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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15 경험주의 철학과 존로크, 데이비드 흄의 인식론 3
  2. 2008.04.24 데카르트의 인식론 1

경험주의 철학과 존로크, 데이비드 흄의 인식론

철학/인식론 2008. 6. 15. 21:55

Empirical Philosophy

합리주의자들의 지식이론에 관한 의심 때문에, 많은 철학자들은 일반적인 인간 행동에 모순이 없을 지식이론을 밝히려고 해왔다. 주장된 실제 세계라고 말해지는 것들에 관한 절대적인 참된 지식을 찾아보는 대신에, 그들은 사실 어디서부터 우리의 지식을 얻어서 행동하는지, 그리고 실제적으로 소유했다는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거절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관한 완벽하고 확실한 지식을 따르는 것이 낫다고 본 이러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근원이며 기초인 감각적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였고, 감각적 경험에 의한 지식의 설명을 구성하려고 하였다.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지식을 설명하려했던 이러한 유형의 이론은 경험주의라고 불린다.

 

경험주의의 사회적 배경. 지식의 문제에 대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보통 지배적인 관심이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어 왔던 나라에서 발전해왔다. 이와 같이, 경험주의는 영국에서 우세한 지식이론이었고,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그리고 다양한 형식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지식사에서는 비주류의 역할을 가졌다. 경험주의 근대이론은 17세기 영국에서 철학적인 논쟁으로 성장하였고, 그때는 영국이 상업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급속히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세계를 조종하고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로버트 보일, 로버트 후크, 아이작 뉴튼과 같은 위대한 영국의 과학자들은 근대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세계의 기초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절대적 지식에 대한 낡은 탐구들이 무익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의 과학자들에 의해 알려진 정보들은 유용하고 중요해 보였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그 시대의 과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참된,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세계에 대한 가능한 가설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새로운 지식으로부터 생겨난 거대한 진보와 함께, 어떤 철학자들은 합리론자들의 연구를 버려야 했고, 실제적인 과학자들의 성공과 함께 지식 이론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17세기 영국에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몇몇 위대한 사상가들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당시에 활동 중인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새로운 지식에 어울린 지식 이론을 발견하려 하였다. 서로 다른 견해의 탐구 속에서 이 철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전문적인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을 좌절시키거나 세기를 넘어서 논쟁해 온 고전적인 문제를 염려하지 않는 실무가들이다. 제임스 1세 왕 아래에서 대법관을 지낸 프란시스 베이컨에서 시작하여, 영국에서 “새로운 철학”의 빛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론적인 세계의 상아탑을 제거하였고, 사람들은 실천적인 사건의 세계에서 그들의 명성을 얻었다.

 

JOHN LOCKE

베이컨은 17세기 영국에서 경험주의적 접근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였다. 17세기 후반에 직업이 보통 의사인, 존로크(1632-1704)는 그의 에세이 인간 이해에 대한 고찰에서 감각 경험에 의한 우리 지식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이 작업에서 로크는 우리의 지식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다가오며, 우리는 본유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체계적으로 그는 다양한 개념이나 관념의 출처나 그것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보여주려고 시도하였고, 노란색과 같은, 하나의 특성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인식에서 도시와 같은, 복잡하고 혼합된 특성에 이르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지식의 본성과 기원에 대해 고찰해보면서, 로크는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각종 사물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과 그들이 사물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류가 깨닫도록 크게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이해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그들이 어디까지를 도달할지, 그들이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수준에,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포기하는 곳에서, 만약 내가 그것에 대한 그 힘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러나 자기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을 하려고 하는 고달픈 사람의 분주한 마음이 더욱 신중해질 수 있는데 유용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오성의 한계가 최대 범위에 이르렀을 때 멈추고, 우리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 있다면 조용한 무지 속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만든다.

 

본유관념의 부정. 로크가 주장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고찰할 때, 우리는 어떤 본유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 경험에 독립적이거나 앞서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을 어떤 이유에 대한 원리나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전의 합리론자들이 제공하였던, 마음에 심어진 진리들에 대한 예들은 실제로 모든 인류에 알려진 것이 아니라고 로크는 주장했다. 어린이나 바보들은 증거 없이 주장된 본유적인 지식을 인식하지 못한다. 비록 그들이 그러한 것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진리들이 그들의 마음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관념은 마음에 심어진 것이고, 동시에 마음은 그것을 모르며, 결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이 인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

 

“백지” 대신에 로크는 만약 모두가 자신의 관찰과 경험을 잘 살펴보게 된다면, 그는 본래적으로 그의 마음은 단순히 “어떤 글자도 쓰여 있지 않고 어떤 관념도 없는 백지”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많은 것들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에 관해 누구든지 생각하거나 알고 있다. 우리 정보의 모든 것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나 우리 마음에 지난 간 것을 반성함으로써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로크에 따른다면, 우리지식의 두가지 원천이 있다. 하나가 외적감각이고, 다른 것이 내적감각이다.

 

어떤 것이든 그의 생각을 고찰해보자. 그리고 완전하게 그의 이해를 조사해보자. 그리고 나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독특한 생각들이 그의 감감적 대상 외에 존재하는지, 그의 반성의 대상으로서 생각되어진 마음의 작용인지에 대해 나에게 말해보게끔 하자.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지식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곳에 머물게 될 것이고, 그는 엄격한 관점을 취하고, 그의 마음에 어떤 관념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지만,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심어지더라도 아마도 무한하고 다양하게 혼합되어고 이해를 통해 확장했다.

 

단순관념. 그의 경험주의적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로크는 끈기있게 우리의 모든 정보가 내적감각이나 외적감각의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얻어지는지 보여주기 위해 시도하였다. 우리 지식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은 로크가 단순 관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다른 어떤 요소들과 섞이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한 단순관념의 예로, 로크는 설탕의 맛, 장미의 향기, 릴리의 순백이나 얼음 조각의 차가움에 대한 경험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단순 관념들은 오직 외적 감각과 내적감각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정신은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말한다. 비축하고, 반복하고 이러한 기본 관념들을 결합시키라고...

 

확실성. 로크의 오래된 논문 인간 오성론의 진행 중에 그는 얼마나 다양한 우리의 지식이 외적감각이나 내적감각의 서로 다른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지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를 훌륭하게 해냈다. 로크 이후로 경험주의 철학자들을 괴롭혀 왔던, 그가 직면한 기초적인 어려움은 우리의 관념에 보이는 것들이 실제인지, 그것이 우리의 지식의 일부분이라면, “실ㅔ와 사물의 존재들과 유사점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정신에 대단히 많은 관념들을 가지고 있고, 그 많은 관념들은 세계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인어, 유니콘, 그밖의 것 등등의 관념. 우리는, 실재로 생각되어질,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상상의 결과물일 뿐이거나 지나간 과거의 다양한 경험을 결합시키는 마음의 능력인 우리의 관념을 검토함으로써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로크의 대답은 지식의 성격과 실재성에 관한 이론의 작업을 가능케 한다.

 

제일성질과 제이성질. 로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외적감각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제일성질에 관한 관념과 제이성질에 관한 관념이다. 제일성질들은 우리 경험 속에서 경험되어진 사물에 속해져야 하는 것들이다. 그에 반해, 제이성질들은 사실, 사물 그 자체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제일 성질에 의해 우리 안에 다양한 외적감각을 만들어 내는 힘이다. 예를 들어 로크의 설명에 따르면, 크기와 형태는 제일성질인 반면에, 우리가 사물에서 보는 색깔은 아니다. 색깔은 확실한 조건의 결과이거나 우리가 그것들을 사물 안에 “Power"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우리가 색깔을 보는 것은 정신에 기반을 둔 행동이다. 우리가 실제적인 사물을 경험할 때, 사실 그 안에는 어떤 색깔도 있지 않다. 로크가 그리려고 했던 것은 과학자들이 사물에 가지고 있는 성질을 기록한, 사물의 과학적인 설명과 같은 사물의 일상적인 경험 사이의 것이다.

 

특별한 크기, 수, 형태와 눈이나 불의 일정한 움직임들은 어떤 사람의 감각이 그것들을 믿거나 믿지 않건 간에 실제로 그것들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실제 성질들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제로 그 물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 열, 흰색이나 차가움이 그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은 정신 안에 고통이나 아픔이 들어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의 감각을 제거해버려라. 미각이 맛은 아니며, 후각이 냄새는 아니다. 그리고 특별한 관념으로서의 모든 색깔, 맛, 향기와 소리들은 사라지고 없어지며 그것들의 원인을 변형시킨다. 즉, 크기, 형태와 부분의 움직임.

