테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돼서 뛰어든 것을 간디가 법적 절차를
통해 새로운 백인 주인과 계약갱신을 해주었다. 이 일로 해서 그는 계약노동자들과 밀접히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차에 이른바 '3파운드 인두세'문제가 일어났다.
  원래 나탈 정부가 1860년 무렵 사탕수수의 재배와 제당에 필요한 노동력을 얻기 위하여
인도정부와의 합의하에 인도인 계약노동자를 데려갈 때에는, 5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그들 노동자는 자유롭게 나탈에 정착할 수 있고 또 완전한 토지소유권도 가진다는
조건이었다.
 @p65
  그러나 기한이 끝난 노동자들은 단지 농업에만 종사하질 않고 상업에도 손을 뻗쳐 토지와
가옥도 소유하게 되었다. 그들을 뒤따라 인도의 상인들도 그곳에 가서 정착하게 되었지만,
그들 중에는 거대한 기업체를 가지게 된 이도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백인 상인들은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그곳의 백인과 인도인 사이에는 종교뿐 아니라 생활양식과
생활감정도 크게 달랐으므로, 백인들이 적개심을 품게 되고 그런 적개심이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법안과 인두세 부과법안으로 나타났다.
  이 법안은 인도인 계약노동자에 대해서 계약기한 종료와 동시에 인도에 귀환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며, 이를 모두 거부하는 경우에는 25파운드의
연세를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탈 인도인 회의가 맹렬한 반대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에,
그 법안의 조회를 받은 인도 정부는 25파운드 연세에는 반대했으나 3파운드 인두세에는
찬성했다. 이에 의하면, 처와 16세 이상의 아들, 13세 이상의 딸이 있는 계약노동자는 합계
4민으로 12파운드의 연세를 납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계약노동자의 수입이 매월 14실링밖에
안되었으므로 매년 12파운드의 과세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사실상 인도인의 나탈 이민을 금하고, 이미 입국해 있던 인도인도 추방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악법이었으므로, 1895년에는 반세투쟁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인도인 선거권투쟁은
1897년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반세투쟁은 1914년의 승리까지, 장장 20년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4) 봉사의 종교
  "비록 나는 인도인 사회에 대한 봉사에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자기실천의 염원이 있었다. 신은 봉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의 봉사의 종교를 만들고 있었다.
 @p66
  그리고 나에게는 봉사란 인도에 대한 봉사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현상이며, 그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의
성향이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카티아와르의 음모에서 벗어나고자, 그리고 생계를 세우고자
남아프리카에 갔었지만, 전술한 대로 나는 거기서 신을 탐구하고 자기실현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Autobiography, p.158)고 간디는 술회하고 있다.
  간디가 자기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힌두교가 흔히 하듯이 삼림이나 사원에 들어가
고행을 하는 따위는 아니었다. 간디는 그와는 정반대로 인도인 속에 들어가 인도인에 대한
봉사에 몰두했다. 기독교인들과의 교우로 촉발된 진리탐구욕은 인도인 대중과 밀접히
접촉하는 가운데서 심화되어갔던 것이다. 더 반에서도 기독교인들과의 접촉은 계속되었는데,
그런 접촉은 간디의 지식욕을 자극시키고 그의 종교심을 생동케 하였다. 이제는
프레토리아에서처럼 종교 연구를 할 시간의 여유는 갖지 못했으나, 그래도 틈을 내어
종교서적을 애써 읽었다. 레이찬드브하이와는 서신을 교환하며 그의 지도를 받아 힌두교를
열심히 연구하였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편견은 갖지 않고서, 힌두교 이외의
종교서적도 함께 읽었다. 그런 종교 연구는 그의 내성을 깊게 해갔지만, 그는 점차 자기가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을 실행에 옮기려 하게 되었다.
  1903년 접신론을 믿는 우인들의 요청으로 힌두교 서적들을 그들과 함께 읽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간디는 [바가바드 기타]를 철저하게 연구하였다. 그 결과 간디는 [기타]를
철두철미하게 믿고, 그것을 실제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 원래 간디가 종교에서 찾은 것은
지적 만족보다도 도덕적 지침이었지만, 이제 그는 그것을 [바가바드 기타]에서 찾은
셈이었다. [기타]는 그에게 오로지 사랑과 동포에 대한 무사한 봉사를 통해서만 진리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기타]가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비소유'
(aparigraha)의 원리는 당분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간디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이상
어떻게 모든 세속적인 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고 의심했다.
 @p67
  그렇지만 결국 그는 이 어려운 문제를 '신탁'의 이론의 도움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기타]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조건 밑에서는 사유재산을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즉
사람들은 사유재산을 공적 신탁으로 보고, 자기를 위해서는 꼭 써야 할 때에만 쓰고,
나머지는 남을 위해 써야 하다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이와 같은 지적 탐구의 내면에서는 그가 동포에 대한 봉사와 그네들의 기본권을 위한
투쟁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은 직접적인 정신적 경험을 통해서 그의 종교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점차 모든 사치와 안락을 버리고 최소한의 필수품에
국한하는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천대받는 인도인인 만큼, 위신을
세우고자 주택과 가재도구에도 무척 신경을 쓰던 그였다. 자기 자신의 유럽화뿐 아니라 그
처자(1896년에 일시 귀국하여 데려왔다)에게도 유럽식의 복장을 하게 하며, 구두와 양말을
억지로 신게 하여, 이에 익숙치 못한 처자한테서 불평이 나오면 화를 벌컥 내던 그였다.
그러던 간디가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된 직접적 이유의 하나는 인도인 노동자에 대한 그의
뜨거운 동정심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공공사업에 한 다액의 기부로 인하여 형편이
옹색해졌기 때문이다.
  1904년 러스킨의 [마지막 자에게도]-그는 '사르보다야' (Sarvodaya)라는 제목하에
구자라티어로 이 책을 번역했다-를 읽고는 몹시 감격하여 한층 더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 책은 간디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는 생활이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임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그는 1904년 더반 근처에서 페닉스 농원(*)이라는 일종의
수도장(ashram)을 만들고, 사회봉사에 헌신하던 그의 동지들과 더불어 그곳에 가서 살았다.
같은 해 창간된 기관지 [인디안오피니언](**)도 이 농원으로 옮겼다. 모든 입거자는
농장과 신문사에서 자기 생계를 위해 직접 일하고, 인종이나 민족의 구별 없이 매달 똑같은
3파운드의 고정임금으로 극히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정신 훈련을 쌓았다. 그러나 간디는
여전히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인의 권리를 합헌적인 방법으로 수호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는 더반에 가서 변호사의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 : 이것은 1910년에 설립된 톨스토이 농원과 함께, 남아프리카에 있어서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발판이었으며, 그 후 간디가 인도에 돌아가서 만든 사바르마티,
세바그람 등지의 수도장의 전신이었다. 입거자는 모두 육체노동을 하고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정신훈련을 쌓아 앞으로의 투쟁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 [영 인디아](1919년 창간)와 [하리잔](1933년 [영 인디아]를 개제)의 전신인 주간지로
간디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자기훈련하는 동시에, 그 사상을 민중에게 전하고 그 반향과
비판을 알기 위한 기관지이다. 신문은 처음에는 구자라티어, 힌디어, 타밀어, 영어의 각
판으로 만들어지고, 일정한 난에 간디는 반드시 기고했다. 이 신문은 장차 전개되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불가결의 무기로 되었다.
 @p68
  그렇지만 그는 페닉스 농원과는 계속 밀접한 접촉을 하면서 도시 생활에서도 극히
간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려고 애썼다.
  이런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된 간디는 점차 동포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철저히 하려면, 단지
세속적인 소유욕을 포기할 뿐 아니라 성욕도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결혼을 한 이래 진리에 대한 사랑의 반신인 처에 대해서 충실하게 일부일처의 이상을 끝내
지켜왔다(*)
  * : 자서전에 의하면, 간디는 고등학교 시절에 한 번, 영국 유학 시절에 한번, 그러고
남아프리카에서 한 번,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악우에 끌려 매춘굴에 간 일이 있으나
그때마다 유혹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처에 대해서마저 육체관계를 끊을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은
남아프리카에서였다" (Autobiography, p.204)고 말하고 있다. 그 동기를 자서전에서
찾아보면, 우선 하나는 레이찬드브하이의 영향,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이상 애기를 갖지
않으려는 (이미 애기가 넷이었다)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이미 런던 유학 시절에 피임법에
관한 지식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산아제한이 주동기였을 무렵에는, 처와의
육체관계를 끊고 '순결한 생활' (brahmacharya)을 실천에 옮기려 하다가 한두 차례 실패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06년, 줄루족 반란 때에 6주간의 종군생활을 할 무렵, 곤란한
행군 도중에 성심성의 사회에 봉사하려면 가정의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 후 심사숙고한 끝에 "전심전령을 기울여 인류에 봉사하려는 사람에게는
브라흐마차르야를 실행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함" (Autobiography, p.316)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p69
  왜냐하면 가정에 얽매어 가지고는 그런 봉사는 할 수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처와 상의하여 동의를 얻자 정식으로 서약을 하고 브라흐마차르야에 들어갔는데, 이는
그가 만 36살 때의 일이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결혼하여, 학교 수업시간중에도 처의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괴로워했던 간디, 때로는 의처증에 가까울 정도로 처에 대해서 질투의 불꽃을 끄지 못해
고민하던 간디, 더구나 처에 대한 정욕을 누를 길이 없어 잠시 침실에 들렀다가 부친의
임종도 보지 못하여 평생 후회하던 간디였단. 그러던 간디가 만 36살 때 처와의 완전한
금욕생활에 들어가 사회봉사를 위해 자기정화에 매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브라흐마차르야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는 "56살이 넘은 때에도... 매일 칼날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Autobiography, p.209)고 간디는 고백하고 있다. 그러한 정욕을
억제하는 데는 신선한 과실과 견과가 제일 적당한 음식임을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브라흐마차르야를 엄격히 지키는 일은 이처럼 심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것은
그저 고통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간디는 "이 서약의 20년간을 회고하면, 환희와 경이로
충만된다"(Autobiography, p.208)고 말하면서, 그것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켜주는 동시에
매일같이 신선한 미를 드러내주므로, 그것은 이제는 고행이 아니라 위안과 환희였다고 한다.
간디는 그러한 자기억제와 자기정화에 정진하는 한편 가난한 인도인 대중과 그 고뇌를
나누며 민중의 지도자로서의 터전을 닦은 뒤에 사터아그라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p70
  5) 사티아그라하 투쟁
  1906년 후반에 이르자,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합헌적인 방법으로 정의를 확보하려던
여태까지의 희망을 몽땅 버리게 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간디는 보어전쟁(1899-1902) 당시에는 "인도의 완전한 해방은 영제국 안에서
영제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Autobiography, p.214)고 믿고, 영국을 위해 자진해서
1,100명으로 구성된 인도인 야전위생대를 인솔하여 종군했었고, 또 줄루족반란(1906년
전반)시에는, "영제국은 세계의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 (Autobiography, p.313)고 믿었으므로
자진해서 24명의 인도인 야전위생 대를 이끌고 나탈 정부를 도왔다. 그는 사적으로는
보어인과 줄루족에 동정하면서도 영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영국을 위해 종군했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1906년 8월 22일의 트란스바르 정부 관보는, 8살 이상의 모든
인도인은 정식등록과 함께 지문을 찍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벌금, 투옥 또는
추방의 형벌을 가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게재했었다. 이는 말하자면 트란스바르에서는
인도인 전체를 일종의 범인으로 취급하려는 것이었다. 이 법안은 단지 트란스바르에 있는
인도인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도자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간디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돌볼 여유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대다수 유럽인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페어 플레이'정신이 계급적 이해와 인종적
편견으로 인하여 흐리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간디는 그들
유럽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취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간디는 1906년 9월 11일, 그'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의 제국극장에 모인
3천 명의 인도인에게 비록 그 법안이 법률로 되는 경우에도 그 법률을 무시하기로 할 것과,
그 법률을 무시한 데 대한 법은 달게 받아 모두 감옥에 .가고, 필요하다면 죽음을 택할 것을
맹세케 했다. 참으로 이상한 저항투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p71
  처음에 간디는 이것은 소극적 저항(passive resistanc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소극적
저항이라고 하면 약자의 무기이기나 한 듯이 오해될 염려가 있었으므로, 기관지 [인디안
오피니언]을 통해서 그 명칭을 공모했다. 그 결과 간디가 가장 신뢰하던 마간랄 간디의
'사다그라하' (sadagraha-진리파악)가 당선되었는데 간디는 그 뜻을 보다 명백히 하기
위하여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진리파악)라고 고쳐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폭력과
증오를 악으로 여겨 배제하며, 악에 대해서도 악으로써가 아니라 선으로써 대한다는 것이
그 신조였다. 즉 간디는 그 상대방을 해치거나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마음과
기사도 정신을 가지고 스스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양심을 찔러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Fischer, p.47) 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적까지 사랑하는, 즉
톨스토이의 말대로, 사랑에 입각하는 사상이며 행동이었다.
  그런데 사터아그라하의 원형인 소극적 저항의 투쟁에서 죽음을 걸고 '아시아인 등록법'에
반대케 할 때에도 간디는 집단적, 인 방식이 아니라 개개인이 그 책임과 발의하에 서약을
한다는 방법을 취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강제와 뇌동에 의한 행동은 '진리 '에 충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간디는 이 투쟁은 오래 끌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내가
대담하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만이라도 자기 서약에 끝내 충실한다면, 오직
승리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Fischer, p.36)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사티아그라하의
기본원리의 하나인데, 즉 영혼의 힘은 수에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결의의 확고성에 의거해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인 등록법은 1907년 8월 1일 (Glorney Boston, The Tragedy of Gandhi, p.119에
의하면 7월 1일로 되어 있다)부터 실시하기로 되었다. 그 동안 인도인의 반대투쟁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또한 간디는 영국에 가서 본국 정부와 직접 교섭을 한 결과, 영국
정부는 이 법안을 승인하지 않았으나, 1907년 1월 1일을 기해 트란스바르에는 자치정부가
들어서게 되어 결국 부녀자만 그 적용에서 제외하기로 하고는 예전의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고 말았다.
 @p72
  등록 반대운동이 조직적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반면 정부의 탄압이 심해져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1907년 1월에 간디는 징역 2개월에 처해졌다. 남아프리카의 최초의 옥고였다.
그러나 옥중에서 스마츠 장군과의 교섭이 진행되어, 만일 인도인들이 자진해서 등록한다면
아시아인 등록법은 폐기한다는 스마츠 장군의 제안을 수락하자, 간디와 다른 지도자들도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10일, 간디는 제일 먼저 등록하러 아시아국에 갔다가 그런 타협에
반대하던 미르 알람이라는 한 파탄인에게 얻어맞고 Tm러졌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 간디가
한 첫 말은 알람을 용서해주라는 것과 자기가 제일 처음으로 등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간디는 이렇게 충실히 약속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스마츠 장군은 약속을 어겼다. 이
위약에 항의하여 이 해 8월에 간디는 재차 사터아그라하 투쟁을 개시했다. 즉 8월 16일
새벽 4시에, 2천 명 이상의 인도인들이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하미디아 모스크에 모여,
그들의 등록증을 한데 모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는트란스바르의 이민금지를 일부러 무시
하여 자진해서 감옥에 들어 가기로 결정했다. 얼마 안 가서 간디는 나탈에 있는 인도인들로
하여금 일부러 트란스바르에 들어와 투옥당하게 하고 자기도 자기 맏아들도 이에 가담하여
그는 10월에 또다시 2개월의 징역을 언도받았다. 이때 간디는 옥중에서 변소청소 등 남이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한편, 소로(H.D. Thoreau)의 [시민적 불복종] (Civil
Disobedience)을 읽었는데, 이 책은 그의 평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내가 마땅히 져야 할 유일한 의무는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언제나 행하는
일이다"라고 소로는 그의 책에서 강조했다. 소로는 정당한 일을 하는 편이 법을 지키는
일보다 명예롭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감옥에 들어가기 위하여 수많은 트란스바르의 인도인들이 나탈에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간디도 이에 가담하여 1909년 2월에는 3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거듭되는 옥중생활에서
인고의 훈련을 쌓는 동시에, 사티아그라하의 저항은 소로식인 불복종 투쟁의 성격을 점점 더
지니게 되어갔다.
 @p73
  출옥하자 간디는 투쟁방법을 바꾸어 이 해 (1909)에 헨리 폴라크는 인도로 보내고 자기는
재차 영국에 갔다. 폴라크를 보낸 것은, 인도 민중이 남아프리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면, 이에 대한 인도 총독의 관심은 영국 정부에 전달될 터이고, 그렇게 되면 영국 정부는
스마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디가 직접 영국에 간
것은 영국민에게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영국에 있는 많은 자유주의자와 개명된
제국주의자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당장에 구체적인 성과는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 문제로 하여금 제국내의 하나의 중요한 두통거리로 만드는 데는
성공함으로써, 궁극적인 승리의 씨는 뿌렸던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 간디는 많은 인도인 애국자들과 접촉하여 그들과 단지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 문제뿐 아니라 인도의 자유라는 더 큰 문제도 논의하였다. 인도의 자유에 관한
자기의 견해를, [힌드 스와라지] (Hind Swaraj-인도의 자치, 1909)라는 소책자에서
밝히면서,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새 계획을 제시하였다.
  16년간에 걸친 남아프리카체재에서 얻은 경험으로 간디는 다음과 같은 결론 즉 유럽인에
의한 인도와 남아프리카 지배는 인도인을 사실상 노예로 만들고 있는데, 이런 지배는
물질적 가치의 맹목적인 추구와 권력애 그리고 약자를 착취하기 위한 그 권력의 사용 등에
의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성장, 발전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만일
인도인이 물질적인 무기를 가지고 싸움으로써 그런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요, 비록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얻어진 자유는 그릇된 자유로
되고 말 것이다. 물질력의 수단으로 외국인 착취자를 물리친 자는 그 힘을 그들의 동포를
착취하는 데 사용하게 될 것이다. [힌드 스와라지]에 의하면,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인도인들은 현대문명의 지배에서 그들의 마음을 해방시키고, 물질적 진보의 온갖
상징들-현대식 기계와 그 생산품, 현대식 수송수단, 현대적 사법 행정제도-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p74
  상류계급일지라도 농민과 노동자와 같이 간소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그들은 폭력의 사용 없이 신체적 및 정신적 자유를 쟁취하는 데 그들을 돕게
될 도덕적 및 정신적인 힘을 키우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간디는 1910년 요하네스버그 근처에 톨스토이
농원이라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들의 수도장을 설립했다. 이때 독일계 유태인 건축가이며
간디의 좋은 협력자로 될 칼렌바흐가 약 1, 100에이커의 토지를 사준데 다가 그도 간디 및
간디의 가족과 더불어 이 농원에 와서 살았다. 명칭을 톨스토이 농원이라고 붙인 것은,
일찍이 간디는 톨스토이의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있었지만, 특히 1909년에는 런던의
호텔에서 야스나야 포리야나의 톨스토이에게 서한을 보탰고, 이어 1910년에도 재차 서한을
보낼 정도로 사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도 간디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개인의
힘과 시민적 불복종을 굳게 믿고 있었다. 즉 톨스토이는 그의 [신의 나라는 그대의 마음
안에 있다]에서 기독교인을 정의하여, "이웃과 다투지 않으며, 공격 하지도 폭력을
사용하지도 않는 이, 그와는 반대로 저항함이 없이 스스로 고난을 당하며, 악에 대한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인하여 온갖 현세적 권위에서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 (Ficsher, p.39)라고 논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톨스토이는 손일과 재산의 포기, 간소한 생활과 기독교적 설교를 통해서 종교와 행동과의
종합을 책하려고 애썼다.
  톨스토이와 간디를 다 같이 사숙하며 두 사람의 전기를 깼던 로맹 를랑은 "간디는
톨스토이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지만, 톨스토이보다도 더 상냥하고 더 온유하며, 딱 잘라
말하면 더 자연스러운 기독교인 (광의의)이다. 왜냐하면 톨스토이는 본성에서 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지에 의해서 기독교인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Romain Rolland, Mahatma
Gandhi, 궁본정청 일역본, p.44)고 말하고 있다.
  * : 로맹 롤랑은 1924년에 "간디에 있어서는, 만사가 자연스럽고, 겸손하고, 소박하며
순수하다. 동시에 그의 온갖 투쟁은 한결같이 종교적인 정온에 의해 성화되고 있다. 그런데
톨스토이에 있어서는 만사가 긍지에 반발하는 긍지요, 증오에 반발하는 증오며, 격정에
반발하는 격정이다. 톨스토이의 경우에는 만사가 폭력이며, 심지어 그의 비폭력의
교리까지도 폭력적이다" (Ficsher, p.40)라고 날카롭게 비교하였다.
 @p75
  이러나저러나 간디가 톨스토이한테서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가는 자기가 설립한 농원의
명칭에 그의 이름을 글 한 가지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이 농원에서는 인도의 각
지방에서 온, 카스트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이들-즉 힌두교도, 회교도도, 파르시교도도,
기독교도도 있었는데, 그 중 약 40명은 청년, 2-3명은 노인, 20-30명이 소년소녀들이었다-이
조국의 명예와 정당한 권리의 수호를 위해 같이 일하면서 고생을 나누었다. 그들은
생활필수품을 거의 모두 스스로 생산하기 위해 농업과 그밖의 산업들에 종사하는 한편,
자녀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간디와 칼렌바흐가 주로 선생노릇을 하였다.
  간디가 이 학교와 연전의 페닉스농원 안의 학교에서 행한 실험은 그의 이념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종교를 달리하는 소년소녀들에게 공통된 종교교육을 하려고 애쓰는
가운데서 그는 각 종교의 본질은 온 인류에게 공통되는 기본적인 도덕원칙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12년에 [니티다르마] (Nitidhama)라는 소책자에서 제시한 도덕종교에 관한 그
의 견해는 바로 이 경험에서 싹텄다. 동시에 그늘 모든 종교는 각각 독자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음을 알게 되었다. 각 종교는 특정한 의식 및 예배양식과 관련을 가져왔으므로, 이런
외면적 형식은 그 신도들의 정신훈련에 가장 적합되는 것이니 만큼 그런 외면적 형식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보편적인 도덕종교의 원리와 함께 어린애에게는
각각 조상전래의 종교의 교의를 가르치고 그 교의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76
  일반 교육의 영역에서도, 간디의 실험은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결론, 즉 교육의
주목적은 어린이에게 심적 자각과 활기, 도덕적 훈련과 협조 정신을 낳게 하는 데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모종의 유용한 공작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정신적 및 실제적 경험에서 나온 간디의 사상의 기본적인
윤곽은 이 남아프리카 시절에 확정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사상뿐 아니라 그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원형도 이 남아프리카에서 이미 확정되고 있었다.
  간디가 톨스토이 농원에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위한 훈련에 주력하고 있는 동안 실제적인
저항운동은 소수의 인도인이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일상 관례로 되고 말아, 사태는 비교적
정온하였다. 더구나 1912년 10월에는 남아프리카의 실정을 시찰하기 위하여 인도
민족운동의 온건파 지도자인 고칼레가 내방하였는데, 이때 스마츠 장군은 그를 크게
환대하며 그에게 이민금지 해제와 3파운드 인두세 폐지를 약속하였다. 그러던 것이
1913년에 이르자 또다시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격심한 투쟁이 전개되게 되었다. 그것은
스마츠가 고칼레에게 한 약속을 어긴데다가 그 해 3월 케이프 클로니 (남아연방의
한주)에서 기독교 방식에 의한 결혼 이외는 무효라는 규정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인도
부인을 선두로 하는 처절한 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간디는 나탈의 '자매'들은 무허가로 트란스바르에 들어오게 하고, 트란스바르의 '자매들'은
나발에 가게 하였다. 나탈의 '자매들'은 투옥되었는데, 이에 분개한 다른 나탈 '자매들'이
뒤를 이었다. 한편 트란스바르의 '자매들'은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지시대로 나탈의
뉴캐슬에 있는 탄광에 가서 인도인 탄광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호소했다. 정부는 그
'자매들'을 체포하여 3개월의 구류처분을 내렸는데, 카스투르바이 부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에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이 번져갔으므로 간디는 뉴캐슬로 달려갔다. 탄
광주들은 파업을 감행하고 있는 인도인 노동자가 들어 있는 회사 숙소의 전기와 수도를
끊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들로 하여금 야외에 나가 노숙하도록 했다.
 @p77
  그러나 그 수가 약 5천 명이나 되었으므로 어찌할 바를 몰라, 일부러 체포되기 위하여
트란스바르에의 행진을 계획하였다. 실제로 행진을 개시하기 전에 당장 체포하도록 당국과
두 차례에 걸쳐 교섭했으나 당국은 '은총'을 베풀지 않았다. 그래서 간디는 트란스바르로
행진을 단행하기로 하고, 만일 체포되지 않는다면, 톨스토이 농원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행진은 몹시 고생스러울 것이므로 심약한 자는 그만두도록 호소했지만, 출발 당일인 1913년
11월 6일의 아침 6시 30분에, 간디는 인원을 파악해보니 2,037명이 남자고, 127명이 여자요,
57명이 어린이들이었다. 트란스바르에 들어가도 경찰이 체포하지 않아 톨스토이 농원을
향해 행진을 계속했는데, 간디는 첫날 저녁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고, 둘째날 밤에도
체포되었다가 다시 석방되었지만, 나흗날 밤에는 체포되어 그대로 구류되었다. 노동자들은
간디 없이도 행진을 계속했으나, 다음날 아침 밸포어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기차에
실려 탄광으로 송환되어 철조망을 둘러친 속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그들 노동자는 탄광에서
일하기를 계속 거부했다. 동정 파업이 더 번져갔다. 정부는 이런 계약 노동자는 파업을 할
권리가 없는 노예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을 억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한 곳에서는
군대가 발포하여 수명의 사상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약 5만 명의 계약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수천 명의 자유 인도인이
투옥당하게 되었다. 이 소식이 인도에 전해지자 인도에서는 항의의 물결이 세차게 일어났다.
인도와 런던, 런던과 남아프리카사이에 교섭이 보고간 끝에 1913년 12월 18일 정부
당국과의 교섭을 위해 간디는 무조건 석방되었다. 함께 투옥당하고 있던 유럽인 협력자인
칼렌바흐와 폴라크도 이때 석방되었다. C.F.앤드루스와 W.W.퍼어슨 등이 후원하기 위해
인도에서 남아프리카로 달려온 것도 이때였다.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반대의사를 표시하며 온갖 고난을 참는
사람들로 감옥을 가득 채우는 운동이기도 하지만, 간디의 수도장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언제나 선두에 섰다. 간디와 스마츠 장군과의 교섭은 처음에는 잘 진행되지 않아, 간디는
1914년 1월 1일에, 또다시 체포되기 위하여 더반으로부터 인도인들의 행진을 단행할 것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p78
  이때 남아프리카의 모든 철도의 백인 고용인들이 파업에 들어가 인도인들과의 제휴를
제의해왔다. 간디는 이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 행진도 중지하고 말았다.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상대방의 난처한 입장을 이용하거나 부자연스러운 동맹을 체결하거나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Pischer, p.47)는 것이 간디의 설명이었다.
  간디와 스마츠 장군과의 교섭은 그 후에도 오래 끌었으나 결국 1914년 6월 30 일 합의에
도달했다. 이로써 3파운드 인두세는 폐지되고, 힌두교, 회교, 과르시교의 방식에 의한 결혼도
합법성이 인정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인도인들은 케이프 콜로니에 들어갈 수
있으나, 연방내의 다른 주들 사이의 자유로운 이동은 금지되었다. 계약노동자는 1920년
부터는 금지하나, 자유 인도인은 계속 들어올 수 있고, 또 인도에 있는 처자가 남편과
합치기 위해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간디가 인두세반대 투쟁을 전개한 1895년부터 20년
만에 인도 민중의 사티아그라하투쟁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1914년 7월 14일, 간디가 오랜 인고와 자기정화의 터전이었던 남아프리카를 떠나
영국을 경유하여 조국에 돌아온 후, 그가 인도에서 전개한 사티아그라하 투쟁의 원형을
우리는 이 남아프리카투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제 그 정치적 특징을 들어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 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이 투쟁은 카스트, 종교, 출신지방의 구별을 초월하는 하나의 전국민적 운동으로
유럽인과 동일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 투쟁은 대중-계약노동자-과 밀착하고 있었다.
  셋째로, 이 투쟁을 지도하고 그 진로를 결정한 이는 그들 대중이 아니라 간디 자신이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특징 이외에도 조직과 투쟁의 방식상의 여러 특징들, 즉 기관지 발간,
수도장 설립, 투쟁개시 전 및 투쟁기간중 당국과의 서한교류, 옥중에서의 교섭,
투쟁참가자의 동의를 얻음이 없이 당국과의 타협, 투쟁에 있어서 극히 사소한 점에
이르기까지 간디 자신의 개인적인 지도 등은 이미 남아프리카 시절에 있어서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Namboodiripad, 일역본, pp.17-22).
  이상에서 우리는 남아프리카에서 간디의 기본적인 사상과 실천방식의 윤곽이 형성된
과정을 대강 살펴보았다. 간디가 후에 인도를 무대로 하여 34년간의 그의 나머지 반생을
통해서 전개한 '진리와 함께 한 실험'은 기본적으로는 이 남아프리카에서의 실험의 규모를
확대시킨 데 불과했다.

