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08.05.21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2.10~1956.8.14] _ 가치론연습 _ 리얼리즘과 영화에 관한 테제
  2. 2008.05.21 지가 베르토프 Dziga Vertov _ 가치론연습 _ 리얼리즘과 영화에 관한 테제
  3. 2008.05.21 세르게이에이젠슈타인 _ 가치론연습 _ 리얼리즘과 영화에 관한 테제
  4. 2008.05.18 마야데런 <오후의 올가미> _ 가치론연습 _ 사실주의와 영화에 관한 테제
  5. 2008.05.14 신즉물주의 _ 가치론연습 _ 사실주의와 영화에 관한 테제
  6. 2008.05.12 간디의 사회사상
  7. 2008.05.12 reification(물화物化) _ 가치론 연습 _ 사실주의와 영화에 관한 테제
  8. 2008.04.29 From Kant to John Lennon: War is Over! (If We Really Want), by Timothy Freeman
  9. 2008.04.28 The U.S. Aggression Process and Its Collaborators:From Guatemala (1950-1954) to Iran (2002-)
  10. 2008.04.24 데카르트의 인식론 1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2.10~1956.8.14] _ 가치론연습 _ 리얼리즘과 영화에 관한 테제

철학/가치론연습 2008. 5. 21. 22:09
독일의 시인 ·극작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위생병으로 육군병원에서 근무하였다. 반전적이며 비사회적 경향을 보였다. 제대군인의 혁명 체험의 좌절을 묘사한 《밤의 북소리》(1922)로 클라이스트상()을 수상하였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독일 바이에른주 아우크스부르크
주요수상 클라이스트상(1922)
주요작품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39) 《푼틸라씨와 그의 하인 마티 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1941)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 Das Leben des Galileo Galilei》(1943)
 

바이에른주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뮌헨대학 의학부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위생병으로 소집되어 육군병원에서 근무하였다. 반전적이며 비사회적 경향을 보이면서, 제대군인의 혁명 체험의 좌절을 묘사한 《밤의 북소리 Trommeln in der Nacht》(1922)로 클라이스트상()을 수상하였다. 희곡 《바알 신 Baal》(1919)과 《도시의 정글》(1923) 등이나, 풍부한 환상과 냉정한 객관성, 그리고 시민사회에 대한 도발을 곁들인 서정시 《가정용 설교집 Die Hauspostille》(1926)으로 주목을 받았다. 정서적이며 환상적인 연극과 오페라의 부정을 목적으로 한 스캔들에 찬 오페라 《마하고니시()의 흥망》(1929)과 음악극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1928)를 시도하는 한편, 서사적 연극의 발상을 발전시켜, 사회 기구를 비판하는 희곡에 많이 반영시켰다.

1920년대 후반부터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하여,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교육극과 고리키의 작품을 각색한 《어머니 Die Mutter》(1930)와 《도살장의 성() 요한나 Die heilige Johonna der Schlachthöbe》(1932)를 썼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그는 덴마크로 망명하여, 반()파시즘 활동을 계속하면서 《제3제국의 공포와 빈곤 Furcht und Elend des Dritten Reiches》(1938)과 《카라르 부인의 소총 Die Gewehre der Frau Carrar》(1939) 등의 희곡을 집필하였고 동시에 많은 정치시()를 썼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종전의 사실주의 수법으로의 접근이 다소 보이며, 다음 완성기의 여러 작품으로 계승되어 갔다. 1940년에는 핀란드로 옮겼고, 1년 뒤 다시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였는데, 대표작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39) 《푼틸라씨와 그의 하인 마티 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1941)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 Das Leben des Galileo Galilei》(1943), 그리고 《코카서스 백토()의 테 Der Kaukasische Kreidekreis》(1945) 등은 극장과의 관계가 모두 단절되었던 망명 중에 완성하였다. 또한 《루쿨루스의 심문 Das Verhör des Lukullus》(1941)《시몬 마샤르의 환각 Die Gesichte der Simone Machard》(1943),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슈베이크 Schweyk in zweiten Weltkrieg》(1943) 등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비미()활동위원회의 ‘빨갱이잡기’가 시작된 1948년, 그는 일단 스위스로 갔다가 그 곳에서 《안티고네 Antigone》(1948)와 《파리 코뮌의 나날 Die Tage der Commune》(1948)을 썼으며, 당시까지의 그의 연극론을 《소사고 원리()》라는 책으로 간추렸는데, 이때 동독으로부터의 초청을 받고 동베를린으로 옮겼다. 1949년에는 아내인 여배우 헬레네 바이겔을 중심으로 극단 ‘베를리너 앙상블’을 결성하여, 그의 망명 중의 여러 작품과 고전을 개작한 《가정교사》《북과 나팔》 등을 연출하면서 실천활동에 정력을 쏟았다. 만년에는 더욱 자기의 연극 체계를 발전시켜 ‘변증법의 연극’을 창도()하면서 연극인을 양성하였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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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베르토프 Dziga Vertov _ 가치론연습 _ 리얼리즘과 영화에 관한 테제

철학/가치론연습 2008. 5. 21. 21:22
출처 욕망하는 영화기계 | 새움
원본 http://blog.naver.com/2gamdok/40014302144 

 "Camera Cogito"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예술의 낡은 형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하며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라는 목적 속에 우선 스토리나 내러티브에 대한 거부를 드러낸다. 특히 지가 베르토프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와 같은 영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에 새로운 감수성을 발전 시키려고 한다. 즉 그의 영화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 처럼 전통적인 잔존들을 모조리 해체하여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가능성에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은 그의 영화를 보고 너무 난해하여 민중들을 깨우기는커녕 잠들게 할 것이다라는 투로 비판하였고, 영화의 혁명성을 찬양하던 레닌 조차도 영화를 보는 도중에 나와 버렸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베르토프의 영화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비젼도 드러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새로운 시점을 제시하였고, 변증법적 현실 포착을 통해 일상적인 실체속의 배후에 있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데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전통적 양식의 잔존은 '문학의 우위'로 대표된다. 문학적 내러티브의 지배는 영화라는 매체의 자체적 특수성이 발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나 지금이나 그러한 문학적 내러티브와 연극적 연출에 의해 영화는 다지 상업거리일 뿐이고, 인간 지각의 한계를 '정박'시켜 아무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영화는 단지 문학적 뼈대에 영화라는 피부를 입힌 것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그 피부 아래 약간의 영화적 지방분이나 영화적 살코기가 자라날 뿐이다. 우리는 영화의 뼈대를 절대로 보지 못한다." 베르토프는 이러한 상황을 다시 "문학적 구두를 영화적 왁스로 닦는 것"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영화가 해야 할 일은 영화적 구두를 만드는 것이다.


  '영화의 눈 Kino-eye'(혹은 카메라의 눈)은 인간의 자연적 눈에의한 시야의 협소함을 넘어서서 비가시적이었던 영역을 가시화 시켜준다. 지표면에 국한된 인간의 눈은 매우 제한적이며 이동속도도 느리다. 하지만 영화의 눈은 그러한 시점의 한계를 극복하여 이데올로기적 제약에 정박된 시선을 구하여 한계를 극복한다.


  이러한 카메라에 의한 지각의 특징은 첫째, 인간의 눈이 지각 내용을 의식의 장치(뇌)를 통해서 보완하고 교정하는 반면에, 기계적 눈은 그와 같은 왜곡이나 조정없이 사물을 지각한다. 둘째, 인간의 몸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은 인식의 확장과 시선에 자율성을 부여하여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가능성'을 영화에 남겨둔다. "이제 우리는 카메라를 해방시키기 시작하면서 영화 카메라가 모사에서 벗어나 정반대의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베르토프는 '영화-눈'의 목적이 '영화-진실 Kinopravda'에 있다고 한다. 그것은 카메라의 광학적 사용을 통해서 일상적 현실의 배후에 있는 법칙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예를들어 우리가 민족의 신화를 연구하여 우리 기층의 사유를 찾아내듯이 영화를 통해 미로에 갇힌 뇌를 끄집어 내는 것이다. "해방되고 완성된 카메라와 감독하고 관찰하는 인간의 전략적 두뇌가 집중되어 결과물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보면 화면분할, 오버랩, 촬영속도의 변화, 명암대비 조절과 같은것들을 영화의 눈을 통해 본 진실이라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것에 대해 베르토프는 영화-눈의 방법의 실행이 단순히 현실의 조각들, 사실의 파편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있다. 그는 당시의 다른 몽타주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몽타주에 상당한 이론적, 실천적 중요성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영화-눈을 통한 진실은 몽타주와 기타 영화장치에 의한 효과로 새로운 독해를 가지게 되고, 대중의 의식에 침투하는 것이다. 즉 현실은 단순히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적 장치를 통해서 해독되어야 한다. "이는 일종의 변증법으로 영화-눈의 방법은 한편으로는 삶의 사실들이 외부 현실에서 나타나는 그대로를 다루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가능한 영화적 장치를 사용하여, 새로운 시각적 구조를 창조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영화에서의 카메라 시점이 몸에 구속되고 정박되어 있는 인간의 시점인 지각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그가 전개시킨 '이미지 존재론'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인간보다 영화가 훨씬 주요한 사유의 원천과 대상이 될 수 있기때문이다. 우리는 베르토프의 영화를 통해 진부함과 상투성의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무한한 사유를 할 수 있을것이다.


- 2005/06/17 이주영(2gamd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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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에이젠슈타인 _ 가치론연습 _ 리얼리즘과 영화에 관한 테제

철학/가치론연습 2008. 5. 21. 21:18

출처 MS. WOO'S LIBRARY | mswoominji
원본 http://blog.naver.com/mswoominji/60049761027

소련의 위대한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미지는 그 특징과 역사적 가치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받았다. 때로는 너무 잔인한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하는 그의 최고의 영화들은 처음 공개된 후로 오랫동안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표정한 군인들이 그 유명한

긴 계단을 무릎을 펴고 다리를 높이 든 자세로 내려오고, 군인들의 행진에 이어 아이 혼자 탄 유모차가 불행을 향해 곤두박질하는 장면이

삽입된 '전함 포템킨 (The Battleship Potemkin)' (1925), 온통 전사한 군인들의 시체로 뒤덮인 툰드라의 드넓은 설원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시체라도 찾고 싶은 마음에 손전등을 든 여인들이 뻣뻣하게 굳은 시체들 사이를 뒤지고 다니던 '알렉산더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 (1938), 그리고 숱이 많은 둥근 눈썹이 클로즈업 되는 불길한 분위기 속에서 증오에 찬 대귀족들이 위협하듯

서 있는 어두운 복도를 담은 1945년과 1946년의 '폭군 이반 (Ivan the Terrible)' 1, 2부는 관객의 뇌리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영화 이론가이자 지성인이며, 소련 공산당의 유능한 선전원이기도 했던 에이젠슈테인은 시각적 체험을 원래의 목표인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전혀 새롭고 예상치 못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미학적

형태로 받아들였다. 에이젠슈테인은 그러한 개인적 변용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영화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표현할

탁월한 기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을 갈등으로 이해했으며, 몽타주 기법 -- 두 가지 이미지가 결합함으로써 보는 이의

마음속에 제3의 이미지가 생겨나는 것 -- 을 사용해서 한 장면은 테제로, 그 다음 장면은 안티테제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는

신테제는 보는 사람에게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통찰력을 전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에이젠슈테인은 D. W. 그리피스를 숭배하기는 했지만 그의 표현기법들은 모두 할리두으식 사고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공산당

내부에서 자행되는 정적들의 처절한 응징과 만족을 모르는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파괴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에이젠슈테인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대중은 실험적이면서도 항상 현실적이었던 그의 예술의 관객이자 영웅이었다 (그는 일반인을 배우로 출연시키기를

좋아했다).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러시아인 어머니와 독일계 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에이젠슈테인 (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은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가정의 문화적 분위기는 그의 천재적 재능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미 열 살 때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나중에 일본어도 배웠다. 열일곱 살 되던 해에는

기술자인 아버지를 따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토목공학과 건축학을 배웠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아들은 보수당과

혁명당으로 각각 노선을 달리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반목이 빚어졌다.


전쟁 동안 부대의 심리 전담 부서에서 교육선전 담당관으로 일했던 에이젠슈테인은 전쟁이 끝나자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아마추어

연극단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격동기를 맞이할 러시아 아방가르드 연극계에서 혜성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는

모든 전통적인 이론도 순수하다고 인정받기 전까지는 결점이 있는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작가이자 감독이며 세트와 의상 디자이너였던

그는 25세의 나이에 모스크바에 있는 실존주의 연극인들 중에서 최고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빠른 이미지 변화를 사용하여 확인한 갈등과 변화의 강도는 오직 필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새로운 기술에 제도, 공학 기술, 그리고 건축학적 기술이 보완된 날카로운 통찰력이 더해지면서 그는 모든 영화 제작 과정에

참여했으며, 그가 일평생 영웅으로 삼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기대한 것과 똑같은 지성과 에너지와 창의력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하여 1924년에 '스트라이크 (Strike)'를 필두로 다음 해에 '전함 포템킨'을 발표했다. 그는 '전함 포템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실패로 끝난 1905년의 혁명을 상징하는 반란군이란 아주 단순한 소재를 이용해, 그는 비평가들의 찬사와 함께 영화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있는 걸작을 탄생시켰다.


공산당이 '10월 (October - 혹은 '세계를 뒤흔든 열흘 (Ten Days That Shook the World)이라고도 함)'의 상당 부분을

삭제하라고 강요하자 에이젠슈테인은 1930년에 할리두으로 건너갔다. 그는 파라마운트와 일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기획한 영화를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정치적 신념 탓에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찰리 채플린의 충고를 받아들인 그는 미국의 좌파

작가 업튼 싱클레어 (Upton Sinclair) 에게 접근하여 멕시코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데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멕시코 만세!

(Que Viva Mexico!)로 인해 싱클레어가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냈고 미국 세관 관리가 에이젠슈테인의 소지품에서 동성애를 다룬

그림을 발견하자, 스탈린은 외국을 돌아다니는 이 감독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한편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영화 안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원칙을 고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정부와 동료 영화감독들에게서 강한 질타를 받아야 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충실한

대변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감독은 마침내 첫 번째 유성영화 '벤진 초원 (Benzhin Meadow)'을 촬영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수개월에 걸친 준비 작업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정적이었던 소비에트학파 책임자에 의해 결국 영화 촬영이 중단되었다.

'폭군 이반'의 결정적인 성공 후에도 그는 2부에서 야만적인 독재자를 너무 나약하고 우유부단하게 묘사했다는 죄로 기소되었으며, 결국

영화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그는 194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무한한 창의성의 실패와 미학적 성공으로 점철된 삶도 막을 내렸다. 그는 스탈린의 지나친 주문에

항상 복종했으며 악의적인 박해를 받을 때도 공개적으로 불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공론가의 정확성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허용한 그의 처사에 대해 영화 순수주의자들은 용서할 수 없는 타협을 한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과연 그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촬영기사 네스토르 알멘드로스 (Nestor Almendros)는 사르트르를 거론하면서 인간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감옥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를 찍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잘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라고 알멘드로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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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데런 <오후의 올가미> _ 가치론연습 _ 사실주의와 영화에 관한 테제

철학/가치론연습 2008. 5. 18. 19:34





*실험영화 영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적인 예술가 마야 데렌이 1943년,
남편이었던 Alexander Hammid와 공동 제작한 첫 영화. 1917년 키에프 출생으로, 40년대와 50년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핵심 인물이 되었던 그녀는 실험영화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은 작품들과
부두교 광신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61년 뉴욕에서 사망했다.(씨네서울)







*마야 데렌은 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1917년(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해) 4월 29일에 태어났다. 음악을 전공한 어머니 마리 피들러와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 솔로몬 데렌스코프스키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부모의 영향 아래 일찍부터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자라났다. 하지만 1922년 계획적인 유대인 학살, 경제적 급변, 그리고 정치적으로 트로츠키에 가까웠던 그녀의 아버지의 축출에 따라 몰락한 이 유대계 가족은 러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족은 아버지의 형제들과 함께 뉴욕 주 시러큐스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병원을 개업했고, 이때부터 가족은 공식적으로 '데렌'이라는 성을 쓰기 시작했다.  

1930년 그녀의 부모가 이혼함에 따라 데렌은 스위스에 있는 기숙학교인 제네바 국제학교로 보내졌고, 거기서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1933년에 미국에 돌아온 그녀는 그후 시러큐스 대학(저널리즘을 전공했으며, 아울러 영화에의 열정이 처음으로 점화된 시기이다), 뉴욕 대학, 스미스 칼리지에서 공부하였으며, 1939년에 영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그녀는 여러 작가들과 출판업자들의 조수로 일하는 한편 시詩에 몰두했다.

그녀가 비서로 일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안무가이자 무용수이며 인류학자인 캐서린 던햄이었다. 캐서린은 블랙 댄스(흑인들이 추던 리듬 댄스의 일종)의 창시자이자  1936년에는 아이티에 대한 인류학 논문을 발표한 저자였다. 던햄의 작업을 돕는 동안 데렌은 '춤에 있어서의 종교적 몰입'이라는 에세이를 쓰고 싶은 강한 영감을 받게 되었다. LA에서 던헴과 지내는 동안 데렌은 두 번째 남편, 체코인 영화제작자 알렉산더 하켄쉼드(나중엔 함미드)를 만나 결혼했다. (데렌은 1935년에서 1938년까지 학생 신분으로 반전 운동을 하면서 한 러시아 사회주의자와 결혼생활을 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물려준 약간의 유산으로 중고 16미리 볼렉스 카메라를 샀는데, 이 카메라로 남편과 함께 헐리우드에서 그녀의 첫 번째 영화이자 대표작인 <오후의 올가미>를 찍었다. 이 영화는 1940년대와 50년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들을 위한 길을 닦았으며, 최고의 실험영화 작품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43년 데렌은 뉴욕으로 돌아와 마야(붓다의 어머니의 이름이자, 물의 古語이며 힌두 신화에서 '환영의 장막'이란 뜻)라는 새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그녀가 주재하는 사교모임에는 Andre Breton(앙드레 브레통:쉬르리얼리즘의 대가), Marcel Duchamp(마르셀 뒤샹:변기 갖다 놓고 샘물이라고 이름 붙인 프랑스 화가), Oscar Fischinger와 Anais Nin(프랑스의 여성 일기 작가) 등이 참여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Willard Maas, Kenneth Anger( 미국 언더그라운드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작업을 한 감독), Stan Brakhage(스탠 브래키지:미국의 유명한 실험영화 작가, 올해 사망.), Sidney Peterson, James Broughton(제임스 브로튼: 게이 영화 감독이자 시인, 극작가), Gregory J. Markopoulos와 Curtis Harrington(마타 하리의 감독) 같은 영화 감독들의 작품에서 그녀의 영향력이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은 그녀가 [At Land(1944)], [Study in Choreography for Camera (1945)] 등의 선구적 16미리 영화들을 창조한 시기였다. 1946년, 그녀는 뉴욕에 있는 프로방스타운 플레이하우스의 밤시간을 빌려 '세 편의 버림받은 영화들'이란 타이틀로 위의 작품들(그리고 다른 한 작품)을 며칠 동안 상연했다. 이 대담한 시도는 자신들이 제작한 영화를 스스로 배급하려는 다른 영화감독들을 고무시켰다. 같은 해에 그녀는 구겐하임 재단이 최고의 영화감독들에게 수여하는 '영화부문 창조상'을 받았다. 그녀의 사진과 에세이들 -그 중 하나가 《An Anagram of Ideas on Art, Form and Film》-이 이때부터 전위적인 출판물로 서서히 주목을 받았다. 또한 그녀는 '트랜스(trance)'와 의식儀式에 대한 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춤과 아이들의 유희, 그리고 그레고리 베이트슨(문화인류학자)과 마거릿 미드(미국의 여성 인류학자)가 발리 섬의 트랜스와 춤(Trance and Dance in Bali. 1952 filmed 1936-8. 20 min.)을 소재로 만들고 있었던 민족지학적 영화들을 함께 녹여내는 것이었다.
*트랜스는 무아지경이나 황홀, 도취-부두교에서 말하는.

1947년 칸느는 〈오후의 올가미〉에게 16미리 실험영화 부문 그랑프리를 안겨주었다. 이것은 칸느가 이 부문에서 미국에게, 그리고 여성영화인에게 최초로 수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데렌은 같은 해 공동감독이었던 남편과 이혼했다.

1947년에서 1955년 사이, 데렌은 아이티 섬에서 21개월 동안 부두교 의식과 춤을 영화에 담았다. 그 결과 [the Haitian Film Footage]라는 이름으로 몇 시간 분량의 필름으로 남았는데, 최종 영상물은 미완이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지도 아래, 그녀는 부두교에 관한 상세하고 전례가 없이 뛰어난 민족지학적인 연구서 《신성한 반인반마:아이티의 살아 있는 신들(1953)》을 썼다.  

그녀의 마지막 영화는,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특별 개봉한 〈The Very Eye of Night (1955)〉였다. 제작자가 재정적 어려움에 빠져 이 영화는 1959년까지 뉴욕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1960년, 데렌은 18살 연하인 일본인 음악가 테이조 이토와 결혼하는데, 그는 1950년대 중반 데렌이 마지막으로 아이티 여행을 갔을 때 그녀와 동반한 사이였다. 이토는〈The Very Eye of Night〉를 포함하여 데렌의 영화 두 편의 사운드 트랙을 맡았다. (또 한 편은 '오후의 올가미')

1961년 10월 13일, 데렌은 갑작스레 뇌출혈로 죽고 말았다. 이 때의 나이가 44세였다. 뇌출혈을 일으킨 정확한 원인이 무언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부두의 저주'라는 여러 가지 소문도 난무했다. 즉, 암페타민(환각성분)이 함유된 비타민 과용, 이른바 '닥터 필굿 Dr. feelgood'(자아도취에 빠지게 하는 환각제)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 이토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유산을 두고 뜨겁게 싸웠던 법정 논쟁도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마야 데렌의 영화적 비전은 세상의 모든 영화 감독들(아방가르드는 물론 다른 장르들의)에게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녀의 작품은 세계의 유수한 영화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최근의 특별판 DVD 발매(마야 데렌 영화 모음)로 그녀는 더 많은 관객을 얻고 있는데, 여기엔 [Haitian footage]에서 발췌해서 만들어진 영화들도 들어가 있다. 1985년에는 아메리칸 필름 인스티튜트는 그녀가 독립영화에 기여한 성과를 기리기 위해 '마야 데렌 상'을 제정했다. 뉴욕에 있는 앤솔로지 필름 아퀴브스는 66좌석의 '마야 데렌 씨어터'를 세워 독립영화들의 필름과 비디오를 전시하고 있다. 최근 *〈우트네 독자:UTNE READER〉는 2003년 예술분야 특별판에서 마야 데렌을 '여전히 중요한 40명의 과거의 거장' 중의 한 명으로 뽑았다. 아주 당연하게!

*UTNE READER: Eric Utne가 1984년 설립한 UTNE READER는 다양한 대중매체들이 소개한 2,000개 이상의 방송 기사 및 정보를 재 출판함으로써 우리 시대 문화의 흐름과 새로운 문화적 비전을 제시하려는 미국의 대안문화잡지.