 

만약 제일성질이라고 부르며, 경험하고 사물에 속한 확실한 성질들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물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얻을 수 있는가? 로크는 우리가 몇 가지 단순한 관념들이 끊임없이 드러나 보이고, 결합하여 보이는 것을 관찰할 때, 우리는 이러한 관념들이 어느 사물에 속하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모든 성질들을 함께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 실체나 기체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금”이라고 부르는 함께 모인 성질들을 경험할 때(색깔, 단단함 그리고 다른 성질들), 로크는 우리가 이러한 성질들이 속해있거나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실체”나 “기체”가 있다고 가정하며, 이 모든 특성들의 배후에 있으며 그것들을 함께 모으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실체들 안에 속해 있는 성질들을 제외하고는 이 실체들이 무엇인지 하는 개념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실체에 관한 정확한 설명을 강요한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로크가 지적했듯이, 어떤 사람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경험의 다양한 요소들이 속해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는 것은 여전히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실체를 설명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의 형태를 분명히 하기위해 로크는 한 예를 비유로 설명하였다. “전에 얘기했듯이, 세상은 거대한 코끼리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고 말하는 인도인에게 그렇다면 코끼리는 어디에 의존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거대한 거북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시 등이 넓은 거북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라고 답했다.” 막연하고 애매한 기초보다는, 우리 경험의 다양한 요소들(제일성질의 경우에는 그 실체 안에 속해 있으며, 제이성질의 경우는 그것들이 원인이 되는)이 다른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

 

지식의 종류. 그러나 얼마나 많은 지식이 외적 감각이나 내적 감각을 통해서 얻을 수 있으며, 그리고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로크는 그의 논문 중 네 번째 책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작업을 시도하는데 기울였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우리 삶의 과정에서 경험을 통해서 얻은 다양한 관념을 처리한다. 지식 관념들이 어떤 측면에서 일치하든지 불일치는 지를 알기 위해서 관념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다. 만약 그것들이 동일하거나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한, 그 첫 번째 지식의 종류는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의 검증에 의해 성취되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흰색과 검은색에 대한 관념을 비교할 수 있다고 하자, 바로 그것들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안다. 우리 관념에 대한 두 번째 지식의 종류는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들이, 어떤 식으로든 함께 연관되어 있다는 발견이다. 관념에 대한 세 번째 지식의 종류는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의 공존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이 함께 속해있거나 함께 모여있는 것에 대한 발견이다. 이것은 보통 이러한 관념들이 일부분이거나 원인이 되거나, 같은 실체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인 지식의 형태는 어는 쪽이든 간에 우리 관념의 어떤 것이든 우리 마음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에 대한 발견이고, 만약 그것이, 그 관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라면,

(1) 동일성 또는 상이성 (2) 상이성 (3) 공존 또는 필연적 연결

(4) 현실적 존재

 

이러한 일치와 불일치의 4가지 종류들에 한해서, 내가 생각하건데,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는 모든 지식은 이 네 가지 종류에 한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관념들에 관해서 할 수 있는 이 모든 발견,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알거나 주장할 수 있는 모든 발견들은 다른 것과 같은지 다른 지이다. 그것이 그러하거나 그렇지 않든지 간에, 같은 주체 안에, 항상 서로 다른 관념과 함께 공존한다. 그것이나 어떤 다른 관념과 이러저러한 관계를 가지는지, 정신 밖에 있든지.

 

직관지식. 만약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서로 다른 지식의 종류라면, 로크에 의하면, 얼마나 많은 지식의 형태를 가질 수 있으며, 얼마나 확실해질 수 있을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확실성의 정도는 우리 지식이 직관일 때이다. 그것은 단순히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을 고찰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것에 관해서 참이라고 즉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 지식에 관한 것은 저항할 수 없으며, 밝은 빛과 같이, 강제적으로 그 자체를 즉각적으로 믿도록 하며, 마음이 관점, 의견으로 바뀌는 방식으로 바뀐다. 그리고 망설임, 의심이나 고찰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은 이윽고 분명한 빛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로크가 주장했듯이, 이 완전한 확실성의 형태는, “희색은 검지 않음이며,” “원은 삼각형이 아니고.” “3=2+1”과 같이 직관적으로 참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다.

 

증명. 불행하게도 관념들 사이에 일치와 불일치에 관한 모든 것들이 직관적으로 확실한 경우에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가 단지 확실한 관념들을 함께 고려할 때, 우리는 만약 그것들이 그러하거나 그렇지 않건 간에,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반드시,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떤 지식에 도달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우리가 비교하게 될 관념을 다른 관념과 연결해야한다. 이 과정이 로크가 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관념과 다른 관념의 일치나 불일치에 관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몇 가지 단계를 거칠 때, 우리는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거나 인식할 수 없다. 대신에 우리는 간접적으로만 진리를 알뿐이다. 그러나 로크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추론을 통해서 얻은 확실의 형태는 직관의 연속일 뿐이다. 증명 속에 각 단계는 마음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확실해 보인다면, 각 증명의 부분이 확실하다면, 그 결과도 또한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을 내버려두는 단계의 연속을 수행하거나 어떤 단계 사이에 확실하게 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흔한 경우가 있다. 로크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잘못 때문에 우리는 간단한 직관 속에 가지고 있는 같은 확실성의 정도와 함께 논증적인 지식에 의지할 수 없다.(?)>

 

감각적 인식. 엄격한 의미에서 로크는 직관과 논증만이 지식을 가져다 줄 수 있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고 인정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제외한다면, 확신의 또 다른 정도가 있다. 보증과 같은 것을 통해서가 아닌, 그것은 여전히 거의 모든 것에 의해 의존되어지고 있고, 따라서 지식의 정도로서 포함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로크가 부르는 “감각적”인식이다. 그것은 특별한 사물의 실제적 존재에 관해 우리에게 보증해주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회의주의에 의해 제기되었던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 경험의 일부분이 마음 밖에 존재하는 사물과 관련된다고 매우 확신한다. 반면에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비록 우리의 마음 밖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우리가 매순간 꿈을 꾸는 것이나 또 다른 이상한 가능성의 경우가 가능할지 모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진실이며, 우리의 마음 밖에 존재하는 사물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다는 점과 관련하여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확실성이 있다고 로크는 주장했다. 비록 직관이나 논증의 것보다 훨씬 취약할지라도 이러한 확실성의 형태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이다. 이것이 거짓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목적에는 충분하다.

이 세 가지 확실성이나 확신의 정도와 함께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인식이 가능할까? 첫째로 우리는 오직 관념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에 관한 방법들에 관해서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질 수 있고, 가지고 있는 관념들에 관해서, 로크는 우리의 지식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관념들이 일치할 것인지 불일치할 것인지에 관한 다양한 방법들을 아주 조금 직관이나 논증할 수 있다. 감각적 인식에 의해서, 우리는 관념의 일부인 우리의 외부 세계 존재가 즉각적으로 마음에 나타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뿐이다.

로크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어떤 두 개의 관념들이 동일한지 동일하지 않은지 직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관념의 공존에 관해서 우리의 지식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관념이 함께 속해있는 판단의 유일한 방식은 우리의 경험 안에서 일어나는 결합에 의해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관념에 관해 함께 발생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존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에 한해 제한되어진다. 로크가 지적했듯이 제일과 제이성질의 공존에 관련해서 특별한 경우이다. 왜냐하면, “어떤 제이성질과 그것에 의존하고 있는 제일성질 사이에 주목할 만한 연관점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이 사물이 노란색으로 보일 것이고, 맛이 달콤할 것이라는 등을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수학적인 관념에 관해서 서로 다른 관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해 많은 것들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지식의 거대한 체계가 발전되어 왔다. 로크는 수학적인 훈련 외에도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윤리학과 정치학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정부”, “정의”, “자유”와 같은 관념들 사이의 관계.