 @p81
    제 3장 간디의 사상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 즉 이 30년간에 걸쳐 내가 달성하고자 애써오고 또 달성하도록
강요되어온 것은 신을 눈앞에 보기 위한,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한 자기실현이다. 나는 이
목적을 추구하면서 생활하고 활동하며 또한 존재한다. 연설과 저술을 통해서 내가 하는
모든 일과 정치의 영역에서의 나의 온갖 모험은 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Autobiography, p.12) 이것은 간디가 1920년에 이르기까지의 진리와 함께 한 자기의
실험을 서술하고 있는 자서전 서문에서 하고 있는 말이지만, 그가 인도에 돌아와서 행한
실험은 주로 정치적 및 사회적 영역에서 수행되었다고는 하더라도 그 목적은 종교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로맹 롤랑은 간디는 "천성적인 종교가이지만 필요에
강요되어 정치가로 되었다"(Rolland, 일역본, p.34)고 보며, "만일 틸라크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도 이 운동 (즉 민족운동)의 종교면의 지도를 담당했으리라" (같은 책,
p.30)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간디의 종교의식은 그 본질에 있어서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인
것이었으므로, 비록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그는 진리를 실현하는 데 단순한 내성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남들을 진리 실현과 구원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사회운동도
병행했으리라고 본다. 실제로 간디는 사원으로의 도피나 동굴의 고독, 또는 예배의식의 경건
속에서 신을 찾지 않고, 동포를 위한 헌신적 봉사를 통해서 신을 구했다.
 @p82
  물론 내성, 명상, 그리고 신과의 영교는 신을 찾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수단이며, 사실
간디도 그런 수단을 이용하기도 했으나 그와 같은 경험은 엄밀하게 개인적인 것이어서
남과는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보다도 간디의 관심은 남과 나눌 수 있는 경험에
있었으므로, "나는 처음부터 1인에게 가능한 일은 만인에게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실험은 사실에서가 아니라 야외에서 행해졌다" (Autobiography, p.12)고
말하고 있다. 1인에게 가능한 일은 만인에게도 가능하다는 견해가 옳고 그르고는 놔두고,
누구든지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자기처럼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간디에게서 우리는
겸허한 마음씨를 찾아보게 된다.
  그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수행된 집단적인 종교적, 도덕적 (간디에 있어서는 이 두 말은
서로 바꿀 수 있다) 실험은 정치적 및 사회적인 것이었다. 정치적 실험은
인도해방운동으로써 수행되었다. 그런 운동은 간디가 정치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이미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제 간디는 새로운 도덕정신을 갖고 그 운동을 비폭력, 비협력
운동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인도를 30년 이내에 영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리고
사회적 실험은, 각종의 건설사업(constructive work) 단체들의 도움을 얻어서, 경쟁이
아니라 협동에 입각하며 착취가 전혀 없는 비폭력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으로써
수행되었다. 그런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그는 또한 새로운 교육방법을
도입하였다. 30여년간에 걸쳐 수행된 이와 같은 실험들은, 간디가 남아프러카에서 이미
형성했던 종교적, 도덕적 이념들을 더욱 분명하게 더욱 심오하게 그리고 더욱 포괄적으로
만들었으나 그의 사상의 일반적 윤곽은 분명히 그대로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검토해보면, 진리에 대한 간디의 강조점이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전에는 신은 무엇보다도 진리라던 것이 이제는 진리야말로 신이 라고 바뀌고 있는
것이다(M.K.Gandhi, Satynraha, p.38).
 @p83
  간디는 이전에는 도덕을 종교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도덕을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의식은 신에 대한
신앙보다도 더 보편적이며 더 명확하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서 그는 깨닫게 되었다. 즉 그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철저하게 도덕적 원칙에 입각해서 행동하면서도
정식으로 신은 믿고 있지 않는 사람들 (자와하를랄 네루는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을
인도에서 만나고, 종교의 정수는 도덕이며, 그 도덕을 그런 사람들이 숱한 종교인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도덕은 종교의 실질이며 신에 대한 신앙심은
종교의 우유적인 것(하기는 그에게는 신에 대한 신앙심은 분리될 수 없는 우유적인 것으로
보였지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간디의 사상이 그의 직접적인 정신적 및 실제적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대강 훑어본 셈이다. 이제는 평생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여 마침내 도달한
결론들을 개관해볼 차례이다.
    1. 종교적 및 도덕적 이념
  1) 개관
  간디의 일생은 극적 사건, 에피소드, 감격적 장면으로 차 있거니와, 그의 강연과 저술도
엄청나게 많아 인간 생활의 온갖 측면에 걸쳐 있다. 그러므로 보는 입장에 따라 치중하는
사상의 측면도 다르게 마련이지만, 로맹 를랑은 간디의 사상은 "거대한 종교적 기초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 위에 세워지고 현재의 가능성과 조국의 원망에 적용된 사회활동"
(Rolland, 일역률, p.30)이라는 두 단계로 나누어서 고착해야 하며, 특히 종교적 기초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간디의 종교, 도덕 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보통 간디는
일반원리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고, 개개의 실제문제와 관련하여 그런 원리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p84
  첫째는, 종교와 도덕에 관한 이론 철학을 제시하는 일은 그의 목적이나 영역은 아니었다.
그의 철학은 실제적이며, 오직 실제문제로써만 그것은 적절하게 표현되었다. 둘째는, 이
실천철학은 절대적 내지 추상적 진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고, 실제생활과의 접촉 속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간디는 그의 철학을 비개인적인 종교적 계율이나 도덕률로서 세상에
내놓기를 원치 않고, 단지 일련의 개인적 실험으로서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도달한
결론에 대해서 구극성이나 보편타당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자연과학자가 최대한의 정확성과 신중성 및 엄밀성을 가지고 실험을 하듯이,
깊 이깊이 내성하고 속속들이 자기 자신을 찾아내고, 하나하나의 심리상태를 음미,
분석하였다. 그리고 자연과학자가 실험의 결과에 대해서 구극성을 주장하지는 않고 그
결과에 대해서 허심한 태도를 취하듯이 그는 자기의 결론에 대해서 "구극성이나 불가류성을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Autobiography, p.12)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론은 적어도 자기에게는 절대적으로 정당한 듯이 보이며 또한 당분간은 구극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러한 결론에 입각해서 행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행동에 옮길 때에는 일일이 그 옳고 그름을 검토하고 나서야
행동하곤 했는데, 그 행동이 자기의 이성과 양심을 만족시켜주는 한 그는 자기의 독자적인
결론을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그의 독자적인 결론은 과연 무엇인가?
  간디의 종교적 신조에는 두 개의 다른 특징이 있다. 하나는, 그가 도덕적 가치를 종교의
실질로 보고, 신에 대한 신앙은 종교의 우유적인 것 (분리될 수 없는 우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는 하나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견해는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다. 일단 도덕이 종교의 본질로서
인정된다면, 모든 종교는 동일한 기본적 도덕원칙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결론이 자연히 나오게 마련이다.
 @p85
  간디에게서는 도덕률은 인류를 지배하며 인간의 본성 속에 스며들어 있는 항구불변의
인생법칙이다. 그는 그러한 도덕률을 '진리의 법'(law of truth)이라고 부르고, 때로는 길러
또는 사티아(satya)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사티아라는 말은 간디의 전 사상구조의
근본원리이니만큼 우리는 그 의미를 가능한 한 명백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이 사티아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지는 우리말은 '참'이다. 참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사실과 일치하는 말을 뜻하는 '진실'의 의미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체에 일치하는
지식을 뜻하는 '진리'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티아는 경우에 따라
진실이라고도 진리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실은 사터아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 진실과 진리 이외에 선량, 정의, 구극적 실재와 신, 이런 모든 속성들의 참된 실체도
의미한다(Husain, p.12).
  간디는 온 우주에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이 미만하고 있는데,
이 힘이야말로 변화무상한 이 세계에 있어서 영구불변하는 유일한 실재라고 본다. 그리고
이 힘의 작용을 관찰한 결과 그 칩은 선을 위하는 힘이지 악을 위하는 힘은 아니라는
확신을 그는 가지게 되었다. 간디가 사티아 또는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힘을
말하는데, 그는 그 힘을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법, 즉 생명의 법, 자연의 법,
도덕률이라고 생각한다. 구극적 실재를 하나의 신비롭고 선한 힘이라고 생각하고, 우주
속에서 질서와 조화 및 도덕률의 지배를 보며, 이 도덕률에 대한 복종을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의 지도원리라고 간주하는 것은 간디의 기본적인 종교적 신조의 '으뜸가는'본질적
요소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믿는 이들뿐 아니라 어떠한 종교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그와 같은 본질적 요소를 지닌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다만 그 차이는, 종교를 믿는 이들은
도덕률과 일치한다고 보는 구극적 실재를 간디와 마찬가지로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것을 사랑이나 헌신을 통해서 깨달으려고 애쓰는 데 대하여,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은
그런 구극적 실재에 어떠한 이름도 붙이지 않고, 그것을 과학의 도움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
 @p86
  간디는 도덕적 이법을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무신론자임을 공언하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해서, 하나의 커다란 동포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만일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보다 더
도덕적이라면 간디는 전자가 더 종교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간디에 의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이 종교심도 사랑 내지 아힌사(비폭력)를 통하지
않고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 내지 아힌사는 간디 철학에서 진리에 다음
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애정, 동정,
자비, 관용, 봉사, 자기회생 등의 적극적인 의미와 아울러 비폭력, 불상해와 같은 소극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Husain, p.13). 그것도 역시 신을 사랑의 제 1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아힌사와 진리와의 관계는 어떠냐하면, 양자는 "꼰 새끼와도 같아서 나누기는
어렵지만 아힌사는 수단이며 진리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p.62) 또는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요,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는 칸트의 유명한 말에 따라 표현하면,
"진리 없는 사랑은 맹목이요, 사랑 없는 진리는 공허하다"고도 할 수 있다.
  간디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이 사랑도 세계의 존립 자체가 의거해 있는 보편적인 제
1원리라고 생각한다. 증오와 전쟁으로 인한 파괴 속에서도 인류생활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그런 파괴의 법보다 더 고차적인 법이 있기 때문인데, 그 법이
다름 아닌 친화와 평화의 법, 즉 사랑과 비폭력의 법이라고 간디는 생각한다. "아힌사
(비폭력)는 인류의 규범이요, 힌사(폭력)는 동물계의 법칙" (납산방랑, p.61)이거니와, 그런
고차적인 아힌사의 법의 작용을 관찰하려면, 인간의 미숙한 성질이 아니라 원숙한 성질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태까지 인류는 대체로 그렇다고 의식함이 없이 그 사랑 내지
비폭력의 법을 좇아왔지만 이제부터 인류는 의식적으로 이 법을 인정하고 준수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p87
  상술한 대로 사랑 내지 아힌사는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적극적인
면은, 인간이 가까운 관계를 가지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사랑을
적까지 포함하는 온 인류에게 확대시키는 일이요, 소극적인 면은 사리를 더욱 추구하거나
열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고의로 어떤 생물을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것을 삼가는 일이다.
  간디의 종교적 신조의 '버금가는' 본질적 요소는, 그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포괄적인 사회적
덕성이야말로 인생의 최고가치인 진리에의 관건이라는 점, 다시 말하면 신에의 길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상은 역시 세계의 모든
주요한 종교에 공통된다. 주요한 세계적 종교를 연구한 결과, 간디는 그런 종교들은 진리와
사랑에 대해서 한결같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는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따라서 명칭을 달리하는 종교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비친 이 하나의 위대한 근원적 종교의 영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즉
동일한 근본적인 경험이 모든 종교의 기초를 형성하지만, 그런 경험은 서로 다른 자연적,
사회적 및 지적 환경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해석되어오고 있을 따름이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견해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 견해는 신비론자의
유형에 속하는 모든 종교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간디가 이 원리를 가르친 그
논리적 일관성과 그가 원리를 실천에 옳긴 성실한 열정은 역사상 거의 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종교에 대한 동등한 숭경은 그의 종교 개념의 초점을 이루고 있다.(*)
  * : 간디는 1928년 1 월, 세계동포연맹에서 말했다. "오랜 시일에 걸친 연구와 경험의
결과, 나는 다음과 간은 결론에 도달했다. #1 모든 종교는 진리다. #2 모든 종교는 약간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 #3 모든 종교는 나에게는 힌두교와 거의 마찬가지로 친밀감이 있다.
다른 종교에 대한 나의 승경은 나 자신의 종교에 대한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개종이란
생각은 가질 수 없다." (Discovery, p.315)
 @p88
  요컨대 모든 종교들의 공통적인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간디의 도덕종교의 기본원리는,
#1 진리의 법과 사랑의 법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 #2 인류는 이런 법들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한다는 점, #3 모든 종교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라고 보고, 모든 종교들에
대해서 동등한 승경을 한다는 점 들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데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전인류에게 공통되는 하나의 종교란 하나의 추상적 이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런 공통적 종교는 여러
실제적 종교들의 형식을 스스로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하나의 참되고 완전한 종교는
인간적 매개를 거침에 따라 여럿으로 되는 것이다. 모든 개인은 그 어떤 특정 종교, 보통은
그 자신의 전통적 종교의 거울에 비춰진 것으로서만 진리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각
개인은 그런 종교를, 사랑과 진리라는 공통이상을 깨닫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오든 개인은 다른 종교들의 온갖 좋은 점은 섭취할 수 있고 또 섭취해야 한다.
  간디는 힌두교의 독실한 신자였다. 그러나 경전을 고집하는 학자는 아니다. 더구나 어떠한
전통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무비판적인 신앙가는 더욱 아니다. 그는 내적 도덕의식과
이성을 통해서 힌두교를 받아들였으므로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힌두교가 가지게 된
오류와 폐해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힌두교에 대한 나의 감정을 말하기는
어려운데 그것은 내 아내에 대한 감정을 말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 아내는 이
세상의 어느 여자보다도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렇다고 내 아내가 아무런 결함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내 눈에 띄는 것 이상의 결함을 내 아내는 가지고 있다고
단언해도 좋다. 그러나 아내와는 끊을 수 없는 연분을 느낀다. 그 온갖 결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힌두교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낀다.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단 두 권의
힌두교의 경전 [기타]와 툴시다스의 [라마야나] (Ramayana. 산스크리트의 서사시이며,
라마찬드라의 생애와 모험을 노래한 것. 툴시다스가 힌디어로 번역하였다)의 음악만큼 나를
고무하는 것은 없다.
 @p89
  나는 오늘날 힌두교의 대사원예서 벌어지는 폐습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입에 담기도
싫은 그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을 사랑한다. 나는 철저한 개혁자이지만, 나의
개혁의 열정도 결코 나로 하여금 힌두교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버리게 하지는
않는다."(Husain, p.19)
  그러면 그가 승인하고 있는 이 본질적 요소란 무엇인가? 간디는 1921년 10월 6일 [영
인디아]지에 게재한 논문에서 자기의 공적인 신앙개조를 열거하고 있다(Rolland, 일역본,
p.37).
  #1 나는 [베다](veda.인도 최고의 종교문학이며, 바라문교의 근본경전), [우파니샤드]
(Upanishad)(*) [푸라나] (Purana)(**) 그리고 힌두경전의 이름 아래 포함되는 모든
것을 믿는다. 따라서 아바타르(avatar: 화신)(주석3)와 푸나르잔마(punarjanma: 재생)를
믿는다.
  * : [베다] 성전의 일부를 이루는 철학적 논총으로 일신교적, 일원론적인 사상체계의
기초로 되었다. 베다의 최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베단타] (Vedanta)라고도 불린다.
  **: 고대전설을 취급한 서사시이며 편력의 음송시인 수타에 의해서 씌어지고,
[베다]보다도 서민적 성격이 강하다. 우주의 창조와 파괴와 재건, 여러 신 및 성인의 계보,
인조 마누에 지배되는 3억 년 이상의 기술, 일종 및 월종 외 왕조의 역사 등을 다루었다.
 ***: 힌두의 신앙에 의하면, 비시뉴(힌두교의 주신의 하나)는 때때로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온다. 열 하나의 이런 화신이 알려져 있으며, 그 최후의
화신이 불타이다.
 ****: 엄격하게 말하면 바르나와 아슈라마에 의거하는 제도이다. 바르나는 이른바 네 개의
카스트이며, 아슈라마는 힌두의 일생에 있어서의 네 개의 계단 내지 시기이다. 즉 힌두는
#1 단라호마차르야(학생의 생활). #2 그라하스티야(가장의 생활), #3 바나프라스타(은자의 생활),
#4 사니야스(탁발의 생활)를 거치면서 일생을 끝마친다. 바르나슈라마는 보통 카스트 제도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2 나는 바르나슈라마 다르마(varnashrama dharma)(주석4)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하게 [베다]에 나타나 있는 의미에서이지 현재의 속악한 의미에서는 아니다.
 #3 나는 통속적일 의미보다는 훨씬 넘은 의미에서 소의 보호를 믿는다.
 #4 나는 우상숭배를 불신하지는 않는다.
 @p90
  그러나 간디는 이런 것들을 다음과 같은 조건부로 믿었다. 우선 간디는 [베다]만이 신성을
가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바이블]도 [코란]도 [겐드 아베스타](Zend Avesta. 조로아스터교의
경전)도 [베다]만큼이나 신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힌두 경전의
오든 구절이 신의 영감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간디에 있어서는 힌두의 경전들은
성자와 현인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며, 그런 경험은 그것을 철저하게 흡수, 동화하여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화하게 하는 경우에만 진리추구의 지침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와 사랑, 브라흐마차르야(자기억제)와 아파리그라하(비소유)를
실천함으로써 스스로를 정화한 사람들의 경우에만 가능한 특정한 정신적 기풍과 종교적
심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힌두교에 대한 간디의 개념에 있어서는 상기한 네 개의
도덕원리가 제 1의적이고 절대적이며, 정전에 대한 신앙과 연구는 제 2의적이며 상대적임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교의에 대해서도 자기의 종교적 가치등급에 있어 제 2차적인
지위밖에 부여하지 않는다. 간디는 소의 보호는 모든 말 못하는 불쌍한 동물에 대한 애정의
상징이라고 보고, (*)우상숭배는 그것들이 나타내려고 한 신에 대한 숭경의 상징이라고
본다. 화신 (avatar)에 대한 신앙은 은유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이고,
바르나슈라마(varnashrama)는 그것이 고정된 카스트 제도가 아니라 분업에 의거하는
사회조직이었던 베다시대에 그것이 가지던 의미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 : 소의 보호는 힌두교의 특성이다. 옛부터 5용(Punchagavia), 즉 #1 우유는 음료로
된다. #2 소의 똥으로 주거의 벽을 만들고, 또 발라서 곽을 낸다. #3 소의 똥에서 황색 염료를
낸다(황색은 인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색으로 취급된다). #4 소의 똥은 비누의 원료로 된다.
#5 소의 똥은 퇴비로 된다고 하여 소는 인도인 생활에는 없어서는 안될 동물이었다.
그러므로 신의 사자로서 이 필요불가결한 소를 소중히 다루어오는 동안에 그만 소 자체가
신으로서 숭앙받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간디는 소에 대해서 인류진화의 최고긍정까지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소는 모든 생물의 상징이며 인간과 동물 사이의 동포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디는 이 온순한 동물에게서 자비심을 발견하는 한편 신이 만든 말
못하는 동물에 대한 연민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
 @p91
  물론 간디 이전에도 개화된 힌두 지도자들은 힌두교의 일반적인 신조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했지만, 이제 간디는 그의 권고와 시범 및 실제적인 개혁운동을 통해서
진보적인 견해를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바르나슈라마를 그릇되게
해석함으로써 생겨난 불가촉천민의 존재를 없애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간디의
해석의 각별한 특징은 힌두교의 종교적 가치에 대한 그의 재평가에 있었다. 힌두교의
방대한 전통 속에는, 아바타르, 푸나르잔마, 바르나슈라마, 우상숭배와 같은 독단적 교리와
사티아, 아힌사, 브라흐마차르야, 아파리그라하와 같은 도덕원리가 병존하고 있었다. 재래식
신조는 전자 즉 독단적 요소를 힌두교의 실체로 보고, 후자 즉 도덕적 요소를 대개
우유적인 것으로 보았다. 간디는 그 위치를 전도시켜 네 개의 도덕원리가 힌두교의
본질적인 핵심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찬가지로 힌두교도 사이에는 힌두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도 존중하는 심정이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간디는 그런 심정을 하나의 기본원리,
즉 모든 종교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힌두교도는 자신의 종교를 고수하는 반면에 다른
종교들도 똑같이 승경하며, 다른 종교들의 받아들일 수 있는 온갖 장점을 힌두교 안에
섭취해야 한다는 하나의 원리로 높였다.
 @p92
  그는 힌두교도가 아닌 사람들을 힌두교도로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비난했다. 비록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힌두교로 개종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간디는 그 사람을 설득하여 힌두교에서
발견한 온갖 장점을 그 자신의 종교속에서 섭취하도록 하게 하려고 애쓰곤 하였다. 간디는
이 넓은 아량이야말로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힌두교의 특징이라고 믿었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간디는 진리와 사랑은
기본적인 종교적 원리임을 발견했고, 또 여러 종교를 연구한 결과 모든 종교는 이 두
원리를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음을 간디가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힌두교는
그런 진리와 사랑에다 자기억제와 자기부인을 합쳐서 네 개를 기본적인 덕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힌두교에 대한 간디 자신의 해석을 통해서 이런 네 개의 도덕원리는 힌두교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보다 넓고, 보다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네 개의 도덕원리
이외에 그가 러스킨과 톨스토이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리고는 [바가바드
기타]에서 나중에 다시 발견했던 생각, 즉 만인은 자기 자신이 손수 일하여 자신의 생계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비착취와 비소유에 대한 필요한 보충으로서 간디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브레드 레이버 '(bread-labour)를 힌두교의 다섯번째의
기본원리로 삼게 되었다.
  우리는 다음에 간디의 종교적 신앙을 구성하는 위에 든 다섯 개의 원리들을 좀더 상세하게
검토하기로 하자.
  2) 기본적 신조
  (1) 사티아
 사티아라는 말은 간디의 저작에서는 네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Husain, p.22).
 #1 절대적 실재, 절대적 존재 내지 신. 사티아란 원래 사트(sat), 곧 '존재'에 연유하는
말로서, 간디에 의하면, 실재 이]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 내지 진리는 신의
가장 중요한 이름이지만, 신이 진리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진리야말로 신이라고 하늘편이
더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p93
 #2 진실과 일치하는 지식, 영원한 천복인 절대적, 지식. 진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참된
지식이 있고, 진실이 없는 곳에는 참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식이라는 말은
신의 이름과 관련되지만, 참된 지식 곧 신을 가지게 되면 온갖 고통에서 자유롭다. 왜냐하면
고통은 사실 무지, 불완전, 비 항구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고통에서의 완전한 자유는
'천복' (bliss)이라고 불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순수한 행복의 상태이다.
 #3 성실. 간디가 '언어와 사상에 있어서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그런 참된 것을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4 정의. 공정하고 정직한 것, 또는 간디의 말을 하면 '행동에 있어서의 진실'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간디가 '진리의 법 '이라고 부르는 전도덕률의 준수를 의미한다.
  간디가 종교와 도덕의 목적인 사티아의 추구와 실천에 관해 말할 때, 그는 '사티아'라는
말의 네 가지 뜻, 즉 구도자가 추1해야 할 실재와 실재에 일치하는 지식, 그리고 구도자가
실천해야 할 정실과 정의를 모두 생각하고 있다. 사티아라는 말로 간디가 표시하는 이런 네
가지 의미 중에서, 성실과 정의는 절대적 실재에 관한 지식 내지 인식이라는 최고목적을
우리가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그러면서 간디는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게끔, 수단과 목적을 함께 표시하는 데에 '사티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까?
간디는 수단과 목적은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를 같은 말로 부르고 있다.
수단과목적의 동일시는 그의 도덕론의 핵심이며, 그것은 신에, 관한 형이상학] 이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간디에 있어서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인 절대적 실재 내지 신은 두
개의 존재양식을 가진다. 하나의 양식은 자연의 세계와 인간 자신의 참된 본성과 부합되는
경우요, 다른 하나의 양식은 그것을 초월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성실과 정의를
준수할 때 그것은 신의 존재의 초월적인 측면을 인식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p94
  그러나 동시에 이 성실과 정의는 인간의 참된 본성의 표현이며, 신의 존재의 내재적인
측면의 한 표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간디는 도덕행위의 수단과 목적을 하나로 보며, 양자를
표시하는 데 '사티아'라는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간디의
도덕철학에서 수단의 순수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상 간디의
도덕철학에서는 수단과 목적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다. 간디는 목적을 일련의 수단의
맨 나중 것으로 본다. 즉 간디에 있어서는 목적을 향해 취해지는 하나하나의 단계는 그
목적의 부분적 실련이요, 그 최종단계는 목적이라고 부르고, 앞선 모든 단계는 수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관습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정당한 행위는 그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
목적인 진리의 부분적인 실현이다.
  (2) 아힌사
  그러나 진리를 깨닫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리 추구에 전심, 전력을 다하는
사람일지라도 부분적인 진리와 불완전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육신을 가짐으로써 감정과 욕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은 흐려져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진리는 우리에게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자기의 감정과 욕망을 억제하고 자신을 점차로 육신의 제약에서 해방시키는데 도움이
될 어떤 힘이 필요하다. 이 힘을 간디는 아힌사 속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외재적인 힘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는 칩으로, '파괴의 법'보다 더 강력한 '인류의 영원한 법'인데,
간디는 그 적극적인 측면을 '사랑의 법'이라 부르고, 그 소극적인 측면을 '비폭력의 법'이라
불렀다.
  K.R.크리팔라니는 "간디는 특히 아힌사의 사도이다. 아힌사는 후일 증오와 학살의
악몽에서 인간을 구출할 숨결인 동시에 그의 생명의 숨결이었다" (K.R. Kripalani, Gandhi,
Tagore and Nehru, 삼본달철, 일역본, p.42)고 말하고 있다.
 @p95
  사실 간디에 있어서는 아힌사란 '불상해 ' 비폭력'과 같은 부정적, 소극적인 면보다도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으로 대한다는 적극적인 면을 더 의미하고 있다. 이 점은 "비겁과 폭력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는 나는 폭력을 택하도록 권한다...그러나 나는
비폭력은 폭력보다도 월등히 나으며 용서는 처벌보다도 한층 더 떳떳함을 알고 있다"
(Rolland, 일역본, p.55-56)는 간디의 말에서 미루어 보다도 알 수 있다.
  간디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진리를 행동으로
추구하는 자가 만일 자기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허위와 부정의 세력인 적을 폭력으로
타도한다면, 그는 단지 외관상의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따름이요, 실은 그 싸움에 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정신적 성장은 억제당하고, 그의 진리추구는 쉬워지기보다는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자기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개인들은 사실 악한 세력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며, 진정한 적은 그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안에 많건 적건 깃들어 있는
폭력의 세력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과 싸우면서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진정한 적을 잊고 있다.
  * : 아힌사에 관해서 간디는 소년시절부터 뼈저린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15세 때 형의
팔찌에서 금을 조금 깎아냈지만, 양심의 가책을 이길 길이 없어 마침내 그 고백을 써서
부친에게 주었다. 그 속에는 고백과 아울러 그것에 대한 적당한 벌을 달라고 씌어 있었다.
부친은 당시 치질로 누워 있었다. 부친이 그것을 다 읽고 나자, 진주와 같은 눈물이 탐을
흘러 그 종이를 적시었다. 부친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그 종이를 찢었다. 나는
소리내어 울었다. 이 광경은 지금도 생생하게 마음에 남아 있다. 부친의 사랑의 눈물은 나의
마음을 정화하고 내 죄를 씻어주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아힌사에 대한 사실상의 교훈이었다.
당시 나는 이것을 부친의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순수한
아힌사였음을 알고있다. 그런 아힌사의 정신이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되면, 그것은 접하는
일체의 것을 변질시킨다. 그 힘에는 한계가 없다."(Autobiography, PP.27-28)
 @p96
  또한 그는 1902년 12월, 제 2차 귀국 후 남아프리카에 돌아갔을 때, 더반에 상륙하자,
그릇된 정보를 믿고 있던 백인들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도 그들을
용서해주라고 했고(같은 책, p.195) 또 1911년에서 1912년 무렵, 피닉스 농원에서 두 사람이
부도덕한 일을 했을 때, 간디는 그들을 벌하는 대신에 자기 스스로가 참회하기 위해 7일간
의 단식과 4개월 반의 기간에 걸쳐 1일 1식밖에 취하지 않았다(같은 책, p.342). 간디의
일생을 통해서 보면 이렇듯 아힌사를 실천에 옮긴 예는 허다하지만, 요컨대 그때마다
간디는 아힌사의 위력을 절감하고 점점 더 아힌사를 믿게 되었다.
  만일 그가 악한 세력의 회생자인 외부의 적을 동정과 사랑으로 대하는 한편, 내부의 적인
자기 자신의 사나운 격정과 싸우며 이에 이긴다면, 그의 인격은 평정을 얻고 그의 시각은
투명하게 되어 자기 앞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진리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힌사의 길이다. 구도자는 이 길을 통해서 진리에로 전진할 수 있는 동시에, 그의 인격의
매력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개심케 하여 자기와 보조를 맞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디는 이 아힌사의 놀라운 힘을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아힌사를 비단 개인을
개심시키는 데뿐 아니라, 사회적 부정과 싸우고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심지어는 외국의 침략에 대해 조국을 방위하는 데도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리의 추구를 방해하는 내부적인 적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것은 성욕과 소유욕인데,
그것들은 무한히 확대할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자비하게 억제하지 않는 한,
그것들은 인간의 온 인격을 지배하고 심적평정을 교란하고 판단을 그르치게 하며 생각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구도자는 브파흐마차르야와
아파리그라하를 준수함으로써 일반적으로는 사나운 격정을 누르고, 특수하게는 성욕과
소유욕을 억제하기 위하여 사랑의 침을 빌어야 한다는 것이다.
 @p97
  (3) 브라흐마차르야
  브라흐마차르야는 '순결'이며 경우에 따라 '자제' 또는 '자기정화'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단순히 '성욕의 억제'라고 이해되고 있지만, 이런 식의 이해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간디는 먼저 그런 오해를 일소하기를 원한다.
  브라흐마차르야는 문자 그대로는 "브라흐만(*) 곧 진리를 탐구하는 데 적합한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브라흐마차르야의 완전한 실행은 브라흐만의 실현을 의미한다."
(Autobiography, p.208) 그러므로 간디는 "브라흐마차르야는... 결코 간단히 달성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또한 단순히 육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브라흐마차르야는
육욕의 억제에서 시작되기는 하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Autobiography, p.317)
라고 술회하면서, 그것을 위해서는 "전감각기관의 통제, 더 나아가서 생각, 말, 행위의
일체의 통제 없이는 불가능하며" (옥성강사랑, 위의 책, p.370) 특히 미각의 통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Autobiography, p.209).
  * : 브라만교의 최고원리 또는 신이다. 신이나 최고존재를 의미하는 경우에는
비인격적이며 일체의 성격과 행동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말로는 범이라고
옳기고 있는데, 쉽게 말하면, 신 내지 진리라 해도 좋다.
  감각적으로 싫지 않은 것을 영원히 포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간디는 감각적 욕망은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목적에 이바지할 때에만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음식물은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고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서 취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성욕도 단지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수의 아기를 낳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성교는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p98
  브라흐마차르야를 완전히 달성하려는 사람은 육욕에 관한 것을 꿈도 꾸어서는 안되지만,
간디는 육체적인 행동이나 말을 통제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으나 생각에 관해서는 노력해야
할 점이 많으며, 깨어 있을 동안은 그래도 불순한 생각을 억제할 수 있으나 잠잘 동안은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부단히 노력은 하고 있으며,
살아 있는 동안에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는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생각의 통제에 의해서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안되고,
아무래도 신의 은총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생각, 말, 행위에 관한 전감각기관의 통제에 의해서 브라흐마차르야는 점차 그 실현의
방향으로 나가고, 이와 더불어 일종의 생명력이 체내에서 배양되게 된다. 만일 이 생명력이
올바른 목적을 위해 옳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최고단계의 창조적 에너지로 된다. 게다가
생각, 말, 행위 중에서 생각이 말과 행위의 근원이므로 완전히 통제된 생각은 그 자신
최고의 잠재력이며 따라서 최고의 자활력으로 될 수 있다.
  (4) 아파리그라하
  아파리그라하는 '비소유'이다. 여기서 소유란 '장래를 위한 준비 '(옥성강사랑, 위의 책,
p.374)를 의미한다. "조물주는 그날그날의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족하리만큼은
만들어내고 있으므로 만일 각자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하고 그 이상은 취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는 아사자는 없을 것이다." (Husain, p.30) 그러므로 아파리그라하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된다면, 그날그날의 식사로써 족하며, 그날그날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인간이 아니라 조물주의 임무이다. 그러나 비소유의 문제를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육체도 하나의 소유로 된다. 육체는 힌두 사상에 의하면 '카르마'(karma)(*)의 결과이며,
달리 말하면 향락에 대한 욕망의 결과이다. 그 때문에 모든 생물은 한결같이 생사유전의
윤회 속에 있게 마련이다. 만일 이 욕망이 없어진다면, 육체가 존재할 아무런 필요도 없게
되고, 우리 인간은 윤회에서 해방되어 우리의 정신은 자유독립의 존재를 얻을 수가 있다.
  * 카르마: 힌두교의 재생의 관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카르마의 법칙에 얽매어, 전생에
있어서의 그 행동의 결과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즉 전생에서 지은 선악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천세에서 응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과, 운명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없이라고 번역된다.
 @p99
  따라서 육체의 욕망을 포기하는 일이 비소유의 이상이다. 그러나 육체가 있는 한은, 이
육체를 사회봉사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단지 봉사를 위해서만 먹고
마시고 자며 깨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야말로 인간에게 실제적인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디의 말대로, 이 비소유의 이상은 달성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서,
현사회상태하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것을 달성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간디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이상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의
소유를 필요한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간디의 종교, 도덕 철학에 있어서의 브라흐마차르야와 아파리그라하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다음 두 가지 점을 명심해야 한다(Husain, p.28) .첫째로, 간디는 많은 교양 있는
힌두교도들처럼, 베단타(vedanta)파(*) 의 일원론을 믿고 있었다.
  * : 힌두 철학의 여섯 파 중 가장 중요한 일파이다. 우파니샤드를 근본으로 하는 우주의
일원론적인 철학이다.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 존재의 부분들을 이루고 있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당연한
귀결에 도달한다. 따라서 진정한 자아의 실현을 원하는 각 개인은 만인에게 좋은 일은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만인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 그러나 관능적
쾌락과 개인적 소유는 이성의 빛을 가리게 하며, 그런 욕망에 사로잡힌 개인은 무지와 이기주의
속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라는 위대한 진리를 잃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간디에 의하면 성욕과
세속적 소유를 버리는 일이야말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필요한 단계이다.
 @p100
  둘째로, 자기 삶의 방향을 전환시킨 간디의 근본적인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이 겪고
있는 고난은 이 세상에서 가장 뚜렷한 실재라고 확신케 했다. 그는 이 삶과 이 세상은
비실재적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반대하였다. 고통과 고난은 실재하고 있다는 이 어쩔 수
없는 의식 때문에 그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실재성을 이 세상에 부여했다. 환희나 행복은
허무하고 무상한 세상에서 한낱 꿈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동포가 겪고 있는 고난을
비실재적인 것이라고 하여 잊어버릴 수는 언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의 고난은
냉엄한 현실이라는 것이 간디의 주장이었다. 인간의 고난은 엄연한 현실이라고 느낀 것이
간디의 기본적인 경험이었지만, 그런 고난에 끝장을 내고야 말겠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결심이었다. 이런 결심이야말로 그의 온 마음을 지배하던 생각이요, 그의 온갖 행동의 밑에
깔려 있던 동기였다. 사실 그의 종교적 및 도덕적 가르침은 다름아닌 이런 내적 충동의
합리화 내지 지적 해석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동포에 대한 사랑과 봉사에 전심,
전력하도록 원했다.
  그런데 다음 세 가지 요인들 즉 #1 증오, 복수심 등과 같은 사나운 격정, #2 감각적 욕망,
특히 성욕, #3 취득욕과 소유욕이 그들로 하여금 전심,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한편 그는 아힌사, 브라흐마차르야, 아파리그라하를 통해서 위와 같은 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진리와 구원을 달성하는 유일한 수단인 사랑과 봉사의 힘을 발휘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전통적 종교가 강조하던 기도나 단식과 같은 다른 수단도 역시
중요하다고 간디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봉사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런 수단은 아무런
의미도 효과도 없다고 그는 믿었다.
  이런 관점에 서서 보아야만 성욕 억제에 대한 간디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사회적 본능이라고 보는 이 성욕이라는 본능은 간디의 견해에 의하면
비사회적 내지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랑을 한 사람에게만 배타적으로 주기 때문이다.
 @p101
  그러므로 간디는 사랑과 진리에 전심, 전력을 바치려는 사람에게는 결혼을 금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건부로 결혼을 허용한다. 즉 원하는 수의 아기를 낳으면, 부부관계는
동지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유에 관해서는, 간디는 자기의 직접적인 필요 이상의 소유는 만일 그것을 단순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보유한다면, 확실히 사랑과 봉사에의 길을 가로막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인의 이득을 위해 수탁자로서 자신의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므로 그는 소유를 무조건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자기의 소유를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전적으로 불법이며, 그것은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보았다.
  (5) 브레드 레이버
  '브레드 레이버' (bread-labour)란 "빵에 대한 권리를 얻기 위한 생산적인 손일"(Husain,
p.30)이다. 간디에 의하면, 자기 소유의 이기적 사용 이외에도 진리에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도둑질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손일에 의해서 무엇인가 생산함으로써
남에게 이바지하는 일은 하지 않고 단지 남의 노동의 성과만을 향유하는 일이다. 따라서
간디의 종교, 도덕률의 다섯 번째의 기본 원리는, 손일을 직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도
정기적으로 어느 정도의 브레드 레이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디가 장려한 물레질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이미 남아프리카 시절에 순전히 종교적 및 도덕적 원리로서 브레드 레이버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 돌아온 후 그는 브레드 레이버의 최선의 것으로서 물레질을
택하였다. 물론 이에는 정치적 및 경제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주동기는 여전히
종교적, 도덕적인 데 있었다. 간디 자신의 말대로, 그는 이 아이디어를 처음에는 러스킨과
톨스토이에게서 얻었고, 나중에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그의 신념을 한층 더 굳게 했다.
 @p102
  이 이외에도 간디는 사랑과 진리의 이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힌두교의 다른 두 교의에
관해서도 강조하였다. 하나는 도둑질과 착취를 하지 말라는 '아스테야'(asteya)이고, 다른
하나는 공포심을 갖지 말라는 '아브하야'(abhaya)이다. 간디는 특히 신 이외의 누구에
대해서도 공포심을 갖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공포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고상한
성품들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하다.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거나 진리를 소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Husain, p.31)고 역설하였다.
  * : 네루는 그의 [인도의 발견](p.311)에서 "개개인에게도, 민족 전체에게도 간디의
최대의 선물은... 아브하야, 즉 공포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S.H.루돌프도 인도에 대한 간디의 최대의 공헌은 인도 민중의 가슴속에서 공포심을
제거하여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민족자존을 위해 귈기케 한 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The
New Courage; An Essay on Gandhi's Psychology," World Politics vol.16, no. 1, Oct.
1963).
  이상으로 우리는 간디의 종교적 및 도덕적 사상-개인의 정신훈련에 관한 한-의 윤곽을
대강 살펴보았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간디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신비적이기보다는
예언자적이었으므로, 그는 단지 개인에 있어서 뿐 아니라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종교적 및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그의 종교와 도덕에 대한 개념은 아직 완전히
논해진 것은 아니므로 다음 항에서 사티아와 아힌사에 의거하는 그의 사회에 대한 사상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2. 사회적 이상
  1) 종교적 이념과 사회적 이상
  간디의 종교의식은 신비적이기보다는 예언자적이기 때문에, 그는 진리에의 길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직관의 명멸하는 섬광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도덕을 통해서 훈련된 이성의
한결같은 빛에 의거하였다. 그러나 간디에게 있어서는 도덕이란 고의 이른바 '지상명령처럼
비인격적인 엄격한 법칙은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나타나는 '사랑의 법'이었다.
그러므로 진리의 추구는 종교와 도덕의 길을 따라 그를 사회봉사의 영역으로 인도했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신의 실현이니만큼 인간의 온갖 사회적, 정치적 및 종교적 활동은
신을 본다는 궁극적 목적에 의해서 인도되지 않으면 안된다. 온 인류에 대한 직접적인
봉사가 인간의 노력의 불가결의 임무로 된다. 그 이유는 신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신을
그의 피조물 속에서 보고, 그것과 하나로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온 인류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Husain, p.32)고 간디는 말했다.
  그러나 간디는 온 인류 중에서도 우선 인도 국민에게 봉사하기로 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은 남을 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남을 구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먼저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같은 책, p. 12)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실로 인도 국민은 내적 불화와 도덕적 퇴폐 때문에 정치적으로
예속당하여 말할 수 없는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들을 도덕적, 경제적 및
정신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그중에서도 특히 억압당하고 낙후되고 있는
계층들에게, 자존심과 자기신뢰감을 주입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이것은 외국인이건
인도인이건간에 그들의 착취자에 대해서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권리를 위한
비폭력 투쟁을 수행하도록 격려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봉사와 사화개혁의 대의와 더불어 사회정의와 정치적 자유의 대의를 높이
쳐들어야만 했다. 그는 진리를, 즉 신을 추구하는 구도자였으나 신은 민중, 그것도 특히
억압당하고 있는 계층에 대한 봉사 없이는 찾을 수 없다고 믿었지만, 그런 계층에 대한
봉사는 정치에 참여하지는 불가능하므로 그는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p104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대한 간디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동기에 연유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 좋은 사회나 국가는 목적 자체는 아니고, 그의 이른바 진리 또는 신 혹은
구원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별로 강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그는 정치에 관여할 때에는 언제
나 전심, 전력을 다했다. 이는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도덕철학에서는
수단은 목적에 못지 않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논한 대로, 간디는 수단을 목적과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목적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간디에게
있어서는 진리와 비폭력에 의거하는 정치활동은 곧 진리 그 자체를 실현하는 한 단계였다
  그러므로 간디의 사회적 이상을 이해하려면, 그런 이상을 그의 종교적 배경하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의 앞날의 생애의 전과정을 결정했던 남아프리카에서의 근본적인
경험에 관해서 이미 살펴보았다.
  그가 단순히 인도인이기 때문에 당했던 모욕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그는 느꼈다. 이 사실은 자기의 중심적인 종교적 이념과 밀접히 관련되던 그의 기본적인
사회적 및 정치적 개념이 인간 인격의 위대성, 즉 인간 인격의 자유와 존엄의 신성성에
대한 개념이었음을 드러내준다. 그의 사회적 이상은 오든 개인에게, 약간의 육체적
안락에다가 개인 인격의 완성과, 신의 실현을 의미하는 자기표현 및 자아실현을 위한
최대의 자유와 기회를 마련하려는 일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완전한 지적, 도덕적, 정신적
발전은 오직 각 개인이 최대의 자유와 최대의 존엄성을 누리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므로 각개인 안에는 신의 신성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다 같이 존경받을 가치가 있으며, 개인에 대한 모욕은 모든 신의 피조물에 대한
모욕이 된다.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와 존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온갖 사회적 부정의와 경제적 착취가
없는-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없는-진리와 사랑의 터전 위에 인간사회를 세울 필요가 있다.
 @p105
  간디는 이런 사회가 어떠하리라는 데 대해서는 명백히 제시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을
그에게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사회적 흑은 정치적 이론가가 아니라 도덕적,
정신적 개혁가였다. 그가 스스로 열중한 과업은 이상사회에 관한 공들인 이론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으로 하여금 그런 이상사회에 대한 매혹적인 별견을 가지게 하여, 각
개인으로 하여금 그런 사회를 위해 자기정화와 자기수양을 통해서 준비케 하려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수단을 조심하면 목적은 자연히 스스로를 돌보리라"는 그의 원리에 따라, 간디는
여기저기서 자기가 그리는 이상사회의 특징에 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 정도로 그쳤다.
그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고자 비폭력투쟁을 위해서 인도와 다른 국민들을 훈련하기를
원하던 그 수단에 관해서는 보다 충분히, 보다 치밀하게 논하였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런 수단은 새 교육, '건설적 프로그램' 및 사티아그라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간디가 '라므라자' (Ramraja.신이 다스리는, 또는 순수한 도덕적 권위에 의거하는
이상사회)에 대해서 가끔 한 짤막짤막한 말들은 희미하나마 그의 이상사회의 윤곽을
드러내주고 있다.
  2) 라므라자
  간디가 그리던 이상사회인 라므라자의 윤곽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간디의 근대문명
비판과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간디에 의하면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영국인이 아니다. 철도, 전신, 전화 그리고
문명의 승리라고 일컫는 거의 모든 발명에 의한 근대문명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며,
"봄베이, 컬커타, 기타 인도의 주요 도시는 참으로 악덕의 중심지"이다. "비록 내일 영국의
지배가 근대적 방법에 의거하는 인도인의 지배로 대치된다 하더라도, 영국이 빼앗아가던
화폐를 약간 인도에 붙잡아둘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도인의 생활은 나아지지는
않으리라"고도 말하고 있다. 또한 의학은 "농축된 흑마술의 엑스(extract)"치며, 병원은
"악마가 그 왕국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해온 도구이며...
악덕, 불행, 퇴폐와 진정한 노예화를 영구화하는 것이다....만일 성병 또는 폐병을 고치는 병
원이 언었더 라면, 폐병 환자와 성적악덕은 훨씬 적었으리 라" (Namboodiripad, 일역본,
p.24)는 것이다. 그리고 "기계조직은 큰 죄악이다... 그것은 국민을 노예화한다. 또한 금전은
독이다. 성적인 악덕과 마찬가지로..."라는 것이다.
  요컨대 로맹 롤랑의 말대로 허위, 탐욕, 포악으로 차 있는 근대문명의 진상을 20년간에
걸친 남아프리카 체재를 통해서 간파한 간디에게는 "문명이란 단지 이름뿐이다. 힌두교의
표현을 빌면 바로 '암흑시대'이다. 그것은 물질상의 행복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은 조금도 영혼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럽인을 미치게 하여
그들을 금전의 노예로 만들고, 그들에게 평화와 내면생활마저 누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약자와 노동자계급에게는 지옥이다. 그것은 민족의 생활력을 소모시킨다. 이
악마문명은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리라. 영국인은 개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지만
문명병에 걸려 있다. 그러므로서 양문명이야 말로 인도의 진정한 적으로 보였다"(Rolland,
일역본, PP.46-47).인도의 구제는 그런 문명병에 걸리지 않는 데 있는 만큼 철도, 전신,
병원, 변호사, 의사 등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간디는 그런 것들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며, 자연적으로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음에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간디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간디의 기본적인
정치적 개념에 있어서는 개인이 사회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사회적
요인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도덕적 및 정신적 발전은 물론 최고의
정치적 가치를 가지나, 그러한 발전은 오직 통로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사회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의 자유는 최고로 신성한 것이나 아무런 한계도
없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자유와 복지에 의해서 제약되어야만 한다.
 @p107
  이는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이 전체사회의 복지를 위하여 사회적 억제에 순종하는 편이
개인과 그가 속해 있는 사회를 다같이 부유케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여러 가지 기본권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간디는 충분한
지적 및 도덕적 발전을 위한 권리라는 오직 하나의 기본권만을 믿고 있다. 그리고 간디에
의하면, 이와 같은 발전은 각 개인이 동포에 대한 봉사에 헌신할 때에만, 달리 말하면,
사회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의무를 다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한다. 만일 각 개인이
타인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 안
가서 누구도 그의 여러 권리를 요구할 필요가 없게 될-요구하지 않아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에-사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그들의 의무는 등한시하고, 그들의
권리만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 유리한 상태로 인도하지는 않을 것
이다.
  간디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는 개인이 자기의 도덕적 내지 정신적 바탕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을 저해하는 밖으로부터의
제약은 없고, 필요한 모든 억제는 자신의 양심이나 도덕의식에 의해서 안으로부터 핵해진다.
그런 사회는 협소한 자치단위들로 구성되는 지방분권화된 사회가 아니고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다. 광대한 중앙집권화된 사회나 국가는 폭력의 사용 없이 유지될 수 없을 터인데,
이는 비폭력이라는 간디의 이념과는 양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분권화된 사회 속의 한 작은 단위는 마치 한 가족과도 같아서, 그 안에서는 개인은
인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광대한 중앙집권화된 사회나 국가는 사랑의 명주실
대신에 법의 철제로써 개인을 묶어 매는 하나의 거대하고도 몰인정한 조직체이다. 따라서
간디는 어떠한 형태의 국가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는 서방제국에 현존하는 온갖 유형의
국가는 각각 그 국민의 체질에 적합한 것이므로 인도는 그런 국가를 본뜰 것이 아니라
인도에 적합한 라므라자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108
  그는 라므라자에 관한 완전한 구상을 제시한 바는 없으나 그래도 한가지 사실만은 꽤
분명하다. 즉 그의 라므라자는 완전한 무정부상태요, 인간성에 내재하는 도덕률 이외의
어떠한 법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고, 사랑의 침 이외의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 하나의 국가없는 사회이다.
  이와 같은 비폭력, 무국가 사회에서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에 족한 힘은 사티아그라하의
형태로 사용되는 사랑의 힘 또는 영혼의 힘이다. 사티아그라하는 한 개인이나 계급 또는
국가에 의한 각각 다른 개인이나 계급 또는 국가에 대한 억압이나 착취에 항거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간디는 생각하고 있었다. 사티아그라하의 영묘한 힘은 억압자의
마음속에 여태까지 잠재하고 있던 사랑의 감정을 깨우치게 하여 그 억압자는 아무런 외부적
압력 없이도 그자신의 보다 고상한 품성의 개발을 통해서 공정하게, 그리고 심지어는
관대하게 행동하려고 하게 된다. 많은 사색과 실험을 한 뒤에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의 온갖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이에 관해서는 다음 실천의 장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모든 개인이 똑같은 고유한 가치를 가지는 간디의 이상사회에서는, 정치적 평등뿐 아니라
사회적 평등도 자연히 있게 될 것이다. 그 사회에서는 출생이나 직업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고귀하다거나 우월하다고 보는 의미에서의 카스트나 계급의 구별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어받은 소질에 의거하는 여러 종류의 카스트(본래의 의미의)는 존속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분업의 건전한 원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한된 의미에서
카스트제도를 용인하던 간디는 계속 카스트의 사슬을 풀어 그것이 제약하거나 속박하는
힘으로는 되지 않도록 하려고 애썼다. 그는 비단 모든 카스트들 사이의 완전한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카스트에서 기질과 능력에 보다 적합한
다른 카스트에로의 이동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카스트제도는 결국, 모든
어린이는 각자의 세습적 직업을 위한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가 자기 안에서
다른 직업에 맞는 각별한 소질을 발견하지 않는 한, 자기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이론이
되고 만다.
 @p109
  만일 인도가 독립하여 세계의 선망의 대상이 될 모범적인 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의사,
변호사, 상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하루의 성실한 일에 대해서 똑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간디는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간디의 사회적 이념과 경제적 이념과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는 경제적 평등은 사회적 평등이라는 도덕원리의 필연적인 귀결로써 받아들인
듯하다. 경제에 대한 그의 기본적 태도는 정치에 대한 그것과 동일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가치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가치도 도덕적 가치에 종속된다.
따라서 도덕원리를 고려에 넣지 않은 경제학은 배척되어야 한다.
  경제학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최선의 방법을 발견하고자 하는 과학이다.
간디에 의하면, 이 방법은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참된 행복은 우리의
욕망을 무한히 증가시키고,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우리를
완전히 지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적당한 한계 안에 머무르게
하는데 있다. 적당하고 정당한 욕망의 기준은, 그런 욕망의 충족이 인류에 봉사하는 우리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간디는 물질적 안락을 그 자체가 악한 것으로 보고, 금욕 그 자체를 가르치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견해는 이렇다. 즉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정신적 발전에 있지만, 이는
오직 동포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 달성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아 물질적
안락이 우리를 돕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허용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물질적 안락이 나태를 낳고, 정신적 발전으로 인도하는 봉사의 길을 가로막게 되면, 그것은
확실히 악이 된다. 심지어 지적인 쾌락도 마땅히 이런 기준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간디는 경제적 가치를, 그리고 문화적 가치까지도 독립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도덕적 및 종교적 가치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p110
  그는 우리에게 적당한 물질적 및 지적 쾌락은 이를 허용하지만, 동시에 그는 육체적 및
지적 필요의 충족이 '관능적 쾌락 추구'에로 타락하지 않도록 경계하기를 원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관능적 쾌락'이란 우리가 인류에 봉사하는 것을 막는 쾌락을 의미한다. 그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자제이다.
  그러나 간디는 인간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제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속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억제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연구한 일은 없으면서도 간디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칩을 통해서, 단순한 억제는 신경을 과민하게 하고 정신적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러한 억제는 정신적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는 그릇된 자제이다. 참된 자제는 생의 보다 높은 목적에 대한 갈구가 심히 커서,
세속적인 쾌락은 그것에 대한 방해로 자발적으로 거부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면 간디가 단지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적절한
육신의 안락은 어느 정도의 것일까 ? 달리 말하면,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필요가 어떠한
경우에도 각 개인마다 충족되어야 할 근본적인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간디는
적빈이나 궁핍을 찬양하기는 커녕, 그것은 도덕적으로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린다고 하여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요컨대 인간의 기본적인 물질적 요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한, 마음의 평정이나 정신적 만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는 의, 식과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주를 포함한다.
간디에 의하면, 이와 같은 의식주의 기본적 필요를 만인에게 확실히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회는, 각 개인이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족할 만한 일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이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직접적 사용을 위해서 생산되는 사회이다.
물론 이와 같은 두 특징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지만, 국가나 정부가 존재할 여지가
없는 간디의 라므라자는 오늘의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심지어 경제면에서도
그것은 현존하는 사회주의 사회와는 아주 다르다.
 @p111
  나의 견해에 의하면, 인도와 세계의 경제조직은 그 조직하에 있는 누구도 의, 식의 결여로
고생해서는 안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누구도 의, 식의 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족한 일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상은 오직 기초적인 생활필수품의
생산수단이 대중의 수중에 들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보편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생산수단은 공기와 물처럼 만인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다른 이들의 착취를
위한 수단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어느 국가, 민족 또는 집단에 의한 생산수단의 독점은
부당하다. 이 간단한 원리를 등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단 이 불행한 나라에서 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역시 궁핍을 목격하고 있다. (Husain, p.42)
  간디의 이러한 견해를 만일 우리가 그의 종교적 및 도덕적 주장에 비추어 검토해 본다면
그와 같은 이상적 경제제도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는 제도임을 알게 된다.
 #1 각자가 손일을 통해서 자기 생계를 세울 기회를 갖는다. 간디의 경우에는 브레드
레이버는 하나의 중요한 종교적 원리이다. 그 원리는 각자가 자신의 손으로 토지를
경작함으로써 스스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을 때에만 엄격하게 준수될 수 있을
뿐이다.
 #2 식량과 기타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 토지는 어느 개인이나 개인들에 속하지는 않고,
'대중의 수중에'들어 있으므로, 대중은 그 토지를 '공기와 물처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대중의 수중에 들어 있다'는 것은 촌락내의 토지 전체가 촌락공동체의 소유물이어야
하며, 모든 촌락민은 집단적으로 또는 공동으로 토지를 경작해야 함을 의미한다.
아파리그라하의 원리에 반하는 토지의 개인소유는 간디의 라므라자에서는 허용될 수가 없다.
  게다가 만일 토지가 어느 개인 또는 개인들에 속한다면, 토지는 만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고, 또한 브레드 레이버의 원리가 보편적으로 준수될 수는 없다.
 @p112
 #3 식량과 의복은 직접사용을 위해서 생산되어야 하지 무역이나 상업을 위한 상품으로서
생산되어서는 안된다.
  분명히 이러한 조건들은 협소한 자급자족적인 촌락공동체들로 구성되는 지방분권화된
농촌경제에서만 충족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사회질서만이 국가와 정부, 군대와
경찰을 필요 없게 하는 엄격하게 비폭력적인 것으로 될 수 있다. 중앙집권과는 필연적으로
이런 온갖 폭력의 수단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협소한 자급자족적인 촌락공동체에 의거하는 지방분권화된 농촌경제야말로 간디가
생각하던 비폭력의 소극적인 조건과 아울러 적극적인 조건도 충족시 켜준다. 즉 그런
경제는 단지 사회에서 폭력을 필요 없게 할 뿐 아니라 사랑과 봉사도 장려해준다.
사회생활에 대한 간디의 견해에 따르면, 각 개인과 다른 사회성원과의 관계는 그와 그의
가족과의 관계에 못지 않게 친밀해야 한다. 그런 관계는 오직 협소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 비록 한 개인이 그의 사랑을 협소한 범위에 국한시킨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와 강도를 보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스와데시에 관한
간디의 교의 밑에 깔려 있는 생각인데, 스와데시야말로 그의 경제학의 도덕적 기초를
이룬다. 간디에 의하면 스와데시란 먼 곳은 그만두고 바로 이웃에 대한 봉사에 우리를
국한하려는 우리의 정신이다(Husain, p.43).
  그러나 우리의 바로 이웃에 대한 봉사는 온 인류에 대한 봉사정신과 융합되어야 한다.
그것은 목적 자체로서가 아니라, 온 인류의 복지라는 더 큰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비폭력적 사회는 필연적으로 지방분권화된 농촌경제를 의미하듯이,
농촌경제는 이번에는 수공업에 의거하는 소규모 공업을 암시하는데, 그 중에서 간디는
물레를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택하였다.
 @p113
  간디는 왜 대규모적인 기계공업을 싫어 했는가는 앞에서 논하였다. 인도교(초자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취지로 하는 종교)에서는 가장 고약한 죄악은 어떤
개인이나 국민이 다른 개인이나 국민을 억압, 착취하는 일이었다. 초는 국제긴장과
국제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선진 공업국가에 의한 후진국가의 착취에 있음을 관찰을 통해
발견하였다. 따라서 그는 현대공업과 그 수단인 기계를 온갖 불행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물론 기계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기계가 한 국민에 의한 다른 국민의 착취라는 이겨내기 어려운 유혹을 제공한다고
믿어 마지않았다. 순수한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기계는 기아와 빈곤을 몰아내고 모든
인간에게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으므로, 그것은 인류에게 하나의 큰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간디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및 도덕적인 것이다. 비록
간디가 산업화가 불가피하게 실업과 착취에로 이끌리라는 그의 신념이 잘못임을 설득당하여
기계가 만인의 복지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또 다른
도덕상의 이론이 여전히 남아 있다. 즉 만일 생산이 몇몇 산업중 심지에 집중되고, 그
분배를 위해 복잡하고 성가신 방법들이 채용된다면, 부정직한 사람들이 사기와 모리와
투기의 기회를 가지게 마련이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그런 것들은 모두, 각자가 자신의
용도나 바로 이웃에의 분배를 위해서 자기 손으로 물품을 생산하는 소규모의 자급자족적
단위로 구성되는 지방분권화된 농촌경제를 채택함으로써 비로소 제거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박하고 목가적인 경제질서를 인도에서 이룩하려는 것이 간디의 꿈이었다.
그는 모든 농촌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필요를 바로 충족하기에 족할 만큼은 생산하는
자급자족적인 단위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는 기계 자체에 반대한 것도 아니고, 현대식
기계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보던 이윤과 착취를 위한 생산에 반대하였다. 만일 그런 기계가
촌락 자체내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그것이 그 자급자족적인 경제를 방해함이 없이 사용될
수 있다면, 그는 결코 기계에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기계가 대규모의 산업화의
수단으로 된다면, 촌락은 착취와 파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촌락의 종말은 인도의
종말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국토는 자연적 실체로서 계속 존재할지는 모르나 그 온 성격은
타락하게 되어 그 수립이 인도의 사명인 비폭력적 사회에 대한 온갖 희망을 사라지게 하고 말
것이다.
 @p114
    3. 독립 후의 인도상
  1) 타협
  진리와 사랑은 간디에게 있어서는 도덕행위의 최고형태인 동시에 동일한 절대적 실재의 두
측면이다. 진리와 사랑의 완전한 실현은 그의 종교적 이상이었지만, 그런 이상을 사회생활에
적용하여 구상해낸 것이 그의 '라므라자'라는 사회의 이상이었다. 만일 그가 단순한
환상가요, 자기의 사회적 이상은 그 구상에 있어서 완전하다고 믿을 수 있었더라면, 그는
자기의 이상을 공들여 생각해내어, 그것을 가능한 한 최단시일 안에 실현시키도록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디는 '실제적인 이상주의자였다(holland, 일역본, p.53). 따라서 그는
진리와 사랑의 이념을 인간이 일찍이 생각해낼 수 있었던 그 어떤 사회적 이상으로 나타낼
수는 결코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회적 이상도 완전무결하거나
최종적일 수는 없다. 게다가 그는 이런 불완전한 이상마저 용이하게 또는 신속하게 실현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라므라자'는 사람들이 그것을 향해 나아가면
갈수록 점점 뒤로 물러서는 머나먼 하나의 목표였다. 그러나 [기타]에서 선언한 사심 없는
행위의 원리를 간디는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구도자가 진리를 추구하면서
내딛는 하나의 발걸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였다.
 @p115
  간디는 자기의 사회적 이상은 먼 저편에 있으므로, 가까운 장래에는 도달될 수 없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면 간디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에 의해서 대치될 때까지는 현사회질서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기를 원했을까? 그의 가르침도 그의 실천도 다 같이 환경과의
적절한 타협에 찬성하고 있다. 실제 타협은 간디의 도덕철학의 극히 중요한 원리이다. 그는
타협을 크게 강조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어떠한 사회적 이론이나 이상도 불완전하므로
누구도 자기는 절대로 정당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얼기 때문이다. 둘째로, 어떠한 이상도
달성하기는 어려우므로 일반적으로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틈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타협은 원리 원칙상에서가 아니고 세목에서만, 본질적인 것에서가 아니고
비본질적인 것에서만 허용된다. 네루는 "간디는 몇몇 원칙은 바위와도 간이 고집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 및 환경에다 순응시켜, 다른 사람들 특히 국민대중의
강약과 그들 대중이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어느 정도까지 실행할 수 있는가를
고려하는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Discovery, pp.390-91)고 말하고 있다.
  간디의 견해에 따르면, 세부의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사항에 있어서의 타협은 단지
허용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런 타협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이의 마음속에, 생명을 바치고라도 본질적인 것만은 견지하려는 의지를 강화해주기
때문이다. 간디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진리, 사랑,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는 하나라는
것 등이다. 이런 도덕원리에 대한 그의 신념은 절대적이며 확고부동하다. 이 신념을
약화시키거나 변질시키는 어떠한 타협도 그로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원리들을
실천에 옮김에 있어서는 그는 환경이나 인간성의 여러 약점과 기꺼이 타협을 한다.
그렇지만 타협은 그런 이상을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해보았으나 실패한 연후에 한하며, 또한
타협은 그 이상의 높은 수준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해져야만 한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 이상을 변질시키거나 그것을 자기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그때그때 부득이 타협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이상에 도달하려고 부단히 성의껏 노력해야만 한다.
 @p116
  개인들에 관한 한, 만일 그들이 확고한 신념과 굳은 결의를 가지는 경우에는, 그들은
역경에 처해서도 더 높은 도덕원리를 지킬 수가 있고, 또한 스스로 세운 개인적인 이상을
달성하는 데 간혹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적 이상은 그때그때의 환경에 훨씬 더
의존하고 있는데다가 그런 이상은 서로 다른 기질과 능력을 가지는 사람들의 일치된
공동행동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런 이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많은 요인들을
고려에 넣어야 하고, 또한 그때그때 타협을 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상이하며
때로는 상충하는 여러 견해들을 조화시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간디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라므라자의 꿈은 가까운 장래에는 실현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간디는 인도국민에게 권하던 머나먼 여행의 제한된 제 1단계를 간단히
말함으로써 타협을 지었던 것이다.
  2) 제1단계
  인도가 독립을 하게 되면, 간디는 자기의 이상인 전적으로 비폭력적인 사회에 이르는
하나의 준비단계로서 적절하게 비폭력적인 세속민주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과도기적 계획에 관해서 가끔 논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그가 자기의 궁극적인
사회적 이상에 관해서 논한 것들과 뒤섞여 있다. 그런데 S.A.후세인에 의하면, 부주의한
독자는 간디의 정치적 및 사회적 이념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고 오해하기 쉬우나, 그런
이념을 주의 깊게 검토해보면 그 이념들에는 두갈래의 뚜렷한 사상경향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한다. 즉 하나는 그가 정책과 방편은 고려에 넣지 않고 그 순수성을 고스란히
보전하려고 하던 완전히 비폭력적인 사회에 대한 이상에 관해서 논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현존하는 환경과의 합리적인 타협을 통해서 가까운 장래에 실현하기를 원하는 국민국가에
관한 실제적 계획에 대해서 논한 것이다. 이 두 경향을 혼합만 하지 않는다면, 간디의
사상에는 아무런 모순도 발견되지 않으리라고 한다 (Husain, p.50).
 @p117
  과도기를 위해서 일망정 어떤 형태의 국가를 용인했다는 이 사실 자체가 간디로서는
최대한의 타협이었다. 왜냐하면 국가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디는 만일 적절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민주국가 안에서는 폭력적인 요소는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민주주의의 정신은 밖에서 부가될 수는 없고, 그것은
안에서 나와야 하느니 만큼 민주주의는 강제(폭력)수단에 의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
(Jawaharlal Nehru, Toward Freedom: The Autobiography of Jawaharlal Hehru, p.189)고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디는 민주국가가 월등하게 비폭력적인 제도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런 민주국가를 인도에 세우려고 애썼다.
  또한 간디의 견해에 의하면 정부나 국가는 성격상 비종교적이어야 한다. 정부나 국가는
특정 종교를 신봉한다고 공언하거나 후원해서는 안되고, 모든 종교에게 신앙, 예배, 설교의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면서 모든 종교를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인도의 이런
국민국가를 위해서, 간디는 서방 민주제국에 현존하는 것과 같은 형의 대의정치를 약간
수정을 가해서 구상하고 있었다. 약간의 수정이란, 간디는 선거권을 직접 손으로 일하여
국가의 생산에 무엇인가 이바지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간디가 구상하던 인도의 스와라지는 국민국가로 되기로 되어 있었고, 그는 "나는 인도와
결혼했다" (Kripalani, 일역본, p.49)고 말할 정도로 인도 민족주의의 선봉이었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는 국제주의를 배제할 정도로 편협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종교는 지리적
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나의 종교에 대한 열렬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인도
자신에 대한 나의 사랑도 능가할 정도로 큰 것이다." "나에게는 애국심은 인류애와 동일한
것이다. 나는 인간이며 인간적이기 때문에 애국자이다. 나의 애국심은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인도에 봉사하기 위해 영국도 독일도 해치고 싶지는 않다." (Kripalani, 앞의
책, p.49) 이런 간디 자신의 말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해방의 사명은 전 인류를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 간디는 국제사회와 국제협조에 대한 최대의 창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가
세계의 모든 진보적 국민의 벗이요 동맹자로 되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인도의 주권의
일부를 양도하여 전세계연방에 가입한다는 생각도 고려해볼 아량까지 가지고 있었다.
 @p118
  "오늘날과 같이 신속한 상호교통과, 온 인류는 하나라는 의식이 날로 커가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우리의 민족주의는 진보적인 국제주의와 상반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인도는 고립해서는 살 수 없으며, 또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에 의해서 영향을 안 받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의 진보적 세력에 편들어야
한다." "세계의 보다 나은 지성은 오늘날, 상호간에 싸우는 절대적인 독립국가들이 아니라
사이좋게 상호의존하는 국가들의 연방을 바란다. 그런 연방의 완성은 까마득한 일일지
모른다.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굉장한 것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의존보다는 보편적인 상호의존을 위한 용의를 갖추고 있음을 표시한다고 해서 그것은
조금도 굉장하다거나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독립을 주장함이 없이
전적으로 상호의존적으로 될 수 있는 능력을 바란다."(Husain, pp.51- 52)
  간디의 국제주의에 대한 개념도 그의 모든 정치이념과 마찬가지로, 그의 기본적인 종교적
원리에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그의 국제주의는 정치인이나 정치철학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앞서 있어, 극소수의 위인을 제외하면 아직 생각해내지 못하던 보편적인 사랑과 형제애의
극치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는 비단 다른 국민들과의 우의와 협조라는 위대한 이상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서 인도의 전자원을 바치며, 필요하다면 인류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도의 생명까지도 회생시킨다는 훨씬 더 위대한 이상을 인도 앞에 제시하였다.
인도 국민국가의 이념과 국제주의의 이념과를 조화시키는 일은 간디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그에게 어려운 일은 국민국가건 다른 형태의 국가건간에 국가의 개념과 비폭력이라는
자기의 기본적 신조와를 조화시키는 일이었다.
 @p119
  인도 국민국가는 비폭력의 원리에 반대되는 경찰과 군대를 가져야만 하고, 또한 이런
국가를 수립하는 데 조력함으로써 그 자신이 어느 정도 완전한 비폭력이라는 길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디는 민족독립을 위한
인도의 주장은 진리에 의거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 국민국가가 불가피하게
수반하게 될 폭력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자기가 책임지게 되리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진리의 부름에 응하는 일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의 폭력은 어떠한 국가도 피할
수 없다. 비폭력의 신봉자는 그가 국가 없는 사회를 수립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는 국가를 참아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는, 그는 만일 정부가
진리의 음성을 귀담아 들으려고만 한다면, 폭력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 아래 그 국민정부와 협력해야 한다.
  그래서 인도해방운동의 대다수의 지도자들은 비폭력을 하나의 신조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정책으로서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간디는, 그들의
해방운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하기로 하고, 인도가 독립한 후에는 국민정부와 협력하면서 이
정부를 설득하여 가능한 한 폭력의 사용을 삼가게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인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상무의 전통을 가지는 민족들은 비폭력을 믿지 않고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비폭력을 믿으면서 그런 이상을 애써 달성하려고 하는 집단이
있었고, 언제나 있으리라고 기대해 마지않았다.
  * : 네루는... 우리들에게도 국민회의파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비폭력의 방법이란 종교도
아니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신조도 교의도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정책이요 어떤 종류의 성과를 약속하는 방법일 따름이며 그 성과를 가지고 종국의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Nehru, Toward Freedom, p.82)고 말하고 있다.
 @p120
  군사력과 경찰의 설치를 그만두면, 간디는 인도 국민정부의 헌법과 행정은 정의에
의거하게 될 터이므로, 비폭력의 길에서 크게는 이탈하지 않으리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정의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인도는 공산주의 국가가 채택해오던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방책들을 채용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일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서, 인도가 영원히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 비폭력적 사회라는 꿈이
실현되지 못하게 될까봐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간디는 사유재산에 의거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제거하는 방책으로서 국가에의 권력집중보다는 그가 생각하던 신탁의
관념의 확장이 더 낫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유재산의 폭력은 그래도 국가의
폭력보다는 덜 해롭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그는
최소한와 국유화는 지지하였다.
  신탁의 이론은 간디의 경제사상에서는 각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도
국민정부를 위해 머리를 짜낸 경제정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이론에 관해서
간단히 생각해보기로 한다.
  우리는 먼저 간디의 궁극적 이상은 사유재산도, 정부도 없게 될 '라므라자'임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라므라자'에서는 협소한 촌락 공동체들이 모든 생활필수품의 생산과
균등한 분배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될 것이요, 각자는 자기의 생계를 세우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많은 노동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고찰하려는 것은 그의 '라므라자'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런
'라므라자'가 실현될 때까지 거쳐야 하는 장기간의 과도기를 위한 그의 타협안이다. 부의
균등한 분배라는 간디의 이상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수 없으므로, 그는 현재로서는
공정한 분배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현사회에서는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은 사람들의 마음을 몹시 강하게 사로잡고
있으며, 또한 사람들은 능력에 비례하는 임금을 원하고 있지만, 사람의 능력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자연 그들의 수입에는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공정한 분배보다 실제적 방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힘 닿는 데까지 많이 취득케 하나, 그들 자신을 위한 지출은 그 일부에
한정시키고 나머지는 사회 전체의 복지에 사용하도록 그들에게 신탁하는 방법이다.
 @p121
  만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 과격한 방법이 사용된다면, 그런 방법은 더 많이 취득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켜, 국가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도 적게
일하게 할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황금의 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식의 단견의 정책인
셈이다. 그러므로 신탁이라는 방법의 비폭력적인 길을 추구하는 편이 보다 낫다. 물론이
경우에는 수탁자가 정직하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만일 수탁자가 정직하지
않거나, 수탁자로 되기를 거절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간디는 월권이나 부정의 모든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 대해서도 절대로 틀림없는 광정책으로서 시민적 불복중, 비협력
또는 다른 형태의 '사티아그라하'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간디에 의하면 부자는 사회내의 인자의 협력 없이 부를 축적할 수가 없는데, 만일 이런
인식이 빈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다면, 그들 빈자는 강력하게 되어 그들을 기아선상에서
헤매게 하는 엄청난 불평등에서 비폭력의 수단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되리라는 것이다.
  간디는 이 일반원리를 인도가 직면하는 각별히 중대한 문제에 적용해야 했다. 인도는
외국지배하에 들어 있었으므로 외국의 자본가들은 수많은 인도인 앞잡이들의 도움을 얻어
인도를 착취하고 있었다. 경제적 불평등은 그 절정에 달해 있었고, 인도 민중의 대다수는
적빈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간디는 착취자들의 무감각해진 심정에 감동을 주어,
그들에게 수탁자의 정신을 환기시키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비폭력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는 단순한
설득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힌사의 원리는 그로 하여금 그들
착취자의 심정에 변화를 일으키게 해보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기의 노력이
합당한 기간내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국민회의파가 정치적 자유를 위해 수행하고
있던 것과 같은 노선에 따라 경제적 자유를 위해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p122
  간디에 의하면, 사티아그라하는 경제적 정의를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착취의 회생자인 가난한 사람들이 외국의 지배하에 있을 경우에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그들 자신의 수중에 넘어와 그들이 자신의 대표자들에 의해서
지배당하게 되면, 그들은 보다 단순한 방법, 즉 법을 통해서 그들의 온갖 불평을 제거케
하는 방법을 채택할 수 있다.
  간디는 부정의 시정이나 광정을 위한 온갖 방법은 일종의 폭력이라고 하여 비난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이는 물론 그가 입법을 순수한 아힌사의 정신에 배치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는 정당하며, 그의 이상사회에서는 입법의 여지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민주적 입법은 현사회에서도 있을 수 있는 상대적인 비폭력과 완전히
양립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간디는 국가의 권력을 최소한으로 줄이기를 원했고, 또한 일반적으로 국가로 하여금
개인생활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서 행해지고 있던 부정과
착취를 없애기 위하여, 그는 국민정부에게 기득권에 대한 최대한의 간섭과 그런 기득권에
의해 다른 국민층에 가해지는 해악을 시정하기 위한 지속적인 입법을 기대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입법의 수단이 채용되기 전에, 제안된 입법에 대한 기득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들 기득권의 정의감에 일단호소하기를 원하였다.
  사회정의를 확보하기 위한 입법과 관련하여 간디가 강조했던 것은 고액소득, 특히
대규모의 재산상속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고율의 세금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부의 불로취득은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불공정할 뿐 아니라 상속자 자신들에게도
도덕적으로 해롭기 때문이다.
 @p123
  이상에서, 간디는 비폭력, 무국가 사회를 열렬히 희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제적인
편의주의뿐 아니라 도덕적 원리에 입각하는 광범한 타협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간디로 하여금 불확정한 과도기에는 군대, 경찰, 입법 및 파세 등 온갖 속성을 가지는
국가를 수락하도록 했음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그로 하여금, 특정 조건하에서는 현대공업과
기계를 참아나가도록 만든 것도 위와 같은 타협의 정신이었다. 현 상황하에서는 기계는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경험을 통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기계사용을 허용하는 데는 일정한 조건을 붙였다. 그 조건이란 기계사용이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의 복지가 아니라 만인의 복지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간디가 반대하는 것은 기계 때문에 일어나는 해악이며 그러한 해악을 가져오는 기계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해악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인간에게서 일을 빼앗는 일이다. 물론
기계사용의 목적에는 노력의 절약, 시간의 절약 등이 있지만, 노력의 절약이라는 미명하에
실직당한 노동자와 그 가족을 길거리에서 헤매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보는 것이 간디의
견해이다. 따라서 인간한테서 일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을 덜어주는 소규모의
기계는 단지 허용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환영된다. 특히 사랑의 동기에서 사랑의
목적을 위해서 기계가 사용되는 데는 간디는 찬성이다. 가령 간디는 '싱거'미싱을 예로 든다.
싱거씨는 자기 아내의 바느질의 노고에 동정하여 미싱을 고안함으로써 아내의 불필요한
노동을 덜어주었다. 적어도 오늘날 싱거 미싱을 살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모두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그것은 좋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싱거 미싱을 만들려면 공장이 필요하고, 그 공장에서는 인간에게서 일을 빼앗는
기계가 사용될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간디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렇다. 그런 공장은 국유화되거나, 국가에 의해서 관리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점에서는
나는 사회주의자이다. 그런 공장은 가장 매력적이며 이상적인 조건, 즉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편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동기가 탐욕의
동기에 대치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노동조건의 개선이다. 이 미친 듯한 부의
추구는 그만두어야 하고, 노동자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임금뿐 아니라, 단순한 고역이
아닌 나날의 일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하에서는 기계는 그것을 소유-하는 국가나
개인에 못지 않게 그것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의 미친 듯한 부의
추구는 그만두게 될 것이요, 노동자는(내가 말한 대로) 매력적이며 이상적인 조건하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이것(즉 싱거 미싱)은 내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예의 하나에 불과하다.
싱거 미싱은 그 배후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 최대의 고려를 해야 하는 것은 개인이다.
개인의 노동절약이 목적으로 되어야 하고, 또한 탐욕이 아니라 성실한 인도주의적 고려가
동기로 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탐욕을 대치하라, 그러면 만사는 바로 될 것이다(Husain,
pp.61-2).
  이렇게 볼 때 간디는 대규모의 공장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충족할 때에만 비로소
허용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1 그것은 실업을 초래해서는 안된다.
 #2 그것은 국가에 의해서 소유되거나 제어도 관리된다
 #3 그것은 공공봉사의 정신에서 운영된다.
 #4 노동자의 일은 매력적이며 유쾌한 것으로 된다.
 #5 노동자에게는 합당한 임금이 지급된다.
  그러면 간디는 생계를 유지하기에 합당한 임금은 어느 정도라고 보고있는 것일까? 다시
말하면 국민대중을 위해서 간디는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을 원하고 있을까? 그의
이상사회에서는 그는 극히 소박한 생활을 그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사회에서는
각자는 간신히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을 충족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상사회에서가 아니라 독립한 후의 인도 사회에서 간디가 생각하던
생활수준이다.
 @p125
  이 정도라고 명확히 말할 수는 없으나 아무튼 그가 일반대중 특히 농민대중의
현생활수준에는 만족하고 있지 않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그들의 생활수준을
훨씬 높여,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문명의 온갖 쾌적한 생활-문명의 사치품은
아니라 하더라도-을 마련해주기를 원했다. 그의 꿈이던 스와라지는 가난한 이들의
스와라지였다. 따라서 부자에 못지 않게 가난한 이도 생활필수품은 물론이요, 문명의 온갖
쾌적한 생활도 누려야 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스와라지는 푸르나(완전한) 스와라지가 될
수 없다고 그는 믿었다.
  간디가 그리던 자유인도의 사회생활에 대한 미래상의 일부는 촌락자치 공동체에 관한
다음과 같은 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촌락 스와라지에 관한 나의 구상을 말하면, 그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이웃
촌락들에 의존하지 않으나, 의존이 필요한 기타 많은 사항에서는 상호의존적인 하나의
완전한 공화국이다. 따라서 각 촌락의 첫째 관심사는 스스로의 양식이 될 농작물과 옷감이
될 면화를 재배하는 일이다. 각 촌락에는 또한 가축과 오락시설 그리고 성인과 아동을 위한
운동장을 마련하기 위해서 보유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도 여분의 토지가 있다면, 담배와
아편 등과 같은 것을 제외한 돈이 될 만한 유용한 농작물을 재배할 것이다. 촌락은 극장,
학교, 공회당을 설립, 유지할 것이요, 또한 깨끗한 음료수를 공급하는 급수시설을 가질
것이다. 이는 잘 관리된 우물과 탱크를 통해서 행해질 수 있다. 가능한 한 각 사회에서는
모든 일이 협동적으로 처리되리라고 본다. 거기서는 불가촉천민제도를 가지는 오늘과 같은
카스트제도는 없어지리라. 사티아그라하의 기술을 가지는 비폭력과 비협력은 촌락공동체의
제재수단으로 될 줄 믿는다. 거기서는 촌락 자위대의 의무복역이 있게 될 터인데, 그들
자위대는 촌락이 보존하는 등록부에서 교대로 선출되리라고 본다. 촌락의 시정은 매년
최소한의 정해진 자격을 갖춘 성년남녀 촌락민에 의해서 선출되는 다섯 명의 촌회가 담당할
것인데, 이들은 필요한 모든 권한과 관할권을 가질 것이다.
 @p126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형벌제도는 없을 터이므로, 이 촌회는 1년 임기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구실을 다하리라고 본다... 나는 여기서의 이웃 촌락들,
그리고 만일 있다면 중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 나의 목적은
촌락정치의 윤곽을 제시하려는 데 있다. 거기서는 개인의 자유에 의거하는 환전한
민주주의가 행해진다. 개인은 그 자신의 정부의 건설자이며, 비폭력의 법은 그와 그의
정부를 규제한다. 그와 그의 정부는 이 세상의 권세는 무시할 줄로 아는데, 왜냐하면 각
촌락민을 지배하는 법은 그와 그의 촌락의 명예를 죽음을 걸고 지키려는 것이기
때문이다(Husain, pp.62-63).
  이와 같은 촌회들은 간디가 가까운 장래에 인도에 수립하기를 원하던 정치적, 사회적
질서의 기본단위들이었다. 그는 인도 국가의 완전한 모형을 만들기 위하여 이런 단위들을
상호간에 연결하고 또한 그런 단위들과 중앙당국과를 연결하는 어떠한 계획도 공들여
생각해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적 문제들은 그것들이 현실적으로 나타났을 때에
비로소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자유인도의 헌법을 제정할 시기가 왔을
때에는, 종파간의 폭동이 전국에서 일어나, 그는 평화와 응화를 회복하려는 일에 모든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는 생명까지도 바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간디는 독립 전에 구상하던
자유인도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에 관한 희미한 생각(*)을 한층 더 치밀하게 구체화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국민 교육의 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방법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만일 그가 인도 국민국가의 헌법에 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더라면, 그는
촌회에 온 관심을 집중시켰으리라고 보며, 중앙 및 주정부의 시정에 대한 그의 관심은
촌락공동체에 전면적인 자치를 허용하도록 그 권한을 제한했을 줄 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도시경제가 촌락의 착취에 의거하지 않으며 도시경제와 농촌경제가 상호보완하고
상호 지탱하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 : 간디는 자기가 그린 이상적 인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막연한 말을 하였다. "가장
가난한 사람도 그 건설에 유효한 발언권을 가지고, 그들이 자기의 나라라고 느낄, 인도 국민
사이에 상충계급도 하층계급도 없는 인도, 이러한 인도를 위해 나는 일하고 싶다...
불가촉천민제도라는 저주도, 술과 마약의 저주도 들어올 여지가 없는 인도... 여성도 남성도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이것이 내가 꿈꾸는 인도이다." (Discovery, p.315)
  간디는 촌락을 인도의 심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비폭력을 위해 농촌을
구출하려고 하였다. 심장이 건전한 한, 온 신체에는 희망이 있다고 그는 믿었다.