*translated from 'http://www.zeitgeistfilms.com/current/mayaderen/mayaderenbio.html'
*translated by p & k.k.h




**데렌에 관한 다큐영화도 있다고 하더군요

<마야 데런의 거울 속 / In the Mirror of Maya Deren>
*Austria | 2001 | 103min | Color | 35mm
Director_ 마르티나 쿠들라첵 | Martina Kudlacek
Screenwriter_ Martina Kudlaek
Cinematography_ Wolfgang Lehner
Editor_ Henry Hills
Sound_ Jan Mclaughlin
Music_ John Zorn
Cast_ Stan Brakhage, Maya Deren, Jonas Mekas
*비엔날레 2001 비엔나 영화상 수상

출처 : http://www.zeha.co.kr/cgi-bin/read.cgi?board=nagne&y_number=29&nnew=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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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즉물주의 _ 가치론연습 _ 사실주의와 영화에 관한 테제

철학/가치론연습 2008. 5. 14. 14:37
신즉물주의

신즉물주의 회화는 전쟁 후 표현주의가 찬미했던 인간과 그가 만들어낸 가치척도 전체를 부정하는데서 출발하였으며 바우하우스나 러시아 전위 미술가들의 활약을 통해 산업사회의 합리적 이상과 결합하였다. 1923년 하르트라우프가 1920년대 회화에 있어서 사실주의적 경향을 총칭하기 위해 “신자연주의”라 칭하였다가 그가 속한 만하임미술관에서 <신즉물주의 : 표현주의 이후 독일회화> 라는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키리코에 의해 1910년 이후 시작된 형이상학적 회화를 연상시키면서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내는 풍경화나 인물화에서 기계와 같은 정확함과 수공업적 소묘기술로 그려진 차가운 느낌의 정물화, 고도의 인플레이션 이후 경제의 합리화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와 시민의 변모를 보여주는 도시풍경화까지 모두를 총칭한다. 신즉물주의는 발달함에 따라 사회비판적 의도나 효과에 따라 좌익과 우익으로 분리되는데, 좌익은 진실주의라 불리웠다가 신즉물주의로 정의되고, 우익은 불가사의한 사실주의라 칭해지게 된다. 신즉물주의는 시대의 표정이라 불릴 정도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대상을 직시하고 격렬하게 사회를 비판하였다.

신즉물주의의 특징
1. 의도적으로 대상을 소묘적으로 정확히 그렸다
2.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진 비감상적 사물관찰방식으로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다.
3. 추한 것을 꺼리지 않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4. 대상이 고립적이다.
5. 정적인 것을 선호한다.
6. 붓자국을 없앰으로써 개인의 필체와는 무관하게 표현된다.


신즉물주의의 표현형식상 특징은 “콜라주원칙”인데, 이는 다른 맥락으로부터 대상을 가져와 모은 듯하고 인물이 동떨어지고 주변이 진공상태처럼 느껴지는 효과이며 이는 전통회화나 사진과의 구별점이라 할 수 있다. 신즉물주의는 사회여론으로부터 거센 비난과 법적 제재를 받았으며 나치에 의해 전시금지의 제약을 받았고 그 후에도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치적 해석으로 공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사실주의 미술인 신구상회화, 포토리얼리즘 등의 모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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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사회사상

철학 2008. 5. 12. 19:06

출처 연화정(^_^)(蓮花亭)_()_隨處作主立處皆眞_()_ | 여련화
원본 http://blog.naver.com/corea_happy/120050799935




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27집 2002․제1권



간디의 사회사상
조  수  동(경산대)

 [한글 요약]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남아프리카에서는 억압받는 인도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서 시작되었지만, 인도에서는 민족의 독립운동, 더 나아가 이상사회 건설로 이어지고 있다.

간디는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현대 물질문명에 반대하고 있다. 간디가 생각한 이상적 사회체제는 촌락공동체였다. 그것은 자급자족적이며, 평등하고 정의로우며, 도덕심으로 무장된 주민들의 자치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계급과 차별이 없는 무정부사회이다. 어린이들은 자기 능력에 맞는 공작교육을 받게된다. 이러한 공동체를 이끄는 근본적인 원리는 사랑과 봉사이다.

간디의 이러한 이상사회 사상은 무정부, 사적소유 부정, 평등, 노동자에 대한 구원과 노동 중시라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유사하지만, 국유화, 정신과 물질이라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양자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간디의 이상사회는 오히려 무력이나 전쟁을 배제하고, 문명의 이기를 반대하고, 무소유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의 자립경제를 강조하고 있는 노자의 이상사회관과 일치점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주제분야 : 인도철학

주 제 어 : 간디, 사회사상, 사티아그라하, 이상사회, 노자, 무정부

 1. 서언


간디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네루의 “방대한 농민대중의 이상적인 화신”1)이라 말이나, “3억의 인구를 눈뜨게 하고, 대영제국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으며, 정치사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적인 원동력을 도입했던 위인”2)이라는 로망 롤랑의 말과 같이 간디는 대중들을 자각시켜 독립을 쟁취한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된다.

한편 그는 혁명적, 보수 반동적, 몽상적인 정치가로 평가되기도 하고, 또 실용적 이상주의자, 인도 혁명의 요나 jonah, 선동적인 승려, 종교적 열정가라 하여 대중들을 조종, 통제, 선동한 자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간디 자신은 “나는 공상가가 아니다. 실제적인 이상주의자라고 말하고 싶다”3)라고 말하고 있듯이, 그는 종교가이지만, 광신자는 아니었다. 그의 종교적 이상은 언제나 현실과 결부되었으며, 그의 종교적 신념은 항상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적극적인 참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간디의 21년간에 걸친 남아프리카에서의 고통받고 억압받는 인도인의 인권과 권리보호를 위한 투쟁 즉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1915년 그가 인도로 귀국한 후에는 영국지배로부터 인도를 해방시키기 위한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919년 2월에 발표된 ‘로울라트법 Rowlatt Act’4)과 ‘킬라파트 Khilafat’ 운동을 계기로 간디는 국민회의에서 평화롭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영국정부에 대한 시민 불복종, 비협력 운동을 전개했다. 그 운동은 하르탈 Hartal5), 소금행진(1930), ‘퀴트 인디아 Quit india’(1942)6) 등 3차에 걸쳐 대규모의 대중적 사티아그라하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사상적 근원은 그의 종교적 이상과 도덕의식에 있다. 처음 인도인의 인권과 권익보호를 쟁취하기 위해 시작된 이 운동은 인도의 민족 독립운동으로 전개되고,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이 그리던 이상사회 건설로 이어지고 있다. 이상사회 건설의 실천은 아쉬람이라는 사티아그라하 실천 공동체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이 공동체의 거주자들은 서약과 개인적, 대중적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간디가 그리던 이상사회를 고찰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간디가 주장하는 사티아그라하의 내용을 간단히 고찰한 후 간디가 생각했던 이상사회를 고찰한다. 거기서는 간디의 이상사회 사상과 플라톤, 노자, 마르크스 등이 주장한 이상사회를 간략하게 비교하게 될 것이다.

  

2. 종교사상


“힌두에서 태어났으므로 나는 힌두로 남아 있다”7)라는 간디의 말처럼 간디의 종교적 모태는 힌두교이다. 간디는 그가 힌두교도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베다, 우파니사드, 푸라나, 그리고 힌두 성전의 이름에 의해 쓰여진 모든 것을 믿고, 신의 화현과 재생을 믿으며, 둘째, 베다적인 견해에서 Varnashrama를 믿고, 셋째, 소에 대한 보호와 숭배, 넷째, 우상숭배를 인정한다.8)

간디는 이같이 철저한 힌두교도였지만, 그는 진리와 사랑의 법으로 일관되어 있는 종교인이라 할 수 있다. 간디는 도덕적인 법, 즉 그가 진리 또는 사랑의 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그의 종교적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종교적 편견이란 없었다. 그는 기독교, 무신론 등 다양한 종교와도 교류하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간디에 있어 우주의 근본원리는 신이다. 신은 일체만물에 두루 편재되어 있다. 신은 일체 만물 즉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존재인 신은 진리이다. 더 나아가 간디는 진리가 신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이란 각 개인에 따라 일신, 다신, 무신, 범신 등으로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을 부정하는 자도 진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간디는 “진리에는 이중의 뜻이 없으며, 무신론자까지도 진리의 힘의 필요성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들은 진리를 발견하려는 정열의 충동으로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주저함 없이 부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하여 나는 신이 진리라기보다는 진리를 신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9)라고 하고 있다.

진리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제일원리이다. 간디는 세계의 주요한 종교들은 한결같이 진리와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진리에 대한 간디의 이러한 태도는 각 종교의 본질은 온 인류에게 공통되는 기본적인 도덕원리에 입각해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하고 있다. 진리와 사랑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인류는 진리와 사랑에 의해서 삶을 영위해야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간디는 진리 이외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다. 모든 활동은 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진리는 아힘사를 통해야만 발휘될 수 있다. 그는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인 것은 비폭력”10)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그의 생을 살아가는 한 살생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아힘사의 실천이라는 자비심에 의해서 생명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힌두교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종교는 비폭력을 근간으로 하는 평화와 사랑의 종교라는 것이 간디의 입장이다.

간디는 이처럼 종교적 가치에 대한 종합적인 재평가를 통해서 모든 종교심은 사랑 내지 아힘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11) 그러므로 그가 전개한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힌두교적 도덕원리를 기본으로 한 보편적 종교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티아그라하는 힌두교의 진리와 사랑, 브라흐마차리야라는 자기 억제, 아파리그라하라는 자기 정화의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여 여러 종교적 견해와 사상들이 함께 어우러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3. 사티아그라하

 


간디는 자아실현의 길을 단순한 내면적 성찰이나 명상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진리실현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동포애의 헌신적 봉사를 통해서 찾았다. 이런 의미에서 간디를 실천적인 행동가라 할 수 있다. 그는 인도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 한가운데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信愛의 길이 가장 인간다운 삶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간디의 이러한 행동주의 철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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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fication(물화物化) _ 가치론 연습 _ 사실주의와 영화에 관한 테제

철학/가치론연습 2008. 5. 12. 16:05
출처 blueocean | fpeople
원본 http://blog.naver.com/fpeople/30008237455

물화(物化) (reification)'는 루카치(Georg Lukacs, 1885~1971)에 의해서 고안된 개념.
마르크스의 상품의 물신성(인간의 노동으로 생산된 생산물이 그 사용가치는 외면당하고 교환가치만으로 평가받게 되어 인간의 사회적 관계 역시 물건상호간의 관계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라는 개념과 베버의 형식적 합리성(현대의 합리성이 신비와 미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나, 과학과 합리화를 통하여 스스로 관료주의의 노예로 속박되어 버림)이라는 개념을 통합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활동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질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의 창조활동이 자본의 운동에 의하여 획일화되고 통제되어 화석화된다는 것이 루카치의 물화이론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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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센코학설 [Lysenkoism] : 유전자설에 대립하는 유전학설.
유전현상에 관해서는 멘델 이후 유전자 개념을 중심으로 해명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T.D.리센코는 이 유전자라는 입자적인 것만으로 유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 생물체 내의 물질대사의 형이 유전성이라는 견해에서 탈피하여 환경조건을 변화시킴으로써 대사형으로 변화를 일으켜 유전성을 변경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증거로 접목과 같이 밑나무와 접목되는 나무 사이에는 염색체의 교류를 생각할 수 없는 경우에도 잡종이 형성된다는 현상을 들었다. 이것을 영양잡종이라 하여, 생식세포의 접합에서 생긴 잡종과 구별하였다. 근래에는 분자유전학의 진보로 이 현상을 유전자와의 관계에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리센코학설로는 유전론 이외에도 진화에 관련된 종자의 변화설이 있다. 다윈의 생존경쟁설의 일부를 변경하여 종내경쟁(種內競爭)을 부정하고, 더욱이 밀의 이삭 속에 호밀의 종자가 보였다는 것을 증거로 삼아 종자의 비약적 변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전론(遺傳論) ·진화론(進化論)은 리센코의 실각과 더불어 현재 많은 학자들이 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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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Kant to John Lennon: War is Over! (If We Really Want), by Timothy Freeman

철학/가치론연습 2008. 4. 29. 15:37
영구평화를 위하여...

38년전 존레논과 그의 아내 오노요코가 벌인 평화캠페인을 통해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거슬러 올라가 진정한 평화를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글입니다. 주석은 첨부자료를 통해서 파악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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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Kant to John Lennon: War is Over! (If We Really Want), by Timothy Freeman (***==ikj)

칸트에서 존레논에 이르기까지 : 전쟁은 끝난다.(만약 우리가 원한다면)

December 22 / 23, 2007

 

From Kant to John Lennon: a Christmas Story

war is over! (If Only We Really Wanted It)

칸트에서 존레논에 이르기까지 : 크리스마스 이야기

전쟁은 끝난다.(만약 우리가 그것을 정말로 원한다면야)

 

By TIMOTHY J. FREEMAN

 

It was thirty eight years ago today,

that John and Yoko gave us all something to play,

a message that's never really been in style,

though its guaranteed to raise a smile. . . .

. . . and maybe even save the world, if only we really listened. . .OK, sorry about that (Oh, and I know its not

even a Lennon song).

38년전의 오늘,

존레논과 요코가 공연을 위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 메시지는 결코 유행했던 적이 없던 것이다.

비록 웃음을 일으키는 것을 보장했지만

...... 그리고 다만 우리가 정말로 듣기를 원한다면, 세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좋아. 그것에 대해는 유감이다.

(나는 그것이 존레논의 노래인 줄도 몰랐다.)

 

 

Thanks to a recent viewing of the film, The U.S. vs John Lennon, the simple message in John Lennon and Yoko Ono's campaign for peace at Christmas 1969-later turned into the song Happy Xmas (war is over)-keeps playing over and over again in my mind. At Christmas in 1969 over 47,000 American soldiers had already perished in Vietnam, and over 10,000 more would die before the war was really over. Yet in seven different languages in eleven different cities around the world, Lennon and Ono had posted on giant billboards the bold declaration: "war is over!" along with, of course, the whispered proviso in small print: "If you want it."

 

최근의 “The U.S. vs John Lennon” 영화에 대한 감상은 고맙다. 크리스마스에 존 레논과 요코 오노의 평화를 위한 캠페인은 1969년 이후 Happy Xmas(war is over)라는 노래로 바뀌어 계속 연주되고 있으며, 나의 마음 속에서도 계속 연주 되고 있다. 1969년 크리스마스에는 47,000명의 미국의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죽어갔고, 10,000명 이상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더 죽어갔었다. 서로 다른 일곱 개의 언어로, 서로 다른 11개의 전 세계의 도시에서, 존레논과 요코오노는 “War is over!"라는 굵게 쓰여진 선언을 거대한 billboards에 “만약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면.”이란 조건을 작은 프린트 안에 속삭이면서 함께 공고하였다.

 

Now thirty eight years later, with the U.S. mired in a "war on terrorism" in Afghanistan and Iraq which seems to have no end in sight, and which-despite the recent 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 refuting Iran's purported nuclear threat-still could escalate into a wider and far more dangerous war, the plaintive plea in Lennon and Ono's message might seem to raise only a painful smile. With conflict over shrinking resources-oil and water especially-surely inevitable in the century ahead, and with the current direction of U.S. power almost certainly bound to lead to confrontation with China and Russia in the future, the thought that war really could be over if only we really wanted it to be seems hopelessly naive, at best a quaint idealism completely out of step with the demands of the real world. "Sure, a nice thought," most Americans probably think, "war could be over, but only if they wanted it-those terrorists, islamo-fascists, communists, and whatever other "ists" who haven't recognized the value of freedom and the God-appointed destiny of the American way." war is a part of human nature anyway, its been a part of human history from the beginning and that isn't likely to change. Its just a pie in the sky to think that war really ever could be over.

 

지금 38년이 지난 후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테러를 위한 전쟁”에 빠진 미국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국가정보평가는 이란의 의도된 핵 위협이 여전히 점점 더 확대되고 있으며 더욱 위험스런 전쟁으로 만들고 있다고 논박하고 있다. 존 레논과 오노유코의 메시지 속의 애처러운 청원은 고통스러운 웃음을 유발하게끔 만들지도 모른다. 세기가 갈수록 확실하고 분명하게 피할 수 없게 된 원유와 수자원의 감소를 두고 하는 투쟁과 미래에 중국, 러시아와의 대결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것이 거의 확실한 미국 권력의 현재의 방향과 비교하면, 다만 우리가 원한다면 전쟁은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은 가망없고 순진해 보일 수 있다. 기껏해야, 진정한 세계를 위한 요구와 완전히 조화되지 않는 기이한 생각이다. “물론, 좋은 생각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마도 “다만 그들은 자유의 가치와 미국식의 신이 임명한 운명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들의 테러리스트, 이슬람파시스트,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주의자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전쟁을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인간본성의 한부분이며, 그것은 태초부터 인간 역사의 한 부분이었으며, 어쨌든, 그것은 변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림의 떡이다.

So maybe I, too, am hopelessly naive; but I can't get John and Yoko's words out of my head-especially as sung in the chorus by the children of the Harlem community choir in Happy Xmas (war is over)-and thus I am led to this further reflection. Could war really be over if only we really wanted it to be? is it really possible to "give peace a chance"?

 

그리고 아마도 나 또한 가망없고, 순진하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서 존레논과 요코의 단어-할렘사회의 성가대의 아이들에 의해 불린 노래 Happy Xmas(war is over) -를 지울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더 나은 반성에 이르게 됐다. 다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전쟁을 끝날 수 있을까? “평화의 기회를 선사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Give Peace a Chance?

 

This question leads me to reflect on the essay Toward Perpetual Peace written by Immanuel Kant at the end of the 18th century. Kant's philosophy is something like a watershed in the history of Western thought, marking a turning point which influences all subsequent philosophy. Kant has been described as both "the paradigmatic and culminating figure of the European Enlightenment," which, of course, is that intellectual movement noted for its optimistic faith in human reason, and which gave us, among other things, our faith in democracy. Kant is a paradigmatic figure of the enlightenment both for his defense of reason against the skepticism of Hume, which required a theory of knowledge which revolutionized the understanding of the human mind, and for his ethics, which is founded on the conviction that the freedom of choice and action in accordance with the dictates of reason is our highest value, that which Kant holds to be even the very definition of humanity. He is also the culminating figure of the Enlightenment in drawing the limits to human reason, both in his theory of knowledge and his ethics. For Kant, the freedom to choose implies the freedom to do evil as well as good, and thus there are no laws of nature or dialectic of history which can guarantee that good will triumph. That hope will always depend upon human choice.

 

이 질문은 18세기 말에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 쓰여진 ‘끊임없는 평화’에 관한 에세이를 숙고하게끔 나를 이끈다. 칸트의 철학은 서구사상의 역사에서 그 모든 다음 철학에 영향력을 끼친 일대 전기를 가져온 분기점과 같은 어떤 것이다. 칸트는 인간 이성에서의 낙천적인 믿음이라고 알려진 지적인 움직임이며,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서 우리의 신념을 가져다준 “유럽계몽주의의 전형적이고 절정에 달한 인물”이라고 기술되어져 왔다. 칸트는 흄의 회의주의에 대항해 인간 지성의 이해에 혁명적인 인식론이 요구되었던 이성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선택의 자유라는 확신에 기초하며, 칸트는 인간성의 대단한 정의라고 여기는, 이성의 명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높은 가치라고 한 윤리학을 위한 계몽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또한 그의 인식론과 윤리학에서 모두 인간 이성의 한계를 정확히 그려낸 계몽주의의 절정에 달한 인물이다. 칸트에게는, 선택하는 자유는 선한 것과 마찬가지로 악하게 행동할 자유를 포함하고 있고, 그러므로 선이 승리할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역사의 절대적이거나 상대적인 법은 없다. 그런 희망은 항상 인간 선택에 의존할 것이다.

 

Both of these paradigmatic and culminating Enlightenment convictions surface in Toward Perpetual Peace. Kant actually begins the essay with something of a little joke, telling us about a Dutch Innkeeper's sign which had the inscription 'The Perpetual Peace' next to a picture of a graveyard. Kant is clear that there is certainly no guarantee that humanity will be able to avoid the perpetual peace of the graveyard, but the gist of his essay is that if humanity really wants a lasting peace in this world-if humanity really wants to give peace a chance-this is what the nations of the world ought to do.

 

이런 전형적이고 절정에 달한 계몽주의의 신념은 끊임없는 평화에서 드러난다. 칸트는 사실상 작은 조크로 간간히 에세이를 시작한다. 묘지의 그림 다음에 “The Perpetual Peace"라고 새겨진 네덜란드 여관 주인의 간판에 관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칸트는 인류가 묘지의 끊임없는 평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증은 확실히 없다는 것에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에세이의 요점은 만약 인류가 이 세계에서 영원한 평화를 정말로 원한다면 - 만약 인류가 평화의 기회를 얻기를 원한다면 - 이것은 세계의 인류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Now maybe in our post-Enlightenment, postmodern times it might be easy to dismiss Toward Perpetual Peace as it betrays as much of the Enlightenment's naivete as well as hope. It would at least be interesting, however, to reflect on the merit of the ideas Kant puts forward, and then to consider what it is that stands in the way of giving them a chance.

 

아마도 계몽주의 후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의 지금에 끊임없는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계몽주의의 희망만큼이나 계몽주의의 순진함을 저버리는 것 같이 쉬울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칸트가 시작한 사상의 장점을 숙고해보는 것과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장애들이 무엇인지 고려해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Kant presents what he considers to be the necessary conditions of a perpetual peace as if it were a peace treaty among the nations of the world. The treaty is divided into two sections. The first part, consisting of six "preliminary articles of a perpetual peace among states," are to be considered as prohibitive laws which aim to reduce the probability of warfare . The second part contains the "definitive articles" which aim, not just at eliminating potential provocations to war, but at establishing a permanent federation of states, thus providing a foundation for international law. It is here, of course, where Kant's essay has proved most influential, as we find the first articulation of the idea which came to fruition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United Nations.

 

칸트는 그가 생각한 끊임없는 평화의 필요한 조건, 세계의 국민들 사이에 평화 협정과 같은 것을 소개하였다. 첫 번째 부분은, 전쟁의 가능성을 줄이도록 하는 금지 법안이라고 생각되어지는 6개로 구성된 “국가 사이에 영구한 평화의 예비 조항”들이다. 두 번째 부분은 전쟁을 도발할 수 있는 가능성의 제거뿐만 아니라 국가의 영구한 연맹의 설립을 겨냥한 “확정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국제적인 법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여기서 당연히, 칸트의 에세이는 UN의 설립의 결과를 맺는, 사상의 첫 마디를 찾을 수 있듯이 가장 큰 영향력을 증명하였다.

 

The Preliminary Articles of a Perpetual Peace

끊임없는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

 

Three of the preliminary articles Kant specifies should be treated as strictly prohibitive laws and thus the abuses which are prohibited should be abolished immediately if the nations of the world really wanted peace. The first article prohibits any peace treaties made with "secret reservation of the material for a future war." It's easy to understand Kant's reasoning here as any peace agreement is not likely to last if the parties involved were secretly preparing for another war of aggression. We know, of course, what a threat to world peace Saddam's secret stockpiles of WMDs were, as well as the secret nuclear ambitions of the Iranian mullahs are today. Oh, that's right, they weren't and aren't-but at least Americans do understand what a threat to world peace secret preparations for wars of aggression can be. I guess peace might really have a chance if all those other nations stopped making secret preparations for war. Of course, ours is a just nation and our leaders would never think of doing such a thing. Oh, that's right, I'd forgot about all those secret preparations for the invasion of Iraq before the Bush Administration even took office. I guess it was just naive of Kant to include this article in his world peace treaty. Actually, it's interesting that Kant acknowledges that the prohibition of secret preparations for war "will certainly appear academic and pedantic" if "in accordance with 'enlightened' notions of political expediency, we believe that the true glory of a state consists in the constant increase of its power by any means whatsoever."

