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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생애와 사상

철학 2008. 9. 25. 18:08

간디의 생애와 사상

 

  지은이: 차기벽
  지은이 소개: 서울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클레어먼트 대학원을 수료(정치학
석사)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간디 평화재단 초청으로 인도를 시찰하였으며,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및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근대화정치론],
[자유와 책임], [한국민족주의의 이념과 실태], [민주주의의 이념과 역사] 등이 있고, 편저로는
[민족주의], [정치와 정치사상], [일제의 한국식민통치] 및 [일본현대사의 구조(공편)] 등이 있다.
 

 

    머리말
  이 책이 처음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에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이 책도 출판사를
세번째 옮기게 되었다.
  지문각에서 초판이 나온 1965년 당시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신생제국에서 군부나 일당에 의한
권위주의 정치가 판을 치고 있었지만, 인도에서는 용케도 민주정치가 견지되고 있었다.
태양문화사에서 재판이 나온 1977년 무렵에는 그 인도에서마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있어 인도
민주정치의 앞날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한길사 에서 3판이 나오게 된 1980년대 말인 요즘에는
제 3세계에서 민주화 도미노현상이 일고 있지만, 인도에서는 이보다 한 발 앞서 민주정치에로
복귀하고 있다.
  제 3세계, 특히 한국 민주화과정의 와중에 있는 우리가 인도 민주화과정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도 민주화과정이 남긴 기복이 덜 심한 발자취 때문이다. 인도가 그 같은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의 식민지정책과 이에 맞선 민족해방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인도를 알려면 지난날의 그 독립운동사론 알아야 하지만, 고전적인
식민지정책 밑에서 전형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인도 독립운동의 역사를 알려면 독립운동을
주도한 회의파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회의파의 역사를 알려면 그 위대한 지도자였던 간디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p14
  간디를 중심으로 하여 회의파의 역사, 독립운동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오늘의 인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게 할 준비작업을 해보자는 것 이 이 책의 목적이다.
  간디의 생애는 숱한 에피소드, 극적 사건, 감격적인 장면으로 차 있다. 그의 연설과 저술은
극히 방대할 뿐 아니라 인간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에 걸쳐 있다. 그는 참으로 특이한 인격의
소유자로 인도 문명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의 세대를 연결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또한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빈틈없는 현실정치가이면서도 자기탐구를 적어도 민족갱생과 국가재건만큼
중요시하던 종교인이었다. 실로 그는 좌절감에 사로잡힌 인도 민중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서구화한 엘리트와 전통적인 대중과를 하나로 결속시켜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민족해방투쟁에 총 궐기케 하는 동시에, 한평생 진리를 추구하며 자기 자신의 도덕적 성품을
향상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 책에서는 다면적인 간디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려고 애썼지만, 집필의 동기가 위와 같으므로
자연 정치면에 치중하여 역사적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제 1장에서는 간디가 인도
정치무대에 등장하기까지의 영국 식민지정책의 변천과정과 인도 민족운동의 전개과정을
개관하였고, 제 2장에서는 간디의 특이한 인격과 사상의 형성과정을 추적하였으며, 제 3장에서는
그렇게 해서 형성된 간디의 종교적 이념과 사회적 이상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제 4장에서는
그러한 이념과 매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실천방법과 그 구체적인 실천과정을 고찰하였고, 끝으로
제 5장에서는 간디주의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고 그 유산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나 역량이 의욕을
따르지 못하여 미비한 점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질정 있기를 바란다.
  출판 사정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쾌히 이 책을 내주신 한길사 김언호 사장과 여러 모로
수고해주신 편집부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1989년 4월 10일 저자

 @p15


    차례
  머리말-13p
  제 1장 영국 지배하의 인도-17p
 1. 인도는 왜 영국의 식민지로 되었나?-19p
 2. 영국의 식민지정책과 인도의 민족운동-27p
  제2장 간디의 반생-49p
 1. 학창시절-50p
 2. 남아프리카 시절-57p
  제 3장 간디의 사상-81p
 1. 종교적 및 도덕적 이념-85p
 2. 사회적 이상-102p
 3. 독립 후의 인도상-114p
  제4장 간디의 실천-l29p
 1. 세 가지 방법-133p
 2. 제 1차불복종운동-149p
 3. 재준비-172p
 4. 제 2차불복종운동-183p
 5. 제 2차대전과 분할독립-197p
  제 5장 간디 사후의 간디주의-223p
  간디의 연보-237p
  참고문헌-241p

 @p17


    제 1장 영국 지배하의 인도
  롤라트법( * 1919년 초에 제정되어 3월에 발효된 이 법의 목적은 전시입법 (즉, 1915년의 인도
방위법)의 실효에 즈음해서 일정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투옥할 수 있게 하여 정부의
민족운동 탄압력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과 아므리차르 대학살!(* 롤라트법의 실시에
반대해서 전국적으로 반영운동이 일어난 데 대하여 정부는 단호한 탄압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1919년 4 월 13일 펀잡 주의 아므리차르 시에서 대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즉 다이어 장군은
비무장의 군중에 발포를 명하여 379명의 사망자와 1, 200명의 부상자를 내게 했다.) 이것이
인도가 150만의 병사와 3억 파운드의 군사비를 제공하여 1차대전 수행에 적극 협력한 데 대한
전후 영국의 보답이었다. 전후 인도에 점차로 자치정부를 허용 하리라던 몬타규 성명의 약속을
믿고 '빵'을 구하던 인도는 '돌'을 얻은 셈이었다.
  어긋난 기대 속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인도 민중의 가슴속에서 북받쳐오르고, 쓰디쓴
굴욕감이 납덩어리처럼 인도 민중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전능의 괴물한테 사로잡혀
어떻게도 할 수가 없는 듯이 보였다. 수족은 마비되고 정신은 무감동이었다"(Jawaharlal Nehru,
The Discovery of India, p.310. 앞으로는 Discovery로약기함)고 네루는 그의 [인도의 발견]에서
당시를 기막힌 심정으로 회고하고 있다. 사실 오랜 세월에 걸친 가차없는 착취로 말미암아
민중의 빈곤은 날로 더해갔고, 민족의 활력은 메말라들고 있었다. 몇 세대에 걸쳐 '피와 고생과
눈물과 땀'을 몽땅 바쳐버렸기 때문에, 인도의 육체와 정신은 병들 대로 병들었고, 민중의
연대생활은 해독을 입지 않은 면이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는 가난과 기아 속에서 비굴감과
공포심의 포로로 되었고, 중산계급이나 인텔리는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p18
  농민은 그래도 수세기 동안에 걸친 가혹한 운명 속에 체념과 인내심이 생겨 있었으므로 빈곤과
기아 속에서도 일종의 침착성을 가지고 만능의 운명에 순종하고 있었으나, 인텔리는 그렇게 될
수도 얼었으니 그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농민보다도 더 비참했었다. 실망과 불만에 가득 찬 그들
인텔리는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할지를 몰랐다. 낡은 것도 새 것도 그들에게는 희망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도, 불타는 사명감도 가질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낡은
교양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요, 현대의 사상이 몸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낡은 것에 집착한다고 해서, 또는 창백한 얼치기 서양모방자로 된다고 해서 비참한 현실에서의
구원이 있을 리가 만무하여, 마치 난파된 배처럼 인도 생활의 암담한 대해를 정처없이 헤맬
수밖에 없었다. 빈곤과 패배주의, 일거에 결판을 내려는 모험주의로는 좀처럼 빠져나을 수 없는
너무나 깊은 구렁텅이요, 기만적인 엉터리 요법으로는 결코 고칠 수 없는 뿌리 깊은 질환이었다.
  간디가 인도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마치 한바탕 부는 서늘한 바람에다
비길 만하여, 우리는 가슴을 펴고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어둠을 비쳐주는 한줄기
빛과도 같아 우리의 눈에 낀 안개를 닦아냈다. 그는 또한 회오리바람처럼 많은 것을
뒤집어엎었지만, 특히 민중의 마음가짐을 변화시켰다"(Discovery, p.311)고 네루는 당시의 감격을
말하고 있다. 흥분과 희망의 급작스런 물결이 인도 민중의 마음속에서 일어나 이때부터 인도의
민족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지니게 되었다. 고원한 이상과 현실적인 실천을 하나로 결부시킨
간디의 영도하에 인텔리는 물론이요, 농민도 동원되어 이제는 일반 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인도의
민족운동이 성난 물결처럼 인도의 지평을 휩쓸게 되었다.
 @p19
  침체와 무기력,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헤매던 인도 민중을 이토록 각성시켜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전진하도록 발동을 건 간디, 그는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 그의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런 사상은 어떻게 실천에 옮겨졌을까 ?
  원래 간디의 사상은 독서를 통해 서보다는 그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형성되었지만, 그런 경험은 시대적 및 사회적 배경과 동떨어져 있을 수는 없으므로, 먼저 영국
식민지 지배하의 인도의 실정부터 개관하기로 한다.
    1. 인도는 왜 영국의 식민지로 되었나?
  1) 유럽 세력의 진출과 인도의 영국 식민지화
  15세기 말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한 인도항로가 발견된 후, 포르투갈은 인도 서안의 고아를
본거지로 하여 동양무역의 독점을 꾀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노린 것은 통상로의 확보에
있었으므로, 인도와 그 밖의 아시아 제국의 연안 요지는 점거했으나, 그 세력을 내륙 깊숙이까지
침투시키는 일은 없었다. 16세기 말부터는 네덜란드와 영국이 아시아에 진출하더니 마침내
양국이 각각 동인도회사를 창립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하자, 포르투갈의 세력은 점차
쇠퇴하였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처음에는 향료 등의 생산지의 점유를 꾀하여 자바, 말래카
등지에서 대립했으나, 17세기 전반에는 네덜란드가 강했기 때문에 영국은 후퇴하여, 포르투갈
세력이 약화돼 있던 인도에 주력을 기울이게 되어, 마침내 마드라스, 봄베이, 캘커타의 3대
거점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인도 진출이 적극화되었다.
 @p20
  한편 프랑스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인도회사를 설립했지만, 그 인도 진출은 영국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에도 인도에서의 영불 양국의 항쟁은 계속되었는데,
처음에는 뒤플렉스가 지휘하는 프랑스가 우세했으나, 영국 측에서 클라이브가 활약하게 되자,
프랑스를 압도하고, 1757년 플래시 전투에서 그 승리는 결정적으로 되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플래시 전투 후 인도의 통치기관으로 변모하여, 우선 벵골 지방을
회사령으로 하고, 그 후 남인도의 마이소르, 중인도의 마라타 동맹, 서북 인도의 시크교도 등의
권력을 차례차례로 타도하였다. 그 결과 이회사는 19세기 중엽까지에는 거의 전인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고, 1857년에서 1859년까지의 세포이의 반란을 계기로 무갈조는 완전히
멸망하고, 동인도회사에 의한 통치는 영국 정부의 직할통치로 되었다가, 1877년 새로
영령인되제국이 성립하여, 이에 인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독립을 상실하고 문자 그대로
외국에 지배당하게 되고 말았다.
  2) 영국 식민지화의 원인
  그 면적 (오늘의 인도연방,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의 합계)이 유럽 대륙 (소련과
핀란드 제외)의 크기가 해당되며, 그 안에 3억의 인구를 가지던 아대륙 인도가 왜 유럽 대륙
주변의 왜소한 섬나라인 영국의 식민지로 되고 말았을까? 네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영국인이
인도의 지배에 성공한 것은 거의 우연한 일, 요행의 연속인 듯이 보인다. 여러 사태들 사이에
만일 무엇인가 약간의 변동이라도 있었더라면, 혹시 그것이 그들의 희망을 분쇄하고 그 야심을
종식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p21
  하기는 그들 영국인은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당한 일이 있었다. 조금만 더 운이 나빴더라면,
그들은 인도에서의 발판을 잃었을지도 모르고, 또는 기껏해야 어딘가의 해안지역을 간신히
지탱하는 데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루는 "더 깊이 음미해보면, 당시의 정세하에서는 그와
같은 사태진전에는 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부언하고는,
무갈제국의 분열로 인한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상태하에서 영국인은 제국지배를 위한 각축전에서
승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네루는 그들 영국인이 먼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들을 인도의 패권을 다툴 진정한 상대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그만 그들의 정체를 간파했을 때에는 이미 시기가 늦었었다고 통탄해 마지
않고 있다. 마치 어린애의 깜찍한 재간에 넘어간 방심하고 있던 씨름꾼처럼 졌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문제는 이러한 견해의 옳고 그름보다도 그러한 견해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자기 조국
인도에 대한 네루의 떳떳한 긍지에 있다. 원래 민족운동에 뛰어든 것은 "개인적 및 민족적인
자존심"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네루이지만, 유럽을 먼저 알고 난 후에 인도를 발견하게 된 네루가
인도에서 발견한 강점은 그에게 무한한 긍지를 갖게 하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찬란하게 꽃피던 고대문화, 힘차게 밖으로 뻗어 나가던 강성한 제국, 더구나
성쇄한 변천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그 근본적인 동일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케" 한
"인도문명의 비상한 지속력과 적응성"은 비단 네루뿐 아니라 인도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떳떳한 민족적 긍지를 가지게 할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과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류
문화의 발상의 하나인 인더스문명은 놔두고라도 기원전 1, 2천년간에 걸쳐서, 종교, 철학, 문학,
법전, 예술을 비롯하여 천문학, 수학 (* 수학에 있어서 고대 인도인은 몇 가지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특히 영의 기호, 십진법, 마이너스 기호의 사용, 대수에서 미지수를 표시하기 위한 알파벳
문자의 사용이 그것이다. 또한 인도인은 수에 대한 감각이 극히 예민하여 몹시 거대한 수(가령
10의 8승)와 반대로 극히 미세한 수 (가령 시간의 최소 단위는 대체로 17분의 1초였고, 또 최소의
척도는 대체로 1.3 * 7의 음수10승 인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를 다루고 있었다.), 의학 등 고도의
문화와 발달된 경제생활을 누리며 이미 기원전 4세기 말에는 거의 전인도에 걸친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인도, 특히 정력에 넘치고 약동하는 정신을 가지던 시대인 서기 최초의
1천년간에는 그 문화와 세력이 동남아 일대에 미쳐, 각지에 식민지가 산재하고, 이란, 중국,
그리스 및 중앙아시아와 활발한 접촉을 가지던 인도, 16세기에는 이슬람정권이나마 무갈족
밑에서 전국이 거의 재통일되었던 그 인도가 왜 19세기에 와서 영국의 식민지로 되고 말았을까?
 @p22
  18세기 초엽에 무갈제국의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자, 많은 지방적 세력이 대두하였으나
18세기를 통해서 인도의 패권을 다투던 진정한 경쟁세력은 영, 불의 두 외국세력과 마라타동맹
및 마이소르의 두 국내세력이었다. 18세기 말에 접어들자, 결국 이 쟁패전은 마라타와 영국의
양자로 줄어들었지만, 마라타의 수장들 사이의 불화로 인하여 영국인에게 각각 격파당하고
말았다.
  이 쟁패전의 과정을 피상적으로 관찰한다면, 영국인의 승리는 우연과 요행의 연속인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영국인은 언제나 존재가 희미하게 되어 있던 무갈황제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한 데다가 그들의 벵골에서의 약탈과 특수한 교역방법은 결국 약탈을 한 다음 고국으로
돌아갈 외국인으로 보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보았다면 그것은 당시 인도의
패권을 다투던 각 세련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국제정세에 어두워 세계적 안목을 갖지 못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데 불과하다. 실로 인도인은 당시 근대적인 의미에서 민족감정을 갖지
못하여 그 들의 충성심은 그 토지의 수장에게 바쳐지고 있었다. 따라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은
가지면서도 위기에 처하여 상호협력을 할 수 업었다. 이에 반하여 영국인은 극히 유능한 지도자
밑에 긴밀하게 결속된 고도의 정치적, 군사적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방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정보에 통해 있어 인도인 세력의 분열과 대림을 남김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영국인의 조직력은 기술적 진보에서 나왔고, 그런 기술적 진보의 배후에는 과학정신과 발랄한
생활감정이 있었다.