 @p129
    제 4장 간디의 실천
  영국 지배하에 정상적인 발전이 저해되어온 인도에서는 자본주의가 심한 사회적 폐해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1차대전을 계기로 크게 발전한 인도의 공업은 노동력의 흡수보다는
도리어 실업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방대한 이익배당으로 자본이 축적되는 반면에
실업은 증대되고 있었다.
  대중의 빈곤이 날로 증대되고 있다는 이 사실은 간디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는
빈부간의 엄청난 격차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소수의 부자와 가난한 대중간의 그러한
격차는 주로 대규모의 기계로 구현된 근대 유럽에 의거하는 외국의 지배와 착취 때문이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치적이며 자급자족적이었던 옛 촌락공동체 시대를
동경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생산, 분배, 소비 사이에 자동적인 균형이 잡혀 있었고, 정치력과
경제력은 분산되어 있었다. 거기서는 일종의 단순한 민주주의가 보급되어 있었으며,
빈부간의 격차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거기서는 대도시의 사악은 없었고, 사람들은 대지에
의거하며,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고 있었다.
  그는 이런 촌락공동체를 동경하여 '라므라자'라는 이상사회를 그렸지만,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국의 지배하에서 해방되어야 했다. 그런데 인도의 해방을 위해서는
빈부간의 격차를 제거하고 종파, 카스트 등 사이의 온갖 대립을 지양하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회복하는 한편, 특히 무감각한 대중을 각성시켜 민족해방운동에 동원해야 했다.
 @p130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을 독립투쟁에 귈기시킴으로써 간디는 인도의 민족운동으로
하여금 획기적인 진전을 보게 하였다.
  그는 대중의 언어로 말하고, 눈은 언제나 대중의 처참한 생활에 돌리고 있었다. 실로 그는
"대중, 그들의 생활, 그들의 문제, 감정, 원망에 공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다른 정치 지도자들과 크게 달랐다. "간디에게는 "정치란...박학한 정치가들이
고급의 토론을 하는 따위가 아니고, 대중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에 공감을 가지고 대중에
대해서 사심 없이 봉사한다는 문제였다. "(Namboodiripad, 일역본, p.38)
  간디는 인도의 대중, 특히 농민 대중에게는 다시 없는 지도자였다. 네루의 말을 빌면,
"그는 방대한 농민 대중의 이상적인 화신"(Nehru, Toward Freedom, p.190)이었다. 그는
물론 보통 농민과는 달라서 날카로운 지성과 자석처럼 사람을 끄는 매력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위대한 농민이어서 농민의 사정에 정통해 있었을 뿐 아니라, 농민의 입장에서
만사를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러나 자기들의 원망과 직접적 이익에 일치하는 특정한 이상이나 윤리적 가치를 주창한
위대한 인물을 간디에게서 발견한 이들은 농민 대중만이 아니었다. 국민의 다른 계층에
속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독자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던 인도의
노동자 계급은 간디에게서 노동자 계급의 이 익을 위해 싸우는 전사를 발견하였다.
중산계급의 지식인과 청년은, 무엇인가 위대하고도 고귀한 이상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귀한 이상을 위해 어떻게 싸우며, 필요하다면 어떻게 생명을
바쳐야 하는가를 그들에게 가르치며 고무하는 지도자를 간디에게서 발견했다. 대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상층계급의 사람들도 간디에게서 고귀한 이상을 위해 사심 없이 일하는
열렬한 애국자, 그리고 특히 군중을 엄중한 비폭력의 한계 안에 머물게 하는 인물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간디는 원망과 요구를 달러하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의 지도자로 되었다.
 @p131
  돌이켜보면, 인도는 현재의 어두운 불행에 짓눌리어, 안타까운 탄식과 과거와 미래의
막연한 꿈 속에서 구원을 얻어보려는 헛된 노력을 해왔으나, 간디는 등장하자마자 인도인의
마음에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지칠대로 지친 인도인의 몸에서 힘이 생겨나게 하였다. 그는
인도국민의 역사적인 근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한 옛 추억을
부활하여 인도인에게 스스로의 혼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그렇지만 네루의 말처럼, 간디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때로는 그의 말은
보통의 근대인에게는 거의 불가해했으니"(Nehru, Toward Freedom, p.72)만큼, 사회적,
철학적 사상에서 그와 일치하던 사람은 극히 적었음에 틀림이 없다. 정치운동에서의 그의
선배와 동료중의 많은 사람은 개인생활과 정치와 여러 사항에서 그와는 아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가 인도의 민족운동의 무대에 등장하자,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모두
매혹당하여, 그의 정치적 및 개인적 영향 아래 들어가 그의 권고와 지도를 자진해서 받게
되었다. 지성면에서 보면 그보다는 월등하던 사람들도 실제 상으로는 그의 지도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그는 몇 년 안 가서 인도의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 지도자로 되었다.
그가 인도 제 1의 가장 탁월한 지도자로 된 것은 그의 종교적 및 사회적 사상 때문은
아니다. 그는 자유를 쟁취하기로 결심한 인도의 상징이었다. 인도의 많은 사람들은 여러
문제에 관해서 그와 견해를 달리했다 하더라도, 또한 그들이 특정 문제에 관해서는 그를
비판하거나 심지어는 그와 결렬까지 했다 하더라도, 일단 인도의 자유 추구 문제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들은 다시금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그를 유일한 지도자로 받들곤 했다.
간디가 마치 온갖 계층의 사람들에게 마술이라도 건 듯이 온 국민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어 동일한 방향으로 이끌고 간 것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p132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품과 영도력 때문이었다. 먼저 네루의 표현을 빌어
그의 인품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몸집이 빈약한 이 작달막한 사나이는 자기 안에 무엇인가 강철과 같은 것, 아무리
강할지라도 물질적인 힘에는 굴복하지 않는, 무엇인가 암석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볼품없는 용모, 그의 허리만을 두른 반나체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왕자다운
위엄과 고귀함이 깃들어 있어서 남이 기꺼이 복종하고 싶은 심정을 갖게 했다. 일부러
온유하고 검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는 힘과 권위에 차 있었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그는 가끔 극히 엄격하게 명령을 내려 사람들을 복종시켰다. 그의 가라앉은 깊은
안광은 남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속까지 꿰뚫어 보았다. 그의 맑고 투명한 음성은 남의
마음에 스며들어 듣는 이를 감동시켰다. 그의 말은 듣는 이가 한 명이건 천명이건간에 그의
매력과 자력은 듣는 모든 이에게 퍼져나가, 한사람 한 사람을 그와의 깊은 공감 속에
끌어넣었다...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성실성과 인격이었다. 그는
안에 막대한 힘을 저장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Nehru, Toward Freedom, p.110)
  이와 같이 간디는 온화한 인품 속에 위대한 정신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그는
실제적인 영도력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간디는 본질적으로 행동의 인간이며 변전하는
정세에 극히 민감하였다. 그는 인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하면서도 널리
시국의 정보에 통하고 이를 주의 깊게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문제와 정세 속에서
비본질적인 것은 피하고 본질적인 것만을 추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견지에서 만사를 규정하면서 문제의 핵심을 확고하게 파악하는 한편,
앞날에 대한 올바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p133
  간디는 대중에게 봉사하려는 결의와 자세를 가지고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솔선수범하였다.
어디까지나 대중과 밀착하고 있던 간디는 대중의 비참한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추상적인
이념에 대해서보다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 전력을 기울였다. 루이스퍼셔의 말대로"그는
이념을 생각해내는 이론가가 아니라 자기의 이념을 실천에 옳긴 실천가" (Fischer,
p.59)였다. 그는 다음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자가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1. 세 가지 방법
  '실제적인 이상주의자'였던 간디는 독자적인 전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시적으로
환경과 타협을 짓곤 했으나, 형식과 정신 양면에서 타협을 존중하면서도 자기의 이상을
잃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환경 그 자체를 변혁함으로써 자기의 이상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인간성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자기가 마음에 그리던 완전히 비폭력적인
사회적 이상을 그대로 실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런 이상은 인간의 정신적 본성에서 나왔으며 그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중요성과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간디는 그의 시대적 환경과 타협하여, 국가 없는 사회 대신 민주적 국가를, 지방 분권화된
농촌경제 대신에 통제경제를, 비소유 대신에 신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교훈과 시범에
의해서 인도와 세계의 국민들이 이상사회와 이상적 경제를 위해 점차로 준비하는 방법을
조심스럽게 제시하였다. 그 방법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수 있다. 첫째로, 그는
비폭력적 사회를 위한 개인의 마음을 준비하려고 새 교육제도의 기초를 세웠다. 둘째로,
그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기가 생각하는 비폭력적 사회에 약간이라도 유사한 데가 있는
실제적인 사회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근대 공업문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어딘가 옛날의 소박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인도농촌에서 도덕적 및 경제적 부흥의
'건설적 프로그램 '(constructive programme)에 착수했다. 그리고 셋째로, 그는 폭력의
세력이 비폭력적 사회의 건설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티아그라하의
방법을 창안했다.
 @p134
  이런 세 가지 방법은 인간성을 바르게 가르치는 동시에 유리한 사회적 조건을
마련함으로써 비폭력적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어 마지않았다
  1) 새 교육
  모든 종교적 및 도덕적 교사들처럼 간디도 사회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효과적인
방법은 개인을 개심시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즉 그는 개인을 내면적으로 개량함으로써
외부환경을 변경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교육은 당초부터 그의 활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남아프리카 시절에 퍼닉스 농원과 톨스토이 농원에서 교육상의
실험에 착수했지만, 그의 교육철학의 대체의 윤곽은, 그의 일반적인 인생철학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 시대에 완성되고 있었다. 인도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교육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종교적 및 도덕적 견지에서 국민 교육에 관한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인도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도의 정신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간디는 인도가 유럽문명의 멍에를 벗기를 원하면서 참으로 인도적인 교육의 기초를
쌓으려고 애썼다. 이미 몇몇 대학교와 전문학교가 설립되어 거기서는 영국의 보호 아래에서
고대 아시아 문화가 약간 보존되고 있었으나 이런 학교들은 정부의 감독 밑에 있으며 정
부의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간디는 보다 순수한 아시아 문화의 본거지를 만들고자 1920년
11월에 구자라트대학교를 아흐메다바드에 세웠다. 이 대학교는 인도 통일의 이상에 입각한
것으로 그 종교적 양대 지주는 힌두교의 다르마와 회교의 이슬람이었다. 이 대학교는 인도
각지의 지방어를 찾고 그것을 국가갱생의 원천으로 삼으려고 했다. 즉 각 지방어의 거대한
보고를 발굴하여 풍요한 과거의 문화 위에 각 문화가 적절하게 종합, 조화된 새 문화를
건설하려고 했다.
 @p135
  모든 학생이 인도의 온갖 종교를 알아야 했지만 특히 힌두교도는 코란에 친숙하게 되고
회교도는 힌두경전에 친숙하게 되어야 했다. 이 대학교가 배제하는 것은 오직 배타적
정신밖에 없었다. 힌두어는 필수과목으로 되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국가적 방언이며,
산스크리트어, 힌디어, 페르시아어화한 우르드어 등이 혼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식계급은 직업 교육을 받고, 다른 이들은 학예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그는 계급간의
차이를 감소시키기를 원했다(Rolland, 일역본, PP.94-96).그리고 간디는 특히 아동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지만, 유럽식 교육이 아동의 지능만을 발달시키고, 전인 교육에 불가결한 '공작'
(craft)을 경시하는 데 반대했다. 간디에 의하면 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발달시키고 그의
인격을 도야하며 그들 사회의 건전한 성원이 되도록 훈련하는 일반교육은 단지 또는 주로
지성과 정서에 관한 교육은 아니고, 전인간-몸과 마음과 혼-의 교육인데, 몸과 마음과 정신,
을 다같이 가장 잘 발전시키는 교육은 지능의 사용에 국한되는 읽고 쓰기의 매개수단을
통해서는 행해질 수 없고, 손과 머리와 마음을 동시에 사용케 하는 모종의 유용한 '공작'을
과학적으로 가르침으로써 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동교육은 그것을 모종의 공작과 밀접하게 결부시키는 편이 좋다 함은 오늘날에는 통설로
되어 있거니와 평생을 통한 교사로서의 경험은 간디로 하여금, 공작을 과학적으로 가르치는
편이 읽고 쓰기를 가르치는 편보다 훨씬 더 빨리 아동들의 지능을 발전시킨다고 믿게
하였다. "지성은 오직 독서를 통해서만 발달될 수 있다는 전적으로 그릇된 견해는, 마음의
가장 빠른 발달은 과학적 방법으로 습득되는 기공의 일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진리에 자리를 비켜야 한다. 마음의 참된 발달은 도제가 왜 손이나 도구의 사용이
필요한가를 그때그때 배울 적에 곧 시작한다" (Husain, p.68)고 간디는 강조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간디가 아동 교육은 '공작'에 국한하고 읽고 쓰기는 불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책을 통한 교육은 지적 훈련뿐 아니라 실제 생활, 심지어는 정신적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함을 그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p136
  그러므로 그는 단지 유용한 공작뿐 아니라 일반교육의 교수요목에 포함되는 모든 과목을
가르치기를 원했다. 다만 그는 공작을 교과목의 중심에 두고 다른 과목들은 그것과 서로
관련시킴으로써 학식과 행동, 이론적 지식과 실제의 활동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교육
방법을 제시했을 따름이다. 공작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런 식의 아동교육의 주목적은
물론 교육적인 면에 있었으나, 간디는 그 경제적 측면도 간과하지는 않았다. 인도와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런 식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장차 직업을 갖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간디의 아동교육에 관한 이념을 실천에 옮긴 결과, 각처에 있는 국, 사립학교에서의 공작
중심 기초교육의 실험은 재래식 교육과는 달라, 모종의 도덕적 성품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즉 공작은 곧 아동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교사는 그리
애쓰지 않아도 학생들은 목적의식과 집중, 민첩, 인내의 성품을 발전시키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 이외에도 공작에는 '팀'으로서 일하게 하는 과정들이 있었으므로, 자연히
경쟁심 대신에 협조정신을 조성하고 있었다. 간디는 이런 모든 이점을 머리에 두고
있었음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교육제도 밑에서만 "혼이 가장 잘 발전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보다 깊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로, 간디에게는 '브레드 레이버 '가 정신적 발전의 불가결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브레드
레이버의 정신을 어린 시절부터 몸에 지니게 하기를 원했는데, 공작 중심의 교육은 다른
어떤 교육보다도 그런 목적에 기여한다는 정신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로, 간디는
농촌수공업을 아동교육의 불가결의 부분으로 만드는 일은 도시가 농촌을 착취하고 있는
현사회를 도시와 농촌이 건전한 관계를 가지는 새 사회로 전환시킨다는 위대한 정신적
목적에 이바지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p137
  오늘날 도시는 돈을 치르고 농촌에서 식량을 사고 있지만, 도시는 그 돈을 인도나 외국의
상품을 팜으로써 농촌에서 몽땅 거둬들이고 마니, 농촌은 자기 노동의 대가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농촌은 옷감을 비롯한 기타 생활필수품을 도시에 의존함으로써
스스로를 도시한테 착취당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간디는 온갖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농촌에서 생산하고 그 생산의 일부는 농촌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나머지는 도시에 파는
새로운 경제제도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리고 간디는 새 세대에게 새로운 정신 상태를
조성하는 기초교육을 새 결제 구조의 초석으로 삼기를 원했다. 즉 그는 그런 구실로 새
세대를 고무하며, 그들에게 농촌 공업을 부활하고, 농촌을 자립, 번영케 하는 건설의 노동의
자기 몫을 다하는 습관을 키우도록 하기를 원했다. 숭고한 목적에 바쳐진 사심 없는
사회봉사는 간디에게는 가장 위대한 정신적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아동들을 그런 봉사를
위해 훈련하는 기초교육은 그에게는 "가장 잘 정신을 발전시키는 일"의 매개수단이었다.
  2) 건설적 프로그램
  공작 중심의 기초교육이 지니는 정신적 중요성은 그것이 민중의 마음속에 노동의 존엄성을
가르쳐주고, 그들에게 유용한 손일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며 그것에 대한 능력을 가지게
하는 데 있다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몇몇 기본적인 농촌 수공업의 기술을 습득함으로써
그들은 농촌을 부흥시키고 농촌을 도시의 착취에서 보호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게 되어,
농촌은 사회적, 정신적 자유를 쟁취하고 라므라자의 이상적 구조의 초석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회혁명이라는 시일이 오래 걸릴 어려운 운동을 시작함에 있어서, 간디는
기초교육을 통하여 훈련된 새 세대가 사회에 등장할 때까지 그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사회적 이상에 대해 전폭적으로 찬동하던 그의 추종자들의 도움을
얻어, 그가 온건하게 "건설적 프로그램" (constructive programme)이라고 부르던 인도
농촌의 부흥을 위한 포괄적인 계획을 작성하여 가능한 한 이를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다.
 @p138
  그는 그런 '건설적 프로그램'이 언젠가는 자기가 그리던 완전한 비폭력적 자유사회로
인도하리라고 믿었다.
  간디에 의하면 그가 원하던 사회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사티아그라하의 극단형인 시민적 불복종이었다. 그러나 무력투쟁이 무기 사용의 훈련을
필요로 하듯이, 비폭력 투쟁 내지 사티아그라하는 자제, 자기 회생 및 사회봉사에 대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 훈련은 '건설적 프로그램 '을 통해서 민족의 일꾼에게 가장 잘
주어질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 '건설적 프로그램 '속에, 인도가 직면하고 있고,
또한 인도가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기 전에 해결해야만 했던 온갖 정신적'사회적 및
경제적 문제를 포함시키고 있었다. 그는 종파간의 융화를 도모하는 일을 첫째로 꼽았다.
그가 종파간의 조화를 가장 중시한 것은 단지 정치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동기에서였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이 그의 종교적 신조의
기본원리였다. 그는 이 원리가 인도에서 수락되어 정신적인 통일감이 모든 종교 신자들의
마음속에 조성되기까지는, 그는 수립하고자 하던 선하고 건전한 사회는 출현할 수 없다고
믿었다.
  간디의 공적 생활의 최대의 부분은 20세기 초 이래로 인도에서 일어나 인도의 혼을
말살하려 들고 있던 광신적인 종파주의의 재앙을 억제하려는 계속적인 노력에 바쳐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이 질환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것은
무한한 손상을 입은 뒤였다.
  다음은 붙가촉천민제의 해악에 대한 반대투쟁이었다. 간디의 사회철학은 전적으로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인식에 의거하고 있었다. 그의 생애의 진로를 바꾸게 했던, 그가 겪은
가장 중대한 첫 정신적 위기는 남아프리카에서 유색인들이 천대받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적 차별대우의 최악의 표본인 인도의 불가촉천민제는 그의 온
영혼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세계의 종교사를 통해서, 피압박계급에 대한 우리의 취급과
같은 것은 아마도 유래가 없는 일이다. 비록 인도인이 영제국의 불가촉천민계급으로 되고
말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의의 신에 의해서 우리에게 가해진 응보이다.
 @p139
  우리 인도인은 영국인을 향해서 피로 더럽혀진 손을 씻으라고 요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그와 같은 손을 씻어야 할 것이 아닐까. 불가촉천민제는 우리를 타락시켜,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서 우리 자신을 불가촉천민계급으로 만들고 말았다. 인도가
불가촉천민제를 그 종교의 일부로 삼고 있는 한, 스와라지의 달성은 불가능하다" (납산방랑,
p.25)고 간디는 역설하였다.
  그는 불타의 시대 이래 누구도 갖지 않던 불가촉천민의 심신상의 격리에 대한 뜨거운
동정을 가졌다. 그는 그들에게 '하리잔' (harijan.신의 아들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불가촉천민의 딸을 자기의 양녀로 삼았다. 불가촉천민제에 종지부를 찍고, 그들에게 이른바
상층계급이 누리고 있는 바와 같은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을 그의 '건설적 프로그램'의
불가결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사회의 자기정화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간디가 생각했던 셋째 것은 온갖 종류의 취하게
하는 물건 (술, 아편 따위 )을 버리는 일이었다. 이를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책은,
금지령을 공포하도록 설득될 수 있는 국민정부가 들어설 때에야 비로소 취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 이유와 아울러 도덕적 원칙은 그로 하여금 정부가
성공적으로 금지령을 시행할 수 있기 전에, '건설적 프로그램'의 일꾼이 그 금지를 위한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취하는 물건의 사용을 단념하도록 국민을 설득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케 하였다.
  위에 든 세 가지의 순수하게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개혁에 뒤이어서 '건설적 프로그램중
넷째 것은 '카디' (khadi.물레를 손으로 돌려 짠 옷감)운동의 추진이다. 이는 간디가 그리던
이상적 사회질서의 기초였던, 자급 자족적인 촌락공업경제의 이념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만일 농촌이 그 식량을 생산하듯이 스스로의 옷감을 생산할 수 있다면,
농촌은 그 기본적 필수품을 자급자족하게 되어 그 이상 도시한테 착취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간디가 그리던 사랑과 진리에 의거하는 순수하게 비폭력적인 사회의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p140
  그래서 간디는 '카디'를 인도의 국민적 통일과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라 보고,
'카디' 운동의 추진을 모든 애국적 인도인, 특히 '건설적 프로그램 '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의무로 삼게 하였다.
  간디는 어떤 과업에 착수하면, 극히 사소한 점까지 이를 계획해서 실행하곤 했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건설적 프로그램 속에 이 '카디'에 더하여, 제분, 비누 제조, 제지, 성냥 만들기,
기름 짜기 등과 같은 농민의 일상적 수요를 충족하는 여러 종류의 소규모 농촌 공업을
첨가했다. 이에다 코는 새로운 공업의 장려와 보호의 필요를 절실히 느낄 때마다 그것을
첨가해나갔지만, 그의 만년에는 거의 '카디'만큼이나 퇴비 만들기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화학비료는 토양에 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도 농촌경제에서 소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머니가 가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해당했으므로 '소의 보호' (go-seva)는 역시 '건설적 프로그램 '의 중요한 항목이었다. 촌락
위생, 기초교육과 성인교육, 자신의 권리 수호와 국가에 대한 붕사를 위한 부인, 노동자 및
학생의 조직도 '건설적 프로그램 리 다른 중요 항목들이었다. S.아비트 후세인이 요약하고
있다시피, '건설적 프로그램 '이란 요컨대 간디가 자유, 평등 및 사랑에 의거하는 새 사회
질서로 인도하는 하나의 조용한 사회혁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던 자발적인 사회봉사와
자조의 포괄적인 계획이었다(Husain, p.76). 간디는 인도에 돌아온 후에도 남아프리카
시절의 퍼닉스 농원이나 톨스토이 농원과 같은 '수도장'을 사바르마티, 세바그람 등지에
만들어 그 곳에서 '건설적 프로그램 '의 요원들을 훈련했다. 그들은 비단 '건설적
프로그램'에서 뿐 아니라, 사티아그라하 운동에서도 주동세력이 되었으므로, 이에 관해서는
다음 항목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3) 사티아그라하
  간디에 의하면 '건설적 프로그램 '은 자기의 사회적 이상을 달성하는 데 직접적으로
이바지한 동시에 다른 하나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도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즉 '건설적
프로그램 '은 그 일꾼들에게 봉사와 자기회생의 정신, 기율과 조직에 관한 의식, 근면과
인내의 능력을 육성함으로써 그 일꾼들을 사티아그라하를 위해 훈련했다는 것이다.
사티아그라하는 사회혁명의 전투를 감행하기 위한 간디의 사랑의 무기고에서 제일 강력한
무기였다.
 @p141
  간디는 허위와 부정에 항거하고 진리와 정의를 지지함에 있어서 사티아그라하라는 특이한
방법을 창안하여 그것을 공적 생활에서 전례 없는 규모로 사용했다. 이 방법의 본질은
상대방을 폭력으로 패배시키는 대신에 정신력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달리
말하면 자진하여 고난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인간적인 감정을 환
기시키는 데 있다. 우리는 앞에서 간디는 악한 세력과 악한 인간들과를 구별짓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악이나 부정과 싸우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진정한 적은 악이나 부정의
세력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적은 그들에게 해악과 부정을 감행하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간디는 주장했다. 간디에 의하면 인간은 단지 그런 악한 세력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악한 세력은 억압자나 피억압자 쌍방 안자, 억제되지 않은 사나운 격정이나
욕망의 형태가 아니면 공포나 비겁의 형태로 존재한다. 피억압자는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런 세력과 싸우고, 그러고 난 후에 억압자 안에 있는 그런 세력과 싸워야 한다.
피억압자가 적절한 훈련을 통하여 자기의 보다 훌륭한 인간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자신의
사나운 격정을 억제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자기 인격에다 조화와 기품, 그리고 하나의
잠재적 정신력인 이상한 매력을 지니게 하는 동정과 사랑의 감정을 발산하게 된다. 악과
부정에 항거함에 있어서 이 영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사티아코라하라고 부른다. 그것은
억압자의 마음의 금선을 울리게 할 수 있는 반면에, 피억압자의 분노, 증오 및 이기심을
억제하고 정의, 사랑 및 자기회생의 정신을 발휘시킨다.
 @p142
  1907년 남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사티아그라하의 실험을 간디는 1948년 1월 30일에 그
절정에 달하게 했다. 이 시기를 통해서 그는 수많은 인도인 애국자들과 더불어 그때까지는
세계에서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정부에 대한 비폭력 투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고난과 회생에
찬 이 시기를 거친 뒤에 그는 자기 조국을 해방하는 데 성공했고, 또한 스스로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자유인도의 기초를 확고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아는 한 이러한
실험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오랫동안 간디의 정략을 연구하고 그것이 가지던 효과를 주시한 결과 강력한
정치조직으로 뒷받침되면, 그것은 식민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K.Nkrumah, "Background to Independence, " The Ideolologies of the Developing Nations,
ed. by p.E.Sigmund Jr, p.184)는 가나의 엥크루마 수상의 술회를 빌 필요도 없이,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다분히 정책적인 의의도 가지고 있었다. 이점은 "스와라지가 민족의
목표이다. 비폭력이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도가 정복자의 폭력의 노예로 되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폭력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하는 것이다. 폭력은 인도를 해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스와라지는 인도의 독특한
무기인 영혼의 힘, 사랑의 무기, 진리의 힘 없이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납산방랑,
p.90)라는 간디의 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우세한 폭력에 대한 간디의 비 폭력투쟁은 지난날 식민지 피억압 민족의 해방 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은 오늘날에도 각국의 인종차별반대운동의 지도자들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구나 생각할 수 있는 폭력의 극한점에 달하여 자멸의 구렁텅이의
가장자리에서 헤매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직접적인 전쟁에 호소하지 않고, 종파간이나
민족간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의 방법은 여전히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다음에 사티아그라하의 원리와 수법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p143
  (1) 사티아그라하의 본질
  사티아그라하의 외모는 정치운동에서 가끔 사용되는 '수동적인 저항'(passive resistance)과
유사하므로 얼핏 보면 양자는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양자간에는 운니의 차가
있다.
  첫째로, 수동적 저항은 개인이나 집단이 모종의 악이나 부정에 대해서 자신을 방위하는 데
만족하는 소극적인 상태이다. 이와는 달리 사티아그라하는 억압당하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비폭력적 방법으로 억압자의 정서, 견해 및 기질, 또는 억압법이나 불공정한
정부형태를 시정하고자 애쓰는 적극적인 상태이다.
  둘째로, 수동적 저항의 동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인 데 반하여, 사티아그라하는 진리와
정의의 영원한 법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앙이다. 이 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당한 법이나
제도에 반대할 의무를 자각케 하고, 사람들에게 그것들에 항거할 용기를 준다.
  셋째로, 수동적 저항의 참된 목적은,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도 약간의 고통을 줄지는 모르나
주로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하여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 있다. 이에 반하여
사티아그라하는 자기 스스로가 조용히 기꺼운 마음으로 참을성 있게 고통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게 하려는 유일한 목적을 가진다. 따라서 수동적 저항에는
사랑에로 전개할 시야가 없지만, 사티아그라하에는 증오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으로
증오에 반대한다.
  넷째로, 수동적 저항은 부정적 내지 일시적인 것이나, 사티아그라하는 적까지도 포함하는
인류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표현이다.
  다섯째로, 수동적 저항은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관념이 붙어 다닌다. 이에 대하여
사티아그라하는 사랑에서 나왔으므로, 그것은 상대방에게 정중한 경의를 표하고 그의
견해를 존중하는 동시에, 그가 선의와 신의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그를 대하는 데도 예절
바르고 참을성 있게 하기를 사람들에게 권한다.
  여섯째로, 수동적 저항은 적당한 시기에는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으나,
사티아그라하에는 아무리 유리한 상황하에서도 그것은 금지되고있다 (Husain, pp.79-80;
옥성강도즉, p.368).
 @p144
  (2) 사티아그라하가 시도될 수 있는 목적
  사티아그라하는 깊은 도덕의식과 종교의식에서 나오는 하나의 정신력이다. 따라서 그것은
물리력이나 기계력과는 달라 그것이 사용되는 목적의 도덕적 성격과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의 대의가 정당하고도 공정하다고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을 때에만
사티아그라하를 효과적으로 시도할 수 있다.
  (3) 사티아그라하를 시도할 적격자
  대의만 정당하다면, 모든 사람이 어느 때라도 사티아그라하를 시도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어떤 지역의 민족이 억압당하고 있을 때, 그 이웃지역이나 세계의 다른 어떤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피 억압자의 대의를 지지하여 사티아그라하를 전개할 수 있을까? 간디에
의하면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오직 피억압 민족 자신에 의해서 전개될 때에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간디는 피억압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동정의 표시로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잘못이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사실상 비효과적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사티아그라하의 이상한 힘은 세
가지 방법으로 억압자 내지 가해자에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억압자나 가해자는 사티아그라하를 전개하고 있는 코들의 피억압자가 부정에
굴복함이 없이 조용히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그들의 존경을 산다.
둘째로, 억압받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들이 자신들의 온갖 고통에도 불구하고 억압자에
대해서 추호의 증오심도 품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억압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억압자의 마음속에 정의감과 아울러 잠재하고 있던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셋째로, 억압자는 그들이 하려던 부당한 짓은, 피억압자들이 어떠한 형태의 협력이건 이를
모두 거부한다면, 충분히 행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세 경우에 있어서
사티아그라하의 효과는 억압자에 대한 항거에 궐기하여 비폭력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피억압자 자신들에 달려 있다.
 @p145
  (4) 사티아그라하 운동자의 훈련
  사티아그라하는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행해질 수 있다. 개인의 사티아그라하는 보통
단식(*)이라는 수단으로 행해지나, 그것은 또한 드물기는 하지만 시민적 불복종의
형태로 행해지기도 한다. 집단적 사티아그라하 내지 대중 사티아그라하는 '하르탈'
(hartal.일의 중지와 철시), '다르나'(dharna.연좌항의), '피케팅'(Picketing.외래품 상점 감시),
납세거부 등을 통해서도 행해질 수 있으나, 그 가장 일반적 인 형태는 시민적 불복종과
비협력이다.
  * : 단식은 간디가 남아프리카 시절부터 사용한 그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에서 하나의
유력한 무기였지만, 그는 인도에 돌아온 후 실로 11 회의 단식을 감행하였다. 그 중세 번은
21일간의 장기간 단식이었다. 그런데 11회의 단식 중, 세 번은 회교와 힌두교 양교도의
화해를 위한 것이고, 두 번은 인도의 불가촉천민의 지위 향상을 위한 것이었다.
  그 어느 형태를 취하든 간에, 사티아그라하는 물리력이 아니라 '영력 '을 가지고 싸우는
하나의 기묘한 전쟁이다.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낡은 형태의 전쟁에서마저 공들인 훈련이
필요하다. 새로운 형의 전쟁인 사티아그라하를 위해서는 훨씬 더 공들이고 철저한 훈련이
요청된다. 비폭력 내지 사티아그라하의 정신상태는 비단 분노, 증오, 복수, 공포 등과 같은
강한 격정을 억제한다는 어려운 일뿐 아니라, 적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거의 초인적인
행동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로 이는, 마음은 난폭한 생각을 삼가고, 혀는 난폭한 말을
삼가고, 손은 난폭한 행동을 삼가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는 가장 엄격한 훈련과 가장 어려운
도덕적 갈등을 극복한 후에야 비로소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신상태를 갖지 못한, 단지
외면적인 비폭력은 심리적 및 정신적 불안을 빚어내기 쉽다. 이는 남에게도 사티아그라하
운동자에게도 다같이 위험하다.
 @p146
  간디에 의하면 사티아그라하는 이중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인간 사회의 모든
성원에 필요한 일반적인 종교적 및 도덕적 훈련이요, 다른 하나는 비폭력적인 사회혁명의
선봉인 사티아그라하 운동자에게 행해지는 특수한 훈련이다. 첫째 종류는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전개하기 전에 인도에서 세운 '수도장'에서
행해졌다. 이는 5대 기본덕성-진리, 비폭력, 절제, 비소유 및 브레드 레히버-과, 공포를 갖지
않는 일과 겸양과 같은 다른 위대한 도덕적 성품의 실천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둘째 종류의 훈련은 수도장의 수업을 마친 사티아그라하 운동자에게, 그들을 '건설적
프로그램'과 관련된 실제 운동을 하도록 농촌에 파견함으로써 행해졌다. 이는 그들에게
책임감, 시간엄수, 이해력, 솔선수범, 요령, 사려분별, 철저성 등을 발전시키는 보다 충분한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 : 훈련생은 네 살부터 들어갈 수 있다. 일단 수도장에 들어가면, 수업을 마칠 때까지
(수업 연한은 약 10년) 의무를 지닌다. 그들은 가정을 떠나야 하고 양친은 감독권을
전적으로 포기한다. 그들은 간소한 옷을 입고, 엄중한 채식주의에 의거하는 간단한 음식을
취한다. 보통 의미의 휴가는 없고, 단지 일 주일에 하루 반만은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이
허용될 뿐이고, 1년에 2개월간은 도보로 인도를 순유하는 데 바쳐진다. 힌디어와
드라비다어는 모든 학생의 필수과목이다. 그들은 또한 제 2 어 학으로서 영어와 인도의 5대
지방어의 문자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국어로 지리, 역사, 수학, 경제학, 산스크리트어를
배운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농업과 물레질에 종사한다. 종교정신이 교육 전체를 덮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교육은 일체 무료이다.
  개인적 사티아그라하를 위해서는 간디는 대중 사티아그라하보다도 더 철저한 훈련을
하도록 강조하였다. 개인적 사티아그라하 운 동자들은 만사를 그들 자신의 책임과 주관하에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술한 두 가지 훈련을 모두 철저하게 받은
사람들로써만 행해져야 한다고 간디는 주장하였다.
 @p147
  그러나 대중 사티아그라하에서는, 만일 지도자가 비폭력의 원리와 실제를 전수받고 있다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지도자는 비폭력을 신조로서가 아니라 단지 정책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데 불과한, 그리고 사티아그라하의 기술에 대한 훈련은 받지 않고 지도자와 지시하에
그 도덕적 원리에 따르고 있는 일군의 추종자들과도 같이 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만일 그
지도자가 이와 같은 정치적 사티아그라하 운동자 이외에, 사티아그라하에 철저한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충분한 훈련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운동은 보다
큰 힘을 갖게 된다. 이것이 즉 간디가 그 도움으로 인도의 자유를 위해 싸운 비폭력적
군대였다. 이 군대는 마침내 1947년에는 인도의 자유를 쟁취하고야 말았다.
  이 놀라운 성과에 비추어 볼 매, 만일 상당한 수효의 사람들이 비폭력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사티아그라하의 수법에 대해서 장기간에 걸쳐 철저하게 훈련된다면, 그들은 아무런
무기 없이도 쉽사리 외국군의 침략에 항거할 수 있다는 간디의 주장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만 볼 수도 없을 듯하다.
  (5) 사티아그라하의 수법
  사티아그라하의 수법에 관해서는 간디가 여러 기회에 상세하게 논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단지 그가 비폭력적 투쟁의 양면, 즉 전략, 전술적 기술과 도덕적 순수성을 똑같이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몇 개의 격언을 드는 데 그치기로 한다.
 #1 시민적 저항은 불편부당한 중재의 제의를 포함하는 기타의 온갖 명예로운 해결이 실패된
연후에 수행되어야 한다.
 #2 적절한 선전은 사티아그라하의 불가결한 부분이다.
 #3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는 주도권을 자기 수중에 장악해야 하고 그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된다.
 #4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는 자기 자신의 판단에 배치되는 방향으로 대중한테 이끌려서는
안된다.
 @p148
 #5 너무 큰 요구를 내세워서는 안되며, 그것은 진리와 정의에 부합되어야 한다. 능력 이상의
것을 노리다가는 우리는 모든 것을 잃기 쉽다.
 #6 사티아그라하는 그 성격에 있어서 진보적이어야 한다.
 #7 초조감, 조급증, 허세, 내적 약점을 감추려는 시도 등이 있어서는 안된다. 비협력은 허풍,
공갈 내지 허세의 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실성의 테스트이다. 그것은 조용한
그리고 확고한 자기회생을 요구한다.
#8 항상 명예로운 조건으로 적과 협력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비폭력 투쟁의 목적은 언제나
정의와 참된 인류복지의 주장에 의거하는 합의된 해결이다.
 #9 첩상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것을 양보해서는 안된다. 비본질적인 것을 희생시켜라.
본질적인 것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최대한의 고통올 당할 각오를 하라. 해결에 앞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Husain, pp.84-85).
  위에서 살펴온 간디의 세 가지 방법은 보기에 따라서는 E.M.S.남부디 리파드가 주장하고
있다시피, "인도 사회 내부에서 날로 커가고 있었고, 또한 인도의 민족 정치생활에서 점점
더 자기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던 하나의 계급(즉 중산계급)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것이었다"(Nam-boodiripad, p.31)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간디는 그의 특이한 도덕,
종교관과 사회, 정치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인도 자본주의의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새 교육으로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자주 독립의 인간을 만들어내려 했고, 건설적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도의 농촌을 부흥하여 민족자본의 칠의 공급원을 강화하는 한편,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국민적 통일을 기하려 했으며, 그리고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통해서
인도 민족자본의 궁극의 목표인 인도의 독립을 추구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간디가 인도 면없 최대의 자본가인 비를라가와 각별한 친교가
있었다는 사실은 단지 개인적 우호와 같은 우연적인 일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p149
  그러므로 한 일본인 연구가는 "간디가 종교적 베일을 씌워서 '진리'라고 부른 것은 영국의
농촌을 목장으로화 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방황자로 만든 원시적 축적에서 볼 수 있던
바와 같은 과격한 방법을 피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노동에 의해서 자본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발전의 길이야말로 인간의 길이며, 모든
인간이 이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간디의 유훈이리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일면적 타당성밖에 없는 견해이지만, 만일 이런 입장에 서서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간디는 어떻게 하면 금전의 노예로 되지 않고, 인간에 적합한 방법으로 돈을
모을 수가 있는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또한 그것을 위해 필요한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고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환경을 만드는 데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인도의 독립이었으므로, 다음에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인도의 민족해방운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제 1차 불복종운동
  1) 준비
  간디가 그의 비폭력이라는 교의를 인도에 가져온 이래로 그것은 줄곧 전 인도를
지배해왔다고 논한 후, 네루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인도의 정치적 및
사회적 생활에 커다란 역찰을 다하고, 또한 널리 세계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교의 그
자체는 물론 인간의 사상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지만, 그것을 대중적인 규모로 정치 및 사회
운동에 적용한 이는 아마도 간디가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은 개인에 관한
문제였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였다. 이 개인적인 이상을 사회적인
이상으로 높이려고 애썼다. 그것으로 정치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을 변경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중하게 이 목적을 머리에 두면서 비폭력의 방법을 광범한, 그리고 전혀 다른
영역에 적용하였다.
 @p150
  '인류의 조건과 그 환경에 대변혁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은 사회에 풍파를 일으키지
노고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데는 비폭력과 폭력의 두 방법밖에 없다. 폭력적
압력은 육체에 가해지지만, 그것은 피해자의 기력을 깎는 것과 간은 정도로 가해자를
타락시킨다. 그러나 비폭력적 압력은 단식이나 기타의 스스로의 고통을 통해서 전혀 다른
작용을 한다. 그것은 육체에 손을 대지 않고, 상대방의 도덕심에 작용하여 그것을
강화한다'고 간디는 말하고 있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이 배후에 있는 광범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도 막연하게 밖에 늘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저 믿고 그저 행동했던 것이다"(납산방랑, pp.65-66).또한 네루는
"인격은 포착하기 어려운 것으로 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상한 침이기도
하지만, 간디는 그것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서... 맡은 사람들을 매혹하고 있었다... 일보 또
일보 그는 자기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하여, 우리는 그의 철학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에게 보조를 맞추었다" (Nehru, Toward Freedom, p.191)고도
말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결단력이 없는 인도의 정치가 키운 무위의 긴 전통의 결과는 어떠한 행동도
환영을 받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윤리적 후광을 지닌 용감하고도 효과적인 간디의
행동은 지성에게도 감성에게도 물리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간디는 중산계급의 성장과 국민의 행동욕의 성숙이라는 유리한 객관적 여건을
배경으로 하여 위에 든 그의 실천력을 가지고 전인도를 휩쓴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전개했지만, 이에는 역시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공포, 탐욕 및
맹목적 격정을 제거하는 내적 투쟁과 외국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외적 투쟁으로
나누어지지만, 전자를 위한 준비는 이미 남아프리카 시절을 다를 때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인도에 돌아온후의 후자를 위한 준비만을 대충 훑어보기로 하겠다.
 @p151
  간디가 남아프리카를 떠나 영국을 경유하여 인도의 봄베이에 상륙한 것은 1915년 1월
9일이었는데, 이는 그 동안 두 차례의 짤막한 귀국을 제외하면 실로 22년 만의 귀국이었다.
이때부터 최초의 전인도적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전개한 1919년까지의 4, 5년간은
간디에게는 인도에서의 준비기간이었다. 간디는 두 차례의 귀국시에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의 실정을 고국의 인도인에게 선전, 계몽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또한 그 후의
남아프리카에서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통하여 인도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그는
귀국직후에는 정치운동에 뛰어들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스승격인 고칼레가 영도하던 '인도봉사협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그의 사상과
방법에 대하여 큰 거리를 느끼던 이 협회원들이 꺼려 하므로 이를 단념하고 1915년 5월,
자기보다 앞서 인도에 도착하여,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샨티니케탄' (평화학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퍼닉스 농원의 사티아그라하 동지들과 더불어 아흐메다바드 (1917년에 그
근교인 사바르마티에 옮김)에 수도장을 세웠다. 왜 아흐메다바드를 택했을까 ?
아흐메다바드 치민이 자진해서 건설 자금을 모금하고, 간디 등이 입주할 가옥까지를
마련하겠다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흐메다바드는 내가 특히 사랑하는
곳으로, 구자라트인인 나는 구자라트어를 통해서 가장 잘 국가에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음 이곳은 일찌기 면포수적업의 중심지였으며, 게다가 그곳은 수방적의
가내공업을 부활시키는 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춘 장소인 성 싶었다. 또한 이 도시는
구자라트의 수도이므로, 다른 어느 곳보다도 그 부유한 시민들한테서 자금의 후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Autobiography, p.395)고 간디는 그 이유를 들고 있다.
봄베이와 더불어 인도 제일의 민족 공업인 면공업의 발생지, 아흐메다바드를 간디가 최초의
수도장의 터전으로 택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간디는 장차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수도장을 만드는 한편, 고칼레의
충고에 따라 우선 약 1년 동안은 정치운동에 참가하지 않고, 간소한 옷차림으로 3등차와
도보로 인도의 각 지방을 순력하여 오랫동안 접촉을 잃은 인도 국민의 현황을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고 다녔다.
 @p152
  1916년에는 틸라크가 인도 자치연맹을 결성하고(4월 23일), 이어 베산트 여사가 마찬가지로
자치연맹을 결성하여(9월 1일) 전시하의 민족(자치요구)운동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으나,
그는 정치운동에는 뛰어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1916년 2월, 그는 베나레스에 있는 힌두대학교 중앙대학에서의 명사들과 학생들의
한 화려한 모임에서, "논문 발표만으로는 결코 우리에게 자치를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많은 연설이라도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치를 얻을 자격을 구비케 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치를 얻을 자격을 갖추게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행동뿐이다" (Filcher, p.54)고
강조했지만, 그는 주로 사회개혁문제에 몰두함으로써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귀국 당시 간디가 봄베이에 상륙하자 그곳에서는 성대한 환영회가 열리고, 이어서
구자라트인만의 회합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남들은 모두 영어로 연설을 한 데 반하여
참석자의 양해를 얻어 구자라트어로 말함으로써 '조그마한 사터아그라하'를 실천에 옳긴
간디 였다. 또한 피닉스 농원에서 온 동지들과 합류하기 위해 샨티니케탄에 가서는 그곳의
선생과 학생에게 육체적 훈련과 도덕적 견지에서 자취생활을 하도록 권하고 부엌의 개선을
역설하며, "이런 경험은 스와라지에의 관건이 된다"고 강조한 그였다. 뿐만이 아니다. (런던의
일류 상가인) "본드 가의 복장이나 봄베이의 멋진 옷차림을 한 지도자들이 어떻게 농민들의
마음과 통할수가 있겠는가" (Fischer, p.53)고 반문하면서 간소한 옷차림으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민들의 고정을 듣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던 그였다. 또한 귀국 직후
향리인 카티아와르에 들리는 길에, 중간역인 와드프완에서 사회활동가인 모틸랄로부터
비람감 역의 관세(통행세) 때문에 철도여객이 겪고 있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난데없이 "군은 감옥에 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라고 묻고, "당신이 우리를 지도해주신다는
조건부로 물론 우리도 감옥에 가겠다"(Namboodiripad, p.39)는 대답을 듣고는 곧 봄베이 주
정부와 서한을 교환하고 그 후 잠시 있다가 총독을 만난 기회에 그 관세를 폐지케 한
그였다.
 @p153
  그러던 중 1917년에는 간디가 인도에서 지도한 최초의 대중 사티아그라하 투쟁이요,
장차의 민족적 사티아그라하 투쟁의 무대 연습이라고 할 수 있는 참파란 사건이 일어났다.
회의파와 회교도 연맹의 협력이 실현된 데다가 회의파내의 온건파와 급진파가 화해하던
중대한 대회였던 1916년 12월 라크노에서 열린 회의파대회에, 당시 전국 각지를 순력하고
있던 간디가 참석했다. 그때 이 대회에 자기들의 비참한 처지를 호소하기 위하여
비하르주의 참파란 지방에서 온 남소작인 대표의 간청으로 간디는 다음해 참파란을
방문하게 되었다. 참파란에서는 간디에게 퇴각명령이 내렸으나, 간디는 이에 불응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그 날 밤 간디는 각지의 우인, 지기에게 전보를
치거나 편지를 쓰고, 게다가 법정에서 읽을 성명서도 기초했다.
  간디의 재판은 전례 없는 기묘한 재판이었다. 재판소 주변은 부근에서 모여든 수천의
농민들로 몹시 혼잡했다. 경찰의 요청에 따라 간디는 군중을 단속하는 데 협력한 후 재판이
열렸다. 검사의 논고를 들은 간디는 조금도 이에 항의를 하지 않고 퇴거명령에 불복했음을
자인했다. 그리고 허가를 얻고 읽은 그의 성명서에 의하면, 그는 "법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인간의 법인 양심의 소리에 복종하기 위하여"(Filcher, p.58) 참파란에서
물러갈 수 없으니 적절한 벌을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놀란 이는 그를 변호하려고 참파란에
달려온 그의 우인들뿐 아니라 그의 재판관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재판관은 결국 재판을
철회하고 말아 간디는 자유롭게 남농장의 실정을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간디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건의 경위는 이러하였다. 백만 이상의 인도 농민이 영국인의
토지를 소작하고 있었는데, 그들 소작인은 그들이 원하는 곡식을 심을 수 있었으나 농지의
15퍼센트만은 반드시 남을 재배하여 그것을 전농지에 대한 소작료로서 농장주들에게 바쳐야
했다.
 @p154
  그러던 것이 20세기 초에 이르자, 독일에서 화학염료공업이 발달하여 천연람은 불필요하게
되었으므로, 영국인 농장주들은 남의 재배를 금하고 그 대신 소작료를 인상하게 되었다.
이는 만일 농민이 남 재배를 하지 않으면 소작료를 인상할 수 있다는 지난날의 합의에
의거한 조처였다. 그러나 인도 농민들은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으므로 소작료 인상에
반대하였다. 이에 영국인 농장주들은 소작인을 구타하고 가옥이나 가축을 차압하는 등 강제
보복조치를 취하는 한편, 수천의 농민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소작료 인상에 동의하는 서명을
하게 했다. 이 쟁의는 1912년에 시작됐지만 은력한 농민들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간디와 그의 동지들은 2만 5천에 달하는 남소작인의 청취서를 작성하여 사실에 입각하는
정당한 요구를 소작인들의 강력한 후원하에 영국인 농장주들에게 제시하여 7개월에 걸친
투쟁 끝에 마침내 이를 관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간디는 '진실'에 충실한 방법, 즉
사티아그라하의 방법으로 참파란의 남소작인의 소작조건 개선에 성공했지만, 이 사건은
극히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것은 영국인 농장주에 대한 투쟁에서
성공했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것은 간디의 이름을 인도 민중간에 한층 더 높이는 동시에
인도에서의 활동에 필요한 유능한 지식인들을 그의 주위에 결집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참파란 사건 후 간디는 1918년 2월에서 3월에 걸쳐
아흐메다바드의 섬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간디가 노사쟁의에 그의 사티아그라하의 수법을
사용한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흐메다바드는 봄베이에 다음가는 섬유공업의 중심지였지만 전시의 물가고로 허덕이던
그곳의 섬유공장 노동자는 마침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단행하기로 하고, 그 지도를
간디 (그의 수도장은 아흐메다바드시에서 강 하나 건너 있는 사바르마티에 있었다)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p155
  간디는 면밀한 조사를 한 뒤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파업의 지도를 수락했다. 우선
사건을 조정에 부친다. 만일 조정이 잘 되지 않으면 정당한 욕구를 위해 단호히 투쟁한다.
그러나 조정의 기회가 있으면 언제라도 이에 응한다는 것 등이다. 먼저 간디는 조정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하여 공장주는 공장폐쇄를 선고하게 되었으므로 이에 파업이 시작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한, 또는 조정이 성립되지 않는 한 공장에
복귀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했다. 파업은 20여 일 계속되었다. 그간 간디는 연설과 글을
통해, 조직된 대중의 사기 앙양에 힘썼고, 또한 노동자들도 최초의 2주간은 총기와 자제심을
나타내어 매일 큰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드디어 노동자측은 맥이 풀리기 시작하여 매일
집회 참가자 수가 줄어들고, 집회 출석자의 얼굴에도 실망의 빛이 엿보이고 있었다. 이
정세를 보고 공장주측이 공장폐쇄를 철회한다고 선언하자, 노동자측은 분명히 동요하여
파업은 위기에 처하게 되고 말았다. "우리들에게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말하는 것은
간디에게는 그것으로 좋을지 모르나, 우리는 굶어죽고 만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불평의
요지였다. 어느날 아침엔, 노동자의 집회에서 간디는 "여러분의 서약을 지키기 위하여 나도
여러분과 함께 굶으면 되지 않겠는가" (Namboodiripad, p.42)고 말하였다. 간디의 단식은
공장주에 대해서가 아니라, 서약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노동자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었다.
간디가 단식에 호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남아프리카 시절에도 수도장의
동지가 부도덕한 짓을 했거나, 사티아그라하의 서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이를 경고하기 위한
단식을 몇 차례나 하여왔다. 그러나 투쟁하는 대중의 투지를 앙양하기 위하여 단식을
호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간디가 단식을 개시하자, 인도의 일각 아흐메다바드의
파업은 전인도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노동자의 사기는 다시 앙양되었고 공장주는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단식은 3 일, 노동자측의 사기가 왕성한 가운데, 조정자가 나타나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가 관철됨으로써 파업은 해결을 보았다.
 @p156
  분명히 간디의 지도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일은 아흐메다바드의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흐메다바드의 섬유노동자의 파업을 승리로 이끈 후 간디는 이어서 이 해
3월에 역시 향리에서 가까운 케다 지방의 소작쟁의를 지도하고, 여기서도 비폭력의 깃발을
내건 사티아그라하 투쟁으로 성공하였다. 비람감, 참파란, 아흐메다바드, 케다의
사티아그라하는 인도에서도 진지한 실험의 결과 분명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일부 국민충의 부분적인 요구에 관한 것이었다. 전국민의 기본적인 욕구, 즉 회의파와
회교도 연맹, 회의파내의 온건파와 급진파가 그것을 위해 라크노에서 결속했던 자치획득은
따로 있었다. 몇 차례의 실험을 통해서 전인도적인 전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간디는 이 민족적 요구를 획득하는 데도 그의 사티아그라하의 수법을 사용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스와라지를 획득하는 가장 용이하고도 가장 직접적인 길은 제국의
방위에 참가하는 일"(Namboodiripad, 일역본, p.44)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간디는 이때에
이르러서도 대영협력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대 영 전시협력을 위한 델리 회의에도
출석하고, 케다 지방에서는 인도인 모병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앞서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에 돌아오는 길에 영국에 들렀던 간디는 때마침 1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협력하는
인도인 야전위생대를 편성, 훈련하는 데 너무 열을 올렸기 때문에 늑막염에 걸렸다.
이번에도 너무 심한 활동 때문에 적리에 걸려 위독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이 병중에 간디는
산양의 젖을 마시는 법을 배웠고, 또한 병 회욕 운동의 하나로서 물레질을 배웠다. 이와
같이 전인도를 지도할 인물로서의 준비를 갖춘 간디는 1차대전 후의 영국의 배신을 계기로
인도 민족운동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p157
  2) 비폭력, 불복종, 비협력 운동
  (1) 시민적 불복종운동
  1차대전에 처하여 인도가 영국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자치를 획득하려던 간디와 기타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종전 후 영국은 인도의 자치요구를
인정하기는 커녕, 인도의 민족운동에 새로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통치법 개정을 위한
몬타규-첼므스포의 제안은 인도의 민족운동이 요구하며 싸우던 모든 것을 부인하는 성격의
것이므로, 가장 온건한 민족운동 지도자들까지도 그 제안에는 불만이었다. 게다가 외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온갖 저항을 분쇄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는 롤라트법안이 이
제안에 추가되었다. 실망과 분노, 영국의 배신에 대한 민족적 불만이 인도 민중의
가슴속에서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자존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복종할 수 없는 것"
(Autobiography, p.456)이라고 롤라트 법안에 대해서 생각했던 간디는 아직 병이 완쾌되지
않은 몸을 무릅쓰고, 총독에게 롤라트 법안을 재가 하지 말도록 간청했다. 이 진정도 예에
따라 무시되고 말았다. 간디는 정치운동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중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전개하려 했으나 국민회의파 지도자 중에 그의 견해에 반대할 이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국민회의파와는 별도로 자기의 세력을 조직하기로 했다.
  악평이 자자하던 롤라트 법안이 정부공보에 발표되자, 간디는 사바르마티에 있는 그의
수도장에서 회의를 열고 '사티아그라하의 서약'을 채택했다. 그 내용은 "이러한 법안이
법률로 될 경우, 그리고 그것이 철회될 때까지는, 우리는 그런 법률과, 금후 임명될
위원회가 악법이라고 간주하는 기타의 법률에 복종하는 것을 시민으로서 거부"하나 "이
투쟁에 있어서 우리는 진리에 충실히 따르며 생명, 개인 및 재산에 대한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확언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는 공공연히 또한 고의로 감옥에
들어가자는 것이다(Namboodiripad, p.46).
  간디는 또한 봄베이에서 사티아그라하 연맹(SatyagrahaSabha)을 조직하고,
'사티아그라하의 서약'에 대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제안을 신문지상에서 처음 읽었을
때 나의 감상은, 이젠 살았구나 하는 기분 이었다" (Nehru, Toward Freedom, p.48)고
네루는 회고하고 있다.
 @p158
  이 호소에 대해서는 벵골을 제외한 인도의 각지에서 반향이 있었고, 특히 남부의 반향은
예기한 것 이상이어서 불과 2주일 동안에 1, 200명이 이 연맹에 가담했다. 1919년 3월에 이
연맹이 발표한 하나의 서명은 "사티아그라하의 서약에서 예고한 위원회는 당분간 금지도서
및 신문 등록에 관한 법률에는 따르지 말도록 권고한다"는 것이었다. 위의 위원회는 금지의
법률을 무시하고 읽기를 권하던 금지 도서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그 속에는 [힌두 스와라지]
[사르보다야] [사티아그라하 이야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롤라트 법안에 대한 저항의 프로그램에 따라 간디는 '하르탈'을 제안했다. 하르탈이란
항의의 표시로서 일을 쉬고 문을 모두 닫는 일이다. 간디는 처음에 3월 30일, 후에 4월
6일을 하르탈의 날로 정했다. 이 날은 기도와 단식과 속죄 및 집회의 날로서 일을 쉬도록
간디는 지령했다. 3월 30일의 예정 일자가 4월 6일로 변경되었으나, 연락이 잘 안된
델리에서는 3월 30 일에 단식과 행진이 단행되었다.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관헌에 의한
발포 사건이 일어났다. 이틀째의 행진은 스와미 슈라다난다가 지휘했는데, 수명의 음정인
병사가 그를 사살한다고 위협했다.
  그는 가슴을 헤치고 총구 앞에 섬으로써, 위협은 이로써 끝났다. 그러나 델리 역에서는
마침내 난투가 벌어져 5명의 사망자를 내고 말았다. 예정일자인 4월 6일에는 봄베이,
마드라스, 비하르, 신드 등지에서 하르탈이 행해지면 우선 성공이라고 생각하던 당초의
예상을 뒤집고, 거의 전 인도가 하르탈을 단행했다. 전인도가 사티아그라하의 투쟁에 궐기한
셈이다. 하르탈은 성공했으나 아므리차르에서는 참사가 일어났다. 여기서는 하르탈에 뒤이어
민중의 사기가 크게 고양되고 있었으므로 관헌은 지도자를 체포하여 이에 탄압을 가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영국군의 다이어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4월 12일, 데모와
집회의 금지를 명하고 계엄령을 폈다. 이 조치는 민중에게 충분히 주지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의 대제일(대제일)인 다음날 13일 저녁, 군중들은 '잘리안왈라 바그'
(Jallianwala Bagh.아므리차르의 공원)에 모여 연설을 듣고 있었다.
 @p159
  그때 별안간 다이어 장군이 나타나 군중을 향하여 기총소사를 명령했다. 공원이라고는
하나 고충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이었으므로, 출구가 좁아 군중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사망자
379명에 부상자 1,200명. 다이어 장군은 이를 전펀잡 주에 대한 위협조치라고 하며, 추호의
동정이나 유감의 뜻도 표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탄 발포 1,650에 대해 사망자 379라는
명중률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였다. 이 사건이 다른 주에 샐까봐 펀잡 주에 계엄령을 펴고,
엄중한 비밀통제가 취해졌으나 점차 사건이 전해져 국민회의파는 그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고 후에 정착한 사실을 공포했다.
  이 무렵 인도의 회교도간에는 터키의 황제 (술탄)이며, 회교도의 군주인 킬라파(khilafa또는
caliph)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었다. 원래 1차대전은 인도의 회교도를 궁지에
몰아넣었는데, 즉 그들은 영제국에 대한 충성과 교주에 대한 성실과의 틈바구니에 끼게
되었다. 영국이 터키 황제인 킬라파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할 때까지는,
그들은 영국 원조의 결의를 하려 하지 않았다. 회교도의 여론은 유럽터키는 터키인에게
맡기고, 황제 (술탄)는 회교성지의 관리와 더불어, 회교학자들이 정한 대로 아라비아의
종주권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비령지를 보유할 것을 강요했다. 로이드
조지와 인도총독은 그렇게 할 것을 정식으로 공약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끝나자, 이
공약은 이행되지 않았다. 패전국 터키의 출탄은 폐지되었고, 킬라파의 앞날도 불투명하였다.
킬라파의 폐지 반대를 위해서 인도의 회교도간에 일어난 것이 바로 킬라파트운동이다.
형안을 가지고 있던 간디는 인도 통일을 이룩하는 가장 적절한 방편으로서 이 움직임을
재빠르게 포착하여 그들을 반영운동에 동원하였다. 20세기 초 이래 영국은, 회교, 힌두교
양교도간의 알력을 조장시켜 왔지만, 이미 남아프리카에서의 체험을 통해서 힌두교도도
회교도도 파르시교도도 모두 인도인으로서는 하나라는 철저한 인식을 갖고 있던 간디는 이
킬라파트운동을 통해서 인도의 회교도를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 끌어넣었다. 물론
회교도에게는 그들로 서의 '독자적인' 입장이 있고, 또 그러한 역사적 조건도 있었으므로,
간디는 그들에게 비폭력을 권하면서도 그들이 비폭력의 원칙을 채용하도록 강력히
주장하지는 않았다.
 @P160
  그와 같이 관대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양교도의 협력을 꾀하였다. 또한 간디는 이 해 1월에
델리에서 열린 회교도의 킬라파트회의에서 의장을 맡아보았다.
  한편 전인도의 하르탈이 성공리에 끝난 후 간디는 체포되었으나, 이때에는 3 일 후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간디는 최초의 전인도적 규모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에 폭력이
혼입되었다고 하여 이를 참회하는 의미에서 3일간의 단식도 하였다. 그렇다고 간디의
용기가 꺾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천 명, 아니 수천 명의 무고한 남녀가 학살당하는 것도
침착하게 숙시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각자는 교수형도 일상 다반사로
여기도록!... (holland, p.70)라고까지 간디는 말했다. 이는 인도 국민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 말일지도 모른다. 이 해에는 간디식 조직과 운동의 기관지로서
주간지 [영 인디아] (영문판)와 [나바지반] (Navajivan.구자라트어판)을 간행했는데, 여기에
매호 기고되는 간디의 주장은 점차 '인도의 소리 '로 되어갔다.
  (2) 비협력운동
  최초의 전인도적 불복종운동이 전개된 1919년에 뒤이어 1920년은 인도 민족운동에서 극히
중요한 해였다. 터키에 불리한 강화조건이 인도에서 알려지고, 아므리차르 대학살에 관한
정보가 발표되어 민심에 충격을 주었다. 간디는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을 생각해내어
그것을 이 해 5월에 베나레스에서 열린 회의파 전인도위원회에 제안했는데, 그것은 다음의
8항목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1 일체의 칭호 및 명예직을 반환한다.
 #2 법정의 보이코트, 즉 변호사 및 소송 당사자는 영국 재판소를 보이코트하고 사적 중재로
소송을 해결한다.
 @P161
 #3 정부의 학교에 대한 보이코트, 즉 각 주의 소, 중 대학교로부터 학생을 점차로 자퇴케
한다.
 #4 여러 참사회에의 불참가 및 지방 행정기관에 임명된 지위를 사직한다.
 #5 정부의 공식 접견, 접대에 출석을 거부한다.
 #6 군인, 교직자, 노동자 계급 층에서 군에 복무하기 위한 모병에 응하는 것을 거부한다.
 #7 외국 상품을 보이코트한다(스와데시).
 #8 국채의 응모를 거부한다(판본양송, pp.134-35).
  회의파 전인도위원회에서뿐 아니라, 같은 달에 열린 킬라파트 위원회에서도 그리고
다음달에 있은 힌두교도, 회교도 회의에서도 이를 지지하였다. 6월 30일에 지지 결의를 한
회교, 힌두교 양교도회의는 1개월간의 유예를 총독에게 주고, 또한 간디 자신이 총독에게
서신을 보냈지만, 반응이 없었으므로 7월 28일 간디는 '비협력'을 8월 1일 개시할 것을
전인도에 선언했다. 그 전날인 7월 31일을 기하여 단식과 기도에 의해 엄숙한 준비
하르탈을 하도록 그는 명했다. 1920년 8월 1 일, 비협력운동을 개시하기 위하여 간디가
봄베이에 도착한 바로 그 날 틸라크는 병몰했다. (고칼레는 이미 간디가 귀국 한직후인
1915년에 2월에 병사했었다.)그것은 마치 인도민족운동의 지도자 교체의 때를 고하는
듯했다.
  간디는 비협력을 실행하기 위해 자진해서 일체의 칭호와 훈장, 즉 남아프리카에서의 박애
행위 때문에 수여된 카이자 리 힌드 황금훈장, 보어전쟁 훈장, 줄루전쟁 훈장을 영국 정부에
반환했다. 이에 아므리차르 대학살에 항의하며 1919년 5월 30일에 이미 기사의 칭호를
포기했던 타고르는 새 민족운동 지도자로서의 간디에게 '마하트마'(위대한 혼)의 칭호를
보냈다. 수백의 관리가 사직하고 수천의 대학생이 자퇴했다. 비협력의 물결은 점차 전인도를
뒤덮게 되었다.
  9월 초에 캘커타에서 열린 회의파의 임시대회에서는 일부 유력한 회의파 지도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점진적인 비폭력, 비협력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11월에 있은
입법의회 선거는 보이코트되었다.
 @P162
  그런데 12'월에 나그푸르에서 열린 회의파 대회에서는 간디의 방침이 회의파의 많은 선배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거의 만장일치로 재확인되었다. 비폭력, 비협력이 스와라지 획득을
위한 회의파의 운동방침으로서 채택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대회는 승리를 얻기 위하여
국내의 모든 요소의 조화, 즉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협력과 빈부간의 접근을 역설하였다.
또한 이 대회는 현재의 비협력은 투쟁의 제 1단계에 불과함을 공언하고, 장차 시기를 보아
납세거부를 완전히 실행할 것을 예고하였다. 이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국민에게 준비를
시키기 위하여 영국화폐 보이코트를 확대하고 물레질을 장려하며 학생, 부형, 사법관에
대소하여 비협력을 더욱 철저히 실행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회의파가 과당헌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여 인도 각 지방 대표의 대의기관으로 되기로 결정한 것도 이 대회에서
였다.
  비협력투쟁을 통해서 간디는 자기 주변의 회의파 지도부의 유능한 인재를 모으게 되어
그의 지도력을 한층 더 강화해 갔지만, 반면 간디의 참가를 계기로 국민회의파 안에는 일대
구조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간디가 처음으로 국민회의파에 참가하자 당장 그 구성에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회의파를 민주화하고 대중의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전에도 회의파는 민주적이기는 했으나,
입당 자격에 제한이 있어, 상류계층에 국한되고 있었다. 이제는 농민이 다수 들어와, 그
모습이 새로워져 중산계급을 상당히 포함하는 커다란 농민조직의 양상을 지니기 시작했다.
이 농민적 성격은 점점 짙어갔다. 공업노동자도 또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들은
단체자격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서 들어왔다. " (The discovery, p.313)
  이와 같은 네루의 말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최초의 간디의 대회'였다는 1919년
12월 아므리차르에서 열린 회의파 대회의 상황을 보면, 3만 6천 명의 출석자 중 6천 명이
정규대표이고 1, 200명이 소작인 대표이며 나머지는 방청 자였다. 이 숫자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대회의 구성에는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p163
  여태까지의 중산계급의 상층부보다 훨씬 더 많은 중산계급 하층부와 소작인, 기타 학생과
청년층을 포함하는 대중이 회의파대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회의파 안에서 계속되어온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도 앞으로는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기반 위에서 전개되게 되는
것이다. 중산계급의 출쳔이 힌두교도에 비해 훨씬 뒤진 회교도사회에서도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회교도연맹과 회의파의 접근도 회교도 중산계급, 특히 그 하층부의 정치적
자각을 추진력으로 하는 것이었다. 간디의 참가는 단지 회의파의 구성상에 변화를 일으킨
것만은 아니다. 그는 또한 회의파 조직의 전국화도 꾀하였다. 즉 전술한 나그푸르
대회에서의 당헌 개정으로 회의파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조직의 최저의 기초는
촌락 회의파위원회에 두고, 그 위에 지구위, 시위, 분구위, 구의, 주위가 차례로 있고, 주는
언어별 단위로 나누어졌다. 이 위에 350명으로 구성되는 전인도회의파 위원회가 있고,
정점에 15명으로 구성되는 운영위원회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주민 5만 명에 1명씩의
위원을 선출하기로 하고, 전위원 6, 173명으로 구성되는 전인도 국민회의파대회는 매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1회씩 소집하기로 되었다.
  국민회의파의 이러한 조직은 촌락에 곧 농민에 기초를 둔 피라미드형의 조직이었다.
간디는 주로 (그가 회의파에 참가하고 있는 동안은 특히) 그와 같은 조직을 통해서
중산계급의 하층, 그 중에도 특히 농민대중을 장악하여 그 에너지를 반영운동에 동원하였다.
1919년에 시작된 시민적 불복종, 20년의 비협력운동을 통해서 인도민중의 정치적 활동은
크게 앙양되었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회의파의 활동에서는 볼 수 없던 전인도적으로 일어난
세찬 물결이었다. "자기 확신과 비상한 능력에 충만되고, 각 개인의 평등과 자유에
편들면서도 만사를 가장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는 놀라운 활력을 가진"
(Discovery, p.316) 간디는 인도의 대중을 매혹하여 그들을 무감각한 정지적 상태에서
깨어나 활동적이 되도록 만들었다.
 @p164
  그는 민족의 정신적 통일을 회복하고, 빈부간의 장벽을 타파하며, 낡은 것에서 생기 있는
요소를 발견하여 이를 육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네루는 "개개인에게도 민족 전체에게도
'간디'의 최대의 선물은 옛부터 가르쳐오고 있는 '아브하야' (abhaya) 즉 공포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육체적인 용기뿐 아니라 마음속에 공포를 깃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Discovery, p.311)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영국 치하의 인도에는
숨막힐 듯한 공포가 서리고 있었다. 원래 공포란 꼬리를 물고 환상을 낳아 실체 이상으로
공포심을 조성하게 마련이지만, 일단 그 실체가 분석되고 그 결과가 쾌히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공포는 반감되는 법이다. 간디는 침착하고 결의에 찬 말로 이렇듯 미만되고 있던
공포에 대하여 "두려워 하지 말랴"고 외쳤다. 왜냐하면 공포심을 갖고서는 진리도, 자유도
그 밖의 고귀한 아무것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심을 버리자 인도 민중에게는
심리적인 반작용이 일어났다. 그들을 모욕하고 타락시킨 외국의 지배에 그토록 오랫동안
굴종해온 것을 부끄러워하는 심정,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제부터는 결단코 굴종하지
않으려는 욕구가 그것이었다.
  비협력이란 본질적으로 "외국인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외국을 돕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관념"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감정은 안에서 나을 수밖에 없다. 그러길래
C.F.앤드루스는, "자기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안에서 발랄한 그 무엇이 용솟음칠 때에만
얻어진다. 그런 용솟음에 필요한 폭발력은 인도 자체의 혼 속에서 발동되지 않으면 안된다.
밖에서의 차관이나 증여, 기부나 양여 또는 선언을 가지고는 얻어질 수 없다. 그것은 안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안에서의 폭발력이 실제로 폭발한 것을 보았을
때에는, 견디기 어려운 부담에서 정신적으로 해방되었다는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
폭발력은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의 마음에 대해서 '자유로워라! 이 이상노예로되지 말라 !'고
외쳤을 때 폭발했다. 인도의 마음은 이에 응했다. 별안간 인도의 굴레는 늦추어지고
자유에의 길은 열렸다"(Nehru, Toward Freedom, p.67)고 말하고 있다.
 @p165
  간디를 매개로 하여 폭발한 인도의 잠재적인 힘이 비폭력운동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전인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게 되자, 비폭력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과열현상이
각처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 첫번째의 대규모적인 경우가 1921년 8월에 일어난 모플라의
반란이었다. 인도 서남마라비르 지대의 모플라(회교도 농민)간에는 영국인에 대한
비협력이라는 간디의 외침이 그들의 반지주적 요구와 하나로 되어 3만의 회교도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은 지주의 문서 소각, 등기사무소와 관청의 습격, 인민법정의 설치 등,
농민혁명적인 형태로 폭발했었다. 이미 12년 3훨 초부터 억압에 착수했던 정부는 이에
대하여 가차없이 탄압하였다. 즉 모플라 반란의 주모자 90명이 체포되어 11월 10일
밀폐화차로 수송 도중 61명이 질식해 죽고 말 정도였다.
  한편 이 비협력운동의 시기에 간디는 회교도인 알리 형제를 데리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백, 수천의 군중대회에 참석하여 그들을 격려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셔츠와
모자의 사용을 그만두고, 예의 인도의 흰 '로인 클로스'(loin cloth.허리를 두르는 간단한
옷)만을 착용하고 다니면서 인도통일을 위해 종교, 인종, 카스트의 결합을 강조하고,
스와데시와 물레질을 역설하였다. 이리하여 간디는 인도 민중의 벗으로 되는 동시에,
불복종, 비폭력 운동이 전인도 민중의 것으로 되어갔다.
  그런데 이때 간디와 타고르 사이에는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다. "타고르와 간디라는 두
위대한 정신 사이의 논쟁은 중요하다. 두 사람은 서로 찬양하고 존경하고 있었지만, 철인과
사도, 성 바울과 플라톤처럼 감정에 있어서는 운명적으로 상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편에는 새로운 인간성의 기초로 되려는 종교적 신앙과 자비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에는 모든 인간의 원망을 결합시키기를 원하는 자유롭고, 청징하며 광범한 이지가
있기 때문이다"(holland, p.125, Kripalani, 일역본, p.63)라고 로맹 롤랑은 말하고 있다.
 @p166
  아시아의 정신의 사절로 유럽에 가서 자기가, 샨티니케탄에 세우려고 하던 세계대학을
위해 유럽의 협력을 구하고 1921년 8월, 수년 만에 귀국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인심의
변화를 보고 놀랐다. 비협력은 그의 세계적인 지성과 충돌했던 것이다. 마치 괴테가
1813년에 프랑스의 문명과 문화를 배격하기를 거부했듯이, 타고르는 유럽 문명을
배척하기를 거부하였다. 간디의 가르침의 진의는 동서양간에 장벽을 쌓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인도의 애국열이 높아지면 간디의 가르침이 그릇 해석될까봐 타고르는 두려워했다.
그는 인도에서 정신상의 전제주의의 위협이 박두하고 있다고 보고, 1921년 10월의 [모던
리뷰]지에 [진리에의 호소] (The Call of Truth)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1907년에서
8년에 걸치는 초기의 인도 해방운동을 회상하며, 인도 정치운동의 지도자들이
직수입적이어서, 에드먼드 버크, 파마 글래드스턴, 마치니, 갈리발디 등을 모방하려고 했다고
비판한 후 인도 순력도상에 있는 간디를 절찬하는 말로 시작했다. "이때에 마하트마 간디가
나타났다. 그는 토지와 재산을 빼앗긴 수천의 사람들의 오막살이 앞에 섰다.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코들의 말로 얘기했다. 거기에는 진리가 있었다. 책에서 빌린 말은 아니었다...
모든 인도인은 살도 퍼도 같다는 것을 간디 이외에 누가 옳게 느꼈을까 ? 일단 진리에
부딪치자 억제되고 있던 혼의 힘이 나타났다. 참된 사랑이 인도의 문전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은 활짝 열렸다. 일체의 주저는 사라지고 말았다. 진리는 진리를 일깨웠다...진리의 힘을
드러낸 마하트마를 찬양하라!... 그 힘은 학문에, 예술에, 또한 부에까지 퍼져가고, 대양을
건너고 사막을 넘어서 갔다." (Rolland, 일역본, pp.136-37) 이렇듯 시인다운 찬사로 시작한
타고르의 논문은 급작스레 신랄한 비판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자유의 훈풍에 접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던 타고르는 당시 전인도를 뒤덮고 있던 압박감, 즉 모든
인도인으로 하여금 같은 언어로 말하며 같은 길을 걷게 하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성과 교양이 부인된 채, 있는 것은 오직 맹종밖에 없다고 본 타고르는 표면상의
자유의 이름 아래 진정한 자유를 분쇄하는 결과를 가져올까 두려워했었다.
 @p167
  간디의 비협력운동에 대한 타고르의 비판은 다음의 두 근거 위에 서 있었다. 하나는
원시생활에 대한 그 호소는 문명의 발달을 저지하게 되리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
운동이 전인류의 복지가 아니라 한 민족의 복지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부싯돌이 선조들의 무기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매달려 있는 민족은 나머지 인류한테
버림받게 될 것이요, 또한 "인도의 각성은 세계의 각성의 일부이며...이제부터는 어떠한
국민도 자기 나라의 고립된 견해를 끝내 취한다면 새 시대의 정신에 배치되게 되고,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이제부터는 각국이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열망은 세계의 복지를
포함하지 않으면 안된다" (Husain, p. xii)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응답에서 간디는 일찍이 보지 못한 열의를 나타냈다. 1921년 10월 13일자의 [영
인디아]지에, 간디는 [위대한 초병] (The Great Sentinel)이란 제목의 감동적인 답변을
실었다. 그는 먼저 약간의 위험에 관해서 미리 인도에 경고한 데 대하여 [위대한 초병]인
타고르에게 감사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은 자유로운 정신의 보전에 있다는
점에는 타고르에게 동의하였다. 타고르는 완미, 혼수, 불관용, 무기력 등으로 불리는 적의
내습을 알리는 훌륭한 초병이기는 하나, 간디는 타고르의 걱정이 정당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간디는 우리의 지성과 온갖 능력이 바쳐야 할 대상은 영혼의 발전이니 만큼,
강철시대가 부싯돌시대보다 전진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의심스럽다고 논하고는, "우리의
비협력은 영국인이나 서양인에 대한 것은 아니요, 영국인이 수립한 제도와 물질문명 및
이에 수반되는 탐욕과 약자의 착취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비협력은 영국 행정관들과
그들이 내세운 조건으로 협력하는 일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 우리의 조건으로
우리와 협력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도, 당신들과 세계에게도 좋으리라'고 그들에게
말한다. 인도의 민족주의는 배타적인 것도 침략적인 것도 파괴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건강을 중진시키는 것이요 종교적인 것이므로 따라서 인도주의적인 것이다. 인도는 인류를
위해 죽기를 열망할 수 있기 전에 사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Husain, p.12)고
역설하였다.
 @p168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고 있는 이 마당에 나에게 허용된 유일한
길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이다... 인도는 날로 가난해지고 있다. 그
수족에는 이미 피가 거의 돌지 않고 있다. 만일 우리가 보살펴주지 않는다면 인도는 금시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 굶주리고 나태한 민족에게 신의 모습이 나타나는 유일한 형식은
생산과 스스로 생계를 세울 수 있는 희망이다...이제는 동물보다도 못하며, 거의 빈사상태에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레야말로 수백만의 빈사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다. 인도에게 물레를 돌리게 하는 것은 기아이다... 먹기 위해서 일할
필요가 없는 나는 왜 물레질을 할까 하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내가 나에게 속해
있지 않는 것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료의 물건을 빼앗아서 살고 있다. 당신의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모든 화폐의 출처를
찾아보시라. 그러면 당신은 내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구도 물레질을 해야 한다!
타고르도 물레질을 하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외국제의 옷을
불태우는 것이 옳다!... 오늘날 그것은 의무이다. 내일의 일은 신이 염려해주신다.
[기타]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바를 일을 행하라!"(Rolland, p.143-45)
  "어둡고 침통한 말! 여기에 예술의 꿈 앞에 마주 서서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라 !'고
외치는 세계의 비참이 있다. 그 누가 간디의 불타는 듯 한 감격을 같이 나누지 않으리요 !
그렇지만 참으로 긍지가 높고 날카로운 이 답변 속에도 여전히 타고르의 염려를
뒷받침해주는 그 무엇이 있다. 시인은 침묵하고, 스와데시운동의 기율에 따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첫째 명령은 '물레질을 하라'이다" (holland, p.145)라고 로맹 롤랑은
논하고 있다.
 @p169
  "얼마나 슬프고 불필요한 논쟁이었던고 !"라고 K.R.크리팔라니 '는 말한다. "여기서는
시인은 자기가 그 출현을 대망하며 기원하고 있던 바로 그 사람에 대해서, 또한 그가
자기의 시와 연설과 희곡과 소설에서 예기하며 축복하던 바로 교 사람의 수단에 대해서
도전했다. 그리고 간디는 '위대한 초병'은 생계를 세우는 일 이상의 일을 갖고 있으며 그의
존재를 완성하기 위해서 물레질을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라고 논하면서 그는 안타까워 하고 있다.
  * : K.R. Kripalani, hndhi, Tagore and Neikru, 삼본달증, 일역본, p.69.크리팔라니에
의하면 간디가 그의 비폭력의 신앙과 신조의 가능성을 계획하기 전에, 타고르는 그러한
사도의 출현을 대망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1883년에 출판된 소설 [바우타크라니르의
모자]에 의거해서 적어지고 1909년에 나온 희곡 [속죄]와, 또 다른 희곡 [룰] (1922년
출판)에서, 그는 다난자이 바이라기라는 인물 속에 거의 간디의 원형을 창조했다. 여기 에는
온갖 재산을 내버리고 왕의 가혹한 세금에 대해 납세거부운동을 일으킨 일반민중의 지도를
맡은 인물이 있고, 여기에는 진리와 비폭력과 용기에 입각하는 대규모적 이며 기율 있는
사티아그라하가 있다고 한다(같은책, p.42).
  또한 일찍이 1904년의 스와데시 사마주에 관해서의 강연과 1908년 파브나에서의
벵골지방회의의 의장 연설에서 타고르가 국민에게 주장하고 설명한 국가활동의 계획은 후일
간디에 의해서 입안되고 조직화된 적극적인 활동계획과 너무나 유사하다고 한다. 비협력,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융화, 불가촉천민제 배척, 농촌개조, 수공업의 부흥, 손일에 의한 훈련을
강조하는 농촌교육, 농촌자치와 지원병의 편성, 이런 모든 것이 열렬하고도 성실한 말로 타고르에
의해서 제창되었다고 한다(같은 책, p.47).
  숭고한 정신을 가진 타고르는 침묵했다. 두 사람의 위대한 논쟁은 끝났다.
 @p170
  그간 정부의 탄압은 날로 심해져 1921년 12월과 1922년 1월 사이에 비협력운동과
관련되어 투옥된 사람이 3만 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되자 간디는 그가 사티아그라하 투쟁의
모델 지구로 정하고 여러 실험을 해온 봄베이 주의 바르돌리에 한정하여 대중에 의한
시민적 불복종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22년 2월, 우타르 프라데슈 주의
히말라야 산록에 있는 차우리 차우라라는 소도시에서 농민에 의한 경찰역습사건이 일어나
경관 22명이 불타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간디는 바르돌리에서 회의파 운영위원회를
열고, 2월 16 일 일체의 대중적인 시민적 불복종운동의 중지를 지령했다. 진리와 비폭력에
충실해야 할 운동에 폭력이 섞이게 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수단을 목적에 못지 않게
중요시하던 간디에 의하면 아무리 소량이라도 우유에 비소가 섞이면 그 우유는 마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지도자와 활동각 투옥당해 있으며, 그들은 운동의 고양을 열망하고 있던 때인만큼
간디의 급작스런 운동중지 명령은 실망과 분격을 샀다. 네루도 처음에는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고민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간디는 비록 경찰측의 대발행위가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폭력은 사티아그라하의 서약에 대한 위배이며 신(진리)에 대한 죄악이
라는 신념을 견지했다. 그러나 간디의 이 조치는 당시 큰 문제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간디
연구가에게는 문제가 되는 점이다. 이 조치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간디의 비폭력의 신념이
확고함을 찬양하는 자, 또는 단순히 간디의 비 폭력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자, 혹은 인도
민중운동의 미성숙에 돌리는 자 등 구구하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치던 간디가 이제 두려워하게 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간디는
폭력에서 현실의 정치악과 사회악을 보고, 비폭력에서 그보다 차원이 높은 질서를 보고
있었다. 불복종이란 양심의 질서에 따르기 위해 현실의 권력에는 복종하지 않는다는
운동이요, 비협력이란 보다 높은 질서의 확립에 협력하기 위해 현실의 권력에는 협력하지
않는다는 운동이다." 간디가 두려워한 것은 그러한 높은 질서의 붕괴였다.
 @p171
  그러나 이런 이상만으로써 간디의 그 조치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간디는
가끔 거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였다. 오랫동안 대중과 밀착하고 있었으므로 대중의 감정의
움직임을 찰지하는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런 대중의 감정에 반응을
나타내고 그것으로 행동을 기율하고 그 후 분격하고 있는 동지들을 위해 자기의 결정을
도리로 감싸고자 하곤 하였다. 당시 비협력운동은 표면상은 강력하며 그 열광은 고조되고
있었으나 사실 그것은 바로 와해에 직면하고 있었다. 일체의 조직과 규율은 상실되고,
유능한 동지는 거의 투옥되고 있었으며, 대중은 대중대로 자력으로 운동을 전개할 훈련을
받고 있지 못했다. 아무리 무명한 자라도 마음대로 회의파위원회를 주름잡을 수가 있었다.
사실 도발자도 포함하는 다수의 원치 않는 인물들이 정면에 나타나 지방의 회의파나
킬라파트운동을 좌우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진출을 막을 길은 전혀 없었다. 간디가 염려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이었다고 하겠다. 게다가 간디는 폭력으로써는 영국을 물리칠 수
없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현실주의자였다. 비폭력의 방법은 단지 정당할 뿐 아니라
목적달성에 가장 유효한 것이라고 믿고 있던 간디였다. 따라서 비폭력은 목적이라기보다는
인도의 독립쟁취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간디에 있어서는 목적과 수단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지만).그렇지 않으면 간디가 네 차례에 걸쳐 영국의 전쟁 (폭력)수행에
적극 협력한 일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더구나 불복종, 비협력운동에서 폭력이
혼입된 것은 이 차우리 차우라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와하를랄은 나의 정치적 후계자이다. 그는 나의 생존시에는 나와 견해를 달리 할는지
모르나 내가 죽으면 그도 나와 같은 말을 하리라" (Husain, p.163)고 예언하던 간디한테서
우리는 인도 국민의 운명을 양 어깨에 걸머진 영도자로서의 책임감과 현실적 제약성을
느끼지 않을 수없다.
  간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비협력운동에 급작스런 중지명령을 내린 얼마 후인 3월 10일에
체포되어 3월 18일 유명한 '최초의 심판'을 받았다.
 @p172
  그는 공술서에서, 1893년 남아프리카에서 자기의 공적 생활을 시작한 이래 어떻게 하여
영국에 대한 충실한 협력자에서 비타협적인 비협력자로 되었는가를 당당히 진술했다.
그리고 간디는 "재판장 및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이 취할 길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즉 여러분이 그 직을 내던지고 여러분이 집행하고 있는 법률이 악이며 실제로는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여 여러분 자신이 악에서 벗어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운영하고
있는 제도와 법률이 인도 국민에게 선이며, 따라서 내 행동이 공공의 안전에 유해하다고
하여 나에게 최고의 형을 내리는 것입니다" (판본섬송, p.150)고 첨부했다.
  재판장은 간디가 위대한 애국자이며 영도자임을 인정하면서, 재판의 전례를 고려하여
6년의 금고를 언도했다. 그 전례란 틸라크의 경우를 가리키며, 틸라크와 같은 형이 언도된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간디는 말하였다. 간디는 에라브다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병 때문에
1924년 2월 5일 석방되었다.
    3. 재준비
  1) 스와라지당과 '건설적 프로그램'
  일반적으로 1922년 차우리 차우라 사건에서 1928년의 12월 캘커타 회의파대회까지의
기간은 간디가 정치의 전면에서 후면으로 후퇴한 시기라고 논해지고 있다. 그러나 간디의
생애를 보면, 정치의 제 1선에서 인퇴한 듯이 보이면서도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줄로
회의파 및 인도의 민족운동과 연결되고 있었으므로, 결국은 다음 투쟁을 위한 준비기간에
불과하곤 했는데, 이번 경우도 그 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민적 불복종과 비협력운동을
지도한 간디의 사상은 인도적인 정신주의가 강했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은 당시의 인도
민중의 현실을 반영하고 그것을 통합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간디에 의한 민족운동의 돌연한
중지는 단지 민족운동의 후퇴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 후의 인도 민족운동의 노선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p173
  간디에 의한 그와 같은 일대운동의 급작스런 중지와 그의 체포는 한편으로는 롤라트법안
반대투쟁 이래로 그가 회의파 안에 이룩해놓은 통일을 깨어지게 하여 회의파 내부의
잠재적인 대립을 표면화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킬라파트운동으로 결합되었던 회교, 힌두교
양자간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어 종파적 분쟁을 노정시키게 되었다.
  우선 전자부터 살펴보기로 한다면, 간디는 비폭력을 역설함으로써 온건파를 만족시키고,
영제국주의에 대한 비협력을 호소함으로써 급진파를 분기시켜 온건, 급진 양파를 하나로
규합시킬 수 있었으나, 그와 같은 운동의 급작스런 중지와 뒤이은 그의 투옥은 회의파
내부에서 오래 전부터 꼬리를 끌어온 양파의 대립이 마침내 온건파에 의한 스와라지당의
결성과 이에 대해 불복종, 비협력의 방침 견지라는 '비변경파'(no-changer)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하였다.
  간디 주변의 주요한 지도자들 중에서도, 스와라지당에 속하는 사람들은 네루의 부친인
모틴랄 네루, 벵골의 지도자 데슈반드 다스와 수바스찬드라 보스, 펀잡의 랄라 라주파트
라이 등이고 비 변경파는 다 같이 간디 측근이라고 할, 봄베이의 발라브흐브하이 파텔,
마드라스의 라자고팔라차리, 비하르의 라겐드라 프라사드 등이었다. 스와라지당의 사람들은,
시민적 불복종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은 주입법참사회를 보이코트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이미 불복종운동이 중지된 지금에 와서는 그런 보이코트는 의미가 없으므로 그러한 기구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비변경파에 속하는 사람은 시민적 불복종, 비협력의
정신을 견지하여 주입법참사회의 보이코트를 계속하고자 하였다.
  1922년 12월 비하르 주의 가야에서 열린 회의파대회에서, 입법참사회 참가의 건은 찬성
890표 대 반대 1, 740표로 부결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비변경파의 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러나 남부디리파드의 말대로, "첫째는 수명의 가장 유명한 회의파의 최고
지도자가 스와라지스트의 지도를 담당하고 있었고, 둘째는 입법참사회에 참가하는 데
반대한 사람들은 아무런 대안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Namboodiripad, p.63)
스와라지스트는, 비록 소수파라고는 하더라도, 회의파 내부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p174
  1924년 2월에 병으로 석방된 간디는 자기가 투옥되고 있던 22개월 동안에 인도의
정치정세는 크게 후퇴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요약하여 "수많은 변호사들은
다시 개업했다. 그 일부는 폐업했던 일을 후회까지 했다... 관립학교를 자퇴했던 숱한 중,
대학생들은 지난날의 자기들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복교했다" (Fischer, p.74)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민중의 투지는 이완된 데다가, 스와라지파와 비변경파의 대립은 결정적인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대정부 비협력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간디는 회의파의 양익을
통일하고 그 틈을 메우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즉 입법참사회 참가가 이미 거의 확정된
사실이며, 또한 회의파 지도자간에 그처럼 날카롭게 견해가 대립되고 있는 문제는
다수결로써는 해결될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간디는 그와 견해를 달리하던
스와라지스트한테는 회의파 안에 머물러 있는 채 그들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걷도록 자유를
부여하는 한편, 자기와 견해를 같이하던 비변경파에 대해서는 스와라지스트의 계획에
반대함으로써가 아니라 입법부 밖에서 대중을 조직, 훈련하여 앞날의 대사업을
준비함으로써 그들의 전술이 보다 나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간디는 비변경파로 하여금 스와라지당이 회의파의 불가결의 구성요소임을 인정케 했을 뿐
아니라스와라지당을 회의파의 정치활동의 중심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동시에 그는 따로
'건설적 프로그램 '을 대중들 사이에 전개하도록 비변경파에 지령하고,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인 면에서의 건설적 행동을 통해서 정치적 에너지를 축적해갔다. 이때 간디가
상징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것을 고집했던 사실은 이 시기의 인도의
사회, 정치적 현실과 간디와의 밀착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p175
  간디는 이미 인도에서도 구식으로 된 '물레' (charkha)의 사용과 카디의 착용을 장려했다.
G.D.H.콜은 "간디가 추진한 자가제직물 수공업을 발전시키려는 운동은 과거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단순히 낭만적인 열정에서 나온 변덕이 아니라, 가난을 구제하고 농촌의 수준을
향상시키려는 실제적인 기도이다" (Discovery, p.355)고 평했지만, 이는 문제의 핵심을 찌른
평이었다. 간디가 물레와 농촌공업에 대한 계획을 전개한 것은 그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나왔다. 즉 막대한 수에 달하는 실업자와 반실업자를 당장에 구제하려고 한다면, 인도
전체에 걸쳐 대중을 마비시키고 있던 부패를 제거하려고 한다면, 농촌의 생활수준을
약간이나마 전체적으로 향상시키고자 한다면, 대중이 타인의 구제를 기다리는 대신에
자립하려는 정신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그러고 이 모든 일을 큰 자금 없이 행하려고 한다면
이 이외의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물레와 카디는 영국 제품을 배격하고 인도
자신의 것을 손으로 짜는 일을 가르치는 동시에 흑서 때문에 농한기가 긴 인도 농민에게
현금수입의 길을 열어주는 실질적인 방법이었다. 게다가 간디는 카디를 인도의 국민적
통일의 상징으로 보고 있었다 함은 전술한 바이거니와, 네루도 카디운동의 정신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것 (카디 운동)은 인도로 하여금 가난한 농민을 인간으로서
생각케 하고, 또한 몇몇 화려한 도시의 배후에는 비참과 궁정의 웅덩이가 가로놓여 있음을
깨닫고, 인도에서의 진보와 자유의 참된 척도는 약간의 백만장자와 부유한 변호사 등을
만들어 내는 데 있거나 무슨 회의나 위원회들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지위와 생활상태의 개선에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파악하도록 강요하였다. 영국인은
인도에 새로운 카스트 내지 계급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영어교육을 받은 계급이며 그들은
대중과는 유리되어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살며, 항의를 할 때마저 그들의 지배자의 눈치를
살피는 작자들이었다. 간디는 어느 정도 그 틈을 메워, 그들로 하여금 머리를 돌려 자국민의
편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Discovery, p.355)
  이와 같은 물레질과 카디착용 장려 이외에도, 간디는 스와데시 (외국제품 배격과
국산애용), 불가촉천민의 해방, 종파간의 화해, 부인해방, 힌디어의 보급, 공작교육, 금주,
공중위생 등의 건설적 프로그램'을 선전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걸어다녔다.
 @p176
  또한 비변경파에 속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열정을 가지고 이상과 같은 프로그램을 천에 옮겨
국민적 통일의식과 자립정신을 대중간에 찬기, 함양함으로써 앞날의 보다 큰 민족투쟁을
위해 국민을 계몽, 훈련했다. 간디가 인도 각지를 순력하면서 일반대중에게 얼마나 큰
감명을 주고 있었는가의 한 예로서 비협력운동 당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인도 부인운동의 지도자 두르가바이 데슈무크 여사의 회고담 중의 몇 귀절을 옮겨놓기로
한다.
  간디가 처음으로 우리가 살던 곳에 오신 것은 1922년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12세의
소녀였습니다... 그곳에서 열린 간디의 연설회에는 나도 참석했습니다만, 회합에는 문자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간단한 허리옷만을 입은 거의 나체에 가까운 간디는
우리를 격려하기도 하고, 우리들에게 신변의 사정들을 돌이켜 보게도 하면서, 우리들
모두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때 어찌된 영문인지 모릅니다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몹시 혼잡해 있었기 때문에, 간디가 있는 곳까지 가기는 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하는 짓이라 모두가 길을 비켜주었습니다. 자그마한
간디모가 사람들에게 돌려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연설을 할 때마다 그는 기부금을 모집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모인 돈은 결국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교육자금이라든지, 극빈자들을
위한 자금, 또는 불가촉천민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간디의 인품에 매혹당해서
내가 행한 최초의 행위는 몸에 지니고 있던 두세 개의 보석을 뽑아서 내 차례에 온 간디모
속에 집어넣은 일이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간디의 가르침을 지키고
열과 성을 다하여 그가 열어준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p177
  간디가 행한 인도 독립을 위한 작전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외국제
내복의 보이코트, 외국어의 보이코트, 모국어인 힌디어의 수득, 물레질, 또한 영락하고
낙후된 사회층의 구제 등 이었습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방침에 따라서 '건설사업'이
조직되었습니다. 그것이 인도의 사람들, 특히 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즉시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랭커셔와 맨체스터에서 수입된 외국제
옷감이었습니다. 나는 손으로 짠 거칠거칠한 카디로 바꿔 입었습니다. 이어서 나는 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국어는 힌디어 입니다. 또한 부락방문을 시작하여 농촌사람들과
접촉하며, 그들에게 말을 걸거나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기도 하고, 카디를
팔거나 농촌 특히 부인간에 물레질을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간디는 '건설적
프로그램 '을 통해서 국민을 각성시키고, 의식분자를 건설사업에, 동원하는 한편,
스와라지스트에게는 입법참사회 안에서 비변경파의 '건설적 프로그램'을 돕는 노선을
취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처럼 간디는 표면상은 비정치적인 '건설적 프로그램'과 스와라지스트의 공공연한
정치활동과를 교묘하게 결부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스와라지스트에게는 실제의 정치활동,
즉 온갖 이용할 수 있는 투쟁의 수단과 무기를 사용하여 정부의 내막을 폭로하며 정부와
싸우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라는 만족감을 주는 대신에, '건설적 프로그램 '의 활동가에게도
영국에 대한 장차의 불가피한 투쟁을 위해서 국민을 준비시키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라는
만족감을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간디는 회의파내의 스와라지스트와 '건설적 프로그램
'파라는 두 파의 고삐를 한 손에 쥐고, 회의파의 지도부와 하층부를 자기 밑에 통일시킬
수가 있었다.
  요컨대 남부디리파드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간디가 비협력운동 후의 시기에 점차
발전시진 전술은... 스와라지스트가 스와라지의 요구를 내세우고, 영국 정부와의 교섭개시를
위해 온갖 기회를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동시에, 몇 만이라는 사심 없는 '건설적
프로그램'파의 활동가의 에너지를 동원하여 조직망을 짜놓고, 교섭이 실패할 경우에는
다음의 비협력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국민을 준비시키는"(Naboodiripad, p.73-74)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p178
  2) 종파주의의 대두와 완전독립의 요구
  앞절에서 지적해두었다시피, 불복종, 비협력운동의 급작스런 중지는 일시 자취를 감추었던
종파주의를 다시 대두케 하였다. 이는 그런 운동의 중지에서 생긴 실망, 좌절의 감정과
정치적 혼란의 결과 등장한 현상이다. 네루는 "각종의 종파주의자들-그 대다수는 정치적
반동주의자이지만-은 비협력운동과 시민적 불복종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종적을 감출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그들은 그런 운동의 중지와 더불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Nehru, Toward Freedom, p.83)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나타난 종파주의자들은 킬라파직의 소멸로 인한 킬라파트위원회의 존재의의 상실과
종파별 의석배당, 종파별 관리임명 등의 정부의 회교, 힌두교분리정책에 편승하여 종파적
대립을 조장하게 되었다. 그들의 종파주의는 단순히 힌두교도, 회교도라는 종교적 대립이
아니라, '실제상의 정치적 대립 '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것은 영국 지배자한테서 탈취하려
하고 있는 권력의 분배를 에워싼 문제였다. 그와 같은 종파주의는 단지 양교도의
최상층부에서의 대립에 그치지를 않고, 인도의 전사회생활을 뒤덮게 되고 말았다. 소를
죽인다거나 회교사원 앞에서 음악을 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사소한 문제들이 극히 중대한
문제성을 띠게 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회교, 힌두교 양교도간에 충돌이 벌어지고 서로
살육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으나 실상은 악마의 앞잡이로 행동하고 있는 그들 종파주의자들이
범한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서 간디는 심히 마음 아프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간디는
1924년 9월 18일, 종파간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양교도간의 평화와 융화를 다시 가져오기
위하여 21일간의 단식을 단행하였다.
 @p179
  이것이 그가 종파간의 화해를 위해 행한 최초의 단식이었다. 예민한 현실주의자였던
간디는 일찍부터 인도의 장래는 회교, 힌두교 양교도간의 관계에 달려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종파간의 분열이 영국 정부에 의해서 이용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다.
 단식은 간디에게 남의 심령을 울려 서로 마음이 통하게 하는 방법이었으나, 그의 단식도
이미 돌처럼 굳어진 회교, 힌두교 양교도 사이의 적개심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물론
부분적인 그리고 일시적인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종파문제는 인도의 공적 생활에
그대로 살아 남아 간디 지도하에 회의파가 스와라지를 위한 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간디의 앞길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로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새 세력이 인도의 민족운동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급진적 반제국주의
세력이었다. 불복종, 비협력 운동의 급작스런 중지에 따르는 실망과 분격은 너무나 커서
회의파의 일부 당원들은 입법참사회 참가라는 스와라지스트의 방책에도, '건설적
프로그램'이라는 비변경파의 정책에도 다같이 불만이었다. 당시에는 해외에서 새로운
사상-아일랜드와 이집트에서는 전투적 반제국주의 사상, 터키에서는 급진적인 사회적,
문화적 변혁사상,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이 인도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새
사상은 환멸의 비애에 잠겨 있던 젊은 회의파당원의 마음속에 파고드는 동시에
인도사회내의 새 계층 내지 새 부분으로 하여금 공적 생활무대에 등장하게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 무렵에는 노동자계급이 무시 못할 세력으로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비협력운동을 전후하여 일어났던 파업운동은 점차노동조합운동으로 발전했지만, 그것은
1920년에는 인도 노동조합의 통합기관으로서 전인도노동조합회의(AITUC)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당초에는 위로부터 급작스레 조직된 것이었으나, 그 후 이를 구성하는
노동조합의 수가 증가되는 동시에 그런 노동조합은 점차로 노동자 자신의 것으로 되어갔다.
 @p180
  그 하나의 이유는 이런 노동조합의 대다수를 지도하던 젊은 민족주의자들이 서서히
노동자계급의 급진적인 반제국주의와 사회정의의 사상에 물들어 갔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운동에 적극 참가한 젊은 민족주의자들은 자연히 급진적 반제국주의, 사회적,
문화적 혁명,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위한 운동의 중핵으로 되었다. 봄베이, 캘커타
등지의 산업도시에서는 사회주의자, 심지어는 공산주의자의 그룹까지 출현하게 되었고,
1926년에는 인도 각지에 노동자농민 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를 앞에 두고,
1927년 영국의 인도사무상 버켄헤드 경은 인도의 실정을 조사하기 위한 사이몬위원회를
임명하고, "인도의 모든 부분이 수락할 수 있는 헌법을 기초하도록"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였다. 이는 종파적 대립에다 계급적 대립마저 겹친 인도의 내부적
분열은 회와파와 그 밖의 비종파적 민주주의자들이 제창하는 민족적, 민주적 요구를 완전히
괴멸시키리라는 악의에 찬 확신에 의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도측에서는 1928년 2월 회의파를 비롯한 회교도연맹, 국민자유연맹(*) 등
각파의 대표가 전 정당위원회를 설치, 헌법초안을 기초하고 그 구상을 보고했는데, 이
보고는 동위원회 의장 모틸랄 네루의 이름을 따 네루보고라 불린다. 이 보고의 골자는
'완전한 책임정치의 선에 따르는 명제국내에서의 자치령의 지위를 즉시 요구하는 것'이었다.
  * : 1919년의 몬타규 첼므스포드개혁에 찬성하여 바네르지 일파가회의파를 탈퇴하여
새로 결성한 것으로, 그 후 오랫동안 영국지배의 지지세력으로 남았다.
  그런데 이 자치령의 지위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모틸랄 네루를 비롯한
스와라지스트의 일파와 기타의 온건파의 인사들 사이에서 통일된 의견이었다. 자와하를랄
네루, 수바스 찬드라 보스 등 젊은 반제국주의 및 사회주의 사상의 선봉이었던 사람들은
이에 반대하고, 영제국에서의 완전한 분리, 독립을 의미하는 푸르나 스와라지의 깃발 아래
결집하게 되었다.
 @181
  이 푸르나 스와라지는 이미 1927년의 마드라스 회의파대회에서 회의파의 목표로서
채택되고 있었다. 즉 그 해 11월에 인도인 위원을 한명도 포함하지 않은 사이몬 위원회가
임명되었을 때, 급진, 온건을 불문하고 이에 분격을 금치 못하던 회의파는 푸르나
스와라지가 회의파의 목표임을 선언한 결의를 채택했었다.
  마드라스대회에 참석은 했으나, 정책수렵에는 참여하지 않은 간디는 "결의의 내용보다도
그 일반적인 경향과 견지 때문에"(Nehru, Toward Freedom, p.129) 이 결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자치령도 푸르나스 와라지도 아니고 다만 스와라지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도 민족운동의 선배 다다브하이 나오로지가 처음 사용한 이 스와라지라는 말은
"독립이라는 말보다도 무한히 크고, 게다가 독립도 포함하고 있다" (Namboodiripad, p.87)는
것이 간디의 견해였다. "회의파는 매년 자기로서도 실행 불가능함을 알고 있을 성질의
결의를 되풀이하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자신의
무능을 나타내고 비평가의 웃음거리로 되며, 적의 업신여김을 자초하고 있다"
(Namboodiripad, p.86)고 간디는 한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푸르나 스와라지를 추진하는
세력은 강했으며, 이 세력을 영도하는 자와하를랄 네루와 찬드라 보스 등은 인도
독립연맹을 결성했다. 이는 수천의 젊은 회의파 당원의 규합점으로 되어, 후일 회의파의
지도자 교체에까지 발전 될 소지를 닦게 된다.
  이런 추세를 보고 간디는 자치령의 지위파와 푼르나 스와라지파 사이의 타협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28년 12월의 캘커타 회의파대회에서는, #1 회의파는 푸르나 스와라지를
