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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에이젠슈타인 _ 가치론연습 _ 리얼리즘과 영화에 관한 테제

철학/가치론연습 2008. 5. 21. 21:18

출처 MS. WOO'S LIBRARY | mswoominji
원본 http://blog.naver.com/mswoominji/60049761027

소련의 위대한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미지는 그 특징과 역사적 가치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받았다. 때로는 너무 잔인한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하는 그의 최고의 영화들은 처음 공개된 후로 오랫동안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표정한 군인들이 그 유명한

긴 계단을 무릎을 펴고 다리를 높이 든 자세로 내려오고, 군인들의 행진에 이어 아이 혼자 탄 유모차가 불행을 향해 곤두박질하는 장면이

삽입된 '전함 포템킨 (The Battleship Potemkin)' (1925), 온통 전사한 군인들의 시체로 뒤덮인 툰드라의 드넓은 설원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시체라도 찾고 싶은 마음에 손전등을 든 여인들이 뻣뻣하게 굳은 시체들 사이를 뒤지고 다니던 '알렉산더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 (1938), 그리고 숱이 많은 둥근 눈썹이 클로즈업 되는 불길한 분위기 속에서 증오에 찬 대귀족들이 위협하듯

서 있는 어두운 복도를 담은 1945년과 1946년의 '폭군 이반 (Ivan the Terrible)' 1, 2부는 관객의 뇌리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영화 이론가이자 지성인이며, 소련 공산당의 유능한 선전원이기도 했던 에이젠슈테인은 시각적 체험을 원래의 목표인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전혀 새롭고 예상치 못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미학적

형태로 받아들였다. 에이젠슈테인은 그러한 개인적 변용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영화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표현할

탁월한 기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을 갈등으로 이해했으며, 몽타주 기법 -- 두 가지 이미지가 결합함으로써 보는 이의

마음속에 제3의 이미지가 생겨나는 것 -- 을 사용해서 한 장면은 테제로, 그 다음 장면은 안티테제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는

신테제는 보는 사람에게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통찰력을 전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에이젠슈테인은 D. W. 그리피스를 숭배하기는 했지만 그의 표현기법들은 모두 할리두으식 사고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공산당

내부에서 자행되는 정적들의 처절한 응징과 만족을 모르는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파괴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에이젠슈테인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대중은 실험적이면서도 항상 현실적이었던 그의 예술의 관객이자 영웅이었다 (그는 일반인을 배우로 출연시키기를

좋아했다).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러시아인 어머니와 독일계 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에이젠슈테인 (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은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가정의 문화적 분위기는 그의 천재적 재능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미 열 살 때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나중에 일본어도 배웠다. 열일곱 살 되던 해에는

기술자인 아버지를 따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토목공학과 건축학을 배웠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아들은 보수당과

혁명당으로 각각 노선을 달리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반목이 빚어졌다.


전쟁 동안 부대의 심리 전담 부서에서 교육선전 담당관으로 일했던 에이젠슈테인은 전쟁이 끝나자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아마추어

연극단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격동기를 맞이할 러시아 아방가르드 연극계에서 혜성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는

모든 전통적인 이론도 순수하다고 인정받기 전까지는 결점이 있는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작가이자 감독이며 세트와 의상 디자이너였던

그는 25세의 나이에 모스크바에 있는 실존주의 연극인들 중에서 최고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빠른 이미지 변화를 사용하여 확인한 갈등과 변화의 강도는 오직 필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새로운 기술에 제도, 공학 기술, 그리고 건축학적 기술이 보완된 날카로운 통찰력이 더해지면서 그는 모든 영화 제작 과정에

참여했으며, 그가 일평생 영웅으로 삼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기대한 것과 똑같은 지성과 에너지와 창의력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하여 1924년에 '스트라이크 (Strike)'를 필두로 다음 해에 '전함 포템킨'을 발표했다. 그는 '전함 포템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실패로 끝난 1905년의 혁명을 상징하는 반란군이란 아주 단순한 소재를 이용해, 그는 비평가들의 찬사와 함께 영화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있는 걸작을 탄생시켰다.


공산당이 '10월 (October - 혹은 '세계를 뒤흔든 열흘 (Ten Days That Shook the World)이라고도 함)'의 상당 부분을

삭제하라고 강요하자 에이젠슈테인은 1930년에 할리두으로 건너갔다. 그는 파라마운트와 일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기획한 영화를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정치적 신념 탓에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찰리 채플린의 충고를 받아들인 그는 미국의 좌파

작가 업튼 싱클레어 (Upton Sinclair) 에게 접근하여 멕시코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데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멕시코 만세!

(Que Viva Mexico!)로 인해 싱클레어가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냈고 미국 세관 관리가 에이젠슈테인의 소지품에서 동성애를 다룬

그림을 발견하자, 스탈린은 외국을 돌아다니는 이 감독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한편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영화 안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원칙을 고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정부와 동료 영화감독들에게서 강한 질타를 받아야 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충실한

대변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감독은 마침내 첫 번째 유성영화 '벤진 초원 (Benzhin Meadow)'을 촬영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수개월에 걸친 준비 작업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정적이었던 소비에트학파 책임자에 의해 결국 영화 촬영이 중단되었다.

'폭군 이반'의 결정적인 성공 후에도 그는 2부에서 야만적인 독재자를 너무 나약하고 우유부단하게 묘사했다는 죄로 기소되었으며, 결국

영화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그는 194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무한한 창의성의 실패와 미학적 성공으로 점철된 삶도 막을 내렸다. 그는 스탈린의 지나친 주문에

항상 복종했으며 악의적인 박해를 받을 때도 공개적으로 불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공론가의 정확성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허용한 그의 처사에 대해 영화 순수주의자들은 용서할 수 없는 타협을 한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과연 그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촬영기사 네스토르 알멘드로스 (Nestor Almendros)는 사르트르를 거론하면서 인간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감옥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를 찍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잘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라고 알멘드로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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