 @p23
  일찍이 십자군의 원정을 계기로 싹트기 시작한 유럽의 새 정신은 마침내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문예부흥은 기존 권위뿐 아니라 추상과 사변에도 도전하는 객관적 탐구의 새 정신을 앙양하여
안으로는 자연과학을 일으키고 밖으로는 대양 저편으로 모험의 손길을 뻗치게 하였다. 그 결과
신대륙과 신항로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유럽은 종교개혁, 시민혁명, 산업혁명 등의 일련의
과정을 밟으면서 발전하여, 드디어 온 세계를 제패하기에 이르렀다. 세계를 제패하는 데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다름 아닌 해군력이었다. 인도의 해군력은 13세기에 남부의
촐라왕국의 몰락을 계기로 쇠퇴하여 15세기에는 아랍인이 인도양 전역을 지배했지만, 그들은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을 선두로 하는 유럽 세력에게 구축당했고, 결국 인도양의 제해권은 영국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바다의 제패는 그들 영국인에게 안전한 기지와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일시적인 패배를 당해도 곧 회복하여 다시 공세를 취한 수가 있었다. 게다가 플래시의
승전으로 인한 벵골의 영유는 전비를 충당할 수 있는 거대한 부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발달한 스파이 제도와 교묘한 오열 조종으로 대개의 전쟁에서는 실제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승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영국인의 인도 지배는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제국지배를 위한 각축전의 과정에서 영국인은 많은 요행을 가졌지만, 영국인은 그런 요행을
충분히 이용하여 승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비단 영국과 인도의
경우뿐 아니라, 널리 유럽과 아시아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여태까지 많은 면에서 뒤져 있던
유럽에서는 발랄한 새 정신이 일어나 새 기술을 발달시켜 자연력을 개발, 이용한 데 대하여,
아시아는 지난날의 노력에 지쳐서 거의 혼수상태에 빠진 채 인력에 의거하는 전통적인
생산방식에 매달려 있었다.
 @p24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래 문명은 외부의 공격보다는 내부적인 결함 때문에 쇠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 문명을 담당하는 국민이 지치거나 질이 저하된다는 인간적인 요인이 주가 되는
경우도 있고, 사회제도가 새로운 전진을 가로막는다는 제도적인 요인이 주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경우를 보면 후자일 것 같다. 인도문명의 쇠퇴는 13세기의 이슬람교도들의 침입 이전에
이미 역연한 바가 있었다. 생기와 활력, 창의와 탐구심에 차 있던 인도, 기술(*)과 경제생활이
고도로 발달해 있던 그 인도도 대체로 서기 1000년을 전후하여 서서히 쇠퇴과정에 들어섰다.
약동하던 생명력은 점차 약화되고 창조적 재능은 고갈되어갔다. 모험에의 충동은 자취를 감추고
탐구의 합리성은 과거의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길을 비켰다. 이리하여 인도의 생활은 변화 없는
정체상태로 빠져들어갔다.
  * 예를 들면 고대 인도에서는 제철업이 상당히 발달하고 있었다. 델리 근처에 거대한 철주가
있는데, 그 산화작용을 막아온 제련법을 현대 과학자들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철주에 새긴 명문은 서기 4세기에서 7세기간에 사용된 굴타 문자로 씌어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철주 그 자체는 이 명문보다 훨씬 더 오래 된 것이며, 명문은 후에 새겨 넣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 특히 무갈의 지배는 인도의 생활에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자극에 의한 예술, 건축, 그
밖의 문화양식에 생기를 돌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본래의 활력과 창조적인 생기를 잃은
낡은 두 세계의 접촉의 결과였던만큼, 인도의 생활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못하고
지난날의 침체상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침체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카스트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인도
사회구조의 점점 더해가는 엄격성과 배타성에 있었다고 네루는 말하고 있다(Discovery, p. 188).
배타의 정신은 창조력을 약화시키고 집단적 편견을 조장시켰다. 인도의 생활은 기정의 틀로
세분화되고, 그 안에서 각 개인의 일은 항구적으로 고정되어 타인과는 거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
국방은 크샤트리아의 일이며, 무역과 상업은 브라만과 크샤트리아가 천시하는 직업인이었다.
교육과 발전의 기회는 하층 카스트에 속하는 이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다. 도시의 경제와 산업은
상당히 발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기구는 대체로 봉건적이었다.
 @p25
 * 카스트 제도: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 민족이 선주민족인 드라비다인을 정복하는 과정에 생겨난
제도이다. 고대에는 피 정복자를 근절시키거나 노예로 만들거나 했지만, 아리아인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 오래도록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일종의 복합사회적인
국가를 만들었다. 이 국가에서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또는 일반적인 규범에 따라, 각 집단에게는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며 각자의 관습과 희망에 따라 자기의 생활을 영위하는 자유가 부여되었다.
다른 집단에 간섭하거나 서로 싸우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실상의 유일한 금제였다.
당초에는 이 제도는 융통성이 있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래자나 낡은 집단 안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인원만 있으면, 언제라도 새 집단을 형성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기의 집단 안에는 평등과 민주주의가 존재하여 선거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들이
지휘하고, 무슨 중대한 문제가 일어나면 언제나 집단 전체와 협의했다. 요컨대, 카스트는 직무,
직능에 기초를 두는 하나의 집단제도였다. 그것은 공통된 교의 없이 각 집단에 완전한 자유를
인정하면서 모두를 포섭하려는 하나의 질서였다. 이 카스트는 기본적으로 브라만(승려계급),
크샤트리아(무사계급), 바이샤(상인계급), 수드라(노동계급)의 넷으로 나누어지나, 각 카스트는
수많은 아카스트로 다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이 카스트에 속하지 못하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불가촉천민 (untouchables)이라고 불린다. 이런 카스트제도는 처음에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목표로 서서히 완성 되었지만, 그것이 고정되어 융통성이 없어지자, 많은 불편과 폐해를
낳아 인도의 발전을 저해하는 질곡으로 되었다.
 @p26
  그러므로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그런 기구를 변혁하여 재능의 새 원천을 해방해야 했지만
카스트제도는 그와 같은 변혁을 완강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카스트제도와 촌락자치제(*) 및 합동가족(joint family)(**)을 3대 지주로 삼는 인도의
사회구조는 인도 사회에 질서와 안정을 주는 데는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단결은 주었으나, 팽창과 보다 큰 단결에는 장애로 되었다. 그것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다소의 자유를 주었으나, 보다 큰 자유의 발달을 회생시키고, 방대한 수의
사람들에게서 그 발전의 기회를 빼앗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한 사회기구는
발전과 팽창에의 길을 제공하고 있는 동안은 진보적이었으나 일단 팽창의 한계에 달하면
정체적이 되고, 그 후에는 필연적으로 퇴보적이 되고 말았다.
  * 촌락자치제: 먼 옛날부터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해온 특별한 사회조직인 촌락공동체는
광범한 자치제가 허용되어, 중앙 정부는 부과된 세금이 납부되는 한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관습법은 강한 힘을 가졌고, 정치적 내지 군사적인 권력도 관습법에 의거하는 권리에는
간섭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그리하여 이 공동체의 경계가 변경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심지어 전쟁과 흉작 또는 질병으로 촌락 그 자체가 파괴되는 경우에도, 같은 명칭, 경계,
이해, 같은 가족이 수세기에 걸쳐 그대로 남았다. 그것은 정체적이며, 카스트제도에
오염되어 때로 야만적인 자연숭배와 미신의 소굴로 되었다.
  **: 인도사회의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합동가족이다. 이른바 대가족의 동거생활이며,
가족 구성원은 제사를 같이하고, 식사를 같이하며 재산을 공유한다. 극히 일부의 지방(아삼
및 케랄라 주)을 제외하면, 대개 가부장제이며, 가부장의 권위에 종속함으로써,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생활이 보장된다. 합동가족의 장점으로서, 개인의 이기주의가 억제되고,
사유재산의 폐해를 수정하며, 양로, 실업의 면에서는 사회복지의 기능을 가진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 개인의 확립이 제약당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 해방된 개인을 단위로 하는 사회 내지 사회집단을 인정할 수 없는 점에서 인도에서
근대화가 뒤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합동가족이 재산의 공유와 그 연대책임제라는
경제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본과 사업경영의 면에서 가족 성원에 의한 합명, 합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합동가족이 몇 개 모여서 그대로 일종의
아카스트를 형성하고 있는 사실과 더불어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가족제도는 현재는
급속도로 붕괴되고 있다.
  그 결과 인도생활은 온갖 면에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또한 지방적, 봉건적인 감정이
발달하게 되어 전체로서의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게 되었던 것이다.
 @p27
    2. 영국의 식민지정책과 인도의 민족운동
  1) 영국지배의 의의와 그 모순
  영국의 인도 지배는 인도로서는 역사상 처음 겪는 외국에 의한 지배였다. 인도는 이전에도
이슬람의 침략자들에게 정복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아시아의 침략자들은
히르지건 투글라크건 혹은 무갈(모두 인도에 침입한 이슬람왕조)이건간에, 다 같이 인도의
국경 안에 정착하고, 침략자의 2세부터는 인도의 생활에 동화, 융합되어 인도인으로서 그
영토를 지배하였다. 또한 그들은 서방의 이슬람제국과는 거의 또는 전연 교섭을 갖지
않았다(K.M.Panikkar, A survey of Indian History, 제 2판 서문). 인도는 일찍이 중력의
중심이 그 국토 밖에 있는 정치적, 경제적 체제 속에 끌어넣어진 일은 한 번도 없었고,
기원과 성격에 있어서 이국적이며, 게다가 영원히 융합할 수 없는 지배계급에게 예속당한
일은 없었다. 인도의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지배가 외부에 의해서 행해지고, 그 경제는 멀리
떨어진 곳에 의해서 좌우되었으며, 또한 인도에 동화되려고 하거나 융합되려고 한 적이 없이
언제나 주의 깊게 이국적이었던 지배계급한테 통치당하게 되었다.
 @p28
  영국의 지배는 인도 사회에 심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인도로서는 여태까지의
어떠한 침략이나 정치적, 경제적 변화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전혀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렇듯 영국 지배가 인도 사회에 예전과는 전혀 다른 충격을 준 이유는 영국이 새로운
기계문명의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새로운 역사적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점을 자각하지는 못했어도, 변화와 변혁의 선구자이며
대표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가 자기들의 지위를 공고화하는 데 필요하거나, 자기들의 이
익을 위해 인도의 인적, 물적 자원을 개발, 착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온갖
수단을 다하여 변화를 저지시키려고 애썼다. 그것은 그들이 진보적인 변화가 인도 민중의
힘을 강화하여 결국 자기들의 입장을 약화시킬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일어났다. 진보적인 방향에서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문명의 새로운 충격은
너무나 강하여, "영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Discovery, p.269) 그런 변화는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런 변화는 인도 민중을 각성시켰고, 각성한 인도 민중은 민족적 자각을
갖게 되어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2) 세포이의 반란과 신식민지정책의 기조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대규모의 민족운동은 1857년에서 1859년까지의 세포이의
반란에서 시작된다. 세포이의 반란은 영국 산업자본의 지배와 수탈의 강화에 조응하는
것이다.
  영국의 인도 지배는 1600년의 동인도회사의 설립에서 시작되지만, 전기적 상업자본의
독점적 무역기관이었던 동인도회사는 주로 약탈적 무역에 종사해왔으나, 1757년의 플래시
전투를 계기로 통치권력으로 등장하여 인도 농민의 직접적 수탈을 주요 사업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p29
  이 때문에 인도의 부의 유출이 심하여, 인도 특히 벵골의 빈곤화가 초래되었지만, 이
벵골에서 수탈해간 부가 자본으로 되어 영국의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동인도회사를 통한 인도의 수탈을 발판으로 해서 성장한 영국 산업자본은,
산업혁명의 진전과 더불어 동인도회사의 무궤도한 수탈과 무역독점에 반대하고, 인도를
영국의 상품시장과 원료기지로 만들도록 요구하게 되어 그 한계 안에서 수탈의 합리화를 그
정책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 정책의 집약적 표현이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토지제도
의 설정(*)과 1813년 이래의 무역독점 해제요, 또한 농업원료품의 강제재배와
재식기업의 장려정책이었다. 이런 정책에 따라 영국 상품은 인도에 쇄도하여 자급자족적인
촌락공동체를 파괴하고, 인도의 농촌을 세계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 강제로 끌어넣게 되었다.
인도의 직물공업은 파멸되고, 수많은 수공업자는 직업을 잃고 몰락했다.
  * 토지제도의 설정: 영국인의 인도 지배가 확립됐을 무렵, 인도의 농촌에는 토지소유권이
국가에 있는지, 농민에 있는지 또는 촌락공동체에 있는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무갈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농민과 국가 사이에 있던 징세청부인인 자민다리의 수가 느는 동시에
사실상의 소유자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대개 오래된 귀족출신은 아니고, 사기나 폭력에
의해서 명의상의 소유자로 되어 있었던 것인데, 벵골, 비하르 연합, 북마드라스의 각 주에서
영국인은 그들을 영국법적인 의미에서의 지주로 결정했다. 영국인이 자민다리를 지주로
오인했는지 또는 알고 있으면서도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아무튼 이 영대차지제도(permanentsettlement)의 설정으로 인도 농촌사회의 전통인 농민의
일종의 자립적인 권리의 관습은 부인되고, 영국은 새로운 지주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동시에 여태까지 자급자족적 이었던 인도의 농촌에는 투기적인
상인이나 부재지주가 속출하는 한편 엄격한 지세 징수와 차금의 저당으로써 토지를 분할,
매도하는 일이 성행하여 토지소유의 영세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p30
  그런데 이런 영대차지제도(즉 자민다리제) 아래서는 지세는 고정되어 증액할 수가 없었으므로
영국인에게는 불리하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다. 그래서 인도의 다른 지방에서는 새로운
토지제도를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일정 기간에 한해서 지주로 인정하고 경우에 따라 지세의
증액도 행해지는 제도였다. 그리고 촌락공동체적 구성이 지방에서는 직접 소농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자작농소유(라이오트와리제)가 설정되었다. 그 방식은 어떻든, 그 결과 이른바
근대적 토지소유(지세징수) 제도가 강제로 도입되게 된 인도 농촌사회는 그 관습적
신분기관, 지주보유, 자치제의 전통적 제도가 은 타격을 입는 동시에 폐쇄적인 촌락사회가
자본주의 앞에 개방당하게 되고 말았다.
  한편 영국에 의해서 창출된 지주, 즉 자민다리(zamindari: 회교도 지주)와
타르쿠다르(tarqudar: 힌두교도 지주)는 봉건적인 공납과 부역을 농민에게 부과하여, 농민의
토지 생산물의 50퍼센트 또는 60퍼센트가 그들 지주 또는 정부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영국은
전통적인 경제제도를 파괴하면서 봉건적인 지주를 창출, 옹호하고, 자본주의를 인도에
도입하면서도 근대 공업의 발달은 극력 저지했다. 즉 영국은 한편으로는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노동력을 흡수할 공업의 발달을 억제했다. 실로
동인도회사는 영국 상품과 경쟁할 공업제품에는 국내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영국 상품과
대항할 수 없게 하고, 또한 영국 정부도 인도의 공업제품에 대해서 금지적인 수입관세를
부과하였다. 이 때문에 인도의 산업자본은 그 발달이 저해되어 인도는 1820년대에
공업제품의 수출국에서 수입 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인도의 농촌에는 공업의
저해로 인한 도시에서의 인구역류도 있고 하여, 가난한 농민들이 넘쳐 토지소유의 명세화가
촉진되는 동시에 영국과 결탁한 지주나 고리대금업자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소작인이
아니면 농노적인 농업노동자로 되는 자가 늘어 농업생산력이 저하되었다. 또한 영국은
예로부터 아시아의 군주의 중요 임무였던 관개시설의 신설, 유지를 전적으로 무시했으므로,
인도와 생활의 파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기근의 빈도와 그 재해의 정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증대해 갔다.
  * : 1769년에서 1800년 사이에는 대기근이 4회, 1802년에서 1838년 사이에는 12회,
1854년에서 1908년 사이에는 35회나 되었다. 그리고 1891년에서 1900년 사이의 10년간에는
무려 1, 900만 명이 아사했다.
 @p31
  이렇듯 산업자본이 우세해 짐에 따라 인도의 경제는 식민지적 상품, 원료 시장으로 재편성
당하게 되었거니와 이는 공공연한 약탈보다도 오히려 실제로는 훨씬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
합법적인 수탈방식이었다. 영국의 인도 정복이 완성에 가까워지던 때요, 또한 산업자본이
영국에서 패권을 확립하던 무렵인 19세기 중엽에는 영국의 인도 지배도 그 모순이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구매력의 감소로 인하여 영국 상품의 수입액은 격감되는 한편 인도인의
저항은 증대하여 인도의 재정은 파탄되고 말았다. 이를 구출하는 동시에 산업자본의 상품,
원료시장의 확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복전쟁과 영토연합정책이 강력히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856년까지에는 전체 면적의 약 60퍼센트, 전체 인구의 약 70퍼센트는
동인도회사의 직할령으로서 직접 영국의 영토가 되고, 나머지 지역은 대소 500여의 번왕국으로서,
조약에 따라 영국의 종주권 밑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 이 정복전쟁은 그 전비가 인도인의
부담으로, 세포이 (Sepoy)라고 불리는 인도인 용병을 주로 고용함으로써 단행되었지만, 그 정복의
완성과 정복 후의 주민의 곤경은 세포이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세포이의 반란 전후에는 인도 사회의 각층 즉 영지를 잃은 구번왕, 기타의 구지배자를
비롯하여, 부당한 대우에 고민하던 지식인, 정복전쟁이 끝나자 대우가 나빠진 세포이,
실직한 수공업자, 영국이 도입한 토지제도 때문에 고생하던 농민 등 영국인 지배자의
앞잡이로 되어 있던 일부의 계층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계층에 속하는 사랑들간의 불만이
충만되고 있었다. 각처에서 농민폭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p32
  이런 불만이 점차 응집하여, 세포이에게 종교적 계율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명령(*)을
내렸다는 극히 사소한 자극으로 전인도의 3분의 2를 정분 세포이의 반란이 폭발했다.