궁극적 목표로서 내건다. #2 그러나 1년 이내에 자치령의 지위가 인정되면 이를 수락한다.
#3 만일 이 기간내에 그것이 인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간디, 모틸랄 네루 등과 같은
지도자들도 회의파가 푸르나 스와라지를 약속한 것에 동의하고, 그것을 위해 비폭력, 비협력
투쟁을 조직한다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p182
  간디는 캘커타대회에 참석한 이외에는 여전히 정치에서 완전히 떠나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주로 카디운동의 선전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태의 진전에는 완전한 접촉을 가지면서 가끔 회의파 지도자들의 상담에
응하고 있었다. 그간 회의파의 지도부는 국민자유연맹의 중심 인물인 사프르 등과 협력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영국정부와 교섭을 꾀했으나 영국은 자치령의 지위가 아닌 제한된
지방자치 이상의 것은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1년간의 기한은 마침내 다되어 1929년
12월에 열린 라호르 회의파대회에서는 이 문제에 결판을 내야 하게 되었다. 회의파대회가
펀잡주에서 열린 것은 10년 만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10년 전의 일 즉 아므리차르 대학살,
계엄령, 아므리차르 회의파대회, 이에 뒤이은 비협력운동의 전개 등을 회상하였다. 그간
인도는 많이 변했으나 다시금 정치적 긴장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전인도적인 비폭력,
비협력의 직접행동이 불가피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으므로, 누구도 간디가 총지휘를
하리라고 예상하고 또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간디는 자신이 의장이 되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젊은 자와하를랄 네루를 마치 자기의 후계자인 양, 의장으로 추천했다.
이 조처에 관해서는 구구한 견해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 인도의 정정에
있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1928년과 29년은 격심한 노동공세의 시기요, 혁명적인 청년들의 테러리즘의
시기이며, 인도정부의 가혹한 탄압반격의 시기였다. 바로 이런 시기에 처하여 회의파는
좌파세력을 포섭하면서도 사태를 파국으로는 이끌지 않을 의장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간디가 우파인 파텔을 제쳐놓고 좌파인 네루를 추천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네루는
라호르대회 직전에 나그푸르에서 열린 전인도노동조합회의대회의 의장을 맡아보았다.
게다가 네루는 선견지명이 있는 급진파이며 겸손하고 실제적 이어서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고 간디는 믿고 있었다. 실제로 간디는 라호르대회의 수주일 전에 쓴 글에서... 나의
자치령의 지위라는 관념에는 만일 내가 원한다면 영국과의 결부를 언제라도 단절할 수 있는
힘을 포함한 것"이라고 말했다.
 @p183
  네루도 의장연설에서 ... 우리가 자유를 쟁취한 후에는 인도는...인도가 그 안에서 대등한
구성원인 보다 큰 그룹에 들어가기 위하여 자신의 독립의 일부를 포기하는 일에까지
동의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Namboodiripad, p.92-93)고 말하였다. 환언하면 간디는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푸르나 스와라지를 받아들였고, 네루는 독립을 쟁취한 후에는 독립에
모종의 제한을 고려할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전년의 캘커타대회 이래의
자치령파와 푸르나 스와라지파 사이에는 참된 타협이 성립된 셈이다. 그런데 두 파의
독립에 대한 해석 여하와는 상관없이, 민족의 요구를 영국에게 인정시키기 위해서는
대중투쟁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인식하에 그들은 푸르나 스와라지라는 캘커타대회의
결정을 실천에 옮기는 데 동의하고 투쟁의 준비에 적극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간디도 이 라호르대회에서 푸르나 스와라지는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목전의 목적이라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단계를 향해 한 걸음 더 힘차게 내디뎠던 것이다.
    4. 제 2차 불복종운동
  1) 소금 행진과 원탁의회
  1929년의 라호르 회의파대회는 '완전독립' (푸르나 스와라지 )을 결의 했을 뿐 아니라,
매년 1월 26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하고, 이 날에는 전인도에서 행사를 통하여 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기로 했다. 또한 이 대회는 전인도 회의파위원회에게 "언제라도 적당하다고
생각될 때"에 대중적 불복종운동을 개시할 권한을 부여했다. 독립을 쟁취하려는 인도
민중의 사기는 날로 고양되고 있었다. 이에는 계급적 자각을 갖기 시작한 노동자,
영제국주의와 인도인 지주의 이중적 수탈에 신음하던 농민, 사회주의를 민족운동 속에
도입하려던 네루, 그 밖의 지도자, 급진적인 민족주의 담당자로서의 청년과 학생, 그리고
영국 자본과 경합하던 인도 민족자본가 등 국민의 온갖 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정의의 관념이 뒤섞여서 날로 고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p184
  제 1회 '독립기념일'인 1930년 1월 26일은 마침내 찾아왔다. 회의파 운영위원회의 호소에
응하여 인도 각지에서는 시위집회를 열고, 독립 인도의 삼색기 아래서 '독립의 서약'을
엄숙히 낭독했다. '독립의 서약'이란 네루를 의장으로 하는 회의파 운영위원회가 발표한
단호한 내용의 문서이다. 그것은 "영국정부는... 인도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정신적으로
파괴하였다... 우리나라에 이런 4중의 불행을 가져온 영국의 지배에 이 이상 복종하는 것은
인간과 신에 대한 죄악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영국의 비인도적인 인도 통치를 힘차게
고발하는 한편, "그러나 자유를 획득하는 가장 유효한 길은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영국정부에 대한 우리의 임의적 협력을
철회하고, 납세거부 등을 포함하는 대중 불복종운동을 준비하려는 바" (Nehrur Toward
Freedom, pp.388-89)라고 부언하고는, 만난을 무릅쓰고 이를 실행할 수만 있다면 인도의
독립은 확실하다고 강조하는, 참으로 인도의 애국청년을 분기시키는 내용을 담은 문서였다.
도시도 농촌도 서로 다투어 이 역사적인 날을 축하했고, 각지의 대집회는 모두 평화리에
극히 인상적이며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이 축전은 간디에게 큰 자극을 주어 그는 행동을
일으킬 시기가 성숙했음을 감득했다.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간디는 '독립기념일' 4일 후인 1월 30일 어윈 총독에게
11개 항목의 최후의 요구를 제출했다. 총독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그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비폭력, 비협력의 입장에서 위의 11개 항목 요구 중의 하나인 '염세의 폐지 '를 들고
일어섰다. 그는 인도 민중의 일상생활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가진 소금을 영국정부의
전매사업으로 하기 위한 제염금지법에의 불복종을 몸소 수범하기 위하여, 1930년 3월 12일,
79명의 엄선된 문제를 데리고, 수도장이 있는 사바르마티에서 봄베이 근처의 단디 해안에
이르는 200마일의 이른바 [소금 행진]을 개시했다. 연도의 170개의 촌락에서는 사람들이
마치 마술에나 걸린 듯이 간디 일행에 가담했고, 인도의 민중은 이 순례행진대의 운명을
매일매일 지켜보는 가운데 점차 흥분이 고조되어갔다.
 @p185
  4월 5일 간디의 일행은 드디어 단디 해안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4월 6일은 국민주간의 제
1일이다. 국민주간이란 매년, '사티아그라하의 날'에서 자리안왈라 바그에 이르는 1919년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설정된 주간이었다. 이 날 아침 6시 반 간디는 먼저 해수로
목욕재계를 하고는 제염금지법을 무시하고 소금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자, 민중의 환호는
절정에 달했다. 3일 후인 4월 9일 간디는 전인도 민중에게 지령을 내렸다. 소금을 만들라!
암염이 있는 곳에선 암염을 파라! 바다도 멀고 암염도 없는 곳에서는 관립학교, 관직의
보이코트를 하라! 주점, 외국제 포목전의 피켓을 서라! 확실히 이러한 요구는 단순하고도
구체적이었다. 누구도 참가할 수 있었고, 전 인도에서 한꺼번에 행동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간디 영도 아래 제 2차불복종, 비협력 운동이 개시되었다. 회의파는 조직을
총동원하여 이 운동에 선봉섰고, 특히 부인들에 의한 가두 피케팅은 효과를 가장 잘
나타냈다. 예를 들면 랭카셔 면포의 수입은 1930년을 고비로 하여 종랙의 약 5분의 1로
격감했다.
  그러나 운동이 확대, 격화의 일로를 걷게 됨에 따라 다시금 비폭력의 한계를 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 4월 18일에는 벵골주의 치타공에서 경찰의 무기고가 습격되었는가
하면, 4월 23 일에는 인도와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도시인 페샤와르에서 데모 군중과 경찰
사이에 대대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특히 페샤와르에서는국경의 간디라고 불리던 회교도
지도자, 한아브둘 가화르 한의 '붉은 셔츠대'가 절기하여 공전의 대데모가 일어났다.
데모대를 위협하기 위해 동원된 장갑차가 불태워지자, 군중에 대한 대규모적인 발포가
감행되어 수백의 사망자를 냈다. 이때 힌두교도의 가르왈리보병대의 일부는 회교도 군중에
대한 발포를 거부했고 마침내 이 시는 10일간 인도에 의해서 지배되기에 이르렀다.
  '소금 행진'을 신호로 완전독립에의 시위가 전인도에 파급됨에 따라, 이렇듯 여기저기에서
폭력이 개재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간디도 중지의 지휘봉을 간단히 내릴 성싶지 않자,
영국 관헌은 간디에게는 인도 민중을 통제할 힘이 없다고 보았던지, 5월 5일 간디를
체포했다.
 @p186
  간디에 대신해서 탄압과 무력으로 이를 억압하려든 셈이었다. 그러나 간디 체포의 보도는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하르탈과 파업이, 그리고 조세불납운동이 각지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공직사퇴의 성명이 연달아 나왔다. 민중의 열광은 절정에 달하여 봄베이
주의 숄라프르에서는 민중이 1주일간 거리를 점령했다. 이런 종류의 행동은 현재의 동, 서
파키스탄의 각지에서 일어났다.
  영국은 군대, 비행기, 탱크, 소총 등 온갖 무기를 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한편,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자들을 체포하는 동시에 회의파를 불법화하고,
불법선동단속령, 신문단속령을 공포하는 등 강압책으로 나왔다. 정면에서 내리치는 이와
같은 '몽둥이' 정책과 병행하여 영국은 또한 상투수단인 '엿' 정책도 썼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원탁회의였다.
  영국에서는 1929년 봄의 총선거에서 맥도널드의 노동당이 제 1당으로 되었다.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노동당도 인도의 완전독립은 물론이요, 자치령의 지위까지도 명백히는 약속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인도의 헌법문제에 관해서 토의하기 위해 영국령 인도각주와 번왕국의
양자에서 선출된 대표를 모아 원탁회의를 열 작정이라고 했다. 회의파는 처음에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영국측의 저의, 즉 자치령의 지위까지도 당장에는 인정할
용의가 없음이 영국의회의 토의과정에서 명백해짐에 따라 회의파의 태도도 경화되어 그러한
원탁회의에는 대표를 보내지 않고 기정방침대로 '완전 독립'을 향해 매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1929년의 라호르대회, 이어 30년 3, 4월의 '소금 행진'에 뒤이어 제 2차
불복종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30년 6훨에 발표된 사이몬위원회의 보고에
입각하는 연방제로의 재조직 안을 토의하기 위하여 그 해 11월에 런던에서 제 1차
원탁회의를 열었다. 회의파는 처음부터 이를 보이코트하고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위의
재조직 안은 총독의 전제적인 권한에는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는 것이어서 회교도연맹
대표자한테서도 전면적인 동의는 얻지 못하고 단지 인도연방의 조직대강에 대해서만 결정을
본 데 불과했다.
 @p187
  그 때문에 영국의 맥도널드 수상은 대탄압으로 인하여 인도의 불복종운동이 고개를 수그린
틈을 타, 감금중인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석방하고는 그들과 타협을 모색하려 하게 되었다.
한편 언제나 우회를 하더라도 상대방과 회견하여 만사를 토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던
간디는 어윈 총독에게 회담을 요청하여 오랜 교섭 끝에 31년 3월 5일 마침내 간디와
어원간에 유명한 델리협정이 성립되었다. 이는 불복종운동에 관한 총독의 긴급령을
철폐하는 조건으로 운동의 중지를 약속한 점에서 확실히 하나의 타협이었다. 불복종운동에
관련돼서 체포된 모든 정치범의 즉시 석방, 운동의 과정에서 정부가 몰수한 재산, 토지
중에서 아직 매각처분을 하지 않은 것의 소유자에의 반환, 해안에서 일정 거리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무세제염의 총인, 주류, 아편, 외국제 의류품에 대한 평화적인 감시 인정
등 부수적으로 획득한 성과도 물론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민중의 열광이 고조되고
있는데다 희생이 컸던 만큼 이런 성과는 결코 충분치는 못하여 민중의 실망은 몹시 컸다.
네루도 이 협정체결에는 당황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간디의 대영 양보 내지
굴복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원래 간디를 먼저 석방하고(31년 1월), 델리협정을 체결한 그
자체가 제 1차 원탁회의의 실패로 난처한 입장에 빠진 영국은 인도 민중간에 차지하는
회의파 지도자, 특히 간디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증좌였다.
  이미 세계는 대공황에 쉽쓸리고 있었지만, 그 파동은 식민지 인도의 경제, 정치, 사회의 각
분야에 심각하게 미치고 있었다. 당초에는 영국화폐 보이코트로 이득을 보던 회의파 안의
민족자본가도 운동의 급진과를 두려워하여 원탁회의, 오타와회의 제안을 앞에 두고
동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이 보호관세의 이득을 노리고 인도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던 영국 자본과 점차 결탁하게 되자 그들은 투쟁의 장기화를 원치 않게 되었다. 또한
회의파운동의 후원자인 지주도 지대불납운동의 격화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p188
  이와 같은 회의파 안의 사정뿐 아니라 회교도와의 관계도 그리 신통치는 못했다. 앞서
간디의 호소에 대중데모로 응했던 서북 변경주의 회교도는 물론이요, 회교도연맹과의
통일행동도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기는 하나, 그들과의 제휴의 취약성은 여전히 영국한테
이용당할 제일 큰 약점이었다. 게다가 바가트 싱그가 지도하던 청년운동도 주로 테러수단에
호소함으로써 간디를 비롯한 회의파 지도자와 오히려 대립하고 있었다. 한편 28, 29년에
절정에 달했던 노동자의 투쟁은 31년에는 약간 침체상태에 빠졌고, 노동자를 비롯하여
회의파 안의 급진분자를 포함하는 진보세력은 아직 간디를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압력으로는
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온갖 요인을 고려에 넣은 간디는 국내의 여론과 운동의 역량을
재정비하여 본격적인 독립투쟁에 들어가려고 델리협정에서 불복종운동의 일시 중지를
약속하면서 제 2차 원탁회의에의 참가에 동의했다고 본다. 또한 위와 같은 사정 때문에
당시 민족운동을 지도하던 민족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회의파 지도자도 전선정비를 위해
일보 후퇴를 결의했던 성싶다.
  사실 델리협정 직후인 3월 말에 열린 회의파 카라치대회는 델리협정을 승인하고, 또한
원탁회의 참가도 그대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항의의 여파는 계속되어, 그것은
자연 회의파대회에 반영하게 되었다. 즉 '완전 독립'의 요구를 실질적으로 재확인하는 한편,
급진세력에 대한 무마책으로 노동자, 농민의 기본적 인권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에
노동조건의 개선과 지대의 인하, 그리고 노후, 질환, 실업에 대한 경제적 보장 등의 요구가
회의파의 강령에 삽입되었다. 그런가 하면, 온갖 폭력행위를 비난하면서도 바가트 싱그 등
혁명적 민족주의 청년들(*)의 총기와 자기 회생을 찬양하는 결의도 채택했다.
  * : 1928년 4월 8일, 텔리에서는 개회중인 입법의회에 두 청년지도자, 바가트 싱그와
B.K.다트가 두 개의 폭탄을 던졌다. 때마침 의회를 방문중이던 사이몬위원회외 사이몬
위원장은 의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을 면했다. 두 사람은 체포되어 종신형을
언도받았고, 그 후 바가트 싱그는 라호르 경관살해사건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카라치회의파대회 직전인 31년 3월 23일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의 체포에 뒤이어
인도 각지에서는 수많은 혁명적 청년들이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옥중에서 정치범의 대우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 중 자틴드라나트 다스라는 25세의 청년은 끝까지 단식을
계속하던 끝에 9횔 3일 단식 61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순교자의 죽음은 전인도에서
애도와 항의 속에 기념되었다. 그런데 수단은 목적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믿던 간디는
다스 청년의 순교에도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p189
  이렇게 함으로써 내부적 통일을 꾀한 회의파도 그 후 제 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회의파와 영국정부와는 현저한 견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요, 둘째로 인도 안의 사태가 원탁회의에의 참가를 방해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정부는 제 1차 원탁회의에서 합의된 특정 형태의 연방조직을 기정 사실로
하고, 제 2차 원탁회의에서는 그 세부점만을 토의하려는 데 대하여 회의파는 백지상태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또한 인도 안의, 특히 벵골, 연방주 및 변경주의 사태는
델리협정 후에도 여전히 긴장이 계속되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으므로, 만일 국내정세가
진전되면 정부와의 분쟁이 일어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큰 기대를 걸지 못한 채 간디는 회의파의 단독대표로서 31년 9월에 런던에서
열린 제 2차 원탁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강요된 주의제는 "제 1차 원탁회의에서
뒤로 미루어진, 연방으로의 재조직에 있어서 선거제도를 어떻게 하느냐"라는 가장 복잡한
종파적 문제였다. 영국은 '소수파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종파별 선거와 소수파를 위한
특별의석 보류를 미끼로 원탁회의에 출석한 비회의파 대표를 조종하여 간디를 고립시키는
술책을 썼으므로, 네루의 말처럼 "회의는 실패하도록 꾸며져 있었던" (Nehru, Toward
Freedom, p.209) 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은 인도에는 헌법개정이라는 극히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인도인 지도자들은 그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으니 영국정부 자신이 그 해결
즉 종파적 재정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인상을 세계에 줌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인도의
진정한 문제로부터 돌리는 데 성공하였다."
 @p190
  영국은 이렇듯 회의파를 원탁회의에 초청하여 회의파는 헌법개정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고는 회의파를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공황의 심화는 인도내의 경제투쟁의 격화와 결부된 반영운동의 고양, 조세불납운동의
확대로 되는 반면, 인도 시장의 확보에 더욱 광분하게된 영국의 인도에 대한 양보의
가능성을 적게 했다. 이제 '엿'의 정책을 쓸 여유를 잃은 영국은 델리협정을 파기하여
다시금 긴급령을 내리고 무자비한 검거와 탄압을 시작했던 것이다. 간디가 원탁회의를
끝내고 12월 6일에서 11 일까지 동양문화에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가지던 위대한 유럽의 지성
로맹 롤랑을 스위스의 레만 호반에 자리잡은 그의 저택으로 방문, 체재한 후 이탈리아를
거쳐 12월 28일에 귀국했을 때에는, 이미 우타르 프라데영, 서북 변경주 등의 주들은
총독령에 의한 통치 아래 들어가 있었고 네루를 비롯한 회의파의 몇몇 최고지도자도
투옥당하고 있었다. 총독과 교섭하여 분쟁문제를 처리하려는 자기의 온갖 노력이 실패하자,
간디는 32년 1훨 3일 불복종운동의 재개를 선언했으나 그 다음날 간디는 체포되고 또한
회의파도 재차 불법화되었다.
  한편 영국은 제 2차 원탁회의 당시, 선거제도 문제는 어디까지나 인도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나, 실제로 이를 해결 못하는 형편이므로 부득이 영국이 중재, 조정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끌었지만, 이에 따라 영국은 32년 8월에 이른바 맥도널드 재정 (또는 코뮤널
재정)을 행하였다. 이에 의하면, 카스트, 전투와 카스트 밖의 불가촉천민을 분리해서
선거를 하고, 또한 인도에서 유럽인, 영, 인 혼혈인, 기독교인과 더불어 회교도가 매우
우대받게 되었다. 이어 제 3차 원탁회의가 32년 11월 에서 12월에 걸쳐 이제는
비합법단체로 탄압당하고 있던 회의파의 대표가 출석하지 않은 채 런던에서 열렸지만,
그것은 영국측의 대강에 따라 세부를 완성하는 것으로 끝났다.
 @p191
  2) 하리잔운동
  앞에서 말한 맥도널드 재정에 의거하는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를 맥도널드 수상 자신이
서신을 통해 확인하자, 간디는 32년 9월 20일을 기하여 푸나의 에라브다 옥중에서 '죽을
때까지 단식'을 단행했다. 일찍이 1909년 회교, 힌두교 양교도 사이에 분리선거제를 채택케
함으로써 인도를 둘로 나눈 영국은 이번에는 불가촉천민에게 분리선거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카스트, 힌두에서 다시 분리시키려고 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원탁회의
석상에서, 다음에는 영국의 인도 사무상에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맥도널드 수상에게, 영국이
정말 자기가 이상으로 하는 '하나의 인도'에 역행하게 될 불가촉천민 분리선거제를
제정한다면, 간디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겠다던 자기의 언명을 이제 실천에 옮기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생사를 초월한 간디라 하더라도 죽음을 앞두고는 마음의 동요를 느꼈던지
그는 타고르에게 자기의 이번 행동에 대한 솔직한 평을 갈망하는 편지를 썼다. 막 편지를
끝내자 때마침 타고르한테서 전보가 왔다. 그것은 "인도의 통일과 인도 사회의 보전을
위해서는 값진 생명이라도 회생시킬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국가적 비극이 극도에
이르도록 무심하게 내버려두지 않기를 열망하는 바입니다"라는 격려의 전문이었다. 그래서
간디는 "선생의 사랑에 넘친 장엄한 전문에 감사합니다. 그 말씀은 내가 바야흐로
들어가려는 폭풍우 한가운데 서도 나를 붙들어줄 것입니다" (Filcher, p.117)는 말을 그
편지에 덧붙이고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날 정오에 단식에 들어갔다.
  이에 놀란 힌두 지도자와 불가촉천민의 지도자들은 급히 푸나로 달려와, 두 파 사이에
불가촉천민에 관한 맥도널드 재정을 수정하는 타협안인 푸나협정에 합의를 보고, 이 협정에
대한 영국정부의 확인을 얻게 됨으로써 간디의 비장한 단식은 1주일로 중지되었다. 간디의
이번 단식은 힌두교도 사이에 큰 충격을 주어 불가촉천민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많이
시정케 하였다.
 @p192
  또한 위 협정의 한 항목에는 불가촉천민제의 폐지와 최하층계급의 생활향상을 위한 전국적
대중운동이 들어 있었으므로, 간디는 옥중에서 이른바 하리잔운동을 전개하는 일이
허용되었다. 하리잔이란 '신의 아들'을 뜻하며,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이렇게 불렀다. 33년
초에 간디는 기관지 [영 인디아]를 [하리잔]이라고 개제하고, 불가촉천민제의 폐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옥중에서의 간디의 하리잔운동은 옥외에 있는 다수의 회의파
당원들의 시간과 정력을 불복종운동을 추진하는 일에서 하리잔의 복지사업을 추진하는 일로
돌리게 하였다.
  그러나 하리잔운동의 진전은 시원치 않았으므로, 어떤 젊은 미국부인이 그의 수도장에서
타락된 일을 저지른 것을 계기로, 간디는 자기정화의 수단으로서 33년 5월 8 일, 21 일간의
단식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먼젓번에 데난 영국정부가 단식 첫날에 간디를
석방했으므로, 그는 옥외에서 단식을 끝마쳤다. 5월에는 회의파 의장대리에 권하여
불복종운동을 중지시키고 7월에는 일체의 비밀활동도 정지케 하였다. 간디 자신 자기의
사바르마티 수도장을 해산하고 그곳을 어떤 천민단체에 넘겨 줄 정도였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정책은 좀처럼 완화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다시 개인적 사티아그라하를 권고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자 8월에 그는 다시 체포되었고, 이번에는 영국정부가 그의 하리잔운동의
전개마저 허용치 않았기 때문에 간디는 또다시 단식을 단행했으나, 위독상태로 인하여 5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에 간디는 남은 형기가 끝나는 34년 8월까지는 자기를 수인으로
간주하여 정치문제에는 침묵을 지킬 것을 성명했다. 그리고는 33년 11월부터 10개월 동안
하리잔운동을 위해 전국 각지를 여행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옥외에 있는 회의파
지도자들과 비공식으로 상의한 끝에 34년 4월에는 불복종운동을 완전히 정지하도록 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뒤이어 정부는 회의파의 비합법성을 실질적으로 해제하고 불복종운동을
정지하기 위한 전인도 회의파위원회 내지 회의파대회의 개최를 허용하게 되었다.
 @p193
  이리하여 5월에 전인도 회의파위원회가 열렸는데, 이 위원회에서는 불복종운동을
철회하는 간디의 성명이 승인되고, 또한 회의파는 각종 입법기관에의 선거, 그리고 앞으로
있을 중앙선거에의 참가를 결정했다. 그들은 의회투쟁을 전개하기로 정책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선에 패해서는 회의파 지도부는 거의 완전히 의견이 일치했으나,
회의파 전체로서는 결코 그렇지는 못했다. 원래 회의파 하부에서는 1932년 9월의 단식 이래
간디가 취해온 노선에 대해서 크게 반발하고 있었지만, 불복종운동 정지에 관한 간디의
성명을 옥에서 읽고, 그 정지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던 네루는 "오랜 세월에 걸쳐 나를 그
'간디 '에게 묶어오던 충성의 끈이 찌르는 듯한 아픔과 함께 툭 꿉어진 것처럼 느꼈다"
(Nehru, Toward Freedom, p.311)고 술회하고 있다. 회의파 지도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은
1933년에서 1934년 사이에는 전례없이 확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파 하부당원들의
불만은 의회투쟁 자체에 대한 봉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의회를 보이코트하고 불복종운동을
계속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기로서 의회투쟁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의회제도를 이용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즉
지도부가 생각하고 있듯이 의회제도는 영국측과 교섭을 재개하기 위한 통로로서 이용되어야
하느냐, 또는 반제국주의적 대중운동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이런 문제가 야기된 것은 당시 그들 사이에 침투하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1 차대전 후 인도에서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내거는 지식인과 노동자의
그룹이 생겨나고 있었다. 10월혁명과 소비에트의 건설은 여러 형태로 인도에 영향을 미쳤고,
1928년의 소련의 제 1차 5개년 계획의 개시는 인도의 각계각층에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1930년에는 타고르가 소련을 방문하고, 그 인류애적, 민족주의적
각도에서의 예찬은 많은 인도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p194
  1927년에 소련을 방문하고 또한 유럽에서의 견문을 통해 사회주의적 입장을 몸에 지니고
돌아온 네루는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인도의 민족운동에 도입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세계공황과 영국의 대탄압 아래서 절망과 분격을 금치 못하던 인도의 혁명적 청년들은
대공황으로 드러난 자본주의의 미증유의 위기, 소련의 제 1차 5개년계획의 성공적 수행,
독일에서의 나치즘의 대두 등 일련의 국제적 대사건에 영향받아 공산주의 사상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하에 1933년 말에 이르자 수많은 공산주의 그룹들이 합동하여
인도공산당을 결성했지만, 조직한 지 몇 개월 후에는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회의파 지도부에 불만을 품던 사회주의적인 젊은 당원들은 1934년 5월에 회의를
열고 회의파사회당을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회의파가 의회주의파와 사회주의
파로 갈라지자 간디는 34년 9월 회의파에서의 인퇴를 성명했다.
  이 해 10월 봄베이에서 열린 회의파대회에서는 간디에 대한 신뢰와, 1언제라도 필요할
때에는 그가 회의파에 권고와 지도를 한다고 약속했다는 사실을 명기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회의파의 제 1선을 물러난 간디는 하리잔의 문제를 비롯한 인도 민중의 일상생활과 밀착한
이른바 '건설적 프로그램'에 시간과 정력을 바치게 되었다. 코는 또한 기초교육에 대해서는
각별한 관심을 표시하여, 1937년에는 와르다(그는 35년에 인도의 지리적 중심인 와르다
부근의 세바그람이란 마을에 새로 수도장을 세웠다)에서 열린 교육회의에 자기의 교육만을
제출했는데, 그것을 약간 수정하여 성립된 것이 유명한 간디의 와르다 플랜이다. 그것은
첫째로 7개년의 무료 의무교육을 전인도에 실시한다, 둘째로 교수용어에는 모국어를
사용한다. 셋째로 이런 교육은 모종의 공작과 결부시켜야 한다는 것을 제창한 안이었다.
그런데 왜 간디는 불복종운동을 버리고 하리잔운동에 열중하고, 더 나아가서는 회의파에서
연회하여 '건설적 프로그램'에 몰두했을까?
 @p195
  찬드라보스는 "마치 전쟁이 한창일 때, 장군이 예하부대에 명하여 물이 부족한 촌락민을
구하기 위해 운하를 파게 하는 격" (판본덕송, p.215)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E.M.S.남부디리파드는 "1932년의 '간디 '의 단식과 그후의 명백한 사회문제인 하리잔의
향상을 위한 행동은, 현실의 정치정세에 대응할 목적을 가지고 주의깊게 계산된 전술의
중요한 일부였다" (Namboodiripad, p.115)고 논하고, 뒤이어 그것은 "회의파가 정부와
단교한 결과로 놓여온 곤경에서 회의파를 구출하기 위한... 영국측과의 접촉점을 발견하여,
개시된 채 제 2차 원탁회의에서 일시 중단되고 만 헌법개정에 관한 교섭을 추구하고,
그리하여 이 새로운 정세에 대응할 수 있도록 회의파를 개조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었다"
(Namboodiripad, p.118)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남부디리파드의 견해는
대체로 아래와 같다.
  우선 간디가 불복종운동을 정지시킨 이유는 이렇다. 즉 제 2차 원탁회의에서는 회의파를
대표한 간디와 영국정부 사이의 교섭이 결렬되었으므로, 간디와 회의파는 부득이
불복종운동을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회의파를 완전히 굴복시키고야 말려는
영국정부와 끝내 정면으로 대결하다가는 회의파는 물론이요, 인도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간디는 판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와 같은
정면대결을 지속하다간, 결국 영국정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의 인도헌법을 제정하고는, 그
헌법을 이용해서 먼저 비회의파 정당들로 하여금 회의파를 약화시키고, 그리고 나서는 그런
비회의파 정당들을 조종하여 인도의 민족적 요구를 부인케 하는 사태가 발생하리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간디는 그러한 사태의 발생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우선 불복종운동을
정지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회의파내에 의회주의(스와라지파)를 부활하여 의회활동을 통해
영국정부와 교섭케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남부디리파드에 의하면, 불가촉천민을 위한 분리선거에 반대하여 단행한
간디의 단식은 불복종운동을 중지시킬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요, 그 후 하리잔운동에의
열중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회의파 지도자와 상의하여 불복종운동을 일단 중지시키고, 그
후 영국정부와의 교섭을 원활하게 추진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p196
  또한 회의파에서의 인퇴는 회의파 안의 의회주의자에게도 좌익 사회주의자에게도 이른바
'도덕적 압력'을 가하지 않고 회의파에서의 '환전한 이탈'과 '절대적인 행동의 자유'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사실 간디는 조언을 통해 두 파의 정책에 영향을 주면서 두 파를 다같이
성장시켜 이를 통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네루도 1932년 9월의 간디의 "단식은 대중의식을 환기시켰지만, 그것은 주요 정치문제, 즉
불복종운동에서 그런 대중의식을 딴 데로 돌렸다" (Nehru, Toward Freedom, p.224)고
논하고 있지만, 간디의 동기는 어떻든, 그 단식은 결과적으로 불복종운동을 정지시키는
전기로 된 것은 사실이었다. 앞서 사티아그라하의 수법에서도 논했거니와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는 어디까지나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운동의 주도권이
완전히 영국정부측에 들어 있었으므로, 간디는 불복종 운동을 정지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 단식을 단행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디의 인퇴와 하리잔운동을 포함하는 건설적
프로그램 '에 몰두하게 된 동기에 관해서 S.A.후세인은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Husain,
p.15).
  간디의 사상의 본질은 정치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도덕적인데 있다고 보는
후세인의 견해는 간디가 회의파의 목표와 목적이라는 근본문제에 대해서 네루를 비롯한
기타 회의파 지도자와는 견해를 달리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후세인에 의하면
간디는 회의파를 주로 인도의 도덕적 및 정신적 갱생의 수단으로 만들고, 단지 부차적으로
인도의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발전의 수단으로 만들려고 한 데 대하여, 현대식 교육을 받은
네루와 기타 회의파 지도자들은 회의파의 활동을 주로 정치적 및 경제적 영역에
국한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간디는 회의파 지도자의 대부분이 그가 설정한 계획의
일부를 그들의 의사에 반해서 단순히 자기에 대한 개인적 사랑과 존경 때문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p197
  그 결과 간디는 점차 회의파와의 정식 관계를 끊고 마침내는 회의파에서 인퇴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간디가 회의파에 반대하게 되었다거나 회의파와의 온갖 협력을 완전히
중지했다거나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단지 간디가 이제는 회의파가 인도의
해방과 관련된 자기의 포괄적이며 보편적인 사명의 일부만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던 나머지 일을
위하여 간디는 회의파 밖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래서 간디는 필요한 때는
언제라도 원조와 조인을 주기로 약속하면서 회의파는 그들 지도자에게 맡기고, 자기 자신은
인도인의 정신적 및 도덕적 의식에 근본적 변혁을 가져오고, 그리하여 인도가 세계에
자기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진리와 비폭력에 의거하는 사회의 표본을
제시할 수 있게 할 '건설적 프로그램'에 나머지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입장과 관점에 따라 물론 평가는 다르겠지만, 간디는 정치의 제 1선에 섰건 제 1선에서
물러섰건간에, 그의 사상과 행동은 한시라도 인도 민중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5. 제 2차대전과 분할돌립
  1) 통일전선과 주의회 선거
  1935년에 영국은 새로운 통치법을 공포했는데, 이것은 사이몬위원회, 3차에 걸친 원탁회의,
맥도널드 재정 등 다년간의 연구, 조사를 거쳐,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한다는 전제에
서서 만들어진 이른바'35년 헌법'이다. 그 핵심은 #1 번왕국을 포함하는 연방제, #2 중앙의
연방정부는 총독과 인도 입법부와의 '양두정치', #3 지방의 주정부에는 책임자치의 도입,
#4 영국정부 인도사무상의 권한 축소, #5 인도에서의 버마분리 등이었다. 그런데 이 새
통치법은 총독과 주지사의 비상대권 (총독의 경우에는 비상사태 선언, 지사의 경우에는
특수 책임)이 인정되고 있었으므로, 일단 그것이 발동되는 날이면, '양두정치'도 '책임정치'도
단번에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도록 꾸며져 있었다.
 @p197
  따라서 그것은 1929년 이래 회의파와 인도 민중이 추구해오던 '완전 독립'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기는 이 새 통치 법으로 선거 유권자의 수가 일시에 수배로 늘어 약
3천만 명으로 확대된 데 대해서는 회의파내의 우파인 의회파가 적지 않게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와 같은 영국의 '엿'정책에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인도
민중의 정치의식이 전진해 있었고, 좌파세력도 신장하고 있었다. 특히 회의파 사회당과
회의파 밖의 노동자, 농민의 세력도 점차로 조직화되고 있었으므로, 이런 세력을 도저히
무시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새 통치법이란 형태를 취한 영국의 새로운 도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회의파내의 통일전선을 결성할 필요가 있었다. 즉 좌우
양파의 대립, 간디주의, 사회주의, 부르주아의회주의 사이의 알력, 사회적, 종교적 문제에
관한 갈등을 조정해야만 했다. 회의파 안에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은 네루밖에는
없었다. 비슷한 상황 아래 있던 1929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1936년에도 네루가 회의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이어서 1937년에도 재선되었다. 1936년 2월, 스위스의 사나토리움에서
애처 카말라 부인을 잃은 네루는 뼈저린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회의파의 좌우세력
통합을 위해 선두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네루는 사회주의 사상을 인도 민족운동에
도입하려고 그처럼 일찍부터 사회주의를 고취하면서 그런 사상이 특히 회의파 안의
인텔리와 노동자 사이에 퍼지기를 열망했으나, 막상 1934년에 회의파사회당이 결성될
때에는 이 당 결성의 기금은 갹출하면서도 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도의 독립을 갈망하던 네루가 민족독립을 위한 거대한 에너지 공급원으로서의 농촌과
농민이 따로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을 통한 유림에서의 견문은 네루를 한층 더 사회주의 편으로 기울어지게 했으나,
인도와 회의파의 실정은 그를 다시 현실정치에로 돌이켰다.
 @p199
  아닌게 아니라 1936년 4월, 라크노회의파대회의 의장 연설에서 네루는 먼저 자기는
사회주의의 신봉자이나 사회주의보다도 인도의 독립을 위해 더 노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독립이 사회적, 경제적 변혁을 위한 불가결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임을 밝히고 나서, "나는
회의파가 사회주의 조직으로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을 위해 싸우고 있는
세계의 다른 여러 세력과 서로 손을 잡고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회의파의
대다수는 오늘날 그들이 나타내고 있다시피 거기까지는 나아갈 총의가 언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판본극송, p.233)고 논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밝는 동시에 당시의 환경도 잘
드러냈었다.
  라므라자라는 막연한 이상사회를 꿈꾸던 간디에 비하면, 네루는 보다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사회적, 경제적 개혁의 필요를 알고 있었던 생이다. 그러나 간디 직계인 파텔과
프라사드 등 회의파 주류를 이루던 우파의 사람들은 사직주의의 '사'자도 싫어하였다. 좌우
양파의 틈바구니에 끼인 네루는 간디의 후원 아래 1935년 헌법에 반대하고 완전 독립을
추구하면서도 주의회 선거에는 참가한다는 양면작전과 농민, 노동자를 위한 급진적 강령을
채택함으로써 회의파의 양파를 조정할 수 있었다.
  한편 네루는 당시 세계에 퍼지고 있던 파시즘의 위협을 민감하게 감득하고 있었다. 1936년
7월에 스페인에서 내란이 발발하고 이어 인민통일전선이 결성되자, 마치 이에 호응이나
하듯, 네루는 인도 안의 진보세력의 통일전선을 제창하고, 1936년 말에서 1937년 초에 걸쳐
반제와 독립을 외치며 질풍과도 같이 전인도를 정력적으로 유세행각하였다. 이는 1937년
2월에 있을 주의회 선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급진적인 '선거강령' (#1 새 통치법 반대,
#2 완전독립, #3 인도의 민주화)과 '농업강령 '(토지개혁, 빈농의 보호, 소작료 인하등)은
대중의 지지를 얻어 회의파는 이 선거에서 압승하였다. 즉 회의파는 11개 주 중 실로 8개
주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선거투쟁을 통해서 새 통치법에 반대하고 오직 인도독립을 위해 싸워온
회의파에서는 주정부를 수립하느냐 않느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의 대립이 다시금
표면화하였다.
 @p200
  즉 좌파는 총독과 주지사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히 되지 않는한 주내각의 책임을
지는 일에 반대 하였다. 이번에도 간디가 인도정부와 회의파 사이에 들어 조정한 결과 그
점에 관한 애매한 보장을 얻어 결국 회의파는 6개 주에서 단독내각12개 주에서 연립내각을
수립하였다. 이리하여 회의파는 독립투쟁을 계속하는 반면에 주의회를 통해서 개혁을 위한
건설적인 조치를 취한다는 이른바 '2중정책 '을 택하게 되었다.
  한정된 범위 안에서 이긴 하지만, 통치당하는 자리에서 통치하는 자리로 입장을 바꾼
회의파는 다년간 내세워온 정책의 실현에 착수했다. 농민의 보호, 노동자의 대우개선
이외에도 간디의 '건설적 프로그램'의 하리잔의 구제, 수공업의 장려, 기초교육의 창시,
금주의 실행 등도 추구하였다 1938년에는 네루를 의장으로 하여, 주 및 번왕국의 대표와
산업가 노동운동 지도자, 경제학자 15명으로 구성되는 인도 경제개발을 위한
국가계획위원회 (그 설치는 1936년 대회에서 결정되고 있었다)를 설치하였다. 또한 여태까지
'내정불간섭'의 입장 때문에 회의파의 테두리 밖에 있던 번왕국내의 정치운동도 회의파가
지도하게 되었다. 그만큼 번왕국의 민중의 정치적 자각이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도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인도 농민운동의 조직적 발전이었다. 1936년에서 1937년까지의
선거투쟁에서 인도 농촌에 깊숙이 파고들어 갔던 네루는 농민에게 자신들의 촌락 단위로
생각하지 말고, 전체로서의 인도라는 국가적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강조하였다. 그 때문에
회의파 주정부의 성립은 그들에게 커다란 심리적 효과와 자극을 주었다.
  농민의 조직에 관해서 말하면, 1920년대에 각지에서 생겨나 있던 많은 농민조합은
1936년에 전인도 농민조합(kisan sabra)으로 통합되었고 1937년에는 그 제 1차 대회가
열렸다. 이것은 공산주의자와 회의파 좌파세력과의 통일전선 아래 추진된 것이었다. 이어
1938년의 회의파 하리푸라대회는 좌파인 보스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1 토지개혁, #2 지대,
소작료의 감면, #3 농가 부담의 감면, #4 임금, 노동 시간의 개선, #5 단결권, 단체교섭권의
확립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p201
  그 해 여름 네루는 휴양 겸 유럽에 여행했다. 스페인내란은 계속되고 있었고, 나치 독일의
노골적인 침략이 진행되고 있었다. 파시즘 세력의 진출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스페인
인민전선의 반파시즘투쟁을 공공연히 지지하던 네루는 '뮌헨협정'으로 명백히 드러난 영,
불의 대파시즘유화정책을 목격하고 환멸의 비애를 느끼면서 인도에 돌아왔다. 그 환멸이
얼마나 했는가는 자기의 자서전에서 네루가 "뮌헨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며, 또한 스페인의
비극은 나에게는 나 자신의 슬픔이었다"(Nehru, Toward Freedom, p.356)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한편 인도에서도 보수파와 대영협력파가 점차 반격으로 나왔다. 1939년 3월의 트리푸리
회의파대회에서는 보스 의장의 재선을 에워싸고 좌우 양파의 대립이 격화하여 간디를
포함하는 우파의 압력 아래 결국 보스는 의장을 사임하고 '전위 블럭 '을 결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네루는 보스와 결별하게 되었다. 그리고 회의파가 판결같이 발대왜온 1935년
헌법에 의거하는 번왕국과 인도 자치 주와의 연방제 실시는 그 해 4월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국제정세의 불안을 이유로 연기되었다. 또한 회의파 주내각은 우파의 압력 아래 점차
농민운동을 억압하게 되었는가 하면, 주선거에서 참패한 회교도연맹은 코 불만이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인도에서는 2차대전 전야에도 민족통일전선은
결성될 수 없었다.
  그간 회의파 주내각과 인도 정부 사이에는 가를 충돌이 일어났으나 그 때마다 영국은
양보하였다. 그러나 뮌헨헙정 후 국제긴장이 날로 격화되자 그런 정책은 일변하였다. 영국
정부는 전쟁발발에 대비하여 긴급시에는 주의 자치권을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다시 인도
총독에게 부여하려고 시도하게 되었다. 이는 회의파의 불만을 샀다. 회의파는 인도군의
해외파견에 반대하는 결의를 1939년 5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행하였다.
 @p202
  2) 2차대전과 인도의 정정
  1939년 9월 3일 영국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계기로 2차대전이 발발하자, 그 다음날
인도 총독은 헌법에 따라 인도는 주동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회의파의 제 1선에서 물러 섰다고는 하더라도 사실상 그 지도에 복귀하고 있던 간디는
2차대전에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
  이 전쟁에 대한 나(간디) 자신의 개인적 반응은, 일찍이 없었던 커다란 공포이다. 나는
지금처럼 어설픈 심정에 빠진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이 커다란 공포가 이번에는 저번
전쟁 때처럼 자진해서 모병하사관으로 되는 일을 방해하리라. 그러나 좀 이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나는 전적으로 연합국에 동정하고 있다. 좋건 언짢건 이 전쟁은 서방이 발전시킨
하나의 민주주의와 히틀러로 전형화된 전체주의와의 전쟁으로 되어가고 있다.
(Namboodiripad, p.156)
  2차대전에 직면하여, 파시즘과 싸우고 있는 영국에 동정적이었던 이는 비단 간디 개인만이
아니요, 회의파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간디나 회의파는 다년간 추구해온 기본적
목표인 독립달성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더구나 1차대전 때와는 달리 인도의 정세는
진전되어 있었고, 특히 인도측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인도를 '자동적 '으로 참전케 한 데
대한 반감은 전인도에 충만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의파는 1939년 9월 14일,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영국의 전쟁 목적이 무엇인가, 즉 민주주의의 옹호와 식민지의 해방에 있는가,
따라서 전후 인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여할 총의가 있는가 어떤가를 밝히기를
요구하였다. 네루는 "세심한 검토를 거쳐 발표된 이 성명은 인도와 영국 사이에 가로놓인,
1세기 반에 걸쳐 양국의 관개를 해쳐온 장벽을 제거하여 우리의 배후에 있는 국민의 정열을
가지고 이 세계적 투쟁에 참가하려는 열망과,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의 간절한 희망과를
조화시키는 길을 찾아내려는 시도였다" (Discovery, PP.375-76)고 말하고 있다.
 @p203
  그러나 이 성명에 대한 영국의 회답은 전쟁목적과 인도의 지위를 명백히 밝힘이 없이 다만
전후 인도의 각 파 세력과 협의할 용의가 있다는 데 불과했다. 또한 영국정부가 사용한
'협력 '이라는 말은 회의파가 생각하고 있는 '대등자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명령,
복종관계'를 의미하고 있었다. 실망과 분격을 금치 못한 회의파는 이에 대한 항의로써 이
해 10월 각주의 회의파내각이 총사직할 것을 성명했다. 그런데 이 조치를 기뻐한 것은
회의파연맹이었다. 1937념의 주의회선거에서 회의파한테 참패를 당하고 "힌두교도의
압정에서 회교도를 보호하라"고 외치던 모하메드 알리 진나 지도하의 회교도연맹은 40년
3월의 대회에서 파키스탄의 승인을 조건으로 영국의 전쟁수행에 협력할 용의가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세는 분명히 반전, 비협력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39년 10월 2일,
봄베이의 9만의 노동자는 전쟁반대를 위한 1일간의 파업을 단행했다. 39년 말에서 40년
초에 걸쳐 노동운동은 비상히 고조되어 전국의 조합은 반전 기치를 뚜렷이 내건 전인도
노동조합회의로 통합되어갔다. 또한 전인도 농민조합도 일찍부터 전쟁반대를 선언하고
지세불납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인도정부는 참전포고와 동시에 공포한 인도방위법을
광범하게 적용하여 노동운동 지도자와 전쟁반대자를 마구 체포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하에서 열린 1940년 3월의 라므가르 회의파대회(간디는 1934년 봄베이대회 이후로
처음으로 연설했다)에서는 시민적 불복종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결의했다. 그러나
회의파는 그때에도 적극적인 수단을 취하는 것을 피하고 국민에게 그 준비를 하도록
요청했을 뿐이다.
  유럽의 전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연합국측은 1940년 5월에서 6월에 걸쳐 나치 독일한테
참패를 거듭하여 서유럽 전체가 나치스의 군화에 의해 유린당하게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영국 자체의 운명도 크게 염려되던 무렵 내각이 바뀌어 처칠이 등장했다.
 @p204
  이와 같이 급변하는 사태에 처하여 회의파는 영국정부와 새로운 교섭을 시작하려고 했다.
앞서의 조건을 완화하여 회의파는 영국이 전후 인도에 자유와, 각 파의 협력하에
중앙에서의 국민정부 수립을 허용할 것을 약속한다면 인도는 전쟁수행에 전면적으로
협력한다는 안이었다. 간디는 이 안에 완강히 반대했다. 간디의 주장은 영국을 지지하려면
아무런 조건 없이 지지해야 하고, 또한 그 지지는 어디까지나 비폭력 지지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간디와 회의파 운영위원회 사이에는 결정적인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그
결과 운영위원회는 마침내 1940년 6월 "간디의 비폭력의 신조를 민족방위의 문제에까지
화장할 수는 없다"고 결의하게 되어 간디는 회의파에서 다시 인퇴하고 말았다.
  * : 간디와 회의파 주류 사이에는 비폭력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달랐다. 회의파 주류는
비폭력의 원리를 영국정부에 대한 투쟁에만 적용하고, 종파적 반란, 폭력주의, 외적의
침입에 대한 저항에 대처하는 데는 비폭력적 수단만을 채택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간디는
국내 질서 및 외적의 침입 등 온갖 문제는 아힌사(불살생, 비폭력)의 원리에 의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회의파는 7월에 전술한 내용의 '푸나제안'을 했으나 처칠의 영국정부는 '8월 제안'에서
이를 공공연히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회의파는 금후의 반영투쟁의 적극적 지도를
'간디에게 다시 한번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회의파의 지도를 재개하게 된 간디는 이 해
8월 개인적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 맨 먼저 선택된 사람이 후술하는 비노바
브하베이다. 뒤를 이어 간디가 선택한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들이 이 운동을 계속해나갔다. 이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개인마다 모종의 테스트를 받고 미리 허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이 운동에 선출된 사람은 그 어떤 공식명령을 일부러 위반하여
체포당하곤 했다. 시일이 경과됨에 따라 체포되는 사람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가까이의 남녀가 투옥당했다.
 @205
  간디가 지도한 이 운동은 인도가 전쟁에 끌려들어간 데 대한 민족의 항의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적인 투쟁에 불과했으나, 전체주의와 필사적인 투쟁을 계속하고 있던 영국의
인도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은 가혹하였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국제정세는 일변했고 이에
따라 국내사정도 격동하게 되었다. 1941년 6월 22일에는 독일의 소련침공이 시작되었다.
  7월에는 인도 총독이 행정참사회의 확대와 국가방위회의의 설치를 발표했다. 12월에는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반전활동을 해오던 공산당, 전인도 노동조합회의, 전인도 농민조합
등은 전쟁의 성격이 변했다고 하여 반영협력을 선언하고 파업과 납세거부운동의 정지를
호소했다.
  한편 1940년 9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평화주둔'을 단행함으로써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로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있단 일본은 마침내 41년 8월, 진주만공격을 계기로
미, 영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이토록 급진전을 하던 전쟁하에서 인도는 이미
전쟁을 대안의 불로만 바라볼 수는 없게 되었다. 인도 방위문제는 긴급한 현실문제로 되고
있었다.(*) 전쟁이 인도에 접근하기 시작하여 인도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되자
회의파는 이처럼 위험한 정세 아래서 무엇인가 효과적인 역할을 다하려는 욕망이
강해져갔다. 감옥에 들어가는 일은 이런 새로운 정세 아래서는 무의미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명예로운 협력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면, 또한 국민이 행동에 호소하기 위한
무엇인가 적극적인 정열을 느끼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이리하여
회의파는 강요당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인도 방위문제에 협력하려면 국민을 납득시킬
만한 국민정부를 수립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 영국과 다시금 교섭을 하려는 기운이
높아갔다.
  * : 영국의 진보적인 인도문제 전문가 팜 다트는, 영국의 세계전략은 인도지배를
선회축으로 하여 집중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제국에서 인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커져가고 있었다. 인도를 토대로 하여, 새로운
중동의 제국과 세력 체계가 성립했다"... 중동과 동남아시아라는 영 제국주의의 지배와 영향
아래에 있는 두 개의 요해지대사이에 있는 인도는 추요의 지역이며, 또한 영국정책의
견지에서 보아 불가결의 기지였다. "더구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독일이
카프카츠, 이 란 방면에서 인도에 진격해올 것을 상정하고, 일본 해군을 싱가포르에서
인도양으로 전진시켜 남하해오는 독 일군과의 공동작전을 실천함으로써 영제국을
붕괴시키려고 기도했다
  한편 진주만공격 전야에는 영국정부도 융화의 제스처를 시도하여 네루를 비롯한 다수의
회의파 지도자를 석방했다(12월 4일). 이렇게 되자 간디와 회의과 주류 사이에는 또다시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간디는 대외전쟁에서도 비폭력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원칙을 버릴
수가 없었다. 네루는 당시의 간디의 입장과 심정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전쟁의 접근 그 자체가 그(간디)에게는 도전이 되고 신념의 시련이 되었다. 만일 그가 이
어려운 국면에서 원칙을 끝내 지켜나갈 수 없다면, 비폭력은 그가 그러해야 한다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기본적인 행동의 원칙과 지침은 아니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가
그것을 버리거나 타협한다는 과오를 범하든가 둘 중의 어느 하나로 되고 만다. 그는 자기의
온갖 행동을 의거해온 평생의 신념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 비폭락의 필연적인
결과와 논리의 귀결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Discovery, PP.388-89)
  간디는 자기의 견해를 회의파에 강요하는 것을 피하고, 41년 12월 회의파에서 인퇴했다.
객관적 정세를 파악하는 데 각별히 명민한 정치적 현실주의자였던 간디는 회의파로 하여금
영국과 다시 한번 교섭을 해보도록 바랐는데, 비폭력을 내세우는 자기가 선두에 선다면,
교섭이 잘 안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41년 12월 23일, 바르돌리에서
열린 회의파 운영위원회는 인도가 국민정부하에 동원된다는 조건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추축국들에 대한무장저항의 원칙에 찬성한다고 선언했다.
 @p207
  그러나 전쟁수행을 위해 인도와 협력은 요구하지만, 그 대가는 가능한 적게 치르려고
생각하고 있던 영국은 대폭적인 자치를 인도에 즉시 허용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의 성격은 변하고 인도측의 태도가 많이 완화된데 다, 인도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게 하여 그 협력을 얻으려고 하던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중국의
압력이 강화됨에 따라 영국으로서도 종래의 정책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42년
2월 15일에는 싱가포르가, 이어 3월 8일에는 버마의 수도 랑군이 함락되어 일본군의 압력이
인도국경에도 밀어닥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3월 11 일 스타포드 크리프스 사절단을 인도에 파견하여 영국과 인도
사이의 관계 개선을 꾀할 것을 발표하고, 이 사절단은 3월에서 4월에 걸쳐 인도에서 절충을
벌였다. 그러나크리프스가 제시한 해결안은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하는 일은 전후에
예정되고, 전시에는 인도측의 의견을 어느 정도 반영시키는 형식을 취한다고는 하더라도
영국이 여전히 정권을 보유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인도측의 요구는 즉시 실권을
가지는 전시국민정부 수립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4월에 회담은 결렬되었다. 따라서
크리프스가 제시한 '연방안'-그것은 종파적 모순을 조장, 격화하는 것이었다-은 논의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반추축국을 위한 영, 인 협력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영국과의 교섭이 또다시 실패하자 회의파에게 남은 길은 간디의 지도아래 반영운동을
재개하는 길밖에 없었다. 다시금 간디와 회의파는 하나로 되었다. 그런데 이번의 교섭결렬을
계기로 인도의 정정은 한층 더 착잡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영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일체의
반영세력을 이용해야 한다는, 즉 일본의 침략을 인도의 해방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친일적인 소집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p208
  그들은 41년 1월에 인도를 탈출한 찬드라 보스의 방송에 감화를 받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과 안의 라자고팔라차리와 42년에 비합법화가 해제된 공산당에 의한
민족통일전선의 제창이 있었다.
  간디는 나치스 및 파시스트와 결탁한 일본 군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반대하였고, 또한 통일전선 제창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절박한 일본군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여, 회의파와 국민을 올바른 민족주의의 방향으로 결집 해나갔다. 그러는 동안에 점차
간디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염원한 나머지, 만일 인도가 자유국가로서의 구실을 다할 수
있다면, 회의파의 전쟁참가에 동의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간디를 가장 잘 알고 있던
네루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는 심한 고뇌와 고통을 수반하는 획기적이며 놀라운 변화였다. 그에게는
생명의 원천이요, 생존의 의의로까지 되고 있는 비폭력의 원칙과, 그에게는 마음을 지배하고
몸을 태워버릴 정도의 열망이었던 인도의 자유와의 상극에 있어서 저울은 후자에로
기울어졌다. 물론 이것은 그가 비폭력에 대한 신념을 약화시켰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전쟁에는 비폭력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회의파의 견해에 동의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음을 의미했다. 실제적인 정치가로서의 면이 비타협적인 예언자로서의 면을 이긴
것이었다. (Discovery, p.393)
  조국의 최대의 위기에 처하여 간디는 민족의 독립과 비폭력의 원칙 중에서 전자를 취한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다시피, 간디에 있어서는 비폭력은 어디까지나 민족독립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목적과 수단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이 시기는
간디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하겠다.
 @p209
  간디의 결의는 점점 굳어져갔다. 1942년 8월 7, 8일 양일 사이에 봄베이에서 열린 전인도
회의파위원회에서는 간디가 제창하는 영국의 인도철퇴 요구를 결의하였다. "영국의 인도
지배의 계속은, 인도의 퇴폐와 약체화를 초래하여 인도가 자국을 방위하고, 세계의 자유를
위해 공헌하는 능력을 날로 감퇴시키고 있으므로, 인도를 위해 또한 연합국의 목적 달성을
위해, 즉시 인도의 자유를 승인하고 인도에서 철퇴하라. 철퇴하면 인도의 주요 당파와
집단의 협력으로 인도 국민의 일체의 중요 계층을 대표하는 복합적인 임시정부를 세울
것이고, 그런 정부는 그 지배하에 있는 비폭력적 세력은 물론이요, 일체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연합국과 함께 인도를 방위하고 침략에 저항하는 일을 '제 1의 임무'로 삼게 될
것이다.
  만일 철퇴하지 않는다면, 간디의 한결같은 지도 아래 비폭력적인 대중투쟁을 전개한다"
(Discovery, pp.420-21)는 것이 그 요지였다. 이 결의가 통과되자 간디는 '행동이냐
죽음이냐' (Do or Die)의 슬로건을 써서 모든 자유투사는 가슴에 달도록 지시했다. 비장한
각오였다. 영국은 이 결의가 8일 심야에 통과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9일 새벽에 간디,
네루 이하 회의파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이에 민중의 항의운동이 폭발하여 회의파 및
그 영향 아래 있던 민중이 불복종, 비협력 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이 해 말까지에는 6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기간에는 군경과 민중 시위대는 자주 충돌했는데, 발포 회수가 538회에 달하며 940명이
사살되고 1, 630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은 당국이 발표한 '공식 ' 숫자이다. 실제로는 이
기간에 사살당한 자의 수는 무려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참으로 '행동이냐 죽음이냐'의
시기였다.
  이에 회의파는 거의 괴멸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 결과 회교도연맹과 공산당이 덕을 보아
각기 세력이 신장되었다. 회교도연맹은 회의파의 '인도 철퇴요구 결의'에 대항하여
"영국이여, 인도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하고 나가라"고 결의하고 있었지만, 이 기간에
회의파 안의 회교도는 대랑으로 회교도연맹측에 옮겨가, 회교도연맹의 구성원은
30-40만에서 200만(44년)으로 중대하여 파키스탄 건설계획을 점점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p210
  또한 회의파계의 지도자를 링은 노동조합, 농민조합에는 공산당이 진출하게 되었다. 상술한
대로, 공산당은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대전을 파시즘과 민주연합과의 대결이라고 보고 영국
지지를 표명하여 42년 이래 합법화를 획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파에 대해서는
민주연합에 반대하고 추축국에 편든다고 공격했는데, 이것이 영국에 의한 회의파 탄압의
구실로 이용되었다.
  그간 총독은 폭력개입의 책임을 간디에게 돌렸기 때문에 간디는 이에 항의하여 43년 2월
9일에서 3월 2일에 걸쳐 3주간의 단식을 결행했다. 당시 간디는 73세였다. 빈사상태에 빠진
간디의 용태는 전세계의 주시와 우려를 자아냈다. 그러나 영국은 냉정했다. 간디의 맥박을
정확히 재면서 폭력개입의 책임이 간디에게 있다는, 말도 취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감옥에서의 석방도 하지 않았다. 위독상태가 지속된 끝에 3주간의 단식은 끝났다. 간디는
단식에는 이겼지만 영국에는 이기지 못했다. 그것은 비장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남부디리파드는 이번의 단식도 1932년의 단식과 마찬가지로
  "표면상은 비정치적인 도덕문제에 관해서 행해졌으나"사실은 "영국과 정치문제에 관해
교섭을 개시한다는 정치활동의 출발점으로서, 이 비정치적인 도덕문제가 이용되었다"
(Namboodiripad, p.180)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간디는 '인도 철퇴요구 결의'후
빠지게 된 정치적 막바지를 타개하기 위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사실 영국은 회의파에 대한 강압책을 조금도 완화하지 않았고, 또한 회교도연맹에 대한
옹호책을 강화하고 있었으니 만큼, 그러한 정치적 고려가 이번의 단식의 동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영국은 간디에게 그런 계기를 만들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44년
2월 22일 간디는 카스투르바이 부인을 옥중에서 잃었다. 13살 때 결혼한 이래 평생을 통하여
좋은 반려였던 카스투르바이 부인은 간디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간디는 매달 22 일 아내를 위해 기념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 : 부인의 급성기관지염이 악화됐을 때에도, 간디는 페니실린 주사를 놓는 것을 끝내
거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간디 몰래 아들의 허가를 얻어 주사를 놓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줄을 모르고 간디는 아내의 죽음에 직면하여 페니실린 주사에 관해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간디에게는 그와 같은 풍부한 인간미가 있었다.
 @p211
  마침내 간디는 그 해(44년) 5월, 악화된 건강상태 때문에 석방되어 쇠약한 몸을 봄베이
근교에서 정양하게 되었다. 그 해에는 75세가 되었으므로, 70세 때처럼(*) 간디를 아는
세계의 저명인사들의 기고로 된 기념논문집이 발간되었다. 또한 전해 7월에 싱가포르에서
'인도 국민군' (일본군의 포로로 된 영국군의 인도인 병사들로 조직한 인도 해방의 군대)을
조직하고, 이어 10월에는 '자유인도가 정부'를 수립했던 찬드라 보스는 랑군에서 행한
'자유인도' 방송을 통해 '민족의 아버지 '인 간디에게 75회 탄생기념일 축복의 인사를
보냈다.
  * : 70세의 [탄생기념논문집]에는 간디의 남아프리카 시절의 정적 스마츠 장군도
기고했었다.
  그러나 전국은 추축국의 패색이 완연하여 전해 (43년)의 카이로, 테헤란 회담에 의해 전후
처리문제가 일정에 오르고, 이미 무솔리니는 실각, 일본은 사이판을 잃고 있었다. 대세는
이미 결정된 셈이었다.
  3) 간디와 분할독립
  1944년 5 월에 석방된 간디는 건강이 회복되자 다시 정치활동을 개시했다. 그가 계속
추구한 과제는, 하나는 "중앙의회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국민정부의 수립"이며, 또 하나는
힌두교도와 회교도와의 융화, 구체적으로는 회의파와 회교도연맹과의 교섭이었다. 그러나
국민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전쟁노력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겠다는 간디의 제안은, 그런
정부의 수립은 헌법개정을 필요로 하지만 헌법개정은 전쟁중에는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총독한테 거부당했고, 회교도연맹과의 교섭도 간디의 조건을 진나가 거부함으로써
실패하였다.
 @p212
  '하나의 인도'를 추구하는 간디의 염원에는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으나, 인도 내외의
정세는 급속히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미 유럽에서는 제 2전선이 결성되고 독일군은 소련에서 구축당했으며, 일본군도 패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1945년 5월에는 독일이 항복하고, 6월에는 오키나와가 함락됐다. 전국은
이미 결판이 난 거나 다름없었다. 이 해 6월에는 회의파의 네루와 회의파 사회당의
나라양등의 정치범이 석방되었다. 8월 15일 일본은 마침내 무조건항복을 했고, 인도국민군의
지도자 보스는 대북공항에서 비행기사고로 죽었다. 2차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대전중 일방적인 전쟁협력을 강요한 영국의 처사에 분개하여 대중적인 대영
비협력운동을 전개해온 인도에서는 종전과 더불어 대중적인 반영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과정을 훑어보기 전에 전쟁중에 일어난 인도 사회의 변모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인도는 전쟁발발과 동시에 영국의 군수품공급지로 되고, 일본의 참전 후에는 직접적인
군사기지로 되었다. 그 때문에 전쟁중에 인도의 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민족자본은 현저하게 성장하여, 특히 타타, 비를라 등의 독전자본은 그 힘을 크게 강화했다.
영국인의 경영은 대개 영, 인 합판의 경영으로 되었고, 또한 영국에 채무 (7억 4, 900만
파운드)를 지고 있던 인도는 도리어 전쟁중에 영국에 대한 채권국(10억 8천만 파운드)으로
변했다. 하기는 이 대영 채권은 런던에 재 영 파운드 자금의 축적이라는 형태로 실제로는
동결되고 주도권은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자본가를 영국에 결부시켜두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쟁의 회생은 주로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업자가 짊어졌다. 300만
명이 징병당하고 200만 명이 징용되었다. 물가는 공정가격으로 평균 2배 반, 암시세로 근
10배나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임금의 증가율은 평균 3할 미만이었다. 국내물가는 엄중한
가격통제를 받고, 공출제 등에 의해서 싼값으로 매입되고 해외물자는 비싼 값으로
할당되었다.
 @p213
  식량부족으로 500만 명이 굶어죽고, 주택난으로 봄베이의 노동자 30만 명은 가두에서 잤다.
전시중의 이와 같은 노동조건의 악화, 물가등귀, 식량부족 등의 생활고가 종전 직후,
인도사상 전례가 없는 격렬하고 대규모적인 대중적 반영운동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 계기를 이룬 것이 '인도 국민군'에 대한 군사재판이었다. 즉 영국 당국은 종전 직후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에 가담했다가 영 국군한테 다시 포로로 된 많은 인도인
장병을 반역 행위라는 이유로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의 판결을 내리려고 하였다. 보스를
비롯한 '인도 국민군'은 영 제국주의와 직접 투쟁함으로써 인도 민중 사이에 자존심과
애국심을 환기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므로 네루도 오래간만에 변호사복을 입고
법정에 서서, 밖에서 인도해방을 촉진하려던 보스 등의 '위대한 역할'을 변호, 찬양했다. 그
방법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이견을 가졌던 간디도, 보스의 '애국심'에는 존경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45년 9월, 이 재판에 항의하는 대중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영국은 인도네시아와 인도차이나의 민족해방운동을 저지할 목적으로 인도병을 그 나라들에
상륙시키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영국의 조치에 반대하는 운동도 전개되게 되었다. 이
두운동은 서로 결부되어 진전했는데, 11월에는 캘커타 시내에서 대규모적인 바리케이드전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날이 갈수록 정세는 긴박해가 반영운동은 드디어 군대 내부에도 파급하였다. 1946년 2월
18일, 봄베이 항에서 영국 군함에 타고 있던 인도해병이 동원해제, 대우개선, 인종적 차별
철폐의 요구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부대는 다음날인 19일에는 영국 국기를 내리고
회의파와 회교도연맹의 기를 게양하고는, '혁명만세' '영 제국주의 타도' '인도 국민군과
정치범의 석방' '인도군의 인도네시아 철수'등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들은
해군중앙파업위원회를 조직하여 그 지도하에 정연하게 행동했다. 봄베이 시와 30만의
노동자, 학생은 일제히 파업을 단행하여 이를 지지했고, 또한 진압을 위해 파견된 인도병은
발포를 거부했다. 마침내 영국군이 파견되어 2월 21일에는 7시간에 걸쳐 전투를 계속하였고,
23일에야 파텔의 간청으로 항복했다.
 @p214
  그러나 영국의 인도 지배의 도구요, 지주인 군대내 에서까지 반영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코 근저에서 뒤흔들리게 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봄베이의 해병반란의 좌절 후에도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인도 민중의 반영투쟁은
계속하여 고조되어갔다. 즉 노동자는 인도 각지에서 파업을 감행했는데, 46년 1월에서
10월까지에 1, 600건의 파업이 일어났다. 이는 37년에서 40년까지의 4년간의 그것을 합친
수에 해당한다. 또한 46년 말에서 48년에 걸쳐 마드라스 주, 트라반코르, 하이데라바드
번왕국 등 (여기서는 식량위기가 가장 심했다)에서는 대규모적인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영국이 전후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전술한 자본가의 성장, 노농운동의
격화, 전후 세계에 미만돼 있던 혁명적 기운 등을 머리에 두고 생각해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영국정부는 새로운 사태진전에 직면하여 종래의 방법으로는 통치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식민지의 권익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무슨 새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후에는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한다는 전시의 약속도 약속이려니와 각
종파의 옹호를 조건으로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인도를 영제국내에
붙잡아두는 편이 새로운 사태하에서 영국의 권익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46년 2월 19일, 그러니까 인도 해병의 반란이 일어난 바로 그 다음날 노동당의 애틀리
수상은 3명의 내각사절단을 인도에 파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어 3월에는 '전시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선언하고, 앞서 약속한 내각사절단(일명 견리프스 사절단이라고도
한다)을 인도에 파견하여 '완전한 자치의 조기실현'을 꾀하게 하였다. 인도의 국내는
소연하였다. 노동자, 농민의 운동은 그만두고라도, 회의파와 회교도연맹과의 교섭은 간디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회의파와 회교도연맹을 주축으로
하는 연방을 구성하려던 전기 내각사절단의 기도는 결국 46년 5월 16 일에 좌절되고
말았다.
 @p215
  그러나 와벨총독은 양측을 조정한 끝에 임시 연방정부를 수립키로 하여 8월 12일 네루에게
조각을 위촉했다. 이 정부에의 입각을 거부한 진나는 8월 16일을 '직접 행동의 날'로
정했다. 4일간 캘커타에서는 최초의 종파적 폭동이 일어나 약 5천 명이 죽고 1만 5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폭동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번져나갔다.
  이러한 가운데서 46년 9월 2일 회의파와 일부 회교도연맹을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회의파 6명, 회교도 2명, 기독교, 시크, 파르시교도 각 1명)를 수립하고 네루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진나는 끝내 이런 임시조치에 반대하고 파키스탄 건국을 추구했다. 그 해 11월
말 런던에서 열린 네루, 진나회담도 실패하였고, 전 인도에서는 힌두교도와 회교도 사이에
미친 듯한 원한과 분노의 불길이 타올라 각처에서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간디는 종파적 충돌이 가장 심하던 벵골 주의 노아칼리 지방에서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설득을 위한 순례를 하고 있었다. 간디는 49개의 마을을 방문하고, 가난한
회교도들의 오막살이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제발 힌두교도와 친구가 돼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비록 거절당하더라도 다음 집에서 똑같은 부탁을 되풀이하곤 했다. 이런
식으로 간디의 노아칼리 순례행은 46년 11월 7일에서 47년 3월 2일까지 계속되었다. 간디는
이미 77회의 탄생일을 지나고 있어 보행도 수월치는 않았다. '마누'라는 하리잔 출신
양손너와 '아바'라는 종손녀를 데리고 맨발로 걸어다니는 간디의 앞길에는 반대파의
사람들이 깨진 유리조각이나 가시덤불 또는 오물 등을 뿌려놓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형극의 길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간디의 숭고한 정신에 공명하여
마을사람들의 불명을 깨우치고자 단식으로 간디를 지지해준 여성도 있었다.
  종교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따라서 국가종교라는 것을 믿지 않던 간디는 종교를 달리
하더라도 하나의 인도국민으로서 사이좋게 같이 살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p216
  간디는 비폭력과 회교, 힌두교의 화해에 의한 '하나의 인도'를 설교하며 47년 3월부터는
회교, 힌두교 소동의 지역인 비하르 주에서 유세행각을 계속하고, 3월 말에서 4월 초에 걸쳐
뉴델리에서 진나 및 마운트 바텐 총독과 회견하고,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융화를 위한
최후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회교도의 분리에 의한 파키스탄 건국을 끝까지 반대했으나
회교도연맹과의 타협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영국 노동당내각의 출현과 더불어 인도 독립이
목전에 다가옴에 따라 전시에 강대화된 회교도연맹은 간디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독립을 앞두게 되자 간디의 고원한 이상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 것은 단지
회교도연맹만은 아니었다. 회의파도 마찬가지였다. 1947년 6월 15일, 전인도 회의파위원회는
드디어 153대 29로 분할독립에 찬성했다. 회의파도 간디를 버린 셈이다. 1947년 8월 15일
결국 인도는 파키스탄과 분리해서 독립했다. 번왕국은 인도연방과 파키스탄의 어느 한쪽에
참가하는가는 그 자유선택에 맡긴다는 조건으로 형식상은 독립된 주권을 가지나 양국은
다같이 영 제국내의 자치령으로서 남게 되었다. (50년 1월 26일, 자치령 인도는 영연방의
수장으로서 영왕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치령의 지위를 벗어나 인도 공화국이 되었고,
파키스탄은 53년 3월에 공화국이 되었다.)
  루이스 피셔는 인도의 분할독립의 책임을 주로 진나의 퍼스낼리티에 돌리고 있다. 자기
밀에서 일하던 간디와 네루한테 능가당함으로써 자존심을 상하게 된 진나는 맹수로 화하여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파키스탄의 분할독립을 끝까지 고집했다는 것이다(Fischer, p.151).
물론 그런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비교적 공평한 입장에서
최후 순간에는 회교, 힌두교 양교의 타협에 의한 통일 인도를 이룩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하면, 인도의 분할독립은 근본적으로 영국의 분할통치의
소산이며, 또한 그것은 영국의 권익온존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회의파의 지도자들은 인도의 독립을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사건으로서 자랑한다.
 @p217
  회의파 의장 크리팔라니는 인도가 독립하던 8월 15일, '국민에의 메시지'에서 '수억의
남녀의 운명을 변경시키고 있는 이토록 위대한 사건이, 그토록 적은 폭력과 유혈로써
성취되었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며, 그것은 "마하트마 간디의 영감을 받은
지도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간디를 "인도 민족의 아버지" (Namboodiripad, p.196)라고
불렀다. 그러나 인도 독립의 최대의 은인이요, "인도 민족의 아버지"인 간디는 분열된
조국을 앞에 놓고 환멸을 느낀 나머지 독립축하식전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간디가 슬퍼한
것은 단지 조국의 분열만은 아니다. 분열과 동시에 인도연방의 힌두교도가 회교도에 대해서,
또한 파키스탄의 회교가 힌두교도에 대해서 가하고 있던 사상 회유의 피의 참극이 그를
참을 수 없는 비탄 속에 몰아넣었다. 피로써 피를 씻는 참극 속에서 감행되던 1, 500만 명의
민족이동으로 피난민을 운반하는 기차, 버스, 마차는 모두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문자 그대로
수라장이었다.
  분할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간디는 1947년 6월
9일의 [하리잔]지상에 극히 비관적인 감상문을 실은 바 있었다.
  현재의 인도에는 나는 이미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나는 125살까지 사는 것을
단념한다. 나는 1, 2년 더 살지는 모르나 그것은 별 문제이다. 만일 인도가 이제부터 하려고
하는 내란의 큰 물결 속에 휩쓸려 들어간다면, 나는 이제 살맛이 없다. 인도는 지금 세계의
웃음거리로 되려 하고 있다. 비 폭력운동으로 독립에까지 온 것이 아닌가. 하기는 금후
인도는 제 1급의 병력을 가지고 고도의 공업국으로 될지는 모르나 나는 비폭력주의의
상징인 수직공업이 아마도 장래에는 없어지지나 않을까 슬퍼한다. (납산방랑, p.28)
  간디는 금욕과 절제로 125살까지 장수하여 인도의 독립을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인도의 독립, 그 독립식전에 메시지 하나 보내지 않고,
간디는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융화를 위해 설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p218
  그는 이제 정당간의 조정보다도 일반 대중간의 화해에 더 기대를 걸고, 종파간의 충돌을
중지시키려고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8 월 31 일 밤에는 회교도한테 타살당한
힌두교도의 한 시체를 앞세우고, 흥분한 힌두교도들이 간디의 숙소를 습격하였다. 비통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던 간디는 9월 1 일 죽기까지의 단식을 단행했다. 민중의 흥분은
가라앉고, 캘커타시에는 다시 평화가 깃들게 되었다. 이에 3일로 단식을 중단한 간디는 9월
7일, 마지막에는 서부 파키스탄에 갈 예정으로 펀잡 주를 향해 캘커타를 떠났다. 10월 2일,
간디의 78회 탄생 일에는, 회의파 주최로 [바가바드 기타]의 주신인 시리 크리슈나의
탄생지라고 전해오고, 또한 세포이의 반란의 중심지였던 연합주의 미 루트에서 대대적인
탄생축하행사가 벌어졌다.
  자기의 탄생축하를 외면하던 간디는 "나는 온 생명을 바쳐 신에게 빈다. 회교도와
힌두교의 싸움의 불길을 끌 수 있는 힘을 나에게 주시든가 그렇지 않으면 나를 이 세상에서
떠나게 해주십사고. 생명을 걸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 매진해온 나는 더 살아서 인도의
파멸을 보고 싶지 않다" (납산방랑, p.73)고 호소하면서 회교도, 힌두교 화해행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디는 완전히 회의파에서 손을 떼고 있은 것은 아니다. 그 동안에도 회의파
지도자들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간디를 찾아와 조언을 듣곤 했지만, 그는
회의파의 진로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틀려고 애썼다.
  11월 15일 회의파 의장의 선거가 있었다. 새 정부의 수뇌인 네루와 파텔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의장 크리팔라니는 전인도 회의파위원회에서 사의를 표명했던 것이다. 이 날은 자기의
'침묵의 날'이었으므로, 간디는 종이쪽지에 의장의 이름을 써서 내밀었다. 거기에는 회의파
사회당의 지도자인 나렌드라 데바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네루도 데바를 지지했다.
 @p219
  물론 회의파 주류의 사람들은 모두 반대하여 프라사드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정권을
장악하자 이권과 지위획득에 혈안이 되어 있는 회의파우파에 실망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간디는 좌파에 의장을 맡기려고 했었다.
  그 후 간디는 급속히 부패 해가던 회의파를 순전히 국민에 대한 봉사에만 헌신하는
비정치적인 조직으로 개조하려고 했다. 이는 새삼스러운 생각은 아니었다. 네루는 1931년의
어느날 회의파의 장래에 관해서 간디와 주고받은 말을 아래와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네루)는 현재의 회의파는 자유의 도래와 더불어 자연히 소멸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간디는 회의파가 하나의 조건부로 존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조건이란
모든 당원은 국가의 유급관직에는 오르지 않는다. 만일 국가 관직에 오르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누구도 회의파를 탈퇴재야 없다는 것을 규정하는 자제적 법령을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이 밑에 깔려 있는 온 사상은 회의파가 초연한 태도를 취하고 아무런 딴 생각도
갖지 않음으로써 정부의 행정부문과 기타 부문에 커다란 도덕적 압력을 가하여 정도를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Nehru, Toward Freedom, pp.188-89)
  그러나 회의파를 이와 같은 비정치적 조직으로 개편하려는 간디의 구상은 회의파의
지도자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래서 간디는 12월 전반에는 정부 밖에 있는 그가 신임하던
동지들과 일련의 회의를 열고, 끝내 정치에 가담하지 말고 계속 '건설적 프로그램'을
추진함으로써 정부에 도덕적 압력을 가하며 정부를 편달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를
원했다.
  화해행각중 간디가 델리에 도착한 것은 1948년 1월 초였다. 당시 델리는 극히 소란스러워
험악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날마나 파키스탄에서의 피난민이 시내로 몰려들어 왔다.
폭도한데 습격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처자를 잃은 원통한 이야기가 친족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은 대회교사원을 점령해서 합숙하고 광장이란
광장은 피난민으로 가득찼다.
 @p220
  종파적 대립은 심상치 않았다. 예에 따라 비를라가에 머물고 있던 간디는 민중의 진무에
온갖 노력을 다하던 끝에 1월 13일 종파간의 화해를 위하여 죽기까지의 단식을 시작했다.
그는 단식 중에도 저녁 기도회는 꼭 가졌다. 각 파의 지도자들이 간디 앞에서 화해를
서약했기 때문에 간디의 단식은 닷새로 끝났다. 그러나 1월 20일의 '저녁 기도회'때에는
폭음이 들렸다. 담 밖에서 간디에게 수제폭탄을 던졌던 것이다. 간디는 놀라지 않았다.
당황해 하는 청중 (그는 아직도 단식으로 인한 쇠약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여 실내에서
확성기를 통해 뒤뜰에 모인 청중에게 설교하고 있었다)에게 놀라지 말고 주의해서 내 말을
들으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간디는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융화 이외에도 네루와 과텔을
화재시키는 일을 따로 가졌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네루, '강철 같은 사나이 '라고 하며
국수파에 가까운 파텔, 네루는 주로 독립 인도의 외교를 지도하고, 파텔은 주로 내정을
주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간디는 1월 30일 오후 4시 파텔을
부르고 있었다. 저녁 기도회전에 파텔과 만나고, 5시의 기도회가 끝난 뒤에 네루와 아자드를
불러서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간소한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파텔과 말을 주고받았다.
  시간을 엄수하던 간디는 시간이 약간 늦은 것을 걱정하며 종손녀 '아바'와 양손녀
'마누'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조금 서둘러 뒷뜰에 나갔다. 약 500명의 남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디가 기도를 하는 약간 톤은 단에 발을 올려놓을 때 돌연 한 힌두
청년이 앞으로 나와 합장을 하고 인사하는 듯한 자세로 3발의 총탄을 간디에게 퍼부었다.
"라므, 라므"라는 희미한 말과 함께 간디는 맥없이 쓰러겼다. '라므'란 간디가 숭경해
마지않던 신의 이름이다. 아하! 비폭력의 사도는 폭력에 쓰러졌다. 더구나 독립한 후에
인도인 청년에 의해서 너무나도 비극적인 최후였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한 힌두 극우파 비밀결사의 단원이었다.
 @p221
  "간디의 존재는 유해하다. 그를 죽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고 범인은 말하여 암살이
개인적 동기에 있지 않음을 비추었던 만큼 간디의 암살은 인도의 앞날이 밝지만 않을 것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은 광적인 종파적 폭동과 더불어 세계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p223
    제 5장 간디 사후의 간디주의
  우리는 이상에서 간디가 인도 민족운동 무대에 등장하기까지의 역사적 배경, 그의 특이한
사상의 형성과정과 그 내용, 그런 사상을 실천에 옳기는 방법과 그 구체적인 실천과정을
고찰해왔다. 이제 우리는 이른바 '간디주의'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고 그 유산을 검토해볼
차례에 이르렀다.
  인도의 분할독립과 간디의 순교는 인간을 개조함으로써 사회를 변혁하려던 그의 평생을
통한-사티아그라하투쟁이 결국 실패하고 말았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난 30년간에 걸쳐
우리가 해온 것은 비폭력의 저항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동적 저항이었다. 수동적 저항은
약자만이 하는 짓이다. 왜냐하면 약자는 무력저항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비폭력저항의 수법을 실천할 수 있었다면-그것은 견인불발의
용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우리는 양분된 인도 대신에 그와는 전혀 다른 자유인도의
모습을 세계에 나타냈을 것이다. 인도는 둘로 분할되고 게다가 서로 몹시 의심하고 있다.
분할된 인도는 서로 심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린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의,
식을 마련해줄 생각을 못하고 있다. 헐벗고 굶주린 수백만의 사람들은 생활필수품의 형태로
그들 앞에 자태를 나타내는 신의 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모른다. (Namboodiripad,
p.198-99)
 @p224
  나는 민중에게 나의 비폭력주의를 가르치고 실행시켰다. 그 때문에 인도는 자유를 쟁취한
것으로 나는 최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이 이상 자기기만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나의 신념의 승리도 아무것도 아니다. (납산방랑, p.195)
  독립을 계기로 편견과 사리에 사로잡히게 된 사람들의 저열한 모습을 쓸쓸한 심정으로
지켜보며 간디가 쓰디쓰게 내뱉은 이런 술회야말로, 간디주의는 "영국인에 대한투쟁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의 전략과 전술로서"는 '승리'했으나, "새로운 사회철학, 인간을
재생시키는 새로운 방법으로서"는 '완전히 실패'했음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남부디리파드는 평하고 있다(Namboodiripad, p.210).
  간디는 인도의 현실, 특히 농민대중과 밀착하면서 특이한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이상을
악착같이 고수하던 '실제적 이상주의자'였다. 그런데 남부디리파드에 의하면 간디의
이상주의는 강점과 약점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지만, 강점은 요컨대 반재반봉건투쟁에
대중을 궐기시키고 그들을 조직한 데 있으며, 약점은 비폭력주의를 엄격히 고집함으로써
제국주의, 봉건주의, 자본주의의 삼중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노동자, 농민대중을 사실상
억제하는 결과로 되었다는 데 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반제반봉건을 위해 인도의
민중을 궐기시키고 조직하기를 원하면서도 대중의 행동과 투쟁이 엄격히 제어되기를 원하던
부르주아지의 요구와 일치했다는 것이다. 물론 전민족의 이익을 수호하고 추구하던
간디에게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특히 옹호하려는 동기는 추호도 없었으나, 간디의
실제활동은 결국 그와 같은 결과로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는 남부디리파드는 만년의 간디의 처지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반제국주의 투쟁의 시기에, 그가 고집하던 이상주의가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있어서 실제로
유효한 정치적 무기로 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간디는 '민족의 아버지'로 되었다.
 @p225
  또한 그의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 많건 적건 부르주아지한테서 고립당한 것은 그의
이상주의가 독립 후의 시기에는 부르주아지의 이기적 이익에 대한 하나의 장애로 되었기
때문이다" (Namboodiripad, p.223)라고 보기에 따라서는 간디의 생애는 인도자본주의의
배양과 발전을 위해 바쳐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는 인도 민족자본의
은인이었다. 그러므로 사티아그라하 투쟁과 '건설적 프로그램'의 덕택으로 성장, 발전한
인도 민족자본은 독립을 쟁취하자 간디의 은혜를 잊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간디는
위대한 정치지도자였다. 따라서 정치적인 면에 국한해서 보면 상술한 남부디리파드의
견해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간디의 이상주의는 부르주아지에게 이용당한 데 불과했을까? 간디주의는 인간을
개조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을까? 인간을 개조하려는 간디주의가 당장에는 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실_패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일이요, 또한
독립 후 부르주아지가 간디의 이상주의에 반대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부르주아지를
위하는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언다. 그리고 간디가 악착같이 고집하던 비폭력주의는
부르주아지한테 이용당한 것은 사실일는지 모르나, 비폭력주의에 대한 남부디리파드의
비판은 당시의 환경의 제약을 무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간디의 종교적 신앙을
너무 경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순수한 정치적 비판은 간디의 비정치적인 면 특히 인간적,
종교적인 면을 소홀히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간디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인도의 종교심을 대표했다. 그는 자신의
이성과 도덕의식을 통해서 과거의 유산을 재검토하였고, 현대 서구의 지적 및 사회적
운동과 접촉함으로써 현대 서구사상을 필요에 따라 받아들여 이를 동화하였다.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인도의 종교심은 단일한 궁극적 가치-절대적 진리의 실현을 통한
구원-를 믿는다. 아름다움, 사랑, 지식과 같은 가치는 위에 든 하나의 위대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단순한 수단이라고 본다.
 @p226
  물질적인 쾌락은 정신적 발전에 대한 장애라고 비난되거나, 기껏해야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한도 안에서 허용되는 데 불과하다. 인생 그 자체도 특정 단계에서는 내버려야 할,
진리를 가리는 하나의 베일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간디의 인생철학은 그가 개인적인 정신적 경험을 통해서 재발견하고 재평가한 인도의
종교심으로 주로 구성되고 있다. 인도의 종교심을 재평가하는 데 주요한 특징은 그가
아힌사 (사랑 내지 비폭력 )를 진리의 실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아힌사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와 거의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데 있다. 동시에 그는
아무런 주저 없이 현대 서구사상에 자기의 기본적인 인생철학과 조화되는 많은 이념을
섭취, 동화함으로써 그것을 자기의 인생철학의 불가결의 부분으로 만들었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개념은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이었으나 그가 특히 그것을 강조한 것은 19세기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영향 받은 바 컸었고, 그의 국가 없는 사회는 자유주의의 극단형이었다.
그의 간소한 생활은 러스킨한테, 브레드 레이버와 사티아그라하는 톨스토이한테 영향받았다.
그의 인생철학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아힌사도 단순히 고대 인도의 전통의 일부로서
받아들인 종교적 이념에 그치지 않고, 우애, 평등, 합리성, 관용 등과 같은 서구의 민주주의
정신에 영향받은 어딘가 새로운 것이었기도 하다.
  그러나 크리팔라니의 말대로, "간디는 인도의 눈을 가지고 서양을 보았다." 그는 "거의
인도 그 자체일 정도로 인도적"이었지만, "그가 서양에서 얻은 것은 당장에 그의 수중에서
인도화되었다." "그는 인도의 정신과 매우 잘 조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중세주의는
네루의 현대주의보다도 더 근대적이 되는 수가 있었다. 그것은 보다 유효하게 인도의
필요에 응하고 또한 인도도 즉시 감응했다." (Kripalani, p.81-82) 간디는 유럽 중세의
카톨릭의 성자다운 면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도의 농민과 언제나 밀착하고 있던 실제적인
지도자였다.
 @p227
  그러니까 네루도 "간디는 사상적으로는 때로 시대에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행동에서는
근대 인도의 가장 위대한 혁명가였다" (판본덕송, p, 213)고 평하고 있다.
  실로 간디는 많은 면에서 인도에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했다. 종교의 영역에서 그는
전통주의와 권위에 대한 맹종에 반항함으로써 개인적 탐구와 합리적 사고의 길을 열었다.
정치면에서 그는 인도 민중에게 어떤 형태의 폭정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싸우라고
가르치고, 자유를 위한 비폭력적 투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티아그라하의 새 무기를
고안해냈다. 사회생활에서는 그는 불가촉천민제, 카스트간의 불평등, 부인의 예속과 격리, 그
밖의 온갖 사회적 폐해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경제생활에서는 그는 신탁과 비소유의
교의를 가르침으로써 사유재산제도의 토대를 흔들리게 하였다.
  그러나 간디는 무엇보다도 종교적 인간이었다. 그는 사터아와 아힌사의 사도였다. 그는
사티아에로 인도하는 아힌사의 길을 스스로 발견하고 남에게 가르쳤다. 개혁, 진보, 혁명을
위한 그의 온갖 노력은 아힌사의 법에 의해서 지배됐었다. 따라서 그는 사회, 경제생활의
낡은 주형을 외부의 힘으로 파괴하는 데 반대했다. 그런 낡은 외형이 자동적으로 새로운
형으로 바뀌게 하기 위하여, 그는 정신의 내적 변화를 일으키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그는
보수적으로, 그리고 낡은 생활형을 일격에 파괴해버리려는 조급한 우상파괴주의자에게는
반동적으로 보였다. 남부디리파드가 간디의 비 폭력주의를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요, 네루가 고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네루는 "패배자에 대한 그 (간디)의 뜨거운
사랑과 동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필연적으로 이런 패배자를 낳고 그것을 짓밟는 제도를
지지할까, 또한 그는 그처럼 비폭력에 대한 정열을 가졌으면서도, 왜 전적으로 폭력과
강제에 의거하는 정치적, 사회적 조직을 지지하는 것일까" (Nehru, Toward Freedom,
p.318)라고 다년간 고민했다.
  그러나 네루도 부언하고 있다시피, 간디는 현존 질서의 지지자는 아니었다.
 @p228
  자기가 그리는 이상사회인 라므라자의 실현은 까마득한 일이므로 그는 현존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폭력에 의해서 현존 질서를 변혁하는 대신에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실현 가능한 이상적 목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상적 목적은 고대
인도에 존재했던 식의 자치적이며 자급자족적인 촌락을 이룩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러한
촌락이 자유와 아힌사의 성장발전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의 촌락경제는 자기가 생각하는 아힌사에 실제로 의거하고 있었다는 환상은 갖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한 아힌사는 오직 그러한 소박하고 지방분권화된 사회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만 개인은 절대적 진리의 추구에 진심으로 몸을
바쳐 가장 가까운 길로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간디의 궁극적 이상은 순수한 아힌사에 입각하는 국가 없는 사회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사회를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으므로, 필요한 준비를 하기 위한 과도기에는
현실과 타협을 했다. 그 결과 간디는 가장 적게 통치하며 가장 많이 자유를 부여하는
민주국가를 수락하고, 그런 민주국가 안에서 상술한 소박하고 지방분권화된 사회를
이룩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이룩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통해
인도의 독립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면 과연 독립 후의 회의파 정부는 이런 사회를 이룩하려고 하고 있을까? 간디가
서거한 후 회의파 정부를 지도한 네루는 수상으로 시정함에 있어서, "간디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의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위선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간디의 말을
하면서 일보일보 그를 속여왔다. 이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현실이
우리에게 특수한 방법을 취하게 한다"(판본덕송, p.267)고 말하였다.
  일찍이 1922년 차우리 차우라 사건으로 제 1차 불복종, 비협력 운동이 급작스레 중지
당했을 때, 네루는 옥중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고 분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도 회의파의 모든 사람에게도 비폭력의 방법은 종교도, 이론의 여지 없는 신조나
교의도 아니었고, 그렇게 될 수도 얼었다. 그것은 정책이요, 모종의 성과를 약속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은 그 성과를 가지고 종국적인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개인으로서는 그것을 하나의 종교 흑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신조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나 정치단체로서는 그 단체가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Nehru,
Toward Freedom, p.28)
 @p229
  그 이래로 네루는 이데올로기상으로는 몇 번이나 간디를 뛰어넘고, 정치운동의
실천면에서도 몇 차례나 간디가 취한 조치에 분개하여 그를 심하게 비판하면서도, 배가
항구에 되돌아가듯 간디의 옆을 영영 떠나지 못하고 가장 충실한 신봉자로 남았다. 그
이유는 간디가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는 인도의 현실 특히 인도의 농민, 농촌 때문이었다.
그는 간디에 대해서 의심이 생길 때마다, "우리가 간디보다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간디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인도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거대한 헌신과 충성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은 대중의 욕구와 열망에 통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같은 책,
p.19)고 생각하면서 간디로 부터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4년에 이르자 네루는 간디에 대한불만이 점점 높아졌다.
  "돌연 알리포르감옥의 독방에서 나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함을 느꼈다... 쌔가 경험한 많은
어려운 교훈 중에서 가장 어렵고 제일 고통스런 문제에 지금 직면하고 있다. 즉 그 어떤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에서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는 없다. 인간은 인생을 홀로 여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남에게 의지하면 비탄을 초래한다" (Nehru, Toward Freedom, p.312)고
생각하게 된 네루는 언젠가는 간디와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지만 네루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이상으로 네루를 알고 있던 간디는 네루의
실제적인 협력을 가장 중시하며,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이론상의 차이에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간디의 제자요 동지인 네루-비폭력을 하나의 정책이라고 보던-는 언젠가는 비록
진리에로 인도하는 사랑의 법으로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진정한 평화에로 인도하는
인간성의 법으로서 비폭력을 믿게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p230
  즉 간디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네루는 자기와 견해를 달리할지 모르나, 자기가
죽고 나서 전적인 책임을 두 어깨에 결어지게 되면 네루도 점차 자기와 같은 견해를 갖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것이 곧 많은 유능한 지도자 가운데에서 간디가 자기의 정치적
후계자로 네루를 택한 이유였다.
  서양을 먼저 알고 나서 인도를 발견한 네루, "귀족적인 민중주의자요,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혼혈아"(이것이 존 간서의 평이다. 납산방랑, P.141)라던 네루, 간디와는 다른 형의
이상주의자요, 간디에 못지 않게 현실주의자였던 네루, 그는 인도의 세속심을 대표하고
있었다. 간디가 "안에서 인도를 변혁했다"면, 네루는 "밖에서 인도에 영량을 미쳤다"
(Kripalani, p.81).
  정권을 장악한 네루는 우선 번왕국의 귀속문제를 에워싸고 파키스탄과 싸우는 한편,
국내의 좌우파 세력과 싸워야 했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중도적인 민주사회주의, 밖으로는
중립주의의 노선을 지향하면서, 간디가 그리던 중세적인 지방분권적 사회가 아니라
현대적인 사회주의형의 사회를 이룩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네루에 대한
간디의 예언이 어느 정도 적중되어갔다. 앞에서 말한 대로 간디는 인도국민을 영도하는
책임이 자기한테서 네루에게로 넘어가고 네루가 인도와 세계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그도
비폭력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즉 절박해 있는 파멸에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비폭력을 하나의 정책으로 채택하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고,
그것을 하나의 신조로서 수락하여 전세계에 전파해야 함을 깨닫게 되리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물론 미시적 내지 현상적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지만, 거시적 내지 본질적으로 보면,
네루는 비폭력을 그의 대내외정책의 초석으로 만들고, 평화의 메시지를 간디가 사용한
말들을 세속적인 말로 옮겨서 전세계에 전파했다고 할 수 있다. 하기는 중국과의 국경분쟁
(1962)으로 차질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네루의 뒤를 이은 샤스트리(1964-66)도 기본적으로는
네루의 노선을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p231
  게다가 회의파의 분열, 인-파전쟁, 식량위기, 그리고 비상사태선언 등 숨가쁜 정국의 변전
속에서 인디라 간디는 때로는 무력에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친소정책을 쓰기도 했으나,
철저한 치안유지대책과 사회개혁으로 내정위기를 극복, 대내적 안정을 되찾자
비동맹중립외교로 돌아갔으니, 그녀도 긴 눈으로 보면 부친인 네루의 노선에서 크게 이탈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간디의 비폭력의 유훈을 충실하게 지킨 이는 네루보다도 비노바
브하베(VinobaBhave)였다. 수백만에 달하는 농촌의 토지 없는 농민에게 토지의 소유권
혹은 사용권을 부여하게 될 토지의 공정한 재분배나 집단적이고 협동적인 농장의 도입은
인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만일 인도가 유혈적인 폭력혁명을 피하려면, 가능한 한 단시일 안에 해결되지
않으면 안된다. 간디의 정신에 합치되는 이상적인 해결책은 토지소유자를 설득하여 토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하기 위하여 그들의 토지의 일부를 양도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
촌락에 있는 모든 토지를 전촌락민의 집단적 소유로 만드는 일이라고 하겠다. 이는 매우
단순하게 생각될는지는 모르나, 재산에 대한 관념은 몹시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고
있는데다가, 특히 토지에 대한 애착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수백만에 달하는 대소 지주한테서 그들의 살과도 같이 생각하고
있는 토지의 일부를 폭력을 사용함이 없이 양도받는 일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기적이다.
자와하를랄 네루의 정부도 이러한 기적은 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간디가 서거한 후, 순수한
비폭력의 길을 걷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지도자인 비노바 브하베는 이 일을 했다.
  비노바 브하베는 간디의 생존시에는 다른 많은 지도자들만큼 일반민중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못했다. 간디의 충실한 제자로서의 그의 이름이 전인도에 알려지게 된 단 한 번의
기회는 1940년 간디가 최초의 개인적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로서 그를 택했을 메였다.
그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그가 간디의 충실하고도 헌신적인 제자이며, 간디가 그것을 위해
싸워온 이상과 원리를 선전하고 실천하는 과묵, 무사한 활동가임을 알게 되었다.
 @p232
  이 사건이 있은 후 10년이 더 지나, 그의 이름이 다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1951년에 그가 시작한 '부단운동' (Boodan yajna)은, 자유인도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토지문제에 간디의 원리를 바로 적용한 것이라고 하여 크게 환영받았다. 그것은 또한
지주에게 강제로 그 토지를 내놓게 하여 그것을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고통 많은 방법에
대신하는 것으로 대환영을 받았다. 즉 테렌가나(*) 에서처럼 공산당의 지도하에 농민이
채용했던 토지의 혁명적 점거의 방법을 배척하는 동시에 회의파 정부가 채용한 입법에 의한
토지개혁방법도 배척하고, 그 대신에 그는 토지소유자가 자발적으로 토지를 내놓는 방법을
제창했다. "누구도 토지를 갖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소유지의 6분의 1을 내놓는다"는
비노바 브하베의 슬로건 아래 전국을 돌아다니며 토지를 기증받아 농민에게 분배하는 일이
곧 부단운동이다.
  * : 1943년 하이데라바드 번왕국의 테렌가나지구에서 농민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자연발생적 성격의 것이었으나 46년이 되자농민위원회와 파르티잔부대가 조직되고
있었다. 조직의 선두에 서 있었던 것은 인도 공산당과 지방민의 조직인 얀든라
마하사바였다. 1948년에는 500만의 농민, 3천의 농촌을 포함하는 테렌가나 지방의 대부분에
인민권력이 수립되고 지주의 토지는 몰수되어 빈농과 농업노동자에게 분배되었다. 1948년
인도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번왕국을 점령하고 49년, 8명의 공산당원을 교살하고, 4천 명의
농민을 투옥하여 봉기를 진압하였다. 이런 사태 진전에 충격을 받아 비노바 브하베는
부단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부단운동은 여러 단계를 거쳐 그람단(Gramdan)운동으로 발전했다. 비노바는 이번에는
지주들의 소유지의 6분의 1의 양도로서는 만족하지 않고 각자가 전재산을 양도하는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즉 모든 토지는 촌락공동체 전체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각하여
촌락 전체의 토지를 기부하는 운동으로 진전되었다. 중앙정부와 주정부는 이 운동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비노바를 정신적으로 지지하고 물질적으로 후원하였다.
 @233
  그리하여 인도정부의 5개년계획에서는 촌락개발계획과 그람단운동의 밀접한 협력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비노바의 경우에도 간디의 경우와 꼭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지적 능력이나 기타의
자질에서는 훨씬 그를 능가하고 있는 많은 인사들이 그를 찾아와서 그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간디 생존시, 정치권력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건설적 프로그램에 헌신,
봉사하던 이들이 이부단-그람단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비노바 브하베의
부단-그람단운동은 단지 토지개혁의 운동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촌락민
자신의 주도하에 인도 농촌의 도덕적 및 문화적 재건을 위한 하나의 사회운동이었다.
그것은 무사봉사를 통해 촌락민에게 자주정신과 자조능력을 키우는 하나의 종교적 사명을
다하였다. 그것은 5개년계획과의 관련하에 시작된 촌락개발계획의 정신적 보완물이었다.
만일 촌락민한테서 자발적인 열성이 일어나고, 그들의 주도하에 정부가 협력한다고 하면,
그것은 10-20년 안에 인도의 전모를 실제로 변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인격적이며
융통성도 혼도 없는 정부-비록 국민정부라 하더라도-의 기구를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비노바는 부단-그람단운동을 통해 이런 충동과 열광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그것은
단지 주는 이와 받는 이뿐 아니라 주는 이에게 주도록 설득하는 운동원에게도 새로운
열정을 일으켰다. 이런 열정은 진보를 위한 정부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그 무엇을
주었다. 그런 열정은 부단-그람단 운동을 진정한 비폭력혁명의 수단으로 만들어, 촌락과
촌락민에 대해 간디가 생각했고 비노바가 생각한 자유를 보장했으며, 비록 비노바의 노쇠로
인하여 1972년 이후에는 이 부단-그람단운동이 실질적으로 중단상태에 있으나, 그 정신은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길이 살아남아 있는것이다.
  오늘날 인도의 독립을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우던 사람들은 여러파로 분열되고 있다.
간디의 사상과 네루의 이념에 만족하지 못하던 일부의 사람들은 일찍이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p234
  이 정당의 중력은 인도 밖에 있으니 만큼 그것은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논의의 범위 밖에
있다. 원래는 네루를 따르며, 회의파 안에 머물면서 회의파를 민주사회주의로 전환시키려던
하나의 집단, 즉 회의파 사회당은 독립 후 회의파 정부의 정책에 크게 실망하고 독립된
정당인 사회당을 만들었다. 이것은 후에 인민사회당으로 발전했다. 이 당은 네루가 제시한
길을 따를 것을 요구하며, 네루 자신은 그 길에서 멀어졌다고 주장한다. 회의파의 진실로
주요한 부분인 둘째 집단은 네루와 그를 뒤이은 샤스트리 그리고 인디라 간디 영도하의
여당으로 되었다. 셋째 집단은 비노바와 기타의 간디의 동지들을 따르는 정통파 간디주의의
'건설적 프로그램'운동자들이다. 이 세 그룹은 때로는 합류하는 듯하면서도 결코 실제로
합치지는 못하는 평행선을 걷고 있다. 간디가 만일 살아 있었다면, 이런 사태를 보고
실망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간디주의가 완전히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위에서 살펴본 그대로이다.
  그러면 간디주의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 물론 간디주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무엇-가령 사티아그라하냐, 정치, 경제력의 분산이냐, 또는 종교의 정치화 내지 정치의
종교화냐-이라고 보는가에 따라 그 평가는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반디오파드야야가
결론을 내리고 있다시피, 간디주의는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점에서는 그 가치가 인정돼야 할
것 같다 (J. Bandyopadhyaya, "An Assessment of Gandhism, " Quest 37, spring, 1963,
pp.20-21).
  첫째로, 비록 인도에는 비폭력의 오랜 전통이 있었고, 또한 간디는 톨스토이와 소로한테서
영감을 받았다고는 하더라도, 비폭력적 저항을 조직하는 하나의 기술로서의 사티아그라하는
인간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이론과 방법에 대한 간디의 독창적인 공헌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티아끄라하의 일반적 이론에는 논리적 난점이 있고, 또한 현재의
인간사회에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신기한 기술이며
특정 상황 아래에서는 다른 방법과 병행하여 전세계에 걸쳐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p235
  둘째로, 간디는 비록 신약성서와 서구사상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더라도 그의
사티아그라하의 이론과, 기본적으로 인도의 전통에서 끄집어낸 고도로 지방분권화된 정치,
경제체제를 통한 인도 국민의 스와라지에 관한 이론은 거의 불모상태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는 이 방면의 현대 인도사상에서 독창성을 나타낸 극소수의 예의 하나이다.
  셋째로, 수천년간에 걸쳐서 성도, 화신, 도덕적 개혁가들이 숭고한 인간적
이상을 설교하면서도 좀처럼 현실과 대결하여 사회제도를 재조직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의 철학적, 도덕적 전통의 고상한 요소와 인도사회의 현실적 구조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간디는 비단 인도뿐 아니라 온 인류역사에서 자기의
생활주변의 사소한 일들과 관련하여 사회를 구체적으로 개조하려고 노력한 회귀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간디주의에는 도덕적 가치를 중핵으로 하는 사회조직을 이룩하려는
고상한 기도가 있다.
  넷째로, 간디주의에는 그것이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하는 많은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 즉
영원한 진리추구, 성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낙오한 자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대하는
고독한 순례자의 겸양, 단호한 결심, 용기, 자기신뢰를 가지고 적대세계에 도전하는 떳떳한
태도 등이 그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실일로의 생애를 통해 간디가 나타낸 민중에 대한 희생과 봉사의 정신,
그리고 지도자로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는 오늘날 인도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정신적인
지주로 되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원래 간디가 생각하던 민주주의란 수라든가 다수, 또는 보통 의미에서의 대표라든가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것은 봉사와 회생에 의거하는 것이며 도덕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인류의 극빈자들과 완전히 일체감을 가지고 그들보다 나은 생활을
바라지 않으며, 가능한 한 그들의 생활수준에 접근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만일 민주주의자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면, 나는 생래의 민주주의자" (Nehru, Toward
Freedom, p.189)라고 간디는 말하였다.
 @p236
  이는 물론 서구식 민주주의 개념과 다르다. 그러나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치중해서 보면
간디 이상의 민주주의자는 있기 어려울 것이다. 간디 자신이 민주주의자에 그친 것은
아니다. 그는 인도에서 민주주의의 터전을 닦는 데 실제로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인도는
간디의 새 교육, '건설적 프로그램 ', 사티아그라하 투쟁의 덕분으로 자주독립의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과 중산계급의 발전 등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을 많이 갖추게 되었지만, 특히
그의 영도하에 이룩된 회의파의 구조개혁과 조직확대는 결정적인 의의를 가진다. 인도가
독립 후 비교적 순조롭게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회의파가 전국적
규모로 일반대중에 파고듦으로써 얻게 된 자치능력과 주정부에 참여함으로써 갖게 된
행정관리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간디가 키운 '건설적 프로그램' 운동자들은 정부
밖에서 정부에 도덕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인도의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렇듯 간디의 정신은 여전히 인도에 살아 남아 있지만, 그러나 그의 정신은 인도에
국한되지 않고 널리 세계에 퍼져, 현재에도 식민지해방투쟁과 인종차별반대투쟁을 고무하며
그 지침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일찍이 로맹 롤랑은 간디야말로 "3억의 민중을 궐기시켜
대형제국을 진감시키고, 거의 2천 년 이래 인류의 정치에 제일 강력한 운동을 도입한 인물"
(Rolland, p.34)이라고 평했지만, 최근에도 아놀드 토인비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간디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시간의 내재화