 

지식의 한계. 어떤 의미에서 아마도 대부분의 중요한 지식의 영역은 우리에게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사물의 실제 존재에 관해 알 수 있다는 것을 고찰할 때, 로크는 유일한 한가지 경우를 인정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에 관해서 직관적으로 확실할 수 있는 경우이다. 게다가 우리는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논증할 수 있다. 그밖의 것에 관해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드러나는 사물에만 이르는 감각적인 인식만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감각적 인식조차 가질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참 존재를 가지고 있든지 어떤지 간에 대해서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지식의 한계와 우리의 무지함 속의 나머지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존과 실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로크는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의미에서의 과학과 참된 정보는 물리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에 대해서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만약 우리의 모든 정보가 외적감각이나 내적감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경험적인 요소에 의해 제한되어 진다면, 우리는 경험을 통한 것을 제외한다면 어떤 성질들이 함께 발생하는지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이러한 성질들이 함께 발생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아내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것이 발생해야하고 다른 것들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에 관해 발전시킬 수 있다는 어떤 과학도 완전한 확실성이 항상 부족해야 하며, 이전에 경험되어진 성질들 사이의 관계에 관해 제한된 경험에 의존해야만 한다. 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행히도 항상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그러므로 로크의 경험주의 이론 안에서 지식은 우리의 일치되거나 그렇지 않은 다양한 관념들의 측면에서 한계지어질 것이다. 아마도 만약 우리가 경험에 의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관념들의 밖에서 진행되어지는 것에 관한 어떤 것도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될 것이다.

 

DAVID HUME

그러나 버클리 직후에 나타난 철학자들 중 한명은 그의 논리를 더욱 비참하고 충격적인 결론에 이르도록 추리한 결과 모든 경험주의 지식이론의 한계의 일부를 드러내도록 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회의주의자인 데이비드 흄, 그는 아마도 근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일 것이다. 흄은 에든버러 근처의 나인웰스에서 성장했고, 장시 동안 에든버러대학에 다녔으며, 15세에 그곳을 떠났다. 다양한 직업을 겪은 기박한 운명 후에, 그는 거대한 철학의 작업을 집필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그때에 그는 26살이었고, 그는 철학의 과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인성론>의 집필을 마쳤다. 대신에, 1739년 그것은 출판됐고, 흄이 비탄했듯이, “출판할 때부터 죽어서 나왔다.” 그리고 그의 동시대인들 중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어떤 큰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의 후기 작품 <인간 오성에 관한 논고>는 더욱 대중적인 형식으로 그의 관점을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흄은 자신이 원했던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는데 실패했다. 마침내 그의 정치적 집필이면서 대중적이었던 <영국의 역사>는 그를 유명하게 해주었고, 18세기 후반에 영어권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잘 알려졌다. 1760년 파리에서 그가 영국 대사관에서 비서관으로 일할 때, 영국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서 프랑스 지식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흄의 무신론적인 관점으로 인해 프랑스 회의주의와 “계몽주의” 선도자들에게 그는 영웅이었다. 영국으로 돌아와, 그는 잠시동안 국무차관으로 일하였고, 미국 식민지의 자유를 지지하도록 이끌었다. 흄은 종교와 정치에서의 정통이 아닌 견해로 높은 악명을 얻었고, 그가 은퇴할 때까지 그는 보통 “온화한 회의론자”와 “위대한 무신론자”로 알려졌다.

 

흄의 인식론. 흄의 철학은 두 가지 줄기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회의주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철학자들이 무엇이든지 어떤 것에 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극단적인 의심이다. 두 번째는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다하더라도, 지식이 무엇인지를 벗겨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확신은 그가 “인간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연구이다. 이 학문은 우리가 생각하고,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시도, 그리고 사건의 본성에 관해 그들이 행하는 것을 어떻게 믿도록 하게 되는 것에 관한 과정을 고찰하려고 하였다.

 

심리학. 흄의 위대한 철학적 작업, 그의 <인성론>은 너무나 성공적으로 물리적인 문제를 해결하였던 아이작 뉴튼의 과학적 방법을 통해 정신세계를 적용시킬 수 있음을 주장했다. 지식의 발전이라고 불리어지는 것들에 의해서 실제적인 과정들을 알아내기 위하여, 고찰되어야할 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특성, 그들의 심리이다. 심리학과 같은 우리가 가진 모든 과학들과 수학과 같은 학문분야는 인간 존재에 의해서 발견되어져 왔다. 흄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이해를 통해서 인간 존재가 소유한 지식의 본성에 대한 어떤 것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흄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성질을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우리의 경험의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아마도 위대한 가치일 수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일반적인 가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물리적 세계에 관한 과학의 발전 속에서 일찍이 해왔던 것이고 정신적 세계에서 더욱 중요한 결과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삶의 신중한 관찰로부터 과학에서의 실험을 모아야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건 속에서, 그들의 즐거움 속에서의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 세계의 공통된 과정 속에 드러나는 그것들을 취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실험들이 분별력 있게 수집되고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에 기초한 과학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 과학은 확실성 속에서 열등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인간 이해의 어떤 다른 것에 유용하도록 월등해져야 한다.

 

인상과 관념. 흄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인상과 관념이라는 두 가지 표제로 분류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이 두 가지 사이의 차이점은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힘과 활기의 정도”이다. 인상은 관념보다 더욱 강력하고 생생하다. 또한 단순한 인상들과 관념들, 그리고 복잡한 것들이 있다. 그 차이는 “구별이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 단순한 것이다. 이와 같이 푸르다는 성질의 이해는 단순한데 반해, 푸른 그림의 이해는 복잡하고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우리의 인상과 관념을 고찰할 때, 흄이 주장했듯이, 우리는 그것들 사이에 큰 유사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의 복잡한 관념들 중에 결코 인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인어와 같은 우리의 복잡한 관념들. 그러나 우리의 관념과 인상의 주의 깊은 정밀 검사를 통해서 우리의 단순 관념들은 우리의 단순 인상들과 같고, 인상이 항상 먼저 일어나는 모든 경우를 발견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오렌지와 같은 단순 성질과 함께하는 우리의 첫 인식은 강력하고 생생한 인상으로 발생하고 후에 동일한 관념과 같은 것으로 발생한다. 흄이 지적했던 것과 같이, 단순 인상들은 항상 단순 관념들에 선행한다는 이 법칙은 우리 경험의 총체 속에서 어떤 본유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며, 또한 경험으로부터 우리의 모든 관념이 나온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기억과 상상력. 더 나아가, 우리의 관념에 관해서 두 가지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는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고정된 질서나 순서 안에서 관념의 연속이 마음속에 보이는 것이다. 다른 능력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목적 안에서 우리의 관념을 조정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상상력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복 속에 관념이 다가온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가 하나의 관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또한 비슷한 생각이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것에 연속하는 생각이나, 그것과 원인이 되어 연관된 생각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패턴이 관념이 연합이다. 인간본성의 원리 중 하나인 이것은 끌어당김의 일종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놀란 말한 결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다수의, 그리고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지게 될 것이다.

 

흄의 인과율 분석. 관념의 연합에 대한 이 주장의 중요성은 흄이 우리의 지식과 특히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연구하였을 때 명백히 나타난다. 흄에 의하면, 지식은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들의 점검으로부터 모아질 수 있는 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만약 우리가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을 조사한다면, 그것들이 서로 비슷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것들이 서로 다른지 같은지,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어두운지 밝은지,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큰지 작은지를 즉각적으로 말할 수 있다.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들에 관해 즉각적인 조사를 통한 이 지식의 유형을 흄은 직관적이고 확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상상력 안의 마음에 주어진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들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을 고찰하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일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지식의 기초에 증명의 연속들이 더해져서, 우리는 수학과 같은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의 분과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들이 어떻게 서로 인과적으로 연관되어있는지 물었을 때, 매우 특이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이러한 유형의 지식은 우리의 견문의 거대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둘이나 그 이상의 관념을 조사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건의 원인은 저 사건이야(예를 들어, 돌멩이가 유리창을 깨는 것을 보는 경험)”라고 흔히 말하는 상황을 고찰해본다면, 인상의 특성으로서, “원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제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인과적인 결과”라고 부르는 모든 경험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녹색과 같은 어떤 성질도 없다. 그리고 흄이 제안했듯이, 아마도 사건들 사이에 인과적 연결은 인상 속의 요소들 사이나, 연달아 일어나는 인상들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돌이 유리창을 깨는 그러한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유리창과 돌들이, 어떤 순간 돌 다음에 유리라는 접근성이 있다는 요소를 발견하며, 또한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기 전에 돌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사건의 접근성과 연속성을 제외한다면, 그밖에 어떤 것이 있는가? 우리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에 의한 어떤 특성이나 요소들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흄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두 가지 것들의 접근성일 뿐이며, 사건의 연속성일 뿐이다.

 

(원문 생략)

 

인과적으로 연결된 사건들에 관한 우리의 추론에서 중요한 요소는 직접적으로 보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부분처럼 보이거나 우리 인상 속에서 발견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지식의 경험주의적 이론이 허용했다면, 필연적 연관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어떤 인상이나 인상의 어떤 특성에서 끌어내야만 한다. 이 기초적인 관념의 근원은 단순히 인상을 고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위치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흄은 두 가지 뒤따르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처음 찾아냄으로써 그의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 “무슨 까닭은로 우리는 시작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물은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얘기하는가?” 그리고 (2) “어째서 우리는 그러한 특별한 원인들이 그런 특별한 결과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내리는가? 그리고 어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추론의 본성은 무엇이며, 제기할 수 있는 믿음의 본성은 무엇인가?”