  * : 1857년 초부터 새 탄약통에 이슬람교도가 싫어하는 돼지기름과 힌두교도가
신성시하는 소의 기름을 발라서 세포이에게 사용케 했다.
  1857년 5월 10일, 미루트의 세포이 3개 연대가 봉기하여 영국인 사관을 죽이고 병사를
태우고 정치범을 석방하고는 델리로 진군했다. 미루트의 시민과 델리의 군대 및 시민도
이에 합류했는데, 이때 그들이 옹립하는 이는 무갈황제였다. 당시 유폐의 몸이었던
무갈황제는 무갈제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힌두교도, 이슬람교도의 구별 없이 모두 단결하여
영국인을 축출하라고 호소했다. 반란은 곧 서북주의 펀잡, 아우드, 라지푸타나, 봄베이,
하이데라바드에 까지 파급됐다. 그러나 이 반란도 본국의 원군과 구르카 및 시크, 그리고
일부 번왕과 대지주의 후원을 얻은 영국 신예 군대의 무자비한 반격으로 마침내 1859년
7월에는 완전히 진압당하고 말았다.
  이 반란이 실패한 이유로서는, #1 자본주의의 미발달로 인하여 중산계급이 성장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 반란은 봉건적 지배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말하자면 본능적인
배외반란이었고, 반란을 통일적, 조직적으로 지도할 짜여진 지도세력이 없었다는 점,
#2 지도권을 장악한 봉건적 지배자에게는 국민을 분기시킬 이상도 정책도 업었고, 그
지배자층과 농민 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이 반란도중에 표면화하여 나중에는 그들 지배자가
영국의 회유에 넘어갔다는 점, #3 영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강성하던 시기인데다가
국제정세가 19세기 중 영국에게 가장 유리하던 때였는 데 반하여, 인도의 민족운동에는
이를 원조할 국제세력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Discovery, p.279)
 @p33
  요컨대 이 반란은 불리한 국제정세하에서 일어난 본질적으로 봉건적인 봉기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단순한 봉건적인 정치운동과는 달라 인종, 종교, 카스트 등의 구별 없이 광범한
계층을 동원하여 공통의 정복자를 축출한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규합시킨 최초의
반영반란이었다는 점에서 인도의 해방운동사상 극히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이 반란은
영국의 조야를 진감시켜, 그 후의 인도 통치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동시에, 이
반란에서 나타난 인도 민중의 용기와 영국의 잔학한 토벌의 기억은 그 후의 인도해방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반란은 또한 영국의 세계정책을 근본적으로
동요시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영국령화를 간접적으로 방지하는 구실도 했던 것이다.
  세포이의 반란 후, 영국인은 인도를 정부의 직접통치하에 두고, 통치기구의 정비와 군대 및
경찰의 재편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지배력의 강화를 꾀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인도 지배의
수법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런 수법은 2차대전 후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1) 영국 지배와 밀착하는 특권계급 및 새 계급의 창출과 보호
 #1 번왕-영국은 번왕을 점진적으로 배제하여 영국의 직접 통치를 확립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으나 세포이의 반란은 그런 정책을 일변시켰다. 왜냐하면 이미 영지를 빼앗긴
예전의 번왕들은 반란에 적극 참가한 데 반하여, 아직 번왕으로 남아 있는 이들은 반란에
가담하기를 꺼리거나 혹은 영국측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원조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
을 통해서 영국은 그들 번왕으로 하여금 민중을 통제케 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점을
발견했으므로 그들은 그대로 존치하고 배후에서 조종하기로 했다.
 #2 지주-토지제도를 설정함으로써 유럽식 지주를 영국이 창출했다함은 전술한 바이다. 그들
지주 중에는 반란에 참가한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충성과 봉사'를 조건으로 다시 지주의 지위를 회복케 하여 그들을 계속
영국 지배의 지주의 하나로 삼았다.
 @p34
 #3 관리-번왕과 지주는 이렇게 해서 온존된 기본적인 특권층이거나, 이제는 영국 지배화
보다 밀착된 새로운 계층인 대규모의 인도인 관리층이 창출되게 되었다. 이전에는 인도인의
고용은 부득이한 경우 이외에는 회피되었지만, 반란의 경험을 통해서 그들 인도인은 영국의
통치에 의존하는 분자이기 때문에 신용할 수 있고, 영국 지배의 대행인으로서 대우 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래서 이른바, '인도 통치의 인도화'라는 행정개혁의 단행을 보게
되었다. 이에 새 교육을 받은 인도인이 하급관리로서 정부기관에 등용되었다. 그들은 대체로
영국 권력에는 아부하고 인도 민중에게는 존대한 중간적 매개자의 역할을 했지만, 관리로
취직한다는 희망과 예상이, 달리 취직할 길이 열려 있지 않던 많은 인도 지식인에게 널리
영향을 미쳐 도의를 타락시켰다. 요컨대 새로운 관리층의 창출은 식민지지배를 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되었다.
  (2) 분할통치정책의 강화
  세포이 반란의 경험은 영국 식민지통치상의 원칙인 분할통치의 효용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므로 영국은 카스트, 종교, 인종의 차이를 지나치게 존중하고, 특히 위에서 말한 번왕과
지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한편, 신관리에는 주로 힌두교도 (세포이 반란의 직접 목표가
무갈왕조의 복위에 있었으므로)를 등용함으로써 통일적인 반영세력의 결집을 막았고,
19세기 말부터는 반대로 회교도를 옹호하여 회교, 힌두교 양교도 사이의 대립을 조장시켰다.
이렇듯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봉건성 내지 후진성을 온존,
이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질세력 사이에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여 민족주의적인 역량을
약화시켰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수법을 통해서 영국은 자기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반면에 인도의 민족적
역량을 약화시킴으로써 인도 지배의 목적인 상품 (또는 투자), 원료시장화를 계속
추구했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정책으로 요약된다.
 @p35
  (1) 근대 공업발전의 방해. 영국 공업의 경쟁자로 될 인도의 근대공업의 발전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저지되었는데, 이에는 자유주의의 원칙이 원용되어, 요람기의 인도 공업은
아무런 국가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자유방임되었다. 실로 인도는 1882년에서 1894년까지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전한 자유무역을 채택했다. 그리고 철도부설과 그 운영도 인도
공업의 발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군사상 및 무역상의 편의라는 관점에서만 행해지고, 폐제도
언제나 인도 자본의 요망을 무시하고 정해졌다.
  (2) 원료기지화의 촉진. 관개, 수리공사는 원료생산지에서만 행해졌다. 그 결과 인도는
수출용 농작물에 의존하는 농업국으로 되고, 농민은 봉건적 착취와 아울러 세계시장의
변동에도 알몸을 드러내게 되고 말았다.
  한편 영국은 대외적으로는 인도 방위를 위하여 국경을 확대시켜나갔다. 즉 1860년부터
버마의 각 종족을 토벌하고, 1866년에는 부탄 지역을 보호국으로 하고, 1873년경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신강성까지를 그 세력 범위에 넣었다.
  3) 중산계급의 성장과 민족운동의 전개
  이상과 같은 영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현상을 타파하려는 강력한 새 세력이 나타나고,
새로운 사회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국 지배하의 인도의 정치적 통일, 유럽과의 접촉,
기술의 진보, 그리고 다 같이 피정복자라는 불행 등은 새로운 사조를 낳아 점차 근대적인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민족의 자유를 추구하는 새 운동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1844년의 철도부설은 인도에서 근대공업 시대의 도래를 의미했다. 이 철도의
부설과 철도에서의 수요때문에 인도의 탄광개발이 성행되고, 이어 아삼의 차, 벵골의 주트
등의 농장농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1860년에는 여태까지 수입기계에 부과되던 관세가
폐지되어, 대규모의 주트 공업이 주로 영국 자본에 의해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
말에, 영국 자본의 독점화가 진행되어 국내자본이 과잉상태에 빠지게 되자,
 @p36
  인도의 저렴한 노동력과 광대한 시장은 영국 자본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인에 의한
기업의 중대에 따라 많은 애로에도 불구하고 인도인의 기업도 증가했다. 생각해보면, 발달한
수공업적 기술과 능한 상업술의 전통(*) 을 자랑하는 이 인도에 철도와 근대공업이
들어온 이상 근대적인 상공업이 발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인도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는 고도로 발달한 수공업국므로, 그 제품을 유럽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널리 수출하고 있었다. 인도의 금융제도도 전국을 통해서 잘 조직되어
있어서 대업자와 대금업자가 발행한 수표는 인도는 물론이요, 이란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각처에서 통용되고 있었다. 상인자본도 발달하여 대리점, 청부업자와 중개인 등 잘 정비된
조직망도 있었다. 조선업도 발달하여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어떤 제독의 기선은
인도에서 인도인 업자의 손으로 건조된 것이었다. 인도는 공업상으로도 상업상으로도 또한
금융상으로도 산업혁명 이전의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은 진보된 나라였다.
  그리하여 1890년에는 인도는 50여 개의 방적공장과 많은 무역기업, 그리고 약간의 소규모
공업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 정부측의 방해는 여전히 계속되어 인도산 면제품에
대해서는 인도 국내에서까지도 랭카셔 섬유제품과의 경쟁을 막기 위하여 국내소비세를
부과하였다. 이 때문에 인도에서의 공업의 발달은 너무나 완만하여 진보의 인상은
주었을지언정 대중의 빈곤과 토지의 부담과중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무수한 실업자와 반실업자 중에서 공업에 흡수된 수는 20, 30만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도 대중의 빈곤은 날로 더해갔다. 농민은 지주와 고리대금업자에게 예속하는 극
빈농으로 전락하여 기근으로 아사자가 격증했다. 실로 세포이의 반란 직후인 1860년에서
1880년에 이르는 동안은 각처에서 농민반란이 이리를 물고 일어난, 말하자면 농민반란의
시기였다. 그런가 차면 새로 발생한 공장노동자의 상태도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궁핍한
농촌에는 산업예비군이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그들 노동자는 보잘것없는 저임금과 장시간노동,
청부제에 의한 중간착취, 압도적인 소년, 부인노동자 사용 등 최악의 노동조건 밑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p37
  이와 같은 실업자 빈곤이 인도의 노동인구로 하여금 굴욕적인 조건을 무릅쓰고 여러
외국에 대규모적으로 이주케 했는데, 그들은 남아프리카와 피지, 트리니다드, 자메이카,
실론, 버마, 말라야 등지를 향하여 이민의 길을 떠났다. 인도의 대중은 이처럼 절망적인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으나, 새 사태하에서 대두한 상공업자는 정치상의 개혁과 투자의
기회를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제 인도의 민족운동은 그들의 지도하에 통일적,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인도 자본가계급은 그들의 이익에 가장
직접적인 장해로 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식민지 지배권력임을 그 공업발전 저지정책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자본가 및 지주 출신인 지식층도 영국인에
의한 차별대우, 문관임용 제한 등으로 인하여 불평,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이러한 신흥중산계급의 반영감정은 우선 초기에는 문연, 종교 운동으로 나타났다. 유럽
문화의 충격은 일찌기 19세기 초엽부터 침체할 대로 침체해 있던 인도의 문화, 사상계에도
새로운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 유럽 문화에 대한 수용적인 경향과
반발적인 경향의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세포이의 반란 후 과거를 회고함으로써
위안을 얻고 자신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문화면에서는 인도 고전의 부활이
성행했다. 종교면에서도 아르야 사마지 같은 복고적인 종교단체가 생겨나고, 또한 보다
근대화된 사상을 가졌던 라마 크리시나와 비베카난다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전자는
힌두교의 순화와 그 우월성을 주장했고, 후자는 힌두교를 개혁함으로써 전통문화 특히
힌두교의 유산을 정화하여 고대의 위대성을 되찾아 이를 근대적인 요소와 융합시키려고
애썼다. 이러나저러나 이 양자는 다 같이 유럽 문명에 혼을 팔고 있는 인도인들에게 그들
자신을 재발견케 하여 민족적 자주정신을 회복시키려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신흥중산계급의 광범한 호응을 얻어 민족정신을 앙양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 : 람 모한 로이가 설립한 브라흐마 사마지는 기독교 또는 서구의 합리주의를
도입하여 인도의 종교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슬람의 와하브파와 힌두의 다르마 사바는
기독교에 대항해서 고대의 종교를 부활하고자 했다. 또한 영국에 의한 유럽 문화의 도입과
영어의 보급에 있어서 이를 자진해서 도입하여 인도의 근대화를 꾀하고자 하는 경향과 인도
고전의 부활, 토착어의 보급에 의해서 이에 대항코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p38
  민족정신이 앙양되자 자본가, 특히 구미문화의 세례를 받은 지식층은 영국의 인도 통치의
융합화를 꾀하는 동시에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정치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인도인연맹 (1876), 인도인협회 (1883)를 비롯한 몇 개의 정치단체가 이렇게 결성되었는데,
이런 단체들은 서로 협력하여 1883년에는 인도 국민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세포이의 반란 후 또다시 인도의 정치, 사상, 사회 등의 각 방면에서 현저하게 나타난
'일종의 발효상태'에 주목한 정부는 국제정세도 불안한 터라 그것에 출구를 마련해줄
필요를 느꼈으므로 영국인 흄과 인도인 바네르지 등의 협력하에서 정치단체의 대동단결을
꾀하게 하였다. 즉 1885년에 개최된 인도 국민회의가 그것인데, 이것이 곧 오늘의
국민회의파의 창시이다.
  이상의 결성동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회의파는 영국측에서 보면 중산계급의 대두에
따르는 인도의 민족주의적 움직임에 대한 유화요, 인도측에서 보면 인도의 지위향상을
꾀하기 위한 대영협조라는 타협적 의도에서 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성대회는 "영, 인
관계에 대해서는 인도에게 불공정하고 유해한 상태를 시정하여 영, 인 양국 관계를
긴밀화한다"는 것을 강령의 하나로 채택하였다.
  회의파의 이와 같은 온건한 성격은 결성에 참가한 각계 대표의 계층별 구성비율 (상공자본
및 고리대자본 대표 25퍼센트, 지주대표 25퍼센트, 지식인 대표 50퍼센트)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결성 이래 20세기 초에 걸쳐 회의파가 정부에 제출한 요구는 국가기관에의
인도인의 등용, 대의정치의 점차적 채용, 민족자본 육성을 위한 보호관세의 설정 등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회의파는 대영협조단체로서 출발했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은 규모와
조직면에서 인도에는 선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점차 구성원을 확충하여 정당적 조직으로
변모하는 동시에, 단순한 대영헙조 단체적인 성격을 서서히 지양하고, 인도 민족운동의 중추로서
활약하게 된다.
 @p39
  회의파로 하여금 협조단체적 성격 이외에 민족정당적 성격도 지니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는
1896년의 북인도의 대기근과 이에 뒤이은 봄베이주 푸나 시에서의 선페스트의 유행이었다.
이 두 사건은 영국 통치의 냉혹성과 인도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을 단적으로 드러내어,
일종의 정치적 안전판의 구실밖에 못하는 회의파에 만족치 못하고, 그것을 민족주의적
정당으로 이 끌어가려는 움직임이 회의파 안에서 일어나게 했다. 이런 급진적인 움직임은
후의 벵골 분할반대투쟁시에는 과격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중산계급의 지도하에 최초로 전개된 전국적 민족운동이었던 벵골 분할반대투쟁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영국 독점자본의 수탈에 반항하는 것이었다. 산업자본이 금융독점자본으로
발전하여 상품수출 중심에서 자본수출 중심으로 전환되는 반면, 열강간의 경쟁으로 인하여
제국내 무역이 중대한 의의를 지니게 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인도는
영국에게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즉 인도는 영국에게는 무진장의 부의
보고이며,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상품시장 및 원료산지인 동시에 과잉자본의
투자시장인데다가 군사상의 쟁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영국은 안으로는 강, 온 양수단을
병용하여 확고하게 인도를 장악하고, 밖으로는 인도의 방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일련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하게 되었다.
 @p40
  19세기 말엽 인도 내부가 동요하고 있을 무렵에, 러시아와 프랑스의 세력이 점차 인도를
엿보게 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인도의 국경확대 정책을 또다시 채택하였다. 그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의 내정에 간섭하여 제 3차 아프간 전쟁 (1878-80)을 일으키고, 파미르 고원에
진출하여 러시아군과 충돌하고(1891-95), 버마에 도전하여 제 3차 버마 전쟁을
일으키고(1885-90), 태국의 영토를 다투어 프랑스와 대립하였다(1893-1902).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으로 되고, 파미르 고원은 분할되고, 버마는 인도제국령에
편입되고, 태국은 불령 인도차이나와의 완충국으로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국경확대정책은
인도를 기지로 하여 인도인의 부담에 의해서 감행되었다. 동시에 영국은 인도양과 인도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집트 및 수단(1882-83), 소마릴랜드(1884), 케냐(1888), 잔지바르(1891),
말라야(1874-1909) 등을 차례차례로 침략했다. 그 결과 인도양은 영국의 내해로 화했지만, 이런
정복도 모두 인도 정부의 감독하에 인도인의 부담에 의해서 단행되었다.