 

칸트가 열거한 예비조항의 3가지는 엄격한 금지 법안으로 간주되어져야 하고 금지되어져야할 학대들은 즉각적으로 폐지되어져야 한다. 만약 세계의 국가들이 평화를 정말로 원한다면, 첫 번째 조항은 “장차 전쟁이 될 수 있는 요소를 암암리에 보류한”채로 만들어진 어떤 평화 협정도 금지되어야 한다. 만약 관계된 정당들이 침략을 위한 또 다른 전쟁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다면, 어떤 평화 협정도 오래 지속될 것 같지 않는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칸트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은 쉽다. 당연히, 오늘날의 이란의 mullahs(스승)의 비밀스런 핵 야망과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비축한 사담의 대량살상무기가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 맞는 말이다.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인들은 세계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침략 전쟁을 위한 비밀스런 준비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 나는 아마도 정말 평화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모든 다른 국민들이 전쟁을 위한 비밀 준비를 멈춘다면. / 당연히, 우리들은 국민일 뿐이고 우리의 지도자들은 결코 그러한 것을 행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 맞는 말이다. 부쉬 대통령이 취임하기도 전에 이라크 침략을 위한 모든 비밀 준비에 관해서 잊고 있었다. 나는 칸트의 세계평화 협정 안에 이 조항을 포함하는 것은 칸트의 순진함일 뿐이라고 추측한다. 사실상, 전쟁을 위한 비밀스런 준비의 금지는 “분명히 이론적이고 현학적이어 보일 수 있다”라는 것을 칸트가 인정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만약 “계몽화된 정치적 편의의 개념과 일치하여, 어떤 수단에 의해서든지 국가 권력의 끊임없는 증가 속에 국가의 진실 된 영광이 구성된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The next thing that Kant recommends should be abolished immediately is any forcible interference by one statein the "constitution and government of another state" (article 5). Well this one is certainly not hard to understand either, as Americans surely wouldn't stand for any external interference in our constitution and government. I guess it's easy to see that peace really could have a chance if the nations of the world could agree to this article; but, of course, this doesn't seem possible in our world, and for reasons of 'enlightened'political expediency, the U.S. in the last century has certainly mastered the art of such interference. Well, at least we can say that the U.S. has had plenty of experience in this regard, from San Juan Hill and the numerous more recent interventions in Latin America and Southeast Asia to the current interventions in Afghanistan and Iraq. Unfortunately, few Americans have really understood what the political expediency really amounts to.

 

즉각적으로 폐지되어야 하는 칸트가 추천한 다음 것은 어떤 국가에 의한 “다른 국가의 제도와 정부” 아래의 어떤 강제적 간섭이다. 이것은 확실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도 마찬가지로, 확실히 우리의 체제와 통치아래 외부의 간섭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세계의 국민들이 이 조항에 동의할 수 있다면 평화는 정말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는 쉽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당연히, 우리의 세계에서 이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계몽주의의 정치적 편의 때문에, 최근의 세기에 미국은 확실히 그러한 간섭의 술수로 지배를 해왔었다. 다만, 적어도 우리는 미국이 이러한 관계 속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산후안 언덕과 라틴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 더 많은 최근의 개입들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현재의 개입에 이르기까지의 불행하게도, 미국인들은 정치적 편의가 정말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The last of the strictly prohibitive laws in Kant's treaty forbids any "acts of hostility as would make mutual confidence impossible during a future time of peace" (article 6). Here Kant refers explicitly to things like the employment of assassins and poisoners, the breaking of treaties and the instigation of treason within another state; but we can extrapolate from what Kant says to understand that he has in mind any acts of hostility that would make mutual trust impossible. Once again, the idea is certainly not hard to understand, though, once again, for reasons of political expediency, the U.S. has certainly had a lot of experience in assassinations and attempted assassinations, the abrogations of treaties, and other such acts of hostility. I wonder if the Iraqi people will ever trust the U.S. again after the obliteration of much of their cultural heritage in the aftermath of the fall of Baghdad, after the torture palace of Abu Ghraib, after the wholesale slaughter of civil war that has ensued in the wake of our 'liberation' of Iraq.

 

칸트의 조항에서 엄금하는 마지막은 “장차 평화의 기간 동안 상호신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적대적 행위”이든 금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암살자와 독살자의 고용과 같은 것, 그리고 항복조약의 파기와 적국 내에서의 반역의 선동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상호신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적대적 행위로 기억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칸트로부터 추론해볼 수 있다. 또 한번, 그 생각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 확실하지만, 다시 한번 정치적 편법 때문에, 미국은 암살과 암사시도, 협정의 폐기, 그리고 다른 적대적 행위들과 같은 수많은 경험을 해왔다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라크 사람들이 언젠가 다시 미국을 믿을 지 궁금하다. 바그다드 몰락의 영향아래 그들의 문화적 유산의 대부분이 소멸한 후에, Abu Ghraib의 고문 궁전 이후에, 이라크의 해방의 결과로서 뒤이어 일어났었던 내전의 대량학살 이후에

 

The other preliminary articles of a perpetual peace, Kant states, "allow some subjective latitude according to the circumstances" and though they "need not necessarily be executed at once," their execution should "not be put-off to a non-existent date." The first of these articles prohibits the acquisition of independently existing states as if they were private property (article 2). I suppose Kant found it impractical to call for the immediate prohibition of such acquisitions as it was such a commonplace practice in the Europe of his day for states to be acquired through marriage and other family alliances among the ruling class. Of course, if such a prohibition were to be a part of any global peace treaty today, considerable latitude would have to be allowed to the U.S. as it is essentially the product of the acquisition of territory as private property, and, at least in the case of Hawaii, of the acquisition of an independently existing state. But at least we might be able to say that this is a problem of the past, as political expediency no longer calls for the acquisition of independently existing states-especially as the forcible interference in the constitution or government of other states can meet that expediency.

 

영구평화론의 다른 예비조항에서 칸트는 “상황에 따른 어느 정도의 주체적인 범위를 허용”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비록 그들은 “한번에 반드시 시행되어져할 필요는 없을지라도,” 그들의 집행은 “무한정 연기되어서는 안된다." 이 조항들의 첫째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국가들의 인수를 금지하는 것이다. 마치 그들의 개인적인 재산인 것처럼 나는 추측한다. 그러한 인수의 즉각적인 금지를 요구하는 것이 실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칸트는 알았다. 지배계급 사이에 결혼과 다른 집안의 동맹을 통하여 얻어질 국가를 위하는 당시 유럽에서는 그러한 흔해빠진 일이였듯이, 당연히, 만약 그러한 금지령이 오늘날 세계평화협정의 일부분이었다면, 상당한 범위는 미국에게 허용되어져할 것이다. 개인재산으로서의 영토의 습득의, 그리고, 적어도 하와이의 경우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국가의 습득의 본질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이것이 과거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국가의 헌법이나 체제 내에서의 강제적인 간섭과 같은 정치적 편의는 더 이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특별한 국가의 취득을 요구하지 않는다. - 편의를 만날 수 있는 -*

 

The last two of Kant's preliminary articles of peace are very much relevant today; however, and due to political expediency, it is still very difficult to imagine how they could be executed at once, or even at some future date. Here Kant suggests that if the nations of the world really want peace then standing armies should be gradually abolished (article 3) along with the accumulation of national debt "in connection with the external affairs of the state" (article 4). Regarding the former, Kant foresees an arms race in which states seek "to outdo one another in arming unlimited numbers of soldiers, and since the resultant costs eventually make peace more oppressive than a short war, the armies are themselves the cause of wars of aggression." Kant even warns that such an arms race might compel states "to mount preventative attacks." Some hundred and fifty years before Eisenhower, Kant seems to have seen the danger of the Industrial Military complex: "for of the three powers within a state-the power of the army, the power of alliance and the power of money-the third is probably the most reliable instrument of war."

 

평화에 과한 칸트의 예비조항의 마지막 두 가지는 오늘날과 매우 연관이 있다. 그러나 정치적 책략으로 인하여, 즉시나 장차 미래에라도, 어떻게 그들이 실행할 수 있는지 상상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여기서 칸트는 제안한다. 만약 세계의 민족들이 평화를 정말 원한다면, 상비군은 “국가의 대외적 분쟁과 관련하여” 국채의 축적과 함께 점차 폐지되어야 한다. 이전과 관련하여, “군인들의 무장을 갖추고, 무제한적인 숫자들에 있어서 국가들은 다른 나라를 이기기 위한 시도를 하는” 군비경쟁을 칸트는 예견하였고, 그리하여 그 결과 비용들은 마침내 평화를 단기간의 전쟁보다 더 가혹하게 만들고, 상비군은 그 자체로 공격적 전쟁의 원인이 된다." 칸트는 경고한다. 그러한 군비경쟁은 국가로 하여금 “예방적인 공격에 착수하도록” 강요한다. 아이젠하워전의 약 백년이나 50년에, 칸트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봐왔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 내의 세 가지 권력-군사력, 동맹력과 자본력- 중 세 번째 것은 아마도 가장 믿을만한 전쟁의 도구이다.

 

Kant's prohibition against the incurrence of national debt for foreign military adventures seems perhaps even more prescient. The neo-con adventure in Iraq would, of course, be completely inconceivable without the tremendous debt which has been accumulated. Kant's explanation for this article of peace seems as if he had in mind precisely the case with the U.S. today:

 

외국의 군대 파병에 따른 국채의 초래에 반대하는 칸트의 금지령은 아마도 보다 더 일찍 알았던 것 같다. 이라크에 대한 신보수주의의 위협은 완전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계속 축적되어온 거대한 채무 없이는. 평화의 이 조항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마치 오늘날 미국의 경우를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There is no cause for suspicion if help for the national economy is sought inside or outside the state (e.g. for improvements to roads, new settlements, storage of foodstuffs for years of famine, etc.). But a credit system, if used by the powers as an instrument of aggression against one another, shows the power of money in its most dangerous form. For while the debts thereby incurred are always secure against present demands (because not all the creditors will demand payment at the same time), these debts go on growing indefinitely. This ingenious system, invented by a commercial people in the present century, provides a military fund which may exceed the resources of all the other states put together. It can only be exhausted by an eventual tax-deficit, which may be postponed for a considerable time by the commercial stimulus which industry and trade receive through the credit system. This ease in making war, coupled with the warlike inclination of those in power (which seems to be an integral feature of human nature), is thus a great obstacle in the way of perpetual peace. Foreign debts must therefore be prohibited by a preliminary article of such a peace, otherwise national bankruptcy, inevitable in the long run, would necessarily involve various other states in the resultant loss without their having deserved it, thus inflicting upon them public injury. Other states are therefore justified in allying themselves against such a state and its pretensions.

 

만약 국민경제에 위한 원조가 국가의 안에서나 밖에서 찾게 되어 진다면, 그것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도로의 공사, 새로운 개척지, 흉년에 대비한 식료품의 저장 등) 그러나 신용체제가, 만약 다른 나라에 대항한 침략의 도구를 위해 권력에 의해 사용된다면, 그런 대부분의 위험스런 상황은 돈의 힘으로 나타난다. (국민경제를 위한) 채무로 인한 빚들은 항상 최근의 요구에 대해서 안전한 반면, (모든 채권자들이 동시에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전쟁을 위한) 채무들은 무기한으로 커가고 있다. 최근의 시기에 영리목적의 사람들에 의해 창안된, 이 교묘한 시스템은 모든 다른 나라가 모아온 자원을 넘어서게 될지도 모르는 군사자금을 제공한다. 그것은 결국 세금적자에 의해 소진될 수밖에 없고, 신용체제를 통해서 산업과 교역이 받아온 상업적인 자극에 의해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연기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전쟁을 만드는데 익숙하게 하고, 권력의 호전적인 경향과 함께(인간 본성의 없어서는 안 될 특성으로 보이는), 그것은 영구적인 평화의 길에 거대한 장애물이다. 외국의 채무는 그러한 평화의 예비조항에 의해 금지되어져야 하고, 반면에 오랜 기간 피할 수 없는, 국가적 파산은 반드시 여러 다른 국가를 자업자득이 없는 손실의 합에 연관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공적인 손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국가들은 그러한 국가와 그들의 요구에 대항해 동맹을 맺는 것을 정당화한다.

 

The Definitive Articles of a Perpetual Peace

영구평화의 확정조항

 

While the preliminary articles in Kant's treaty certainly provide much food for thought in considering whether it is possible to give peace a chance, it is with the definitive articles that we come, I think, to the real crux of the challenge of peace in our time. What Kant says here is, on the one hand, quite influential, while on the other hand, very problematic. The influential part is the second article in which Kant lays out his idea for a league or federation of nations.

 

칸트의 협약 안에 예비조항은 그것이 평화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것이 가능하지 아닌지에 대한 고려 속에 확실히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는 반면, 확정 조항과 함께, 내가 생각하길, 우리 시대의 평화에 대한 도전의 진정한 요점에 우리는 다가갔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영향력 있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영향력 있는 부분은 칸트가 국가의 동맹과 연맹에 대한 그의 생각을 펼쳐 놓은 두 번째 조항이다.

 

Kant is clearly influenced here by the political theory of the early Modern philosopher Thomas Hobbes, to whom we owe the idea of government as a social contract. In order to provide a justification for the social contract, Hobbes conceived of a hypothetical "state of nature" which would be what human society would be like without government. As Hobbes had a basically pessimistic understanding of human nature, human beings being hard-wired, so to speak, to seek only their own self-interest, the state of nature, as he conceived it, is a state of war. Everyone would have an unlimited right to get away with anything, and thus everyone would live in constant fear and danger of violent death. The life of man in the state of nature, as Hobbes famously put it, is thus "solitary, poor, nasty, brutish, and short." It is thus to get out of this state of nature that human beings would rationally choose to surrender this unlimited right, and to form a government by social contract.

 

칸트는 여기서 분명히 초기 근대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의 정치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그의 사회계약으로서의 국가이념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사회계약의 정당화를 제공하기 위해서, 홉스는 인간사회가 정부가 없는 것과 같아지게 될 가설의 “자연 상태”를 생각했다. 홉스는 기본적으로 비관적인 인간 본성의 이해를 가짐으로써, 인류는 오직 자기의 관심사에만 말하고, 찾으려고 하는데 고정화되어 간다. 그가 생각한 자연 상태는 전쟁의 상태이다. 모든 사람은 어떤 것이든 제거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폭력적인 죽음의 끊임없는 두려움과 위험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의 삶은, 홉스가 유명하게 써놓은 것처럼 “외롭고, 가난한고, 비천하고, 야비하며, 불충분하다.” 그러므로 자연의 상태를 벗어나려면 인류는 이 무제한적인 권리를 양도하도록 제한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고, 사회계약을 통해 정부를 형성해야한다.

 

The early modern political theorists such as Hobbes and John Locke were concerned only with the formation of the nation-state and did not extend their reflection to the international arena. Kant's essay extends social contract political theory to the relations between states. Kant begins the second section of his essay introducing the idea of an international social contract:

 

초기 근대 정치이론가인 홉스와 존 로크는 오직 민족 국가 형성에만 염려하였고 그들의 생각을 국제적인 무대에까지 확장하지는 않았다. 칸트의 에세이는 사회계약 정치 이론을 국가사이의 관계에까지 확장했다. 칸트는 그의 에세이의 두 번째 부분에서 시작하였다. 국제적인 사회 계약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A state of peace among men living together is not the same as the state of nature, which is rather a state of war. For even if it does not involve active hostilities, it involves a constant threat of their breaking out. Thus the state of peace must be formally instituted, for a suspension of hostilities is not in itself a guarantee of peace.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이에서 평화의 국가는 자연 상태와는 같지 않다. 그것은 차라리 전쟁의 상태이다. 그것이 적대적인 행위를 포함하고 있지 않더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끊임없는 파괴의 위협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평화의 상태는 정상적으로 세워져야 한다. 전쟁에 매달리는 것은 그것 자체로 평화에 대한 보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Kant follows Hobbes here more than Locke in conceiving the state of nature as a state of war (Locke conceived the state of nature as bound by natural law, and thus it is not necessarily a state of war, though it is still inconvenient enough to require a social contract to get out of the state of nature). Kant argues that if the people of the world want to get out of the constant state of war among nations, then the nations of the world ought to form a federation of nations:

 

칸트는 여기 전쟁의 상태로서의 자연의 상태에 대한 생각에서 로크보다 홉스를 더 따른다. (로크는 자연법에 의해 얽매인 자연의 상태를 상정하고, 그러므로 그것이 반드시 전쟁의 상태는 아니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여전히 자연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회계약을 필요로 하기에 충분히 필요치 않지만,) 칸트는 세계의 사람들이 끊임없는 국가사이의 전쟁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세계의 사람들은 국가 간의 동맹을 형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Each nation, for the sake of its own security, can and ought to demand of the others that they should enter along with it into a constitution, similar to the civil one, within which the rights of each could be secured. This would mean establishing a federation of peoples.

 

각 국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하나의 체제 안으로 함께 들어갈 것을 다른 국가에게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야한다. 시민들에게 하나의 비슷한 것으로, 각각의 권리가 안전해질 수 있는 것 안에서 이것은 인민의 동맹을 설립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Kant is clear that he is not thinking of an "international state" or one world government. Each state retains its sovereignty in the same way that individuals retain their rights in entering the social contract (Kant follows Locke here more than Hobbes in arguing that states and individuals have rights that cannot be given up). Kant argues that the only way of giving a perpetual peace a chance is through such an agreement between nations:

 

칸트는 그가 “국제적인 국가”나 하나의 세계정부를 생각했던 것이 아니란 것이 분명하다. 각 국가는 그들의 통치권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유지한다. 개개인들이 그들의 권리를 유지하면서 사회계약에 참가하는, (칸트는 국가와 개개인들은 포기되어질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는 점에서, 이 부분에서 홉스보다 로크를 더 따른다.) 칸트는 영구평화의 기회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러한 국가 간의 협약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But peace can neither be inaugurated nor secured without a general agreement between the nations; thus a particular kind of league, which we might call pacific federation, is required. It would differ From a peace treaty in that the latter terminates one war, whereas the former would seek to end all wars for good. This federation does not aim to acquire any power like that of a state, but merely to preserve and secure the freedom of each state in itself, along with that of the other confederated states, although this does not mean that they need to submit to public laws and to a coercive power which enforces them, as do men in a state of nature. It can be shown that this idea of federalism, extending gradually to encompass all states and thus leading to perpetual peace, is practicable and has objective reality.

 

그러나 평화는 국가 간의 일반적인 동의 없이는 개시될 수도 보장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적인 동맹이라고 부르게 될, 일종의 특별한 협약은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의 전쟁이 종식된 후자 속에서의 평화협정과는 차이가 있는데 반하여, 전자는 선을 위한 모든 전쟁을 끝내는 것에서 찾을 것이다. 이 동맹은 국가가 어떤 권력과 같은 것을 얻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각 국가가 다른 동맹 국가들과 함께, 스스로의 자유를 보장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하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강요하는 강압적인 권력과 공권력을 허락하는 것을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점차 모든 국가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하는 연방주의의 이념은 보여질 수 있고, 그러므로 실행가능하고 실재적인 목적을 가진 영구적인 평화에 이를 것이다.

 

Kant's idea of a particular kind of league of nations which would seek to end all wars for good was, of course, first proposed as the League of Nations at the end of the first world war. The U.S., of course, didn't articipate in the League of Nations because the Senate, controlled by Republicans after the election of 1918, voted against the ratification of the Treaty of Versailles. The League of Nations came to an end with the onset of the second world war, but was resurrected in its aftermath as the United Nations.

 

선을 위한 모든 전쟁을 끝내는 것을 추구하려했던, 이러한 특별한 국가 간의 연맹에 대한 칸트의 이념은, 당연히, 1차 대전의 끝에 국제연맹으로서 처음 제안되었다. 당연히, 미국은 베르사유 조약의 승인에 대항해 투표하였던, 1918년의 선거 이후 공화당의 집권하였던 상원의사당 때문에 국제 연맹에 참여하지 않았다. 국제연맹은 2차 대전의 습격과 함께 끝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것의 영향 아래, UN으로서 부활하였다.

 

The problem with the League of Nations, as well as its successor, is that there is no coercive power to enforce international law. The success of the federation, as Kant makes clear, depends upon the mutual agreement of the member nations. The main weakness of the United Nations today is that the most powerful nation in the world, led by the neo-cons in the Bush Administration, has shown utter contempt for the United Nations and clearly operates as if the international arena were a Hobbesian state of nature.

 

UN만큼 국제연맹의 문제는, 국제적인 법을 강요할 강압적이 힘이 없다는 것이다. 칸트가 분명히 했던, 연맹의 성공은 국가 회원들의 상호 협약에 달려있다. 오늘날 UN의 주요 취약점은 부시정권 아래의 신보수주의가 이끌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국가인 미국이 UN에 대해 단호한 경멸을 보여 왔고, 마치 국제적인 무대가 홉스식의 자연의 상태인 것처럼 분명하게 조종하였다는 것이다.

 

Hobbes was quite explicit that in the state of nature the question of justice and injustice cannot even arise: "To this war of every man against every man, this is also consequent; that nothing can be unjust. The notions of right and wrong, justice and injustice have there no place. Where there is no common power, there is no law: where there is no law, no injustice." Although the Bush Administration has tried to justify its wars of aggression to the American public, it's clear from everything they did in the run-up to the war in Iraq-when instead of doing everything in their power to avoid war and find a peaceful solution, they, in fact, did everything in their power to avoid a peaceful solution and find a reason for war-as well as their disregard of the Geneva Conventions concerning the treatment of prisoners during the occupation of Iraq, that their real position is that they need not be concerned with the question of justice and injustice and the restrictions of international law. Kant had this to say about people like these architects of the Iraq war who have chosen to reject international law and the federation of nations and instead plunge the nations of the world into a state of nature in which the future of humankind seems likely to be nasty, brutish, and short: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 정의와 부정의 문제가 발생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였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부조리할 수 없다. 권리와 권리침해, 정의와 부정의의 개념은 아무데도 없다. 공동의 힘은 어디에도 없다. 법도 없다. 법과 부정의는 어디에도 없다." 비록 부시 정권은 미국인들에게 침략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지만, 그들이 결국에 모든 것들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들 스스로 전쟁을 피하려 하고, 평화로운 해결책을 찾으려는 모든 행위를 하는 대신에, 사실, 그들은 평화로운 해결책을 피하려하고, 이라크 점령 중에 죄수들의 처리에 관한 제네바 협약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전쟁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고 그들 스스로 모든 행위를 하였다. 그것이 국제적 법률의 제한과 정의와 부정의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필요치 않은 그들의 진정한 입장이다. 칸트는 이것을 가지고 이라크 전쟁의 기획자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말한다. 국제적 법률과 국가의 연맹을 거절하기를 결정하고, 인류의 미래가 비천하고, 야비하고, 부족해 보이는 것 같은 자연의 상태 속으로 세계의 국가를 내던지는 이라크 전쟁의 기획자들

 

We look with profound contempt upon the way in which savages cling to their lawless freedom. They would rather engage in incessant strife than submit to a legal constraint which they might impose upon themselves, for they prefer the freedom of folly to the freedom of reason. We regard this as barbarism, coarseness, and brutish debasement of humanity. We might thus expect that civilized peoples, each united within itself as a state, would hasten to abandon so degrading a condition as soon as possible. But instead of doing so, each state sees its own majesty (for it would be absurd to speak of the majesty of a people) precisely in not having to submit to any external legal constraint, and the glory of its ruler consists in his power to order thousands of people to immolate themselves for a cause which does not truly concern them, while he need not himself incurany danger whatsoever. . . .