철학 2008. 9. 3. 11:31

서론 : 시간 문제의 제기

- 옛 관습에 젖어있는 사람(마니교도)이 제기하는 시간에 관한 물음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시간의 담론을 시작

1) 창조가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고, 이 의지가 신의 실체에 속한다면, 천지 창조를 위해 신에게 새 의지가 생겼어야 한다. 새 의지가 생겼다면 신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말이다. 변화는 신의 불변의 영원성에 어긋난다. 신은 영원하지 않다고 해야 하는가? 만일 신이 영원하다면 신의 의지로부터 나왔어야할 피조물도 신처럼 영원해야 하지 않는가? 즉 시간이 유한한 근거가 무엇인가? - 유한한 시간의 존재 근거

2) 피조물은 신이 존재한 연후에 있게 된 것인데 그 창조 이전에 신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 창조 이전에 시간 양상은 어떠하였는가?

- 창조 이전의 상태와 이전의 시간 양상 및 신의 영원성에 대한 반문

- 하나님이 시간을 앞선다는 것은 시간에 있어서가 아니며,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을 앞서고 넘어섭니다. 시간조차도 당신이 만드셨으므로 천지 창조 이전의 그때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적에 그때란 있을 수 없습니다.

A. 시간의 존재

- 시간은 천지창조와 더불어 있는 것이지만 그 본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1. 시간의 성립

-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시간은 신의 천지 창조와 함께 존재, 시간의 소재지는 인간이 사는 천지, 천지는 생성 변화를 본질로 하는데 시간은 바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

․ “변화와 운동 없이 시간은 절대로 있을 수 없고, 형상이 없는 데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 변화와 형상이 없는 데에 시간이 있을 수 없음

- 형상이 없는 데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음

- 시간의 존재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방향으로 향해 있다는 것

․ 무로 향해 흘러가고 무로부터 흘러온다는 것

․ 시간 존재의 근거는 무라고하는 패러독스가 성립

2. 시간은 천체의 운동이 아니다.

- 인간이 사는 천지는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천체적 우주,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체의 운동은 시간이 아니라고 함

- 천체의 규칙적 순환운동은 시간을 측정하는 가장 유용한 단위는 될 수 있으나 그것이 그 자체로 시간이 될 수는 없음

하루는 태양이 동쪽에서 솟아올라서 다시 동쪽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데, 하루라는 것이

① 운동자체인지 - 태양이 겨우 한 시간만 움직였더라도 하루라고 해야할 것

② 운동이 완성되는 기간인지 - 해뜨기로부터 다음 해뜨기까지의 기간을 한 시간이라고 잡을 때, 하루를 채우기 위해 태양이 24번 돌아야 함

운동 자체가 시간이 될 수는 없음, 천체의 규칙적 순환 운동은 시간의 길이를 측정하는 훌륭한 규준은 될 수 있음

3. 시간의 본성

과거와 미래가 어디 있든, 그것은 현재라는 것

- 존재론적으로 본 시간 양상의 실상

․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지금에 없고,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 역시 지금에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일 뿐

․ 그러나 오직 현재만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영원이지 시간은 아님, 그뿐 아니라 현재만 있고 과거와 미래는 원천적으로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의 존재 근거는 의식에 있음

- 시간의 중심이 존재론적으로는 현재에 있다는 것

․ 시간의 존재 근거는 그것이 무를 향하는데 있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로 연속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일 뿐

- 과거의 것에 대한 현재는 기억이며, 현재의 것에 대한 현재는 직관이고, 미래의 것에 대한 현재는 기대, 이 세 가지는 마음속에 있음

- 시간의 소재는 의식이며, 시간 존재의 현주소는 전적으로 현재의 의식에 집중

- 과거, 현재, 미래 → 기억, 직관, 기대

- 현재는 연장을 갖지 않음

- 현재는 과거와 미래라는 무성에 의해 단절되어 있기 때문

- 현재가 존재로서 무로 연장될 수 없음을 의미, 현재가 연장을 갖지 않는다면 그 현재는 시간의 생명이라 할 연속성 내지 지속성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야 함

4. 과거와 미래의 존재 근거

- 과거와 미래는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연장 없는 현재뿐

- 과거와 미래는 기억과 기대라는 의식 속에 있음

- 과거의 사실 자체는 이미 없지만 그것들이 의식 속에 새겨놓은 흔적이 기억 속에 있음

- 미래의 사실은 지금에는 없으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있음

․ ‘곧 해가 떠오를 것이다’라고 미래를 예상한다면, 곧 떠오를 해를 바라보는 것은 현재요, 그 현재에서 예상되는 것은 곧 떠오를 미래의 태양

․ 원인이나 징후로서 현재 속에 들어와 있는 것

- 의식은 과거와 미래의 존재 근거

-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체적 행위나 사건의 변화와 함께 과거와 미래가 존재함을 확신하며, 의식의 명증성에서 확보된 내재적 시간의 객관적 시간으로서의 전환의 계기

5. 시간의 방향

- 시간의 본질은 정지를 거부

- 과거 연원적 : 과거 → 현재 → 미래

․ 시간의 발생적 근원을 과거에 두는 태도, 그리스적 사유

- 미래 연원적 : 미래 → 현재 → 과거

․ 그리스도교의 미래대망 사상, 미래(최후의 심판)가 규정적 역할을 담당, 목적론적

․ 시간은 미래에 의거해서 현재를 규정

- 시간은 미래에서 발원하여 현재를 거쳐 과거로부터 흐르는 것

- 미래대망 사상은 종말론의 다른 표현, 언젠가 인류 역사는 끝이 날 것이고, 시간은 그 때까지만 진행할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미래 시간의 감소와 과거 시간의 증가를 의미

․ 일정량의 가사로 된 노래를 부르는 경우와 같음

․ 전체로서의 역사는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역사가 진행함에 따라 미래의 부분은 감소

․ 인류 역사에 종말을 예견하고 역사의 방향을 존재론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보는 데에 그리스도교적 시간관의 본질적 특성이 있음

- 존재하는 세계의 역사는 무를 목표로 삼고 진행하다가 무로 돌아갈 것

6. 시간의 측정

- 현재는 연장(지속)을 갖지 않기 때문에 길이가 있을 수 없고, 과거와 미래는 무이기 때문에 측정할 수가 없음, 비록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더라도 의식 내재적 존재이기 때문에 양화할 수 없음

-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자연학의 대상, 즉 천체의 운동으로 보고 시간을 선후에 따른 운동의 수라고 하여 처음부터 시간의 측정 가능성을 확보

-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의식 속에 내재화시키면 양적 측정이 불가능

- 일반적으로 시간은 물체의 운동을 측정하는 잣대, 규준임

- 측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연장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정하지 않음

- 시간을 의식으로 전환시켰으므로 측정도 의식으로 할 수밖에 없지만, 의식은 길이를 갖지 않음, 따라서 측정은 양을 지양하고 질화할 수밖에 없음

- 시간의 연장 = 마음의 분산(distentio animae)

․ distentio > dis(분산), tendere(향하다)의 합성어, ↔ 마음의 집중

․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방향으로 분산하여 퍼지는 마음

1) 부르기 전에 마음은 노래 전체에 향한다

2) 부르기 시작하면 이미 부른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이 향한다

3) 아직 부르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기대가 향한다

․ 2)와 3)의 향함은 마음이 분산되어 향하는 dis-tendere

․ 현재는 직관으로 tendere함으로 결국 마음은 세 방향으로 분산

- 시간의 측정은 지각에서만 가능

- 아우구스티누수가 측정하려고 하는 것은 시간 속에서 경하는 것(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의식에 남겨놓은 지각

- 시간의 측정은 시간 ‘시간 내용’이 ‘지나가는’ 현재에 새겨놓은 인상의 깊이, 즉 지나가는 현재에서 직관되거나 회상되거나 또는 기대되는 마음의 깊이가 질적으로 측정되는 것

- 시간의 측정은 지각을 양적 길이로서 측정하는 것이 아닌, 지각을 질로서 측정한다는 뜻

- 걸어가며 남기는 발자취와 같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으로 지각의 잔영

- 과거 일이 현재는 없어졌으나, 마음에 새겨진 잔영만은 남아 있음, 잔영으로서 새겨진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상기(회상), 그 내용이 기억, 기억은 상재(相在)로서만 존재, 미래도 마찬가지

※ 종 합, 아우구스티누스의 패러독스

1) 시간으로서 있기 위해서는 있지 않게 되어야 함

2) 시간의 측정과 관련된 것으로, 시간을 의식으로 환원하여 긴 미래란 긴 기대이며, 긴 과거란 긴 기억이며, 긴 현재란 긴 진관

질적으로 인상의 강도가 강하거나 약한 것을 가리키는 지각의 강도, 시간의 철저한 주관화

3) 시간의 주관화는 사람마다 각자의 시간이 있게 되는, 보편적 시간을 부정하는 결과

B. 시간과 영원의 인식

- 영원의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1. 영혼의 제 단계와 연원의 인식

- 인간 영혼의 세 단계

1) 동물적 영혼 : 동물의 생명력, 신은 발견되지 않음, 육신을 살게 할 수 있을 뿐

2) 감각적 영혼 : 동물도 가지고 있는 능력, 신체의 오관을 가리킴, 외부적인 것을 내부로 보고하는 역할, 정신은 없음, 이성이 없음

3) 기억 : 감각적 기억과 지성적 기억

- 감각적 기억 : 심상(감각을 통해 마음속에 받아들인 물체의 상),

감각(현재에 얽매이게 되는 것으로, 감각된 것은 기억 속에 상으로 보존),

기대(과거의 심상, 감각 내용에 기초해 미래의 행위, 사건 등을 현재의 것인 양 생각하는 것)

․ 감각도 심상, 외부로부터만 받아들인 것이 아닌, 받아들인 것을 분해 변양해서 새로운 상을 만들기도 함, 용을 상상하는 경우(뱀과 맹수의 상의 합성)

- 지성적 기억 : 비감각적 기억, 근원적 기억

․ 근원적 기억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심상의 누적이 아닌,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는 기억, 무의식의 기억, 비경험적 기억, 의식적 판단이 행해지는 밝은 기억의 배후에 있으면서, 판단의 기준이 되는 선천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어두운 기억의 들판, 신은 여기에서 찾아지는 것

․ 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기억을 초월해야하는 것

- 근원적 기억, ‘기억을 넘어서 당신에 있어서’ 아는 것, 신을 알고 나서부터 신은 기억 속에 있음

․ 종교적 체험이며, 철학적 인식의 한계 밖에 있는 것

․ 영원은 인간 세계 밖에 초월해 있는 것으로 인간은 불변이나 무시무종이라고 소극적으로 밖에 말할 수 없음, 인간의 유한한 인식 능력은 영원에 대해 인식할 수 없음

․ 영속은 시간을 초월하지만 실재 시간의 무한성을 전제하므로 정신을 통해 인식 가능

․ 감각을 넘어서는 것으로 감각은 현재적인 것, 개별적인 것에 구속되는 마음의 분산

2. 마음의 분산과 집중

- 영원은 시간의 분열적 양상을 갖지 않음, 현재로만 있는 단적인 존재

- 영원에의 길은 분산과 반대되는 길, 마음의 집중을 의미, 일자에로의 마음의 집중

- 마음의 집중은 어떻게 가능한가?

․ 정신의 집중이란 인간적 사유의 단념으로서 신을 향한 열렬한 기구

․ 정신을 모아 기구하는 신앙을 통해 어느 순간 인간 정신은 무인 과거와 미래를 여의고 존재 자체인 신의 나라, 영원한 지혜에 부딪힐 수 있음

․ 인간은 영원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 인간 정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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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합 : 세계의회인가, 제국주의의 도구인가?

철학/가치론연습 2008. 6. 27. 12:58

United Nations: ’World Parliament’ or Tool of Imperialism?, by Robin Clapp 
국제 연합 : ‘세계 의회’ 인가 제국주의의 도구인가?, by Robin Clapp
Chinaworker, Thu, 12 Jul 2007.

간단요약============================================================================================
이글은 현재의 국제연합, 즉 UN이 세계의 의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아니면, 미국이라는 제국주의국가의 도구로서만 기능하고 있는 가를 다양한 사례와 논증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한마디로 UN은 세계의회, 세계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세계를 기만하고 있으며, 미국을 도와 전 세계의 제국주의를 꿈꾸는 쓰레기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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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s United Nations boasts 192 member states, an annual budget of $4.19 billion. Since 1989 China has deployed over 7,000 troops and policemen to UN ’peace-keeping’ missions – from the Congo to Haiti.]

[오늘날 국제 연합은 192개의 동맹국, 41억 9000만 달러의 연간 예산을 자랑한다. 1989 이래로 중국은 국제 연합 '평화유지' 사절단에  7,000명 이상의 군대와 경찰관들을 배치하고 있다. - 콩고에서 아이티 섬까지. ]

from The Socialist (weekly paper of the CWI in England & Wales),
사회주의자로부터 (영국 & 웨일스의 주간지 CWI)

Despite the failure of the United Nations (UN) since its inception to prevent and resolve wars and conflicts, and its inability to eradicate crushing poverty and prevent climate change on a world scale, many (including those on the political left during last year’s Lebanon war), continue to promote it as a ’world parliament’. But the UN is beholden to the world’s major capitalist powers and cannot play an independent role. Only socialism could provide a framework for genuine internationalism.
UN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UN이 시작된 이래로 전쟁과 갈등을 예방하고 해결하고, 극심한 가난을 뿌리째 뽑고, 세계적인 규모의 기후 변화를 예방하는 것에 대한 UN의 무능력은 많이 있다 (작년 레바논 전쟁동안 정치적으로 남겨진 그들을 포함하여),  UN은 ‘세계 의회’로서 그것을 진행하기를 계속한다. 그러나 UN은 세계의 주요 자본가 세력에 신세를 지고 있고 독립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오직 사회주의만이 참된 국제주의를 위한 틀을 제공할 수 있다.

Just two months after the United States dropped atomic bombs on Japan bringing the Second World War to an end at the cost of 120,000 civilian lives, 51 countries agreed on 24 October 1945 to ratify the Charter giving birth to the United Nations. Unveiling an emblem showing the world in the ’olive branches of peace’, the Charter proclaimed the intention of member states to strive for friendly relations between nations, maintenance of world peace, the elimination of poverty, disease and illiteracy and the principles of justice, human dignity and the well-being of all people.
 일본이 가져온 세계 2차 대전을 끝내기 위해  120,000명의 시민들의 생명을 대가로 하였던,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지 불과 2개월 후에 51개의 국가는 1945년 10월 24일 UN의 헌장 탄생의 비준에 대하여 동의했다.  세계에  ‘평화의 올리브 가지’ 상징을 보여주는 것을 시작으로, 헌장은 국가간에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애쓰고, 세계 평화의 유지를 위해 애쓰고, 빈곤, 질병 그리고 문맹의 제거를 위해 애쓰고, 정의의 원칙을 위해 애쓰고, 인간의 존엄성과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애쓰는 회원국의 목적을 선언했다.