  그리고 인도를 안으로 더 확고하게 장악하려는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20세기의 초대
총독 카존 경(1899-1905재임)의 시대에 가장 노골적으로 강행되었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광산법을 개정하여 인도의 광물자원을 영국 자본에 개방하고, 루피 화를 파운드 화에
결부시켜 영국자본의 도입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어 군사, 경찰 기구를 확충하고,
검열제도를 편데다가 캘커타 시회를 해산하고, 인도 관리를 추방하고, 교육의 문호를 좁힌
이외에도 직접세를 인상하고 간접세를 증수하고, 공채를 남발하고, 기근을 역이용하여
임금을 인하하고, 공공사업비를 삭감하고, 토지의 수탈을 공인하는 등 난폭한 행동으로
나왔다. 또한 밖으로는 반란을 일으킨 서북 국경의 바탄 족을 잔인하게 토벌하고(1903),
티베트에 침입하여 달라이 라마에게 일방적인 조약을 강요하였다(1904).
  카존의 이와 같은 제국주의 정책은 자연 인도 민족의 반발을 샀지만, 그런 반영감정을
비등점에 까지 끓어오르게 한 것은 벵골의 분할 계획이었다. 1905년 카존은 힌두교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지조를 증수하기 위하여 벵골 주의 분할 계획을 세웠다. 즉 동부 벵골과
아삼을 서부 벵골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정부는 전자의 지역의 영구 자민다리제를 잠정제로 바꾸어
세입의 증가를 꾀하는 동시에 동부 벵골에 많이 사는 회교도 농민을 힌두 지주로부터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두 교도 사이의 이간을 꾀으로써 힌두교도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이에 이 해
8월에는 캘커타에서 분할 반대의 반영집회가 열리고 10만의 민중을 모아 영국 상품의 보이코트를
선언했지만,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0월에는 분할령이 공포되고 말았다. 때마침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와 1905년의 러시아혁명에 크게 자극받아 이 분할반대운동은 영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p41
  이때 사용된 주요 대항 수단은 영국 화폐 보이코트였다. 이는 인도 민족자본가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회의파도 1905년의 대회에서 이 보이코트를 지지하고, 이어 1906년의
대회에서는 보이코트 이외에 스와라지 (자치), 스와데시 (국산품 애용), 국민교육 진흥이라는
4대 목표를 내세우고 적극적으로 반영운동의 지도에 나섰다. 그러나 이 운동이 노동자,
농민도 사로잡아 급진적 성격을 띠게 되자, 민토 총독의 통치법 개정의 약속을 에워싸고
회의파는 스와라지를 영 제국내에서 자치령으로서의 지위 획득이라고 해석하는 온건파와
완전독립이라고 이해하는 급진파로 분열되었다. 이 두 파는 드디어 1907년의
회의파대회에서 충돌했다. 고칼레를 지도자로 하는 다수파인 온건파는 반영운동을 중지하고
합헌적인 방법으로 제국내에서의 자치를 획득하기로 목표를 바꾸었다.(*) 이에 급진파는
회의파에서 탈퇴하여 많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개인적 테러 행위에 호소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으나, 정부의 가혹한 탄압 아래 1908년을 고비로 하여 그 테러 행위도
1911년에는 종식되고 말았다.
  * : 대회출석자 1, 600명 중 900명이 별도로 회합해서 (회장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나
회의를 진행시킬 수 없었으므로) 온건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네루는 표면상으로는
온건파가 승리를 거둔 듯하나, 그 승리는 조직에 의한 통제와 당시의 회의파의 극히 제한된
선거자격의 덕택으로 얻어진 것이며,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도인의 대다수는
급진파에 동조하고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Discovery, p.306).
 @p42
  이 시기의 반영운동의 특징은 자본가와 지식층에 의한 조직적인 지도가 개시되었다는 점과
노동자도 정치투쟁에 참가했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그들 자신의 확고한 조직은 갖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정치적 파업(*)을 단행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했는데, 이들
노동자와 농민의 지도는 주로 급진파가 담당했다. 틸라크를 지도자로 하는 급진파는 소시민
지식층을 기반으로 하는 국수주의자였다. 틸라크는 일찍이 1896년의 회의파대회에서
"회의파여, 좀더 용기를 가지라"고 외치던 대담하고 공격적인 새로운 형의 지도자였다. 그는
또한 탁월한 베다학자로 고대 인도의 풍습에 열렬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틸라크를 지도자로 하는 급진파는 배외적인 애국심을 일반 대중에게 고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 1906년에는 동 벵골 철도의 노동자가 분할반대의 파업을 단행했고, 1907년에는
펀잡의 농민이 증세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펀잡 철도국의 노동자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수송을 거부하는 파업을, 이어 1908년에는 틸라크의 투옥항의 파업을
단행했다.
  이에 비하면, 온건파는 지식인이나 직능대표자로서의 엘리트의식이 비교적 강했고, 그
대표자 고칼레는 낡은 형의 지도자로서 "총독에는 민중의 요망을 전하고, 회의파에게는
정부의 난처한 입장을 설명하는"역할을 담당했다. 고칼레는 정부와 협조하면서 현존제도를
개량하려 했고, 틸라크는 정부와 싸우면서 현 제도를 새로 만들려고 했다. 이처럼
투쟁방식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은 다 같이 일평생을 조국에 바친 제
1급의 애국자였다. 그러나 고칼레를 중심으로 하던 온건파는 대중과 직결되지 못했고,
틸라크를 중심으로 하던 급진파는 지나치게 국수주의를 앙양하는 데 그쳐, 민중의
조직화라는 근대적 정치운동의 원칙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인도의 민족운동은 이 벵골 분할 반대투쟁을 통해서 크게 성장했다.
 @p43
  그간 정부는 틸라크를 비롯한 수십 명의 급진파 지도자를 체포하여 반영운동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분할통치의 원칙을 적용하여 인도인의 상층, 특히
자본가계급을 회유했다. #1 1909년의 몰레이-민토개혁. 총독의 연정참사회에 인도인 대표를
참여케 하고, 중앙 및 지방의 입법참사회의 민선의원을 증원했다. 그러나 유권자의 수는
아직도 전인도 인구 3억 중에서 수천 명에 불과했다. #2 1911년의 델리 천도와 벵골 분할법
폐지. #3 카존경 시대에 금지된 주산업부의 설치 허가.
  이 때문에 온건파만 남은 회의파는 현저하게 정부에 협조적으로 되었다. 한편 영국은
이번의 반영운동을 계기로 분할통치 정책의 하나로 회교도 옹호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회교도들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중산계급(*)이 성장해 있지 못했기 때문에,
19세기 말부터 인도 민족운동은 주로 힌두교도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은 세포이의 반란 후의 대회교도정책, 즉 이 반란이 무갈제국의 부활을 직접
목표로 삼았으므로 힌두교도보다도 회교도를 더 가혹하게 탄압하던 정책을 버리고,
1870년대부터는 점차 회교도를 옹호하는 방향을 취해 왔지만, 특히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회교도를 옹호하기로 했다.
  * : 회교도들은 일반적으로 극히 보수적이며 반영적이어서 오랫동안 영어교육을
기피한데다가, 봉건적인 사고방식과 고리대금 이자에 대한 회교의 금령 때문에 상공업에도
거의 종사하지 않았다. 더구나 세포이의 반란 후 회교도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힌두교도에
대해서 보다도 더 강경하고 주도하여, 특히 회교도간에 중산계급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던 것이 1870년대에는 대회교도정책이 서서히 변하여 보다 호의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는 물론 영국의 분할통치정책 내지 균형정책 때문이었지만, 이
전환과정에는 역시 서 사이드 아흐마드 한의 역할도 컸었다. 그는 회교도의 지위향상은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회교도간에 영어교육을 받아들이도록
하여 그들을 보수적 구각에서 탈각시키려고 무척 애썼다.
 @p44
  그 결과 우선 1906년 말에는 대귀족 아가 한을 지도자로 하는 회교도연맹을 결성케
했는데, 이 연맹은 회의파와는 달라서 종파의 이익을 내세우고 있었고, 그 주요 구성원은
회교도 지주와 자본가였다. 그런데 대다수의 회교도는 가난한 사람들이며, 또한 회교도의
자본가는 그 수가 적었으므로, 이 연맹내에서의 지주세력은 회의파보다도 훨씬 강하여, 이
점이 이 연맹의 대영협조주의의 한 원인으로 되었다. 그리고 상술한 몰레이-민토
개혁에서는 입법참사회 대표 선출의 선거자격의 제한에서 회교도는 현저하게 우대하였을 뿐
아니라, 회교도들에게만 별개의 의석수가 부여되어 종파적 선거제의 기원으로 되었다. 이런
선거제의 도입은 회교도연맹의 창설보다도 인도의 장래 발전에 더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도 국민 사이의 통일과 융합의 과정을 역전 시켜, 점차
사회생활의 전 구조에 어처구니없는 분열을 일으키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델리 천도도,
힌두교도가 많은 캘커타에서 회교도가 많은 델리로 옮겨진 것이었다. 요컨대 영국은 이런
정책으로 회교도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힌두교와의 대립의식을 앙양시켰다.
  4) 1 차대전과 고양기를 앞둔 민족운동
  벵골 분할 반대투쟁에 뒤이은 반영운동은 회유와 탄압으로 일단 진압되었다 하더라도
1차대전 때의 인도는 끝내 평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초기에는 네루의 말처럼
"정국의 움직임은 저조했으나"(Discovery, p.309) 말기에 접어들면서 민중의 정치의식은
점차 고조되어갔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국민의회파와 회교도연맹을 비롯한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은
영국의 전쟁수행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그것은 '제국의 위기'에 처하여 적극
협력해두면, 불원간 영국과 대등한 지위가 부여되리라는 선의의 기대 때문이었다.
 @p45
  그래서 대전 발발과 동시에 30만의 인도병이 유럽 전선에 파견되고, 그후 80만의 군인과
40만의 군노무자가 아프리카와 중근동지방에 투입 된데다가 전시공채의 인수 등에 의한
군사비 원조도 3억 파운드를 넘었다. 또한 인도는 영국의 중요한 군수품 공급기지로 되어
무기, 탄약 등의 생산에도 응했다. 물론 이렇게 전면적으로 협력한 것은 앞에서 말한 선의의
기대 때문만이 아니라 온건, 급진 양파로의 회의파의 분열로 인한 민족운동의 중추세력의
약화와 전시입법에 의한 강요 탓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시중 인도의 공업은 크게
발달하였다. 군사상의 필요에서 공업에 대한 압박이 완화되어 인도자본에 의한 면공업,
주트공업, 철강공업 등이 발달했지만, 특히 면공업은 현저한 약진을 보였다.
  한편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물가의 앙등, 해외시장의 상실, 가격의 통제 등으로 민생고가
심해 진데다가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선전도 있고 하여 점차 반영풍조가 높아갔다.
  미국에 기지를 둔 인도혁명 당은 호기가 도래했다고 보고, 독일과 결탁하여 인도에 잠입,
각처에서 무력반란을 시도하였다. 범이슬람주의의 영향을 받아오던 회교도들은 영국이
그들이 존중하던 터키의 킬라파(회교 교주로서의 터키 왕의 칭호)와 적대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동요하여, 그들 안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나 해방세력이 강화되었으며, 특히 새로
발흥한 중산계급은 점점 민족주의적 경향을 짙게 띠어갔다. 더구나 1915년의 인도 방위법의
공포 등에 의한 전시체제의 강화는 민족감정을 크게 자극했는데, 펀잡 지방의 반영
테러리즘의 격발은 그 첨예한 표시였다. 이에 영국은 자본가에게 대량의 군수품 발주와
약간의 보호관세의 설정을 통해서 그들을 포섭하려고 했으나 그 결과 실력과 자신을 갖게
된 인도의 자본가는 국내시장을 스스로 확보하고자, 이 불온한 상태를 자치권확대를 위해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1916년에는 두 개의 자치연맹, 즉 하나는 틸라크를, 다른
하나는 영국인이면서도 인도의 자치를 위해 싸우던 안니 베산트 여사를 중심으로 하는
자치연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p46
  이러한 정세하에 이 해 말에는 회의파와 회교도연맹이 라크노에서 동시에 대회를 열고,
베산트 여사의 자치계획안에 의거하는 '자치정부안'을 공동으로 채택하고, 그 실현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또한 이때 회의파대회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
틸라크(1914년 6월, 6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었다)도 회의파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렇듯 전국민이 '자치의 획득'이라는 단일한 목표로 결집되는 것을 보자, 영국은, 인도의
전시협력을 확보하고 또한 불온한 공기에 안전판을 마련하려는 의도하에서 1917년에는
'인도에서의 자치를 점차 확대하여 영제국내에서 자치령의 지위로 점진시킨다'는 몬타규
성명을 냈다. 그 후 인도 군무상인 몬타규는 직접 인도를 방문하고, 첼므스포드 총독과
더불어 1918년 6월 [인도 헌법 개혁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에 의거하여 1919년에는
새로운 인도 통치안이 제정되어, 1920년부터 실시하기로 되었다. 이것이 곧
몬타규-첼므스포드 개혁인데, 이 개혁은 지방자치를 목표로 하고, 이른바 '양두정치 '
(diarchy)를 도입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도 통치의 여러 기능을 중앙과 지방(주)으로 나누어
지금까지 중앙정부가 관장하던 행정사항 중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항, 이를테면 치안관계,
교육, 보건 등을 주정부에 이관하나, 중앙정치에는 인도인이 참여할 여지가 없고,
지방자치에는 인도인이 참여한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지사와 총독이 전권을 장악하는
제도에 불과했다.
  이 개혁의 보고서가 발표되었을 때, 그것은 일반 대중의 여론과는 물론이요, 회의파와
회교도연맹의 견해와도 거리가 먼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보고에 대한 회의파의 태도를
협의하려고 1918년 8훨(29일-9월 1일) 봄베이에서 임시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회의파와 회교도연맹의 '자치정부안'을 재확인하고, 중앙과 지방에 동시에 참된 책임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성명했다.
  한편 대전도 마지막 고비에 접어들자, 일반 대중은 전시생활의 압박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전선에서의 인도병의 회생과 그들에 대한 차별대우의 사실 등도 점차 명백해 짐에 따라 그
정치적 의식이 고양되어갔다.
 @p47
  따라서 그들은 5년 내지 늦어도 10년 안에는 자치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베산트 여사의
주장도 이제는 너무나 점진론이라고 물리칠 정도였으니 몬타규-첼므스포드의 개혁안에는
분격을 금치 못했다.
  1918년 11월 11일 1차대전은 끝났다. 몬타규 성명은, 요컨대 전시 비상사태하에서 인도인의
저항을 가능한 한 무마하려는 전술적 배려에서 나온 것에 불과했으므로, 그 약속이행은
몬타규-겔므스포드 개혁 정도로 그치고, 영국은 종전과 더불어 급격한 역공세로 나왔다. 즉
정부는 점점 불온해지는 인도 안의 분위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1919년 3월 전시 비상입법의
연장으로서의 를라트법을 공포하고 이어 4월에는 아무리차르시의 잘리안왈라 공원에서
를라트법에 반대하는 평화적인 군중집회에 발포하여 대량학살을 감행하고는 펀잡 주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러한 강압정책하에서 인도 민중은 절망상태에 빠졌다 함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그대로이다. 그들은 너무나 큰 실망 속에서 기진맥진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눈으로 볼 때 그렇지, 긴 눈으로 보면 점차 높아가던 인도 민족운동의
물결이 재차의 고양을 앞두고 잠시 가라앉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서 조직하고 지도한 독자적인 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인도에 돌아와,
앞으로의 투쟁을 위한 준비를 갖추고 마침내 1919년 롤라트법 반대투쟁을 계기로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전국적인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때는 이미 인도의
중산계급이 회의파에 속하건 회교도연맹에 속하건 또는 온건파에 속하건 급진파에 속하건
한결같이 자치의 획득이라는 단일한 목표 아래 결집하고 있었다. 하기는 그들이 대중 특히
인도 민중의 최대 다수인 농민층을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동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인도의
현실과 밀착해 있던 간디의 등장을 계기로 회의파는 대중정당으로 되는 동시에 종래의
논의를 일삼던 당에서 실천과 행동의 당으로 변해갔다. 간디가 민족운동을 지도한 독특한
방식은 사티아, 아힌사라는 특이한 사상에 입각하는 비폭력, 불복종, 비협력운동이었다. 그러면
간디의 그러한 사상은 과연 무엇이며 그런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p49
    제 2장 간디의 반생
  간디는 철두철미한 실천적인 인간이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인도인의 복지향상을 위해
그는 한시라도 실천활동을 그만둔 일이 없었다. 그와 같은 실천활동은 간디가 진리 내지
사랑 (또는 비폭력)의 법이라고 부르던 도덕률에 일관해서 의거하였고, 그런 도덕률은 그의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간디는 "본질적으로 종교인"(Discovery, p.315)이며 그의 "인생철학의 핵심은 종교"(S. Abid
Husain, The Way of Gandhi and Nehru.앞으로는 Husain으로 약기함. p.1)였다. 그러나
그의 종교는 인습적이거나 전통적인 것은 아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개인적
탐구와 직접적인 정신적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즉 고는 종교적 유산을 전해오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이성과 실천으로 검증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신적,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서 재해석하였다. 그 결과 그는 "종교의 본질은 도덕"(Mohandas K.Gandhi,
An Autobiography : The Story of My Experiment with Truth. 앞으로는 Autobiography로
약기함. p. 13)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간디에게서는 종교와 도덕은 서로 방향을 달리 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그의 실천활동을 밑받침해주고 있는 만큼, 그는 개인이나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언제나
종교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실제로는 "간디주의의 진수는 진리와 비폭력이라는 윤리적
원리(곧 도덕률)를 사회의 일상문제에 적용시키는 데에 있다"고 논해지는 것이다.