 

우리는 야만인들이 그들의 비합적인 것에 매달리는 방식에 대한 뿌리 깊은 경멸에 관해서 봤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강요하는 합법적인 제약을 허락하는 것보다 끊임없는 투쟁을 시작하려 할 것이다. 이성의 자유보다 어리석은 자유를 더 좋아함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인류의 야만, 비속, 그리고 야수적인 모독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명화된 사람들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국가 안에서 각각 하나가 된, 가능한 빨리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에 대해 버리는 것을 서두르려고 하는 문명화된 시민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에, 각 국가는 정확하게 어떤 외부의 법적 강제에 귀속되어야할 필요가 없는 의미에서 국가의 위엄(그것이 인민의 위엄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을 알고 있고, 지도자의 영광은 그의 권력 안에서 수 천명의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도록 구성되었다. 지배자는 그들, 국민들을 진정으로 염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발생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There remains one further aspect of Kant's essay which is necessary to discuss and that is the problematic first definitive article of a perpetual peace. Kant argues that for this federation of nations to be possible it is first necessary that the constitution of every state be a republic. Fortunately, it proved not to be necessary to wait for this to come to pass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United Nations. Unfortunately, this requirement can be construed as a reason not to take the United Nations seriously, and even more perniciously, as a justification for wars of aggression in the name of democracy. However, Kant's argument is not based on the intrinsic superiority of a republic in itself (he argues for a republic over a pure democracy for the essentially the same reason Madison did, and the reason why the U.S. Constitution is a republic-and that is the danger of the tyranny of the majority, which could not be avoided if a simple majority vote of the people decided every issue and the executive and legislative powers were not separated). Kant's argument is rather that war would be less likely if the government were accountable to the people as in a republic:

 

칸트의 에세이의 더 나아가 영구평화의 첫 확정조항을 논의하고, 문제 삼을 필요가 있는 측면이 남아있다. 칸트는 이 국가의 연맹에 있어서 모든 국가의 헌법이 공화정이 되어야할 우선적인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행히도, 이것은 UN의 설립일 일어나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불행히도, 이 요구는 UN을 일으키지 않는 심각하고 보다 더 치명적인 이유로서 해석될 수 있다. 민주주의라는 이유 아래 침략을 위한 전쟁의 정당화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칸트의 주장은, 그의 주장 안에서 공화정의 본질적인 우세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그는 메디슨 대통령이 했던 본질적인 같은 이유에서의 단순한 민주주의의 공화정에 대해 주장하고, 미국의 체제가 공화정인 이유이고, 그것은 다수의 횡포라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만약 모든 문제와 집행 그리고 입법권을 결정하는 다수의 투표가 나눠지지 않는다면 필할 수 없는 다수의 횡포) 칸트의 주장은 만약 정부가 공화정 체제로서 사람들에게 그럴듯해 보인다면 차라리 전쟁은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다.

 

If, as is inevitably the case under this constitution, the consent of the citizens is required to decide whether or not war is to be declared, it is very natural that they will have great hesitation in embarking on so dangerous an enterprise. For this would mean calling down on themselves all the miseries of war, such as doing the fighting themselves, supplying the costs of the war from their own resources, painfully making good the ensuing devastation, and, as the crowning evil, having to take upon themselves a burden of debt which will embitter peace itself and which can never be paid off on account of the constant threat of new wars. But under a constitution where the subject is not a citizen, and which is therefore not republican, it is the simplest thing in the world to go to war. For the head of state is not a fellow citizen, but the owner of the state, and a war will not force him to make the slightest sacrifice so far as his banquets, hunts, pleasure palaces and court festivals are concerned. He can thus decide on war, without any significant reason, as a kind of amusement, and unconcernedly leave it to the diplomatic corps (who are always ready for such purposes) to justify the war for the sake of propriety.

 

만약, 이런 체제 아래에서의 불가피한 경우라면, 전쟁이 공표되어지든지 어떤지를 결정에 대해 시민의 동의가 요구될 것이고, 그들이 그런 위험스런 사업에 착수하는 것에 대해 큰 망설임을 가지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모든 전쟁의 비참함을 그들 스스로 비난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싸우게 되는 것이고, 그들 소유의 자원으로부터 전쟁의 비용을 지원하고, 뒤이은 황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고, 그리고, 최고의 악마로서, 빚의 짐을 스스로 떠맡게 되는 것이다. 평화를 스스로 비참하게 하고, 새로운 전쟁의 끊임없는 위협 때문에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는 빚의 짐. 그러나 주체가 시민이 아닌 체제 아래에서, 그리고 공화주의자도 아닌, 그것은 세계에서 전쟁으로 가는 가장 간단한 것이다. 국가의 소유자 뿐만 아니라 국가의 수장이 시민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전쟁은 그에게 그의 연회, 사냥, 유희 궁전과 궁중의 축제를 염려할 만큼, 조금도 희생을 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즐거움과 같은 종류의, 어떤 중요한 이유없이 전쟁을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무사태평하게 타당성의 이유를 통해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항상 준비된)외교단에게 그 일을 맡긴다.

 

Not surprisingly there has been much discussion of this point, and sometimes it has been argued that Kant's whole scheme has been undermined by the unfolding of history since Kant's day with numerous examples of republics making war upon one another. Two replies to this objection, however, have been offered. The first is that it is not so clear that there has been war between states that "really do satisfy Kant's own highly stringent definition of a republic" and secondly, "it must always be remembered that Kant never argues that even a worldwide federation of republics makes permanent peace necessary; his view is rather that only such a federation makes permanent peace even possible. Kant's final word, after all, is that human beings have free will, and no matter what remain free to choose to do what is right, but equally free, alas, to choose evil over good."

 

놀랍지 않게도 이 점에 관한 많은 담론이 있어왔고, 때때로 그것은 칸트의 모든 계획은 역사의 전개에 의해 몰래 손상되어 왔다고 논의되어왔다. 칸트의 생애 이래로, 공화정이 또 다른 전쟁을 만든 다수의 사례와 함께 그러나 이 반대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은 제공되어져 왔다. 첫 번째는 “칸트가 말한 매우 엄격한 공화정의 정의에 정말로 만족한” 국가 사이의 전쟁이 있어왔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두 번째, “그것은 항상 기억되어져야 한다. 칸트는 결코 공화정의 세계적인 연맹들조차도 영구한 평화를 필요로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관점은 차라리 오직 그러한 연맹은 영구한 평화를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칸트의 마지막 말은 인류는 자유로워질 것이고, 비록 권리가 무엇인지 행동할 수 있는 선태의 자유가 남아있을지라도, 슬프도다. 선보다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똑같다.

 

The example set by the U.S., in the last half-century at least, does not necessarily refute this last point; however, it does raise the question of whether a republican form of government is enough to protect a democracy against the problem of the tyranny of the majority. I don't imagine that Kant ever foresaw a republic such as ours, where the people could be so oblivious to the real costs and miseries of war. What Kant says above about the despotic owner of a state applies just as easily to our leaders in Washington today. What value is there in a republic today, as far as avoiding unnecessary wars, if the people can be so insulated from the devastating effects of war?

 

적어도 지난 반세기 안에 미국에 의한 사례는 이 마지막 부분을 논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부의 공화주의적인 형태이든지 어떤지 간에 제기된 문제는 다수의 횡포의 문제에 반한 민주주의를 보호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나는 칸트가 항상 사람들은 전쟁의 실비용과 비참함에 대해 안중에 없을 수 있는, 우리 나라의 것과 같은 공화정을 예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칸트가 상술하여 했던 것은 오늘날 워싱턴에 너무 쉽게 우리의 지도자에게 주어진 국가의 독재자이다. 만약 사람들이 전쟁의 황폐한 영향으로부터 고립될 수 있다면, 오늘날 공화국에 불필요한 전쟁을 피할 만큼의 무슨 가치가 있는가?

 

One of the principle reasons the U.S. is in Iraq today is that the American people never really learned the lesson from the Vietnam war. As soon as the troops came home and the protests ended, the corporate controlled media began a reactionary counter-movement which pretty much successfully obliterated the memory of what happened in Vietnam. This came home to me most powerfully in one of my Introduction to Western Philosophy courses last year. During our review of the issue of the ethics of war and peace, I had the students watch the film The Fog of war. Before watching the film, I said that most Americans probably know about how many Americans died in the war, but probably don't know how many Southeast Asians perished. So I asked them. There was a few minutes of silence, and then one young woman raised her hand and hesitatingly responded: "10,000?" That about sums up the problem for me. How many Americans really understand that millions died, and-as Robert McNamara seems to acknowledge in The Fog of war-for really no good reason. 9. Documents declassified by the Vietnamese government in 1995 put the total casualties at 5.1 million. What was the reason? Oh, that's right, all those millions died so that we could stop the dominoes from falling and halt the spread of communism. McNamara admits that the U.S. just simply never understood that the Vietnamese saw it as a war of independence. The U.S. has still never come to terms with the terrible moral failure that was the war in Vietnam.

 

오늘날 이라크에서 미국의 원리 원칙 중 하나는 미국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결코 교훈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대가 돌아오자마자 그리고 그 항의는 끝났다. 기업은 미디어를 반작용의 대항운동을 시작하도록 조종했다. 베트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너무나 성공적이었던 이것은 나에게 지난해 서양철학의 과정에 대한 나의 소개의 하나에서 가장 강력하게 다가왔다. 전쟁과 평화의 윤리의 문제에 대한 나의 관점 중에, 나는 학생들에게 영화 전쟁의 안개를 보여주는 기회를 가졌다. 영화를 보기 전, 나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마도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는지 알고 있지만, 아마도 얼마나 많은 동남아시아인이 처형당했는지는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침묵의 몇 분은 있고 나서 한 젊은 여인은 손을 들었고 망설이며 대답했다. “만명?” 나에게 문제는 그 합계이 관해서이다.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이 백만인이 죽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로버트 맥나마라가 The Fog of war에서 인정했던 것처럼-정말 좋은 이유는 없었는지 이유가 무엇일까? 오, 맞다. 연달아 넘어지는 것과 공산주의 확산의 저지를 우리는 멈출 수 있어서, 저 모든 백만 인이 죽었다. 맥나마라는 미국은 단순히 베트남사람들이 독립전쟁으로서 봐왔던 것을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고 인정하였다. 미국은 결코 여전히 베트남에서의 끔찍하고 윤리적인 실패인 전쟁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Our corporate controlled "free press" tells us that the "surge" in Iraq is going great. They won't tell us; however, what is really going on in Iraq. The majority of Americans may be tiring of the war, like they tire of yesterday's news; yet they still don't really understand what a moral failure it is once again that U.S. troops are engaged in a war for no good reason. The fear of communism was replaced by the fear of terrorism in leading the American people to support another unnecessary war. It certainly doesn't help put out the fires of terrorism by participating in terrorism. When it is understood that over a million Iraqis have already perished, supposedly as a response to the threat of terrorism and in retaliation for the 3000 that died in New York on 9/11, when it turned out that Iraq was never really a threat and certainly had nothing to do with the atrocity of 9/11, then it must be recognized that the invasion and occupation of Iraq has been, itself, an act of terrorism that dwarfs what happened on 9/11. Americans are simply as oblivious to the real causes of the problem of terrorism as they are to the real costs and miseries of war.

 

우리의 기업이 지배해온 “자유언론”은 우리에게 이라크에서 커져가는 “동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이라크에서 진정으로 무엇이 진행되는지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인들의 다수는 아마도 전쟁에 실증날 것이다. 그들이 어제의 뉴스에 싫증내듯이, 아직 그들은 미군부대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전쟁에 참여하였다는, 여전히 다시 한 번 나타난 도덕적 실수를 이해하지 않고 있다. 공산주의의 두려움은 미국인들을 리드하고 있는 테러리즘의 공포로 대체되었다. 또 다른 불필요한 전쟁을 지원하기위한, 그것은 테러리즘에 참여함으로써 테러리즘의 불 속에 놓이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라크인 백만 이상이 이미 처형당했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9.11에 뉴욕에서 사망한 3000명에 대한 보복과 테러리즘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생각되어진다. 이라크가 결코 협박한 적이 없고 9.11의 끔찍한 행동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그리고 나서 이라크의 침략과 점령은 테러리즘의 한 행위이여 왔다는 것은 인정되어져야 한다. 9.11에 일어난 난쟁이의. 미국인들은 전쟁의 실비와 비참함이 나타나는 테러리즘 문제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 단순히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The majority of Americans may want to bring the troops home, but what value is there in our republic if the only candidates who have a chance of being elected President next fall are not going to bring the troops home, and are committed to continuing the general direction of U.S. foreign policy? What value is there in our republic if a candidate like Dennis Kucinich, the only candidate who is committed to giving peace a chance, and understands what it would take to do so, is excluded from even participating in the debate?

 

미국인들의 다수는 군대를 데려오기를 원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공화국 안에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만약 다음 가을에 대통령으로 선출될 기회를 가진 유일한 후보자들이 군대를 데려오지 않고, 그들이 미국의 외교정책의 일반적인 지휘를 계속해나가는 것을 전념하다면, 우리 공화국 안에 가치는 무엇인가? 만약 데니스 쿠치니치와 같은 후보자, 평화의 기회를 가져오는데 헌신하고 그렇게 하도록 하려고 이해한 유일한 후보자가 그 논쟁의 참여조차에서부터도 차단되어진다면,

 

How many Americans have the slightest inkling of what political expediency really drives the U.S. war machine?

It certainly isn't a defense of democracy, as our leaders have been more than willing to overthrow democratically elected leaders if it suits that political expediency-as the assassination of Allende in Chile ought to have made clear. It certainly isn't a defense of our freedom-as the Vietnam war and now the war in Iraq should make abundantly clear. That political expediency which has made the U.S. the greatest obstacle to peace in the world today is simply the preservation and dissemination of an economic system which seeks, above all, to maximize wealth in the hands of the very few. The $400 million retirement package doled out to the former CEO of Exxon Corporation in 2005 perhaps stands as the best illustration of what our troops are really dying and killing for. In the century ahead, with unparalleled crises facing humanity, that expediency is beyond abominable. John Lennon hit the nail on the head when he said, as recorded in The U.S. vs John Lennon, "our society is run by insane people for insane objectives."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이 정치적 편의가 미국을 전쟁기계로 몰고 가고 있다는 어렴풋한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을까? 그것은 민주주의의 옹호가 아닌 것이 명백하다. 우리의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를 전복시키려 하는 것이 적합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유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베트남 전쟁과 지금 이라크에서의 전쟁이 매우 분명해지는 것처럼. 그 정치적 편의는 미국을 오늘날 세계 안에서의 평화에 거대한 장애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최소한의 방법으로 최대의 부를 누리려는 경제구조의 단순한 보존과 보급이다. 2005년 4십억달러의 퇴직 상품이 Exxon기업의 전CEO에게 주어졌다. 아마도 우리의 군대가 정말로 죽어가고 죽이고 있는 것의 최고의 사례로서 서있는 세기가 지나갈수록, 인류에 직면한 비할바 없는 위기와 함께, 그 정치적 편의는 혐오스러운 것을 넘어선다. 존레논은 The U.S. vs John Lennon에서 기록된 것으로서, 그가 말했을 때, 핵심을 찔렀다. “우리 사회는 어리석은 목적을 위한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

 

What is really absurd is that this Christmas, like every Christmas, churches all across America will be filled with those who most believe that America is a just nation-those who most stridently think of themselves as followers of the "prince of peace"-and yet they will elect more insane people for these same insane objectives and thus peace will never have a chance.

 

정말 부조리한 것은 모든 크리스마스와 같은, 이 크리스마스에 미국 전역 모두에 있는 교회는 미국은 단지 국가일 뿐이라고 가장 믿고 있는 그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것이고 -그들은 스스로를 “평강의 왕”의 지지자들로서 귀에 거슬리도록 생각하는 사람들- 아직 그들은 어리석은 목적을 위한 어리석은 사람들을 더 선출할 것이며, 그러므로 평화는 결코 기회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The problem with the U.S. is that Americans have never really understood what the key to democracy is. If one were to take a poll across America and ask everyone what is more important, faith or the love of wisdom-the capacity to question and to critically think about the important issues of the day, there isn't much doubt about what the result would be. Such a poll would reveal the contradiction within the heart of America. The first colonists were mostly religious fundamentalists who certainly had no idea of founding a democracy. That idea came more than a century later, during the height of the Enlightenment. Perhaps this was the Enlightenment and Kant's greatest naivete. The Enlightenment hope in democracy, and Kant's conviction that a republican form of government would be the best hope of giving peace a chance, both are founded on the assumption that the people are capable of the love of wisdom -and have thus, not just the freedom to choose good over evil, but the courage and strength to take up the burden of conscience in thinking through the problem of good and evil. All those Christians who think that faith is the key to democracy should read Dostoevsky's short story "The Grand Inquisitor" from The Brothers Karamazov. Then maybe they would understand how, if faith is blind, one can have faith in the precisely the opposite of what one thinks one has faith in.

 

미국의 문제는 미국인들은 정말 민주주의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결코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미국전역에서 투표가 행해지고 모두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신념이나 현명한 사랑, 문제해결능력과 오늘날 중요한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고,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에 대한 많은 의심은 없다. 그러한 투표는 미국인의 마음 안에 모순을 드러낼 것이다. 첫 식민지 이주민들은 거의 민주주의를 설립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없는 종교적인 근본주의자였다. 그 생각은 계몽주의의 정점 동안에 한 세기보다 더 지나서 왔다. 아마도 이것은 계몽주의와 칸트의 대단한 순진함이었다. 민주주의에서 계몽주의의 희망과 칸트의 확신은 정부의 공화주의적인 형태는 평화의 기회에 대한 최고의 희망일 것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다 사람들은 현명함을 사랑할 수 있고, 그러므로 악보다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지는 않지만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생각 안에서 양심의 짐을 팽팽하게 할 용기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아래에 있다. 신앙을 생각하는 이 모든 기독교인들은 민주주의 비결은 도스토에프스키의 짧은 이야기이면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원작인 “대심문관”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아마도 그들은 이해할 것이다. 만약 신앙이 가려졌다면,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사람이 믿고 있는 것의 정확한 반대 속에 어떻게 사람이 신앙을 가질 수 있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Given the state of affairs in the world today it certainly seems naive to think that a perpetual peace can ever be achieved. There is certainly no hope for Kant's plan for a perpetual peace if the most powerful nation in the world cannot come to its senses and set a better example for the nations of the world to follow in living up to the requirements of international law. Maybe, just maybe, war could be over-if we just wanted it. Imagine that.

 

오늘날 세계에서 주어진 상황은 영구한 평화에 언젠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하다고 보는 것이 분명하다. 영구평화에 대한 칸트의 계획에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만약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영구한 평화의 의미에 다가갈 수 없고, 국제적인 법의 요구에 이르러 살아가는 것을 따르는 세계의 국가에 대한 나은 사례를 세울 수 없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아마도, 전쟁은 끝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원한다면. 상상해봐라

 

Timothy J. Freeman teaches philosophy at the University of Hawaii at Hilo. He can be reached at freeman@hawaii.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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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S. Aggression Process and Its Collaborators:From Guatemala (1950-1954) to Iran (2002-)

철학/가치론연습 2008. 4. 28. 14:37

미국 침략과정과 그 협력자 : 과테말라(1950~1954)에서 이란(2002)까지

가치론 연습 수업시간에 발표된 내용을 올립니다. 번역본인데, 오역이 많습니다. 읽으시면서 찬찬히

내용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간단한 요약을 해드리겠습니다. 9.11테러 이후의 미국이 행한 전쟁과 지난 수십년간 미국이 벌여온 전쟁의 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전세계에서 미국은 2개의 대륙에서 3회에 걸친 전쟁을 해왔다.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지금 미국은 이란을 향해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UN은 그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지난 수세기동안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평화와 민주주의의 번창, 자유, 인권 등의 명목하에 세계여러나라를 침략하여 UN의 국제법을 수십차례나 어겨오고, 당당히 세계 앞에 서있다. 심지어 유엔의 국제법의 몇가지 조항은 미국을 제외로 하고 있다. 미국은 국제적인 범죄와 전쟁을 막기위한다지만, 실질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 명백하다.

그 과정은 이러하다. 어느 어느 나라에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모든 언론을 동원하여 그 나라를 악의 축, 악마화시킨다. 세계의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침략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나라 어느 곳에도 대량 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실제로 이라크의 경우, 대량살상무기를 찾기 위해 침략한 미국이 찾아낸 무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2002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의 실제 목적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란, 이 세 곳을 점령하여 석유를 자기 나라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려는 심산이다. 그들이 욕하는 전쟁광, 악의 축의 나라들은 실제로 아무짓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뿐이다. 실제로 전쟁광, 악의 축은 미국, 부시정권인 것이다.

또한 미국은 언론을 조작하여 그들의 비리를 숨기고 오히려, 그들이 침략하려는 나라를 세계의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유엔은 미국의 뒷처리를 하는 개에 불과하다. 세계 평화와 안녕을 위한다는 유엔은 미국의 만행을 그대로 방치하고 오히려 더 복돋우려고 한 뿐이며, 더한 경우 원조까지 하려고 한다. 그 예가 NATO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평화의 이름으로 전쟁을 시작하고, 그 나라에 수많은 죄없는 시민들을 살해하고, 궁핍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그런 미국의 힘에 눌려, 미국이 벌려 놓은 전쟁을 무마시키거나, 아니면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미국은 자국내의 국제기업과 정책집행자들 간에 손을 잡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일할 뿐이며, 미국의 주요 언론 또한 진실을 외면하고 오히려 국가에 이익이 되는 정보만을 제공한다. 자유의 나라,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은 실제로 제국주의와 다름없는 나라이다. UN은 미국의 뒷처리를 하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치켜세워 준다.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은 미국의 행위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으며, 아무런 행동이나 언사도 하지 않고 있다. 매우 실망이다.

다음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시면 전체적인 흐름이 이해가 가실것입니다. 번역이 서툴러서 잘못된 것도 있을 것이나 양해바랍니다. 참고로 이글은 제가 번역한 것이 아니고,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이 번역한 것입니다. 너무도 중요한 이야기이고, 누구나 알아야 되는 이야기이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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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S. Aggression Process and Its Collaborators:

From Guatemala (1950-1954) to Iran (2002-)

미국 침략과정과 그 협력자 : 과테말라(1950-1954년)에서 이란(2002)까지

by Edward S. Herman and David Peterson

We are living in a very dangerous period in which a predatory superpower has embarked on a series of aggressive wars in rapid succession—three on two different continents during the past decade alone. Not only have these wars violated the UN Charter, and constituted what U.S. Supreme Court Justice Robert Jackson declared at Nuremberg to be “the supreme international crime;” not only has it gotten away with its wars, despite their increasingly destructive and murderous nature; but in waging them, the United States has been able to enlist leaders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nd United Nations in support of its assaults on distant lands.[1] As the world's preeminent multilateral organization, the central purpose of which was purportedly to save humankind from the scourge of war, and to ensure that armed force not be used except for the common defense, we find the UN’s role here to be troubling indeed.

우리들은 욕심 많은 초강대국이 일련의 침략 전쟁을 신속하게 지속하고 있는 무척 위험한 시기에 살고 있다. - 지난 10년 동안에 2개의 대륙에서 3회에 걸쳐서- 이 전쟁은 국제 연합 헌장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미국 대법원장 Robert Jackson이 “최고의 국제범죄”라고 Nuremberg에서 선언한 것과 같다. 점차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전쟁을 해치웠다. 그럴 뿐만 아니라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국제 공동체”와 유엔의 지도자들을 자신들의 먼 거리에 있는 공격을 지지하는 명단에 올릴 수 있었다. [1] 세계의 압도적인 다자주의적 기구로서, 그 기구의 중요한 목적은 전쟁의 고난으로부터 인류를 구해내고, 군사력을 공동 방어를 위한 것을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주요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유엔의 역할이 실제로는 여기에서 곤란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his superpower's wars are opposed by a majority of the world's population, and often even by a majority of the heavily propagandized citizens of its own country. [2] But popular opinion and voter preferences, even when manifested in national elections, as in November 2006, do not determine policy in the United States. Freed at last from any deterrent of the kind the Soviet Union exercised until its demise, and the kind posed for a more abbreviated period by the civil protests that confronted it on its own streets between 1965 and 1974, the U.S. program of "power projection" proceeds apace. Now it sets its sights on Iran, likely to produce a much wider war and one that quite possibly could involve the use of nuclear weapons.