 

원인의 문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단순한 대답은 조금 놀란 만하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건들이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존재하기 위해서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흄이 질문했듯이, 우리는 이것을 왜 믿는가? 원인적 원리를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직관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우리가 마음에 다양한 인상들과 관념들을 관조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인상들이나 관념들의 특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존재 -존재하기 위해 시작해야 하는 어떤 것- 에 대한 관념과 원인에 대한 관념들 사이에 어떤 연결도 없다. 이것은 모든 관념들이 구분되어진다는 사실을 통해서 보일 수 있고, 상상력을 통해서 분리되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사물의 관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관념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어째서 우리는 모든 사물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흄은 존로크와 같은 철학자들이 제공했던 다양한 논의들을 고찰하였다. 그는 인과관계의 주장을 증명하려 하였다. 흄은 그들의 증명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우려고 하였던 바로 그 주장을, 그 증명 어딘가에서 사실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로크의 주장에 대한 흄의 설명 속에서 그 증명은 만약 사물이 어떤 원인 없이 만들어졌다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어떤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작용을 생산함으로써 행위를 할 수 없다. 그러나 흄이 지적했듯이, 이 주장은 모든 사물들이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가정을 통해서만 진행될 수 있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여주는 것은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증명되어져야 할 것은 모든 것이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이다.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나타난 주장들을 고찰한 후에, 그들이 타당한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흄은 “그것은 지식이나 어떤 과학적 추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새롭게 만들어진 것에 대한 인과관계의 필연성의 견해를 이끌어내며, 그 견해는 반드시 관찰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의견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흄은 그의 다른 문제를 처음으로 해결할 필요를 있었다. 어째서 우리는 특별한 원인들은 특별한 결과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며, 어째서 우리는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것에 이르기까지의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인과적 분석의 요소들. 우리의 인과적 추론은 3가지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나타난 현상으로 또 다른 항목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연관된 사건의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 요소는 흄이 발견하고자 했던 연결이나 추론이다. 탐정이 시체를 발견하였을 때, -인상의 드러남- 그는 즉각적으로 죽음의 어떤 원인에 대한 관념을 추론한다. 만약 시체에 총알이 박혀있다면, 그 탐정은 즉각적으로 총알이 나온 총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인상에서부터 관념에 이르는, 이 추론의 과정을 흄이 분석하려고 하였다. 시체에는 총이 발사되었다는 어떠한 결과를 알려주는 사인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밖의 어떤 사람들 같이, 그 탐정은 총 대신에 수많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흄이 물어봤듯이, 비록 우리가 생각한 것을 즉각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원인을 보지 못하더라도, 어째서 우리는 소유한 경험을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가? 만약에 특별한 인상의 고찰로부터, 어떤 분명한 관념도 마음이라고 불리어지지는 않는다. 상상력은 누군가 가진 어떤 관념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어떤 사람은 총 대신에, 때마침 배의 맛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탐정이 만들었던 추론의 종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볼 때, 비록 어떤 특별한 관념을 생각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사실, 우리가 가진 인상의 “원인”이나 “결과”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피아노가 연주되고 있다는 확실한 소리를 들을 때, 비록 우리가 듣는 그 소리, 인상이라 하더라도, 피아노와 연주자의 시각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흄은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가 이러한 추론을 하느냐고 물었다. 추론을 통해서가 아닌, 인상으로부터는 어떤 필연적인 결론이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관념도 생각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 경험 안에 어떤 것에 기인해야 한다.

(흄의 원문 생략)

 

계속되는 연결. 흄에 따르면,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경험 속에서 서로 일어나는 두 가지의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연결된다. 이것이 과거에 종종 충분히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되어지게 하고, 이러한 것들 중 하나를 경험했을 대, 우리는 즉시 다른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추론한다. 그러나 그 문제를 더 나아가 설명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이 어째서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만약 합리적인 절차의 수단에 의한다면, 자연의 제일성과 같은 원리들이 진리이어야 한다는 것이 요구되며,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경우는 우리가 경험했었던 것과 비슷해야 하며, 자연의 흐름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이와 같이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와 같은, 과거 경험으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경험한 어떤 것을 가정하게 될 것이고, 현재에 일어나야만 하며, 그것이 현재 안에 계속되는 과거 속에서 발견하는 계속되는 연결이다.

 

불확실성. 여기서 흄은 가장 특이한 어떤 것을 발견하였다. 자연의 제일성의 원리는 우리가 즉각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세계 안에서, 진행되어지는 우리 추론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상들에 대한 거의 모든 해석들은 -소리, 색깔, 냄새 - 과거의 경험 속에서 계속적으로 연결되어지는 물질들의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들은 여전히 현재에도 연결되어 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모든 중요한 원리들 에 대한 증거를 묻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우리가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계속되는 연결들은 미래에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소금의 맛을 달 수 있고, 물은 탈 수도 있다. 경험의 관찰과 연구는 이러한 원리를 세우는데 도움을 줄 수 없으며,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자연이 불변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계속될 것이라고 확실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중력의 법칙과 같은 가장 잘 시험된 과학의 법칙조차도 자연의 제일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흄은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만약 그것들이 지구를 향해 내려간다고 할 때,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많은 사물들이 시험되어진다할지라도, 그 법칙이 미래에도 진리일 것이라는 것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인간 본성. 만약 자연의 제일성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너무나 기초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도, 그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것을 믿는가? 흄의 대답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관습이나 습관에 기인한 믿음 때문이며, 두 가지 인상들의 계속되는 결합을 경험한 후에, 그러한 결합이 그들의 경험 속에서 또 발생하여, 그들의 상상력 속에서 하나의 생각으로 이끌려지기 된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 인상과 연결되는 관념을 생각한다. 우리의 상상력은 자유롭기 때문에, 어떤 관념이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연관된 관념이 “강력하고 생생함”을 가진 생각이거나 믿어질 뿐이다. 이와 같이 내가 확실한 소리를 들을 때, 만약 내가 소망하고, 소망한 어떤 관념을 상상하게 된다면, 배의 맛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흄이 지적했듯이, 자연스럽게 나는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강력하고 생생함”을 가진 생각을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실제로 피아노를 치고 있다고 믿는데 반해, 배가 맛이 있다는 것을 믿지는 않는다. 어느 경우에 발생하는 믿음과 다른 것은 두 가지 관념들이 이해되어지는 서로 다른 방식일 분이다. 오직 연결된 관념들(과거의 경험 속에서 연결된 것)만이 강력하게 생각되어진다. 어떤 다른 관념들은 단순하게 생각되어질 것이다.

무엇이 어떤 관념들은 강력하고 생생하게 이해하도록 우리를 만드는 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상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는 언제나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적인 습관이나 관습이 있어야 하며, 마음은 관념이나 이 인상과 연결된 관념에 대한 생각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인상의 강력하고 생생함을 가진 생각에 이르도록 한다. 아무튼 인상의 힘은 관념에 흐르고 넘치며, 관념은 과거의 인상들과 계속적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즉각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는 세계 속에서 나아가는 우리의 추론은 어떤 합리적인 절차를 따른 것이 아니지만, 대신에 인간 본성의 기본적인 버릇 때문에 “경험을 가지지 않은 경우가 경험했던 것과 반드시 유사할 것이라고” 믿도록 한다. 우리는 그러한 경우가 될 것이라고 이해하지는 않지만, 차라리 확실한 관념을 자동적으로 믿도록 하거나 다른 것보다 더욱 강력하게 그것들을 이해하도록 하는 우리를 발견한다.

 

<흄의 원문 생략>

 

우리의 즉각적인 인상을 넘어서는 우리의 추론과 특별한 원인은 결과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결론은 우리 마음에 주어진 확실한 관념들에 의한 습관과 관습의 산물이며, 확실한 감정은 우리의 믿음을 구성하는 것에 밀접하다면, 확실만 사물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도록 이끄는 필연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인상들의 특성 중 하나가 아니다. 사건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어떤 필연성이나 힘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사건의 연속을 이해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몇 가지 비슷한 인상들의 연속의 경우를 보아왔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연결된 것으로서 사건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필연적인 연결에 대한 관념은 비슷한 사건들의 반복과 함께 발생하는 어떤 것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상들의 연속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흄이 지적했듯이, 만약 그 연속들이 비슷하다면, 우리는 매순간 같은 것을 대략 이해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경우의 사건들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수백 가지의 일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 경우들이 비슷하다면, 같은 성질들이 매순간 드러나야 한다. 같은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본 후에 처음에 보지 않았던, 새로운 어떤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 일어날지는 우리가 전에 했었던 것보다 서로 다른 정신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리의 믿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정신적인 자세이다.