 @p50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여 그의 윤리적 원리 즉 종교적 및 도덕적 이념은 무엇이며
그러한 이념에서 나온 사회적 이상은 무엇일까? 그런 이념과 이상은 그가 "진리와 함께 한
나의 실험"이라고 부른 그의 생애를 통해서 성장, 발전하였다. 따라서 먼저 그의 생애를
훑어봐야 하지만, 그 기본적인 윤곽은 남아프리카 시절까지에는 대체로 확정되고 있으므로
우선 그의 반생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 학창시절
  1) 평범한 소년
  모한다스 카라므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현 구자라트 주의 카티아와르 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해안도시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카라므찬드 간디는
상처를 거듭하여 네 번 결혼했는데, 그 네 번째의 처인 파틀리바이와의 사이의 3남 1녀 중
간디는 그 막내동이였다.
  간디가 태어난 시기는 대체로 세포이의 반란(1857)과 국민회의파의 창립 (1885)과의
중간이며, 인도에서도 점차 새로운 중산계급이 발생하여 그들에 의한 종교적, 사회적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정치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하려는 무렵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방으로
말하면, 당시 카티아와르 번왕국은 수많은 소면왕국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런 나라들은
영국인 앞에서는 굽실거리면서도, 자기 백성들에게는 마치 전제군주와도 같이 대하던
번왕(raja 또는 rana)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포르반다르도 그런 나라들
중의 하나로 그 인구는 1872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7만 2, 077명(Louis Fischer,
Gandhi: His Life and Message for the World. 앞으로는 Fischer로 약기함. p.9)에 불과한
조그마한 나라였다. 원래 괴티아와르인들은 발랄하고 예기에 찬 활동적인 사람들로 가끔
내란도 일으키곤 했지만, 실제적이며 상재가 있어서 일찍부터 여러 외국과 통상을 하여
이름을 떨친 기업심 있는 상인 계급인 마르와리를 낳았고, 또 인도 자본에 의한 근대공업이
최초로 발달한 유일한 곳이 이 구자라트 지방이었다. 이렇게 보면 카티아와르 반도가 근대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간디를 낳은 것은 그저 우연으로만 돌릴 수도 없을 듯하다.
  다음에 간디의 가문을 보면, 간디가는 인도의 카스트상으로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다음가는
바이샤의 일종 바니아에 속해 있었다. 말하자면 상인계급이며, '간디'라는 말은 힌디어로
'곡물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간디 가에서는 간디의 조부도, 부친도, 숙부도
포르반다르 번왕국의 수상(diwan)을 지냈다.
  조부는 몹시 절조가 굳은 사람이어서, 그가 음모에 걸려 포르반다르의 수상 자리를 쫓겨나
주나가드 번왕국에 망명했을 때, 그는 그곳의 번왕(nawab)에게, 왼손으로 인사를 했다. 그
무례함을 따졌을 때, 그는 "오른손은 이미 포르반다르에 바치고 있다" (Autobiography,
p.3)고 말했다고 한다. 부친은 정력적이며 호탕한 기질의 사람이어서, 금전에는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아 거의 모든 재산을 자선사업에 바치고, 가족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양친이 모두 힌두교의 일파인 바이슈나바파에 귀의하고 있었지만, 특히 모친은
경건한 신자여서 종규에 따라 단식을 지키며 시물을 바치고 환자를 돌보았다.
  이와 같이 간디는 인도 중산계급의 대두라는 역사적인 물결을 배후에 가지며, 종교적,
사회적 개혁이라는 형태를 취한 새로운 종교적 각성을 앞에 두고, 모친으로부터 는 경건한
신앙심을, 양친이 귀의하고 있던 바 이슈나바파로부터는 특히 아힌사(*)의 정신을,
부친으로부터 는 재물에 대한 무욕을, (**) 조부로부터는 고결한 성품을, 그리고 바니아
계급인 간디가로부터는 실천적, 활동적 성격을 이어받고 태어났다.
 @p52
  * : 아힌사(ahimsa, 불상해, 비폭력). 인도 종교의 최고의 계율의 하나로, 특히 자이나교,
불교, 그러고 이 바이슈나바파의 힌두교가 이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 아힌사는 간디의
기본사상의 하나이다.
 **: 간디의 기본사상의 하나인 '비소유'(aparigraha)는 이런 부친의 성품으로부터
영향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년시절의 간디는 몹시 수줍어하고, 외모나 재능에서 다른 소년들과 구분
지을만한 이렇다 할 특질도 나타낸 바 없으므로 후년의 그의 위대성의 약속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양친에 대한효심과 의무에의 헌신,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씨와 타인의
결점을 꼬집기를 싫어하는 성품은 젊은 학생시절에도 뚜렷했다. 우리는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숱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위와 같은 그의 성품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7살 때
부친이 라지코트 번왕국의 법관이 되었으므로 그곳에 가서 곧 소학교에 들어가 12살 때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7살 때에는 바브나가르에 있는 사말다스대학에 입학했으며, 한편
같은 나이의 카스투르바이와 7살 때 약혼하고, 고등학교시절인 13살 때에 결혼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몹시 수줍음을 타 학우들과 어울리질 않고, "누가 나를 놀려 대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수업만 마치면 곧장 집에 달려오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맹목의
양친을 인도하며 순례하는 [효자 슈라바나]의 희곡을 읽고, 또 그 연극을 보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 자기도 그러한 효자가 되려고 마음 먹고, 병석에 누워 있는 부친을 간호하기
위해서 방과 후의 체육을 싫어했고, 또한 영국 유학의 길을 떠날 때 술과 고기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모친과의 약속을 끝내 지켰다.
  고등학교 시절 육식은 종교상으로 엄금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구미에도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식을 하면 마음이 대담해지고 몸이 강해져서 능히 영국인을 몰아내고 인도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어린 마음에서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는 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으로
심히 고민하면서도, 애국자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일시나마 남몰래 한 친구와 더불어 육식을
했다.
 @p53
  그리고 이러한 의무감은 새로운 고등교육을 받고자 외국유학을 금하는 자기 카스트로부터
추방까지 당하면서도 영국 유학의 길을 떠나게 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소, 고등학교 시절에 선생이나 학우에게 거짓말을 한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어느 시험 때는 감독선생이 옆학생의 답안을 보고 베끼라고 넌지시 종용했으나,
컨닝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형한테서 꾼 돈을 갚을 길이 없어 형의
금팔찌를 조금깎아 팔아 빛을 갚고는 고민 끝에 부친에게 이를 고백하고 병석의 노부가
분노와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지켜보는 엄한 시련을 겪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끝으로 악우(육식을 같이 하던 그 친구)와 가까이하지 말라는 가족들의 충고를 물리치고,
그의 단점을 시정해주기 위하여 접촉을 계속했고, 또한 컨닝을 종용하던 그 선생은 점차
여러 단점이 눈에 띄었지만, 그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그대로 가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젊은 학생 시절의 그의 언동에서 효심, 의무감, 성실성, 관용의 성품을
찾아볼 수 있으나, 당시에는 누구도 이런 성품에서 그의 장래의 운명을 예측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심령 속에 깊숙이 깃들어 있던 이러한 성품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내용과 범위는 확충 되어갔다. 즉 양친에 대한 효심은 조국 인도에 대한 충성으로 되었고,
의무에의 헌신은 인류에의 봉사에 대한 일관된 헌신으로 되었으며,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씨는 평생을 통한 진리의 탐구로 되었고, 타인의 결점을 꼬집기 싫어하는 성품은 적에
대한 관용과 공정한 태도로 되었다. 맹목의 양친을 인도하며 순례하는 슈라바나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소년 간디는, 성장하여 맹목의 인도 국민을 이끌고 자유를 위한 순례에
나서게 되었다.
 @p54
  2) 마음의 창문이 열리다
  1888년 9월 4일, 그러니까 만 18살 때 간디는 처자를 고국에 두고 단신 봄베이를 떠나 영국에
유학했다. 그때만 왜도 인도에서 영국에 유학하는 데는 공사간에 까다로운 일이 많아 앞서 말한
대로, 모친에게는 육식과 주색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자기 카스트로부터는 추방을
당하고 나서야 유학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런던에 도착한 간디는 얼마 동안 마음이 들떠, 영국식 신사가 되려고, 값진 양복을 마구
맞추어 입고, 댄스와 웅변과 바이얼린을 배운다고 야단하면서 시간과 돈을 낭비했으나, 얼마
안 가서 마음이 가라앉아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면학에 힘썼다. 그는 변호사의 자격을
얻으려고 런던의 이너 템플 법학원에 다녔지만, 3년간에 걸친 이 영국유학은 간디로 하여금
마음의 창문을 열게 하여 그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실로 후년의 간디를 형성하는 그 기초적인 부분이 여기서 얻어졌는데, 사실 그는 영국에서
인도적인 요소, 유럽적인 요소, 인류적인 요소를 스스로 몸에 지니게 되었다.
  우선 그는 새로운 종교적인 접촉을 통하여 접신론자, 기독교인, 무신론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접신론자들은 그에게 인도의 정신적 유산의 가치를 드러내주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런던에서 [바가바드 기타](*)를 독신인 두 접신른자 형제와 더불어
산스크리트어의 원문과 에드윈 아놀드의 번역판(Thesong Celestial)을 대조해 가면서
읽었는데, 기타]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여한 그들 형제의 권유로 에드윈 아놀드의
[아시아의 빛](불타의 전기)을 읽고, 그는 [바가바드 기타] 이상의 흥미를 느꼈다. 이 두 권
이외에도 불라바트스키 부인의 [접신론입문]을 읽고, 이에 자극되어 힌두교에 관한 서적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 : [바가바드 기타] (Bhagavad Gita)는 성범가라고 번역된다. 전투에 임한 왕자
아르주나의 정신적 고뇌를 비시느의 화신 크러슈나가 풀어 준다는 형식으로, 전심전의 신을
믿도록 강조하고 있다. 인도의 2대 서사시 중의 하나인 [마하바라타]의 일부인데, 그것은
독립되어 있어서 그것만으로 완결된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간디에게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34살 였을 무렵, 파탈잘리의[요가 수트라]와 [바가바드
기타]를 같은 그룹의 친구들과 읽기 시작하고 준다. 특히 [기타]는 산스크리트 원문을
읽으려고 애쓰면서 매일 아침, 세면(15분)과 목욕(20분)에 드는 35분의 시간을 이용하여,
맞은편 벽에 매일 [기타]의 1, 2절을 써 붙이고 그것을 계속 암송했다. [기타]는 그에게는
"절대로 틀림없는 행위의 향도자"이며 일상적인 사건에 관한 "나의 사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령 영어 단어를 모를 때 사전을 찾듯이, 온갖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행위의 사전"에 의거했다고 한다(Autobiography, pp.264-65). 그러니까 런던에서는 [기타]를
읽었을 뿐 아직 연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같은 책, p. 67).
 @p55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원래 그는 라지코트에서의
학생시절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힌두교와 그 신들에 마구 욕설을 퍼붓곤 한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런던에서 만난 한 선량한 기독교
신자의 권유에 못 이겨 성서를 읽어보게 되었다. 구약에는 좀처럼 흥미를 가질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또 신약에 나오는 '산상수훈'특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는 구절은 직통으로 자기
마음에 들어왔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간디에게는 '인도의 마음'이 있었으므로, 샤말
바트의 "한 사발의 물에는 좋은 식사로 갚아라"를 상기하였다. 그래서 그는 젊은 마음에서
[바가바드 기타]와 불타, 그리고 산상수훈으로 표시된 그리스도, 이 3자의 가르침을
조화시키려고 하였는데, 우리는 이에서 종교적 진리에 대한 그의 탐구의 첫 모습을 볼 수
있다.
  간디는 무신론에 관한 책도 몇 권 읽었지만, 그들의 견해는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영국에서 무신론의 전형적 대표자요, 급진적 정치가이며, 인도의
우인이었던 잔스브라들로는 크게 존경하게 되었다.
 @p56
  그 이유는 브라들로가 성실한 목적의식과 뜨거운 인류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들로와 같은 무신론자에게는, 진리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신이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Husain, pp.2-3)는 것이 간디의 견해였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확고하게 뿌리 박은 "도덕은 만사의 기초이며, 진리는 모든 도덕의 실질이다"
(Autobiography, p.34)라는 확신은 이 경험으로 더욱 성장하여 그 후 30년간에 걸쳐서
'진리는 신'이라는 그의 도덕종교로 발전했다.
  또한 간디는 칼라일의 [영웅과 영웅숭배]중의 '예언자로서의 영웅'을 읽고, 마호메트의
위대성과 용감성 그리고 근엄한 생활에서 배운 바가 많아 후에 남아프리카에서 코란을 읽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간디는 모친과의 서약을 지키는 이외에 '경제와 위생 '의 관점에서 처음에는
채식주의에 들어갔으나, 솔트의 [채식주의의 변]을 읽고 나서 부터는 자진해서 채식주의자로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보급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게 되었다. 앞서 육식을 '애국자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일시나마 해본 일이 있다고 말했거니와, 그런 생각의 배후에는
개혁자적 기질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무신론자 브라들로를 존경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도 그 이면에는 브라들로의 진보적 사상에 공명한 점도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왜냐하면 간디는 1889년의 런던 항만 파업때, 나라만 헤므찬드라라는 그의 인도인
친구와 함께 마닝 추기경을 방문하여, 추기경이 파업을 도와준 데 대해 축사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급진적인 사상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가 유학하던 당시의
영국에서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사회주의의 물결이 팽배하게 대두하고 있었다. 즉
1887년에는 독립노동당이 창립되었는가 하면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 1권이 같은 해에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1889년에는 [페비안 논문집]이 나왔다. 또한 당시에는 다원의
진화론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잡지에 연재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간디는 그의 개혁자적 기질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인 정치운동에 대해서보다는
채식주의 운동에 더 마음이 끌렸다.
 @p57
  간디는 영국 유학 시절에도 수줍어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여, 남 앞 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여서 앞으로 변호사가 될 일이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인도를 떠날때 소개장을
받아간 다다브하이 나오로지를 방문하여 조언을 들으라는 우인의 권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나오로지는 국민회의파의 온건파에 속하며, 후 (1906)에 회의파 의장도 지냈지만, 당시
런던에서 인도인 학생들과 한 단체를 조직하여 그 뒤를 돌봐주고 있었으므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간디는 그 모임에는 자주 참석했으나 끝내 개인적인 상담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수파이긴 해도 친절하게 인도인 학생들을 돌봐주던 영국인 프레드릭
핀카트에게는 찾아가 상의했다. "보통 정도의 정직과 근면만 있으면 살아나가는 데
충분하다"는 핀카트의 말을 듣고 안심은 했으나, "군은 변호사에게는 필요불가결한 세상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인도의 역사조차 읽고 있지 않다. 변호사는 인간성을 알아야
한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어야 한다" (Autobiography, p.82)는 충고를
받고, 핀카트가 추천한 관상학의 책을 사 읽기도 했다. 우리는 이 점에서 간디의 실제적인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특히 금전문제에는 엄격하여 사소한 지출까지 일일이
출납부에 기입하곤 했는데, 이런 습관이 후일 방대한 공금을 다를 때에도 빈틈없이 할 수
있게 했다.
  이상에서 간디의 영국 유학 시절을 대강 훑어봤다. 우리는 후일의 간디의 성격과 사상의
싹을 이 영국 생활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변호사의 자격을 얻고 1891년 6월 12일,
인도를 향해 영국을 떠났다.