미국의 전쟁은 세계 인구의 대다수에 의해 반대되고, 종종 자기 나라의 대다수의 선전된 시민들에게 마저도 반대된다. [2] 그러나 여론과 투표자들의 선호가 2006년 11월에서처럼 전국적인 선거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듯이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지 못한다. 소련이 망할 때 까지 수행했던 전쟁 억제력으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워지고, 또 1965년과 1974년 사이에 미국이 거리에서 대면하였던 시민들의 저항에 의해 더욱더 짧아진 기간 동안 제기되었던 문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으로써 미국의 “세력 확장”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지금 미국의 “세력 확장” 계획이 이란에서 목격되고 있다. 핵무기의 사용을 포함할지도 모른다는 더 광범위한 전쟁을 야기할 듯싶다.

U.S. wars of aggression are certainly not new, nor is its leaders' brazen disregard for international law. Greece, Guatemala, Lebanon, the Dominican Republic, Vietnam, Cambodia, Laos, Grenada, Panama—these do not exhaust the list of U.S. victims since World War II. What is more, the assumption that international law does not apply to the United States is longstanding. The "propriety of the Cuba quarantine is not a legal issue," former U.S. Secretary of State Dean Acheson explained in reference to Kennedy's naval blockade of Cuba during the 1962 missile crisis. "The power, position and prestige of the United States had been challenged by another state; and law simply does not deal with such questions of ultimate power.”[3] For Acheson, any U.S. action to counter alleged threats trumps international law, and law cannot be allowed to interfere with the exercise of the "pre-eminent power" of this country. The belief that although law should apply to others, it never applies to the United States, was internalized long before Acheson's day; and it reaches straight through to the present, widely accepted abroad because the scale of U.S. power permits its leaders to ignore the law with complete impunity.

미국의 침략전쟁은 확실히 새롭지 않고, 미국의 지도자는 또한 국제 법을 뻔뻔스럽게 무시한다. 그리스, 과테말라, 레바논, 도미니카 공화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그레나다, 파나마 - 이 국가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희생자들의 명단의 전부가 아니다. 게다가 국제법이 미국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전제는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전 미국 국무장관 Dean Acheson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의 케네디의 해상 봉쇄를 언급하면서 “쿠바 봉쇄는 법적인 문제가 아니다”라고 설명하였다. "미국의 권력, 입장과 특권은 지금까지 다른 나라로부터 도전받지 않아왔다.; 그리고 법은 단지 초강대국의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3]Acheson의 경우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는 미국의 행동은 국제법보다 우세하며, 국제법이 미국의 “초강력” 무력사용을 방해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비록 법이 다른 나라에 적용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미국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신념은 Acheson이래로 오랫동안 내면화되었다.; 그것은 곧바로 현재에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널리 인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과 같은 규모의 초강대국은 그 지도자들에게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고 법을 무시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But the aggression pace and scale has been stepped up in recent years, based on a number of factors: The collapse of the containing power, the vested interests in U.S. power projection in the Middle East—the Israeli lobby, oil interests, the military-industrial-complex—and the ideology and politics of a militarized capitalist state.

그러나 공격 속도와 규모는 이런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서 근래에 들어서 더욱 강화되어 왔다. 즉, 견제 세력의 붕괴, 중동에서 “세력 확장” 계획이 받는 엄청난 이익 - 이스라엘의 로비, 석유 이권, 군산 복합체- 그리고 군국주의화된 자본주의국가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그러한 것들이 이러한 요인들이다.

The aggression process has always involved demonization of the target, with the establishment media regularly carrying out their propaganda service in ways that match anything achievable in a totalitarian state. In the case of the joint U.S-proxy army attack on Guatemala in 1954, the New York Times swallowed and disseminated the lie that the Reds had taken over that country (e.g., Sidney Gruson, “How Communists Won Control of Guatemala,” March 1, 1953), just as the paper swallowed and disseminated the official line in 2002-3 that Saddam Hussein possessed weapons of mass destruction. Equally important in both cases was the suppressed context: In the case of Guatemala, the vested interests of United Fruit Company in the ouster of the elected government, the ties of high U.S. officials to that company (including Eisenhower's Secretary of State, John Foster Dulles), and the fact that Guatemala was virtually unarmed and posed not the slightest threat to the security of the United States or Guatemala’s small neighbors. In the case of Iraq, major suppressions included the facts that the United States had actually supplied Saddam with “weapons of mass destruction” when he was attacking Iran, and that he failed to use such weapons during the 1991 Persian Gulf War because he recognized that the United States could retaliate in kind with overwhelming force—the disclosure of which would weaken the case that his possession of such weapons in 2002-3 posed any threat to this country or Israel, except that of self-defense.

그 공격 과정은 언제나 공격 대상을 악마화 하는 것을 포함해 왔다. 주류언론(기득권을 갖는 미디어, 거대 미디어언론)들이 정기적으로 그들의 선전을 수행함으로써,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에 비교되는 방식으로. 1954년 과테말라에 대한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의 공격, 뉴욕타임즈는 이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퍼뜨렸다. 공산당들이 과테말라를 넘겨받았다는 식으로 (e.g., Sidney Gruson의 “어떻게 공산주의는 과테말라를 제어하고 승리할 수 있었는가? 1953년. 3월 1일), 신문이 사실을 숨기고, 2002-3년에 사담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했던 것처럼. 이 두 사건 모두 진실을 언론에 발표하지 않는 배경이 동등하게 중요하다. 과테말라의 경우에는 선출된 정부를 쫓아낸 United Fruit Company (미국 과일회사)의 엄청난 이익, 미국의 고위 관료와 그 회사와의 관계, (아이젠하워의 국무장관 John Foster Dulles를 포함하여) 그리고 과테말라는 실제로는 무장을 하지 않았었고, 미국의 안전이나 과테말라의 주변의 작은 나라들에 대해서도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 더욱이 이라크의 경우에는 사담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할 때 대량살상무기를 미국이 제공해주었다는 사실을 감추어 놓고 있다는 사실, 그가 1991년의 페르시아 걸프만 전쟁 때 그런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 미국이 압도적인 힘으로 보복할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 2002년과 2003년 사이의 그러한 무기 소유는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이나 미국에게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약화시킬 수도 있는 폭로인데 이것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The aggression process not only depends on the domestic media following the official line, marginalizing dissent, and causing the public to believe in the mythical threat posed by the target, it also requires neutralization of any international response that might protect the prospective victim. In the case of Guatemala, its leaders did appeal to the UN in June 1954 for protection against an already-in-process U.S.-organized attack. But with the U.S.'s (and United Fruit investor and former spokesperson) Henry Cabot Lodge president of the Security Council, and the United States exerting intense pressure on its voting members and Secretary-General Dag Hammarskjold, the Security Council refused to consider Guatemala's case. Hammarskjold, who felt that the issue was precisely what the UN was formed to deal with, considered the U.S. effort “the most serious blow so far aimed at the Organization.”[4]

공격 과정은 공식 라인을 추종하는 국내의 언론, 반대 여론을 한쪽으로 밀쳐놓는 국내 언론, 공격 대상 국가들이 초래하는 가상적인 위협을 국민들에게 믿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국내 언론에 의존한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그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국제적인 반응을 희석화시킨다. 과테말라의 경우에, 과테말라의 지도자들은 이미 진행 과정에 있는 미국의 조직적인 공격에 대해서 보호에 달라고 1954년 6월에 국제 연합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유엔의 안전 보장 이사회의 의장인 Henry Cabot Lodge (유나이티드 프루트 투자자이기도 하고 그 회사의 대변인이기도 한 사람)와 그리고 미국이 그것의 의원투표를 위해 격렬한 압력을 행사한 사람, UN 사무총장인 Dag Hammarskjold, 안전 보장 이사회는 과테말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Hammarskjold는 문제는 UN이 바로 그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노력을 "지금까지 유엔이라는 조직을 겨냥하는 가장 심각한 일격이다" 라고 생각했다. [4]

The decade-long U.S. effort at “regime change” in Nicaragua during the 1980s involved a boycott, the mining of Nicaragua's harbors, and sponsorship and active support of a terrorist army on its borders, in violation not only of the UN Charter but also the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Charter and the Rio Treaty, the latter two quite clear on the illegality of the cross-border use of military force, “directly or indirectly, for any reason whatsoever” (OAS), and with proper authorization or “self defense” the only bases for an exception (Rio). Nicaragua brought these violations to the UN and World Court, but the United States vetoed a Security Council condemnation and ignored several adverse World Court decisions against its “unlawful use of force.” The Reagan administration could get away with this in part because the establishment media accepted its aggression and violation of international law, encapsulated in the New York Times’s editorial that dismissed the World Court as a “hostile forum” (“America’s Guilt—or Default,” July 1, 1986)—a lie, but demonstrating that the editors’ principles do not extend to universality of application and that they will apologize for blatant illegality and even aggression by their own state.

니카라과에서 1980년대에 10여 년간 지속된 미국의 “체제전복” 노력은 거부운동을 야기했다. 니카라과 항구의 광부들의 파업, 그리고 국경의 무장 테러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과 지원, 이는 유엔 헌장 위반뿐만 아니라 미국 국가의 헌장(미국 헌법)과 리우조약 위반이기도 하다. 뒤에 있는 이 두 가지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국경을 넘어서 군사력을 사용하는 불법성의 아주 명확한 예이다. (OAS - 미주헌장) 예외로는 “자기 방어” 내지는 자신의 주권을 지키기 위할 때에만 사용하게 되어있는데 이것을 위반하였다. (Rio) 니카라과는 국제 연합과 국제 사법 재판소에 이 위반들을 제소했다. 그러나 미국이 안전 보장 이사회의 비난을 비토권을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무력의 사용”에대한 몇몇 불리한 사법 재판소의 결정을 무시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러한 것들을 해치웠는데 왜냐하면 주류언론이 이런 공격과 국제법의 위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뉴욕 타임즈의 사설에 바로 이런 것 이 들어있다. 국제 사법 재판소는 “적대적인 법정”이라고 무시하는 사설을 썼는데 (“미국의 잘못인가 범죄인가” 1986년 7월 1일) - 이것은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 편집인은 보편성의 원칙을 적용하지 아니하고 자기나라에 의한 공격이나 뻔뻔스러운 불법성을 옹호하는 것이 사설에 들어있다.

U.S. Aggression After the Soviet Collapse

소련의 붕괴 이후의 미국의 침략

The collapse of the Soviet bloc in late 1989 was greeted in the West by the U.S. invasion of Panama, which received the New York Times's immediate approval—although the Times did acknowledge that it "fueled enduring Latin suspicions about Washington's selective respect for sovereignty," and expressed the concern that this kind of precedent might be used by less worthy powers to achieve the same effect ("Why the Invasion Was Justified," December 21, 1989).

1989년 말 소비에트 연방이 망하자마자 서양에서는 그것을 환영을 했는데, 미국의 파나마 공화국 침입에 의해 환영을 했다. 그것은 뉴욕 타임즈의 즉각적인 승인을 받았다. - 비록 타임지가 “파나마 공격은 워싱턴(미국 정부)이 주권 국가에 대해서 선택적으로 존중한다”는 라틴아메리카의 의심을 지속하는데 기름을 끼얹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런 종류의 선례에 어떤 관심을 표현했다. 바로 이런 선례는 덜 가치 있는 권력에 의해서 동일한 효과를 내는데 이용될 수 도 있다는 데 관심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침략이 정당화 되는가" 1989년 12월 21일)

But it is with Iraq (1990-), Yugoslavia (1991-1995; and 1999-), Afghanistan (2001-), and Iraq again (2003-) that we move into the definitive post-Soviet era, whe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becomes a more active participant in the aggression process, and the global aggressor is either appeased, abetted—or both.

그러나 그것은 이라크(1990-), 유고슬라비아(1991-1995년 ; 그리고 1999), 아프가니스탄(2001), 그리고 다시 이라크로 우리는 소비에트 이후시기로 나아가게 된다. 국제 사회는 침략 과정에서 좀 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공격자들은 그것을 무마시키거나 조장하였고- 혹은 둘 다였다.

In the case of Yugoslavia, the U.S.-led NATO bombing war of 1999, assaulting Serbia and Kosovo, was preceded four years earlier by gradually escalating bombing attacks in Bosnia to support Bosnian Muslim and Croat forces, all in violation of the spirit of the UN Charter, but approved by UN secretary-generals and the Security Council. Also notable was the Security Council's 1993 creation of an ad hoc Tribunal supposedly to bring “justice” as well as peace to Yugoslavia, but in reality a political and public relations arm of NATO, that functioned to prevent peace in pursuit of U.S. and NATO aims there.[5] It also provided a legal and public relations cover for NATO's own crimes, most notoriously in its bringing an indictment against Slobodan Milosevic in May 1999, just as NATO was coming under attack for extending its bombing to Serb civilian facilities. This diversionary PR operation was quickly used by the U.S. Secretary of State and her spokesperson to justify NATO war crimes. It goes almost without saying that the UN Security Council failed to question the U.S.-NATO bombing war against Yugoslavia, although it was in violation of the UN Charter and followed a peace conference in France designed to fail and permit the U.S.-NATO attack to proceed.[6]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에, 1999년에 세르비아와 코소보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미국 중심의 NATO의 폭격 전쟁은 4년 전에 선행되었다. 보스니아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 군대를 지원하기위해서 폭격 공격을 점차적으로 증대시킴으로써. 이것이 전초전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UN 헌장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그러나 UN 사무총장과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것을 동의해 주었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1993년 안전 보장 이사회의 임시 법정 창설이다. 유고의 평화는 물론 정의를 가져다주는 법정을 만들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정치적 군대이자 공공적 군대인 NATO군은 UN과 NATO의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평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5] 그것은 또한 NATO 자신의 범죄를 감싸기 위해서 합법적이고 공공적인 관계를 제공했다. 가장 악명 높은 것은 NATO가 세르비아 민간 시설에 폭격을 투하하는 공격을 확장했던 것처럼, 1999년 5월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반대하는 고소를 함으로써 NATO 자신의 범죄를 감추는 역할을 했다.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여론 조작은 NATO 전쟁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미국 국무장관과 그녀의 대변인에 의하여 빠르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UN의 안전보장이사회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미국이 주도하는 NATO 공격 전쟁을 문제 삼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은. 그것이 UN 헌장도 위반하고 U.S.-NATO가 공격을 계속하는 것을 허용하거나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 고안된 프랑스의 평화회담도 따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6]

The war on Afghanistan was launched by the U.S. and U.K. purportedly as an international police action and a reprisal raid against al-Qaeda targets in the aftermath of 9/11, but it also removed the Taliban regime in Kabul and carried the war to the Taliban's allies in Pakistan and elsewhere around the world. From the outset, Washington defined Afghanistan as a theater in its new global "War on Terror," a Cold-War-like framework projected to stretch indefinitely into the future, and useful to the warrior states for disguising their actions in this era of global warlordism.[7] Although the war never received Security Council authorization, it has been prosecuted with UN support from the very start. In the week that preceded this war, the UN joined the cause with a "counter-terrorism" resolution and a hastily organized conference "to fight the scourge of terrorism" (Kofi Annan), with terrorism elevated to a "threat to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as well as a crime against humanity" (General Assembly President Han Seung-soo of South Korea).[8] Four days before the war, in clear anticipation of the event, Annan even reappointed Lakhdar Brahimi his Special Representative to Afghanistan; Brahimi's assignment was to "initiate preparations for the development of plans for the rehabilitation of that shattered country"[9]—not one word warning about the war or taking issue with its illegality. Within the Council itself, a Counter-Terrorism Committee was established; it is now a permanent feature of Council activities. Sentiments to the effect that "armed non-State networks" such as al-Qaeda "pose a universal threat to the membership of the United Nations and the United Nations itself" are now commonplace; and efforts to combat such non-state actors have been placed at the top of the UN's agenda ever since.[10]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9/11이후에 알카에다의 공격과 국제 경찰 활동을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전쟁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카불(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의 탈레반 정부를 제거하고, 마침내 파키스탄과 다른 전 세계의 탈레반 동맹에 대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처음부터 미국정부는(워싱턴) 아프가니스탄을 새로운 세계적인 “테러전쟁”에 대한 위협이라고 정의 했다. 즉 미래에 무한히 확대될 것 이라고 생각되는 냉전과 같은 틀을 가지고 있는 전쟁이라고 보고, 이것이 세계적인 전쟁 시대에 그들의 행동을 감추기 위한 전쟁국가로써 도움을 주는 전쟁이라고 선언했다.[7] 전쟁이 안전보장이사회에 비준을 받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UN의 지지를 받으면서 수행되었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 한 주 전에 UN은 “반테러 위원회” 결의를 제안하는데 결합했고, 또 “ 테러의 악마들과 싸우기 위한.” (Kofi Annan) 황급히 조직된 회의에 참가했다. 테러행위는 “인류에 대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 ( 대한민국의 국제연합 총회 의장 한승수)으로 테러가 고양될 수 있다.라는 결의에 동참했다.[8] 전쟁 4일 전에, 그 사건은 미리 확실히 예견되었다. 아난(유엔 사무총장)은 Lakhdar Brahimi를 아프가니스탄에 그의 특사로 임명하였다. Brahimi의 과제는 “산산히 부서진 그 나라의 회복을 위한 계획의 발전의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다” [9]

- 전쟁에 관한 한마디 경고도 없거나 그것이 불법임을 발포함이 없이, 안전보장이사회 안에서 조차 대 테러 의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안전보장이사회의 영구적인 활동이 되어버렸다. 알카에다 같은 “무장된 비 국가 조직”은 “UN의 회원국에 대한 보편적인 위협일 뿐만 아니라 UN 그 자체에 대한 위협이다” 라는 결과에 대한 그러한 감정이 아주 일반화 되었다. 그리고 비 국가 행위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 이후로 국제연합의 의제의 꼭대기에 위치해 오고 있다. [10]

Before the end of 2001, the invading military forces had gotten the United Nations to sponsor the Bonn Agreement through which they installed an Interim Authority in Kabul, with Hamid Karzai as its chairman; now six years later, Karzai is the president, having won elections staged by the UN in October 2004. But as with any country in a state of perpetual war, real power within Afghanistan resides with the 40,000-strong 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 (ISAF), the NATO-bloc's second out-of-area operation in the past decade, the first having been Kosovo. The occupation has failed to dismantle the power of the warlords, with whom the United States collaborated in the initial war effort; it has failed to do any substantial rebuilding of this "shattered country;" and its military focus and civilian-costly methods of warfare have caused substantial losses of life and helped the resurgence of the Taliban. Still, the UN has stood firm as a supporter of the occupation; and as with Bosnia, Kosovo, and Iraq, treats Afghanistan like a laboratory for neocolonial nation-building, helping the occupiers at every turn "to deny the power which they wield and to evade accountability for its exercise."[11]

2001년 말 전에, 침입한 병력은 국제연합의 후원자인 본 협정을 통해 카불의 임시정부 의장에 Hamid Karzai를 취임시켰다.; 6년 후인 현재, Karzai는 2004년 10월에 국제 연합에 의하여 계획된 선거에서 당선된 대통령이다. 영구 전쟁 상태에 있는 어떤 국가라도 아프가니스탄의 실질적인 힘은 40,000명의 국제 안정 보조 군대 (ISAF)로 존재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지난 10년에 NATO-bloc이 두 번째로 유럽 바깥으로 나가서 군사작전을 하는 지역이 되었다. 첫 번째는 코소보에서 일어났다. 그 점령기간 동안 미국이 전쟁의 초기부터 그들과 함께 협력했던 전쟁 세력을 제거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산산이 부서진 국가의 어떠한 실질적인 전쟁 복구를 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 그리고 그것은 군사적인 목표물과 시민을 대가로 하는 전쟁의 방식은 많은 생명을 살상을 초래했고, 그것은 탈레반의 재기를 도왔다. 아직도 UN은 점령군의 지원자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보스니아, 코소보, 그리고 이라크에서 그렇듯이, 아프가니스탄을 신식민주의의 국가 건설을 위한 실험실로 다루었다. 매번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준다. "점령군이 그들이 행사하고 있는 권력을 부정하도록 도와주고, 또 그들이 그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생기는 책임을 회피하도록" [11]

The aggression process involving Iraq that began in 1990 was simplified at that time by the fact that Iraq had committed an act of aggression itself in invading and taking over Kuwait in early August of that year. This gave the United States the opportunity to mobilize the UN and international community to oppose an aggression which it disapproved. (Although poor Saddam Hussein might have been misled by the earlier U.S. support of his aggression against Iran, and by U.S. Ambassador April Glaspie's reassuring him one week before his Kuwait adventure that the United States had "no opinion on the Arab-Arab conflicts, like your border disagreement with Kuwait."[12]) But with the actual Iraq aggression the United States quickly got UN and international support for ousting Saddam from Kuwait. Even here, however, there is solid evidence that the United States would not let Saddam escape via a negotiated settlement, but instead forced a war, which means that even in their “legitimate” case this country’s leaders acted in violation of the UN Charter, which calls for all states to “bring about by peaceful means, and in conformity with the principles of justice and international law, adjustment or settlement of international disputes” (Article I). There were also serious law violations in both the slaughter of helpless Iraqi soldiers, the use of illegal weaponry, and the deliberate destruction of Iraq's civilian infrastructure, including water and sanitation facilities, knowing that this would take a heavy civilian toll (and would be in violation of the laws of war).[13]

1990년에 시작된 이라크를 포함한 공격 과정은 그 당시 이라크가 그 해 8월 초에 쿠웨이트를 침략하고 탈취한 것은 이라크가 스스로 저질렀던 사실에 의해 단순화 되었다. 이것은 미국에게 미 승인된 침략에 반대하도록 국제 연합과 국제 사회를 동원할 기회를 주었다.

( 불쌍한 사담 후세인이 그 이전에 이라크를 공격할 때 미국이 지원해 준 것에 의해서 잘못 인도되었다 하더라도 미국 대사인 April Glaspie가 쿠웨이트 분쟁 일주일 전에 이런 재확인을 해주었듯이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국경불일치와 같은 아랍국가간의 분쟁에 대해 아무런 견해가 없다”[12] )

그러나 이라크의 침략에 대하여 미국은 유엔과 국제적인 지원을 얻어내서 쿠웨이트로부터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는 쪽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확실한 증거가 있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이 협상을 통해 피해 나가도록 허용하지 않고, 그 대신에 전쟁을 강요했는데 이는 그들이 “정당한” 경우에 있어서조차 그 나라의 지도자는 UN헌장에 위반하여 행동하였음을 의미했다. UN헌장에는 모든 나라들이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서, 정의와 국제법의 원리에 합당하게, 국제적인 논쟁의 조정을 확정한 후 그것에 따라 문제를 해결을 하도록 한다.” (유엔헌장 1조) 그리고 또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이라크군의 학살, 불법적인 무기를 사용한 것,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수리시설과 위생시설을 포함하여 이라크의 민간 기반시설을 상당 정도 파괴하는 데에서도 심각한 국제법의 위반이 있었다. 이러한 행동이 시민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이것이 전쟁에 관한 법에 위반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13]

Following the end of the Persian Gulf War in late February 1991, the UN, under U.S.-U.K. pressure, installed a very severe sanctions regime that greatly limited Iraq’s imports and its export of oil. This prevented or greatly hindered the repair of the damaged water and sanitation facilities as well as its electrical plants and grid, irrigation systems, factories, schools and hospitals. This resulted in huge casualties, mainly from disease, poor nutrition and limited health care, especially among children, whose estimated 500,000 deaths from the “sanctions of mass destruction,” was a price in human lives that Madeleine Albright famously declared on national TV in 1996 to have been “worth it.” All of this was done under UN authority, although the U.S. and U.K. were the aggressive sponsors of these genocidal sanctions.