Over 60 years have passed since these honeyed words gave hope to war-shattered men and women that a future based on peace and prosperity might at last be built. But these decades have witnessed the growth of an unprecedented wealth gap between rich and poor, the displacement of millions of people forced to flee from war and ethnic cleansing, the threat of fiendish new weapons of mass destruction, the spread of international terrorism, an HIV epidemic that has stricken 2.3 million children and hardly a day of peace across the planet.

이 달콤한 말들이 전쟁으로 산산이 부서진 남자와 여자에게 평화와 번영에 기초한 미래가 마침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었던 이래로 60년 이상이 흘렀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목격되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유례없는 부의 차이의 증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바꾸어 놓는 강제된 전쟁과 인종 청소로부터의 달아남, 잔인한 새로운 대량 살상 무기의 위협, 국제 테러의 확산, 230만 명의 아이를 병에 걸리게 한 HIV 전염병, 그리고 평화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일은 하루도 없었다.

Today the UN boasts 192 member states, an annual budget of $4.19 billion and specialised agencies such as the Children Fund (UNICEF) and the World Food Programme (WFP). Other agencies carry out work relating to specific fields such as trade, communications, transport, agriculture and development.

오늘날, UN은 192개의 동맹국, 41억 9000만 달러의 연간 예산 그리고 아동기금(UNICEF)과 세계식량계획(WFP)과 같은 전문화된 기관을 자랑한다. 다른 기관은 무역, 통신, 운송, 농업 그리고 발달과 같은 특정 분야에 관련이 있는 연구를 수행한다.

Little influence
힘이 없는 영향력

Yet despite its expertise in providing aid and humanitarian assistance, like its forerunner the hapless League of Nations, the UN is at best essentially reactive, unable to independently and decisively stamp its influence upon events. This is not accidental. It cannot be an effective 'world parliament' nor ’world peacekeeper’ when its policies and actions are determined by the interests of the main imperialist powers, especially the US ruling class. Since 1945 the United States has been the dominant force in the UN. In the Korean War of 1950-1953 fought under the United Nations Joint Command, 90% of all army personnel, 93% of air power and 86% of naval power came from the US.

그러나 원조와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하는 전문성에도 불구하고, 그 전신단체인 불행한 국가연맹과 마찬가지로, UN은 본질적으로 기껏해야 수동적이고 중대사건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독립적이고 결정적으로 행사할 수 없다. 이렇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UN은 효과적인 ‘세계국회’도 아니고 ‘세계 평화 유지자’도 아니다. UN유엔의 정책과 활동들은 주요 제국주의 세력들 특히 미국의 지배계층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므로, 1945년 이래로 미국은 유엔에서 지배세력이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유엔공동군이 참전한 한국 전쟁 시, 공동 군중 육군의 90%, 공군의 93%, 해군의 86%가 미국 출신이었다.

Washington is supposed to provide 22% of the UN budget, but has often withheld huge sums owed in order to force compliance with its wishes. These arrears currently stand at $1.3 billion. The five permanent members of the UN Security Council - the US, Britain, France, Russia and China - each possess the power of veto, which means that decisions taken by that body can be blocked by any one. Any spheres of influence enjoyed by these countries is thus protected.

워싱턴은 국제 연합 예산의 22%를 제공할 것으로 추측되지만, 자주 거대한 금액을 지불할 의무를 보류한다. 그것이 바라는 대로 힘에 순종하기 위해, 이 분담금 체납은 현재 13억 달러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중국― 각각 veto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체에 의해 선택된 결정이 누군가에 의해서 막힐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국가들이 즐겨왔던 영향력의 어느 영역이던지 그리하여 보호를 받는다.

For instance, the UN intervened in the Biafra war in Nigeria in the 1960s but did nothing when US-ally Indonesia annexed East Timor in 1975. The UN remained tight lipped when China annexed Tibet, looked the other way when US President Nixon blasted neutral Cambodia and Laos during the Vietnam War and more recently carried on without comment during 1994-1996 while Russia conducted a vicious repression against Chechyna. None of the major powers will tolerate their fundamental interests being challenged by the UN. When rival states follow divergent paths, the UN is paralysed.

예를 들면, UN이 1960년대에 나이지리아에서의 Biafra 전쟁에 개입하였지만 어떤 것도 하지 않았고, 미국의 동맹국 인도네시아가 1975년에 동티모르를 합병하였을 때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UN은 중국이 티베트를 합병하였을 때,  미국 대통령 닉슨이 베트남 전쟁 동안에 중립국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폭파하였을 때도 여전히 외면했다. 그리고 더욱 최근에는 비판 없이 계속해서 수행한다. 러시아가 1994-1996년 동안 Chechyna에 대해서 비난받을만한 진압을 하였던 동안에, UN에 의해 그들의 기본적인 권리가 도전받을 때 어떠한 주요국들도 참지 않을 것이다. 경쟁국들이 다른 길을 따를 때, UN은 쓸모없게 된다.

In a capitalist world based on the nation state and private ownership of property there can be no such thing as a stable ’international community’. Tony Blair blurted this out when he admitted in a rare moment of candour that nations act ”in their own self interest”, before hastily adding the qualification that ”our self-interest and our mutual interest are today inextricably woven together.”

자본가 세계에 기초한 민족 국가와 사유재산권에는 안정된 ‘국제 사회’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토니 블레어는 이것을 무심코 말했다. 그는 공평무사하게 잠깐 동안 인정했다.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연합의 행동을.  “우리의 자신의 이익과 우리의 서로의 이익은 오늘날 서로 풀 수 없게 짜여 있다.” 는 조건을 서둘러 더하기 전에.

Despite all the talk of morality and the integrity of international agreements, policy is decided by what is in the imperialist powers' own interests. A state's foreign policy is a continuation of its domestic policy. War and military actions are not fought to defend ideals, but undertaken to maintain and expand prestige, power and spheres of influence. To the victor comes the treasure.

국제적인 협약들의 도덕성과 성실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정책은 제국주의자 자신의 관심에 의해 결정된다. 국가의 외교 정책은 국내 정책의 연속이다. 전쟁과 군사 행동은 이상을 방어하기 위하여 싸우지 않지만, 권력의 세력, 권력 그리고 세력의 영역을 유지하고 확장할 의무를 지닌다. 승리자에게 보물이 온다.

Events in the last 15 years have begun however to open the eyes of millions of workers and youth not only to the impotence of the UN, but also the way that the big powers use it to legitimise their various economic and military crimes. America's military occupation of Iraq has severely undermined the perception of those who believed the UN was a genuinely independent arbiter between nations. The integrity of the UN has been dealt a grave blow, shattering that myth for millions. All the key world powers have interests in the Middle East and the surrounding region. Sometimes, as in the case of China and Russia, these interests are partly geographical. But this area is particularly vital for them because of oil.

최근 15년간의 사건들은 노동자들과 젊은이들 수백만 명에게 유엔의 무능뿐 아니라 강대국들이 경제적, 군사적 범죄 합리화를 위해 유엔을 이용한다는 것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미국의 이라크 무력 점령은 유엔이 국가들 사이에서 성실하게 독립적으로 중재한다고 믿던 사람들의 인식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심각한 타격을 다루는 유엔의 완전성은 수백만 명의 신화를 깨뜨렸다. 모든 핵심 세계열강들은 중동과 그 주변 지역에  관심을 가진다. 때로는 중국과 러시아 경우처럼, 이 관심들은 일부는 지역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특히 석유 때문에 그들에게 무척 중요하다.



Military superpower
군사상의 초강대국

Following the end of the Cold War a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the US believed itself to have recovered from the ’Vietnam syndrome’ – the military paralysis brought about by nightmares of its defeat in South East Asia. As an unrivalled military super power the US orchestrated a decisive military victory over Iraq after Saddam tried to annex Kuwait in 1991. Henceforth US imperialism thought it would have a new golden age, in which it would tolerate no objections to its strategic ambitions from other powers or the UN.

냉전의 종식과 소련의 붕괴에 뒤이어 미국은 ‘베트남 증후군’-남동 아시아에서의 패배의 악몽이 가져온 군사적 마비-에서 회복되었다고 믿었다. 무적의 군사적 초강대국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중대한 군사적 승리를 조정하였다. 1991년 사담이 쿠웨이트를 합병하려고 한 이후. 그리하여 미국 제국주의는 새로운 황금시기를 맞이했는데, 이 시대에 다른 강대국이나 유엔으로부터 자신의 전략적인 야심들에 대한 반대들을 참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After 9/11, in determination to demonstrate might against 'terrorism' and those countries making up the so-called ’axis of evil’, Bush and his neo-con advisors plotted the downfall of Iraqi president Saddam Hussein, an ally in the 1980s whom the US had funded when their preoccupation was to overthrow the Shiite regime of Khomeini in Iran. At that time, the west ensured that no action arose from the UN resolutions criticising Saddam’s use of chemical weapons against Iran and Iraqi Kurds. Iraq was already on its knees as a result of UN-imposed sanctions following the 1991 war. According to UNICEF, 500,000 children perished in the decade following that war due to shortages of medicine and health treatment. At the time the US Secretary of State, Madeleine Albright, infamously commented that ”we think the price is worth paying”.

9/11 이후 ‘테러리즘’과 그 국가들이 만든 소위 ‘악의 축’이라 불리는 국가들에 대항하는 군사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결정에서, 부시와 그의 네오콘 참모들은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실각을 음모로 꾸몄다. 1980년대에는 동맹으로 미국이 원조하였던,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이란의 호메이니의 Shiite(시아파) 정권을 전복하는 것이었을 때는. 당시에 서방은 이란과 이라크 쿠르드족에 대항하여 사담이 화학무기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유엔 결의안으로부터 아무 행동도 취해지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이라크는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1991년 전쟁 다음에 유엔이 부과한 제재의 결과로. UNICEF에 따르면, 전쟁이후 10년간 50만 명의 어린이들이 죽어갔다. 의료품과 건강 치료의 부족 때문에, 당시 미 국무장관 Madeleine Albright 는 파렴치한 의견을 말했다. “우리는 대가를 치를 만 했다고 생각한다.”. 고


It was alleged that Saddam still possessed weapons of mass destruction. At the end of 2002 the US obtained the passing of Resolution 1441 through the UN Security Council which demanded that Iraq fully comply with UN weapons inspectors. This however was merely a diplomatic ploy. The increasingly bellicose statements coming from Washington caused deep unease among the other major powers, with France and Germany outspokenly cautioning against hasty military action, hoping that containment might achieve ’regime change’ without war.

사담은 여전히 대량 살상 무기를 소유했다고 주장되었다. 2002년 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라크가 유엔의 무기사찰에 완전히 협조하기를 요구하는 1441결의안의 통과를 획득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외교적 책략이었다.
워싱턴으로부터 호전적인 진술이 점점 더 증가함에 따라 다른 주요 강국들 사이에  불안감이 깊어졌는데, 프랑스와 독일은 전쟁 없이 ‘정권교체’를 이루기를 바라는 경솔한 군사적 행동에 대해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Mass opposition to the war drums culminated in demonstrations of 30 million in 600 cities across the world on 15 February 2003. Workers marched demanding ’No war for oil’. The UN Security Council was split and there was widespread understanding that Bush, with faithful Blair in tow, was intent on either 'capturing' the UN and bending it to his purposes, or bypassing it. When the former tactic stalled, the US acted anyway, laying waste to Iraq in the guise of exporting democracy.
전쟁의 북소리에 대한 일반 대중의 반대는 2003년 2월 15일 전 세계적으로 600개의 도시의 3천만 명 사람들이 시위에서 정점에 달했다. 노동자들은 '석유를 위한 전쟁 반대'를 요구하며 행진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분열했다. 그리고 충실한 블레어와 한 패로 부시가 유엔을 장악하여 자기 목적대로 굴복시키거나 무시해버리거나 혹은 둘 다 였다고 다들 이해하고 있었다. 이전의 책략으로 시간을 끌면서, 미국은 어쨌든 행동한다. 이라크를 민주주의를 수출한다는 구실로 황폐화한다. 

Four years on, the situation is catastrophic and Bush is a chastened president. Over 650,000 Iraqis have perished, more than 4 million have fled their homes, 37,000 civilians are being detained and the chasm between ethnic and religious groups is widening as the big regional powers circle over resources like jostling vultures. A former senior US military official commented: ”Iraq's government is a mobile phone number that doesn’t answer. Iraq probably can't be fixed”. There is no easy exit strategy for US imperialism, despite deployment of extra troops and highly-publicised security surges. The entire Middle East has been further destabilised, with the UN envoy for Lebanon-Syria warning: ”Now there seems to be four epicentres of conflict in the region with their own dynamics, the Iraqi issue, the Iranian issues, the Syrian-Lebanon issues, and of course the heart of hearts, the Palestinian-Israeli issue”.

4년 연속 상황은 파국으로 갔고, 부시는 누그러진 대통령이다. 65만 명의 이라크 사람들이 죽어갔고, 4백만 명 이상이 그들의 집에서 달아났으며, 3만 7천명의 민간인이 억류되고, 인종적 종교적 집단 간의 차이는 더 커지고 있다. 떠미는 독수리 같이 커다란 지역적 세력들이 자원 위를 맴도는 것처럼. 전직 고위 미국 군대 관리는 말했다. "이라크 정부는 응답이 없는 휴대전화 번호이다. 이라크는 아마 고정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쉬운 탈출 전략은 없다.  추가군대의 배치와 안전의 증대가 고도로 공포되었어도. 전체 중동의 정권은 더더욱 불안정화 되었다. 유엔 특사가 레바논 -시리아 경고와 함께 말했다. : “자체의 역동성을 지닌 지역 갈등에는 4개의 진원지가 있는 것 같다, 이라크 문제, 이란 문제, 시리아-레바논 문제, 그리고 물론 핵심중 핵심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이다.”

After years of deriding and downplaying the significance of the UN, in desperation the Bush administration is expected to take the Iraq question back to the UN General Assembly in September, claiming belatedly that ”the UN has great expertise that is badly needed in Iraq”. The US plan is expected to call for involvement in overseeing Iraq’s full transition to a ’normal democratic state’.

UN의 중요성을 조롱하고 경시한 그 후, 필사적으로 부시 행정부는 9월의 유엔 총회에  이라크 문제를 다시 가져간 것으로 예상되었다.  "유엔은 이라크가 무척 필요로 하는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뒤늦게 주장하면서. 미국의 계획은 이라크가 ‘정상적인 민주 국가’로 완전 이행되는 것을 감독하는데 관여하도록 요청받을 것을 기대한다. 

In essence they would like blue-helmeted UN peacekeepers to take some of the bullets. But the only big change under UN control would be that, instead of domination by one occupying power, decisions would be taken collectively by the leading imperialist powers. Socialists argue that the real alternative to US occupation is the withdrawal of all foreign armies and the right of the Iraqi people to determine their own future.

본래 그들은 푸른 헬멧을 쓴 유엔 평화유지군이 총알 몇 개를 가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유엔 통제하의 유일한 큰 변화는 하나의 점유 세력에 의한 지배 대신 결정이 선도하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집단적으로 행해진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미국 점령의 현실의 대안은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와 이라크 국민들이 그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라고 주장한다.

Keeping the peace
평화를 소유하는 것

United Nations’ peacekeeping interventions are often controversial affairs and lay bare the UN’s inability to keep the peace when there is no peace to keep. The Security Council has been forced to explicitly accept responsibility for failing to prevent the 1994 genocide in Rwanda in which 800,000 people were killed. On the eve of the atrocities most of the 2,500 peacekeepers were withdrawn after the deaths of 10 Belgian soldiers, thereby sending a green light to the killers. Moreover much of the subsequent UN aid was channelled through former Rwandan government officials who controlled refugee camps in Congo. Many of these camp leaders were implicated in the campaign of genocide.

UN의 평화유지활동 개입은 종종 논쟁거리가 되는 사건이고 평화가 유지되지 않는 때에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것은 UN의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안전보장이사회는 80만 명이 죽은 1994년 르완다의 인종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책임을 명백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잔학사태가 일어나기 전날 밤에, 벨기에군인 10명의 죽음 이후 2500명의 평화 유지군 대부분이 철수함으로써, 학살자들에게는 파란 불이 켜진 것이다. 게다가 그 사태 이후의 유엔의 원조는 콩고에 있는 피난민수용소를 통제하던 과거 르완다 정부 공무원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이 수용소의 지도자 상당수가 인종 대량 학살사태에 연루되었다.

Similarly, the UN was widely criticised for rehabilitating the forces of the Khmer Rouge in Cambodia, even going so far as to provide them with funds for the 1993 election. This policy suited both the US and China, both of which wanted to shore up any opposition to Vietnam. Then there is the shame of Srebrenica in Bosnia in 1995, where Serb forces overran a so-called UN safe area, butchering 7,000 men and boys in Europe’s worst massacre since World War Two.
마찬가지로, 유엔은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군의 세력을 회복하게 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그들에게 1993년 선거 자금까지 제공해주었다. 이런 정책은 미국과 중국 모두에 적합 했는데, 그 두 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반대가 더욱 확산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1995년 보스니아에서 발생한 스레브레니차 치욕사건을 들 수 있는데,  세르비아 군대가 소위 유엔안전지대라 불렸던 스레브레니차에 침입해 7천명의 남자와 소년들을 죽였으니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잔인한 대량학살 이었다.

Then UN Secretary General, Kofi Annan, later wrung his hands and concluded that ”peacekeepers must never again be deployed into an environment in which there is no ceasefire or peace agreement”. In a sick postscript, the perpetrators of this massacre, Bosnian-Serb leader Karadzic and General Mladic are still in hiding, having thwarted the UN’s attempts to bring them before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at The Hague.

그 후 유엔 사무총장 Kofi Annan은 후에 손을 쥐어짜며 결론을 내렸다. "평화유지군은 휴전협정이나 평화협정이 맺어지지 않은 곳에 다시는 배치하여서는 안 된다"  가슴 아픈 후기지만, 이 대량 학살의 주범들인 보스니안 -세르비아 지도자 Karadzic 과d General Mladic 장군은 아직도 숨어있다. 그들을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세우려는 유엔의 시도를 방해하면서.


Working class
노동자 계급

As humanitarian crises multiply today, the UN is still often confined to the fringes.
인도주의적 위기들이 증가하는 오늘날, 유엔은 여전히 주변에 머물러 있다.

Savage fighting between ethnic African rebels and pro-government Janjaweed militia in Sudan’s vast western Darfur region has led to 200,000 deaths since 2003. A beleaguered 7,000 strong African Union force has been unable to stop the fighting and only now does it seem possible that UN troops will be permitted to enter the arena to try and uphold the Darfur Peace Agreement signed a year ago.

수단의 아프리카 민족 반역자와 비정부군 Janjaweed (잔자위드) 민병대 사이의 맹렬한 싸움은 수단의 광대한 서부 Darfur(다이푸르) 지역에서 2003년 이후 20만 명을 죽게 했다. 포위된 7천명의 아프리카 연합군은 그 싸움을 그만두기가 불가능했고 요즈음에서야 유엔군이 그 지역에 진입을 허용 받아 1년 전 서명된  Darfur 평화협정을 시도 및 지원할 것이다.

The impasse in Israel-Palestine is one of the clearest examples of the UN's inability to resolve complex crises. Despite first proposing a two-state solution in 1947, today the situation seems more intractable than ever.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난국은 복잡한 위기 해결에 있어 유엔의 무능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예중의 하나이다. 1947년에 양국의 첫 제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상황은 이전보다 더욱 처치 곤란해졌다.

In 1967 the UN drew up its famous Resolution 242 calling upon Israel to return the Palestinian occupied territories taken in the Six Day war. Nothing happened. In 1974 the UN General Assembly reaffirmed in grandiloquent terms the inalienable rights of the Palestinian people to self-determination, national independence and sovereignty, and to return to the homeland from which they had been deposed in successive waves since 1947. Now the UN pursues again a vision of two states, Israel and Palestine, living side by side within secure and recognised borders. But what forces can translate these words into deeds? Not the representatives of the world’s imperialist powers and Israeli capitalism.

1967년에 유엔은 유명한 242 결의안을 내놓았다. 이스라엘에게 6일 전쟁에서 점령된 지역들을 팔레스타인에게 돌라주라고 요청하는. 그러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1974년에 유엔 총회는 장황한 말을 써가며 재확인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인 자결권, 국가의 독립과 주권, 그리고 1947년 이래 계속된 풍파로 쫓겨난 고향땅으로 돌아가도록 재확인 했다. 지금 유엔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개의 국가가 안전하고 확정된 경계선 안에서 협력하는 이상을 또 다시 추구한다. 그러나 어떤 세력이 이 언어들을 행동으로 바꿀 수 있을까? 세계의 제국주의 세력과 이스라엘 자본주의의 대표자들은 할 수 없다.

The outgoing UN Middle East envoy Alvaro de Soto has castigated the role of the US. ”There is a seeming reflex, in any given situation where the UN is to take a position, to ask first how Israel or Washington will react rather than what is the right position to take.”
퇴임한 유엔 중동 특사 Alvaro de Soto는 미국의 역할을 혹평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던 간에 UN이 취하는 그럴듯한 반사 작용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인가 묻기보다, 먼저 이스라엘이나 워싱턴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The UN's reputation is at a particularly low point after being sidelined in the Iraq war. The growth of the anti-capitalist movement, World Social Forums and the outpouring of aid from the pockets of millions of ordinary people following the Tsunami in 2005 all underline a growing struggle to refashion our planet and to build links across continents that can challenge the hegemony of the capitalist class.

UN의 평판은 이라크 전쟁에서 방관자로 존재한 이후에 특히 최저 수준이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성장, 세계 사회 포럼과 2005년의 쓰나미(지진성 해일) 이후 보통 사람들 수백만 명의 주머니로부터 쇄도한 도움은 모두 투쟁의 증가를 강조한다. 우리의 지구를 개조하고 자본주의 계급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는 대륙 횡단 연결 고리를 건설하기위한.

The struggle against the disastrous effects of climate change has ignited worldwide movements. Climate change is a global phenomenon requiring a global solution. Harmful gas emissions in the US grew a staggering 18% between 1990 and 2004 and remain the highest in the world in per capita terms. It is the dominant economic agencies – the World Bank, IMF, World Trade Organization and World Economic Forum - all of which serve the interests of the rich and the oligarchs, that are standing in the way of producing a climate change treaty that can reduce global greenhouse gas emissions by 80% before 2050.
기후 변화의 끔찍한 결과에 대항하는 투쟁은 범세계적인 운동에 불을 붙였다. 기후 변화는 전 세계적 해결을 요구하는 전 지구적 현상이다. 미국의 유해가스 방출은 1990년과 2004년 사이에 오락가락하며 18% 성장을 했고, 1인당 전 세계 최고이다. 그것은 지배적인 경제 기관들로 -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 세계경제포럼 - 모두 부유층과 소수의 독재자의 이익에 봉사하고, 2050년 이전까지 80%의 세계적인 온실 가스 배출량을 감소시킬 수 있는 기후 변화 조약을 만드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The UN may threaten Iran with new sanctions if it continues to defy demands to stop uranium enrichment and can wave resolutions at North Korea unless it closes down its nuclear facilities. At the same time the capitalist UN has no mechanism to tell the big powers how to behave, as it is controlled by them. To really change the world and protect it for future generations means abolishing capitalism. That is the job of the working class acting internationally. Then, and only then, will we have a real uniting of peoples across the planet.
유엔은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무시하면 새로운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북한이 핵시설을 폐쇄하지 않는 한 결의안을 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자인 유엔은 강대국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기 때문에 강대국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할 아무런 메커니즘이 없다, 진짜로 세계를 변화시키고 미래 세대를 보호하려면 자본주의를 폐기해야 한다. 그것이 국제적으로 행동하는 노동계급의 일이다. 그 때, 오직 그때만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진짜 연합하게 될 것이다.

UN admits to failing in the fight against poverty
UN은 빈곤에 대한 투쟁에서 실패하는 것에 동의한다.

At the United Nations in 2000, eight Millennium Development Goals (MDGs) were agreed by 147 countries. These range from halving extreme poverty to halting the spread of HIV/AIDS and providing universal primary education, all by the target date of 2015. However, a recent progress report published by the UN indicates that these MDGs will not be met for sub-Saharan Africa – the poorest region of the world. And worldwide, despite some progress, other MDGs are falling short.

2000년, 유엔에서 8개 밀레니엄 발전 목표에 147개국이 동의했다. 이것들은 극빈을 반으로 줄이는 것부터 HIV/AIDS 바이러스의 확산 저지 및 보편적 초등교육 제공, 이 모든 것을 목표년도인 2015년까지 해내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유엔이 출판한 최근의 중간보고서는 지적한다. 이 MDGs가 세계의 최빈곤지역인 사하라 아프리카 이남에서는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범세계적으로 약간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다른 MDGs가 부족하다.

In summary, the UN report states:
요약하여 유엔 보고서는 진술한다. :

- In sub-Saharan Africa one in 16 women still die from treatable and preventable complications of pregnancy and childbirth.
-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서는 16명당 1명의 여성이 여전히 죽는다. 임신과 출산의 치료할 수 있고 예방할 수 있는 합병증으로.

- The target of halving the proportion of underweight children will be missed by 30 million children
- 체중미달 아동의 비율을 반으로 줄이는 목표는 3천만 아동에 의해 이루지 못할 것이다.

- The number of people dying from AIDS worldwide increased to 2.9 million in 2006, and prevention measures are failing to keep pace with the growth of the epidemic.
- 전 세계적으로 AIDS로 죽는 사람 수는 2006년에는 29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예방법은 전염병의 증가와 보조를 맞추는데 실패하고 있다.

- Half the population of the developing world lack basic sanitation. The world is likely to miss the target by almost 600 million people.
- 개발도상국의 인구의 절반은 기본위생이 부족하다. 세계는 거의 6억 명의 사람들에 의해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것 같다.

- Widening income inequality is of particular concern in Eastern Asia, where the share of consumption of the poorest people declined dramatically between 1990 and 2004.
- 1990 and 2004. 심화된 소득불균형은 특히 동 아시아의 관심사인데, 동아시아에서는 는 극빈층 소비 비율이 1990년과 2004년 사이에 급격히 감소되었다.

- Most economies have failed to provide employment opportunities to their youth.
- 대부분의 경제는 젊은이들에게 고용기회를 제공하는데 실패했다.

- Emissions of carbon dioxide, the primary contributor to global climate change, rose from 23 billion metric tons in 1990 to 29 billion metric tons in 2004. Climate change is projected to have serious economic and social impacts, which will impede progress towards the MDGs.
- 이산화탄소의 방출은 지구 기후 변화의 주된 요인인데, 1990년 230억 톤에서 2004년 290억 톤으로 증가했다. 기후 변화는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은 MDGs 진행을 방해할 것이다.


With a masterly understatement the report says: “To some extent, these situations reflect the fact that the benefits of economic growth in the developing world have been unequally shared.”
교묘하게  발뺌하듯 보고서는 말한다. :" 다소 이 상황들은 개발도상국에서의 경제 성장의 혜택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사실을 반영한다." 

Therein lies the problem. The ruling classes in the most advanced capitalist countries (ACC), while pontificating on the plight of the world's poor, continue to pursue a ’neo-liberal’ agenda – ie privatization, ’free trade’ (while subsidising industries and exports in the ACC), labour market deregulation, unrestricted movement of capital, etc - that results in sucking wealth out of the poorest countries and swelling the assets of the big corporations and the super-rich.
거기에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ACC)의 지배계급들은, 세계의 가난의 곤경에 대해 점잔을 빼며 말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 즉 민영화, 지유무역, (자본주의 국가들이 기업들과 수출에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노동시장 비 규제,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 등등 - 이것은 최빈국의 부를 다 빨아먹고 거대 기업과 초 부유층의 재산을 부풀린다.

To facilitate such arrangements the world's big powers often cultivate local capitalists and corrupt politicians in the ex-colonial countries. And within the ACC the wealth gap between the social classes is also widening to an extent not seen for generations. The move towards equality will only happen when the workers and small farmers who produce the wealth take over the economy, nationally and internationally, and run it democratically under a socialist plan of production.
세계의 강대국들의 그러한 배치는 종종 지방에서 경작하던 자본가와 이전 식민지 국가의 부패한 정치가를 활성화한다. 그리고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 안에서도 사회 계층들끼리의 격차 또한 확대되고 있다. 세대를 거쳐 그 정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평등을 향한 움직임은 오직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들과 소농들이 국가적으로, 국제적으로 경제를 획득하여, 차지하여 생산의 사회주의적 계획 하에서 그것을 민주적으로 운영할 때 일어난다.

The aim of the super-rich capitalists is to accumulate more and more personal wealth. The objective of the majority under socialism will be to create a better life for humankind as a whole.
초 부유층 자본가들의 목적은 더 많은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하에서의 다수의 목적은 인류 전체를 위해 더 좋은 삶을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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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극화되어가는 세계의 발생

철학/가치론연습 2008. 6. 27. 12:53

The Rise of a Multipolar World

다극화한 세계의 증가

by Dilip Hiro


간단요약 ==========================================================================================
이 글은 언론, 경제, 군사 등 다방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라고 하는 미국에 대항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와 러시아,
중국 등의 나라의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현재 점점 쇠퇴해가고 있으며, 더이상 미국에게 계속 기대고 있다가는 같이 몰락의 길을 가고 말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역시 미국으로부터 멀어지고, 다른 나라와 협조하여 발전을 이룩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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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in 1991, the United States stood tall - militarily invincible, economically unrivalled, diplomatically uncontestable, and the dominating force on information channels worldwide. The next century was to be the true "American century," with the rest of the world molding itself in the image of the sole superpower.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에 따라 미국은 우뚝 서게 되었다. - 무적의 군사, 경제적으로 무적이고, 외교적으로 논쟁할 수 없고, 세계의 정보 채널을 지배하는 힘. 다음 세기는 진정으로 “미국의 세기” 가 될 것이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 그 자신이 유일한 초강대국의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Yet, with not even a decade of this century behind us, we are already witnessing the rise of a multipolar world in which new powers are challenging different aspects of American supremacy -- Russia and China in the forefront, with regional powers Venezuela and Iran forming the second rank. These emergent powers are primed to erode American hegemony, not confront it, singly or jointly.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선지 10년도 채 못 되어 우리들은 이미 새로운 세력이 미국 패권의 다른 측면에 도전하는 다극화 세계가 시작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 선두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있고, 지역 강대국 베네수엘라와 이란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떠오르는 세력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좀먹기 위해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단독으로 또는 서로 연대하여 준비한다.

How and why has the world evolved in this way so soon? The Bush administration's debacle in Iraq is certainly a major factor in this transformation, a classic example of an imperialist power, brimming with hubris, over-extending itself. To the relief of many -- in the U. S. and elsewhere -- the Iraq fiasco has demonstrated the striking limitations of power for the globe's highest-tech, most destructive military machine. In Iraq, Brent Scowcroft, national security adviser to two U.S. presidents, concedes in a recent op-ed, "We are being wrestled to a draw by opponents who are not even an organized state adversary."

어떻게 그리고 왜 세계는 이러한 방식으로 빠르게 발전되어 가는가?  이라크에서  부시 행정부의 패배는 오만으로 가득차고 그 자신이 지나치게 확대된 제국주의 권력의 고전적인 예로서 확실히 이 변화의 주요한 요인이다. 다수의 구조를 위해서 - 미국과 다른 곳에서 - 이라크 실패는 세계 최고 기술의 파괴적인 군사무기에 의한 힘에 의한 공격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라크에서, 2명의 미국 대통령의 국가 안보 보좌관이었던 Brent Scowcroft는 최근 신문의 특집기사에서 시인했다. "우리는 심지어 국가 수준도 안 되는 반대자들에 의해 끌려가며 싸우고 있다.”

The invasion and subsequent disastrous occupation of Iraq and the mismanaged military campaign in Afghanistan have crippled the credibility of the United States. The scandals at Abu Ghraib prison in Iraq and Guantanamo in Cuba, along with the widely publicized murders of Iraqi civilians in Haditha, have badly tarnished America's moral self-image. In the latest opinion poll, even in a secular state and member of NATO like Turkey, only 9% of Turks have a "favorable view" of the U.S. (down from 52% just five years ago).

이라크를 침공했다가 재앙으로 변한 점령,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어설픈 군사 행동은 미국의 신용에 장애를 가져왔다. 이라크의 Abu Ghraib(아부 그레이브) 수용소와 쿠바의 Guantanamo(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스캔들, Haditha(하디타)의 이라크 민간인들의 널리 선전된 살인과 함께, 미국의 도덕적 자부심을 더럽힌다.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심지어 비종교적 국가이고, NATO의 멤버인 터키 같은 국가에서도, 터키사람의 오직 9 %만이 미국에 “호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5년 전 52 %에서부터 하락)

Yet there are other explanations -- unrelated to Washington's glaring misadventures -- for the current transformation in international affairs. These include, above all, the tightening market in oil and natural gas, which has enhanced the power of hydrocarbon-rich nations as never before; the rapid economic expansion of the mega-nations China and India; the transformation of China into the globe's leading manufacturing base; and the end of the Anglo-American duopoly in international television news.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설명들이 있다. ― 워싱턴의 지독한 불운과는 관계가 없다. - 국제적인 사건에서의 최근의 변화에는. 이것은 무엇보다 석유와 천연 가스의 긴축시장 문제를 포함한다. 석유가 풍부한 국가들은 전례 없이 힘이 커졌다. ;  중국과 인도 같은 인구대국이 급속한 경제 성장을 했고 ; 세계를 이끄는 제조업 기반이 된 중국의 변화 ; 그리고 국제적인 텔레비전 뉴스에서 미국과 영국의 독점 체제가 끝났다.

Many Channels, Diverse Perceptions
많은 Channel, 다양한 이해

During the 1991 Gulf War, only CNN and the BBC had correspondents in Baghdad. So the international TV audience, irrespective of its location, saw the conflict through their lenses. Twelve years later, when the Bush administration, backed by British Prime Minister Tony Blair, invaded Iraq, Al Jazeera Arabic broke this duopoly. It relayed images -- and facts -- that contradicted the Pentagon's presentation.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the world witnessed two versions of an ongoing war in real time. So credible was the Al Jazeera Arabic version that many television companies outside the Arabic-speaking world -- in Europe, Asia and Latin America -- showed its clips.

1991년 걸프 전 때, 오직 CNN과 BBC만이 바그다드에 특파원을 두었다. 그래서 국제적인 TV 시청자는 장소에 관계없이 그들의 렌즈를 통하여 충돌을 보았다.  12 년뒤, 부시 행정부가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에 의해 후원을 받아 이라크에 침입하였을 때, 아랍의 Al Jazeera는 이 양대 강국의 패권을 깨뜨렸다. 그것은 이미지를 교체했다 - 그리고 사실들 - 미국 국방부의 발표를 반박했다. 사상 처음으로, 세계는 실시간으로 진행 중인 전쟁의 두 가지 버전을 목격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랍의 버전인 Al Jazeera였다. 아랍 밖의 텔레비전 회사들은 - 생생한 세계 - 유럽, 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알자지라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Though, in theory, the growth of cable television worldwide raised the prospect of ending the Anglo-American duopoly in 24-hour TV news, not much had happened due to the exorbitant cost of gathering and editing TV news. It was only the arrival of Al Jazeera English, funded by the hydrocarbon-rich emirate of Qatar -- with its declared policy of offering a global perspective from an Arab and Muslim angle -- that, in 2006, finally broke the long-established mold.

이론적으로 볼 때 케이블 텔레비전의 세계적인 성장은 24시간 TV news에서의 미국과 영국의 독점체제가 종료될 것이라는 전망을 낳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TV 뉴스의 자료를 모으고 편집하는 터무니없는 비용 때문에.  오직  Al Jazeera 영어방송만이  도착한다. 석유가 풍부한 카타르의 아랍에미리트의 기금으로. ― 그것은 세계적인 관점의 정책을 선언한다. 2006년, 비로소 오랫동안 수립된 틀을 깨뜨렸다. 

Soon France 24 came on the air, broadcasting in English and French from a French viewpoint, followed in mid-2007 by the English-language Press TV, which aimed to provide an Iranian perspective. Russia was next in line for 24-hour TV news in English for the global audience. Meanwhile, spurred by Venezuelan President Hugo Chavez, Telesur, a pan-Latin-American TV channel based in Caracas, began competing with CNN in Spanish for a mass audience.

곧이어 프랑스 24가 영어와 불어로 프랑스의 시각에서 방송을 하기 시작했으며 , 그것에 뒤이어 2007년 중반에 Press TV가 영어 방송을 하였다. 이란 사람의 관점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러시아도 뒤를 이어 전 세계 관객을 위한 24시간 TV뉴스를 영어로 하였다. 한편, 베네수엘라 대통령 Hugo Chavez에 의해 박차가 가해진 Caracas에 위치한 pan-Latin-American TV 채널인 텔레수르는 일반대중을 위한 스페인어 방송으로 CNN과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As with Qatar, so with Russia and Venezuela, the funding for these TV news ventures has come from soaring national hydrocarbon incomes -- a factor draining American hegemony not just in imagery but in reality.

카타르처럼, 러시아와 베네수엘라는 이들 TV 뉴스 벤처사업을 위해 자금을 조달한다.  치솟는 석유 수입을 통해 - 미국인의 헤게모니를 줄이려는 원인이다.  단지 이미지만이 아니라 실제로.

Russia, an Energy Superpower
러시아, 에너지 강대국

Under President Vladimir Putin, Russia has more than recovered from the economic chaos that followe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in 1991. After effectively renationalizing the energy industry through state-controlled corporations, he began deploying its economic clout to further Russia's foreign policy interests.

Vladimir Putin 대통령 때,  러시아는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에 따른 경제적인 혼란으로부터 회복되었다. 국가의 지배를 받는 회사를 통한 에너지 산업의 효과적인 국영화 이후에, 그는 경제적인 영향력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외교 정책 이익을 위해.

In 2005, Russia overtook the United States, becoming the second largest oil producer in the world. Its oil income now amounts to $679 million a day. European countries dependent on imported Russian oil now include Hungary, Poland, Germany, and even Britain.

2005년, 러시아는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석유 생산국으로 떠오르면서 미국을 따라잡았다. 석유 수입은 현재 하루에 6억 7900만 달러에 달한다.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 석유를 수입하는데 의존한다. 현재 헝가리, 폴란드, 독일은 물론 영국까지 포함돼있다. 

Russia is also the largest producer of natural gas on the planet, with three-fifths of its gas exports going to the 27-member European Union (EU). Bulgaria, Estonia, Finland, and Slovakia get 100% of their natural gas from Russia; Turkey, 66%; Poland, 58%; Germany 41%; and France 25%. Gazprom, the biggest natural gas enterprise on Earth, has established stakes in sixteen EU countries. In 2006, the Kremlin's foreign reserves stood at $315 billion, up from a paltry $12 billion in 1999. Little wonder that, in July 2006 on the eve of the G8 summit in St Petersburg, Putin rejected an energy charter proposed by the Western leaders.

러시아는 또한 천연가스의 가장 큰 생산자이다.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가스 중 5분의 3이 27 곳의 EU 회원국 27개국에 수출된다.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그리고 슬로바키아는 러시아로부터 그들의 천연가스의 100 %를 얻는다. 터키는 66 %, 폴란드는 58 %, 독일은 41%, 프랑스는 25 %를 수입한다. 지구에서 가장 큰 천연가스 회사인 Gazprom(가스프롬)은 16개의 EU 국가에 회사를 설립했다.  2006년에, 크렘린 궁의 외환 보유액은 3150억 달러로, 1999년에 얼마 안 되는 120억 달러에서 급증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2006년 7월 G8 회담의 전날, 푸틴은 서부 지도자들에 의해 제안된 에너지 헌장을 거절했던 것은 이상할게 없다. 

Soaring foreign-exchange reserves, new ballistic missiles, and closer links with a prospering China -- with which it conducted joint military exercises on China's Shandong Peninsula in August 2005 -- enabled Putin to deal with his American counterpart, President George W. Bush, as an equal, not mincing his words when appraising American policies.

급증하는 외환보유액, 새로운 탄도 미사일, 그리고 번영하는 중국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 그것은 2005년 8월 중국의 산둥 반도에서 연합 군사 훈련이 수행된 것과 함께 ― 강화된 푸틴은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와 동등하게 의논했다. 미국 정책을 평가할 때 기탄없이 말했다. 

"One country, the United States, has overstepped its national boundaries in every way," Putin told the 43rd Munich Trans-Atlantic conference on security policy in February 2007. "This is visible in the economic, political, cultural and educational policies it imposes on other nations...This is very dangerous."

 "미국은 모든 면에서 국경의 한계를 넘어섰다.” 푸틴은 2007년 2월에 열린 43번째 뮌헨 안보 정책 대서양 항로 동맹에서 말했다. "이것은 명백히 다른 국가의 경제, 정치, 문화와 교육 정책에 강제한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Condemning the concept of a "unipolar world," he added: "However one might embellish this term, at the end of the day it describes a scenario in which there is one center of authority, one center of force, one center of decision-making...It is a world in which there is one master, one sovereign. And this is pernicious." His views fell on receptive ears in the capitals of most Asian, African, and Latin American countries.
“단극 세계”의 개념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그는 덧붙였다. : "그러나 하나는 이 기간을 장식할지도 모른다. 결국 그것은 한 시나리오에서 묘사한다. 거기에는 하나의 권력의 중심, 하나의 힘의 중심, 하나의 정책결정의 중심이다. 그 세계에는 하나의 지도자가 있고, 하나의 주권자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유해하다.” 그의 견해는 대부분의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수도에서 경청했다. 

The changing relationship between Moscow and Washington was noted, among others, by analysts and policy-makers in the hydrocarbon-rich Persian Gulf region. Commenting on the visit that Putin paid to long-time U.S. allies Saudi Arabia and Qatar after the Munich conference, Abdel Aziz Sagar, chairman of the Gulf Research Center, wrote in the Doha-based newspaper The Peninsula that Russia and Gulf Arab countries, once rivals from opposite ideological camps, had found a common agenda of oil, anti-terrorism, and arms sales. "The altered focus takes place in a milieu where the Gulf countries are signaling their keenness to keep all geopolitical options open, reviewing the utility of the United States as the sole security guarantor, and contemplating a collective security mechanism that involves a host of international players."

모스크바와 워싱턴 사이의 관계의 변화, 그 중에서도 특히 석유가 풍부한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의 분석자와 정책입안자들에 의해 그러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페르시아 만 연구 센터의 의장 Abdel Aziz Sagar는 Munich 회담이 있은 후, 푸틴이 오랜 미국의 동맹국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 방문한 것에 대해 논평을 하면서, Doha(카타르의 수도)지역의 신문 The Peninsula에 기고하기를, 한 때 상반되는 이데올로기 진영의 적대국들이었던 러시아와 걸프 만의 아랍 국가들이 석유, 반테러주의, 무기판매에 대한 공동의제를 찾아냈다고 하였다. “초점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일체의 지정학적 선택 가능성들을 열어두려는 민감한 신호를 걸프 국가들이 보내는 분위기속에서, 유일한 안전보장국가 신분의 미국의 효용성을 검토하고 동시에 여러 활동국가들이 관련되는 집단안보체제를 재고하면서”

In April 2007, the Kremlin issued a major foreign policy document. "The myth about the unipolar world fell apart once and for all in Iraq," it stated. "A strong, more self-confident Russia has become an integral part of positive changes in the world."

2007년 4월, 크렘린 궁은 주요 외교 정책 문서를 발행하였다. "단극 세계의 신화는 이라크에서 한 번에 무너졌다” 그것은 언급했다. "강력하고, 자신감에 차있는 러시아는 세계의 긍정적인 변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The Kremlin's increasingly tense relations with Washington were in tune with Russian popular opinion. A poll taken during the run-up to the 2006 G8 summit revealed that 58% of Russians regarded America as an "unfriendly country." It has proved to be a trend. This July, for instance, Major Gen Alexandr Vladimirov told the mass circulation newspaper Komsolskya Pravada that war with the United States was a "possibility" in the next ten to fifteen years.

워싱턴과 크렘린 궁의 증대되는 긴장 관계는 러시아의 민중들의 의견과 조화된다. 2006 G8 정상회담이 열릴 당시의 여론조사는 러시아 국민들의 58 %가 미국을 “비우호적인 국가” 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추세가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예를 들면, 7월에 Gen Alexandr Vladimirov는 대량 발행 부수 신문 Komsolskya Pravada에서 미국과의 전쟁은 향후 10년에서 15 년 내에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Chavez Rides High
의기양양한 Chavez

Such sentiments resonated with Hugo Chavez. While visiting Moscow in June 2007, he urged Russians to return to the ideas of Vladimir Lenin, especially his anti-imperialism. "The Americans don't want Russia to keep rising," he said. "But Russia has risen again as a center of power, and we, the people of the world, need Russia to become stronger."

그러한 생각은 Hugo Chavez도 동조했다. 2007년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동안에, 그는  러시아 사람들이 Vladimir Lenin의 정신을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특히 그의 반제국주의를 "미국은 러시아가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권력의 중심으로 다시 떠올랐고, 그리고 우리들, 전 세계의 사람들은 러시아가 더 강해지는 것을 필요로 한다."

Chavez finalized a $1 billion deal to purchase five diesel submarines to defend Venezuela's oil-rich undersea shelf and thwart any possible future economic embargo imposed by Washington. By then, Venezuela had become the second largest buyer of Russian weaponry. (Algeria topped the list, another indication of a growing multipolarity in world affairs.) Venezuela acquired the distinction of being the first country to receive a license from Russia to manufacture the famed AK-47 assault rifle.

Chavez는 5개의 디젤 잠수함을 구입하기위해 10억 달러에 최종 계약을 했다. 베네수엘라의 석유가 풍부한 해저의 대륙붕을 지키고, 워싱턴이 미래의 경제적인 통상 정지를 강제하게 될 가능성에서 지키기 위해. 베네수엘라는 이미 러시아 무기를 가장 많이 사들이는 2번째로 고객이 되었다. (알제리는 리스트의 최상위를 차지했다. 이는 국제정치에서 성장하는 다극성의 또 다른 징조이다.) 베네수엘라는 러시아로부터 자격증을 받은 첫 번째 국가가 된 특별대우를 획득했다. 유명한 AK-47 돌격용 자동 소총을 제조하기 위한. 

By channeling some of his country's oil money to needy Venezuelans, Chavez broadened his base of support. Much to the chagrin of the Bush White House, he trounced his sole political rival, Manuel Rosales, in a December 2006 presidential contest with 61% of the vote. Equally humiliating to the Bush administration, Venezuela was, by then, giving more foreign aid to needy Latin American states than it was.

가난한 베네수엘라 사람들에게 그의 국가의 오일머니(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돈)의 몇몇 channeling을 하는 것으로, Chavez는 그의 지지 기반을 넓혔다. 백악관의 부시에게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의 유일한 정치적 경쟁자인 Manuel Rosales을 완승했다.  2006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61 % 득표하여. 부시 행정부에게 동등하게 굴욕적이다.  베네수엘라는 그때까지보다 가난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더 많은 대외 원조를 했다. 

Following his reelection, Chavez vigorously pursued the concept of forming an anti-imperialist alliance in Latin America as well as globally. He strengthened Venezuela's ties not only with such Latin countries as Bolivia, Cuba, Ecuador, Nicaragua, and debt-ridden Argentina, but also with Iran and Belarus.

재선 후, Chavez는 반제국주의 동맹을 형성하는 생각을 활발하게 추구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서.  그는 베네수엘라의 유대를 강화했다. 볼리비아, 쿠바, 에콰도르, 니카라과, 그리고 빚에 허덕이는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이란과 벨로루시(폴란드에 인접한 독립 국가 연합의 하나)와의 

By the time he arrived in Tehran from Moscow (via Minsk) in June 2007, the 180 economic and political accords his government had signed with Tehran were already yielding tangible results. Iranian-designed cars and tractors were coming off assembly lines in Venezuela. "[The] cooperation of independent countries like Iran and Venezuela has an effective role in defeating the policies of imperialism and saving nations," Chavez declared in Tehran.

그가 2007년 6월, 모스크바(Minsk을 통하여)로부터 테헤란에 도착했을 때까지, 180개 경제와 정치적 협정을 맺다. 그의 정부는 테헤란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미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란 사람이 디자인한 자동차와 트랙터가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란과 베네수엘라 같은 독립 국가들의 협력은 제국주의의 정책을 좌절시키고 여러 나라를 구하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Stuck in the quagmire of Iraq and lashed by the gusty winds of rocketing oil prices, the Bush administration finds its area of maneuver woefully limited when dealing with a rising hydrocarbon power. To the insults that Chavez keeps hurling at Bush, the American response has been vapid. The reason is the crippling dependence of the United States on imported petroleum which accounts for 60% of its total consumed. Venezuela is the fourth largest source of U.S imported oil after Canada, Mexico, and Saudi Arabia; and some refineries in the U.S are designed specifically to refine heavy Venezuelan oil.

이라크의 꼼짝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지고 치솟는 유가의 바람에 의해 공격당한 부시 행정부는 슬픔에 가득차서 제한된 책략의 지역을 찾는다. Chavez가 계속해서 부시에게 모욕을 하는데도 미국의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그 이유는 미국이 소비하는 석유의 60%를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는 캐나다, 멕시코,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뒤를 이어 미국이 가장 많이 석유를 수입하는 4번째 국가이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몇 개의 정제소는 특별히 베네수엘라의 중유를 정제한다.

In Chavez's scheme to undermine the "sole superpower," China has an important role. During an August 2006 visit to Beijing, his fourth in seven years, he announced that Venezuela would triple its oil exports to China to 500,000 barrels per day in three years, a jump that suited both sides. Chavez wants to diversify Venezuela's buyer base to reduce its reliance on exports to the U.S and China's leaders are keen to diversify their hydrocarbon imports away from the Middle East, where American influence remains strong.

“유일한 초강대국”에 타격을 주려는 Chavez의 구상에, 중국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06년 8월 7년 간 4번째에 해당하는 베이징 방문 동안, 그는 베네수엘라가 3년 내에 중국에 대한 석유 수출량을 현재보다 3배 많은 하루에 50만 배럴 까지 늘이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도약은 양측에 적합하다.  Chavez는 베네수엘라의 바이어의 기초를 다양화하기를 원했다. 미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그리고 중국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석유 수입을 다양화하고자 했다.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중동으로부터 떨어져. 

"The support of China is very important [to us] from the political and moral point of view," Chavez declared. Along with a joint refinery project, China agreed to build thirteen oil drilling platforms, supply eighteen oil tankers, and collaborate with the state-owned company, Petroleos de Venezuela S.A. (PdVSA), in exploring a new oilfield in the Orinoco Basin.

 "중국의 지원은 매우 중요하다.[우리에게]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Chavez는 선언했다. 공동 정제소 연구 과제와 더불어, 중국은 13개의 석유 시추탑을 건설학고 18개의 유조선을 공급하기로 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기업 S.A.(PdVSA)페데베사와 협력하기로 했다.   새로운 유전지역인 Orinoco Basin을 조사하는 것을 

China on a Stratospheric Trajectory
성층권 궤도위의 중국

So dramatic has been the growth of the state-run company PetroChina that, in mid-2007, it was second only to Exxon Mobil in its market value among energy corporations. Indeed, that year three Chinese companies made it onto the list of the world's ten most highly valued corporations. Only the U.S. had more with five. China's foreign reserves of over $1 trillion have now surpassed Japan's. With its gross domestic product soaring past Germany's, China ranks number three in the world economy.

중국의 국영 석유기업 페트로차이나의 성장도 극적이다.  2007년 중반, 페트로차이나는 전 세계 에너지 기업 중 시장가치로  Exxon Mobil에 이어 2위를 했다. 실제로, 그 해에 3개의 중국 회사들은 높은 가치를 가진 세계의 10대 회사의 리스트에 올랐다. 미국이 5개를 차지하고 있지만.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1조 달러를 넘어서며 지금 일본의 외환 보유액을 능가하였다. 국내총생산(GDP)도 독일을 능가하며, 중국은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 떠올랐다. 

In the diplomatic arena, Chinese leaders broke new ground in 1996 by sponsoring the 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 (SCO), consisting of four adjoining countries: Russia and the three former Soviet Socialist republics of Kazakhstan, Kyrgyzstan, and Tajikistan. The SCO started as a cooperative organization with a focus on countering drug-smuggling and terrorism. Later, the SCO invited Uzbekistan to join, even though it does not abut China. In 2003, the SCO broadened its scope by including regional economic cooperation in its charter. That, in turn, led it to grant observer status to Pakistan, India, and Mongolia -- all adjoining China -- and Iran which does not. When the U.S. applied for observer status, it was rejected, an embarrassing setback for Washington, which enjoyed such status at the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

외교 분야에서도, 중국 지도자들은  1996년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4개의 인접 국가들로 구성된 : 러시아와 이전의 소비에트 공화국의 세 나라 였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SCO는 마약 밀수와 테러에 대응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협력 기구로서 출발하였다. 이후, SCO는 우즈베키스탄이 참여하도록 초대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국과 인접하지 않았을지라도. 2003년, SCO는 그의 헌장에 지역 경제 협력기구의 성격이 포함되면서 범위가 확장되었다. 차례로 옵서버의 자격으로 중국과 인접한 파키스탄, 인도, 그리고 몽골과 중국과 인접하지 않은 이란까지 끌어들였다. 미국이 옵서버의 자격에 참여하기를 원했을 때, 그것은 거부당했다. 동남아시아연합(ASEAN)에서 옵서버 지위를 누려온 미국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사건이었다.

In early August 2007, on the eve of an SCO summit in the Kyrgyz capital of Bishkek, the group conducted its first joint military exercises, codenamed Peace Mission 2007, in the Russian Ural region of Chelyabinsk. "The SCO is destined to play a vital role in ensuring international security," said Ednan Karabayev, foreign minister of Kyrgyzstan.

2007년 8월 초,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SCO 정상회의가 열리기 전날, SCO가 수행하는 첫 번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평화임무 2007'이라는 코드명을 붙인. 러시아의 남부 첼랴빈스크 시에서. "SCO는 국제안보에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키르기스스탄의 에드난 카라바예프 외교장관은 말했다.
In late 2006, as the host of a China-Africa Forum in Beijing attended by leaders of 48 of 53 African nations, China left the U.S. woefully behind in the diplomatic race for that continent (and its hydrocarbon and other resources). In return for Africa's oil, iron ore, copper, and cotton, China sold low-priced goods to Africans, and assisted African counties in building or improving roads, railways, ports, hydro-electric dams, telecommunications systems, and schools. "The western approach of imposing its values and political system on other countries is not acceptable to China," said Africa specialist Wang Hongyi of the China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 "We focus on mutual development."

2006년 말,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아프리카 포럼에는 53개의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48개국의 지도자들이 참여했다. 중국이 미국을 비참하게 따돌렸다. 외교 경쟁에서(그리고 석유와 다른 자원들도). 아프리카의 석유, 철광, 구리, 면화 등을 수입하는 대가로 중국은 저가의 상품을 판매했고, 아프리카 국가들이 도로, 철도, 항만, 수력발전소, 통신설비, 학교 등을 건설하고 개량하는 사업에 협력했다. "다른 나라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가치와 정치체제를 강제하려는 서구적 접근방식은 중국이 용납할 수 없는 것" 이라고 중국의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아프리카 전문가로 일하는 왕홍이는 말했다. "우리는 상호발전을 초점을 맞추고 있다."
To reduce the cost of transporting petroleum from Africa and the Middle East, China began constructing a trans-Burma oil pipeline from the Bay of Bengal to its southern province of Yunan, thereby shortening the delivery distance now traveled by tankers. This undermined Washington's campaign to isolate Myanmar. (Earlier, Sudan, boycotted by Washington, had emerged as a leading supplier of African oil to China.) In addition, Chinese oil companies were competing fiercely with their Western counterparts in getting access to hydrocarbon reserves in Kazakhstan and Uzbekistan.

중국은 아프리카와 중동으로부터의 석유 수송비용을 줄이기 위해, 미얀마를 경유하는 석유 파이프라인 공사에 착수했다. 그 파이프라인은 미얀마의 남쪽 지방 유난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수송 거리를 줄여준다. 기존의 유조선을 이용한 방법보다. 이러한 사업은 미국이 미얀마를 고립시키려는 계획에 차질을 가져다주었다. (일찍이 미국에서 수입거부조치를 해왔던 수단은 중국에서는 아프리카의 선도적인 석유공급원으로 등장했다.) 게다가 중국의 석유 회사들은 서구 석유 회사들과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석유 자원 개발 대한 접근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China's oil diplomacy is putting the country on a collision course with the U.S. and Western Europe, which have imposed sanctions on some of the countries where China is doing business," comments William Mellor of Bloomberg News. The sentiment is echoed by the other side. "I see China and the U.S. coming into conflict over energy in the years ahead," says Jin Riguang, an oil-and-gas advisor to the Chinese government and a member of the Standing Committee of the Chinese People's Political Consultative Council.

“중국의 석유 외교는 미국과 서구 유럽과의 충돌을 야기 하고 있다. 미국과 서구 유럽은 중국과 비즈니스를 하는 몇몇 나라들에 제재를 가하고 있다.” Bloomberg 뉴스의 윌리엄 멜러가 말했다. 그런 경향은 다른 면에서도 엿보인다. “앞으로 중국과 미국은 에너지를 두고 충돌하게 될 것이다.” 중국 정부의 석유․가스부문 고문이자 중국인민정치자문회 상임위원회 회원인 진 리광이 말했다.

China's industrialization and modernization has spurred the modernization of its military as well. The test-firing of the country's first anti-satellite missile, which successfully destroyed a defunct Chinese weather satellite in January 2007, dramatically demonstrated its growing technological prowess. An alarmed Washington had already noted an 18% increase in China's 2007 defense budget. Attributing the rise to extra spending on missiles, electronic warfare, and other high-tech items, Liao Xilong, commander of the People's Liberation Army's general logistics department, said: "The present day world is no longer peaceful and to protect national security, stability and territorial integrity we must suitably increase spending on military modernization."

중국의 산업화와 현대화는 군사 현대화에도 역시 박차를 가했다.  2007년 1월 중국은 첫 번째 위성 공격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여, 자국의 기상 위성을 성공적으로 폭파시켰다. 이것은 중국의 무기 기술이 극적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놀란 미국은 이미 2007년 중국의 국방 예산이 18% 증가했음에 주목한 바 있다. 중국의 국방 예산 증가는 미사일, 전자 무기와 다른 하이테크 장비에 대한 지출 증가에 기인한다며, 인민해방군 일반 병참부 사령관 리야오 실롱은 말했다. “오늘날 세계는 더 이상 평화롭지 않으며 국가 안보, 안전과 영토보전을 위해서 우리는 적당한 수준으로 군현대화에 대한 지출을 증가시켜야한다.”

China's declared budget of $45 billion was a tiny fraction of the Pentagon's $459 billion one. Yet, in May 2007, a Pentagon report noted China's "rapid rise as a regional and economic power with global aspirations" and claimed that it was planning to project military farther afield from the Taiwan Straits into the Asia-Pacific region in preparation for possible conflicts over territory or resources.
중국의 공식 국방 예산은 450억 달러로 미국 펜타곤의 4590억 달러에 비하면 매우 적지만, 2007년 5월 미 국방부의 한 보고서는 ‘야심을 가진 중국의 지역적․ 경제적 파워의 급속한 성장’에 주목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대만 해협을 넘어 아시아-태평양에 이르는 지역에서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영토 또는 자원에 대한 군사적인 충돌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The Sole Superpower in the Sweep of History
역사를 휩쓴 유일한 초강대국
 
This disparate challenge to American global primacy stems as much from sharpening conflicts over natural resources, particularly oil and natural gas, as from ideological differences over democracy, American style, or human rights, as conceived and promoted by Western policy-makers. Perceptions about national (and imperial) identity and history are at stake as well.

이런 미국의 패권에 대한 도전은 차이를 보인다. 천연자원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를 둘러싼 충돌에서 더 첨예한 갈등을 보인다. 민주주의, 미국식, 또는 인권 같은 서구 정책결정자들의 상상과 달리. 국가에 관한 예외는 (그리고 제국의) 생각과는 달리 정체성과 역사성은 마찬가지로 stake하다.

It is noteworthy that Russian officials applauding the swift rise of post-Soviet Russia refer fondly to the pre-Bolshevik Revolution era when, according to them, Tsarist Russia was a Great Power. Equally, Chinese leaders remain proud of their country's long imperial past as unique among nations.
그것은 주목할 만하다. 러시아 공직자들이 과거 소련의 급속한 성장을 언급하며 박수를 보내면서 볼셰비키 혁명 이전 시대의 제정 러시아가 패권 국가였다는 것을 언급하는 걸 좋아했다는 것은. 동일하게, 중국의 지도자들도 여전히 중국이 오랜 기간 동안 지역 내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When viewed globally and in the great stretch of history, the notion of American exceptionalism that drove the neoconservatives to proclaim the 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 in the late 20th century -- adopted so wholeheartedly by the Bush administration in this one -- is nothing new. Other superpowers have been there before and they, too, have witnessed the loss of their prime position to rising powers.

세계적 시각으로 그리고 유구한 역사의 관점에서, 미국 예외론의 의견은 신보수주의로 하여금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미국의 시대를 위한 프로젝트를 주장하도록 만드는 - 부시 정부가 성실하게 채택한 -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른 초강대국들도 자국의 독보적인 지위가 감소하고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렇게 했었다.

No superpower in modern times has maintained its supremacy for more than several generations. And, however exceptional its leaders may have thought themselves, the United States, already clearly past its zenith, has no chance of becoming an exception to this age-old pattern of history.
현대사에서 어떠한 초강대국도 몇 세대를 거쳐 패권을 유지한 사례가 없다. 그러나 미국 지도자들은 자국은 예외라고 생각해왔다. 미국은 이미 분명히 쇠퇴하고 있고, 오랜 역사의 패턴에서 벗어나 예외적 존재가 될 가능성은 결코 없다.

Dilip Hiro is the author of Secrets and Lies: Operation "Iraqi Freedom" and, most recently, Blood of the Earth: The Battle for the World's Vanishing Oil Resources, both published by Nation Books.

Dilip Hiro는 『 비밀과 거짓말: “이라크 자유” 작전』과 최근 『지구의 혈액 : 고갈되는 석유자원을 둘러싼 세계전쟁』의 작가이다. Nation Books에서 두 권을 출간한.

This article first appeared on Tomdispatch.com, a weblog of the Nation Institute, which offers a steady flow of alternate sources, news, and opinion from Tom Engelhardt, long time editor in publishing, co-founder of the American Empire Project and author of Mission Unaccomplished (Nation Books), the first collection of Tomdispatch interviews.]

이 논설은 처음으로 국가가 설립한 웹로그 Tomdispatch.com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것은 다른 출처의 지속적인 흐름, 뉴스와 의견을 제공한다. Tom Engelhardt로부터, 오랫동안 출판사 편집자였고, American Empire Project의 공동설립자이며, Mission naccomplished (Nation Books)의 저자이고, Tomdispatch 인터뷰의 첫번째 collec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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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주의 철학과 존로크, 데이비드 흄의 인식론

철학/인식론 2008. 6. 15. 21:55

Empirical Philosophy

합리주의자들의 지식이론에 관한 의심 때문에, 많은 철학자들은 일반적인 인간 행동에 모순이 없을 지식이론을 밝히려고 해왔다. 주장된 실제 세계라고 말해지는 것들에 관한 절대적인 참된 지식을 찾아보는 대신에, 그들은 사실 어디서부터 우리의 지식을 얻어서 행동하는지, 그리고 실제적으로 소유했다는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거절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관한 완벽하고 확실한 지식을 따르는 것이 낫다고 본 이러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근원이며 기초인 감각적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였고, 감각적 경험에 의한 지식의 설명을 구성하려고 하였다.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지식을 설명하려했던 이러한 유형의 이론은 경험주의라고 불린다.

 

경험주의의 사회적 배경. 지식의 문제에 대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보통 지배적인 관심이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어 왔던 나라에서 발전해왔다. 이와 같이, 경험주의는 영국에서 우세한 지식이론이었고,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그리고 다양한 형식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지식사에서는 비주류의 역할을 가졌다. 경험주의 근대이론은 17세기 영국에서 철학적인 논쟁으로 성장하였고, 그때는 영국이 상업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급속히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세계를 조종하고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로버트 보일, 로버트 후크, 아이작 뉴튼과 같은 위대한 영국의 과학자들은 근대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세계의 기초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절대적 지식에 대한 낡은 탐구들이 무익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의 과학자들에 의해 알려진 정보들은 유용하고 중요해 보였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그 시대의 과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참된,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세계에 대한 가능한 가설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새로운 지식으로부터 생겨난 거대한 진보와 함께, 어떤 철학자들은 합리론자들의 연구를 버려야 했고, 실제적인 과학자들의 성공과 함께 지식 이론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17세기 영국에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몇몇 위대한 사상가들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당시에 활동 중인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새로운 지식에 어울린 지식 이론을 발견하려 하였다. 서로 다른 견해의 탐구 속에서 이 철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전문적인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을 좌절시키거나 세기를 넘어서 논쟁해 온 고전적인 문제를 염려하지 않는 실무가들이다. 제임스 1세 왕 아래에서 대법관을 지낸 프란시스 베이컨에서 시작하여, 영국에서 “새로운 철학”의 빛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론적인 세계의 상아탑을 제거하였고, 사람들은 실천적인 사건의 세계에서 그들의 명성을 얻었다.

 

JOHN LOCKE

베이컨은 17세기 영국에서 경험주의적 접근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였다. 17세기 후반에 직업이 보통 의사인, 존로크(1632-1704)는 그의 에세이 인간 이해에 대한 고찰에서 감각 경험에 의한 우리 지식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이 작업에서 로크는 우리의 지식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다가오며, 우리는 본유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체계적으로 그는 다양한 개념이나 관념의 출처나 그것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보여주려고 시도하였고, 노란색과 같은, 하나의 특성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인식에서 도시와 같은, 복잡하고 혼합된 특성에 이르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지식의 본성과 기원에 대해 고찰해보면서, 로크는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각종 사물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과 그들이 사물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류가 깨닫도록 크게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이해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그들이 어디까지를 도달할지, 그들이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수준에,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포기하는 곳에서, 만약 내가 그것에 대한 그 힘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러나 자기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을 하려고 하는 고달픈 사람의 분주한 마음이 더욱 신중해질 수 있는데 유용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오성의 한계가 최대 범위에 이르렀을 때 멈추고, 우리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 있다면 조용한 무지 속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만든다.

 

본유관념의 부정. 로크가 주장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고찰할 때, 우리는 어떤 본유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 경험에 독립적이거나 앞서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을 어떤 이유에 대한 원리나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전의 합리론자들이 제공하였던, 마음에 심어진 진리들에 대한 예들은 실제로 모든 인류에 알려진 것이 아니라고 로크는 주장했다. 어린이나 바보들은 증거 없이 주장된 본유적인 지식을 인식하지 못한다. 비록 그들이 그러한 것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진리들이 그들의 마음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관념은 마음에 심어진 것이고, 동시에 마음은 그것을 모르며, 결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이 인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

 

“백지” 대신에 로크는 만약 모두가 자신의 관찰과 경험을 잘 살펴보게 된다면, 그는 본래적으로 그의 마음은 단순히 “어떤 글자도 쓰여 있지 않고 어떤 관념도 없는 백지”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많은 것들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에 관해 누구든지 생각하거나 알고 있다. 우리 정보의 모든 것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나 우리 마음에 지난 간 것을 반성함으로써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로크에 따른다면, 우리지식의 두가지 원천이 있다. 하나가 외적감각이고, 다른 것이 내적감각이다.

 

어떤 것이든 그의 생각을 고찰해보자. 그리고 완전하게 그의 이해를 조사해보자. 그리고 나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독특한 생각들이 그의 감감적 대상 외에 존재하는지, 그의 반성의 대상으로서 생각되어진 마음의 작용인지에 대해 나에게 말해보게끔 하자.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지식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곳에 머물게 될 것이고, 그는 엄격한 관점을 취하고, 그의 마음에 어떤 관념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지만,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심어지더라도 아마도 무한하고 다양하게 혼합되어고 이해를 통해 확장했다.

 

단순관념. 그의 경험주의적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로크는 끈기있게 우리의 모든 정보가 내적감각이나 외적감각의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얻어지는지 보여주기 위해 시도하였다. 우리 지식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은 로크가 단순 관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다른 어떤 요소들과 섞이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한 단순관념의 예로, 로크는 설탕의 맛, 장미의 향기, 릴리의 순백이나 얼음 조각의 차가움에 대한 경험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단순 관념들은 오직 외적 감각과 내적감각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정신은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말한다. 비축하고, 반복하고 이러한 기본 관념들을 결합시키라고...