    2. 남아프리카 시절
  1) 생애를 전환시킨 두 충격
  1891년 7월 인도에 돌아온 간디는 라지 코트에서 봄베이로 나와 변호사 개업을 했으나
타고난 수줍음과 꼼꼼한 성격 때문에 변호사업이 시원치 못했다. 그러나 귀국하던 길에
봄베이에서 알게 된 젊은 보석상이요 시인이며 종교가인 레이찬드브하이와는 교우를
지속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p58
  간디는 자서전에서 "현대의 인물 중 세 사람이 나의 생애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즉,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레이찬드브하이, [신의 나라는 그대의 마음
안에 있다]는 책을 통해서 톨스토이, 그리고 띠 마지막 자에게도]를 통해서 러스킨이
그러하다"(Autobiography, p.90)고 쓰고 있다. 봄베이에서는 경비만 많이 들 뿐 변호사의
일을 제대로 얻을 수가 없었으므로, 라지 코트로 다시 돌아가 형의 협력을 얻어 일종의
법률대서 같은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일은 수입이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그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벌어졌다. 그의 형은, 포르반다르의 전 번왕이 태자로 있을 때
그 비서인 동시에 고문이었다. 그 당시에 그릇된 진언을 했다는 혐의로 새삼스레
고소당하여 그 사건의 처리가 형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그곳의 영국인 주재관에게로
넘어가 버렸다. 간디는 형의 간청으로 마음내키지 않으나마 자기가 런던에서 지면이 있는
그 주재관에게 부탁하러 찾아갔으나, 주재관은 간디의 청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하인을
시켜 간디를 사무실에서 내쫓고 말았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 분한 나머지 그 영국인을
고소하려고 했다. 때마침 인도 유수의 변호사인 페로제샤 메타가 우연히 라지 코트에
왔다가 영국인을 고소해 봤자 자기 신세만 망칠 뿐이니 무모한 짓을 하지 말고 세상을 좀더
알아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이 충고를 전해 듣고, "마치 독배를 드는 듯이 괴로웠다"
(Autobiography, p.99)고 간디는 술회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충격은 간디의
인생행로를 전적으로 바꾸게 했다. 라지 코트에서 개업을 계속한다면, 자연 간디의 사건은
대부분 그 주재관의 법정에서 처리해야 하는데, 간디는 그와 화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의
은고를 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더구나 일단 고소한다고 해놓고 가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있던 중에, 여러 소국들로 이루어져 있는 카티아와르국에서는 소소한 음
모와 책략이 부단히 행해지고 있음을 알게 되자 그 분위기가 싫어져서 간디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떠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러던차에, 형의 지인이며 남아프리카에서
크게 사업을 벌이고 있던 포르반다르 출신의 회교도 상사로부터 고문변호사로 와달라는
의뢰가 있었다. 간디는 처자를 두고 혼자서 남아프리카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p59
  1893년에 5월 간디는 나탈의 더반 항에 상륙했다. 이리해서 그의 생애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남아프리카 생활이 시작되었다. 거기서 그의 특이한 사상이 확립되고, 그런
사상에서 나온 독자적인 실천운동의 원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주로 나발에 약 7만 명의 인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대다수는
연기계약의 노동자 및 계약연기를 끝낸 자유노동자이고 나머지는 회교도 상인과 힌두교도
및 파르시 교도의 서기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수의 외국인의 유입은 백인 주민 사이에
외인배척 문제를 야기시켰다. 정부는 아시아인의 이주를 경원하고, 이미 그곳에 정주하고
있던 아시아인도 갖은 수단을 다하여 추방하려 하고 있었는데, 조직적인 박해가 인도인의
생활을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다.
  간디는 상륙 제1보에서부터 인도인의 참상을 목격해야 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비통한 체험을 겪어야만 했다. 위촉받은 소송 사건 때문에 더반에서 프레토리아로 가는
도중, 그는 다만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말할 수 없는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즉 어떤
정거장에서 그는, 유색인은 1등차실에 탈 수 없다고 하여 백인 차장한테 차 밖으로
내쫓기였던 것이다. 이 경험은 간디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다. 남아프리카라 하더라도
고지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등불도 없는 대합실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생각하였다. 권리를 주장하며 싸워야 하나? 인도로 돌아가야 하나? 이 모욕을
참고 프레토리아에 가서 맡은 일을 끝내고 인도로 돌아가야 하나? 의무를 저버리고 인도로
돌아가는 것은 비겁하다! 이런 생각 끝에 그가 받은 모욕은 결국 인종적 편견이라는
뿌리깊은 질환의 한 징후에 지나지 않으니, 온갖 고통을 참으면서 이 질병을 근절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보통사람이라면 개인적인 모욕감에 사로잡혀 당장에
복수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장차의 복수를 계획했을 터이지만, 간디는 개인의 경험을
보편화하는 종교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렇듯 자기가 겪은 개인적 모욕을 전인도인, 아니
전인류의 모욕으로 전환시켰다. 그것은 어떻든간에, 인도의 상류계층으로 태어나 영국 유학
시절에도 잘 대우받던 간디, 비록 고국의 영국인 주재관한테는 모욕당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토록 노골적인 수모는 처음이므로 그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후일 일생을 통해
가장 창조적이었던 경험이 무엇이냐는 존 R.모트 박사의 질문에 대하여, 간디는 특히 이
사건을 들어, 그것이 자기 마음 속에서 사티아그라하(진리 파악)의 이념이 싹트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대답했다 한다(Husain, p.3)
  그러나 실제로 그는 나머지 여로에서 역마차의 백인 차장한테 더 심한 모욕을 당한 끝에
구타까지 당했으나, 간이 뒤집히는 듯한 분노를 꾹 참고 여행을 계속하여 프레토리아에
도착했다.
  2) 귀중한 체험
  "1년간에 걸친 프레토리아 체재는 평생을 통한 가장 가치 있는 체험이었다. 여기서 나는
공공사업이라는 것을 배울 기회를 가졌고, 또한 그것에 대한 나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에 있는 종교정신이 생동하기 시작한 것도 여기서 였고, 변호사업의 참된
지식을 얻은 것도 여기서였다" (Autobiofraphy, p.131)고 간디는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시절을 통해서 간디는 종교적 진리를 계속 추구했다. 특히 이 프레토리아
체재시에는 많은 선량한 기독교인들과의 밀접한 접촉(기독교인들과의 접촉은 후에도
계속되었지만)으로 크게 자극받아 종교 서적을 읽는 데 몰두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산상수훈은 이미 런던 시절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바 있었거니와 이제는 선량한
기독교인들과의 교우로 기독교 자체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기독교의 신앙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 끝내 기독교
신자로는 될 수 없었다(*).
  * : 이런 이유 이외에도 예수가 신의 외아들이라든가 기독교의 신을 ale는 사람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든가 하는 등등은 그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신이 아들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모두 신의 아들이다. 만일 예수가 신과 같다든가 신 자신이라면,
모든 인간이 신과 같든가 신 자신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 죽음과 피로써 세계의
온갖 죄를 속죄했다는 것을 그의 이성은 문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게 했다. 또한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만이 영혼을 가지며, 다른 생물은 영혼이 없고, 죽으면 아주 없어지고 만다고
하지만 이것도 그의 신념과는 배치된다 등등. (Autobiography, p. 136)
 @p61
  그는 예수를 순교자, 회생의 구현자, 신성한 교사로서는 받아들이나 이 세상에 태어난
최고의 완전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십자가 위의 죽음은 위대한 시범이기는 하나,
그런 죽음 속에 그 어떤 신비로운, 또는 기적적인 효능이 깃들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요컨대 기독교는 완전한 또는 세계 최고의 종교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동시에 그는 힌두교도 결코 완전하거나 세계 최고의 종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불가촉천민(*)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또한 [베다]나 기타 힌두 경전이 신의
영감에서 나왔다고도 믿을 수 없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도 코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 :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은 최하층민(pariah) 또는 추방당한 자(outcast), 혹은
하리잔(harijan)이라고도 불린다. 카스트의 최하급 수드라보다도 더 낮은 신분으로, 전적으로
사람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이다. 그수는 5천만 내지 6천만이라고 한다.
  회교도 친구들의 권유로 그는 코란을 사 읽고 큰 감명을 받았으므로 다른 회교에 관한
서적도 구해 읽었다. 그는 종교상의 고민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레이찬드브하이에게 서신을
보냈더니, 좀더 참을성 있게 힌두교를 깊이 연구하라는 회답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그는
힌두교의 여러 경전과 서적들을 많이 읽게 되었다.
 @p62
  또한 그는 이 무렵에 톨스토이의 [신의 나라는 그대의 마음 안에 있다]는 책을 읽고 평생
잊지 못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이에서 간디의 종교적 관용과 구도자적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프레토리아 시절의 이와 같은 그의 종교적 태도는 그 후에도 줄곧
계속되었다.
  간디는 이처럼 종교적 탐구에 열중하는 한편, 프레토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인도인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하였다. 도착한 직후에 간디는 우선 인도인 집회를 열고, 상인(프레토리아에
있던 인도인은 주로 상인들이었다)도 상행위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점, 인도인은 주위에
있는 영국인들에 비해 불결하고 비위생적이니 이 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모든 인도인은 그 종교나 출신 지방의 구별을 넘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시간을 내어 희망자에게는 영어를 자진해서 가르쳤다. 그리고 첫 집회에서
성과를 거둔 간디는 거의 정기적으로 인도인의 집회를 열어, 상호간에 자유롭게 토의케
하고, 그들의 고정을 당국에 호소하여 그 시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집회를 통해서 그는
그곳에 있는 인도인은 모두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바르에 거주하는
인도인의 실정을 잘 파악하게 되었다.
  오렌지 자유국에서는 그 이름과는 달리, 인도인은 1888년의 특별법에 의해서 일체의
권리가 박탈당하고 있었다. 인도인 상인들은 명목상의 보상만으로 국외로 추방당했고, 남아
있는 이들은 대개 하인이었다. 트란스바르에서는 인도인에 대한 극히 가혹한 법이 1885년에
공포되었는데, 그 다음해인 1886년에 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인도인은 입국료로서
3파운드의 인두세를 지불해야 하는 반면에 인도인은 선거권을 갖지 못한데다가 기본권마저
무시되어 밤 아홉 시 이후에는 외출할 자유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인도인들과 널리 직접 접촉하여 그들의 실정을 아는 동시에 그들에게 봉사하려는 간디의
이런 성격이 결국 계약기한이 지난 후에도 계속 남아서 그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싸우게
했던 것이다. 간디는 종교적인 탐구와 인도인의 지위 향상이라는 공공사업에 시간을 내는
한편 위촉받은 소송사건을 위해서 진상 파악에 힘을 들였는데, 결국 그는 그 소송사건을
사적 중재의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p63
  원래 원고와 피고는 친척간인데다가 재판의 비용도 엄청나게 드므로 간디는 자진해서
조정의 수고를 다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그는 "변호사는 인간성의 보다좋은 면을 찾아내어
인간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가야 한다"는 점과, "변호사의 참된 직무는 두 분쟁 당사자를
결합시키는 데 있다" (Autobiography, p.134)는 사실을 배웠다. 그는 자기가 종사해온
20년간의 변호사 개업기간 중에 수백 건의 사건을 중재하는 데 그 시간의 대부분을
바쳤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단지 소송사건에서뿐 아니라, 정치투쟁에서도 그는 이 방법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3) 민족자존을 위한 투쟁
  이처럼 간디는 프레토리아에서 많은 귀중한 체험을 얻었거니와 의뢰받은 소송사건도
해결을 보았으므로, 그는 1894년에 더반으로 돌아와 막 귀국하려던 차에 때마침 '인도인
선거권문제'가 야기되었다. 이 문제는 인도인에게서 나탈 입법의원 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법안이 나탈 의회에 상정됨으로써 일어났다. 간디는 인도인 유지들한테서 그 대책을
부탁받고 1개월간 출발을 연기하기로 했다. "이리해서 신은 나의 남아프리카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고 민족자존을 위한 투쟁의 씨를 뿌렸다"(Autobiography, p.140)고 간디는 술회하고
있다. 이 1개월간의 체재 연기가 도중 두 차례의 짤막한 귀국을 제외하곤, 장장 20년간의
남아프리카 체재로 되고 말았다.
  인도인 선거권 옹호를 위해서 출발을 연기한 간디는 당장 활동을 개시 했다. 그런데 당시
간디는 나탈의 식민지 정부도 그가 영국에서 목격한 본국 정부처럼 법과 정의의 기본
원리를 존중하리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법적 경로를 밟으면서 투쟁을 시작했다. 즉 나탈
입법의원 의장과 나탈 정부의 수상에게 항의하는 전보를 치고, 각계 각층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입법의회에 보내는 청원서에 서명운동을 벌였다.
 @p64
  이에 모든 인도인은 그 종교나 출신지방, 신분이나 지위의 구별을 잊고 하나의 모국
인도의 아들이요 봉사자로 되었다. 따라서 영국 식민지상에게 보내는 다른 청원서에는 단
2주일간에 1만 명의 서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사본을 여러 신문사에 보냈더니, [타임스
오브 인디아]지는 사설에서 크게 격려하고, [런던 타임스]지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간디는 나탈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여러 인도인들의 간청도 있고 하여, 그는
남아서 이 운동을 지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공공활동자금에서 자기의 생활비를 빼내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 간디는 자기의 생계를 위해서 변호사 개업을 하는 한편, 청원서
제출에만 만족하질 않고 지속적인 운동을 하기 위하여 그 해 5월에는 나탈 인도인회의를
조직하였다. 그 사업비는 회비(1개월 5실링)와 독지가의 기부로 충당했는데, 특히 그 회계는
엄격히 하였다. "정착한 계정 없이는 진리를 본래의 순수성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
(Autobiography, p.140)는 것이 간디의 신념이었다.
  이 회의는 정기적인 회합을 통해서 회원을 훈련하고 또 그 산하에 '식민지 출생의 인도인
교육협회'를 조직하여 그들의 동포애를 함양하는 동시에 활발한 선전활동을 폈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은 많은 벗을 얻게 되고 또한 인도내의 모든 당파들로부터
적극적인 동정을 사게 되었다.
  이 회의는 비교적 많은 회비 때문에 계약노동자를 비롯한 가난한 인도인은 포섭할 수가
없어서 간디는 항상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루는 노예에 못지 않은 악조건 밑에 있던 한
계약노동자가 백인 주인한테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돼서 뛰어든 것을 간디가 법적 절차를
통해 새로운 백인 주인과 계약갱신을 해주었다. 이 일로 해서 그는 계약노동자들과 밀접히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차에 이른바 '3파운드 인두세'문제가 일어났다.
  원래 나탈 정부가 1860년 무렵 사탕수수의 재배와 제당에 필요한 노동력을 얻기 위하여
인도정부와의 합의하에 인도인 계약노동자를 데려갈 때에는, 5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그들 노동자는 자유롭게 나탈에 정착할 수 있고 또 완전한 토지소유권도 가진다는
조건이었다.
 @p65
  그러나 기한이 끝난 노동자들은 단지 농업에만 종사하질 않고 상업에도 손을 뻗쳐 토지와
가옥도 소유하게 되었다. 그들을 뒤따라 인도의 상인들도 그곳에 가서 정착하게 되었지만,
그들 중에는 거대한 기업체를 가지게 된 이도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백인 상인들은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그곳의 백인과 인도인 사이에는 종교뿐 아니라 생활양식과
생활감정도 크게 달랐으므로, 백인들이 적개심을 품게 되고 그런 적개심이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법안과 인두세 부과법안으로 나타났다.
  이 법안은 인도인 계약노동자에 대해서 계약기한 종료와 동시에 인도에 귀환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며, 이를 모두 거부하는 경우에는 25파운드의
연세를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탈 인도인 회의가 맹렬한 반대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에,
그 법안의 조회를 받은 인도 정부는 25파운드 연세에는 반대했으나 3파운드 인두세에는
찬성했다. 이에 의하면, 처와 16세 이상의 아들, 13세 이상의 딸이 있는 계약노동자는 합계
4민으로 12파운드의 연세를 납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계약노동자의 수입이 매월 14실링밖에
안되었으므로 매년 12파운드의 과세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사실상 인도인의 나탈 이민을 금하고, 이미 입국해 있던 인도인도 추방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악법이었으므로, 1895년에는 반세투쟁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인도인 선거권투쟁은
1897년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반세투쟁은 1914년의 승리까지, 장장 20년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4) 봉사의 종교
  "비록 나는 인도인 사회에 대한 봉사에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자기실천의 염원이 있었다. 신은 봉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의 봉사의 종교를 만들고 있었다.
 @p66
  그리고 나에게는 봉사란 인도에 대한 봉사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현상이며, 그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의
성향이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카티아와르의 음모에서 벗어나고자, 그리고 생계를 세우고자
남아프리카에 갔었지만, 전술한 대로 나는 거기서 신을 탐구하고 자기실현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Autobiography, p.158)고 간디는 술회하고 있다.