1991년 2월 말 페르시아 만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과 영국의 압력 하에 UN은 이라크의 수입과 기름의 수출을 상당정도 제한을 가하는 매우 엄격한 제재 제도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전기 시설과 전기망, 관개시설, 공장들, 학교와 병원들뿐만 아니라 손상된 수도 시설과 위생시설의 수리를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하였다. 이것이 결국은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였다. 주로 질병과 영양실조와 특히 어린아이와 관련된 의료에 심각한 재앙을 초래했다. 그 어린아이들이 “대량파괴의 통제”로부터 무려 50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Madeleine Albright가 1996년 국영 TV (national TV) 에서 선언을 했다. “응당한 대가를 받았다” 인간 삶의 가치였다. 이 모든 것들이 UN하에서 수행되었다. 실제로는 미국과 영국이 이런 인종말살적인 제재의 적극적인 후원자들이었을지라도

With the Bush administration having decided to “go massive” after the events of 9/11, to “sweep it all up, things related and not” (Donald Rumsfeld),[14] and to invade and occupy Iraq as well as Afghanistan, it faced the small problem that what it intended to do would be a major violation of the UN Charter, as Iraq had neither attacked nor threatened the United States, so any non-risible self-defense justification was out. The U.S. and U.K., while still making extremely implausible claims about an Iraq threat (“mushroom clouds” over American cities, hidden WMD programs, chemical and biological weapons 45-minutes from launch)[15] and providing a stream of false claims about Iraq’s weapons programs, eventually fell back on Iraq’s resistance to UN inspections. An attack on Iraq would be based on and justified by Iraq’s defiance of UN authority! After all, we cannot dispense with the rule of law!

9/11 사건 이후, 부시행정부가 “대규모로 작전을 수행한다.”라고 결정함과 동시에 “관련이 되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두 쓸어버려라” (Donald Rumsfeld) 라고 결정하게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은 물론이고, 이라크까지도 침략해서 점령하라는 결정함으로써 그것이 하려고 하는 의도는 UN헌장을 중요하게 위반하는 것이라는 작은 문제에 직면했다. 그래서 어떤 명목으로도 자기 방어를 정당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 위협에 대해서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주장을 해대면서 [15](미국 도시들 곳곳에 "핵폭발의 버섯구름"을 생기게 한다, WMD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숨기고 있다. 또는 생화학 무기를 쏘아 올리면 45분후에 미국에 떨어진다.) 일련의 이라크의 무기 계획에 대한 거짓 주장을 제공하면서, 결국 이라크가 UN당국을 거부함으로써 이라크 공격이 정당화 되고 그런 것이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결국, 우리는 국제법과 상관이 없다.

It is well known that the Bush administration only bothered with resort to the UN under British urging and in the interest of giving an aura of legitimacy to an attack already planned and one that had nothing to do with Iraq’s “non-compliance.” The UN cooperated in this make-believe scenario with intensified inspections that found nothing but refused to stop looking, to the great annoyance of U.S. officials, whose 160,000 troops and naval armada were already positioned for an invasion and wanted the inspectors and Security Council to sanction war. When they couldn’t get this, they went to war anyway, once again in violation of the UN Charter. Once again also they were helped along by the establishment U.S. and U.K. media, whose members across the board quickly joined the war bandwagon, passing along WMD claims on a daily basis that were untrue or misleading, essentially blacking out dissident views and facts, mini-demonizing the French for their failure to get on board the bandwagon and Hans Blix and the inspectors for failing to produce evidence that didn’t exist.

잘 알려져 있다. 부시 행정부가 영국의 채근 하에서 이미 계획을 하고 있는 공격에 대해서 정당화의 권위를 주는데 관심을 가지는 UN에 의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또 이라크의 “거부” 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전쟁을 미리 준비하고 있으면서 .

UN이 미국이 하는 이 시나리오를 믿도록 하는데 협력하였다. 아주 강도 높은 조사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였고, 조사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미국이 16만 명의 군대와 무적함대를 침공을 위해 배치해 놓고 UN안전보장이사회가 전쟁의 승인을 바라고 있는.

그들이 이것을 얻을 수 없었을 때, 어쨌든 그들은 전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UN 헌장을 위반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미국과 영국의 주류 언론의 도움을 받아서 회원국 대부분이 전세가 유리한 쪽으로 가담을 하였고, WMD 주장을 매일 내보내고, 전세가 유리한 쪽으로 가담하지 않은 프랑스, Hans Blix, 존재하지 않은 증거를 찾지 못한 조사자들을 작은 악마로 만들기 등, 사설과 의견을 달리하는 견해를 필수적으로 막아버리거나 진실하지 못한 것을 내보냈다.

Two months before the war, aggression-hawks Kenneth Pollack and Martin Indyk were given space in the New York Times to lament the UN "inspections trap" that they alleged the Washington regime then found itself "firmly stuck in," and counseled that, instead of relying on a "futile hunt for a 'smoking gun'," the world should simply accept that "Every inspection of an Iraqi site that finds nothing reinforces the misimpression that Iraq has complied." ("How Bush Can Avoid the Inspections Trap," January 27, 2003.)[16] The day before the U.S. launched its war, Princeton University's advocate for U.S. lawlessness Anne-Marie Slaughter invoked the precedent of the 1999 war over Kosovo, also launched without Security Council authorization, and noted that Washington's imminent war over Iraq "could be called 'illegal but legitimate'," just as the Independent International Commission on Kosovo had found with respect to Kosovo. ("Good Reasons for Going Around the U.N.," New York Times, March 18, 2003.) The same day, the Times itself editorialized that, "For Mr. Hussein, getting rid of weapons of mass destruction is no longer an option….Mr. Hussein must be disarmed." ("War in the Ruins of Diplomacy," March 18, 2003.) This is war propaganda service that would be hard to surpass.

전쟁 2개월 전에, 전쟁 강경론자인 Kenneth Pollack과 Martin Indyk는 국제 연합의 “조사의 덫” 을 비탄하기 위하여 뉴욕 타임즈에 글을 썼다. 거기에서 그들은 진위가 의심스러운 워싱턴 정부에 대해 “확실하게 발견되었다”고 아무런 근거 없는 거짓말을 해대고 ‘연기를 내뿜는 총을 찾는 쓸데없는 사냥’에 의존하지 말고 대신 세계는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는 이라크 영토에서의 모든 조사는 이라크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생각을 오도하게 된다.” ("부시가 어떻게 조사의 덫을 피해 갈 수 있었는가,”2003년 1월27일)[16]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기 하루 전, Anne-Marie Slaughter라는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 교수가 1999년에 끝난 코소보 전쟁을 선례로 호소했다. 코소보에서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 없이 코소보 전을 감행하였다고 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워싱턴의 즉각적인 이라크 전쟁은 “법은 어겼지만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마치 코소보에 대한 독립 국제 위원회가 코소보에서 했던 것처럼. (“유엔이 참여하기 위한 좋은 이유들,” New York Times, 2003년 3월 18일). 같은 날 Times 사설에서 “후세인 대통령에게서 대량 학살 무기를 제거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다. Hussein은 무장 해제를 해야 한다.” (외교가 무너진 속에서의 전쟁,” 2003년 3월 18일) 이것은 더 이상 능가하기 힘든 전쟁선전 방법이다.

The UN of course never condemned the United States and Britain for this invasion in violation of the UN Charter, even though it was soon recognized in the mainstream to have been based on lies. Not only was there no condemnation, the UN Security Council quickly voted to validate the occupation and gave the aggressor the Security Council’s approval to stay in Iraq and try to bring stability to the victimized country.[17] The UN even created the Assistance Mission for Iraq to help U.S. management there, resulting in the bombing death of the Secretary-General’s Special Representative for Iraq, Sergio Viera de Mello, and 22 others, as the Iraqi resistance did not view the UN as a neutral party.[18] Subsequently, the UN has done nothing to condemn or attempt to bring to a conclusion an invasion-occupation that has virtually destroyed Iraq, killed perhaps a million civilians, and driven in excess of 4 million Iraqis from their homes.[19] The contrast with the UN’s treatment of Yugoslavia and the U.S.-NATO targeting there of Serbia, could hardly be more dramatic.

UN은 물론, 국제 연합 헌장을 위반한 이 침입에 대하여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지 않았다. 비록 그것의 주류가 거짓말들에 바탕을 둔 것으로 곧 인식되었을지라도, 오직 거기에 어떤 비난도 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UN 안전 보장 이사회는 점유와 공격권을 주기 위해 빠르게 투표하였다. [17] UN은 심지어 거기에서 미국의 관리를 돕기 위해 이라크를 위한 지원단을 만들었다. 그 결과 이라크를 위한 UN 사무총장의 특사가 폭격을 맞아 죽는 결과를 초래했다. Sergio Viera de Mello와 22명의 다른 사람들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이라크 저항 세력이 국제 연합을 중립으로 바라보지 않음에 따라 [18] 그 후에, UN은 결론에 사실상 이라크를 파괴시켰던 침략 점유기간을 비난하거나 비난을 시도하기 위하여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아마 100만 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그들의 집에서 400만 명 이상의 이라크 사람을 몰아내었던. [19] UN이 유고에 대해서 했던 것과 미국 NATO가 세르비아에서 했던 것과는 달리, 이 보다 극적일 수는 없다.

The Iran Aggression Process

이란의 침략 과정

The current round of threatening Iran dates back to the summer of 2002, a year that opened with Bush labeling Iraq, Iran, and North Korea the "axis of evil, arming to threaten the peace of the world." Already hot on the trail of the apocryphal Iraqi WMD, and proclaiming its new national security doctrine of "preemption" (i.e., aggression by another name), the White House started floating allegations about a clandestine Iranian nuclear weapons program, and coupled these with statements of opposition to the "unelected people who are the real rulers of Iran," a stance that Iran's President Mohammad Khatami immediately assailed as “ war-mongering" and "open interference" in Iran's affairs.[20]

이란에 대한 협박은 현재로부터 2002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는 이라크, 이란, 북한을 일컬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라 말한 부시의 표현으로 시작되었다. 진짜가 아닌 이라크의 WMD를 추적하는데 열을 올렸고, 그것의 새로운 국가 안보 원칙인 “선제공격"(예를 들면, 또 다른 이름에 의한 공격)을 공포하였다. 백악관은 이란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불명확한 주장을 시작하였고, 이것을 “이란의 실제 통치자는 선거로 뽑힌 사람이 아니다”라는 반대성명과 결부시켰다. 이란의 대통령 Mohammad Khatami는 “전쟁광” 이고 “노출된 간섭”을 한다고 이야기로 비난했다. [20]

The current U.S. preparation for an attack on Iran has many of the characteristics of earlier U.S. aggressions, and the responses of the UN, international community, humanitarian interventionists, and mass media have also been similar. The first striking similarity is the extent to which claims and tactics used earlier but eventually acknowledged to have been based on falsehoods designed to mislead and manipulate have been recycled yet again, with only marginal challenge as to their motive and accuracy. Another is how a double-standard can be applied so effectively that it passes almost without challenge: One standard for the U.S. target (Iran), the Security Council demanding that it surrender its "inalienable" right under the Non-Proliferation Treaty to enrich uranium for peaceful purposes; another standard for the United States and any country that has U.S. approval (the nuclear-weapon states of Israel, India, and Pakistan, for example; Saddam Hussein's weapons programs in the 1980s, when he was serving U.S. interests; and even Iran's nuclear energy program in the late 1970s, when controlled by the U.S.-client dictator Shah Mohammad Reza Pahlavi.).

현재 이란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의 준비는 초기의 미국 침략의 많은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UN, 국제 사회, 인도주의라는 명목으로 간섭하는 것, 그리고 대중 매체를 동원하는 것이 거의 유사하였다. 정말 놀라운 첫 번째 유사성은 그 이전에 사용하였던 전략 전술과 유사한 것은 그것은 결국에는 거짓말에 기초 하여 계획되고, 현혹되고, 조작되었다. 그러나 오직 그들의 동기와 정확성에 있어서 단지 주변적 도전만 받으면서 재사용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중 잣대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용되었는가 이다. 그것은 거의 도전 없이 지나갔다.: 미국의 표적으로서 하나의 표준인 (이란), UN 안전보장의사회는 평화로운 목적을 위해 우라늄 농축을 하는 것을 비핵확산금지조약 (NPT)하에서 그것의 “양도할 수 없는” 권한에 승복해야 한다고 요구를 하면서, 미국과 미국이 인정하는 나라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 (핵무기 국가인 이스라엘,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을 예로 들면 ; 사담 후세인이 1980년대에 가지고 있던 무기 프로그램은 미국의 관심사에 일조했고; 심지어는 미국의 고객인 독재자 Shah Mohammad Reza Pahlavi가 통치하고 있던 1970년대 말에는 이란의 핵 에너지프로그램도 인정되었다.

A third notable feature of the aggression process developing in regard to Iran is that another major violation of the UN Charter by the United States, another “supreme international crime,” is not only taken as legally and politically unchallengeable by the UN and international community, but is also sanctioned and even given positive aid. It is true that Secretary-General Kofi Annan did plaintively point out on more than one occasion that the 2003 Iraq invasion was illegal—"not in conformity with the Charter,"[21] in the milquetoast phrase he preferred when dealing with U.S. crimes—but he didn’t suggest doing anything about it. In his first official statement after the start of the war, Annan expressed regret that "if we had persevered a little longer, Iraq could yet have been disarmed peacefully,"[22] thus repeating the disinformation that had been used by the states that launched their war in violation of the Charter under which he served.

이란에 관하여 개발되는 침략 과정의 3번째 주목할 만한 특징은 미국이 UN 헌장을 위반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최고 국제 범죄”가 국제 연합과 국제 사회에 의해 합법적이고 정치적으로 도전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될 뿐 아니라 , 전쟁을 막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원조를 지원한다. UN 사무총장 Kofi Annan이 한 것을 봐라. 2003년 이라크 침략은 불법적이었다고 어느 경우보다 더 많이 구슬프게 지적했던 것은 사실이다. - “UN헌장과 합치 하지 않는다” [21] 미국의 범죄들을 다룰 때 그가 선호한 대가 약한 사람의 관용구였다. -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았다. 전쟁 시작 후 그의 첫 번째 공식적인 언급에서 Annan은 유감을 표현하였다. “만약 우리들이 조금 더 인내하였더라면, 이라크는 평화스럽게 무장해제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2] 이렇게 잘못된 정보를 반복을 하면서 그가 지원을 하고 있는 UN헌장을 위반한 국가들에 의해서

Kofi Annan was very accommodating to U.S. demands, but his successor, Ban Ki-moon, is even more cooperative with the Supreme International Criminal. Not only has he failed to say a word about the U.S. threat to attack Iran, but with the United States now between its third (Iraq) and prospective fourth (Iran) supreme international crime, Ki-moon nevertheless has gone out of his way to claim that the "UN and the US have a shared objective of promoting human rights, democracy and freedom and peace and security," and to call for “a strong partnership between the United Nations and the United States."[23] Like his predecessor, Ki-moon recognizes who is the boss, and shows no qualms over using his office to help the boss implement his UN Charter violations.

Kofi Annan은 미국의 요구에 매우 순응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 반기문은 최고 국제 범죄에 더욱 더 협력적이다. 그는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는 데 대한 미국의 협박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미국이 지금 세 번째 국제범죄(이라크)와 예상되는 네 번째 일으키려고 하는 국제범죄(이란) 사이에서 “UN과 미국이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와 평화와 안전의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다.” 고 주장하면서 자기 길을 간다. 그리고 그의 전임자처럼 “UN과 미국이 강력한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23] 고 주장한다. 그의 전임자와 같이, 기문은 누가 보스인지를 잘 알고, 자기 사무실을 보스가 UN 헌장을 위반하는데 이용하는 데에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보이지 않는다.

The Security Council also is cooperating with the U.S. process. Mainly it has done this by going along with the U.S. allegation that Iran's nuclear program poses a threat to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24] rather than recognizing that in threatening to take military action against Iran if it does not comply with U.S. demands, it is the U.S. that poses the grave threat, not Iran—a threat that would be actionable under Chapter VII of the Charter, were the Security Council able to live up to its legitimate functions and powers. This, too, is a rerun of the Security Council’s effort in late 2002 and early 2003, leading to the invasion of Iraq, when the Council went along with the United States’ alleged concern about Iraq's noncompliance with the Council's disarmament resolutions, and patiently voted for an "enhanced inspections regime" instead of calling the supreme international criminal's bluff and denouncing its plans for the already decided-upon invasion.[25] Going along with these pressures and demands fed into the U.S. war-propaganda in 2002, just as it does the same today in the run-up to the planned attack on Iran.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이 국제적인 평화와 안전을 위협한다는 미국의 근거 없는 주장에 찬성하며 미국의 침략 과정에 협력한다. [24] 만약 안전 보장 이사회가 미국의 요구를 따라주지 않으면 이란에 대해서 군사행동을 취하겠다고 함으로써 미국은 중대한 위협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미국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란이 국제 평화를 위협한다고 한다. - 유엔 헌장의 7조에 의해 기소할 수 있다는 위협은 안전 보장 이사회가 합법적인 기능과 권력에 따라 행동 하도록 하게했다. 이라크의 침입을 이끄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노력은 2002년 말 그리고 2003년 초에 계속 반복 된다.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과 함께 근거 없이 주장한 것 을 걱정했다. 이미 침략하기로 계획된 최고 국제 범죄의 속임수와 반대선언을 하기 보다는 안전보장이사회의 무장해제 결의와 그리고 참을성 있게 "사찰 강화"를 위해 끈질기게 찬성표를 던지면서. 이러한 압력과 요구와 함께 이라크에서 계획된 공격이 이란에서도 이런 식으로 공격이 준비되고 있다. [25]

Also helpful to the U.S. aggression process today is the work of the IAEA and Mohamed ElBaradei, which closely parallels the earlier efforts of the United Nations Monitoring, Verification and Inspection Commission and its chairman, Hans Blix. The mere existence of an inspections program, and the fact that it can be dragged out for years—on-and-off for a total of eight years in Iraq, and since 2002 in Iran—permits the United States to create the impression that there really is a grave threat and to distract attention from the real threats that it poses, including its own contribution to the spread of nuclear weapons. The inspections regimes have provided the United States with platforms to spread false allegations against Iraq and Iran, the two states that it declared its main targets in early 2002. Just as it was impossible for Blix's UNMOVIC to refute the U.S.-U.K. allegation that Iraq was "in material breach" of its disarmament obligations, so, no matter how many times ElBaradei's inspectors "verify the non-diversion of declared nuclear material in Iran," they will never be able to refute the Alice-in-Wonderland allegation that they still cannot "provide credible assurances about the absence of undeclared nuclear material and activities,"[26] and that a clandestine nuclear weapon program must be hidden somewhere.

또한 IAEA와 Mohamed ElBaradei 의 일은 오늘날 미국의 침략 과정에 도움이 된다. 초기의 유엔사찰위원회 (UNMOVIC)와 그것의 의장인 한스 브릭스의 노력과 상당히 비슷하다. 조사 계획의 존재, 그리고 수년간 조사를 하면서 질질 끌 수 있다는 사실 .이라크에서 총 8년 동안 때때로 하였고, 이란에서는 2002년 이래로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 그런 것들이 미국으로 하여금 어떤 인상을 만들도록 허락한다. 거기에 실제로는 중대한 위협이 있고, 그 실질적인 위협으로부터 우리에게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한다는 인상을 만들고, 핵무기의 확산에 기여를 하고, 그 사찰 강화 체제는 이미 2002년 초부터 주요 목표라고 선언하였던 이 두 나라 이라크와 이란에서 미국에게 이라크와 이란에 대항해서 잘못된 주장을 퍼트리기 위한 구실을 제공한다. 마치 Blix의 유엔사찰위원회가 미국과 영국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던 것처럼. 이라크는 무장 해제를 하는 의무를 지키지 않는 다고 하는 미국과 영국의 이러한 거짓된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Blix에게는 불가능 했듯이 이와는 마찬가지로 엘바라데이의 감독관이 “이란에 지적된 핵물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한다. ”고 여러 번 말했을지라도, “그들은 아직 믿을만한 확신을 제공할 수 없다” 라는 주장 그리고 "아직까지 신고되지 않은 핵물질이 없다는 데 대한 어떤 확신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이런 식의 미국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논박할 수 없다. [26] 그리고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In Iraq's case, the United States made grandiose allegations before the Security Council that were soon thereafter proven false[27]—but with no effect on its status within the UN, or on its right eventually to lead the Multinational Force there,[28] or the believability of its sequel allegations against Iran.. The United States denounces first Blix and now ElBaradei for unwarranted foot-dragging and appeasement of the targeted states. And of course the establishment media cooperate in this process by treating hyperbolic allegations about the targeted states as no different than real news about them, refusing to give context and expose the real U.S. agenda, and failing to note that Iran's case today is following the same script that in Iraq turned out to be false.

이라크의 경우에,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그 후 거짓으로 밝혀지기 전 까지 과장되고 근거 없는 주장을 하였다. [27]— 그러나 UN에서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결국 다국적군을 그곳으로 이끌고 가는 권리나 [28] 또는 이란에 대한 터무니없는 주장을 믿게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미국은 공격 대상 국가에 아무런 보장이 없는 유화정책을 하는 Blix와 현재 ElBaradei를 공공연하게 거부했다. 물론 주류 언론은 목표가 된 국가는 그들에 관한 실제뉴스와 다를 것이 없다는 과장한 주장을 진술하는 것과 사건에 대한 경위를 밝히거나 실제 미국의 의제를 노출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이라크에서 거짓으로 판명된 같은 각본을 이란의 경우에 오늘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을 결여함으로써 이 과정에 협력한다.

Among the aggression process's many modalities, which combine the suppression of critical facts with the repetition of falsehoods, we note here the following:

침략과정의 여러 가지 협상 방식 사이에서 그 중에서 비판적인 중요한 사실들을 억압하고 거짓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의 결합, 우리들은 다음에서 여기에 주목한다.

1. That only rarely is mention made of the striking and ominous parallels between the utterly discredited U.S. and U.K. mobilization campaign in 2002-2003 to rid Iraq of its nonexistent weapons of mass destruction, and the ongoing U.S. and Israeli mobilization campaign from 2002 onward alleging that Iran is developing nuclear weapons.

1. 철저하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미국과 영국의 존재하지 않는 대량 살상무기를 제거하기 위한 2002년부터 2003년까지의 기동작전과 그리고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근거로 미국과 이스라엘이 2002년에 벌렸던 기동작전을 나란히 두 개를 놓고 보는 비교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2. That no mention is made that the U.S. and Israeli threats to attack Iran are themselves violations of the UN Charter's prohibition on the threat or use of force, and that even the UN an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re guilty of turning a blind-eye to the illegality of these threats.

2.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기위해서 협박하는 것, 그것 자체가 UN 헌장의 협박이나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위반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또 UN과 국제 사회가 이 위협들의 불법성을 모르는 척하는 것에 과실이 있다는 것은 한 번도 보도하지 않았다.

3. That no mention is made that the U.S.-led aggressions-occupations of Afghanistan and Iraq mean that Iran is now surrounded on its eastern and western borders by massive and hostile military forces that can launch devastating strikes on Iran at any time. So that to focus at this juncture on any kind of threat—real or counterfactual—to peace and security posed by Iran is simply incongruous with reality.

3. 미국이 주도하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공격 점령은 이란이 지금 동쪽과 서쪽의 국경에 언제라도 이란에 대해 혹독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규모의 적대적인 군사력에 의해 에워싸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떠한 종류의 위협에 대해 이 시점에서 주목하는 것은 -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 이란이 제기하는 평화와 안전에 대한 것은 단순히 현실과 모순된다.