 

확실성. 로크의 오래된 논문 인간 오성론의 진행 중에 그는 얼마나 다양한 우리의 지식이 외적감각이나 내적감각의 서로 다른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지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를 훌륭하게 해냈다. 로크 이후로 경험주의 철학자들을 괴롭혀 왔던, 그가 직면한 기초적인 어려움은 우리의 관념에 보이는 것들이 실제인지, 그것이 우리의 지식의 일부분이라면, “실ㅔ와 사물의 존재들과 유사점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정신에 대단히 많은 관념들을 가지고 있고, 그 많은 관념들은 세계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인어, 유니콘, 그밖의 것 등등의 관념. 우리는, 실재로 생각되어질,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상상의 결과물일 뿐이거나 지나간 과거의 다양한 경험을 결합시키는 마음의 능력인 우리의 관념을 검토함으로써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로크의 대답은 지식의 성격과 실재성에 관한 이론의 작업을 가능케 한다.

 

제일성질과 제이성질. 로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외적감각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제일성질에 관한 관념과 제이성질에 관한 관념이다. 제일성질들은 우리 경험 속에서 경험되어진 사물에 속해져야 하는 것들이다. 그에 반해, 제이성질들은 사실, 사물 그 자체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제일 성질에 의해 우리 안에 다양한 외적감각을 만들어 내는 힘이다. 예를 들어 로크의 설명에 따르면, 크기와 형태는 제일성질인 반면에, 우리가 사물에서 보는 색깔은 아니다. 색깔은 확실한 조건의 결과이거나 우리가 그것들을 사물 안에 “Power"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우리가 색깔을 보는 것은 정신에 기반을 둔 행동이다. 우리가 실제적인 사물을 경험할 때, 사실 그 안에는 어떤 색깔도 있지 않다. 로크가 그리려고 했던 것은 과학자들이 사물에 가지고 있는 성질을 기록한, 사물의 과학적인 설명과 같은 사물의 일상적인 경험 사이의 것이다.

 

특별한 크기, 수, 형태와 눈이나 불의 일정한 움직임들은 어떤 사람의 감각이 그것들을 믿거나 믿지 않건 간에 실제로 그것들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실제 성질들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제로 그 물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 열, 흰색이나 차가움이 그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은 정신 안에 고통이나 아픔이 들어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의 감각을 제거해버려라. 미각이 맛은 아니며, 후각이 냄새는 아니다. 그리고 특별한 관념으로서의 모든 색깔, 맛, 향기와 소리들은 사라지고 없어지며 그것들의 원인을 변형시킨다. 즉, 크기, 형태와 부분의 움직임.

 

만약 제일성질이라고 부르며, 경험하고 사물에 속한 확실한 성질들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물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얻을 수 있는가? 로크는 우리가 몇 가지 단순한 관념들이 끊임없이 드러나 보이고, 결합하여 보이는 것을 관찰할 때, 우리는 이러한 관념들이 어느 사물에 속하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모든 성질들을 함께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 실체나 기체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금”이라고 부르는 함께 모인 성질들을 경험할 때(색깔, 단단함 그리고 다른 성질들), 로크는 우리가 이러한 성질들이 속해있거나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실체”나 “기체”가 있다고 가정하며, 이 모든 특성들의 배후에 있으며 그것들을 함께 모으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실체들 안에 속해 있는 성질들을 제외하고는 이 실체들이 무엇인지 하는 개념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실체에 관한 정확한 설명을 강요한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로크가 지적했듯이, 어떤 사람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경험의 다양한 요소들이 속해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는 것은 여전히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실체를 설명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의 형태를 분명히 하기위해 로크는 한 예를 비유로 설명하였다. “전에 얘기했듯이, 세상은 거대한 코끼리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고 말하는 인도인에게 그렇다면 코끼리는 어디에 의존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거대한 거북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시 등이 넓은 거북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라고 답했다.” 막연하고 애매한 기초보다는, 우리 경험의 다양한 요소들(제일성질의 경우에는 그 실체 안에 속해 있으며, 제이성질의 경우는 그것들이 원인이 되는)이 다른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

 

지식의 종류. 그러나 얼마나 많은 지식이 외적 감각이나 내적 감각을 통해서 얻을 수 있으며, 그리고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로크는 그의 논문 중 네 번째 책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작업을 시도하는데 기울였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우리 삶의 과정에서 경험을 통해서 얻은 다양한 관념을 처리한다. 지식 관념들이 어떤 측면에서 일치하든지 불일치는 지를 알기 위해서 관념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다. 만약 그것들이 동일하거나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한, 그 첫 번째 지식의 종류는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의 검증에 의해 성취되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흰색과 검은색에 대한 관념을 비교할 수 있다고 하자, 바로 그것들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안다. 우리 관념에 대한 두 번째 지식의 종류는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들이, 어떤 식으로든 함께 연관되어 있다는 발견이다. 관념에 대한 세 번째 지식의 종류는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의 공존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이 함께 속해있거나 함께 모여있는 것에 대한 발견이다. 이것은 보통 이러한 관념들이 일부분이거나 원인이 되거나, 같은 실체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인 지식의 형태는 어는 쪽이든 간에 우리 관념의 어떤 것이든 우리 마음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에 대한 발견이고, 만약 그것이, 그 관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라면,

(1) 동일성 또는 상이성 (2) 상이성 (3) 공존 또는 필연적 연결

(4) 현실적 존재

 

이러한 일치와 불일치의 4가지 종류들에 한해서, 내가 생각하건데,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는 모든 지식은 이 네 가지 종류에 한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관념들에 관해서 할 수 있는 이 모든 발견,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알거나 주장할 수 있는 모든 발견들은 다른 것과 같은지 다른 지이다. 그것이 그러하거나 그렇지 않든지 간에, 같은 주체 안에, 항상 서로 다른 관념과 함께 공존한다. 그것이나 어떤 다른 관념과 이러저러한 관계를 가지는지, 정신 밖에 있든지.

 

직관지식. 만약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서로 다른 지식의 종류라면, 로크에 의하면, 얼마나 많은 지식의 형태를 가질 수 있으며, 얼마나 확실해질 수 있을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확실성의 정도는 우리 지식이 직관일 때이다. 그것은 단순히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을 고찰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것에 관해서 참이라고 즉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 지식에 관한 것은 저항할 수 없으며, 밝은 빛과 같이, 강제적으로 그 자체를 즉각적으로 믿도록 하며, 마음이 관점, 의견으로 바뀌는 방식으로 바뀐다. 그리고 망설임, 의심이나 고찰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은 이윽고 분명한 빛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로크가 주장했듯이, 이 완전한 확실성의 형태는, “희색은 검지 않음이며,” “원은 삼각형이 아니고.” “3=2+1”과 같이 직관적으로 참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다.

 

증명. 불행하게도 관념들 사이에 일치와 불일치에 관한 모든 것들이 직관적으로 확실한 경우에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가 단지 확실한 관념들을 함께 고려할 때, 우리는 만약 그것들이 그러하거나 그렇지 않건 간에,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반드시,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떤 지식에 도달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우리가 비교하게 될 관념을 다른 관념과 연결해야한다. 이 과정이 로크가 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관념과 다른 관념의 일치나 불일치에 관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몇 가지 단계를 거칠 때, 우리는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거나 인식할 수 없다. 대신에 우리는 간접적으로만 진리를 알뿐이다. 그러나 로크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추론을 통해서 얻은 확실의 형태는 직관의 연속일 뿐이다. 증명 속에 각 단계는 마음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확실해 보인다면, 각 증명의 부분이 확실하다면, 그 결과도 또한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을 내버려두는 단계의 연속을 수행하거나 어떤 단계 사이에 확실하게 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흔한 경우가 있다. 로크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잘못 때문에 우리는 간단한 직관 속에 가지고 있는 같은 확실성의 정도와 함께 논증적인 지식에 의지할 수 없다.(?)>

 

감각적 인식. 엄격한 의미에서 로크는 직관과 논증만이 지식을 가져다 줄 수 있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고 인정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제외한다면, 확신의 또 다른 정도가 있다. 보증과 같은 것을 통해서가 아닌, 그것은 여전히 거의 모든 것에 의해 의존되어지고 있고, 따라서 지식의 정도로서 포함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로크가 부르는 “감각적”인식이다. 그것은 특별한 사물의 실제적 존재에 관해 우리에게 보증해주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회의주의에 의해 제기되었던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 경험의 일부분이 마음 밖에 존재하는 사물과 관련된다고 매우 확신한다. 반면에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비록 우리의 마음 밖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우리가 매순간 꿈을 꾸는 것이나 또 다른 이상한 가능성의 경우가 가능할지 모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진실이며, 우리의 마음 밖에 존재하는 사물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다는 점과 관련하여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확실성이 있다고 로크는 주장했다. 비록 직관이나 논증의 것보다 훨씬 취약할지라도 이러한 확실성의 형태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이다. 이것이 거짓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목적에는 충분하다.

이 세 가지 확실성이나 확신의 정도와 함께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인식이 가능할까? 첫째로 우리는 오직 관념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에 관한 방법들에 관해서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질 수 있고, 가지고 있는 관념들에 관해서, 로크는 우리의 지식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관념들이 일치할 것인지 불일치할 것인지에 관한 다양한 방법들을 아주 조금 직관이나 논증할 수 있다. 감각적 인식에 의해서, 우리는 관념의 일부인 우리의 외부 세계 존재가 즉각적으로 마음에 나타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뿐이다.

로크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어떤 두 개의 관념들이 동일한지 동일하지 않은지 직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관념의 공존에 관해서 우리의 지식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관념이 함께 속해있는 판단의 유일한 방식은 우리의 경험 안에서 일어나는 결합에 의해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관념에 관해 함께 발생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존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에 한해 제한되어진다. 로크가 지적했듯이 제일과 제이성질의 공존에 관련해서 특별한 경우이다. 왜냐하면, “어떤 제이성질과 그것에 의존하고 있는 제일성질 사이에 주목할 만한 연관점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이 사물이 노란색으로 보일 것이고, 맛이 달콤할 것이라는 등을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수학적인 관념에 관해서 서로 다른 관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해 많은 것들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지식의 거대한 체계가 발전되어 왔다. 로크는 수학적인 훈련 외에도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윤리학과 정치학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정부”, “정의”, “자유”와 같은 관념들 사이의 관계.

 

지식의 한계. 어떤 의미에서 아마도 대부분의 중요한 지식의 영역은 우리에게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사물의 실제 존재에 관해 알 수 있다는 것을 고찰할 때, 로크는 유일한 한가지 경우를 인정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에 관해서 직관적으로 확실할 수 있는 경우이다. 게다가 우리는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논증할 수 있다. 그밖의 것에 관해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드러나는 사물에만 이르는 감각적인 인식만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감각적 인식조차 가질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참 존재를 가지고 있든지 어떤지 간에 대해서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지식의 한계와 우리의 무지함 속의 나머지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존과 실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로크는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의미에서의 과학과 참된 정보는 물리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에 대해서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만약 우리의 모든 정보가 외적감각이나 내적감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경험적인 요소에 의해 제한되어 진다면, 우리는 경험을 통한 것을 제외한다면 어떤 성질들이 함께 발생하는지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이러한 성질들이 함께 발생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아내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것이 발생해야하고 다른 것들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에 관해 발전시킬 수 있다는 어떤 과학도 완전한 확실성이 항상 부족해야 하며, 이전에 경험되어진 성질들 사이의 관계에 관해 제한된 경험에 의존해야만 한다. 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행히도 항상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그러므로 로크의 경험주의 이론 안에서 지식은 우리의 일치되거나 그렇지 않은 다양한 관념들의 측면에서 한계지어질 것이다. 아마도 만약 우리가 경험에 의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관념들의 밖에서 진행되어지는 것에 관한 어떤 것도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될 것이다.

 

DAVID HUME

그러나 버클리 직후에 나타난 철학자들 중 한명은 그의 논리를 더욱 비참하고 충격적인 결론에 이르도록 추리한 결과 모든 경험주의 지식이론의 한계의 일부를 드러내도록 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회의주의자인 데이비드 흄, 그는 아마도 근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일 것이다. 흄은 에든버러 근처의 나인웰스에서 성장했고, 장시 동안 에든버러대학에 다녔으며, 15세에 그곳을 떠났다. 다양한 직업을 겪은 기박한 운명 후에, 그는 거대한 철학의 작업을 집필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그때에 그는 26살이었고, 그는 철학의 과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인성론>의 집필을 마쳤다. 대신에, 1739년 그것은 출판됐고, 흄이 비탄했듯이, “출판할 때부터 죽어서 나왔다.” 그리고 그의 동시대인들 중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어떤 큰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의 후기 작품 <인간 오성에 관한 논고>는 더욱 대중적인 형식으로 그의 관점을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흄은 자신이 원했던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는데 실패했다. 마침내 그의 정치적 집필이면서 대중적이었던 <영국의 역사>는 그를 유명하게 해주었고, 18세기 후반에 영어권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잘 알려졌다. 1760년 파리에서 그가 영국 대사관에서 비서관으로 일할 때, 영국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서 프랑스 지식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흄의 무신론적인 관점으로 인해 프랑스 회의주의와 “계몽주의” 선도자들에게 그는 영웅이었다. 영국으로 돌아와, 그는 잠시동안 국무차관으로 일하였고, 미국 식민지의 자유를 지지하도록 이끌었다. 흄은 종교와 정치에서의 정통이 아닌 견해로 높은 악명을 얻었고, 그가 은퇴할 때까지 그는 보통 “온화한 회의론자”와 “위대한 무신론자”로 알려졌다.

 

흄의 인식론. 흄의 철학은 두 가지 줄기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회의주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철학자들이 무엇이든지 어떤 것에 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극단적인 의심이다. 두 번째는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다하더라도, 지식이 무엇인지를 벗겨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확신은 그가 “인간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연구이다. 이 학문은 우리가 생각하고,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시도, 그리고 사건의 본성에 관해 그들이 행하는 것을 어떻게 믿도록 하게 되는 것에 관한 과정을 고찰하려고 하였다.

 

심리학. 흄의 위대한 철학적 작업, 그의 <인성론>은 너무나 성공적으로 물리적인 문제를 해결하였던 아이작 뉴튼의 과학적 방법을 통해 정신세계를 적용시킬 수 있음을 주장했다. 지식의 발전이라고 불리어지는 것들에 의해서 실제적인 과정들을 알아내기 위하여, 고찰되어야할 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특성, 그들의 심리이다. 심리학과 같은 우리가 가진 모든 과학들과 수학과 같은 학문분야는 인간 존재에 의해서 발견되어져 왔다. 흄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이해를 통해서 인간 존재가 소유한 지식의 본성에 대한 어떤 것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흄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성질을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우리의 경험의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아마도 위대한 가치일 수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일반적인 가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물리적 세계에 관한 과학의 발전 속에서 일찍이 해왔던 것이고 정신적 세계에서 더욱 중요한 결과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삶의 신중한 관찰로부터 과학에서의 실험을 모아야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건 속에서, 그들의 즐거움 속에서의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 세계의 공통된 과정 속에 드러나는 그것들을 취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실험들이 분별력 있게 수집되고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에 기초한 과학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 과학은 확실성 속에서 열등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인간 이해의 어떤 다른 것에 유용하도록 월등해져야 한다.

 

인상과 관념. 흄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인상과 관념이라는 두 가지 표제로 분류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이 두 가지 사이의 차이점은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힘과 활기의 정도”이다. 인상은 관념보다 더욱 강력하고 생생하다. 또한 단순한 인상들과 관념들, 그리고 복잡한 것들이 있다. 그 차이는 “구별이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 단순한 것이다. 이와 같이 푸르다는 성질의 이해는 단순한데 반해, 푸른 그림의 이해는 복잡하고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우리의 인상과 관념을 고찰할 때, 흄이 주장했듯이, 우리는 그것들 사이에 큰 유사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의 복잡한 관념들 중에 결코 인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인어와 같은 우리의 복잡한 관념들. 그러나 우리의 관념과 인상의 주의 깊은 정밀 검사를 통해서 우리의 단순 관념들은 우리의 단순 인상들과 같고, 인상이 항상 먼저 일어나는 모든 경우를 발견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오렌지와 같은 단순 성질과 함께하는 우리의 첫 인식은 강력하고 생생한 인상으로 발생하고 후에 동일한 관념과 같은 것으로 발생한다. 흄이 지적했던 것과 같이, 단순 인상들은 항상 단순 관념들에 선행한다는 이 법칙은 우리 경험의 총체 속에서 어떤 본유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며, 또한 경험으로부터 우리의 모든 관념이 나온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기억과 상상력. 더 나아가, 우리의 관념에 관해서 두 가지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는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고정된 질서나 순서 안에서 관념의 연속이 마음속에 보이는 것이다. 다른 능력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목적 안에서 우리의 관념을 조정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상상력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복 속에 관념이 다가온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가 하나의 관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또한 비슷한 생각이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것에 연속하는 생각이나, 그것과 원인이 되어 연관된 생각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패턴이 관념이 연합이다. 인간본성의 원리 중 하나인 이것은 끌어당김의 일종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놀란 말한 결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다수의, 그리고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지게 될 것이다.

 

흄의 인과율 분석. 관념의 연합에 대한 이 주장의 중요성은 흄이 우리의 지식과 특히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연구하였을 때 명백히 나타난다. 흄에 의하면, 지식은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들의 점검으로부터 모아질 수 있는 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만약 우리가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을 조사한다면, 그것들이 서로 비슷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것들이 서로 다른지 같은지,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어두운지 밝은지,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큰지 작은지를 즉각적으로 말할 수 있다.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들에 관해 즉각적인 조사를 통한 이 지식의 유형을 흄은 직관적이고 확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상상력 안의 마음에 주어진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들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을 고찰하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일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지식의 기초에 증명의 연속들이 더해져서, 우리는 수학과 같은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의 분과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들이 어떻게 서로 인과적으로 연관되어있는지 물었을 때, 매우 특이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이러한 유형의 지식은 우리의 견문의 거대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을 조사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건의 원인은 저 사건이야(예를 들어, 돌멩이가 유리창을 깨는 것을 보는 경험)”라고 흔히 말하는 상황을 고찰해본다면, 인상의 특성으로서, “원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제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인과적인 결과”라고 부르는 모든 경험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녹색과 같은 어떤 성질도 없다. 그리고 흄이 제안했듯이, 아마도 사건들 사이에 인과적 연결은 인상 속의 요소들 사이나, 연달아 일어나는 인상들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돌이 유리창을 깨는 그러한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유리창과 돌들이, 어떤 순간 돌 다음에 유리라는 접근성이 있다는 요소를 발견하며, 또한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기 전에 돌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사건의 접근성과 연속성을 제외한다면, 그밖에 어떤 것이 있는가? 우리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에 의한 어떤 특성이나 요소들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흄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두 가지 것들의 접근성일 뿐이며, 사건의 연속성일 뿐이다.

 

(원문 생략)

 

인과적으로 연결된 사건들에 관한 우리의 추론에서 중요한 요소는 직접적으로 보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부분처럼 보이거나 우리 인상 속에서 발견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지식의 경험주의적 이론이 허용했다면, 필연적 연관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어떤 인상이나 인상의 어떤 특성에서 끌어내야만 한다. 이 기초적인 관념의 근원은 단순히 인상을 고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위치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흄은 두 가지 뒤따르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처음 찾아냄으로써 그의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 “무슨 까닭은로 우리는 시작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물은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얘기하는가?” 그리고 (2) “어째서 우리는 그러한 특별한 원인들이 그런 특별한 결과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내리는가? 그리고 어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추론의 본성은 무엇이며, 제기할 수 있는 믿음의 본성은 무엇인가?”

 

원인의 문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단순한 대답은 조금 놀란 만하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건들이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존재하기 위해서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흄이 질문했듯이, 우리는 이것을 왜 믿는가? 원인적 원리를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직관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우리가 마음에 다양한 인상들과 관념들을 관조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인상들이나 관념들의 특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존재 -존재하기 위해 시작해야 하는 어떤 것- 에 대한 관념과 원인에 대한 관념들 사이에 어떤 연결도 없다. 이것은 모든 관념들이 구분되어진다는 사실을 통해서 보일 수 있고, 상상력을 통해서 분리되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사물의 관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관념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어째서 우리는 모든 사물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흄은 존로크와 같은 철학자들이 제공했던 다양한 논의들을 고찰하였다. 그는 인과관계의 주장을 증명하려 하였다. 흄은 그들의 증명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우려고 하였던 바로 그 주장을, 그 증명 어딘가에서 사실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로크의 주장에 대한 흄의 설명 속에서 그 증명은 만약 사물이 어떤 원인 없이 만들어졌다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어떤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작용을 생산함으로써 행위를 할 수 없다. 그러나 흄이 지적했듯이, 이 주장은 모든 사물들이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가정을 통해서만 진행될 수 있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여주는 것은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증명되어져야 할 것은 모든 것이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이다.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나타난 주장들을 고찰한 후에, 그들이 타당한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흄은 “그것은 지식이나 어떤 과학적 추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새롭게 만들어진 것에 대한 인과관계의 필연성의 견해를 이끌어내며, 그 견해는 반드시 관찰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의견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흄은 그의 다른 문제를 처음으로 해결할 필요를 있었다. 어째서 우리는 특별한 원인들은 특별한 결과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며, 어째서 우리는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것에 이르기까지의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인과적 분석의 요소들. 우리의 인과적 추론은 3가지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나타난 현상으로 또 다른 항목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연관된 사건의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 요소는 흄이 발견하고자 했던 연결이나 추론이다. 탐정이 시체를 발견하였을 때, -인상의 드러남- 그는 즉각적으로 죽음의 어떤 원인에 대한 관념을 추론한다. 만약 시체에 총알이 박혀있다면, 그 탐정은 즉각적으로 총알이 나온 총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인상에서부터 관념에 이르는, 이 추론의 과정을 흄이 분석하려고 하였다. 시체에는 총이 발사되었다는 어떠한 결과를 알려주는 사인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밖의 어떤 사람들 같이, 그 탐정은 총 대신에 수많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흄이 물어봤듯이, 비록 우리가 생각한 것을 즉각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원인을 보지 못하더라도, 어째서 우리는 소유한 경험을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가? 만약에 특별한 인상의 고찰로부터, 어떤 분명한 관념도 마음이라고 불리어지지는 않는다. 상상력은 누군가 가진 어떤 관념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어떤 사람은 총 대신에, 때마침 배의 맛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탐정이 만들었던 추론의 종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볼 때, 비록 어떤 특별한 관념을 생각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사실, 우리가 가진 인상의 “원인”이나 “결과”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피아노가 연주되고 있다는 확실한 소리를 들을 때, 비록 우리가 듣는 그 소리, 인상이라 하더라도, 피아노와 연주자의 시각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흄은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가 이러한 추론을 하느냐고 물었다. 추론을 통해서가 아닌, 인상으로부터는 어떤 필연적인 결론이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관념도 생각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 경험 안에 어떤 것에 기인해야 한다.

(흄의 원문 생략)

 

계속되는 연결. 흄에 따르면,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경험 속에서 서로 일어나는 두 가지의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연결된다. 이것이 과거에 종종 충분히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되어지게 하고, 이러한 것들 중 하나를 경험했을 대, 우리는 즉시 다른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추론한다. 그러나 그 문제를 더 나아가 설명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이 어째서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만약 합리적인 절차의 수단에 의한다면, 자연의 제일성과 같은 원리들이 진리이어야 한다는 것이 요구되며,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경우는 우리가 경험했었던 것과 비슷해야 하며, 자연의 흐름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이와 같이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와 같은, 과거 경험으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경험한 어떤 것을 가정하게 될 것이고, 현재에 일어나야만 하며, 그것이 현재 안에 계속되는 과거 속에서 발견하는 계속되는 연결이다.

 

불확실성. 여기서 흄은 가장 특이한 어떤 것을 발견하였다. 자연의 제일성의 원리는 우리가 즉각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세계 안에서, 진행되어지는 우리 추론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상들에 대한 거의 모든 해석들은 -소리, 색깔, 냄새 - 과거의 경험 속에서 계속적으로 연결되어지는 물질들의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들은 여전히 현재에도 연결되어 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모든 중요한 원리들 에 대한 증거를 묻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우리가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계속되는 연결들은 미래에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소금의 맛을 달 수 있고, 물은 탈 수도 있다. 경험의 관찰과 연구는 이러한 원리를 세우는데 도움을 줄 수 없으며,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자연이 불변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계속될 것이라고 확실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중력의 법칙과 같은 가장 잘 시험된 과학의 법칙조차도 자연의 제일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흄은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만약 그것들이 지구를 향해 내려간다고 할 때,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많은 사물들이 시험되어진다할지라도, 그 법칙이 미래에도 진리일 것이라는 것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인간 본성. 만약 자연의 제일성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너무나 기초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도, 그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것을 믿는가? 흄의 대답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관습이나 습관에 기인한 믿음 때문이며, 두 가지 인상들의 계속되는 결합을 경험한 후에, 그러한 결합이 그들의 경험 속에서 또 발생하여, 그들의 상상력 속에서 하나의 생각으로 이끌려지기 된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 인상과 연결되는 관념을 생각한다. 우리의 상상력은 자유롭기 때문에, 어떤 관념이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연관된 관념이 “강력하고 생생함”을 가진 생각이거나 믿어질 뿐이다. 이와 같이 내가 확실한 소리를 들을 때, 만약 내가 소망하고, 소망한 어떤 관념을 상상하게 된다면, 배의 맛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흄이 지적했듯이, 자연스럽게 나는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강력하고 생생함”을 가진 생각을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실제로 피아노를 치고 있다고 믿는데 반해, 배가 맛이 있다는 것을 믿지는 않는다. 어느 경우에 발생하는 믿음과 다른 것은 두 가지 관념들이 이해되어지는 서로 다른 방식일 분이다. 오직 연결된 관념들(과거의 경험 속에서 연결된 것)만이 강력하게 생각되어진다. 어떤 다른 관념들은 단순하게 생각되어질 것이다.

무엇이 어떤 관념들은 강력하고 생생하게 이해하도록 우리를 만드는 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상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는 언제나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적인 습관이나 관습이 있어야 하며, 마음은 관념이나 이 인상과 연결된 관념에 대한 생각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인상의 강력하고 생생함을 가진 생각에 이르도록 한다. 아무튼 인상의 힘은 관념에 흐르고 넘치며, 관념은 과거의 인상들과 계속적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즉각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는 세계 속에서 나아가는 우리의 추론은 어떤 합리적인 절차를 따른 것이 아니지만, 대신에 인간 본성의 기본적인 버릇 때문에 “경험을 가지지 않은 경우가 경험했던 것과 반드시 유사할 것이라고” 믿도록 한다. 우리는 그러한 경우가 될 것이라고 이해하지는 않지만, 차라리 확실한 관념을 자동적으로 믿도록 하거나 다른 것보다 더욱 강력하게 그것들을 이해하도록 하는 우리를 발견한다.

 

<흄의 원문 생략>

 

우리의 즉각적인 인상을 넘어서는 우리의 추론과 특별한 원인은 결과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결론은 우리 마음에 주어진 확실한 관념들에 의한 습관과 관습의 산물이며, 확실한 감정은 우리의 믿음을 구성하는 것에 밀접하다면, 확실만 사물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도록 이끄는 필연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인상들의 특성 중 하나가 아니다. 사건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어떤 필연성이나 힘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사건의 연속을 이해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몇 가지 비슷한 인상들의 연속의 경우를 보아왔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연결된 것으로서 사건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필연적인 연결에 대한 관념은 비슷한 사건들의 반복과 함께 발생하는 어떤 것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상들의 연속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흄이 지적했듯이, 만약 그 연속들이 비슷하다면, 우리는 매순간 같은 것을 대략 이해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경우의 사건들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수백 가지의 일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 경우들이 비슷하다면, 같은 성질들이 매순간 드러나야 한다. 같은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본 후에 처음에 보지 않았던, 새로운 어떤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 일어날지는 우리가 전에 했었던 것보다 서로 다른 정신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리의 믿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정신적인 자세이다.

 

<흄의 원문 생략>

 

원인의 부정. “필연성”은 인간 마음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에서 성질이나 사물의 특성이 아니다. 해머로 쳤을 때 유리창이 깨져야한다고 하는 것 같이, 존재한다고 믿는 필연성은, 흄이 주장했듯이, 확실한 인상을 경험했을 때 생각하도록 하고, 가장 강력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마음의 결정이며, 드러나는 인상과 함께 계속적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해머에 대한, 그리고 유리에 대한 인상을 고찰했을 때, 인상의 특성이나 어떤 부분이 유리가 깨진다고 하는 필연성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해머와 깨진 유리, 이 두 사건들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은 그것들에 관해 생각하는 마음의 방식에 놓여있으며, 그 사건들 자체에는 없는 것이다. 흄은 우리가 내적 경험과 동시에 일어나는 외적 경험을 합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비록 필연성은 오직 확실한 인상들에 대한 경험에 기반을 둔 정신적인 결정일지라도, 우리는 관찰되어진 사건 속에서 이 정신적인 사건을 위치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사건들과 함께 거기에 일어나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비록 우리의 마음 안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일 지라도

흄이 잘 깨달았듯이, 필연적 연관성에 대한 우리 관념에 대한 분석과 원인적 추론의 본성은 이상하고 믿기 힘든 소리를 들릴 것이다. “나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지만 나의 감정은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What! 원인의 결과는 마음의 결정에 달려있다!”




그리하여 흄의 결론은 과학에 대한 회의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것 자체가 부정되면 인간이 우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습관이나 관습은 일련의 관념이나 인상에 질서나 일반성을 부여하고, 경험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러저러한 조작을 통해 배치, 연결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지식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합니다.

마음의 습관, 관습이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비슷한 사람, 이런 사람들의 무리가 모여 “정상”정인 믿음의 체계를 이룬다고 흄은 주장합니다. 그에 반하는 사람을 비정상, 비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고요.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 중 누가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아무도 실질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무엇인가를 믿게 하는 힘입니다. 강제적인 충동, 이것이 어디서 오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은 내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흄의 인식론 인식론이었습니다. 읽느라 고생하셨네요. 중간 중간 줄이 쳐져 있는 부분은 번역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무언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 부분입니다.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요. 그리고 왜만하면 원문은 생략하였습니다. 본인이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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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학(唯識學) 중-전오식과 육식 칠식 팔식에 대하여-

철학 2008. 6. 15. 19:16

우리가, 우리들 주위를 '보고 느끼고 의식하는 모든 것'은 표상식(表象識)일뿐 실체로 인정할 만한 것이 없으며, 인식의 주체도 또한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각되는 그대로가 실재(實在)한다고 믿는 아집과 법집을 타파하고, 업식(業識)을 반야의 지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유식학(唯識學)의 근본취지이다.

유식(唯識)은 우리들이 외부의 경계를 알아보는 인식의 구조를 분석한 것으로 유식학의 근본취지에 접근하기 위한 학문적인 분석, 설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들 주위의 외부 경계를 안다는 것은 우선 보거나 듣거나 접촉함으로써 느끼게 되고, 그로부터 의식적인 분별이 일어나 나름의 판단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인식의 과정을 차례로 자세히 구분하여 표현·설명하는 것이 '전오식, 육식, 칠식, 팔식'이라 할 수 있다.

유식학(唯識學)의 심식론(心識論)에서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식별작용의 주체'와 그에 수반되는 '심리작용'으로 나눈다. 전자에는 팔식(八識)이 있고, 후자에 51가지 심소(心所)가 있다.

또한 존재구조면에서 팔식은 전식(轉識)과 근본식으로 나뉘어 설명되며, 전식은 아뢰야식의 등류습기(等流習氣)에서 전변(轉變) 생기(生起)된 식으로 오식(五識)·제6 의식(意識)·제7 말나식이 이에 해당된다.

근본식은 칠식의 근본이 되는 식으로 아뢰야식을 말한다. 근본식인 이 제8 아뢰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 제7 말나식을 제2 능변식(第二能變識), 의식(意識)-오식의 육식을 제3 능변식(第三能變識)이라 부른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표>로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 <표1> 식별작용의 주체인 '전오식 · 육식 · 칠식 · 팔식'의 관련내용.


육근
(根)

根의
능력

육경(六境)
인식 대상

육식
(六識)

팔식
(八識)

 

이해 도표

 

 

전의(轉依)가
되어진 지혜



1
 

안(眼)

시각

색경(色境)
색깔

①안식
(眼識)

오식

전오식
轉五識

*
표충식




식(識)

[요별]

제3 능변식
第三能變識



전식
轉識



->









->

유식학의
[四智]
전식

↓↓



성소작지
成所作智


 


1

2

3

4

5


2
 

이(耳)

청각

성경(聲境)
소리

②이식
(耳識)


3
 

비(鼻)

후각

향경(香境)
냄새

③비식
(鼻識)


4
 

설(舌)

미각

미경(味境)

④설식
(舌識)


5
 

신(身)

촉각

촉경(觸境)
촉감

⑤신식
(身識)


6
 

의(意)

법(法)

⑥의식
(意識)

제 6
의식

묘관찰지
妙觀察智

6


7
 

*


아뢰야식의 견분>

제7:말나식(末那識)
자아의식

의(意)
[사량]

제2 능변식
第二能變識

평등성지
平等性智

7


8
 

종자·신체·자연>

제8:아뢰야식
(阿賴耶識)무의식

심(心)
[集起]

초능변식
初能變識

근본식
根本識

대원경지
大圓鏡智

8

 

변화 내용:식(識) => 四智로

의타기성의 8식

> > 수행에 의하여 전의가 이루어짐 > >

유식학에서의
4가지 지혜


전오식(轉五識): 그냥 오식(五識)이라 부르기도 한다.

① 안식(眼識), ② 이식(耳識), ③ 비식(鼻識), ④ 설식(舌識), ⑤ 신식(身識)의 다섯가지 식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들이 외부 경계(인식대상)를 인식할 수 있는 감각 근(根)인 -①안(眼:눈), ②이(耳:귀), ③비(鼻:코), ④설(舌:혀), ⑤신(身:몸)의 - 각각의 근(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다섯 가지의 식(識: 인식대상∼각각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오식(五識)의 다섯 가지 식(識)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외부대상을 감각적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둘째
. 감각기관에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의 영역만을 고수한다.
   셋째
. 현재 대면하고 있는 대상을 인식하므로 시간적 공간적으로 한계성을 지닌다.
   넷째. 현량지(現量知)로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요별 할 뿐 사량분별이 가해지지 않는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오식은 우리가 외부경계를 대하며 처음 인식이 이루어지는 첫 식(識)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① 안식(眼識)은 '색깔'이다. '형체'다. ② 이식(耳識)은 '소리'다. ③ 비식(鼻識)은 '냄새'다. ④ 설식(舌識)은 '맛'이다. ⑤ 신식(身識)은 '접촉됨을 의식' 이 일어나는(-발생하는), 첫 순간의 식(識)을 말하는 것으로, 달리 표현하면 '각 영역(眼耳鼻舌身)에서의 첫 느낌(알아차림)'으로, 이어서 따라오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가해지지 않은 각각의 최초의 인식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다.(참고: 위 넷째)

※그런데 우리가 외부의 경계를 인식함에 있어, 따로따로 인식이 되지 않고 종합적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여섯 번째인 제6 '의식(意識)' 때문인 것이다.

이 의식(意識)이 오식(轉五識)의 내용을 오식(전오식의 각각의 인식)과 함께 동시에, 그리고 종합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인 것이다.

제6 의식(意識)의 작용은 이러한 작용 외에도 기억 · 회상 · 추리 · 상상 등등의 작용을 하고 있으며, 전오식(五識)과의 관계나 작용에 따라 영역을 세분해 볼 수 있다.
이해를 위해 <표>로 정리하면,

 참고 <표2> 전오식(五識)과의 관계나  의식(意識)의 작용

의식
意識

오구의식
五俱意識

오구동연의식
五俱同緣意識

※오식과 동시에 같은 인식대상을 요별

오구부동연의식
五俱不同緣意識

※함께 일어나지만 단독으로 대상인식작용을 함

불구의식
不俱意識

오후의식
五後意識

※오식의 인식활동 후에 생기(生起)하여 그 대상을 요별하는 작용

독두의식
獨頭意識

몽중의식(夢中意識):꿈속에서 작용
독산의식(獨散意識):산만하여 착각 환상
정중의식(定中意識):선정 속에서 유지


참고: 상기 <표2>의 내용 중 '오구 · 불구 · 독두'의식의 내용을 살펴보면,

불구의식(不俱意識): 오식과 함께 일어나지 않는 의식활동.
독두의식(獨頭意識):
외부세계와 관계없이 마음 안에서 단독으로 하는(움직이는) 의식활동으로 기억 · 회상 · 추리 · 예측 · 계획 · 집념 등을 말한다.
오구의식(五俱意識): 항상 오식과 구기(俱起)하여 그들의 인식내용을 종합적으로 요별(了別)하는 것.


위의 오구의식(五俱意識)의 경우 '오식의 인식내용이 현량지(現量知)'이므로 의식(意識)은 오식(五識)에 대하여 요별력(了別力)의 의지처 역할을 하는 분별의(分別依)가 되는 것이다.

오식(轉五識)이 제6식인 의식(意識)을 의지처로 삼듯이, 의식은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을 의지처로 삼으며, 말나식(末那識)은 또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의지처로 삼아 식별작용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요별(了別) 식인 '①안식(眼識)∼ 의식(意識)'은 표충식이며 제7말나식·제8아뢰야식은 심층식인 것이다. <참고 표1>

제6 의식(意識)의 의지처인 제7 말나식(末那識)은 제6 의식보다도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작용이 더 강하고 집요하다.
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을 대상으로 하여 자아(自我)로 집착하며, 이러한 작용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자아(自我) 집착작용의 집요함 때문에 항상 아치(我痴)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근본 번뇌가 항상 따라다니게 되어, 본능과도 같은 집요한 자기 집착성을 갖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제7 말나식의 의지처인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은 근본식이라 하며 '이숙식(異熟識) ·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도 한다. '아뢰야'는 저항 · 집착 · 무몰(無沒)의 뜻으로 아뢰야식에 종자를 저장하며, 제6말나식에 의해 상주불변의 자아로 착각 · 집착이 된다.

또한 이 아뢰야식의 '식(識)의 흐름'은 결코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근본식(根本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작용은
첫째. 모든 인식과 행위의 결과가 종자(種子)로서 저장되는 저장소 역할
둘째
. 윤회(輪廻)의 주체로, 저장되어 있던 등류습기(等流習氣)로부터 점차 '오식 · 의식 · 말나식'이 전변(轉變) 생기(生起)되어 팔식( ∼ )의 구조를 갖추게 되는 모체의 역할(役割).
셋째
. 종자(種子)와 신체의 작용을 유지하는 근원적(根源的)인 생명체로, '감각기관 · 신경계 · 순환계 등의 작용과 신진대사' 등 여러 가지 생리적인 기능들이 이 아뢰야식에 의해 유지된다.
넷째. 종자와 신체를 생리적으로 유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인식대상으로 하며, 또한 외부적으로 자연계[器世間]도 대상으로 인식작용을 한다. 꿈에 의한 예측 능력 등은 아뢰야식의 기능에
의한 것이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종자(저장된種子)는 다음의 여섯 가지 속성을 갖추어야 비로소 종자(種子)로서의 작용이 가능해 진다.[⇒육의(六義)]

찰나멸의(刹那滅義):
고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생기소멸(生起消滅)하면서 지속한다.
과구유의(果俱有義):
종자가 현행(現行)하여, 심리인식작용이 이루어지는 순간과 그 결과가 종자로서 훈습(熏習)되는 순간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항수전의(恒隨轉義):
'선 · 악'의 종자는 한 부류로 상속하여 전후 찰나에 성질이 바뀌거나 단멸되지 않는다.
성결정의(性決定義):
선·악·무기를 일으킬 힘이 결정되어져 있다. 선의 종자에서 악의 결과가, 또는 악의 종자에서 선의 결과가 현행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
대중연의(待衆緣義):
종자가 현행(現行)되려면 중연(衆緣-作意·根·境 등)과 화합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이시인과(異時因果) 관계는 이루어지더라도,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동시인과(同時因果)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인자과의(引自果義): 종자는 오직 자기의 결과만을 발생시킨다.


   -<참고>-

※등류습기(等流習氣): 계속되는 '인 · 과(因果)'로 쌓여 저장되는 기운.
※구기성(俱起性): 선·후·개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 동시에 일어남.
※종자(種子): 정신적 신체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뢰야식에 습기(習氣)의 형태로 이식(移植) 저장(貯藏)된 것.
※훈습(熏習): 제7말나식이 아뢰야식에 새로운 종자를 이식시키고, 본래 있는 종자를 생장(生長)케 하는 작용.
※현행(現行): 종자가 아뢰야식 속에서 순간순간 생멸하면서 성숙되어 생연(生緣)을 만나 생기(生起)한다. 이는 종자(種子)만의 힘으로는 안되며, 말나식과 아뢰야식 · 심리작용(心所) · 감각기관(根) · 환경요인(境)의 '유기적인 작용'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지금까지 식별작용의 주체(心王)인 '전오식 · 육식 · 칠식 · 팔식'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전식(轉識)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은 근본식(根本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의지하여 생기(生起)되는 것이며, 또한

첫째
오식(五識)이나 의식(意識)이 작용할 때는 말나식과 아뢰야식도 항상 함께 생기(生起)한다.[식(識)의 구기성(俱起性)]
둘째 팔식(八識)은 종자(種子)를 매개로 해서 상호인과(相互因果)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8식( ∼ 識)의 관계 속에서 제7말나식 · 제8아뢰야식은 의식의 영역에서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심층식이라 하며, ①안식∼ ⑥의식까지는 표충식으로 표현하며, 심층에서 표층으로 향하는(심층⇒표층) 방향에 삼능변식(三能變識)이 있고, 반대 방향인 표층에서 심층으로 향하는 방향(표층⇒심층)에 8식(八識)이 있게 됩니다.
또한 유식학(唯識學)의 '8식(八識)의 내용'은 석존(釋尊)이 설하신 심의식설(心意識說)에 위배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서, 초기불교 시대부터 설해진, 심(心) · 의(意) · 식(識)에서 아뢰야식을 심(心)에, 말나식(末那識)을 의(意)에, 육식을 식(識)에 각각 배당시켰으며, 이렇게 하여 인간의 정신현상과 성불의 과정을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식별작용의 주체'인 8식(心王)에 대하여 알아보았으며, 이에 수반되는 '심리작용'으로 51가지 심소(心所)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정신작용은 객관적으로 식별작용 외에 갖가지 심리작용이 교차됨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작용을 심소(心所)라 하며 51가지로 나뉘어 집니다.[⇒51心所]
심왕(心王: 8식)과 심소(心所: 51심소)는 구체적인 인식상황 속에서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하는 것은, 심왕(心王)은 대상의 전체적인 윤곽을 취하며, 심소(心所)가 구체적인 모습까지를 취함으로써 전체적인 대상의 인식이 가능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상에 대하여 고(苦) · 락(樂) · 사(捨) 등의 감정을 일으키고, 대상을 선택하며, 선(善) · 악(惡) 등의 업(業)을 짓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팔식(八識)과 51심소는 체(體)를 달리하며 상응(相應)하여 구기(俱起)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표3> 심소(心所)

심 소

51가지 → 종류 : 세부 내용

변행심소
邊行心所(5)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별경심소
別境心所(5)

욕구(欲)·승해(勝解)·기억(念)·집중(定)·혜(慧)

선 심소
善 心所(11)

믿음(信)·참(慙)·괴(愧)·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정진(勤)·경안(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불해(不害)

번뇌심소
煩惱心所(6)

탐욕(貪)·성냄(瞋)·어리석음(癡)·거만(慢)·의심(疑)·악견(惡見)

수번뇌심소
(20)
隨煩惱心所

분노(忿)·원한(恨)·덮음(부)·고뇌(惱)·질투(嫉)·인색()·속임()·아첨()·해(害)·방자함(×)·무참(無慙)·무괴(無愧)·들뜸()·혼침(昏沈)·불신(不信)·게으름(懈怠:해태)·방일(放逸)·실념(失念)·산란(散亂)·부정지(不正知)

부정심소
不定心所(4)

뉘우침(悔:회)·수면(眠:면)·심구(尋:심)·사찰(伺:사)

그러면 8식(八識: 心王)과 51심소(心所)의 상응관계를 살펴보면_(표3 참고)


☞ 아뢰야식(阿賴耶識)에는 '5변행심소(邊行心所)'가 상응하며,
☞ 말나식(末那識)에는 5변행심소, 4번뇌,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중에서 혼침 · 들뜸 · 불신 · 게으름 · 방일 · 실념 · 산란 · 부정지, 별경심소(別境心所) 중에서는 혜(慧) 심소의 '18심소(心所)'가 상응합니다.


☞ 의식(意識)에서는 '모든 심소(心所)'가 상응할 수 있으며,
☞ 오식(五識: 전오식)에는 5변행심소, 5별경심소, 선심소 11, 번뇌심소 중 무참 · 무괴 · 들뜸 · 혼침 · 불신 · 게으름 · 방일 · 실념 · 산란, 4부정심소(不定心所) 등 '34심소(心所)'가 상응을 합니다.

즉 우리들 정신세계는 식별작용의 주체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과 그에 상응하여 수반되는 51가지 심소(心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팔식(心王)은 역동적으로 작용하며, 개별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모두 함께 일어나며, 팔식은 종자를 매개로 상호 인과관계 속에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오식(五識)은 대면하는 대상에 따라, 하나 또는 여러 가지가 함께 일어나는데 반하여, 의식(意識)과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은 항상 함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지금까지 식별작용의 주체인 전오식 · 의식 · 말나식 · 아뢰야식의 내용을 서술하였으며, 이와 함께 수반되는 '심리작용'인 심소(心所)와 팔식과의 관계를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흔히 '집착과 미망의 세계를 사는 범부'로 표현되는 근본원인과, 이러한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우리들의 정신세계가, 어떻게 흐르는 가를 알아 보았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현상계 모든 것은 오직 표상식(表象識)일 뿐이다'

현상(인식한)세계는 식(識)이 대상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 표상식으로 존재할 뿐이고, 대상세계는 결코 식(識)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지각된 그대로 외부세계에 실재하지 않는 다는 '유식무경설(唯識無境說)의 내용과 함께

우리들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림에 있어 아집과 법집을 타파하고 업식을 반야의 지혜로 전환하고자 하는, -번뇌와 집착이 없는 심식(心識)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우리의 인식체계를 알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분한 내용입니다.

 <불자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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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얼리즘과 영화에 관한 테제 _ 가치론 연습

철학/가치론연습 2008. 6. 12. 15:16

Theses on realism and film, by Mike Wayne (***==ikj)

1 October 07,

International Socialism, Issue: 116

Theses on realism and film

by Mike Wayne

At the beginning of the film 28 Weeks Later Robert Carlyle’s character, Don, is holed up in a cottage with his wife and some other strangers, trying to survive as the Rage virus sweeps the UK, turning people into zombie-like flesh devouring razies. As we expect, the hideaway is discovered and attacked by said zombies. Don and his wife are separated as they run through the house in the ensuing chaos. She is trying to protect a young boy (not their own). Then they are briefly rejoined on opposite sides of a room. He tells her to leave the boy. She doesn’t. Suddenly the zombies invade the room and he flees, leaving her to what seems like certain death. Outside the cottage he starts running and looks back. He sees his wife at the window, banging on the glass. He keeps running.

영화 28주 후의 시작 부분에서 로버트 칼라일의 캐릭터, Don은 그의 아내와 다른 낯선 자들과 함께 숨어있었고, 살아 남기위해 시도하였다. 분노바이러스가 영국을 휩쓸자마자 사람들은 인간의 살을 게걸스럽게 먹는 미친 좀비로 변하여 갔다. 우리가 기대했듯이, 은신처는 발각되고 좀비라고 불리는 것들에게 공격당했다. Don과 그의 아내는 뒤이은 혼란 속에 집으로 도망가자마자 나뉘어졌다. 그녀는 어린 소년(그들의 자식이 아닌)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간단하게 방의 반대편에 다시 모였다. 그는 그녀에 소년을 떠나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갑자기 좀비들이 방으로 밀어닥치고, 그는 도망갔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그녀를 남겨두고, 오두막 밖으로 그는 도망가기 시작했고, 뒤를 돌아봤다. 그는 창문에서 유리를 두드리는 그의 아내를 보았다. 그는 계속 도망갔다.

This opening to the film is shocking and, we might say, accords with an initial but hopefully uncontroversial definition of realism. Realism in film requires a plausible range of character action and interaction within the specific circumstances depicted.

이 영화의 오프닝은 충격적이며, 우리는 말하게 될 것이다. 처음이지만 희망적이고 논쟁할 수 없는 리얼리즘의 정의와 일치한다고. 영화에서 리얼리즘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럴듯한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범위와 상호작용이 묘사된다.

From a materialist perspective all the key terms here flow from the “specific circumstances”—”range” (diversity), “character” (individuals with traits and motivation), “action” (agency) and “interaction” (how individuals relate to each other as the result of socialised behavioural norms). Thus the opening of 28 Weeks Later is “plausible” because we recognise that the solidarity of interpersonal love could simply shatter in a moment of barely imaginable terror.

유물론자의 견해에서 보면 모든 핵심적인 용어가 다음으로부터 나온다. “특별한 상황”- “범위”(다양성), “등장인물”(특성과 동기를 가진 개인들), “행동”(작용)과 “상호작용”(사회화되고 행동 양식화된 규범의 결과로서 어떻게 개인들이 서로 연관되는지). 그러므로 28주 후의 오프닝은 그럴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인관계의 연대적인 사랑이 겨우 상상할 수 있는 테러의 순간 속에서 간단하게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To add to the plausibility we also witness, in this opening scene, the old man who owns the cottage sacrificing himself so that his wife can live. But she in turn dies because she is not willing to leave him quickly enough to escape. Thus we have a range of actions contrasted with each other as well as different outcomes. This range of actions raises the issue for the audience of judgement and evaluation, to which we will return.

이 오프닝 신에서 우리는 그럴듯함이 가미된 것을 또 목격하게 되는데, 오두막을 소유한 노인은 그의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에 죽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충분히 탈출할 수 있는데도 그를 남겨두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결과만큼 각각 다른 대조를 이루는 행동의 범위를 가지고 있다. 이 행동의 범위는 관객에게 판단과 평가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But surely, some will say, the “specific circumstances” that drive the characters to act in such desperate ways, namely flesh eating crazies, is highly implausible. Doesn’t this compromise any claim the film might have to being “realistic”?

그러나 확실히,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그러한 절망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주인공을 몰고 가는 “특별한 상황”, 다시 말해 인간의 살을 먹는 좀비들이 있는 상황은 매우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이것은 영화가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어떤 주장과 타협할 수 있는가?

The initial definition of realism, given above, orients us towards what we might call the “referential” dimension of realism: how does this representation measure up to what we expect, or what a film might help us discover about the real world? But there is another dimension to the question of realism, inseparably tied up with the “referential” question. For the opening of the film is so shocking because the character who runs away, leaving his wife to certain death, is a film star, Robert Carlyle. He is the biggest star of this film, and the opening scenes set him up as “our” main character, surely the hero of the film. His action feels particularly realistic because it goes against our expectations of the “action” and “interaction” of the hero, expectations that have been shaped by mainstream, overwhelmingly Hollywood, cinema.

리얼리즘의 최초의 정의는, 우리에게 리얼리즘의 “지시적” 차원라고 부르게 될 것으로 향하도록 한다.(얼마나 이 표현이 우리가 기대한 것과 일치할 수 있겠는가? 영화가 실재세계에 관해 아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그러나 리얼리즘의 질문에 대한 또 다른 특성이 있다. 분리할 수 없는 “지시적” 질문에 얽매여 있다. 영화의 오프닝이 너무 충격적인 것은 확실히 죽게 될, 그녀의 아내를 두고 도망가는 주인공이 영화스타인 로버트 칼라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굉장한 스타이며, 오프닝 신에서 당연히 그를 우리 영화의 영웅인 중요 캐릭터로 세워졌다. 그의 행동은 특별하게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영웅의 “행동”과 “상호작용”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반대로 갔기 때문이다. 그 기대는 압도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주류에 의해 형성 지어진 것이다.

This introduces a very important second dimension to the realism debate. What we judge to be realistic is not just an assessment of how a film or scene relates to what we know of in the real world. Realism always involves an aesthetic judgement about how this vision of the real has been produced and how it relates to, or is in dialogue with, other representations. Realism is always in some sense an innovation, a break or some modification in the “audio-visual” toolkit of representation. It always stands in some relationship (which also includes borrowing and adapting) with other traditions and specific films, inviting acts of comparison.

이 소개는 리얼리즘 논쟁에 두 번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리얼리즘라고 판단하는 것은 실제 세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영화나 장면이 얼마만큼 연관되어 있느냐는 평가는 아니다. 리얼리즘은 언제나 실제에 대한 비전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와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미적 판단을 포함하거나 다른 표현들과의 논쟁에 놓여있다. 리얼리즘은 항상 어떤 의미에서 재현의 “시청각”도구 내에서의 혁신이고, 변경점이거나 어떤 변형이다. 그것은 언제나 비교할 만한 무언가를 끌어들이는 다른 전통과 특별한 영화와의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다.

But to return to the earlier question: can the generic framework of the horror film and the specific subset of the “zombie film” be described as “realistic” according to the definition of plausibility of “specific circumstances”?

그러나 초기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공포영화의 일반적인 구조와 “좀비영화”의 특별한 부분이 “특별한 상황”의 그럴듯함의 정의에 따라 리얼리즘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The answer is “yes”. Bu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eal world and the “specific circumstances” depicted (zombies) becomes even more highly mediated than in the case of the specific action of Carlyle leaving his wife. Realism as a film genre provides a pool of conventions transcending the individual film, conventions that provide a kind of playground for the imagination. The figure of the zombie is certainly fertile territory for a Marxist analysis of capitalism. Like many monsters in the horror genre, the zombie is ambiguously placed between victim and aggressor. It is the complete Other and yet strangely familiar (like film itself vis-a-vis the real), and this ambiguity opens up the possibility of a critique of social norms.

그 대답은 그렇다. 그러나 실제 세계와 “특별한 상황” 사이의 관계가 묘사했던 (좀비들), 아내를 남겨두는 칼라일의 특별한 행동의 경우에서보다 훨씬 더 고도로 매개되어있다. 영화장르로서의 리얼리즘은 독립영화를 초월하는 공동 관습의 저장고를 제공한다. 그 관습은 상상력의 넓은 영역을 제공한다. [좀비라는 인물은은 분명히 비옥한 토지이다. 자본주의의 맑스주의 분석가들에게.] 공포장르의 많은 괴물들 같이, 좀비는 애매모호하게 희생자와 공격자로 나타난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친숙하며(영화 스스로가 실재를 마주하는 것 같이), 그리고 이 애매성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비평의 가능성에 열려있다.

But more specifically, the zombie figure is a combination of both the masses and the ultimate commodity, where complete “thinghood” reigns. To be the “living dead” is the perfect image of life under capitalism. At this level, the “specific circumstances” of a fictional world do not at all have to correspond with our everyday notions of “the realistic”. The most fantastical settings/scenarios can function, as Marxist cultural theorist Fredric Jameson has said, allegorically in relation to the real. Real world dynamics and processes are converted into stories and images that manageably deal with and represent them.1 What are often highly abstract concepts, such as reification, are given concrete form (here “zombiefication”).

그러나 더욱 특별하게도, 좀비라는 인물은 물질과 최고의 상품의 결합물이고, 완벽한 “사물성”이 지배하는 곳이다. “살아있는 죽음”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 아래의 삶의 완전한 상상이다. 이 수준에서, 허구적 세계의 “특별한 상황”은 “사실적인 것”에 관한 우리의 모든 개념과 전혀 일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맑스주의 문화 이론가인 Fredric Jameson이 말했듯이, 대부분의 환상적인 설정/시나리오는 실재와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 세계의 역동성과 과정은 쉽게 처리할 수 있고 표현될 수 있는 이야기들과 상상으로 전환되어질 수 있다. 굉장히 고도화된 추상적 개념들, 사물화(物化)와 같은 것들은 구체화된 형태로 주어진다. (여기서는 “좀비화”)

This second dimension to realism, the representational dimension, immediately begins to intertwine with another. Representation stimulates our aesthetic judgements and evaluations but these in turn inevitably invoke cognitive and moral judgements (as well as provoking a response from our “feelings”, which we have a much less developed language for analysing). We are provoked into a series of judgements (moral and cognitive) by the way the representation of the failure of love and solidarity in 28 Weeks Later differs from other representations.

리얼리즘에 대한 이 두 번째 차원, 재현화된 차원은, 즉시 다른 것과 얽히어 시작된다. 구상은 우리의 미적 판단과 평가를 자극하지만 이것들은 다음에 불가피하게 지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을 호소한다. (우리의 “감정”으로부터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그 “감정”은 우리가 분석하기에는 말로서는 모자라다). [우리는 다른 표현과 차이가 나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의 연속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28주 후에서 사랑과 연대의 실패에 대한 표현과 그 방식에 의해]

If it had been any other character than the one played by the star, Robert Carlyle, then the force and persistence of our judgement of his actions would not have been so strong in subsequent scenes, when he is re-united with his children. Typically a character who does what this character does is marked within the narrative as simply “a coward” or “a baddy”. This simplifies our moral judgements because it abstracts the action from the “specific circumstances” (the grounds for a proper materialist understanding) and instead imputes a fixed quality intrinsic to the individual. The concrete experience which this film offers us, the viewer, and the process of reflection on this experience constitute the third dimension of realism.

[만약 그 스타, 로버트 칼라일이 연기했던 것보다 다른 어떤 성격이었다면, 그의 행동에 대한 우리 판단의 힘과 고집은 다음의 신에서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의 아이들과 다시 만났을 때.] 이러한 성격을 할 수 있었던 전형적인 캐릭터는 단순히 “겁쟁이”나 “악인”과 같은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내어졌다. 이 단순화는 우리의 윤리적 판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한 상황”(순수 유물론자들이 이해를 위한 근거)으로부터의 추상화된 행동이고, 대신에 개인들에게 본질적으로 고정된 특성을 전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관객인, 우리에게 제공하는 구체화된 경험과 이 경험에 대한 반성의 과정은 리얼리즘의 세 번째 차원을 구성한다.

It is crucially important to hold these three dimensions together in some sort of relationship: how this film relates to the real (the referential); how this film relates, as a mode of representation itself, to other representations (the representational); and how the viewer relates to this film, to the questions and problems it poses (the reflexive). These are the three “Rs” of realism.

어떤 종류의 관계 속에서 이 세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얼마나 이 영화가 실제와 관련 있는지(지시하고 있는 것); 스스로의 재현 양식으로서, 이 영화가 다른 재현에 대해서 얼마나 관련 있는지, (재현화); 그리고 관객이 이 영화에 얼마나 관련되는지, 이 영화가 주장하는 질문과 문제에 대해서 (반응성).> 이것들은 리얼리즘의 세 가지 “Rs"이다.

Realism and Film

리얼리즘과 영화

The question of “realism” has had a complicated relationship to the concept of naturalism within film theory and, to varying degrees, film practice. The concept of naturalism predates the emergence of cinema and, as an aesthetic term, was associated with mid-19th century literature and drama (eg Zola and Strindberg). It has a complicated relationship with the concept of realism not least because, like realism, “character and action were seen as affected or determined by environment, which especially in a social and social-physical sense had then to be accurately described as an essential element of any account of life”.

“리얼리즘”의 문제는 영화 역사 내에서 자연주의 개념과 변화하는 수준, 실습 영화와의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왔다. 자연주의의 개념은 영화의 발생보다 앞서며, 미적 언어로서, 19세기 중반 문화, 연극과 관련이 있다. (예, Zola, Strindberg) [자연주의는 리얼리즘 개념과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리얼리즘같이, “성격과 연기는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거나 결정이 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환경은 특별히 사회적이고, 사회-자연과학적인 의식 안에서 어떤 삶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되어져야 하는 것”]

From a Marxist perspective, however, “environment” is multi-levelled, and not all forces at work within an environment are necessarily immediately apparent. People’s actions cannot be understood as simply conditioned by their immediate circumstances. Yet the main basis for film’s claim on the real was often felt to be the camera’s capacity to provide a record of phenomena within their immediate environment. It was a record compellingly similar to the phenomenon it recorded and one which appeared to owe a lot to a mechanical automaticity that diminished the “distortions” of human subjectivity, so fitting in with the dominant, positivist, model of scientific enquiry. And as a record it could observe with a scientific accuracy that transcended the limits of the human eye, as in Eadweard Muybridge’s famous “horse in motion” photos.

그러나 맑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환경”은 다양한 차원이며, 환경 안에서 작용하는 모든 힘이 직접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의 행동은 그들의 직접적인 환경에 의해 간단하게 조건 지어진 것으로서 이해되어질 수 없다. 아직도 실제에 바탕을 둔 주요 영화의 기본 주장은 그들의 직접적인 환경 내에서의 현상들에 대한 기록을 제공하는 카메라의 역량이라고 종종 느껴질 수 있다. 그것은 기록된 현상에 대한 강제적이고 비슷한 기록이고, 인간의 주관성의 “왜곡”을 줄이려고 하는 기계적인 자동성에 많이 기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지배적이고 실증적인, 과학적 탐구에 너무도 적절하다. [그리고 기록으로서의 그것은 인간 눈의 한계를 초월하는 과학적인 정확성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유명한 “움직이는 말” 사진에서처럼.]

All this meant early debates about film inherited those that had accumulated around naturalism, but, confusingly, the term realism was universally applied because of film’s mimetic (imitative) power. Added to this, an often social democratic mode of detailed cinematic observation was extended to the working class in the aftermath of the Russian Revolution of 1917, which gave the “realist” form of the photographic image a real social content (from the New Objectivity movement in the Germany of the Weimar Republic to the Griersonian documentary and Mass Observation movements in the UK in the 1930s and 1940s).

영화가 그러한 것들을 물려받았다는 것에 관한 초기부터의 논쟁이 의미하는 모든 것은 자연주의 곳곳에서부터 축적되어져 왔지만, 혼란스럽게도, 리얼리즘의 용어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졌다. 그것은 영화의 모방의 힘 때문이다.[ 이것에 더해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의 여파 속에서, 세밀한 영화적인 관찰의 사회적 민주적인 양식은 노동자 계급에 확대되어졌다. 실제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사진 이미지의 리얼리즘적인 형태를 가져온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신즉물주의 움직임으로부터 1930년과 1940년대 영국에서 Griersonian documentary와 여론조사 운동에 이르기까지)

One Marxist theorist, associated mainly with literature, who tried to maintain a distinction between naturalism and realism was Georg Lukács. He charged naturalism with naturalising the status quo—treating it as a fact of nature—and missing the deeper (mediated) dynamics of social change going on under the surface of life. Obsessing with small mundane details drained of broader social significance, naturalism failed to select and arrange actively from all of life’s vast canvas the socially significant events and actions that could make sense of the world. Lukács even metaphorically associated these failings of literary naturalism with a particular “mechanical” medium: the “photographic reproduction of the immediately perceptible superfice of the external world”.4

주로 문학과 관련된 한 맑스주의 이론가인 Georg Lukács는 리얼리즘과 자연주의 사이의 구분을 주장하려 했었다. 그는 현상유지와 삶의 표면 아래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사회적 변화의 깊이를 놓치고 있는 자연주의를 책망하였다. [작고 평범하고 사소한 일에 사로잡힘으로써 더 넓은 의미의 사회적 의미를 고갈시키는 자연주의는 모든 삶의 다양한 무대로부터 활발하게 선택하고 조정하는 것을 실패했다. 세계에 대한 감각을 만들 수 있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들과 행동들의 무대] Lukács는 심지어 문학의 자연주의에 대한 이런 실패들이 특별한 “기계적인” 수단과 은유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특별한 “기계적인” 수단 : “외부 세계의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표면에 대한 사진의 재생산”

The film theorist who most eloquently articulated widespread cultural assumptions about the “realism” of the cinematographic and photographic image (Lukács’s perceptible external world) was Andre Bazin. He championed film-makers who put their faith in the capacity of the image to unfold the temporal and spatial relations of a scene without obtrusive editing or expressionistic “distortions” of the mise en scène (the staging of the action through sets, lighting, figure movement and so forth).

영화와 사진의 이미지(Lukács의 인지할 수 있는 외부세계)의 “리얼리즘”에 관하여 널리 퍼진 문화적 가설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표현한 영화 이론가는 Andre Bazin이다. 그는 영화제작자로서 활동하였다. 현란한 편집이나 표현주의적인 “왜곡”없는 연출에 의한 장면의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이미지로서의 그들의 신념을 집어넣은 영화제작자로서 활동하였다. (세트, 조명, 인물의 움직임 등등을 통한 행동의 각색)

The convergence and divergence of naturalism and realism can be best seen in the work of Ken Loach, whose films often crisscross over the borderline between these traditions. Where Loach’s stories are set in the context of revolutionary change, as in Land and Freedom (1995) and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2005), his films seem to combine a naturalistic attention to ordinary details, using Bazin’s favoured photographic style, with a brand of narrative realism closer to Lukácsian realism.

자연주의와 리얼리즘의 집합점과 분산점은 Ken Loach의 작업에서 잘 나타나 보일 수 있다. 그의 영화는 종종 이 전통들 사이의 경계선을 넘어 교차한다. 랜드와 프리덤(1995)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5)에서와 같이 혁명적인 변화의 관계 속에서 Loach의 이야기들은 시작된다. [그의 영화들은 자연주의적 관심을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로 결합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Bazin의 유명했던 사진의 스타일을 사용하여, 루카치적인 리얼리즘에 가까운 서술적 리얼리즘의 브랜드와 함께]

Bazin’s tendency to equate naturalism and realism in film through the downplaying of authorial agency and subjectivity was criticised by others, who said it blocked film off from becoming an art form. The American avant-garde film-maker Maya Deren (who had a background in Trotskyist politics) dissected the many contradictions of this dominant naturalist/realist position in her 1946 essay, “Anagram of Ideas on Art, Form and Film”.

[작가의 작용과 주관성의 경시를 통해서 영화 안에서의 자연주의와 리얼리즘을 동등시하는 Bazin의 경향은 다른 이들에게 비판받았다.] 그것이 하나의 예술 형태가 되려는 것으로부터 영화를 차단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들. 미국의 아방가르드 영화제작자인 Maya Deren (그녀는 트로츠키적인 정치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은 그녀는 1946년 에세이 “Anagram of Ideas on Art, Form and Film(예술, 형식 그리고 영화에 관한 이념의 철자바꾸기)”에서 이 지배적인 자연주의/리얼리즘의 위치에 대한 많은 모순을 분석 비판하였다.

Here Deren attacked the “current tendency to exalt the documentary as the supreme achievement of film”, pointing out the contradictory impulses behind this exaltation. On the one hand there is the claim of objectivity, but on the other there is the positive evaluation given to documentary films which display “lyricism or a use of dramatic devices”. Deren, quoting a documentary film-maker who admits to the various levels of selection and choices required to produce a documentary, concludes that only a cinematic form that openly admits that cultural heights require the “conscious manipulation of its material from an intensely motivated point of view” makes sense.

여기서 Deren은 “영화의 최고 성공으로서의 다큐멘터리를 칭찬하는 현재의 경향”을 공격했고, 이러한 칭찬 뒤에 모순적인 충동을 지적했다.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주장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정미나 드라마틱한 장치의 사용”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가져다준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Deren이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의 말을 인용했듯이, 선택의 다양한 수준과 선택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요구되며, 문화적인 절정은 강력하게 동기화된 견해로부터 소재의 의도적인 조작을 요구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결론 내렸다.

Deren also brilliantly attacked the positivist model of the natural and social sciences—a model that saw them as passively reflecting reality—which many naturalist/realist film practices tended to ground themselves in. As she put it:

Deren은 또한 자연주의의 실증적인 모델과 사회 과학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수동적인 실제의 반영으로서 보여진 모델- 많은 자연주의/리얼리즘의 영화의 실천들은 그들 스스로를 땅에 떨어뜨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녀가 써놓았듯이,

Even in science—or rather, above all in science—the pivotal characteristic of man’s method is a violation of natural integrity. He has dedicated himself to the effort to intervene upon it, to dissemble the ostensibly inviolate whole, to emancipate the element from the context in which it “naturally” occurs, and to manipulate it in the creation of a new contextual whole—a new, original state of matter and reality—which is specifically the product of his intervention… The task of creating forms as dynamic as the relationships in natural phenomena is the central problem of both the scientist and the artist.8

과학에서조차도, - 좀더 정확히 말해, 특히 과학에서- 인간의 방식에 대한 핵심적인 특성 자연적인 본성의 침해이다. 그는 스스로 그것에 관하여 개입하기 위해, 표면상 침해되지 않은 전체를 무시하기위해, “자연스러운” 발생 속에서의 관계로부터 요소를 끊어버리기 위해, 새로운 관계의 전체의 창조 속에서 그것을 조작하려하고 노력한다. -사건과 실재의 새롭고, 본질적인 단계- 그것은 특별히 그의 개입에 의한 산물이다. 자연 현상 속에서의 관계만큼 역동적인 창조적인 형태의 작업은 과학과 예술 모두의 중요 문제이다.