 

<흄의 원문 생략>

 

원인의 부정. “필연성”은 인간 마음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에서 성질이나 사물의 특성이 아니다. 해머로 쳤을 때 유리창이 깨져야한다고 하는 것 같이, 존재한다고 믿는 필연성은, 흄이 주장했듯이, 확실한 인상을 경험했을 때 생각하도록 하고, 가장 강력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마음의 결정이며, 드러나는 인상과 함께 계속적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해머에 대한, 그리고 유리에 대한 인상을 고찰했을 때, 인상의 특성이나 어떤 부분이 유리가 깨진다고 하는 필연성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해머와 깨진 유리, 이 두 사건들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은 그것들에 관해 생각하는 마음의 방식에 놓여있으며, 그 사건들 자체에는 없는 것이다. 흄은 우리가 내적 경험과 동시에 일어나는 외적 경험을 합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비록 필연성은 오직 확실한 인상들에 대한 경험에 기반을 둔 정신적인 결정일지라도, 우리는 관찰되어진 사건 속에서 이 정신적인 사건을 위치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사건들과 함께 거기에 일어나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비록 우리의 마음 안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일 지라도

흄이 잘 깨달았듯이, 필연적 연관성에 대한 우리 관념에 대한 분석과 원인적 추론의 본성은 이상하고 믿기 힘든 소리를 들릴 것이다. “나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지만 나의 감정은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What! 원인의 결과는 마음의 결정에 달려있다!”




그리하여 흄의 결론은 과학에 대한 회의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것 자체가 부정되면 인간이 우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습관이나 관습은 일련의 관념이나 인상에 질서나 일반성을 부여하고, 경험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러저러한 조작을 통해 배치, 연결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지식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합니다.

마음의 습관, 관습이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비슷한 사람, 이런 사람들의 무리가 모여 “정상”정인 믿음의 체계를 이룬다고 흄은 주장합니다. 그에 반하는 사람을 비정상, 비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고요.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 중 누가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아무도 실질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무엇인가를 믿게 하는 힘입니다. 강제적인 충동, 이것이 어디서 오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은 내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흄의 인식론 인식론이었습니다. 읽느라 고생하셨네요. 중간 중간 줄이 쳐져 있는 부분은 번역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무언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 부분입니다.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요. 그리고 왜만하면 원문은 생략하였습니다. 본인이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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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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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eory Of Knowledge

철학 분과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인식론(지식에 과한 이론)이다. 철학자들은 우리 지식의 범위와 우리 지식의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믿을 수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이나 조건에 의해 얻어진 지식의 의미를 발견하려 시도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만물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고,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나 그것의 신뢰성에 관해서 물어보지는 않는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수상쩍거나 허위라는 것의 증명이 확실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만약 이러한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면, 우리는 모든 확실성에 대한 주장에 대해 의심스러워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신문에서 말하는 모든 뉴스가 거짓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을 가정해보자. 우리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친구나 신문이나 우리자신까지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인식론을 발전시켜온 철학자들에게 온갖 종류의 질문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인식론의 발전에 있어 가장 풍부한 자료의 출처는 인간판단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이론이나 믿음도 없어왔다는 것, 그것을 믿고 그것에 관해 논의했던 어떤 사람도 없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과학의 역사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믿어져 왔던 이론과 완전히 버려진 이론으로 가득 차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고 시도해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처벌한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달이 돌이라고 주장하여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20세기에, 테네시 주에서의 한 선생은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처벌을 당했다. 지난 25년간 그들 사회의 통치자들의 절대 확실한 지식에 도전해 “범죄자”라고 낙인찍힌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철학자들은 모든 지식의 기초를 결정하는 것과 이 주장들의 판단에 관한 기준을 결정하는 것을 고찰하였다. 만약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많은 것들이 거짓이나 의심스러운 것으로 증명되어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RENE DESCARTES : THE PROBLEM POSED

 

위대한 프랑스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인 Rene Decartes는 가장 두드러진 형태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데카르는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는 카톨릭과 위그노교 사이의 종교적인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적인 세계의 본성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의 옹호자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와 갈리레오의 새로운 이론을 지원하는 자들 사이의 격렬한 논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훈련된 데카르트는 스스로 세계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의 연구를 확장한 후에 그는 전통적이고 명예스러웠던 나름 권위적인 것으로 주장된 모든 받아들여진 견해를 의심하는데 이르렀다. 1628년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느낀 오래된 이론과 새로운 이론 사이의 혼란에 의해 활발히 논의되었던, 가장 독립적이고, 사려 깊은, 동시대의 사람들을 찾았다. 그들 대부분은 확실성을 찾는데 단념하였고, 회의론으로 빠져들었다.

a. 충분하거나 적합한 증거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우리의 어떤 믿음이든지 의심한다는 견해

그러나 데카르트는 회의론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확실하기 위한, 그리고 어떤 발견도 그의 믿음을 전혀 흔들 수 없는 확실성을 강렬히 원하였다. 그는 확실성의 탐구에 절망한 사람들의 파리를 떠났다. 네덜란드로 떠난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고찰하고, 믿을 수 있는 지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떤 것이든지 알아보라고 말했다.

데카르트는 결코 거짓이거나 의심스러울 수 없는 유일한 지식에 대해 확실할 수 있다고 느꼈다. 우리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이러한 기준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을 시험해보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시험(만약 그가 옳다면,)의 결과들은 너무 절망적이어서 철학자들은 지식의 기초에 대한 물음에 대해 탐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Decartes' Test. 그들의 이론들을 시험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데카르트의 시험을 고찰해봐야 한다. 그는 그의 <제일철학의 성찰(1640)>을 쓰면서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진리라고 공인된 지식들이 거짓된 믿음들이 얼마나 많은 지와 이러한 기초에 구성되어진 모든 것들이 얼마나 의심스러운지를 발견한 이후, 몇 년이 지난 현재.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이전부터 받아들여진 모든 의견들을 스스로 제거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기초에서부터 새로운 것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만약 내가 과학에서 견고하고 불변하는 구조를 세우기를 원하는 것처럼. . . .

그러나 이를 위해 모든 의견이 거짓임을 증명해보일 필요는 없다. 이것은 내가 도저히 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성이 설득하고 있는 바는 아주 확실하지 않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명백히 거짓된 경우에서처럼 조심스럽게 동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므로, 의견들 가운데 하나라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의견 전체를 모두 거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의견들을 일일이 검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끝이 없는 일이기에 말이다. 이보다는 오히려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진 것도 저절로 무너질 것이기에, 기존의 의견이 의존하고 있는 원리들 자체를 검토해보자.

 

이전부터 갖고 있던 모든 견해들을 시험할 필요는 없다고 데카르트는 느꼈지만, -끝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믿음의 일반적인 형태를 고찰해보는 것이 날 것이다. 만약 의심할 만한 어떤 이유가 있다면 모든 범주는 의심스럽고 믿지 못할 만한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 간주되어진 첫 번째 범주는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그러한 견해들이다.