4. That no mention is made of Iran's inherent right of self-defense against the very real threats posed by the United States and Israel, both the closest of allies and nuclear weapons powers. As the Israeli military analyst Martin Van Creveld noted, "The world has witnessed how the United States attacked Iraq for, as it turned out, no reason at all. Had the Iranians not tried to build nuclear weapons, they would be crazy." ("Is Israel planning to attack Iran?"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August 24, 2004.) This sentiment appears virtually nowhere in the establishment U.S. media, which also give little credence to the Iranian leadership's repeated protest that they do not intend to produce nuclear weapons.

4.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이 만들어 놓은 현실적인 위협의 태도에 대항하여 자기방어의 고유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군사 평론가 Martin Van Creveld가 언급했듯이 "세계는 지금 미국이 이라크를 어떻게 공격했는가, 이미 판명 났듯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라크를 공격한 것을 세계가 알고 있다. 이란 사람들이 핵무기를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말 미친 짓이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공격할 계획인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2004년 8월 24일자)라고 설명하였을 때, 이러한 감정은 사실상 미국의 주류 언론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핵무기를 생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란의 지도자들의 거듭된 항의를 믿지 않는다.

5. That no mention is made that Israel was the first state outside the Permanent Five to develop nuclear weapons, a capability that it possesses to this day; and that Israel remains the only state in the Middle East never to have acceded to the NPT and international inspections.

5. 이스라엘은 UN 안전 보장 이사회의 5개 상임 이사국(미국·영국·러시아·프랑스·중국)을 제외하고는 핵무기를 개발한 첫 번째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그것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 임에도;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핵 확산 방지 조약과 국제적인 조사에 동의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 남아있다.

6. That no mention is made that Security Council Resolution 687 (April 3, 1991), which imposed disarmament requirements on Iraq, also recalled the longstanding "objective of the establishment of a nuclear-weapon-free zone in the region of the Middle East;" and that this objective, which enjoys very broad support throughout the region, has been ignored by Israel, the United States, and Security Council.

6. 이라크에 대한 무장 해제 요구 조건을 강제한 안전 보장 이사회의 687조 결의안(1991년 4월 3일)은 "중동 지역에 핵무기가 없는 자유지역을 설립"하려는 오랜 목표를 상기 시켰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목표가 그 지역 전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데 이러한 목적이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안전 보장 이사회에 의해 완전히 무시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7. That no mention is made that Iran also has long advocated a nuclear-weapon-free zone in the Middle East, as well as extending IAEA safeguards to all states in the region; and that every year the UN General Assembly votes by overwhelming margins to adopt resolutions to this effect, but that at the same time they are rejected by the United States and Israel.

7. 이란 역시 오랫동안 중동에 핵이 없는 지대를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모든 국가에 IAEA 사찰대를 보내자는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 매년 UN 총회는 압도적인 다른 국가들이 결의를 통해 그 결의서가 효과를 발휘하도록 투표를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의해 거부된다는 것을 보도하지 않는다.

8. That no mention is made that under the NPT, Iran—like every other non-nuclear-weapons-possessing party to the treaty—enjoys the "inalienable right…to develop research, production and use of nuclear energy for peaceful purposes without discrimination" (Art. IV.1), and that the IAEA has produced no evidence that Iran is working on nuclear weapons.

8. 핵 확산 금지 조약 하에서는 이란도 다른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는 나라들과 꼭 마찬가지로 “차별 없이 평화로운 목적을 위한 핵에너지의 사용과 생산을 위한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 가진다는 것에 대해 어떤 언급도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이란이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9. That no mention is made that under the NPT, the United States—like every other nuclear-weapons-possessing party to the treaty—agrees to "pursue negotiations in good faith on effective measures relating to cessation of the nuclear arms race…and to nuclear disarmament, and on a treaty on general and complete disarmament under strict and effective international control" (Art. VI). By continuing to improve its nuclear weapons, and to make their design more practicable, it is the United States that stands in serious violation of the NPT.

9. 핵 확산 금지 조약 하에서 미국이 다른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는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그 조약의 의무를 지키는데 동의한다는 것에 대해서 “ 핵 무장전쟁을 중단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에 대해서 철저하게 협상을 해야 하고, 그리고 핵 군축을 위해 가장 엄격하고 효과적인 국제적인 제어 아래서 완전하고 일반적인 무장해제를 추구해야 한다” (예술. VI). 그리고 또 미국은 NPT를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다. 그것의 핵무기들을 계속 개량하고, 그들의 디자인을 좀 더 실용적으로 만들고 함으로써.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되어 있지 않다.

10. That no mention is made that at the last NPT Review Conference, held in New York City in May 2005, recognition of the urgency to implement this disarmament article figured prominently among the vast majority of participants—but not with the United States.[29] Instead, the conference ended in "the most acute failure in the history of the NPT" (former U.S. weapons negotiator Thomas Graham), unable to produce even a final statement on substantive issues. Led by the U.S. refusal, the conference was unable to admit any topic related to disarmament, "[turning] the world of nuclear proliferation into the Wild West, with complete disrespect for the rule of law" (Abolition 2000 founder Alice Slater).

10. 지난번 2005년 5월 뉴욕에서 열렸던 NPT 평가회의에서 이 무장해제 조항을 보완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다수 참여국가에 의해서 두드러지게 제기 되었다. - 그러나 미국은 참여하지 않았다.[29] - 대신에, 회의는 “NPT 역사상 가장 심각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전 미국 무기 거래인 Thomas Graham) 마지막 성명에서 조차 실질적인 결과를 생산할 수 없었다. 미국의 거부에 의해서, 그 회의는 무장 해제에 관련된 어떤 주제도 승인할 수 없었다. "핵 확산이 되는 세계는 미국 서부로 변화하게 만듦으로써 법을 준수하는 것을 완전히 무시한다. "(핵 폐지 2000 창설자 Alice Slater) 여기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11. That no challenge is raised in the UN or international community contesting the fact that the United States has taken it upon itself to decide which states may develop nuclear programs, and which may not. Iran could build nuclear power plants under the Shah, Pakistan can develop and keep nuclear weapons under Pervez Musharraf (or a likely successor-client of the U.S.), Egypt can develop nuclear power under Hosni Mubarak, Israel and India can develop and keep nuclear weapons over four decades—but neither the Islamic Republic of Iran, Libya, nor North Korea can. Not only is this unilateralism and politicization of the right of access to nuclear energy not challenged by the UN or the establishment media, it isn’t even noticed.

11. UN이나 국제공동체에서는 미국이 어느 국가가 핵 프로그램을 개발할지 개발하지 않을지를 그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도전도 하지 않는다. 이란은 국왕 하에서 원자력 발전소를 세울 수 있었다. 파키스탄도 Pervez Musharraf하에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소유할 수 있었다.(미국의 다른 계승자와 마찬가지로), 이집트도 호스니 무바라크 통치 하에서는 원자력을 개발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과 인도는 40년 이상 핵무기를 개발하고 소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리비아, 또는 북한은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마음대로 하는 일방주의와 핵에너지에 대한 접근권을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UN에 의해서도 주류언론에 의해서도 도전받지 않았다. 이것은 심지어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12. One basis for these politicized choices is the usual demonization process, so that a target like Iran cannot be allowed to come close to developing nuclear energy for any purpose because its leaders are portrayed as religious fanatics who might use a single nuclear device to bring about some mad end even though this would entail national suicide. These fears are not based on an examination of the performance of Iran’s leaders, who in their diplomatic relations with other states and UN representatives clearly behave as realistic geopoliticians. Nor is any comparison ever made with the religious beliefs of "End Times" evangelicals in the United States and their influence on U.S. leaders and policy.

12. 이런 정치화 된 선택의 한 가지 토대는 통상적으로 악마화 과정이다. 그래서 이란과 같은 표적이 어떤 목적에서든지 핵에너지 발전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란의 지도자는 종교적인 광신자로 묘사되고, 어떤 미친 목적 심지어 이것이 국가적인 자살을 일으킬지라도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악마화 하기 때문에, 이런 두려움은 진짜 이란의 지도자들의 수행의 조사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국가들과의 외교적인 관계나 유엔의 대표자들과 관계하여 그 지역의 현실적인 정치인들로써 분명히 행동한다. 미국에 있는 “종말론”적인 복음주의자들의 종교적 신앙과 이것을 비교해 봐야 하는데 비교를 전혀 하지 않는다.

13. That the Iranian target can be accused of other crimes, with minimal evidence and context, like interference in Iraq's internal affairs by sending aid to the resistance. This allegation is very convenient, as it is impossible for Iran to refute beyond simple denial, the establishment media don’t require hard evidence to report it, and it scapegoats Iran for the failures of the aggression-occupation—so attacking Iran will be part of the effort to “liberate” the Iraqis! Note also that when the United States aids insurgents opposing an occupation, as in the case of the Afghan resistance to the Soviet occupation, no question is raised about the legitimacy of such interference; but then, only the United States has aggression rights. Thus, only the United States can legitimately aid factions in the conflict over Iraq. It aids all of the factions, according to momentary strategic convenience. And it attacks anybody inside Iraq that it wants to attack.

13. 이란 사람들이 또 다른 범죄, 이란의 저항군대에 도움을 줌으로써 이라크의 국내 사태에 간섭하는 것과 같아 최소한의 증거와 상황으로 또 다른 범죄로 비난 받을 수 있다. 이런 황당한 주장은 이란이 단순히 부정하는 것을 가지고는 논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편리하다. 주류 언론들은 그것을 보도하기위해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공격 점령의 실패에 대해 이란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또한 이란의 공격은 이라크인들을 “해방” 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미국이 점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을 때에는 소련이 점령하고 있을 때 아프간 저항자들을 도와줬을 때처럼. 이 같은 간섭의 합법성에 관한 어떤 질문도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오직 미국만이 침략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직 미국만이 합법적으로 이라크에 대한 갈등의 여러 분파들을 합법적으로 도와줄 수 있다. 미국은 일시적인 전략상의 편의에 따라서 모든 당파싸움을 도와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들이 공격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이라크안의 누구라도 공격한다.

14. That very little attention is given to the fact that the U.S. supports the Mujahedin-e Khalq Organization (MEK) and related groups such as the National Council of Resistance of Iran, whose members appear to move freely among the Western capitals, despite the U.S. Department of State's formal designation of these groups as Foreign Terrorist Organizations at least since 1997.[30] With U.S. aid and approval since the U.S. invasion of Iraq in 2003, the MEK has continued its longstanding campaign of cross-border bombings and assassinations against Iran—causing much bloodshed among Iranians.[31]

14. 미국이 Mujahedin-e Khalq 기구와 이란의 반정부저항 세력 같은 관련된 단체를 원조했다는 사실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일원들이 서양의 수도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 국무성이 1997년 이후에 이런 단체들을 외국 테러리스트 조직이라고 공식적인 정부로 지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30], 2003년 이라크를 미국이 침입한 이래로 미국의 도움과 승인을 받은 MEK는 국경을 넘나드는 장기적인 폭격을 계속하고 있고, 이란에 대항한 습격인- 이란 안에서의 유혈참사를 계속 불러일으킨다.- 군사행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31]

15. That by highlighting the abuses of dissidents inside Iran, a prospective U.S. attack on Iran is made all-the-more palatable.[32] When the lie about going to war to disarm Iraq no longer could be sustained, the selling-point shifted to the "liberation" of Iraqis from the dictatorship in Baghdad. Similarly, Western intellectuals and human rights organizations have featured the detentions and trials of different Iranian figures, combining cost-free denunciations of Iran's leadership with public displays of solidarity towards the dissidents. This has been an important mechanism by which a segment of the intellectual community, including the humanitarian interventionists and devotees of “democracy promotion,” serve the imperial state while convincing themselves that they are simply aiding in the global liberation process. It has been noted, however, that this segment seems reluctant to push hard for democracy in states allied with and supported by the empire (e.g., Egypt, Saudi Arabia, Turkey, Indonesia, Israel, etc., or in the United States itself). They also spend much more effort in expressing concern over the condition of the dissidents in target countries than they do over the supreme international crimes to which they may be contributing.

15. 이란 안에서 자기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욕하는 것을 부가시킴으로써 미래에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만든다. 그리고 이라크를 무장 해제 하기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는 거짓말이 더 이상 유지될 수 가 없을 때, 바그다드의 독재로부터 이라크 사람들의 해방이라는 쪽으로 관심방향을 옮겼다. 서양 지식인들과 인권 조직들은 벌이고 있다. 이란 사람들을 억류하고 재판하는 것과 이란 지도자들을 아무런 대가도 치루지 않고 부인하는 것을 결합시킴으로써, 이러한 중요한 메커니즘은 지식인 공동체들의 일부와 인도주의적인 간섭론자들, 그리고 "민주주의 증진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이런 지식인들은 그들 스스로 세계 해방 과정에 우리가 도와주고 있다고 확신하는데 연대를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것과 이것은 결국은 제국주의 국가를 돕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미국에 의해서 도움을 받고, 그들과 연대하고 있는 국가들의 민주주의를 진척시키는 것은 쉽지가 않다.(예를 들면,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인도네시아, 이스라엘, 등등, 또는 미국 그 자체에서) 또한 그들은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이 기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장 중요한 국제적인 범죄들로 한 것보다 공격 대상이 되는 나라의 반대자들의 조건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그들은 그들이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초특급 범죄에 대해서는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반군들을 돕는데 역점을 둔다.

Concluding Note

Imagine that Adolf Hitler, having invaded and occupied Czechoslovakia and making clear plans to attack Poland, was able to get France, Britain and the Soviet Union to agree with him that Poland’s buildup of its border forces posed a threat to Germany and should be subject to sanctions till it reduced those forces. A League of Nations Disarmament Commission was formed that focused on Polish weaponry on its border with Germany, expressing “concern” over Poland’s possible secrecy in the placement of some of those weapons. Meanwhile, the head of the League met with Hitler, expressed admiration for his revitalization of Germany, and expressed the hope that the League and Germany could forge a "stronger partnership" for the years ahead. The famed appeasement of Nazi Germany never went this far in the late 1930s, so that it never matched the current scene of UN and international community appeasement plus literal collaboration with the Supreme International Criminal of our day, who is threatening another major cross-border attack despite being bogged down in a quagmire in an aggression begun in 2003.

Like the League, the United Nations is never more than the cumulative actions of its members. The collapse of the Soviet bloc and Soviet Union itself (1989-1991) was greeted by much optimism at the time: Finally, the UN would live up to its historic mission of protecting the world's peace and security. But what this rhetoric really meant was that the flourishing Western bloc was freer than ever to use the UN to promote its agenda. This proved true in the 1990s, as the number and scope of Western-inspired UN operations expanded greatly. And when in March 1999, the U.S.-led NATO bloc could not gain Russia's assent in the Security Council for its war on Yugoslavia, NATO went ahead with its war anyway, and brought in the UN after the fact.

Post-9/11, the United States and its allies have used the UN even more effectively to promote selective campaigns of "counter-terrorism" and "counter-proliferation," and to push aside aggression and disarmament. At the same time that U.S. wars approach a lethality not seen since Southeast Asia 40 years ago, UN agencies are dispatched with mandates to pick up the pieces caused by their destructiveness, but never to counter them.

At an October 17 news conference, a reporter asked George Bush whether he "definitively believe[s] Iran wants to build a nuclear weapon?" "Yeah," Bush replied, "I believe they want to have the capacity, the knowledge, in order to make a nuclear weapon….So I've told people that if you're interested in avoiding World War III, it seems like you ought to be interested in preventing them from have the knowledge necessary to make a nuclear weapon."[33]

Notice that Bush’s mobilization for World War III is not in response to Iran's actual use or even acquisition of a nuclear weapon, but simply to prevent Iran from having the knowledge of how to build one—knowledge that can be found in every peaceful use of nuclear energy the world over. Note also the transference of responsibility for the planned war from the serial aggressor onto the target, an Orwellian gambit hardly commented upon in the West. Bush’s extreme position was announced only weeks after an Israeli bombing raid in northern Syria that may have been executed to destroy surface-to-air missile defense systems of the same class that Iran is also known to operate, as well as test the system's vulnerabilities. And a vote by three-quarters of the U.S. Senate—including 30 of the Senate's 50 Democrats—expressing its sense that Iran poses a "threat to the security of the region," and calling on the White House to designate Iran's military a "foreign terrorist organization," just eight days before Bush did in fact designate Iran's military an FTO, adding to the sanctions it already imposes on Iran.[34]

It is thus quite possible that the U.S. leaders are about to embark on their fourth aggression in a desperate hope of reviving public support for a beleaguered presidency and it reactionary program. In this case, however, the aggression would likely trigger a much wider war, even involving nuclear arms, a breakdown in the global flow of oil, economic chaos as well as mass war deaths and destruction, and a rapid spread of authoritarian rule (reaching the United States).[35] But the breakdown in the rule of law as manifested in the UN and great power acceptance of, and even collaboration with, the serial aggressions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inability of democratic processes in the United States to constrain the war party, make this tragic outcome unnervingly more prob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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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인식론

철학/인식론 2008. 4. 24. 08:33

The Theory Of Knowledge

철학 분과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인식론(지식에 과한 이론)이다. 철학자들은 우리 지식의 범위와 우리 지식의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믿을 수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이나 조건에 의해 얻어진 지식의 의미를 발견하려 시도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만물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고,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나 그것의 신뢰성에 관해서 물어보지는 않는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수상쩍거나 허위라는 것의 증명이 확실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만약 이러한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면, 우리는 모든 확실성에 대한 주장에 대해 의심스러워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신문에서 말하는 모든 뉴스가 거짓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을 가정해보자. 우리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친구나 신문이나 우리자신까지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인식론을 발전시켜온 철학자들에게 온갖 종류의 질문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인식론의 발전에 있어 가장 풍부한 자료의 출처는 인간판단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이론이나 믿음도 없어왔다는 것, 그것을 믿고 그것에 관해 논의했던 어떤 사람도 없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과학의 역사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믿어져 왔던 이론과 완전히 버려진 이론으로 가득 차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고 시도해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처벌한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달이 돌이라고 주장하여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20세기에, 테네시 주에서의 한 선생은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처벌을 당했다. 지난 25년간 그들 사회의 통치자들의 절대 확실한 지식에 도전해 “범죄자”라고 낙인찍힌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철학자들은 모든 지식의 기초를 결정하는 것과 이 주장들의 판단에 관한 기준을 결정하는 것을 고찰하였다. 만약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많은 것들이 거짓이나 의심스러운 것으로 증명되어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RENE DESCARTES : THE PROBLEM POSED

 

위대한 프랑스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인 Rene Decartes는 가장 두드러진 형태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데카르는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는 카톨릭과 위그노교 사이의 종교적인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적인 세계의 본성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의 옹호자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와 갈리레오의 새로운 이론을 지원하는 자들 사이의 격렬한 논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훈련된 데카르트는 스스로 세계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의 연구를 확장한 후에 그는 전통적이고 명예스러웠던 나름 권위적인 것으로 주장된 모든 받아들여진 견해를 의심하는데 이르렀다. 1628년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느낀 오래된 이론과 새로운 이론 사이의 혼란에 의해 활발히 논의되었던, 가장 독립적이고, 사려 깊은, 동시대의 사람들을 찾았다. 그들 대부분은 확실성을 찾는데 단념하였고, 회의론으로 빠져들었다.

a. 충분하거나 적합한 증거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우리의 어떤 믿음이든지 의심한다는 견해

그러나 데카르트는 회의론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확실하기 위한, 그리고 어떤 발견도 그의 믿음을 전혀 흔들 수 없는 확실성을 강렬히 원하였다. 그는 확실성의 탐구에 절망한 사람들의 파리를 떠났다. 네덜란드로 떠난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고찰하고, 믿을 수 있는 지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떤 것이든지 알아보라고 말했다.

데카르트는 결코 거짓이거나 의심스러울 수 없는 유일한 지식에 대해 확실할 수 있다고 느꼈다. 우리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이러한 기준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을 시험해보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시험(만약 그가 옳다면,)의 결과들은 너무 절망적이어서 철학자들은 지식의 기초에 대한 물음에 대해 탐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Decartes' Test. 그들의 이론들을 시험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데카르트의 시험을 고찰해봐야 한다. 그는 그의 <제일철학의 성찰(1640)>을 쓰면서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진리라고 공인된 지식들이 거짓된 믿음들이 얼마나 많은 지와 이러한 기초에 구성되어진 모든 것들이 얼마나 의심스러운지를 발견한 이후, 몇 년이 지난 현재.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이전부터 받아들여진 모든 의견들을 스스로 제거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기초에서부터 새로운 것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만약 내가 과학에서 견고하고 불변하는 구조를 세우기를 원하는 것처럼. . . .

그러나 이를 위해 모든 의견이 거짓임을 증명해보일 필요는 없다. 이것은 내가 도저히 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성이 설득하고 있는 바는 아주 확실하지 않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명백히 거짓된 경우에서처럼 조심스럽게 동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므로, 의견들 가운데 하나라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의견 전체를 모두 거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의견들을 일일이 검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끝이 없는 일이기에 말이다. 이보다는 오히려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진 것도 저절로 무너질 것이기에, 기존의 의견이 의존하고 있는 원리들 자체를 검토해보자.

 

이전부터 갖고 있던 모든 견해들을 시험할 필요는 없다고 데카르트는 느꼈지만, -끝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믿음의 일반적인 형태를 고찰해보는 것이 날 것이다. 만약 의심할 만한 어떤 이유가 있다면 모든 범주는 의심스럽고 믿지 못할 만한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 간주되어진 첫 번째 범주는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그러한 견해들이다.

 

내가 지금까지 아주 참된 것으로 간주해 온 것은 모두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인다는 것을 이제 경험하고 있으며,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감각적 자료의 신뢰성 데카르트는 모든 것들은 감각에 의해 기만당하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확신하였다. 누군가 거리를 두고 어떤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가까이서 바라볼 때와 분명 다르게 보이거나, 물속에 있는 것을 볼 때와 물 밖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한사람이 노를 젓고 있을 때, 노는 굽어보인다. 이러한 일은 때때로 발생하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모든 경우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실할 수 없다고 제안하였다. 만약 누군가는 때때로 이러한 경우를 인정하지만, 우리는 감각 경험에 매우 확신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사물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그의 시험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감각이 비록 아주 작은 것과 멀리 떨어진 것에 대해 종종 우리를 속일지라도, 감각으로부터 알게 된 것 가운데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겨울 외투를 입고 난로 가에 앉아 있다는 것, 이 종이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두 손이 그리고 이 몸통이 내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는가?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미치광이의 짓과 다름이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 . . [그들은 그들이 분명히 가난하다거나, 아무것도 거치지 않았는데, 귀족의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거나, 호박이나 유리로 만들어진 왕관을 가지고 있다는 상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확신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미쳤고, 내가 조금 더 미치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다음 예를 따르는 것은 너무도 사치스럽다.(?)] - 별 신경 안 써도 되는 내용 -

 

그러나 아마도 데카르트는 우리의 확신을 흔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착각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그의 시험이 이미 어떤 의심에 이르지 않았다면, 데카르트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렇지만 나도 한 인간이다. 밤에는 으레 잠을 자고, 꿈속에서는 미치광이가 깨어 있을 때 하는 짓과 똑같은 것을, 아니 종종 더 괴상한 것을 그려 낸다.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있건만 평소처럼 내가 여기 있다고, 겨울 외투를 입고 난로 가에 앉아 있다고 잠 속에서 그려낸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러나 나는 지금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종이를 보고 있다. 내가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이 머리는 잠 속에 있지 않다. 나는 의도적으로 손을 뻗어 보고, 또 느끼고 있다. 내가 잠자고 있을 때 이런 것은 이처럼 판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속은 적이 한 두 번이던가. 이런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깨어 있다는 것과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해 줄 어떤 징표도 없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이런 놀라움으로 인해 내가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 문제는 까다롭다. 어떻게 우리가 보는 모든 것과 꿈의 일부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구별할 수 있을 지라도, 우리가 체크하기로 채택한 어떤 수단이든, 또한 꿈의 일부분이다. 사람들은 꿈속에서 꿈인지 아닌지 꼬집어보는 꿈을 꾸어왔다. 데카르트는 그것에 관해 느낄 방법이 없고, 우리의 감각 경험이 꿈의 일부가 아니라는 어떠한 보증도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의 신뢰성- 정확성 - 을 의심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모든 것이 꿈이더라도, 누군가는 꿈의 어떠한 측면은 믿을 수 있지 않냐고 물어볼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그의 시험을 시작하였다.