Of course it was precisely the image of the objective scientist, observing without violating the “natural integrity” of the object under investigation, that underpinned both positivist science and Bazin’s model of the ideal film-maker as someone who preserved the temporal and spatial integrity of the scene with long shots and deep focus photography.

물론 그것은 객관적인 과학자의 정확한 이미지이다. 조사 중에 사물의 자연적인 본성을 침해하지 않는 관찰을 하는, 실증적인 과학과 이상적인 영화 제작자에 대한 Bazin의 모델 모두를 지지하는 롱샷과 딥포커스 사진으로 장면의 시간과 공간의 본성을 유지하였던 어떤 사람으로서

Curiously, given the materialism of her approach (evident in the passage quoted above), Deren sharply divided film off from having any of the cognitive possibilities of science. Instead, laying the basis for the later avant-garde of the 1960s and 1970s, she saw the role of film as constructing a ritualistic experience intoxicated with a playful manipulation and disruption of cinematic conventions (match on action, point of view shot, temporal continuity and so forth). Her influence can be detected in a film like David Lynch’s Lost Highway (1997).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주어진 유물론적인 접근법에서(인용구절에서 분명히 주장했던), Deren은 뚜렷하게 과학의 인식력 있는 가능성들의 소유로부터 영화를 나누었다. 대신에, 1960년과 1970년의 후기 아방가르드에 대한 기초를 세우면서, 그녀는 의식주의적인 경험의 구성이 장난스런 조작으로 흥분시키는 영화의 규칙과 영화의 협정들의 붕괴를 보여주었다. (액션의 조화, 촬영 견해, 시간의 계속성 등) 그녀의 영향은 David Lynch감독의 로스트 하이웨이(1997)과 같은 영화에서 발견될 수 있다.

Deren’s turn away from the real in the 1940s came after a period of avant-garde experimentation across the arts between the First and Second World Wars. Practitioners had often posed their play with artistic form as a search for modes of expression suitable to a modern world of urban living, mass culture, technologies of communication and social convulsions. In film the theory and practice of Sergei Eisenstein and Dziga Vertov blazed a trail for developing film forms that could deal with the collective dynamics of social life. Here the emphasis was placed on montage editing (editing which brings different images into collision with each other, rather than continuity editing which establishes temporal and spatial continuity from one shot to the next).

1940년 Deren의 실재로부터의 외면은 1차 2차세계대전 사이에 예술과 교차하여 아방가르드 실험의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실천자들은 종종 예술적인 형태와 함께 그들의 활동을 도시생활, 대중문화, 커뮤니케이션의 기술과 사회적 격동의 현대 세계에 적당한 표현의 방식을 추구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Sergei Eisenstein과 Dziga Vertov의 영화 이론과 실천에서 사회적 삶의 집합적인 동력들을 처리할 수 있는 발전도상의 영화 형식을 개척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몽타주 편집에 있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충돌시켜 가져다주는 편집,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까지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연속성을 확립시키는 계속적인 편집보다 낫다.

But despite this referential orientation within what is sometimes called political modernism, no theoretical synthesis emerged in this period which could do three things simultaneously: (1) articulate a theory of realism from a position that was more than the advocacy of a particular approach or method (surrealism, constructivism, montage, etc); (2) provide a substantive account of the nature of the real (against which any example of realism must be judged); and (3) identify the problems involved in producing realist art in the age of advanced capitalism.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지시적인 지향은 때때로 정치적인 모더니즘이라 불리는 것 안에 있으며, 어떤 이론적인 종합도 이 기간 동안 세 가지 것을 동시에 할 수 있음이 나타나지 않는다. (1) 특별한 접근이나 방법의 옹호보다 더 많은 견해로부터 리얼리즘과 유기적으로 통합된 이론(초현실주의, 구성주의, 몽타주 등) (2) 실제의 본성에 대한 가치 있는 평가를 제공하는 것(평가되어져야 하는 리얼리즘 어떤 사례들에 관해서) 그리고 (3) 선진자본주의의 시대에 리얼리즘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과 연관된 문제를 증명하는 것

Bertolt Brecht came closest to producing such a theory of realism in a series of short essays designed to critique Lukács. The latter had not only produced a very comprehensive critique of naturalism in literature, but he was also hostile to the sort of modernist currents that provided Brecht with much of his inspiration. Yet Brecht’s extremely effective riposte, which declared that a concept of realism “must be wide and political, sovereign over all conventions”, was not published until the late 1960s.

Bertolt Brecht는 Lukács를 비판하기 위해 계획된 짧은 에세이의 시리즈에서 그러한 리얼리즘의 이론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가까 왔다. 후자는 문학에서의 자연주의의 매우 종합적인 비판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일종의 Brecht에게 매우 종합적인 비판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의 영감의 대부분을 제공했던, 현대적인 흐름들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Brecht의 극단적이고, 효과적인 반격은, 리얼리즘의 개념은 모든 협정들을 넘어서 광범위하고 정치적이고 독립적이어야 함을 주장했던, 1960년대 후반까지 출판되지 못했다.

Within film studies the 1970s saw a sharp turn away from the concept of realism. Any distinctions between realism and naturalism were collapsed, and any sense of realism itself as a complex and differentiated tradition was erased. The sort of avant-garde critique of realism made by Maya Deren returned with a vengeance, now underpinned by a heady brew of structuralism, post-structuralism, psychoanalysis and sometimes Althusserian Marxism.

1970년대 영화 연구들에서 리얼리즘 개념으로부터 뚜렷한 외면이 목격됐다. 리얼리즘과 자연주의 사이의 어떤 구별들도 사라져갔고, 리얼리즘 어떤 의미도 그 스스로 복잡해져갔고, 구별 지어진 전통은 지워졌다. Maya Deren에 의해 만들어진 리얼리즘의 아방가르드적 비평은 철저하게 돌아왔다. 현재 격렬한 구조주의에 의해 지지되었던, 후기 구조주의, 정신분석학과 때때로 아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로.

Realist aesthetics, it was argued, encouraged a naive belief in the ability of the camera and of film to present an unmediated access to the real and, with this, uncritical modes of identification with characters (whether fictional or real social actors in documentary). In masking the production of meaning a certain naturalness was accorded to the “content” of the film rather than seeing the content as a construct (the outcome of choices and decisions which have often been made as the result of ideological assumptions).

논쟁되어져왔고, 북돋아왔던, 미학의 리얼리즘은 카메라와 영화의 능력 안에서의 순수한 믿음을 실재에 대한 접근이 매개되지 않고 보여주는 카메라와 영화. 그리고 이것과 함께, 등장인물을 무비판적인 형식으로 동일시한다. (다큐멘터리 내에서 허구이거나 실제의 사회적 인물이든지 안던지 간에) 의미의 생산의 마스킹 과정에서 확실한 자연스러움은 구조로서의 내용을 보는 것보다 더 영화의 “내용”에 일치되어진다. 선택의 결과와 결정들은 종종 이데올로기적인 가설의 결과로서 만들어져왔다.)

This critique was certainly a strand of thought in the political modernism of the 1920s and 1930s. But what theorists like Brecht and Walter Benjamin never forgot was that questions of “form” always had their roots in a broader social content that was dynamic and contradictory. By contrast the avant-garde approach of the 1970s separated the question of form off from its broader social context.

이 비평은 확실하게 1920년대와 30년대의 정치적 모더니즘의 사상의 뿌리이다. 그러나 Brcht와 Walter Benjamin과 같은 이론가들이 결코 잊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형식”의 문제가 항상 역동적이고 모순적인 더 넓은 사회적 내용 속에 그들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아방가르드적인 접근과 대비해서 더 넓은 사회적 의미로부터 형식의 문제를 분리했었다.

This sweeping dismissal of anything that might remotely be termed “realism” produced an extremely reductive account of mainstream cinema.

“리얼리즘”이라고 불리게 될 어떤 것의 싹 쓸어버리는 무시는 주류 영화의 극단적이며 환원적인 설명을 생산했다.

For example, even in 28 Weeks Later there are modifications and subversions of conventions and audience expectations that might be the occasion for a critical awareness of the mediated nature of representation in general. After the initial opening, where we see Don leaving his wife, the audience expects some sort of narrative arc of redemption for this character. But that is rather brutally put paid to a little later on. This refusal to follow through on the expected story structure is similar to the kind of playful unravelling of narrative conventions in a Godard film of the 1960s. Indeed 28 Weeks Later is not a million miles away from the nihilism of Godard’s Weekend (1967).

예를 들어, 28주후에서 조차, 변형과 관례의 전복이 있고, 관객의 기대는 연출의 매개된 자연의 비판적 인식에 대한 경우가 될 것이다. 처음의 오프닝 후에, Don이 그의 아내를 떠나는 것을 보게 되면서, 관객은 이 주인공에 대한 일종의 구원의 이야기 구조를 기대한다. 그러나 오히려 조금 나중에 잔혹하게 결말난다. 예상되는 이야기 구조를 끝까지 추구하는 것에 대한 이 거절은 1960년대 Godard 영화에서의 서술적 관례들의 장난스런 해명의 종류와 비슷하다. 실로 28주후는 Godard의 영화 Weekend(1967)의 허무주의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By the 1980s the rejection of realist aesthetics had become a rejection of realism as a philosophical proposition with the rise of postmodernism. Postmodern theory (if not always postmodern art) abolished the referential dimension of realism and moved away from the avant-garde’s vision of the work of art as autonomous and having universal codes of representation. Instead postmodernism grounded the representational dimension entirely in the linguistic or discursive “community” of different identities and groups, each with its own aesthetic, moral and cognitive schemas. Within such a worldview any notion of shared interests, a shared world, or grounds for a meaningful dialogue between identities became difficult to sustain. This is why the three “Rs” of realism must be thought of as inseparable.

1980년대에 현실주의 미학에 대한 거절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부흥과 함께 철학적인 제안으로서 리얼리즘의 거절이 되어버렸다. 포스트모던 이론(항상 포스트 모던 예술이 아니라면)은 리얼리즘의 지시적 차원을 폐지하고 자발적인 예술의 작업인 아방가르드의 비젼으로부터 옮겨가고, 연출의 보편적인 코드를 가진다. 대신에 포스트 모더니즘은 완전히 연출적인 수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언어학이나 서로 다른 개인들의 산만한 “사회”와 그룹 안에서, 각각 미적이고, 윤리적이며, 인식적인 윤곽을 가지고 그러한 세계관 안에서 공유된 관심들, 공유된 세계의 어떤 개념들이나 개인들 사이에 의미있는 의견교환을 위한 준비는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이 리얼리즘의 세가지 “Rs"가 나눌 수 없는 것으로서의 생각되어져야 할 이유이다.

Despite the decline of postmodernism, the concept of realism has yet to recover from the intellectual assault it sustained. This should not be an acceptable situation for Marxists, however, for whom the concept of realism remains central as a philosophical principle. On aesthetic matters, realism does not hold quite the same universal applicability. It may, for example, be less relevant to a lot of music or poetry. But in film (and in the novel), where storytelling of an extremely diverse sort predominates, realism deserves the priority which Marxists have traditionally accorded it. And so what follow are 11 theses on realism and then some elaborations in an attempt to provide some ammunition for the left on the question of realism.

포스트모더니즘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의 개념은 아직 그것을 유지하는 지적인 습격으로부터 복구되지 않았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들에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리얼리즘의 개념은 철학적인 원리로서 중심에 남아있다. 미적인 수단으로서, 리얼리즘은 같은 보편적 응용가능성으로 적용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마도 많은 음악이나 시에 더 적게 상응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그리고 소설에서), 매우 다른 종류의 이야기들이 우세하는 곳에서, 리얼리즘은 맑스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그것을 따라왔듯이 우선할만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것은 11가지 리얼리즘에 관한 11가지 테제와 약간의 상세한 말들이다. 리얼리즘의 문제에 남겨진 것에 관한 어떤 공격수단을 제공하는 시도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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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Theses on Realism

Realism is the exploration of aspects of the conflict-ridden and contradictory nature of social relationships.

리얼리즘은 갈등으로 점철된 측면의 탐구와 사회적 관계의 모순적 성질을 띠고 있다.

II

The contribution which realism makes to the development of our thinking and feeling (identification/empathy) is also a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our consciousness of the social conditions that shape our thinking and feeling.

리얼리즘은 우리의 생각을 개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감정(일체감/공감)은 또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형성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우리 의식의 발전에 기여한다.

III

Realism must overcome the socially determined limitations on cognition and feeling that inevitably impact on its own form and content.

리얼리즘은 그것의 형식과 내용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끼치는 인식과 감정에 있어 사회적으로 한정된 제한들을 극복해야 한다.

IV

Form is the conversion into aesthetics of what are socially and historically conditioned ways of seeing.

형식은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시각기법의 미적인 전환이다.

V

The common mistake of discussions around cinematic realism in the West is to fixate on a particular form of representation as “realistic”, based on superficial appraisals of “life-likeness”.

서양에서 영화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논의의 공통된 실수는 “삶과 같음”의 형식적인 평가에 기반을 둔 “사실적인” 재현의 특별한 형식에 리얼리즘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VI

The history of forms expands the repertoire available for potential realist culture, but no form offers any guarantees of realist work.

형식의 역사는 가능한 리얼리즘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레퍼토리로 확장한다. 그러나 어떠한 형식도 리얼리즘의 작업에 대한 어떤 보증도 제공하지 않는다.

VII

Critiques and affirmations of particular forms may be more or less valid in particular instances and contexts, but no analysis of such forms can be assumed to be universally and timelessly appropriate; but neither can it be assumed that the reproduction of forms, with or without modification, in any new context, automatically repudiates earlier critiques or confirms earlier affirmations.

특별한 형식에 대한 비평과 긍정은 특별한 경우와 정황에 있어서 다소 효과적일 것이지만, 그러한 형식에 대한 어떤 분석도 보편적이고 영원하게 전유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정황에 있어서, 변형이 있든지 없든지, 형식의 재생산이라고 생각되어질 수는 없다. 자동적으로 더 이른 비평을 거부하던지 더 이른 확정을 단정한다던지 간에

VIII

The content of realism may stretch from the personal and the intimate all the way to the epochal, historical and global.

리얼리즘의 내용은 개인적이고 친숙한 것으로부터 획기적이고,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범위로 확장해 갈 것이다.

IX

Realism interrogates the dogmas of the day as they are propagated, honed and defended by dominant social interests in every sphere of life. Realism expands the critical faculties of the public sphere and any instance of it is ultimately part of a broader collective praxis.

리얼리즘은 모든 삶의 범위 안에서의 지배적인 사회적 관심들에 의해 선전되고, 불평되고, 옹호되었던 시대의 독단적인 견해를 계속 문제 삼아야 한다. 리얼리즘은 공적인 범위의 비평적인 능력을 확대하고 모든 경우는 더 넓은 집단적인 실습의 최후의 분야이다.

X

The economically induced impediments to adequate thought, feeling and ultimately practice include: the false universality of the commodity form (all men are equal in exchange and in the eyes of the law); and the false concreteness of the commodity form, where physical materiality (this person, this object, this place) is shorn of the web of social interconnections/relations that are its conditions of existence.

돈은 충분한 생각과 감정에 장애를 유발하고, 결국에 실천은 다음을 야기한다. 상품 형식의 거짓된 보편성(모든 인간은 매매와 법의 시야에서 평등하다.) 그리고 상품형식의 거짓된 구체화, 물리적 물질성(이 사람, 이 물체, 이 장소)은 사회적 상호연결/관계들의 웹망이 공유되고 있는 것처럼 보는 존재의 조건들이다.

XI

Realism requires developing the mediations (interlinkages) between social agents (intersubjectivity) and between social agents and the circumstances they find themselves in (their object world). The mediations of capital are fundamentally dissymmetrical, dislocated and antithetical to an association “in which the free development of each is the condition for the free development of all” (Marx).

리얼리즘은 사회적 행위자들(상호 주체) 사이에 매개체(연결)와 그리고 사회적 행위자들과 그들이 (그들의 객관적 세계에서) 그들 스스로를 찾아내는 상황을 발전시킬 것을 요구한다. 자본의 매개들은 근본적으로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된다(맑스)”라는 연합사회에 비대칭되고, 어긋나고, 대조된다.

Some elaborations

Thesis I.

This defines realism in relation to an aim—the exploration, with some degree of complexity, of social relations—and immediately insists that the central feature of social relations that ought to occupy realism is their conflict-ridden and contradictory nature. The absence of conflict and the erasure of contradiction must be viewed, from the realist position, as problematic. Thus realism is to some extent thrown into conflict both with the classical aesthetic principles based around harmony and unity and with the contemporary injunctions of the mass media to “entertain”.

하나의 목표를 향한 관계 속에서 이 리얼리즘에 대한 정의들과 - 사회적 관계들의 약간의 복잡한 수준의 설명 - 리얼리즘을 사용하는 사회적 관계의 주요한 형태에 대한 즉각적인 요구들은 그들의 만연한 갈등과 모순적인 본성이다. 갈등의 부재와 모순의 제거는 개연적인 것으로서의 사실적인 자세로부터 고려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리얼리즘은 어느 정도 갈등 속으로 내몰렸다. 조화와 통일성의 주위에 기초를 두는 고전적인 미학의 원리와 “entertain"하기 위한 현시대적 대중매체의 개입과 함께

Conflict and contradiction are distinct if interlinked terms: the former refers to frictions between social agents (individuals and groups) while the latter refers to the way social practices and the conflicts they generate between agents become internalised within those agents, thus dividing them against themselves as well as others (this in particular is where the richness of drama is often to be found). The social relations in question here—and the ones out of which and in response to which realism in the modern epoch emerges (at first in literature)—are of course capitalist.

갈등과 모순은 서로 연결된 의미들이라면, 구별된다. 전자는 사회적 행위자들(개인들과 그룹들) 사이에 마찰을 가져오는 반면에 후자는 사회적 실천 수단이나 갈등을 가져온다. 그리고 중재자들은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 나누는 것이 된다. (그중에서도 이것은 드라마의 호화가 종종 발견되어지는 곳에서) 여기서 문제되는 사회적 관계들은 당연히 자본주의적인 관례이다. 거기에서부터 온 것과 근대시기에 리얼리즘에서 나온(문학에서 처음에)

Art, wrote the Bolshevik writer Aleksandr Voronsky, “is the cognition of life in the form of sensual, imaginative contemplation”.11 Film, as with all forms of art, has its own peculiar laws of cognition, its own modes of production and consumption, so this “contemplation” is not in any way a passive process. Developing a theme that has run through much Marxist cultural theory in the 20th century, Voronsky argues that art has the potential of retuning our perceptions of life that have become dulled by the routines and habits of an alienated world. This disjuncture between everyday modes of seeing (often saturated with ideological reflexes) and more adequate cognition was central to Marx’s scientific project in Capital. It is also central to artistic realism.

볼셰비키의 작가 Aleksandr Voronsky는 예술은 “관능적이고, 상상력 풍부한 명상의 형태 안에서 삶의 인식이다.” 예술의 모든 형식으로서의 영화는 자신만의 독특한 인식의 법칙, 자신만의 생산과 소비에 관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명상” 어떤 식으로든 수동적인 과정들이 아니다. 테마의 발전은 20세기에 많은 맑스주의 문화이론을 통해서 떠올랐고, Voronsky는 예술은 소외된 세계의 습관과 관례에 의해 무디게 되어버린 삶에 대한 우리 인식의 잠재된 조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시각(종종 이데올로기적 반작용으로 충만했던)의 모든 형태 사이의 분리와 더욱 충분한 인식은 자본주의에서 맑스의 과학적 연구에 중요했다. 그것은 또한 예술적 리얼리즘에 중요하다.

Thesis II.

Realism explores the relationship between consciousness (thinking and, as consciousness is embodied, feeling) and consciousness of the social conditions (our social being, as Marx put it) shaping our consciousness. Realism is an inherently reflexive project because it develops consciousness’s awareness of its own material basis.

리얼리즘은 의식(생각과 구체화된 된 의식, 감정) 사이의 관계와사회적 조건(맑스가 이야기했듯이, 사회적 존재)에 대한 의식의 우리의 의식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탐구한다. 리얼리즘은 본래적으로 반영적인 연구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의식의 자각을 개선하기 때문이다.

It is worth underscoring that affect is as important as cognition, since to separate the one from the other is to collapse once more into a disembodied consciousness, whereas the whole point of realism is to reconnect mind and body, the latter being the first material condition of existence for consciousness, even as it is entwined with the wider material conditions of social relations.

감정은 인식만큼 중요하게 강조할 값어치가 있다. 하나를 다른 것으로부터 나누는 것은 실체가 없는 의식으로 붕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리얼리즘의 전체적인 상태는 몸과 마음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고, 후자는 의식을 위한 존재의 첫 번째 물질적 조건이 되고, 마침 그것이 사회적 관계의 더 넓은 물질적 조건들과 엉키었을 때에,

Identification with other represented social agents is a particularly powerful feature of cinema because of its combination of movement (which replicates agency) and iconic resemblance of photographed people, whether fictional characters or real “social actors”. The alignment between spectator and spectacle, which the process of identification seeks to effect in dominant cinema, is often primarily affective, outed through our socially sedimented “heart” or “guts” via narrative and editing techniques. Yet the trace of some cognitive caveats that the standard Hollywood film has to negotiate is evident in the fact that our primary figures of identification (the cop, the teacher, the soldier) are usually distanced from the institutions and bureaucracies they are located in. While fantastically inflating the individual at one level, at another level it implies that these social structures are not really “working”, making for a fissured and contradictory process of identification. A more realistic representation would look for a rebalancing of the relation between cognition and feeling, liberating the latter from sentimentalism, but certainly not eradicating feeling.

[다른 묘사된 사회적 중재자들과의 일체화는 특히 영화의 강력한 특성이다. 운동의 조합(반복된 작용)과 사진에 찍힌 사람들의 유사성 때문에, 허구적 등장인물들이나 실제 “사회적인 인물”이라하더라도.] 관객과 볼거리 사이의 일치는, 동일화의 과정이 지배적인 영화에 영향을 끼치려고 하는, 흔히들 우선적으로 감정적이고, 사회적으로 쪼개진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을 이야기와 편집기술을 통하여 전했다. 표준 할리우드 영화가 협상해야 했던 어떤 인식적인 경고의 흔적은 동일시(경찰, 선생, 군인)의 중요한 인물들이 실질적으로 그들이 몸 담고 있는 기관과 관료로부터 거리지어진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반면에 터무니없게 과장된 개인에게, 한 기준에서, 또 다른 기준에서, 이러한 사회적 구조들은 진정한 “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함축하며, 일체화의 과정을 쪼개고, 모순되게 몰아간다. 더 많은 리얼리즘적 표현은 인식과 감정 사이의 관계의 재조정을 기대하게 될 것이고, 감정주의로부터 후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만, 분명하게 감정을 뿌리 뽑는 것은 아니다.

Thesis III.

If realism is grounded in an exploration of the conflict-ridden and contradictory nature of social relations, and if it explores the relationship between consciousnessand those relations, then it must also overcome the limitations which social being has imparted to culture itself. This overcoming is to be found at both the level of content (and here the extension of representation to new, hitherto invisible or forgotten, marginalised or culturally disempowered social agents has been a significant feature of realism and naturalism) and form.

만약 리얼리즘이 갈등으로 만연하고 사회적 관계들의 모순적인 상황의 설명을 위해 있다면, 그리고 만약 의식과 그러한 관계들 사이에 관계에 관해서 설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또한 반드시 문화 그 자체에 주어진 사회적 존재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극복은 내용(그리고 여기서 새로운 것을 표현하기 위한 확장,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거나 잊어버린,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거나 리얼리즘과 자연주의의 중요한 특성이었던 사회적 행위자들로부터 문화적으로 권력을 빼앗었던)과 형식의 수준 모두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Thesis IV.

This defines cultural forms as modes of “seeing”. In the cinema this means literally sensuous visuality as well as “seeing” as a metaphor for comprehension and understanding. Such ways of seeing are the conversion into a particular medium of ways of seeing that are grounded in technology (including the technology of the medium itself), social relations, political conjunctures and philosophy. There’s a wonderful image in Errol Morris’s documentary, The Fog of War (2004)—a critical account of the life of former US defence secretary Robert McNamara.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e was a statistician for General Curtis LeMay’s bombing raids over Japan. In one scene we see the bomb bay doors open over Japan, but instead of bombs falling out numbers are superimposed, dropping through the sky to the land below. This is what Walter Benjamin would call a “dialectical image”—crystallising in a flash a whole philosophical argument about how rational scientific knowledge has become yoked, under capitalism, to the most barbaric and irrational actions. This is an example of a way of seeing that is critical of how others (McNamara and the war machine) see.

이것은 “보기”의 형태로서 문화적 형식을 정의한다. 영화에서 이것은 이해와 함축을 위한 은유로서의 “보기”만큼 글자그대로 감각적인 시각성을 의미한다. 그러한 보기의 방법들은 보기의 방법들의 특별한 수단으로의 전환이다. 그러한 수단들은 기술(수단 그 자체로서의 기술을 포함하여), 사회적 관계들, 정치적 국면과 철학에 입각한다. Errol Morris의 다큐멘터리, The Fog of War(2004)-전 미국무부 장관 Robert McNamara의 삶에 대한 비평적인 설명-에서 환상적인 장면이 있다. 2차 세계 대전 동안에 그는 Curtis LeMay의 일본에 대한 폭탄 공습에 관한 통계학자였다. 한 장면에서 우리는 일본 위에서 폭탄투하실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대신에 떨어지는 폭탄의 수들이 겹쳐지고,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Walter Benjamin이 “변증법적인 이미지”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합리적인 과학적 지식이 자본주의 아래 대부분의 야만적이고 불합리한 행동들과 어떻게 결합되는지에 관한 전체적인 철학적 논쟁이 한 순간에 결정화되어 보여진다. 이것은 다른 이들(McNamar와 전쟁광)이 어떻게 보는지에 관해 비판적으로 보기의 방법에 관한 하나의 예이다.

But the previous theses tell us that ways of seeing may convert precisely those structured impediments to understanding that are part and parcel of ways of being. The star system and its buttressing of “the hero” would be a case in point. But every form, including the star system, is always potentially a site of struggle, as the example of 28 Weeks Later suggests.

그러나 이전의 테제들은 우리에게 보기의 방식이 구조화된 장애물들을 존재의 방법의 한 부분인 이해로 정확하게 전환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스타 시스템과 “영웅”에 관한 그것의 지지는 적절한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스타 시스템을 포함하는 모든 형식은 투쟁의 중요한 위치이다. 28주 후의 한 예가 제안한 것처럼

Every cut in a film makes a choice not only about what to see, but how to see (comprehend) what we have just seen (and will see). Jonathan Nossiter’s documentary Mondovino (2004) charts the global battle in the wine business between small-scale producers using artisanal working practices, for whom wine-making is an art and above all a use-value, and large_scale producers operating globally with mass production methods, for whom the commercial value of wine ultimately trumps its use-value. In an interview with one large-scale US wine producer and his wife next to his swimming pool, we hear how they designed their garden and bought their trees, shrubs and bushes from Italy. This, we are told is a statement, a “showcase for our wines, our lifestyles, our commitments to charity”. On the word “charity” the film cuts to an automatic machine swimming around the pool, evidently cleaning it. This cut hints at a level of luxury and commodity fetishism that works to counterpoint the philanthropic image being projected by the interviewee and his wife, and presupposes the realist proposition of a relationship between consciousness and social environment (being) which it is important to take account of when making judgements about the interviewee’s discourse.

영화에서 모든 컷이 선택하는 것은 보는 것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제껏 봤던(그리고 보게 될)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 지이다. Jonathan Nossiter의 다큐멘터리 Mondvino(2004) 와인 사업에서의 세계적인 투쟁을 기록했다. 와인 제작은 하나의 예술이고 무엇보다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장인의 작업 기술들을 사용하는 작은 규모의 생산자들과 대량 생산 방법으로 세계적으로 경영하는 거대한 규모의 생산자들, 그들은 와인의 상업적인 가치를 그것의 사용가치의 으뜸으로 한다. 한 거대 규모의 미국 와인 생산자와 부인이 소유한 수영장에서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이탈리아로부터 그들의 정원과 나무, 관목, 관목 숲을 사오는지에 관해 들었다. 우리에게 전해진 이것은 “우리의 와인들, 우리의 삶의 방식들, 우리의 자비를 위한 헌신을 보여준다”라고 하는 진술이다. “자비”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영화는 수영장 주위를 헤엄치는 자동기계를 편집하는데, 분명하게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다. 이 컷은 사치와 상품의 물신화의 차원에서 넌지시 비춘다. 인터뷰 받은 사람과 그의 부인에 의해 비추어진 인정 많은 이미지를 대조하여 작업한, 의식과 사회적 환경(존재) 사이의 관계에 관한 리얼리즘적 명제를 전제하고 있다. 인터뷰 받은 사람의 담화에 관해 언제 판단해야 하는가는 중요한 일이다.

Thesis V.

Discussions of form that separate it from content and from the historical context constitute a fetishisation of form that short circuits our critical faculties rather than fostering them. Within the West conventions that have reproduced certain spatio-temporal understandings, causal linkages and often fairly thin and conventionalised character motivations have laid undisputed claim to the mantle of realist art. Within cinema Hollywood is often the yardstick against which realism is defined. But forms, whether institutionalised by Hollywood or developed elsewhere, cannot be realist in and of themselves; nor should any form or genre (no matter how apparently “fantastic”) be seen as inherently unusable from a realist perspective.

내용과 역사적인 정황으로부터 그것을 분리하는 형식에 관한 담론은형식의 맹목적 숭배를 구성한다. 그것들을 키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비평적인능력들을 간단하게 한다. 서양의 관습 안에서 일정한 시공간에 관한 이해들과 인과적 연결들을 재생산해내고, 종종 분명히 희박하고 관습화된 등장인물의 동기부여는 사실적 예술의 장막에 분명한 주장을 하고 있다. 영화 내에서의 범주는 종종 할리우드가 리얼리즘의 정의에 관해 판단, 비교의 척도이다. 그러나 형식, 할리우드나 발전된 그 밖의 어느 곳에서 규정되어지든 말든 간에, 리얼리즘이 될 수 없고, 스스로도 될 수 없거나, 어떤 형식이나 장르도 리얼리즘적 이해로부터 본래적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But what has tended to happen is that the use of a particular style, such as grainy film stock, hand held cameras, and zoom lens, has often been enough to convince critics that this or that film (fiction or documentary) has grasped the social and historical dynamics it deals with. And yet, great film though it is in many ways, The Battle Of Algiers (Gillo Pontecorvo, 1965) today largely escapes critical scrutiny because it conforms to a popular and, within the West, still widely held notion of “realism”.

그러나 무엇이 일어날 경향인지는, 이를테면 거친 영화 필름, 핸드 헬드 카메라들, 그리고 줌 렌즈와 같은, 특별한 스타일의 사용은 종종 비평가들을 확신시키기에는 충분했었다. 이 영화나 저 영화(창작이나 다큐멘터리)가 포착하려 했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역동성을 다루려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여러 가지 면이 있지만, 위대한 영화 The Battle of Algiers(알제리전투, Gillo Pontecorvo, 1965), 오늘날 비평의 감시를 벗어났다. 왜냐하면 대중성을 따랐고, 서구 내에서, 여전히 넓게 “리얼리즘”의 개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Similarly, the Dogme 95 manifesto famously identified a ten-point set of rules that were intended to be antithetical to the overly elaborate big budget studio production. These rules were to be adhered to with an ironic determination every bit as rigidly as Hollywood sticks to its rules and conventions. But the cognitive and emotional power of the Dogme film Festen (Thomas Vinterberg, 1998) derives from the articulation of a form designed to strip away cinematic over-elaboration and “artifice” with a story content that strips away the layers of social artifice that conceal the corruption of a bourgeois family. The form allows the film to attack its subject matter with a ferocity appropriate to the content, reinventing the country house genre along the way.

비슷하게, Dogme 95는 유명하게 명시한 10가지 규칙들을 설정하여 성명을 발표하였다. 지나치게 복잡한 거대 예산 스튜디오 프로덕션과 대조를 이루려 했다. 이러한 규칙들은 할리우드가 그들의 규칙들과 관습들을 고집하는 것만큼 완고하게 여러 면에서 반어적인 결정들을 충실히 하려 했다. 그러나 Dogme film Festen (Thomas Vinterberg, 1998)의 인식과 감정적인 힘은 형식의 정확한 표현으로부터 비롯되며, 지나치게 복잡한 것을 벗겨내고, 유산자 계층의 부패를 숨기는 사회적인 기교의 층등을 벗겨내는 이야기 내용을 담은 “기술”을 기획했다. 그 형식은 영화를 허락한다. 잔인성을 가지고 그것의 주제를 공격하는 영화가 그 내용에 적절하게, 컨츄리 하우스 장르가 따르는 방식을 재창조한,

Thesis VI.

Once life-likeness, however variably defined in accord with prevailing cinematic fashions, has ceased to be a reliable criterion for realism, then the vast and diverse and unfolding history of forms becomes available to realism. One day perhaps the game aesthetics of Run Lola Run (Tom Tykwer, 1998), with its repetition-with-slight-difference narrative structure and Polaroid snapshots of the future trajectories of marginal characters Lola makes contact with on her running mission, will be harnessed to a story about the random and arbitrary outcomes of a market economy out of control. Certainly the film hints tantalisingly at how its formal strategies are bursting out of the straitjacket of the irreversible linear narrative structure. But as it is, Run Lola Run can hardly be credited with much in the way of cognitive reach.

그러나 한번이라도 살아있는 듯한 느낌은 유행하는 영화의 패션과 일치하여 다양하게 정의되었지만, 그것은 리얼리즘의 믿을만한 기준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방대함과 다양성과 형식의 전개 역사는 리얼리즘에 이용가능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마도 Run Lola Run(Tom Tykwer, 1998)의 게임의 미학은, 그것의 반복과 함께, -약간의 차이나는 서술적 구조와 함께, 그리고 폴라로이드 스냅샵. 주변인물인 Lola가 그녀의 수행 미션과 마주치게 만드는 미래의 궤도에 대해서, 통제할 수 없는 시장경제의 무작위적이고 임의대로의 결과에 관한 이야기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확실하게 그 영화는 기대를 부추기도록 암시한다. 공식적인 계획들이 뒤집을 수 없는 일직선의 서술적 구조의 엄격한 제한들을 어떻게 갑자기 터뜨리는지에 관해.] 그러나 그대로, Run Lola Run은 거의 믿어질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인식적인 방면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Similarly, Steven Soderberg’s Traffic (2000) suggests the unrealised potential of numerous narrative strands that barely connect the characters but do revolve around drugs. But the potential to expand economic and social dynamics geographically and culturally while also decentring the causal agency of the individual character is badly undermined by a predominant focalisation on how rich white elites are affected by drugs, by stereotypical character development and by the failure to ground the drugs trade in anything other than “bad people”.

비슷하게, Steven Soderberg의 Traffic(2000)은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인 다수의 서술적 요소들, 거의 연결되기 힘들 것 같은 주인공들에 관하여 시사하였지만 마약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 잠재성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역동성을 지리적이고 문화적으로 확장하지만 또한 개별적인 주인공들의 인과적 작용의 벗어남은 대단하게 파헤쳐진다. [두드러진 초점의 집중을 통해, 어떻게 부유한 화이트 엘리트들이 마약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지에 관한, 진부한 캐릭터의 전개와 “나쁜 사람들”를 제외한 마약거래의 실패에 의해]

But with Syriana (2006), directed by Steven Gaghan, the screenwriter of Traffic, and produced by Steven Soderberg, a modified version of these formal strategies achieves considerably more as an example of realist cinema. Here the multiple strands are more strongly connected, not necessarily in terms of characters meeting each other but in terms of the consequences of their actions. Those actions are in turn grounded not in their personal moralities (good or bad) but in their location within the institutions, organisations and structures of global capitalism. Finally, whereas Traffic was overly focused on the white American elites, this film traverses the spectrum of class and geography, charting the narrative trajectory of a young man from Pakistan working in the Middle East, getting shafted by a Western oil company, beaten up by the police of a generic Middle Eastern dictatorship, and becoming gradually seduced into an act of terrorism by Islamic fundamentalists.

그러나 Traffic의 시나리와 작가인, Steven Gaghan에 의해 연출되었고, Steven Soderberg에 의해 제작되었던 Syriana(2006)은, 이러한 공식적인 방법의 변형된 버전이 이 영화의 한 사례로서 더욱 크게 성공하였다. [여기서 다양한 요소들은 더욱 강력하게 연결되어졌다. 각각의 주인공들 간의 만남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의 행동의 결과에 의해서.] 그러한 행동들이 이번에는 그들의 개인적인 도덕성들에(좋음과 나쁨) 기초를 두고 있지 않지만 제도와 조직과 세계적 자본주의 구조들 안에 그들의 위치를 기초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Traffic이 지나치게 미국의 화이트엘리트들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이 영화는 계층과 지역의 스펙트럼을 자세히 고찰하고 있으며, 중동에서 파키스탄의 노동자 출신인 젊은이의 서술적 궤도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는 서양의 석유회사에 의해 속임을 당하게 되고, 일반적인 중동의 독재정권의 경찰에게 두들겨 맞고, 점차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부터 테러행위를 하게끔 꼬임을 당하게 된다.

For all these reasons Syriana is also a substantially better investigation of state and corporate capital links and conflicts than not only Traffic but also the overly praised British film The Constant Gardener (Fernando Meirelles, 2005), which tries but largely fails to interrogate the pharmaceutical industry’s activities in Africa. The Constant Gardener, for example, utterly fails to disprove the long established critique of the classical narrative’s simplistic problem-solution structure, with its preposterous ending whereby public exposure brings down the bad individual civil servant who wants to cover up unethical practices. For this film it appears to be bad apples that are the problem, whereas for Syriana, it is the barrel itself.

[이러한 모든 이유 때문에, Syrian는 또한 국가에 대한 조사와 자본으로 연결된 회사와 투쟁을 Traffic 뿐만 아니라 극찬된 영국 영화 The Constant Gardener (Fernando Meirelles, 2005) 역시 더 실질적으로 표현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제약 회사의 활동을 심문하려했던 것을 실패한 내용을 다룬,] [예를 들어, Constant Gardener는 고전적인 이야기의 문제와 해결의 구조에 관해 극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에 관한 오랫동안 확립된 비평을 논박하는 데는 순전히 실패하였다. 비윤리적인 행위들을 감추기를 원하는 나쁜 개별적인 공무원들을 공적으로 폭로하는 터무니없는 결과와 함께.] 이 영화에 있어서, 암적인 존재가 문제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 반하여 Syriana는 그것 자체로 the barrel(?)이다.

Thesis VII.

There is a long history of debates about realism. There is the critique of naturalism (which itself has been open to a wide range of definitions), the critique of illusionism, the critique of the classical narrative, the Brechtian critique, surrealism (as a critique and critiques of its critique), Third Cinema and so forth. Such debates provide important resources for us today. A constant balancing act has to be attempted between a radical historicism, which would say that these forms and their critiques are only valid within their particular contexts, and the temptation to mechanically apply a given critique of forms to new contexts and practices.

리얼리즘에 관한 논의의 오랜 역사가 있다. 자연주의의 비판 (그것 자체로 정의의 넓은 범위에 열려있었던), 환상주의의 비판, 고전적 서술에 관한 비판, 브레히트적인 비판, 초현실주의(비판과 그것의 비판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 3영화 등등이 있다. 그러한 논의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방편을 제공한다. 끊임없이 조화로운 행동은 합리적인 실증주의와 유혹 사이에서 시도하려 해왔다. 이러한 형식들과 그들의 비평들이 오직 그들의 특별한 배경 하에서만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는 합리적인 실증주의와 새로운 배경들과 실천들이 주어진 형식의 비평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유혹 사이에.

Those who say Brechtianism constitutes an answer and those who say that Brecht’s time has passed seem equally unhelpful. Peter Watkins’ epic La Commune (1999) would certainly suggest that there is life in the Brechtian dog yet.12 At the same time some of the categories which have been used to dismiss less obviously reflexive and “experimental” forms of documentary as naively realist, and therefore not really realist, might well have underestimated the complexity and combination of formal strategies at a micro level at work beneath the catch-all critique of “realism”. In short our overarching theoretical categories must be enriched (rather than simply confirmed) by proceeding on a case by case basis.

브레히트주의를 말하는 그들은 하나의 답을 구성하였고, 브레히트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말하는 그들은 똑같이 유용해보이지는 않는다. [Peter Watkins의 서사시적 작품 La Commune(1999) 분명하게 시사했다. 브레히트의 개 안에 삶이 있다고.(?)] 동시에 그 범주의 일부는 덜 명백한 반영과 순수한 리얼리즘으로서의 다큐멘터리의 “실험적인”형식을 버리도록 하게하며, 그러므로 확실한 리얼리스트가 아니면, 복잡성과 작업 중인 아주 작은 수준에 있어서 공식적인 방법들의 조합을 “리얼리즘”의 포괄적인 비평 보다 낮게 과소평가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무엇보다 소중한 이론적인 범주는 풍부해져야 한다. (단순하게 굳건히 하는 것보다) 개별적인 사례의 의거한 행동을 통해서

Thesis VIII.

The personal is political, as the feminist slogan has it, but only if the personal is understood in relation to the broader social conditions impinging on the person. Surrealism has been one form in which this has been explored, focusing in particular on the fantasies, associations and investments that people make and have in the social world around them. Surrealism excavates these dynamics by disrupting the commonsensical patterns of order, sequence, logic and relationships that repress our awareness of them.

개인성은 정치적이다. 페니스트의 슬로건이 정치성을 갖는 것 같이, 오직 개인성이 더 넓은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에 관하여 이해될어질 수 있다면 초현실주의 상상들과 관념의 연합,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공간에서 창조하고 소유하는 것에 노력을 들이는 것들에 상세하게 초점을 맞춰왔다는 점에서 하나의 형식을 이룬다. 초현실주의는 이러한 역동성을 발굴한다. 순서, 결과, 논리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억압하는 관계들의 상식적인 패턴들을 분열시킴으로써.

Although “anti-realist” in style, it is eminently realist in terms of the criteria mapped out above, especially in its concern to reveal the link between psychology (consciousness/unconsciousness) and material things, themselves embodiments of material relationships. Simon Aeppli’s surrealist documentary short Eden (2004), focusing on a small Protestant town in Northern Ireland, gently but politically captures a community and identity in decline, living out a fantastic, bizarre and dislocated relation to its real material conditions.

스타일상 반-리얼리즘이지만, 위에서 얘기한 기준에 의하면 분명한 리얼리스트이고, 특히 심리(의식/무의식)와 물질적인 것 사이의 연결을 드러내려고 하는 그것의 관계 속에서, 그들 스스로 물질적인 관계의 구체화이다. Simon Aeppli의 초현실주의 다큐멘터리 단편 Eden (2004)은, 북쪽 아일랜드에 작은 프로테스탄트 마을에 초점을 맞추고, 친절하지만 정치적으로 터무니없고 기괴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고, 진정한 물질적 조건의 관계들이 뒤바뀐, 쇠퇴한 공동체와 개인들을 포착한다.

Thesis IX.

The measure of realism is the depth of its critical and cognitive power. This inevitably brings it into conflict with, and requires interrogation of, the intersection between belief systems and dominant social interests (ideology). The recent emergence of feature film documentary as a prominent player within the sphere of public opinion formation has evidently crystallised around the great assault on corporate capitalism, consumerism and globalisation of market relations that has been such a welcome feature of the recent political landscape. Implicit in this, and sometimes explicit as in Robert Greenwald’s Outfoxed: Rupert Murdoch$7_$_s War on Journalism, is a critique of the inadequacies of the mainstream news media agenda. In many ways media criticism has gone mainstream (see also Michael Moore’s Bowling For Columbine, which features an extensive critique of news media).

리얼리즘의 측정은 그것의 비판적이고 인식력에 대한 깊이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리얼리즘에게 믿음 체계와 지배적의 사회적 관심사들(이데올로기적인) 사이에 투쟁과, 그것들의 심문을 요구하고, 그것들 사이의 교차점을 가져다준다. 두드러진 활동가로서 영화 다큐멘터리 특성에 대한 최근의 발생은 여론 형성의 범위 내에서, 기업의 자본주의, 소비자 중심주의와 시장관계의 세계화 에 대한 대단한 비난을 둘러싸고 분명하게 구체화되었다. 최근의 정치적 토양의 환영받는 특성이어 왔던, 이것이 내재하고, 때때로 Robert Greenwald’s <Outfoxed: Rupert Murdoch$7_$_s War>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영화는 주류 뉴스 매체의 협의사항의 부적절한 점에 대한 비평을 담고 있다. 다방면에서 언론 비판은 주류가 되어버렸다.(마이클 무어의 Bowling For Columbine을 봐라, 언론 매체에 대한 광범위한 비평을 특생으로 삼고 있다.

The economic underpinnings of the news media, their closeness to the state, the limits to their repertoire of conventions, all this is in uneven, doubtless partial, but indisputably general, popular circulation. We can detect the effect of this in the use of archival news footage, whose recontextualisation in many contemporary documentaries hints at a reflexive dissatisfaction with the agencies that originally produced the footage.

언론 매체의 경제적 기반, 국가에 대한 그들의 친밀감, 관습의 그들의 레퍼토리에 대한 제한, 이 모든 것은 공평하지 않으며, 의심 없이 편파적다. 그러나 명백하게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상황이다. 우리는 기록된 뉴스 보도를 사용하여 이러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고, 많은 동시대의 다큐멘터리에서 재맥락화함은 처음에 보도를 만든 중재자들에 대한 불만족이 반영된 것을 넌지시 비추고 있다.

For example, Michael Moore’s Fahrenheit 9/11 (2004) opens with unbroadcast footage of the principal protagonists’ or rogues’ gallery involved in propagating the war in Iraq. Here they are: Bush, Rumsfeld, Rice, Powell, Wolfowitz, all being prepared on separate occasions for the television cameras prior to broadcast; microphones are being clipped on, make-up applied, hair brushed and so forth. It’s a series of shots over the credit sequence (including Bush making childish faces to the camera) that nicely makes the point about image displacing reality and the lack of critical interrogation of the pro-war case by the television networks.

예를 들어, Michael Moore’s Fahrenheit 9/11 (2004)는 방송을 타지 않은 주요 지도자들과 악당들의 이라크 전쟁 선전과 관련된 사진 보도와 함께 시작한다. 여기서 그들은 Bush, Rumsfeld, Rice, Powell, Wolfowitz, 모든 사람들이 텔레비전 카메라가 방송하기 전의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 있다. 마이크로폰을 고정시키고,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를 빗고 있는 등. 그것은 크레딧 시퀀스 위에 장면의 연속이다. (부쉬가 카메라에 어린이 같은 얼굴을 만드는 것을 포함해서) 그것은 사실성을 바꾸어 놓은 이미지에 관한 포인트와 텔레비전 네트워크에 의한 전쟁 전의 경우에 관한 비판적인 심문의 부족을 훌륭하게 만들어냈다

Later on in the film, in the context of an exploration into who is fighting in Iraq (soldiers from poor backgrounds in the main) and who is dying in Iraq (ordinary Iraqis in the main), we see a clip of a Bush speech. Bush is dressed in a tuxedo and is speaking to the rich and powerful. We know this because he tells us. They are, he suggests, an “impressive crowd: the haves and the have-mores” (cue contented laughter from the audience); and then this: “Some people call you the elite. I call you my base.”

이 영화에서 후에, 이라크 전쟁의 배경에 누가 있는 지에 대한 조사하고 (대체적으로 가난한 배경 출신의 군인들) 이라크에서 누가 죽어가고 있는지(대체적으로 보통의 이라크인들), 우리는 Bush 연설의 클립을 보게 된다. Bush는 턱시도를 입고, 부유하고 강함을 말한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있다. 그가 제안한 그들은 “강한 인상을 주는 무리들 : 소유하고 있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한” (관객으로부터 웃음소리를 담고 있는 큐 사인) 그리고 나서 이것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엘리트라고 부른다. 나는 당신을 나의 기반이라고 부를 것이다.”

That Bush can so openly make such a joke without fear of repercussion or embarrassment, without fear that it would be picked up “as news” and shown, tells us an awful lot about the agendas of the corporate media and their complicity with power. For this “joke” ought really to be (it has come from his own mouth after all) the last word on what Bush represents. The fact that it wasn’t and that the film, despite being the biggest box office hit for a documentary in US history, failed in its self-appointed task to mortally wound Bush’s re-election campaign, is a testimony to the fact that, while it was an important intervention into the sphere of public debate, that clip and the film as a whole circulate in a context where other representations and discourses overwhelmingly predominate: eg the president as an embodiment of the national interest, the nation as a unified people, the market as a generator of wealth, business elites as “job creators”, riches well earned and so forth. Yet the fact that the film was made at all, that it was as critical as it was and that it was seen by so many people, reminds us agai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consciousness and its conditions of existence—and that realism is never an isolated property “belonging” to a film but is a product of the relations between theory (eg the critique of imperialism) and practice (the worldwide anti-war movement), their fusion being praxis.

Bush는 공공연하게 영향이나 당혹의 두려움 없이 그러한 농담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뉴스”로서 꼽게 될 두려움 없이,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지고 전해진 기업의 매체의 협의 사항과 권력과 함께한 그들의 공모에 관한 지독히 많은 것들을 이 “농담”에 관해서 Bush가 표현한 것은 정말로 마지막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찌됐든 그의 입에서 나오게 됐다.)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 영화의 사실은 미국 역사에서 다큐멘터리로서 큰 규모의 박스오피스 히트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Bush의 재선 운동에 치명타를 입히겠다고 자칭한 임무에 실패했다. 그 사실에 관한 증언이지만, 그것은 공적인 논의의 범위 안에서 중요한 개입이었다. 모든 것을 유포함으로써의 클립과 영화는 다른 표현들과 논쟁들의 배경 하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예를 들어, 국가적 관심의 구체화된 대통령, 단일화된 사람들로서의 전 인류, 부의 발생으로서의 시장, “일자리 창출자”로서의 비지니스 엘리트들, 잘 벌고 있는 부자들 등등. 그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만큼 비판적이라는 사실,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줬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의식과 존재의 조건들 사이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 그리고 리얼리즘은 결코 영화에 대해 “개별적인” 성질이 아니며 그것은 이론(예,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실천(세계적인 반전쟁의 움직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산물이다. 그것들의 혼합은 praxis가 된다.

Thesis X.

The commodity, as Marx noted, is “a very queer thing”. Its universal drive to penetrate every aspect of our lives is built into its indifference to particularity, culture, value-systems, geography, difference and use-value. In the eyes of the commodity, everyone and everything is levelled in an act of practical abstraction. Any consciousness and practice that do not grasp the real differences between what are necessarily antagonistic interests exist within the parameters of a commoditised universe. Where, for example, the media cultivates a “vertical” identification (as with the formation of national identity) across hierarchically arranged differences, there the pseudo universality of the commodity form holds sway.

맑스가 기록하였듯이, 상품은 “매우 기묘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도록 하는 보편적 경향은 특수성, 문화, 가치 체계, 지역성, 차이와 사용가치에 대해 무관심하도록 만들어졌다. 상품의 시야에서,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은 실용적인 추상적 개념에 의해 수준지어진다. 어떤 의식과 실천도 실제적인 차이를 잡아내지 못한다. 상품화된 다수의 요소 안에서 존재하는 대립하는 관심사들이 필수적으로 무엇인지 예를 들어, 미디어가 “수직적” 동일시를 계층적으로 교차하는 차이들을 조정하여 장려한다면(국가적 정체성의 구성을 위해), 상품형식의 거짓된 보편성이 지배하게 된다.

Because this universality is false, it cannot be the grounds for hoping that the cosmopolitanism of the commodity form will unite the world. Resources that are made scarce for the majority because they are monopolised by the minority can be shorn up by fostering difference and division and misunderstanding where real solidarities and alignments could and should exist. Again the media’s blockage of the possibilities for such “horizontal” identifications (in news and fictional forms) constitutes a fundamental impediment to developing a realist culture. Where the commodity form appears to be most “concrete” and particular it is again concealing its abstraction. The concrete is not to be confused with the physicality of person, place or thing. Taken out of their context, their conditions of existence, people, places and things are empirical ciphers of unacknowledged forces.

이런 보편성은 거짓되기 때문에, 상품 형식의 세계시민주의가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는 희망을 위한 근거일 수 없다. 자원은 대다수에게 부족하게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소수에 의해 독점되어지고, 차이와 나눔과 오해를 심화함으로써 공유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결속들과 정렬들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하는 곳에서. 그러한 “수평적” 동일시를 위한 가능성들에 대한 미디어의 방해는 또다시 (뉴스와 허구적인 형식들에서) 리얼리즘적 문화의 발전에 대한 근본적인 장애물들을 구성한다. 상품 형식이 가장 “구체화”되고 상세화되어 나타날 수 있는 곳에서, 그것은 다시 그것의 추상적 개념을 숨기려 한다. 구체화는 개인, 공간이나 사물의 신체적 특징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배경, 그들의 존재의 조건들을 끄집어낸다면, 사람들, 장소들, 사물들은 인정되지 않는 강압의 경험적인 열쇠가 된다.

Thesis XI.

If the social totality is an unsymbolisable limit point to our consciousness and representations, then realism is an open ended and unfinishable project, a spur to renewed efforts rather than a closed and fixed answer to problems. While unfinished and approximate (the hallmark of dialectical knowledge, as Lukács reminds us in a late work) realism remains an indispensable part of our social being and our cultural resources: we can work against the grain of bourgeois economics and the institutions of class society to piece together the conditions of existence that are repressed and disavowed within the reified public sphere.

만약 사회적인 전체성이 우리의 의식과 표현에 대해 비 상징화할 수 있는 한계지점이라면, 리얼리즘은 정해진 답이 없으며 미완성의 연구이다. 문제에 대한 닫혀있고 고정된 답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노력을 위한 자극이 될 것이다. 반면에 미완성되고, 가깝게 접근한 (변증법적 지식의 정확한 증명, Lukács가 후기 작업에서 우리에게 상기시켰듯이) 리얼리즘은 사회적 존재와 문화적 자원의 없어서는 안 될 부분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유산과 계급의 성질과 존재의 조건들을 함께 모으는 계층 사회의 제도에 대항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그것들은 구체화된 공적인 범위 내에서 억압받아왔고, 부정되어졌다.

Developing the mediations between social agents means developing their rational critical faculties and that in turn means developing their communicative and decoding abilities—all important aspects of a progressive, realist film culture. In Supersize Me (2004) the director Morgan Spurlock famously vomits up a McDonald’s meal early on in his month-long McDonald’s-only diet. But this is more than a particular incident or an example of bad luck. This vomit is no empirical cipher. He is vomiting up the real relationship between his body and capitalism, a relationship that becomes repressed (kept down) as his body adapts and acclimatises itself to the new diet. The film, through a variety of strategies, builds up the mediations which reveal how corporate junk food penetrates the body and makes an increasing number of people sick in a more long-term and potentially fatal sense.

사회적 중재자들 사이의 매개를 개선시키는 것은 그들의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능력의 발전을 의미하고, 그 전환 은 그들의 활발한 의사소통의 발전과 재능들을 설명을 의미한다. - 진보하는 리얼리즘 영화 문화의 모든 중요한 측면. [Supersize Me (2004)에서 감독 Morgan Spurlock은 초기 한 달 동안 먹은 맥도날드의 식사를 토해냈다. 오직 식사를 위해.]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사건이거나 불운의 한 사례가 아니다. 이 토해냄은 경험적인 열쇠가 아니다. 그는 그의 몸과 자본주의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관계는 그의 몸이 새로운 음식에 적응하고 순응함으로써 억압되어진다. 그 영화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기업의 정크 푸드가 몸에 어떻게 스며드는지와 오랜 기간 동안 아픈 사람들의 숫자를 증가하게 만들고 몸에 잠재적으로 치명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매개체를 확립한다.

Realism must inevitably be reflexive, not in a narrow stylistic sense, but in the sense that it explores the relation between consciousness and its material ground. When social being is conflictual and contradictory, when what we do (eg harm ourselves with the food we eat) and what we aim at (eg stay alive by taking daily intakes of nourishment) part company so systematically, then consciousness and social being also become estranged. The goal of a critical, dynamic realism is to spin some connecting webs that pull consciousness and social being closer together.

리얼리즘은 반드시 반영적이어야 하고, 협의의 문체적인 의미는 아니며, 의식과 물질적 배경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는 의미이다. 사회적 존재가 투쟁적이고 모순적일 때,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과 우리가 체계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동료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 그리고 나서 의식과 사회적 존재는 또한 멀어지게 된다. 비판적이고 역동적인 리얼리즘의 목표는 의식과 사회적 존재를 모두 가깝게 끌어당기는 연결망을 회전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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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나(2005) _ 가치론연습 _ 리얼리즘과 영화에 관한 테제

철학/가치론연습 2008. 6. 3. 02:01

영화 첫장면 테헤란. 어딘가 분주할 것 같지만 하늘밑에 고즈넉하게 깔린 먼지같은 막이 열정과 활기의 발산을 막습니다. CIA 요원 밥은 외부와 차단된 차고안에서 정체를 정확히 알수 없는 이와 미사일 거래를 합니다. 물건을 내놓고 그 대가로 돈을 받으면 그만인 비지니스. 그러나 밥은 미사일의 사용 내역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받아쳐 나온 말을 신경끄라는 매몰찬 소리일 뿐.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요. 한복판 도로의 침묵을 깨뜨리는 자동차 폭파 소리가 영화 관람객의 청각을 놀래킵니다. 그러나 밥은 아무 미동 없이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스위스 투자자문 회사에 근무하는 .우연한 기회로 레바논 왕자의 초청을 받아 파티에 참석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들이 풀장에 뛰어들었다가 감전사합니다. 눈앞에서, 그것도 화기애애한 파티장에서 일어난 자식의 죽음.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만나줄 의사조차 표현하지 않았던 왕자는 그 사건과 연관지어 그에게 접근하게 되고, 그는 순식간에 왕자의 경제고문이 됩니다.


한편 미국으로 건너가면, 정유계는 거대 정유기업간의 합병문제로 시끄럽습니다. 그 와중에 변호사 베넷 홀리데이는 그 합병건을 담당하게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법률적 문제라던지 협상이 진행되었던 과정에서 있었던 석연찮은 점이 하나둘 발견되면서 그는 깊은 고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리고 두 정유업체의 합병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레바논 거주 파키스탄인도 있습니다. 개 중에 어떤 이는 점점 서구의 부조리한 세계 운영과 석유를 둘러싼 암투의 그림자를 보게 되고, 결국 캠코터를 향해 유언을 차분하게 읊어나갑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복잡한 구성의 '트래픽'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닐겁니다. '시리아나'역시 '트래픽'과 매우 비슷한 이야기 체계를 가지고 있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특정 문제에 맞닥드려 서로의 간극이 좁아지거나 아예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테크닉은 시리아나에서도 여실히 구사됩니다. 트래픽의 각본을 쓴 스티븐 개건이 감독과 각본을 겸한 '시리아나'는 전작 '트래픽'보다 한층 직접적이고 스케일또한 커졌습니다. 영화는 검은 황금 석유을 둘러싼, 석유만큼 검은 비리들이 판을 치는 실상을 적나라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흐물흐물하지도 않게 묘사함으로서 그 주제로서 긴장을 유지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서구와 이슬람의 갈등은 종교의 차원이 아닌 고갈될 날이 머지않은 석유를 둘러싼 알력다툼이라고 위치는 다르지만 석유문제에 관해 우리와 느끼는 처지나 강도는 비슷할 네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스릴러라고 하기엔 내용이 워낙 복잡하고, 감독 자체도 그다지 스릴러적 요소에 비중을 크게둔것 같지 않습니다.  


스토리는 그 자체의 구성뿐만이 아니라, 인물의 다차원적 성격까지 더해져 점점 복잡하게 진행되갑니다.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아랍 출신 졸부들을 그다지 좋은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지는 않지만, 오직 한 사람 레바논 국왕의 첫째 왕자만이 근대적 마인드를 가지고 레바논뿐만 아니라 대서구 관계까지 바꾸려는 긍정적 인물로 그려져 있습니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비관성 가운데 유일하게 새로운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죠. CIA 요원 밥은 자신이 뭐 하는지 모른체 계속해서 방황하고 있고, 로버트 역시 아들의 죽음과 맞바꾼 꿈에 한껏 취해있고, 베넷은 불법과 합법사이의 절충안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죠. 어린 파키스탄인 역시 어느 정도 긍정성을 머금고는 있으나 그의 힘은 미약했고 결국 시도할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한가지, 테러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레바논 왕자는 보다 구체적이고 확고한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그것을 실현할 재력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주도의 세계판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위계승자리를 한가로이 당구나 치는 동생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하지만 긍정성을 벗어나 희망의 관점에서 찾아본다면, 저는 오히려 맷 데이먼이 연기한 로버트 우드먼에게서 그 것을 찾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드먼이라는 캐릭터가 석유를 둘러싼 영화속 암투속에서 감독이 관객들에게 선사한 유일한 인간성이 부연된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어쩌면 아들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할자임에도 왕자라는 신분때문에,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미래를 향한 비전과 함께 따라올 명예과 금전적 이익 때문에, 왕자에게 탄복하고, 그의 심복을 자처한 우드먼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아있습니다. 가정에는 점점 소홀해지는건 당연지사. 그러다 왕자가 폭탄테러로 죽게되고 순식간에 모든게 날아간 우드이 찾아간 곳은 가정이었습니다. 남은 어린 아들은 아빠에게 달려가고, 아내는 그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짓고 말이죠.


다양한 이야기들이 중첩되는지라 주연이라는 특권을 누리는 배우는 없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무난한 연기를 펼쳐주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최근작 '마이클 클레이튼'의 연기가 훨씬 훌륭했다고 판단하는 입장이지만 이 영화에서도 조지 클루니는 강한 역을 들고나와 역시 강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동안 대외적 이미지와는 달리 영화속에서는 잘생긴 얼굴을 활용한 역할을 맡아온 그에겐 이 영화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맷 데이먼 역시 기능적으로 무난하게 연기한 편이였고요. 다만 제프리 라이트는 역할 자체가 심심했던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임에도 다른 캐릭터에 눌린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습니다.  자살테러의 파키스탄인을 연기한 카이반 노박도 영화 흡인력에는 전혀 지장없는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조지 클루니는 인터뷰에서 시리아나에 대해 '이 영화의 스타는 각본'이라고 말하면서 이 영화는 특정 배우가 빛을 발하는 영화가 아닌 앙상블의 결과라고 설명한바 있는데, 참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마이클 무어와 같은 다큐멘타리류 영화를 제외해 놓고 최근 할리우드 주류안에서 가장 정치적인 영화지만 결코 흥분하지 않는 시리아나. 트래픽의 엔딩장면 기억나시는지요? 시리아나의 엔딩을 장식하는 새하얀 화면과 그 직전에 등장한 씬 역시 보기에 따라 이런저런 해석이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수정 : 윽! 제가 포스팅하면서 순간 '트래픽'과 '크래쉬'를 혼동해서 써버렸네요. 아카데미 작품상과 돈 치들 부분은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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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me 95 _ 가치론연습 _ 사실주의와 영화에 관한 테제

철학/가치론연습 2008. 6. 2. 23:27

아래 내용은 영문 위키Dogma 95에서 살짝 베껴 온 것이다. 오역 및 무지로 인한 오도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도그마 선언 Dogma 95는 1995년 Lars Von Trier,Thomas Vinterberg, Kristin Levring,Søren Kragh-Jacobsen에 의해 시작된 아방가르드(Avant-Garde)1
영화제작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Dogma 95 Collective(도그마95 집단) 또는 Dogma Brethren(도그마 동포, 조합)으로도 불리운다.
도그마 운동은 1995년 3월 22일 상업영화의 불확실한 미래를 정관(靜觀)2 하고 영화
백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인 영화계의 엘리트들이 모인 자리인 Le cinéma vers son deuxième siècle 회의에서 발표되었다

도그마의 정신은  라스 폰 트리에의 Breaking the waves(비록 도그마 필름은 아니지만)에 영향을 끼쳤다. 첫번째 도그마 필름은 빈터버그의 1998년작인
Dogma #1으로도 알려진 Festen(The Celebration) 평단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 내었으며, 그해의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폰 트리에의 유일한 도그마 필름인 백치들(Idioterne-The Idiots, or Dogma #2)는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 두 작품 이후로 다른 감독들에 의해서 도그마 정신을 계승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는데, 미국 감독인 Harmony Korine의 Dogma #6로도 알려진 Julien Donkey-Boy등이 있다.

도그마 강령의 목적은 고비용의 과도한 특수한 효과, 제작 후 변경등의 기믹(gimmick)3 을 거부함으로써 영화제작의 순수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순수성의 강조는 제작자로 하여금 실제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할 수 있게끔 해준다. 내러티브, 주제,작품의 흐름에서 유리되어진 과잉생산을 자제함으로써 관객 역시 보다 적극적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터버그는
필름이 따라야 할 10가지 규칙을 발표하게 된다.
순결서약(Vow of Chastity)으로도 불리우는 이 규칙은 다음과 같다.

1. 반드시 현지에서 촬영을 해야만 한다.
   영화소도구와 무대가 인위적이어서는 안된다
   (만약 특정 소도구가 스토리 상 필요하다면 그 소도구들이 있는 곳이
   촬영장소로 선택되어져야만 한다)

2. 영상과 관계 없이 사운드가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촬영씬내에 존재하지 않는 음악은 사용되어선 안된다)

3. 카메라는 들고 찍어야 한다. 손놀림에 의한 어떤 동작들도 허용된다.
(카메라는 고정되어서는 안되며 연기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촬영되어져야한다)

4. 촬영은 컬러로 이루어져야 하며 특별한 조명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빛이 너무 부족하거나 과도하다면 그 씬은 삭제되거나
   카메라에 하나의 램프를 붙일수는 있다)

5. 시각작업이나 필터는 금지된다.

6. 피상적이거나 천박한 행동이 포함되어선 안된다
   (살인, 무기등 또한 일어나서는 안될만 한  상황)

7. 현실에서 벗어난 시공간은 금지.

8. 장르 영화는 허용되지 않는다.

9. 최종적으로 영화는 와이드 스크린이 아닌 4:3 비율의 35mm필름으로 만들어져야만 한다. (원래는 Academy 35mm필름으로 촬영되어야만 한다고 요구하였으나, 이 원칙은 저예산 제작에 있어서는  유동적으로 적용되어진다)

10. 감독은 크레딧에 올라가서는 안된다.

이 규칙들은 첫번째 도그마 필름에서부터 우회되거나 파괴되어졌다.토마스 빈터버그는 The Cebration(Festen)에서의 한 씬을 촬영하는 동안 창문을 가렸다고 고백했으며, 특별한 조명과 소도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Dogma 95 웹사이트 http://www.dogme95.dk/ 에 도그마 필름들의 리스트가 있다.

  1. 아방가르드 - 군대용어로써 주력부대의 전진을 위한 길을 정찰하고 예비하는 임무를 갖는 전위대를 의미한다. 예술분야에서는 급격한 진보적성향을 일컫는 말이다 [본문으로]
  2. 정관 - 심사숙고하다, 고요히 사물을 관찰하여 그 이치를 생각함,[철학]대상의 안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마음의 눈에 비추어서 바라보는 것 [본문으로]
  3. 기믹 gimmick
     ①관심을 끌기 위해 이용되는 장치,생각 또는 트릭. 본래는 장터의 약장수나 요술장이가 군중을 교묘히 속이  수법. 오늘날에는 관객의 주의를집중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구성상의 트릭으로 극적인 순간에 충격효과를주기 위해 준비되며, 갈등의 막바지해결에 자주 이용된다.
     문학에서는오 헨리의 단편에서 볼 수 있으며 영화에서는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위기영화에서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다. 신문광고의 경우 자기회사에 관한 기사가 퍼블리시티로서 신문에 기사화되는 당일에 광고를 게재하거나,TV CM의 경우 상품의 일부가 돌출되어 움직이는 것 등을 말한다.
    ②다른 유사 프로그램과 구분되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특성.
    ③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한 구도 장치
    [본문으로]

출처 : kanerho.tistory.com/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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