  간디가 자기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힌두교가 흔히 하듯이 삼림이나 사원에 들어가
고행을 하는 따위는 아니었다. 간디는 그와는 정반대로 인도인 속에 들어가 인도인에 대한
봉사에 몰두했다. 기독교인들과의 교우로 촉발된 진리탐구욕은 인도인 대중과 밀접히
접촉하는 가운데서 심화되어갔던 것이다. 더 반에서도 기독교인들과의 접촉은 계속되었는데,
그런 접촉은 간디의 지식욕을 자극시키고 그의 종교심을 생동케 하였다. 이제는
프레토리아에서처럼 종교 연구를 할 시간의 여유는 갖지 못했으나, 그래도 틈을 내어
종교서적을 애써 읽었다. 레이찬드브하이와는 서신을 교환하며 그의 지도를 받아 힌두교를
열심히 연구하였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편견은 갖지 않고서, 힌두교 이외의
종교서적도 함께 읽었다. 그런 종교 연구는 그의 내성을 깊게 해갔지만, 그는 점차 자기가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을 실행에 옮기려 하게 되었다.
  1903년 접신론을 믿는 우인들의 요청으로 힌두교 서적들을 그들과 함께 읽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간디는 [바가바드 기타]를 철저하게 연구하였다. 그 결과 간디는 [기타]를
철두철미하게 믿고, 그것을 실제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 원래 간디가 종교에서 찾은 것은
지적 만족보다도 도덕적 지침이었지만, 이제 그는 그것을 [바가바드 기타]에서 찾은
셈이었다. [기타]는 그에게 오로지 사랑과 동포에 대한 무사한 봉사를 통해서만 진리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기타]가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비소유'
(aparigraha)의 원리는 당분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간디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이상
어떻게 모든 세속적인 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고 의심했다.
 @p67
  그렇지만 결국 그는 이 어려운 문제를 '신탁'의 이론의 도움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기타]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조건 밑에서는 사유재산을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즉
사람들은 사유재산을 공적 신탁으로 보고, 자기를 위해서는 꼭 써야 할 때에만 쓰고,
나머지는 남을 위해 써야 하다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이와 같은 지적 탐구의 내면에서는 그가 동포에 대한 봉사와 그네들의 기본권을 위한
투쟁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은 직접적인 정신적 경험을 통해서 그의 종교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점차 모든 사치와 안락을 버리고 최소한의 필수품에
국한하는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천대받는 인도인인 만큼, 위신을
세우고자 주택과 가재도구에도 무척 신경을 쓰던 그였다. 자기 자신의 유럽화뿐 아니라 그
처자(1896년에 일시 귀국하여 데려왔다)에게도 유럽식의 복장을 하게 하며, 구두와 양말을
억지로 신게 하여, 이에 익숙치 못한 처자한테서 불평이 나오면 화를 벌컥 내던 그였다.
그러던 간디가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된 직접적 이유의 하나는 인도인 노동자에 대한 그의
뜨거운 동정심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공공사업에 한 다액의 기부로 인하여 형편이
옹색해졌기 때문이다.
  1904년 러스킨의 [마지막 자에게도]-그는 '사르보다야' (Sarvodaya)라는 제목하에
구자라티어로 이 책을 번역했다-를 읽고는 몹시 감격하여 한층 더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 책은 간디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는 생활이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임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그는 1904년 더반 근처에서 페닉스 농원(*)이라는 일종의
수도장(ashram)을 만들고, 사회봉사에 헌신하던 그의 동지들과 더불어 그곳에 가서 살았다.
같은 해 창간된 기관지 [인디안오피니언](**)도 이 농원으로 옮겼다. 모든 입거자는
농장과 신문사에서 자기 생계를 위해 직접 일하고, 인종이나 민족의 구별 없이 매달 똑같은
3파운드의 고정임금으로 극히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정신 훈련을 쌓았다. 그러나 간디는
여전히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인의 권리를 합헌적인 방법으로 수호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는 더반에 가서 변호사의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 : 이것은 1910년에 설립된 톨스토이 농원과 함께, 남아프리카에 있어서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발판이었으며, 그 후 간디가 인도에 돌아가서 만든 사바르마티,
세바그람 등지의 수도장의 전신이었다. 입거자는 모두 육체노동을 하고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정신훈련을 쌓아 앞으로의 투쟁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 [영 인디아](1919년 창간)와 [하리잔](1933년 [영 인디아]를 개제)의 전신인 주간지로
간디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자기훈련하는 동시에, 그 사상을 민중에게 전하고 그 반향과
비판을 알기 위한 기관지이다. 신문은 처음에는 구자라티어, 힌디어, 타밀어, 영어의 각
판으로 만들어지고, 일정한 난에 간디는 반드시 기고했다. 이 신문은 장차 전개되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불가결의 무기로 되었다.
 @p68
  그렇지만 그는 페닉스 농원과는 계속 밀접한 접촉을 하면서 도시 생활에서도 극히
간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려고 애썼다.
  이런 간소한 생활을 하게 된 간디는 점차 동포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철저히 하려면, 단지
세속적인 소유욕을 포기할 뿐 아니라 성욕도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결혼을 한 이래 진리에 대한 사랑의 반신인 처에 대해서 충실하게 일부일처의 이상을 끝내
지켜왔다(*)
  * : 자서전에 의하면, 간디는 고등학교 시절에 한 번, 영국 유학 시절에 한번, 그러고
남아프리카에서 한 번,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악우에 끌려 매춘굴에 간 일이 있으나
그때마다 유혹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처에 대해서마저 육체관계를 끊을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은
남아프리카에서였다" (Autobiography, p.204)고 말하고 있다. 그 동기를 자서전에서
찾아보면, 우선 하나는 레이찬드브하이의 영향,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이상 애기를 갖지
않으려는 (이미 애기가 넷이었다)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이미 런던 유학 시절에 피임법에
관한 지식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산아제한이 주동기였을 무렵에는, 처와의
육체관계를 끊고 '순결한 생활' (brahmacharya)을 실천에 옮기려 하다가 한두 차례 실패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06년, 줄루족 반란 때에 6주간의 종군생활을 할 무렵, 곤란한
행군 도중에 성심성의 사회에 봉사하려면 가정의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 후 심사숙고한 끝에 "전심전령을 기울여 인류에 봉사하려는 사람에게는
브라흐마차르야를 실행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함" (Autobiography, p.316)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p69
  왜냐하면 가정에 얽매어 가지고는 그런 봉사는 할 수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처와 상의하여 동의를 얻자 정식으로 서약을 하고 브라흐마차르야에 들어갔는데, 이는
그가 만 36살 때의 일이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결혼하여, 학교 수업시간중에도 처의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괴로워했던 간디, 때로는 의처증에 가까울 정도로 처에 대해서 질투의 불꽃을 끄지 못해
고민하던 간디, 더구나 처에 대한 정욕을 누를 길이 없어 잠시 침실에 들렀다가 부친의
임종도 보지 못하여 평생 후회하던 간디였단. 그러던 간디가 만 36살 때 처와의 완전한
금욕생활에 들어가 사회봉사를 위해 자기정화에 매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브라흐마차르야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는 "56살이 넘은 때에도... 매일 칼날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Autobiography, p.209)고 간디는 고백하고 있다. 그러한 정욕을
억제하는 데는 신선한 과실과 견과가 제일 적당한 음식임을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브라흐마차르야를 엄격히 지키는 일은 이처럼 심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것은
그저 고통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간디는 "이 서약의 20년간을 회고하면, 환희와 경이로
충만된다"(Autobiography, p.208)고 말하면서, 그것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켜주는 동시에
매일같이 신선한 미를 드러내주므로, 그것은 이제는 고행이 아니라 위안과 환희였다고 한다.
간디는 그러한 자기억제와 자기정화에 정진하는 한편 가난한 인도인 대중과 그 고뇌를
나누며 민중의 지도자로서의 터전을 닦은 뒤에 사터아그라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p70
  5) 사티아그라하 투쟁
  1906년 후반에 이르자,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합헌적인 방법으로 정의를 확보하려던
여태까지의 희망을 몽땅 버리게 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간디는 보어전쟁(1899-1902) 당시에는 "인도의 완전한 해방은 영제국 안에서
영제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Autobiography, p.214)고 믿고, 영국을 위해 자진해서
1,100명으로 구성된 인도인 야전위생대를 인솔하여 종군했었고, 또 줄루족반란(1906년
전반)시에는, "영제국은 세계의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 (Autobiography, p.313)고 믿었으므로
자진해서 24명의 인도인 야전위생 대를 이끌고 나탈 정부를 도왔다. 그는 사적으로는
보어인과 줄루족에 동정하면서도 영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영국을 위해 종군했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1906년 8월 22일의 트란스바르 정부 관보는, 8살 이상의 모든
인도인은 정식등록과 함께 지문을 찍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벌금, 투옥 또는
추방의 형벌을 가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게재했었다. 이는 말하자면 트란스바르에서는
인도인 전체를 일종의 범인으로 취급하려는 것이었다. 이 법안은 단지 트란스바르에 있는
인도인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도자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간디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돌볼 여유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대다수 유럽인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페어 플레이'정신이 계급적 이해와 인종적
편견으로 인하여 흐리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간디는 그들
유럽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취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간디는 1906년 9월 11일, 그'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의 제국극장에 모인
3천 명의 인도인에게 비록 그 법안이 법률로 되는 경우에도 그 법률을 무시하기로 할 것과,
그 법률을 무시한 데 대한 법은 달게 받아 모두 감옥에 .가고, 필요하다면 죽음을 택할 것을
맹세케 했다. 참으로 이상한 저항투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p71
  처음에 간디는 이것은 소극적 저항(passive resistanc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소극적
저항이라고 하면 약자의 무기이기나 한 듯이 오해될 염려가 있었으므로, 기관지 [인디안
오피니언]을 통해서 그 명칭을 공모했다. 그 결과 간디가 가장 신뢰하던 마간랄 간디의
'사다그라하' (sadagraha-진리파악)가 당선되었는데 간디는 그 뜻을 보다 명백히 하기
위하여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진리파악)라고 고쳐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폭력과
증오를 악으로 여겨 배제하며, 악에 대해서도 악으로써가 아니라 선으로써 대한다는 것이
그 신조였다. 즉 간디는 그 상대방을 해치거나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마음과
기사도 정신을 가지고 스스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양심을 찔러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Fischer, p.47) 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적까지 사랑하는, 즉
톨스토이의 말대로, 사랑에 입각하는 사상이며 행동이었다.
  그런데 사터아그라하의 원형인 소극적 저항의 투쟁에서 죽음을 걸고 '아시아인 등록법'에
반대케 할 때에도 간디는 집단적, 인 방식이 아니라 개개인이 그 책임과 발의하에 서약을
한다는 방법을 취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강제와 뇌동에 의한 행동은 '진리 '에 충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간디는 이 투쟁은 오래 끌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내가
대담하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만이라도 자기 서약에 끝내 충실한다면, 오직
승리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Fischer, p.36)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사티아그라하의
기본원리의 하나인데, 즉 영혼의 힘은 수에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결의의 확고성에 의거해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인 등록법은 1907년 8월 1일 (Glorney Boston, The Tragedy of Gandhi, p.119에
의하면 7월 1일로 되어 있다)부터 실시하기로 되었다. 그 동안 인도인의 반대투쟁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또한 간디는 영국에 가서 본국 정부와 직접 교섭을 한 결과, 영국
정부는 이 법안을 승인하지 않았으나, 1907년 1월 1일을 기해 트란스바르에는 자치정부가
들어서게 되어 결국 부녀자만 그 적용에서 제외하기로 하고는 예전의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고 말았다.
 @p72
  등록 반대운동이 조직적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반면 정부의 탄압이 심해져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1907년 1월에 간디는 징역 2개월에 처해졌다. 남아프리카의 최초의 옥고였다.
그러나 옥중에서 스마츠 장군과의 교섭이 진행되어, 만일 인도인들이 자진해서 등록한다면
아시아인 등록법은 폐기한다는 스마츠 장군의 제안을 수락하자, 간디와 다른 지도자들도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10일, 간디는 제일 먼저 등록하러 아시아국에 갔다가 그런 타협에
반대하던 미르 알람이라는 한 파탄인에게 얻어맞고 Tm러졌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 간디가
한 첫 말은 알람을 용서해주라는 것과 자기가 제일 처음으로 등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간디는 이렇게 충실히 약속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스마츠 장군은 약속을 어겼다. 이
위약에 항의하여 이 해 8월에 간디는 재차 사터아그라하 투쟁을 개시했다. 즉 8월 16일
새벽 4시에, 2천 명 이상의 인도인들이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하미디아 모스크에 모여,
그들의 등록증을 한데 모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는트란스바르의 이민금지를 일부러 무시
하여 자진해서 감옥에 들어 가기로 결정했다. 얼마 안 가서 간디는 나탈에 있는 인도인들로
하여금 일부러 트란스바르에 들어와 투옥당하게 하고 자기도 자기 맏아들도 이에 가담하여
그는 10월에 또다시 2개월의 징역을 언도받았다. 이때 간디는 옥중에서 변소청소 등 남이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한편, 소로(H.D. Thoreau)의 [시민적 불복종] (Civil
Disobedience)을 읽었는데, 이 책은 그의 평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내가 마땅히 져야 할 유일한 의무는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언제나 행하는
일이다"라고 소로는 그의 책에서 강조했다. 소로는 정당한 일을 하는 편이 법을 지키는
일보다 명예롭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감옥에 들어가기 위하여 수많은 트란스바르의 인도인들이 나탈에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간디도 이에 가담하여 1909년 2월에는 3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거듭되는 옥중생활에서
인고의 훈련을 쌓는 동시에, 사티아그라하의 저항은 소로식인 불복종 투쟁의 성격을 점점 더
지니게 되어갔다.
 @p73
  출옥하자 간디는 투쟁방법을 바꾸어 이 해 (1909)에 헨리 폴라크는 인도로 보내고 자기는
재차 영국에 갔다. 폴라크를 보낸 것은, 인도 민중이 남아프리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면, 이에 대한 인도 총독의 관심은 영국 정부에 전달될 터이고, 그렇게 되면 영국 정부는
스마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디가 직접 영국에 간
것은 영국민에게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영국에 있는 많은 자유주의자와 개명된
제국주의자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당장에 구체적인 성과는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 문제로 하여금 제국내의 하나의 중요한 두통거리로 만드는 데는
성공함으로써, 궁극적인 승리의 씨는 뿌렸던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 간디는 많은 인도인 애국자들과 접촉하여 그들과 단지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 문제뿐 아니라 인도의 자유라는 더 큰 문제도 논의하였다. 인도의 자유에 관한
자기의 견해를, [힌드 스와라지] (Hind Swaraj-인도의 자치, 1909)라는 소책자에서
밝히면서,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새 계획을 제시하였다.
  16년간에 걸친 남아프리카체재에서 얻은 경험으로 간디는 다음과 같은 결론 즉 유럽인에
의한 인도와 남아프리카 지배는 인도인을 사실상 노예로 만들고 있는데, 이런 지배는
물질적 가치의 맹목적인 추구와 권력애 그리고 약자를 착취하기 위한 그 권력의 사용 등에
의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성장, 발전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만일
인도인이 물질적인 무기를 가지고 싸움으로써 그런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요, 비록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얻어진 자유는 그릇된 자유로
되고 말 것이다. 물질력의 수단으로 외국인 착취자를 물리친 자는 그 힘을 그들의 동포를
착취하는 데 사용하게 될 것이다. [힌드 스와라지]에 의하면,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인도인들은 현대문명의 지배에서 그들의 마음을 해방시키고, 물질적 진보의 온갖
상징들-현대식 기계와 그 생산품, 현대식 수송수단, 현대적 사법 행정제도-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p74
  상류계급일지라도 농민과 노동자와 같이 간소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그들은 폭력의 사용 없이 신체적 및 정신적 자유를 쟁취하는 데 그들을 돕게
될 도덕적 및 정신적인 힘을 키우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간디는 1910년 요하네스버그 근처에 톨스토이
농원이라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들의 수도장을 설립했다. 이때 독일계 유태인 건축가이며
간디의 좋은 협력자로 될 칼렌바흐가 약 1, 100에이커의 토지를 사준데 다가 그도 간디 및
간디의 가족과 더불어 이 농원에 와서 살았다. 명칭을 톨스토이 농원이라고 붙인 것은,
일찍이 간디는 톨스토이의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있었지만, 특히 1909년에는 런던의
호텔에서 야스나야 포리야나의 톨스토이에게 서한을 보탰고, 이어 1910년에도 재차 서한을
보낼 정도로 사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도 간디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개인의
힘과 시민적 불복종을 굳게 믿고 있었다. 즉 톨스토이는 그의 [신의 나라는 그대의 마음
안에 있다]에서 기독교인을 정의하여, "이웃과 다투지 않으며, 공격 하지도 폭력을
사용하지도 않는 이, 그와는 반대로 저항함이 없이 스스로 고난을 당하며, 악에 대한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인하여 온갖 현세적 권위에서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 (Ficsher, p.39)라고 논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톨스토이는 손일과 재산의 포기, 간소한 생활과 기독교적 설교를 통해서 종교와 행동과의
종합을 책하려고 애썼다.