 

그래 좋다. 우리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치자. 그래서 눈을 뜨고 있다는 것, 머리를 움직여 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자. 아니 어쩌면 그런 손이나 몸통조차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잠들어 있을 때 보이는 것은 일종의 상과 같은 것이며, 이것은 참된 것의 견본대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 머리, 손, 몸통 등과 같은 일반적인 것만은 적어도 단순히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현존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화가들이 사이렌이나 사티로스를 아주 기이한 모양으로 나타내려고 해 보았자, 그들은 아주 새로운 본성을 그것에 부여할 수는 없으며, 다만 다양한 동물들의 지체들을 이리 저리 뒤섞어 놓을 뿐이다. 그렇지만 혹시 그들이 이와 유사한 것을 전혀 본적도 없는, 그래서 극히 허구적이고 거짓된 어떤 것을 고안해낸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구성하고 있는 색깔만은 적어도 참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부분에서, 데카르트는 비록 우리의 경험의 특별한 내용이 꿈일지라도, 여전히 그 꿈은 자체로 어떤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물들-우리자신, 의자, 테이블, 나무-은 굉장한 착각이거나 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환상은 어떤 것에 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데카르트는 우리가 경험하고 얘기하고, 함께 살고 있는, 특별한 사물은 계속되는 꿈 세계의 일부분일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우리는 그 꿈에 있는 사물을 우리의 꿈속에서 창조해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그렇다면, 확실한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창조는 확실히 고정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코끼리는 항상 나비보다 크고, 사각형은 결코 둥근 각을 가질 수 없다. 데카르트는 우리 경험의 실제항목이 환상일 수 있다는 고찰과, 우리가 그것들을 만들어 낸 연구(예를 들어, 천문학, 식물학, 물리학)들 또한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그러한 사물이 꿈속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상상의 허구라면. 여전히 꿈의 세계는 -만약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이 꿈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논쟁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고, 확실히 기하학적이고 수사학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깨어있거나 잠들어 있든 지간에, 2와 3의 합은 언제나 5이고, 사각형은 절대 4변 이상을 가질 수 없고, 그것은 너무도 분명하고 진리는 어떤 거짓이나 불확실한 것으로 의심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신에 관한 질문 그러나 어떤 사람도 시험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믿을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져야 한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것의 지식을 의심할 최종적이고 압도적인 이유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내 정신 속에는 오래된 한 가지 의견이 새겨져 있다.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지금의 내 모습대로 나를 창조했을 신이 존재한다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땅, 하늘, 연장적 사물, 형태, 크기, 장소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지금 보는 그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저 신이 만들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또한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완전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도 가끔 오류를 범하고 있듯이, 나 역시도 둘에 셋을 더할 때, 사각형의 변을 셀 때 혹은 이보다 더 쉬운 것을 행할 때 잘못을 범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은 아주 선하기 때문에 내가 속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항상 잘못을 저지르도록 신이 나를 창조했다는 것이 그의 신성과 어긋나는 것이라면, 내가 가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신이 허용하고 있다는 것 또한 어느 정도는 신의 선성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가끔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는 인류를 속이는 신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모든 것의 가장 비참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데카르트는 그의 시험을 결론 낼 준비를 하였다. 만약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못 인도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우리는 어떤 것이든 믿을 수 있을까? 만약 내가 2와 3을 더했을 때, 결론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실수를 강요받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잘못된 결론을 피할 수 있을까? 계획적인 기만의 가능성이 한번이라도 허락된다면, 모든 것은 절망에 빠질 것이고, 우리의 믿을 수 있는 대부분의 정보는 의심스러워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결론지었다.

 

결국에 나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믿어왔던, 그리고 생각의 부족을 통해서나 경솔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매우 강력하고 완벽하게 고려되었던 이성을 통한 진리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만약 과학에서 어떤 확실성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명백하게 거짓인 것보다 이러한 의견을 믿는 것을 조심스럽게 그만두어야 한다.

 

의심 데카르트의 시험은 재앙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견해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이러한 믿음들이 거짓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증거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에, 우리의 가장 소중하고 견고한 믿음들이 거짓일 수 있다고 제시하는, 그럴듯하거나 그렇지 않건 간에, 이유는 제공될 수 있다. 광기와 술 취함으로 인한 감각적 착각과 환상은 우리의 감각적 정보의 신뢰도에 어떤 의심을 던진다. “우리는 단지 사물을 보는 것일 뿐이다.” 경험의 모든 가능성은 꿈의 일부분이라는 의심(사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상상 밖의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심)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지식의 기초에 대한 보증 없이는 악령이 우리를 속인다는 가능성은 완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

 

데카르트의 목적. 데카르트의 시험의 목적은 과학적 허구의 환상을 공표하는 것이 아니지만, 결정적인 문제를 조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것들이 거짓이거나 불확실할 것이라고 당연히 여기려고 할 것이다.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견의 설립 속에 어려움은 존재한다고 보이는데,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와 모든 의심에 빠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거짓일지도 모르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하나의 견해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도록 만들었다. 대신에 그는 만족스러운 기초를 만드는데 착수하였다. 그 기초는 너무도 확실하여, 회의주의에 의해 제시된 모든 터무니없는 가정이 그 기초를 흔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문제. 이제 데카르트와 다른 철학자들이 우리 지식의 본성(지식의 기초와 지식의 확장)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나타내었던 이론에 관하여 고찰해보자. 그들의 이론화가 고려해왔던 것을 명백하게 만들기 위하여 먼저 지식의 문제에 관한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사용하는 주장의 종류는 무엇인가?

 

통용어(通用語) 보통의 논쟁 속에서 우리는 동사 “알고 있다.”를 막연히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어떤 것의 사실이 확실하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1933년 월드시리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나는 뉴욕자이언츠가 이겼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말하였다. 데카르트의 도움 없이, 개인적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 “알고 있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의 주장은 사실 기초가 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매우 완고한 사람들 - 사실, 매우 실수하는 - 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믿는다.”, “생각한다.”와 좋아함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을 때와 같이 “알고 있다.”의 보다 더 긍정적인 사용법이 있다. 속인들이 Salk polio vaccine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사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아마도 이것은 권위 있는 어떤 사람의 견해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한사람이 묻기를 만약 스미스가 그 파티에 가게 된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 그가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이다. 이것은 단지 “그가 그럴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적어도 나는 그가 거기에 갈 계획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말하는 편리한 방식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완전한 보장을 표현하지 않지만, 확신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스미스의 계획을 들은 것을 단순한 기초로 하여 그러한 주장의 정확성을 보증하기는 힘들 것이다. 분명히 스미스는 그의 계획을 바꾸려하거나 어떤 일이 발생하여 그의 참석을 방해할 것이다. 당연히, “알고 있다.”는 단어는 예감이나 희망이나 고집 센 의견에 지나지 않는 표현으로 사용될 것이다. 룰렛게임의 다음 숫자를 “알고 있다”는 라스베가스의 도박꾼들은 “예감”에 기반을 둔 예측이나 행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선거 캠페인 기간 동안에 누가 뽑힐지 “알고 있는” 정치가들과 만약 그들이 잘못됐다면, 그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희망이나 두려움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비슷하게 아칸소 공과대학이 노틀담 대학보다 더 나은 풋볼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남자가 아칸소 공과대학이 모든 게임에서 지고, 노틀담 대학이 모든 게임에서 이겼을 때, 그는 사실과 관계없으며, 초월적이고, 단순한 맹신적인 충성을 표현한 것이다.

 

DECARTES'S THEORY OF KNOWLEDGE

만약 우리가 플라톤에서부터 훨씬 후인 데카르트의 지식의 이론에 이르기까지를 살펴봤다면, 우리는 절대적이며 참된 지식의 발견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긍정적인 이론을 찾을 수 있다. 지식의 기초와 근원, 본성에 관한 데카르트의 견해는 많은 면에서 플라톤의 것과 공통점이 있다.

확실성을 위한 탐구. 이 논쟁의 시작에서 우리는 지식의 신뢰성에 관한 데카르트의 시험을 고찰했다. 그리고 보았듯이 충격적인 결론에 도착했다는 것과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정보-과학적이고 심지어 수학적인 정보를 포함해서-는 이의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재앙이 된 시험을 제안한 데카르트의 요점은 모든 것에 관한 의심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의심을 위한 의심을 하고 항상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고 하는, 회의주의자들을 모방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의 목적은 장담컨대, 좋은 기초를 얻으려는 것이고, 젖은 모래와 진흙을 거절하고 단단한 반석을 찾으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에 관한 절대적이고 확실한 기초를 찾으려고 하였다. 만약 거짓이거나 의심스러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것이든 제거하기 위해 누군가 그의 시험을 처음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그러한 기초는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기술하였다.

 

마치 분명히 거짓인 것을 알아낸 것 같이, 조금의 정도라도 의심스러운 것으로 제시된 모든 것을 유보하려고 한다. 그리고 확실하거나 적어도 내가 그 밖의 것을 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을 배울 수 있을 때까지, 확실한 어떤 것을 찾을 때까지 나는 이러한 과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존재의 확실성. 이런 식으로 데카르트는 의심할 나위없고 확실할 수 있는 어떤 정보를 찾아내려는 시험을 수행하였다. 만약 그가 그러한 지식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인간 지식의 전체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발점으로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감각적 정보와 과학적 정보와 수학에 의심을 던진 후에, 데카르트는 자신이 찾으려는 정확한 확실성의 찾을 때까지 그의 탐구를 계속해나갔다.

 

그렇지만 세계에는 하늘, 땅, 정신, 물체가 없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지 않았던가? 이때 나 자신도 없다고 설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내가 만일 나에게 어떤 것을 설득했다면, 확실히 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주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집요하게 나를 항상 속이고 있다고 치자. 자 이제,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인다고 치자. 그러나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히 고찰해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찾아낸 정보의 유일한 부분은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참되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거나 이해하려고 시도하려할 때마다 데카르트의 시험에 따르면, 그것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는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려하거나 그 시험을 시행하려고 할 때, 나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기만자”가 하려는 것을 주장하려할지라도, 그가 나를 속이려는 시도가 어렵다할지라도, 만약 내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을 속일 수 없다. 만약 내가 생각하며, 데카르트가 요구한다면, 내가 존재한다고 절대적으로 명백해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어떤 조건을 생각하려 시도하자마자,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완전하게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의심이나 부정을 위한 어떤 시도도 여전히 내가 생각하기 위해 나는 존재해야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하는 또 다른 생각이다. 비록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반증하려하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그 주장의 진리를 다시 논증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데카르트의 요점을 강조하는 한 방법은 다음의 이야기를 고려해보는 것이다. 유명한 미국의 철학자 Morris Raphael Cohen이 방과 후 한 학생과 함께 토론에 참가한 것이 보고되었다. Cohen 교수는 그의 반에 데카르트를 가르쳐왔고, 이 토론에서, 일찍이 윤곽을 그려온 의심을 위한 모든 이유를 전개시켜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학생에게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으라고 집에 보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다음날, 매우 초췌한 학생은 면도도 하지 않고, 눈이 충혈 돼서 방과 후, Cohen 교수에게 왔으며, 매우 걱정된다고 얘기했다. 학생은 밤새 자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안하는지에 대해 결정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숙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공부했었다. “Cohen 교수님”, 그는 매우 걱정되어 얘기했다. “말해주세요, 제발 말해주세요. 내가 정말 존재하나요?” Cohen 교수는 그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경우에도, 데카르트는 마침내 하나의 진실을 발견하였다고 확신하였다. 그것은 “회의주의에 의해 제시된 거의 모든 터무니없는 주장은 그것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다.” 이 절대적이고 확실한 진리를 시험을 통해서, 다른 진술들의 진리를 판단하기위한 하나의 규칙이나 규범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모른다고, 그는 희망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진리에 확신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는지 나는 또한 알지 못하는가? 확실히 이 기초적인 지식 안에서 그것이 진리라고 나를 납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내가 너무도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했던 어떤 것이 거짓일 수 있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내가 단언한 것의 명석함과 지각의 판명을 제외하고, 내가 말한 것이 진리라고 나를 납득시키는 것은 실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일반적인 규칙을 세울 수 있다고 보인다. 내가 매우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는 일반적인 규칙.

 

데카르트의 논쟁은 하나의 진리(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점검함으로써, 모든 진리에 대한 법칙과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어째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하는가?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것이 진리라고 납득시키는, 이 주장의 유일한 특징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명석하고 판명하게 알거나 이해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명석과 판명이 나의 확신을 만드는 유일한 조건이고, 그것들이 모든 진리들이 가져야 하는 일반적인 조건이 아니라면, 이러한 경우에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명석과 판명이 진리의 기준이나 척도가 아니고, 그것들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라면, 그 주장은 분명하게 거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논의는 결론 내렸다. 명석과 판명은 진리의 기준(표시, 특징?)이 될 수 있고,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특성의 구별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규칙은 체계적일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간에 명석하고 명료하게 생각된 것은 진리이다.”

명석과 판명. 그러나 무엇이 명석과 판명의 특성들인가?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들>의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데카르트는 그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만큼 명석과 판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하였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분명하고 명료한 지각이란 무엇인가. 전체 삶 속에서 아무것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고 하면서)이 있다. 명백하고 논쟁할 수 없는 판단으로 구성되어진 지식은 명석할 뿐만 아니라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명석함을 주의 깊은 마음에 나타나고 보이는 것이라고 부른다. 존재가 지각하는 눈에 보일 때, 그들이 충분한 힘을 그것을 조종할 때, 우리는 분명하게 사물을 본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판명은 너무도 정확하고 그것자체로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언뜻 보아, 이 설명은 매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조심스런 고찰은 데카르트의 요점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인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강제적인 것이라면, 분명히 경험이나 생각은 명석하다. 명석한 생각에 관해 데카르트가 제공한 그 삽화는 대충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치통과 같은 생생한 감각경험이 하나이고, 수학적 사고나 생각하고, 소망하고, 좋아함과 같은 정신적 활동이 또 다른 하나이다. 이 두 가지 형태에서, 마음은 정신적이거나 감각적이든 간에 어떤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곧 이야기하게 될 것과 같이 사고는 판명함 없이도 명석할 수 있다. 그 역은 발생할 수 없다. 명석하지만, 판명하지 않은 사고는 하나의 경험이다. 그것은 너무도 생생하고 강력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에 확신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하여 데카르트가 채용한 한 예는 치통이다. 그 경험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그 인식을 강요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통증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 사람은 그 고통이 치통에서 온 것인지 마음에서 온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몸과 마음의 관계에 관한 데카르트의 이론에 관한 또 다른 논의를 고찰해보면, 고통은 치아 속에서도,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부족한 것은 경험이 무엇인지와 세계의 그 밖의 어떤 것과 구별하는 능력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것을 완성할 수 있다면, 그 밖의 어떤 것과 도저히 혼동할 수 없는 그 경험을 명백히 한다면, 명석함만큼 판명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구분 지을 수 있는 어떤 생각이 분명해질 것이라면, 그 밖의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사고의 인식을 강렬하게 가지게 될 것이다.

확실성의 확장. 명석과 판명한 사고의 개념을 더 추적하게 되면,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진리 외에 그 밖의 진리를 요구한다. 이 연구의 동안에, 그는 완전한 확실성과 함께 알 수 있는 우주에 과한 이론을 발전시켰고, 그 이론은 결국에 참된 진리의 기준을 위한 더 나은 정당화를 제공하였다. 그의 지식 이론에 관한 논쟁을 완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간단하게 그의 성장의 남아있는 주장을 살펴 보아야한다.

본유관념. 명석과 판명한 것을 찾기 위한 나의 생각을 고찰할 때, 데카르트는 주장하였다. 내가 명석하지 않고 판명하지 않은 거의 모든 것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전부터 갖고 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고,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하다. 태양이나 인어,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고블린과 같은 개념들을 포함한다. 데카르트는 경험에서도 온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의 상상 속에서 창조되거나 구성되어진 것도 아닌 경험에서 나온 것도 아닌 본유과념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형태의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알아보겠지만 이 본유관념들은 정말로 명석하고 판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신(GOD). 데카르트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이러한 종류의 관념은 원과 같은 수학적인 개체에 관한 것이고, 또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주장했던 완전한 존재, 신에 대한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우리의 경험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이다.우리 스스로는 충분히 완벽하지 않아서, 데카르트는 특히 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서 나타나는 완전에 대한 것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지 유한한, 현세의 창조물이며, 아직 우리는 무한하고 영원한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데카르트가 묻기를,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서 발견할 수도 없고, 우리 자신 안에 있지도 않은 속성의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러한 이유로부터, 그는 수학적인 관념과 신에 대한 관념이 본유관념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범주라고 결론지었다. 그 본유관념은 우리 자신도 아니고 우리 삶의 어떤 사건에 의해서도 아닌 어떤 작용에 의해서 인식되어진 것이다.

완전한 존재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데카르트는 이 관념은 어떤 것에 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 어떤 것은 적어도 관념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완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관념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독립적이며, 전지전능한 실체이고, 나 자신과 만약 그 밖의 것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이다. 나는 고안된 관념 속에서 이용하는 이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나의 경험 속에서 그러한 완전성과 같은 어떤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에 관한 관념은 적어도 관념으로서 완전성과 같은 어떤 것으로부터 나왔어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논증했듯이, 그것은 나를 창조하고,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심어놓은 신이 존재해야 한다.

확실성 그 이상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두 가지 진리를 확립함으로써, 데카르트는 여전히 보다 더 나아가서 확실한 지식들을 찾았다. “그것은 참된 신(과학과 지혜의 모든 놀라움을 포함하고 있는)을 심사숙고하는 것에서부터 세계의 다른 사물의 지식에까지 우리를 이끌도록 하는 하나의 길을 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길을 따르는 첫 번째 단계는 만약 신이 완전한 존재라면 그가 인간을 속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주장한, 사기와 기만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의 속성이 될 수 없다.

이 발견-신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의 기초-은 완전한 존재는 기만자일 수 없고, 그 신은 그가 이전부터 상상했던 악마일수도 없고, 아니라는 것을 데카르트에게 보장해주었다. 만약 신이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전부터 깊이 의심해왔던 수많은 정보가 진짜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기만자가 아닌, 신이 우리에게 진리를 믿도록 원하고,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발견해낼 필요가 있다. 신은 우리를 속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준 지식의 완전한 믿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의 능력의 분석으로부터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강요된 유일한 판단이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어떤 명석, 판명한 관념이든지 동의하도록, 그리고 명석, 판명한 것은 무엇이든지 진리라는 것을 믿도록 강요받았다. 전능한 신이 이것을 우리에게 강요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한 어떤 것이 진리라고 믿을 때, 우리는 실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기만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명석하지 않고 판명하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 우리의 판단을 억제할 수 있다. 신은 우리에게 이러한 분야에서 어떠한 결론도 강요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지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념에 관한 존경과 함께, 우리의 믿음이 참이라는 어떤 보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에 관하여 믿을만한 판단 기능을 신이 우리에게 심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불완전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범위를 넘어서는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는 것을 강요하고, 어떤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관한 문제를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악용했을 때, 실수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의도하고 우리에게 강요한 것과 같이 그것들을 사용할 때, 실수할 수 없다.

여기서 몇 가지 예가 도움이 될 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은 명석하고 판명한 수학적 관념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가 2와 3과 5에 관한 관념을 고찰할 때, 우리는 2+3=5라는 것이 명석하고 판명하다는 것을 안다. 신이 우리에게 그 관념과 판단능력을 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기만자일 수 없기 때문에, “2+3=5”는 진실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걷고 있는 것 같은 칼라패치(?)의 그룹을 볼 때, 이것들이 사람이라는 것이 명석하지 않고, 판명하지 않는다고, 이것은 꿈의 일부분이 아닐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보는 것을 판단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만약 이런 경우에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신성한 보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 . 우리는 잘못과 오류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확실히 내가 설명했던 것보다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 그 이해를 통해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되어진 것을 제외한 어떤 문제에 관한 판단을 할 수 없는 나의 지식의 한계 내에서 나의 의지를 억제한 만큼 오랫동안, 나는 결코 속을 수 없다. 모든 명석과 판명한 개념은 분명히 어떤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나올 수 없지만, 반드시 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 내가 말하길, 신은 최고로 완전하고 어떤 오류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개념이나 참인 판단을 결론내려야 한다.

 

객관적인 실재를 위한 논쟁. 그러면 무엇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한 무엇이든지 간에 참이라는 신의 보증에 대해서, 신의 존재, 우리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기초에 기반을 두어, 데카르트는 우리는 수학적인 지식의 전체 범위가 진리라는 것에 긍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오직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내가 깨어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간에 이 지식은 진리이다. 그것은 어느 경우에나 명석하고 판명하며, 그리고 신은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학적인 지식은 오직 나의 마음속에 관념에 관련된 진리로 주어졌다. 나의 외부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또한 확신할 수 있다는 것과 확실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고찰하지 않았던 정교한 논쟁을 통해서, 데카르트는 우리의 마음 밖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의 경험이 이 세계로부터 나온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우리의 본성적인 믿음의 신뢰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기초적인 논증이 제공한 것은 외부의 세계 안에서의 믿음이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신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 된다. 신은 기만자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외부의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외부세계에 안전하게 귀속시키는 속성은 명석하고 판명한 형태의 관념 안에서 찾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연장을 가지고 있는 형태,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진리들이 그것들에 적용된다.

비록 데카르트는 지식과 믿음에 관한 가장 극단적인 의심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확실한 지식의 정도에 관한 광범위한 이론과 함께, 우리를 속이지 않는 신에 관해서, 신에 관한 우리의 존재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실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모든 명석하고 판명한 지식은, 정신적인 것만큼 물질적인 개체에 적용될 수 있는 모든 수학적인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의 기초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확실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 경험과 같은 명석하지도 않고 판명하지도 않은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확실성을 결코 완성할 수 없다. 그것들이 수학적인 관계에 있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물리적인 형태의 법칙을 알 수 있지만, 아마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관한 환상이나 꿈들인 세계의 판명하지 않거나 명석하지 않은 어떤 확실성을 가지고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색깔, 소리, 냄새) 본유관념의 세계,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은 신이 우리 안에 심어 놓은 것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확실성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확실성이다. 의심의 방법, 그것을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정보에 대한 시험은 무엇이 확실하고 그렇지 않은지 우리로 하여금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 데카르트는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에 관한 확실한 지식의 많은 양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외부의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떤 것들은 자연의 확실한 지식에 관한 기초를 제공해준다. 만약 우리가 명석하지도 않고 판명하지도 않은 관념에 기반을 둔 판단을 피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어떤 실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식 이론의 합리론자. 지식의 이론은 플라톤과 데카르트가 불렀던 “합리론”과 같은 것이다. 독자적인 이성의 확실한 절차를 채용함으로써 우리는 강력한 감각 안에 지식-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거짓일 수 없는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보통 그러한 합리주의적 이론들은 (여기에 나타난 이론들 모두) 감각 경험 안에서는 어떤 절대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찾을 수 없지만, 오직 마음의 영역 안에서만 구해진다고 말해진다. 플라톤과 데카르트 모두 참된 지식은 이미 우리 안에 우리가 얻을 수 없지만 타고난 본유관념이라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더 나아가 합리론자들은 다양한 합리주의적 절차를 통해 진정한 세계를 확실히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확실성으로 알려질 수 없는 세계는 일반적으로 현혹시키거나 가짜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세계로 판단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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