 

내가 지금까지 아주 참된 것으로 간주해 온 것은 모두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인다는 것을 이제 경험하고 있으며,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감각적 자료의 신뢰성 데카르트는 모든 것들은 감각에 의해 기만당하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확신하였다. 누군가 거리를 두고 어떤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가까이서 바라볼 때와 분명 다르게 보이거나, 물속에 있는 것을 볼 때와 물 밖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한사람이 노를 젓고 있을 때, 노는 굽어보인다. 이러한 일은 때때로 발생하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모든 경우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실할 수 없다고 제안하였다. 만약 누군가는 때때로 이러한 경우를 인정하지만, 우리는 감각 경험에 매우 확신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사물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그의 시험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감각이 비록 아주 작은 것과 멀리 떨어진 것에 대해 종종 우리를 속일지라도, 감각으로부터 알게 된 것 가운데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겨울 외투를 입고 난로 가에 앉아 있다는 것, 이 종이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두 손이 그리고 이 몸통이 내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는가?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미치광이의 짓과 다름이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 . . [그들은 그들이 분명히 가난하다거나, 아무것도 거치지 않았는데, 귀족의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거나, 호박이나 유리로 만들어진 왕관을 가지고 있다는 상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확신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미쳤고, 내가 조금 더 미치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다음 예를 따르는 것은 너무도 사치스럽다.(?)] - 별 신경 안 써도 되는 내용 -

 

그러나 아마도 데카르트는 우리의 확신을 흔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착각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그의 시험이 이미 어떤 의심에 이르지 않았다면, 데카르트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렇지만 나도 한 인간이다. 밤에는 으레 잠을 자고, 꿈속에서는 미치광이가 깨어 있을 때 하는 짓과 똑같은 것을, 아니 종종 더 괴상한 것을 그려 낸다.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있건만 평소처럼 내가 여기 있다고, 겨울 외투를 입고 난로 가에 앉아 있다고 잠 속에서 그려낸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러나 나는 지금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종이를 보고 있다. 내가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이 머리는 잠 속에 있지 않다. 나는 의도적으로 손을 뻗어 보고, 또 느끼고 있다. 내가 잠자고 있을 때 이런 것은 이처럼 판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속은 적이 한 두 번이던가. 이런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깨어 있다는 것과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해 줄 어떤 징표도 없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이런 놀라움으로 인해 내가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 문제는 까다롭다. 어떻게 우리가 보는 모든 것과 꿈의 일부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구별할 수 있을 지라도, 우리가 체크하기로 채택한 어떤 수단이든, 또한 꿈의 일부분이다. 사람들은 꿈속에서 꿈인지 아닌지 꼬집어보는 꿈을 꾸어왔다. 데카르트는 그것에 관해 느낄 방법이 없고, 우리의 감각 경험이 꿈의 일부가 아니라는 어떠한 보증도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의 신뢰성- 정확성 - 을 의심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모든 것이 꿈이더라도, 누군가는 꿈의 어떠한 측면은 믿을 수 있지 않냐고 물어볼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그의 시험을 시작하였다.

 

그래 좋다. 우리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치자. 그래서 눈을 뜨고 있다는 것, 머리를 움직여 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자. 아니 어쩌면 그런 손이나 몸통조차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잠들어 있을 때 보이는 것은 일종의 상과 같은 것이며, 이것은 참된 것의 견본대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 머리, 손, 몸통 등과 같은 일반적인 것만은 적어도 단순히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현존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화가들이 사이렌이나 사티로스를 아주 기이한 모양으로 나타내려고 해 보았자, 그들은 아주 새로운 본성을 그것에 부여할 수는 없으며, 다만 다양한 동물들의 지체들을 이리 저리 뒤섞어 놓을 뿐이다. 그렇지만 혹시 그들이 이와 유사한 것을 전혀 본적도 없는, 그래서 극히 허구적이고 거짓된 어떤 것을 고안해낸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구성하고 있는 색깔만은 적어도 참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부분에서, 데카르트는 비록 우리의 경험의 특별한 내용이 꿈일지라도, 여전히 그 꿈은 자체로 어떤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물들-우리자신, 의자, 테이블, 나무-은 굉장한 착각이거나 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환상은 어떤 것에 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데카르트는 우리가 경험하고 얘기하고, 함께 살고 있는, 특별한 사물은 계속되는 꿈 세계의 일부분일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우리는 그 꿈에 있는 사물을 우리의 꿈속에서 창조해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그렇다면, 확실한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창조는 확실히 고정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코끼리는 항상 나비보다 크고, 사각형은 결코 둥근 각을 가질 수 없다. 데카르트는 우리 경험의 실제항목이 환상일 수 있다는 고찰과, 우리가 그것들을 만들어 낸 연구(예를 들어, 천문학, 식물학, 물리학)들 또한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그러한 사물이 꿈속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상상의 허구라면. 여전히 꿈의 세계는 -만약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이 꿈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논쟁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고, 확실히 기하학적이고 수사학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깨어있거나 잠들어 있든 지간에, 2와 3의 합은 언제나 5이고, 사각형은 절대 4변 이상을 가질 수 없고, 그것은 너무도 분명하고 진리는 어떤 거짓이나 불확실한 것으로 의심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신에 관한 질문 그러나 어떤 사람도 시험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믿을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져야 한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것의 지식을 의심할 최종적이고 압도적인 이유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내 정신 속에는 오래된 한 가지 의견이 새겨져 있다.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지금의 내 모습대로 나를 창조했을 신이 존재한다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땅, 하늘, 연장적 사물, 형태, 크기, 장소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지금 보는 그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저 신이 만들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또한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완전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도 가끔 오류를 범하고 있듯이, 나 역시도 둘에 셋을 더할 때, 사각형의 변을 셀 때 혹은 이보다 더 쉬운 것을 행할 때 잘못을 범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은 아주 선하기 때문에 내가 속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항상 잘못을 저지르도록 신이 나를 창조했다는 것이 그의 신성과 어긋나는 것이라면, 내가 가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신이 허용하고 있다는 것 또한 어느 정도는 신의 선성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가끔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는 인류를 속이는 신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모든 것의 가장 비참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데카르트는 그의 시험을 결론 낼 준비를 하였다. 만약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못 인도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우리는 어떤 것이든 믿을 수 있을까? 만약 내가 2와 3을 더했을 때, 결론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실수를 강요받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잘못된 결론을 피할 수 있을까? 계획적인 기만의 가능성이 한번이라도 허락된다면, 모든 것은 절망에 빠질 것이고, 우리의 믿을 수 있는 대부분의 정보는 의심스러워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결론지었다.

 

결국에 나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믿어왔던, 그리고 생각의 부족을 통해서나 경솔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매우 강력하고 완벽하게 고려되었던 이성을 통한 진리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만약 과학에서 어떤 확실성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명백하게 거짓인 것보다 이러한 의견을 믿는 것을 조심스럽게 그만두어야 한다.

 

의심 데카르트의 시험은 재앙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견해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이러한 믿음들이 거짓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증거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에, 우리의 가장 소중하고 견고한 믿음들이 거짓일 수 있다고 제시하는, 그럴듯하거나 그렇지 않건 간에, 이유는 제공될 수 있다. 광기와 술 취함으로 인한 감각적 착각과 환상은 우리의 감각적 정보의 신뢰도에 어떤 의심을 던진다. “우리는 단지 사물을 보는 것일 뿐이다.” 경험의 모든 가능성은 꿈의 일부분이라는 의심(사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상상 밖의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심)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지식의 기초에 대한 보증 없이는 악령이 우리를 속인다는 가능성은 완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

 

데카르트의 목적. 데카르트의 시험의 목적은 과학적 허구의 환상을 공표하는 것이 아니지만, 결정적인 문제를 조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것들이 거짓이거나 불확실할 것이라고 당연히 여기려고 할 것이다.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견의 설립 속에 어려움은 존재한다고 보이는데,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와 모든 의심에 빠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거짓일지도 모르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하나의 견해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도록 만들었다. 대신에 그는 만족스러운 기초를 만드는데 착수하였다. 그 기초는 너무도 확실하여, 회의주의에 의해 제시된 모든 터무니없는 가정이 그 기초를 흔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문제. 이제 데카르트와 다른 철학자들이 우리 지식의 본성(지식의 기초와 지식의 확장)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나타내었던 이론에 관하여 고찰해보자. 그들의 이론화가 고려해왔던 것을 명백하게 만들기 위하여 먼저 지식의 문제에 관한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사용하는 주장의 종류는 무엇인가?

 

통용어(通用語) 보통의 논쟁 속에서 우리는 동사 “알고 있다.”를 막연히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어떤 것의 사실이 확실하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1933년 월드시리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나는 뉴욕자이언츠가 이겼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말하였다. 데카르트의 도움 없이, 개인적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 “알고 있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의 주장은 사실 기초가 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매우 완고한 사람들 - 사실, 매우 실수하는 - 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믿는다.”, “생각한다.”와 좋아함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을 때와 같이 “알고 있다.”의 보다 더 긍정적인 사용법이 있다. 속인들이 Salk polio vaccine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사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아마도 이것은 권위 있는 어떤 사람의 견해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한사람이 묻기를 만약 스미스가 그 파티에 가게 된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 그가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이다. 이것은 단지 “그가 그럴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적어도 나는 그가 거기에 갈 계획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말하는 편리한 방식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완전한 보장을 표현하지 않지만, 확신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스미스의 계획을 들은 것을 단순한 기초로 하여 그러한 주장의 정확성을 보증하기는 힘들 것이다. 분명히 스미스는 그의 계획을 바꾸려하거나 어떤 일이 발생하여 그의 참석을 방해할 것이다. 당연히, “알고 있다.”는 단어는 예감이나 희망이나 고집 센 의견에 지나지 않는 표현으로 사용될 것이다. 룰렛게임의 다음 숫자를 “알고 있다”는 라스베가스의 도박꾼들은 “예감”에 기반을 둔 예측이나 행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선거 캠페인 기간 동안에 누가 뽑힐지 “알고 있는” 정치가들과 만약 그들이 잘못됐다면, 그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희망이나 두려움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비슷하게 아칸소 공과대학이 노틀담 대학보다 더 나은 풋볼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남자가 아칸소 공과대학이 모든 게임에서 지고, 노틀담 대학이 모든 게임에서 이겼을 때, 그는 사실과 관계없으며, 초월적이고, 단순한 맹신적인 충성을 표현한 것이다.

 

DECARTES'S THEORY OF KNOWLEDGE

만약 우리가 플라톤에서부터 훨씬 후인 데카르트의 지식의 이론에 이르기까지를 살펴봤다면, 우리는 절대적이며 참된 지식의 발견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긍정적인 이론을 찾을 수 있다. 지식의 기초와 근원, 본성에 관한 데카르트의 견해는 많은 면에서 플라톤의 것과 공통점이 있다.

확실성을 위한 탐구. 이 논쟁의 시작에서 우리는 지식의 신뢰성에 관한 데카르트의 시험을 고찰했다. 그리고 보았듯이 충격적인 결론에 도착했다는 것과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정보-과학적이고 심지어 수학적인 정보를 포함해서-는 이의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재앙이 된 시험을 제안한 데카르트의 요점은 모든 것에 관한 의심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의심을 위한 의심을 하고 항상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고 하는, 회의주의자들을 모방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의 목적은 장담컨대, 좋은 기초를 얻으려는 것이고, 젖은 모래와 진흙을 거절하고 단단한 반석을 찾으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에 관한 절대적이고 확실한 기초를 찾으려고 하였다. 만약 거짓이거나 의심스러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것이든 제거하기 위해 누군가 그의 시험을 처음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그러한 기초는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기술하였다.

 

마치 분명히 거짓인 것을 알아낸 것 같이, 조금의 정도라도 의심스러운 것으로 제시된 모든 것을 유보하려고 한다. 그리고 확실하거나 적어도 내가 그 밖의 것을 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을 배울 수 있을 때까지, 확실한 어떤 것을 찾을 때까지 나는 이러한 과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존재의 확실성. 이런 식으로 데카르트는 의심할 나위없고 확실할 수 있는 어떤 정보를 찾아내려는 시험을 수행하였다. 만약 그가 그러한 지식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인간 지식의 전체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발점으로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감각적 정보와 과학적 정보와 수학에 의심을 던진 후에, 데카르트는 자신이 찾으려는 정확한 확실성의 찾을 때까지 그의 탐구를 계속해나갔다.

 

그렇지만 세계에는 하늘, 땅, 정신, 물체가 없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지 않았던가? 이때 나 자신도 없다고 설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내가 만일 나에게 어떤 것을 설득했다면, 확실히 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주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집요하게 나를 항상 속이고 있다고 치자. 자 이제,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인다고 치자. 그러나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히 고찰해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찾아낸 정보의 유일한 부분은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참되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거나 이해하려고 시도하려할 때마다 데카르트의 시험에 따르면, 그것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는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려하거나 그 시험을 시행하려고 할 때, 나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기만자”가 하려는 것을 주장하려할지라도, 그가 나를 속이려는 시도가 어렵다할지라도, 만약 내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을 속일 수 없다. 만약 내가 생각하며, 데카르트가 요구한다면, 내가 존재한다고 절대적으로 명백해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어떤 조건을 생각하려 시도하자마자,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완전하게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의심이나 부정을 위한 어떤 시도도 여전히 내가 생각하기 위해 나는 존재해야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하는 또 다른 생각이다. 비록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반증하려하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그 주장의 진리를 다시 논증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데카르트의 요점을 강조하는 한 방법은 다음의 이야기를 고려해보는 것이다. 유명한 미국의 철학자 Morris Raphael Cohen이 방과 후 한 학생과 함께 토론에 참가한 것이 보고되었다. Cohen 교수는 그의 반에 데카르트를 가르쳐왔고, 이 토론에서, 일찍이 윤곽을 그려온 의심을 위한 모든 이유를 전개시켜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학생에게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으라고 집에 보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다음날, 매우 초췌한 학생은 면도도 하지 않고, 눈이 충혈 돼서 방과 후, Cohen 교수에게 왔으며, 매우 걱정된다고 얘기했다. 학생은 밤새 자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안하는지에 대해 결정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숙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공부했었다. “Cohen 교수님”, 그는 매우 걱정되어 얘기했다. “말해주세요, 제발 말해주세요. 내가 정말 존재하나요?” Cohen 교수는 그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경우에도, 데카르트는 마침내 하나의 진실을 발견하였다고 확신하였다. 그것은 “회의주의에 의해 제시된 거의 모든 터무니없는 주장은 그것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다.” 이 절대적이고 확실한 진리를 시험을 통해서, 다른 진술들의 진리를 판단하기위한 하나의 규칙이나 규범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모른다고, 그는 희망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진리에 확신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는지 나는 또한 알지 못하는가? 확실히 이 기초적인 지식 안에서 그것이 진리라고 나를 납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내가 너무도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했던 어떤 것이 거짓일 수 있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내가 단언한 것의 명석함과 지각의 판명을 제외하고, 내가 말한 것이 진리라고 나를 납득시키는 것은 실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일반적인 규칙을 세울 수 있다고 보인다. 내가 매우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는 일반적인 규칙.

 

데카르트의 논쟁은 하나의 진리(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점검함으로써, 모든 진리에 대한 법칙과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어째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하는가?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것이 진리라고 납득시키는, 이 주장의 유일한 특징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명석하고 판명하게 알거나 이해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명석과 판명이 나의 확신을 만드는 유일한 조건이고, 그것들이 모든 진리들이 가져야 하는 일반적인 조건이 아니라면, 이러한 경우에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명석과 판명이 진리의 기준이나 척도가 아니고, 그것들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라면, 그 주장은 분명하게 거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논의는 결론 내렸다. 명석과 판명은 진리의 기준(표시, 특징?)이 될 수 있고,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특성의 구별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규칙은 체계적일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간에 명석하고 명료하게 생각된 것은 진리이다.”

명석과 판명. 그러나 무엇이 명석과 판명의 특성들인가?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들>의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데카르트는 그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만큼 명석과 판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하였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분명하고 명료한 지각이란 무엇인가. 전체 삶 속에서 아무것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고 하면서)이 있다. 명백하고 논쟁할 수 없는 판단으로 구성되어진 지식은 명석할 뿐만 아니라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명석함을 주의 깊은 마음에 나타나고 보이는 것이라고 부른다. 존재가 지각하는 눈에 보일 때, 그들이 충분한 힘을 그것을 조종할 때, 우리는 분명하게 사물을 본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판명은 너무도 정확하고 그것자체로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언뜻 보아, 이 설명은 매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조심스런 고찰은 데카르트의 요점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인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강제적인 것이라면, 분명히 경험이나 생각은 명석하다. 명석한 생각에 관해 데카르트가 제공한 그 삽화는 대충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치통과 같은 생생한 감각경험이 하나이고, 수학적 사고나 생각하고, 소망하고, 좋아함과 같은 정신적 활동이 또 다른 하나이다. 이 두 가지 형태에서, 마음은 정신적이거나 감각적이든 간에 어떤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곧 이야기하게 될 것과 같이 사고는 판명함 없이도 명석할 수 있다. 그 역은 발생할 수 없다. 명석하지만, 판명하지 않은 사고는 하나의 경험이다. 그것은 너무도 생생하고 강력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에 확신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하여 데카르트가 채용한 한 예는 치통이다. 그 경험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그 인식을 강요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통증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 사람은 그 고통이 치통에서 온 것인지 마음에서 온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몸과 마음의 관계에 관한 데카르트의 이론에 관한 또 다른 논의를 고찰해보면, 고통은 치아 속에서도,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부족한 것은 경험이 무엇인지와 세계의 그 밖의 어떤 것과 구별하는 능력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것을 완성할 수 있다면, 그 밖의 어떤 것과 도저히 혼동할 수 없는 그 경험을 명백히 한다면, 명석함만큼 판명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구분 지을 수 있는 어떤 생각이 분명해질 것이라면, 그 밖의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사고의 인식을 강렬하게 가지게 될 것이다.

확실성의 확장. 명석과 판명한 사고의 개념을 더 추적하게 되면,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진리 외에 그 밖의 진리를 요구한다. 이 연구의 동안에, 그는 완전한 확실성과 함께 알 수 있는 우주에 과한 이론을 발전시켰고, 그 이론은 결국에 참된 진리의 기준을 위한 더 나은 정당화를 제공하였다. 그의 지식 이론에 관한 논쟁을 완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간단하게 그의 성장의 남아있는 주장을 살펴 보아야한다.

본유관념. 명석과 판명한 것을 찾기 위한 나의 생각을 고찰할 때, 데카르트는 주장하였다. 내가 명석하지 않고 판명하지 않은 거의 모든 것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전부터 갖고 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고,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하다. 태양이나 인어,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고블린과 같은 개념들을 포함한다. 데카르트는 경험에서도 온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의 상상 속에서 창조되거나 구성되어진 것도 아닌 경험에서 나온 것도 아닌 본유과념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형태의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알아보겠지만 이 본유관념들은 정말로 명석하고 판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신(GOD). 데카르트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이러한 종류의 관념은 원과 같은 수학적인 개체에 관한 것이고, 또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주장했던 완전한 존재, 신에 대한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우리의 경험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이다.우리 스스로는 충분히 완벽하지 않아서, 데카르트는 특히 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서 나타나는 완전에 대한 것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지 유한한, 현세의 창조물이며, 아직 우리는 무한하고 영원한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데카르트가 묻기를,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서 발견할 수도 없고, 우리 자신 안에 있지도 않은 속성의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러한 이유로부터, 그는 수학적인 관념과 신에 대한 관념이 본유관념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범주라고 결론지었다. 그 본유관념은 우리 자신도 아니고 우리 삶의 어떤 사건에 의해서도 아닌 어떤 작용에 의해서 인식되어진 것이다.

완전한 존재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데카르트는 이 관념은 어떤 것에 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 어떤 것은 적어도 관념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완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관념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독립적이며, 전지전능한 실체이고, 나 자신과 만약 그 밖의 것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이다. 나는 고안된 관념 속에서 이용하는 이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나의 경험 속에서 그러한 완전성과 같은 어떤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에 관한 관념은 적어도 관념으로서 완전성과 같은 어떤 것으로부터 나왔어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논증했듯이, 그것은 나를 창조하고,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심어놓은 신이 존재해야 한다.

확실성 그 이상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두 가지 진리를 확립함으로써, 데카르트는 여전히 보다 더 나아가서 확실한 지식들을 찾았다. “그것은 참된 신(과학과 지혜의 모든 놀라움을 포함하고 있는)을 심사숙고하는 것에서부터 세계의 다른 사물의 지식에까지 우리를 이끌도록 하는 하나의 길을 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길을 따르는 첫 번째 단계는 만약 신이 완전한 존재라면 그가 인간을 속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주장한, 사기와 기만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의 속성이 될 수 없다.

이 발견-신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의 기초-은 완전한 존재는 기만자일 수 없고, 그 신은 그가 이전부터 상상했던 악마일수도 없고, 아니라는 것을 데카르트에게 보장해주었다. 만약 신이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전부터 깊이 의심해왔던 수많은 정보가 진짜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기만자가 아닌, 신이 우리에게 진리를 믿도록 원하고,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발견해낼 필요가 있다. 신은 우리를 속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준 지식의 완전한 믿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의 능력의 분석으로부터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강요된 유일한 판단이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어떤 명석, 판명한 관념이든지 동의하도록, 그리고 명석, 판명한 것은 무엇이든지 진리라는 것을 믿도록 강요받았다. 전능한 신이 이것을 우리에게 강요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한 어떤 것이 진리라고 믿을 때, 우리는 실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기만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명석하지 않고 판명하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 우리의 판단을 억제할 수 있다. 신은 우리에게 이러한 분야에서 어떠한 결론도 강요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지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념에 관한 존경과 함께, 우리의 믿음이 참이라는 어떤 보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에 관하여 믿을만한 판단 기능을 신이 우리에게 심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불완전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범위를 넘어서는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는 것을 강요하고, 어떤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관한 문제를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악용했을 때, 실수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의도하고 우리에게 강요한 것과 같이 그것들을 사용할 때, 실수할 수 없다.

여기서 몇 가지 예가 도움이 될 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은 명석하고 판명한 수학적 관념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가 2와 3과 5에 관한 관념을 고찰할 때, 우리는 2+3=5라는 것이 명석하고 판명하다는 것을 안다. 신이 우리에게 그 관념과 판단능력을 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기만자일 수 없기 때문에, “2+3=5”는 진실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걷고 있는 것 같은 칼라패치(?)의 그룹을 볼 때, 이것들이 사람이라는 것이 명석하지 않고, 판명하지 않는다고, 이것은 꿈의 일부분이 아닐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보는 것을 판단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만약 이런 경우에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신성한 보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 . 우리는 잘못과 오류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확실히 내가 설명했던 것보다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 그 이해를 통해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되어진 것을 제외한 어떤 문제에 관한 판단을 할 수 없는 나의 지식의 한계 내에서 나의 의지를 억제한 만큼 오랫동안, 나는 결코 속을 수 없다. 모든 명석과 판명한 개념은 분명히 어떤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나올 수 없지만, 반드시 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 내가 말하길, 신은 최고로 완전하고 어떤 오류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개념이나 참인 판단을 결론내려야 한다.

 

객관적인 실재를 위한 논쟁. 그러면 무엇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한 무엇이든지 간에 참이라는 신의 보증에 대해서, 신의 존재, 우리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기초에 기반을 두어, 데카르트는 우리는 수학적인 지식의 전체 범위가 진리라는 것에 긍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오직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내가 깨어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간에 이 지식은 진리이다. 그것은 어느 경우에나 명석하고 판명하며, 그리고 신은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학적인 지식은 오직 나의 마음속에 관념에 관련된 진리로 주어졌다. 나의 외부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또한 확신할 수 있다는 것과 확실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고찰하지 않았던 정교한 논쟁을 통해서, 데카르트는 우리의 마음 밖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의 경험이 이 세계로부터 나온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우리의 본성적인 믿음의 신뢰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기초적인 논증이 제공한 것은 외부의 세계 안에서의 믿음이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신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 된다. 신은 기만자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외부의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외부세계에 안전하게 귀속시키는 속성은 명석하고 판명한 형태의 관념 안에서 찾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연장을 가지고 있는 형태,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진리들이 그것들에 적용된다.

비록 데카르트는 지식과 믿음에 관한 가장 극단적인 의심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확실한 지식의 정도에 관한 광범위한 이론과 함께, 우리를 속이지 않는 신에 관해서, 신에 관한 우리의 존재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실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모든 명석하고 판명한 지식은, 정신적인 것만큼 물질적인 개체에 적용될 수 있는 모든 수학적인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의 기초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확실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 경험과 같은 명석하지도 않고 판명하지도 않은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확실성을 결코 완성할 수 없다. 그것들이 수학적인 관계에 있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물리적인 형태의 법칙을 알 수 있지만, 아마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관한 환상이나 꿈들인 세계의 판명하지 않거나 명석하지 않은 어떤 확실성을 가지고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색깔, 소리, 냄새) 본유관념의 세계,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은 신이 우리 안에 심어 놓은 것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확실성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확실성이다. 의심의 방법, 그것을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정보에 대한 시험은 무엇이 확실하고 그렇지 않은지 우리로 하여금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 데카르트는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에 관한 확실한 지식의 많은 양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외부의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떤 것들은 자연의 확실한 지식에 관한 기초를 제공해준다. 만약 우리가 명석하지도 않고 판명하지도 않은 관념에 기반을 둔 판단을 피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어떤 실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식 이론의 합리론자. 지식의 이론은 플라톤과 데카르트가 불렀던 “합리론”과 같은 것이다. 독자적인 이성의 확실한 절차를 채용함으로써 우리는 강력한 감각 안에 지식-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거짓일 수 없는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보통 그러한 합리주의적 이론들은 (여기에 나타난 이론들 모두) 감각 경험 안에서는 어떤 절대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찾을 수 없지만, 오직 마음의 영역 안에서만 구해진다고 말해진다. 플라톤과 데카르트 모두 참된 지식은 이미 우리 안에 우리가 얻을 수 없지만 타고난 본유관념이라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더 나아가 합리론자들은 다양한 합리주의적 절차를 통해 진정한 세계를 확실히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확실성으로 알려질 수 없는 세계는 일반적으로 현혹시키거나 가짜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세계로 판단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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