  톨스토이와 간디를 다 같이 사숙하며 두 사람의 전기를 깼던 로맹 를랑은 "간디는
톨스토이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지만, 톨스토이보다도 더 상냥하고 더 온유하며, 딱 잘라
말하면 더 자연스러운 기독교인 (광의의)이다. 왜냐하면 톨스토이는 본성에서 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지에 의해서 기독교인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Romain Rolland, Mahatma
Gandhi, 궁본정청 일역본, p.44)고 말하고 있다.
  * : 로맹 롤랑은 1924년에 "간디에 있어서는, 만사가 자연스럽고, 겸손하고, 소박하며
순수하다. 동시에 그의 온갖 투쟁은 한결같이 종교적인 정온에 의해 성화되고 있다. 그런데
톨스토이에 있어서는 만사가 긍지에 반발하는 긍지요, 증오에 반발하는 증오며, 격정에
반발하는 격정이다. 톨스토이의 경우에는 만사가 폭력이며, 심지어 그의 비폭력의
교리까지도 폭력적이다" (Ficsher, p.40)라고 날카롭게 비교하였다.
 @p75
  이러나저러나 간디가 톨스토이한테서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가는 자기가 설립한 농원의
명칭에 그의 이름을 글 한 가지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이 농원에서는 인도의 각
지방에서 온, 카스트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이들-즉 힌두교도, 회교도도, 파르시교도도,
기독교도도 있었는데, 그 중 약 40명은 청년, 2-3명은 노인, 20-30명이 소년소녀들이었다-이
조국의 명예와 정당한 권리의 수호를 위해 같이 일하면서 고생을 나누었다. 그들은
생활필수품을 거의 모두 스스로 생산하기 위해 농업과 그밖의 산업들에 종사하는 한편,
자녀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간디와 칼렌바흐가 주로 선생노릇을 하였다.
  간디가 이 학교와 연전의 페닉스농원 안의 학교에서 행한 실험은 그의 이념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종교를 달리하는 소년소녀들에게 공통된 종교교육을 하려고 애쓰는
가운데서 그는 각 종교의 본질은 온 인류에게 공통되는 기본적인 도덕원칙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12년에 [니티다르마] (Nitidhama)라는 소책자에서 제시한 도덕종교에 관한 그
의 견해는 바로 이 경험에서 싹텄다. 동시에 그늘 모든 종교는 각각 독자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음을 알게 되었다. 각 종교는 특정한 의식 및 예배양식과 관련을 가져왔으므로, 이런
외면적 형식은 그 신도들의 정신훈련에 가장 적합되는 것이니 만큼 그런 외면적 형식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보편적인 도덕종교의 원리와 함께 어린애에게는
각각 조상전래의 종교의 교의를 가르치고 그 교의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76
  일반 교육의 영역에서도, 간디의 실험은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결론, 즉 교육의
주목적은 어린이에게 심적 자각과 활기, 도덕적 훈련과 협조 정신을 낳게 하는 데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모종의 유용한 공작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정신적 및 실제적 경험에서 나온 간디의 사상의 기본적인
윤곽은 이 남아프리카 시절에 확정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사상뿐 아니라 그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원형도 이 남아프리카에서 이미 확정되고 있었다.
  간디가 톨스토이 농원에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위한 훈련에 주력하고 있는 동안 실제적인
저항운동은 소수의 인도인이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일상 관례로 되고 말아, 사태는 비교적
정온하였다. 더구나 1912년 10월에는 남아프리카의 실정을 시찰하기 위하여 인도
민족운동의 온건파 지도자인 고칼레가 내방하였는데, 이때 스마츠 장군은 그를 크게
환대하며 그에게 이민금지 해제와 3파운드 인두세 폐지를 약속하였다. 그러던 것이
1913년에 이르자 또다시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격심한 투쟁이 전개되게 되었다. 그것은
스마츠가 고칼레에게 한 약속을 어긴데다가 그 해 3월 케이프 클로니 (남아연방의
한주)에서 기독교 방식에 의한 결혼 이외는 무효라는 규정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인도
부인을 선두로 하는 처절한 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간디는 나탈의 '자매'들은 무허가로 트란스바르에 들어오게 하고, 트란스바르의 '자매들'은
나발에 가게 하였다. 나탈의 '자매들'은 투옥되었는데, 이에 분개한 다른 나탈 '자매들'이
뒤를 이었다. 한편 트란스바르의 '자매들'은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지시대로 나탈의
뉴캐슬에 있는 탄광에 가서 인도인 탄광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호소했다. 정부는 그
'자매들'을 체포하여 3개월의 구류처분을 내렸는데, 카스투르바이 부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에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이 번져갔으므로 간디는 뉴캐슬로 달려갔다. 탄
광주들은 파업을 감행하고 있는 인도인 노동자가 들어 있는 회사 숙소의 전기와 수도를
끊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들로 하여금 야외에 나가 노숙하도록 했다.
 @p77
  그러나 그 수가 약 5천 명이나 되었으므로 어찌할 바를 몰라, 일부러 체포되기 위하여
트란스바르에의 행진을 계획하였다. 실제로 행진을 개시하기 전에 당장 체포하도록 당국과
두 차례에 걸쳐 교섭했으나 당국은 '은총'을 베풀지 않았다. 그래서 간디는 트란스바르로
행진을 단행하기로 하고, 만일 체포되지 않는다면, 톨스토이 농원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행진은 몹시 고생스러울 것이므로 심약한 자는 그만두도록 호소했지만, 출발 당일인 1913년
11월 6일의 아침 6시 30분에, 간디는 인원을 파악해보니 2,037명이 남자고, 127명이 여자요,
57명이 어린이들이었다. 트란스바르에 들어가도 경찰이 체포하지 않아 톨스토이 농원을
향해 행진을 계속했는데, 간디는 첫날 저녁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고, 둘째날 밤에도
체포되었다가 다시 석방되었지만, 나흗날 밤에는 체포되어 그대로 구류되었다. 노동자들은
간디 없이도 행진을 계속했으나, 다음날 아침 밸포어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기차에
실려 탄광으로 송환되어 철조망을 둘러친 속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그들 노동자는 탄광에서
일하기를 계속 거부했다. 동정 파업이 더 번져갔다. 정부는 이런 계약 노동자는 파업을 할
권리가 없는 노예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을 억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한 곳에서는
군대가 발포하여 수명의 사상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약 5만 명의 계약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수천 명의 자유 인도인이
투옥당하게 되었다. 이 소식이 인도에 전해지자 인도에서는 항의의 물결이 세차게 일어났다.
인도와 런던, 런던과 남아프리카사이에 교섭이 보고간 끝에 1913년 12월 18일 정부
당국과의 교섭을 위해 간디는 무조건 석방되었다. 함께 투옥당하고 있던 유럽인 협력자인
칼렌바흐와 폴라크도 이때 석방되었다. C.F.앤드루스와 W.W.퍼어슨 등이 후원하기 위해
인도에서 남아프리카로 달려온 것도 이때였다.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반대의사를 표시하며 온갖 고난을 참는
사람들로 감옥을 가득 채우는 운동이기도 하지만, 간디의 수도장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언제나 선두에 섰다. 간디와 스마츠 장군과의 교섭은 처음에는 잘 진행되지 않아, 간디는
1914년 1월 1일에, 또다시 체포되기 위하여 더반으로부터 인도인들의 행진을 단행할 것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p78
  이때 남아프리카의 모든 철도의 백인 고용인들이 파업에 들어가 인도인들과의 제휴를
제의해왔다. 간디는 이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 행진도 중지하고 말았다.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상대방의 난처한 입장을 이용하거나 부자연스러운 동맹을 체결하거나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Pischer, p.47)는 것이 간디의 설명이었다.
  간디와 스마츠 장군과의 교섭은 그 후에도 오래 끌었으나 결국 1914년 6월 30 일 합의에
도달했다. 이로써 3파운드 인두세는 폐지되고, 힌두교, 회교, 과르시교의 방식에 의한 결혼도
합법성이 인정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인도인들은 케이프 콜로니에 들어갈 수
있으나, 연방내의 다른 주들 사이의 자유로운 이동은 금지되었다. 계약노동자는 1920년
부터는 금지하나, 자유 인도인은 계속 들어올 수 있고, 또 인도에 있는 처자가 남편과
합치기 위해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간디가 인두세반대 투쟁을 전개한 1895년부터 20년
만에 인도 민중의 사티아그라하투쟁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1914년 7월 14일, 간디가 오랜 인고와 자기정화의 터전이었던 남아프리카를 떠나
영국을 경유하여 조국에 돌아온 후, 그가 인도에서 전개한 사티아그라하 투쟁의 원형을
우리는 이 남아프리카투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제 그 정치적 특징을 들어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 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이 투쟁은 카스트, 종교, 출신지방의 구별을 초월하는 하나의 전국민적 운동으로
유럽인과 동일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 투쟁은 대중-계약노동자-과 밀착하고 있었다.
  셋째로, 이 투쟁을 지도하고 그 진로를 결정한 이는 그들 대중이 아니라 간디 자신이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특징 이외에도 조직과 투쟁의 방식상의 여러 특징들, 즉 기관지 발간,
수도장 설립, 투쟁개시 전 및 투쟁기간중 당국과의 서한교류, 옥중에서의 교섭,
투쟁참가자의 동의를 얻음이 없이 당국과의 타협, 투쟁에 있어서 극히 사소한 점에
이르기까지 간디 자신의 개인적인 지도 등은 이미 남아프리카 시절에 있어서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Namboodiripad, 일역본, pp.17-22).
  이상에서 우리는 남아프리카에서 간디의 기본적인 사상과 실천방식의 윤곽이 형성된
과정을 대강 살펴보았다. 간디가 후에 인도를 무대로 하여 34년간의 그의 나머지 반생을
통해서 전개한 '진리와 함께 한 실험'은 기본적으로는 이 남아프리카에서의 실험의 규모를
확대시킨 데 불과했다.

 @p81
    제 3장 간디의 사상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 즉 이 30년간에 걸쳐 내가 달성하고자 애써오고 또 달성하도록
강요되어온 것은 신을 눈앞에 보기 위한,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한 자기실현이다. 나는 이
목적을 추구하면서 생활하고 활동하며 또한 존재한다. 연설과 저술을 통해서 내가 하는
모든 일과 정치의 영역에서의 나의 온갖 모험은 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Autobiography, p.12) 이것은 간디가 1920년에 이르기까지의 진리와 함께 한 자기의
실험을 서술하고 있는 자서전 서문에서 하고 있는 말이지만, 그가 인도에 돌아와서 행한
실험은 주로 정치적 및 사회적 영역에서 수행되었다고는 하더라도 그 목적은 종교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로맹 롤랑은 간디는 "천성적인 종교가이지만 필요에
강요되어 정치가로 되었다"(Rolland, 일역본, p.34)고 보며, "만일 틸라크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도 이 운동 (즉 민족운동)의 종교면의 지도를 담당했으리라" (같은 책,
p.30)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간디의 종교의식은 그 본질에 있어서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인
것이었으므로, 비록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그는 진리를 실현하는 데 단순한 내성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남들을 진리 실현과 구원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사회운동도
병행했으리라고 본다. 실제로 간디는 사원으로의 도피나 동굴의 고독, 또는 예배의식의 경건
속에서 신을 찾지 않고, 동포를 위한 헌신적 봉사를 통해서 신을 구했다.
 @p82
  물론 내성, 명상, 그리고 신과의 영교는 신을 찾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수단이며, 사실
간디도 그런 수단을 이용하기도 했으나 그와 같은 경험은 엄밀하게 개인적인 것이어서
남과는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보다도 간디의 관심은 남과 나눌 수 있는 경험에
있었으므로, "나는 처음부터 1인에게 가능한 일은 만인에게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실험은 사실에서가 아니라 야외에서 행해졌다" (Autobiography, p.12)고
말하고 있다. 1인에게 가능한 일은 만인에게도 가능하다는 견해가 옳고 그르고는 놔두고,
누구든지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자기처럼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간디에게서 우리는
겸허한 마음씨를 찾아보게 된다.
  그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수행된 집단적인 종교적, 도덕적 (간디에 있어서는 이 두 말은
서로 바꿀 수 있다) 실험은 정치적 및 사회적인 것이었다. 정치적 실험은
인도해방운동으로써 수행되었다. 그런 운동은 간디가 정치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이미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제 간디는 새로운 도덕정신을 갖고 그 운동을 비폭력, 비협력
운동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인도를 30년 이내에 영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리고
사회적 실험은, 각종의 건설사업(constructive work) 단체들의 도움을 얻어서, 경쟁이
아니라 협동에 입각하며 착취가 전혀 없는 비폭력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으로써
수행되었다. 그런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그는 또한 새로운 교육방법을
도입하였다. 30여년간에 걸쳐 수행된 이와 같은 실험들은, 간디가 남아프러카에서 이미
형성했던 종교적, 도덕적 이념들을 더욱 분명하게 더욱 심오하게 그리고 더욱 포괄적으로
만들었으나 그의 사상의 일반적 윤곽은 분명히 그대로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검토해보면, 진리에 대한 간디의 강조점이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전에는 신은 무엇보다도 진리라던 것이 이제는 진리야말로 신이 라고 바뀌고 있는
것이다(M.K.Gandhi, Satynraha, p.38).
 @p83
  간디는 이전에는 도덕을 종교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도덕을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의식은 신에 대한
신앙보다도 더 보편적이며 더 명확하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서 그는 깨닫게 되었다. 즉 그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철저하게 도덕적 원칙에 입각해서 행동하면서도
정식으로 신은 믿고 있지 않는 사람들 (자와하를랄 네루는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을
인도에서 만나고, 종교의 정수는 도덕이며, 그 도덕을 그런 사람들이 숱한 종교인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도덕은 종교의 실질이며 신에 대한 신앙심은
종교의 우유적인 것(하기는 그에게는 신에 대한 신앙심은 분리될 수 없는 우유적인 것으로
보였지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간디의 사상이 그의 직접적인 정신적 및 실제적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대강 훑어본 셈이다. 이제는 평생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여 마침내 도달한
결론들을 개관해볼 차례이다.
    1. 종교적 및 도덕적 이념
  1) 개관
  간디의 일생은 극적 사건, 에피소드, 감격적 장면으로 차 있거니와, 그의 강연과 저술도
엄청나게 많아 인간 생활의 온갖 측면에 걸쳐 있다. 그러므로 보는 입장에 따라 치중하는
사상의 측면도 다르게 마련이지만, 로맹 를랑은 간디의 사상은 "거대한 종교적 기초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 위에 세워지고 현재의 가능성과 조국의 원망에 적용된 사회활동"
(Rolland, 일역률, p.30)이라는 두 단계로 나누어서 고착해야 하며, 특히 종교적 기초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간디의 종교, 도덕 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보통 간디는
일반원리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고, 개개의 실제문제와 관련하여 그런 원리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p84
  첫째는, 종교와 도덕에 관한 이론 철학을 제시하는 일은 그의 목적이나 영역은 아니었다.
그의 철학은 실제적이며, 오직 실제문제로써만 그것은 적절하게 표현되었다. 둘째는, 이
실천철학은 절대적 내지 추상적 진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고, 실제생활과의 접촉 속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간디는 그의 철학을 비개인적인 종교적 계율이나 도덕률로서 세상에
내놓기를 원치 않고, 단지 일련의 개인적 실험으로서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도달한
결론에 대해서 구극성이나 보편타당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자연과학자가 최대한의 정확성과 신중성 및 엄밀성을 가지고 실험을 하듯이,
깊 이깊이 내성하고 속속들이 자기 자신을 찾아내고, 하나하나의 심리상태를 음미,
분석하였다. 그리고 자연과학자가 실험의 결과에 대해서 구극성을 주장하지는 않고 그
결과에 대해서 허심한 태도를 취하듯이 그는 자기의 결론에 대해서 "구극성이나 불가류성을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Autobiography, p.12)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론은 적어도 자기에게는 절대적으로 정당한 듯이 보이며 또한 당분간은 구극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러한 결론에 입각해서 행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행동에 옮길 때에는 일일이 그 옳고 그름을 검토하고 나서야
행동하곤 했는데, 그 행동이 자기의 이성과 양심을 만족시켜주는 한 그는 자기의 독자적인
결론을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그의 독자적인 결론은 과연 무엇인가?
  간디의 종교적 신조에는 두 개의 다른 특징이 있다. 하나는, 그가 도덕적 가치를 종교의
실질로 보고, 신에 대한 신앙은 종교의 우유적인 것 (분리될 수 없는 우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는 하나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견해는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다. 일단 도덕이 종교의 본질로서
인정된다면, 모든 종교는 동일한 기본적 도덕원칙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결론이 자연히 나오게 마련이다.
 @p85
  간디에게서는 도덕률은 인류를 지배하며 인간의 본성 속에 스며들어 있는 항구불변의
인생법칙이다. 그는 그러한 도덕률을 '진리의 법'(law of truth)이라고 부르고, 때로는 길러
또는 사티아(satya)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사티아라는 말은 간디의 전 사상구조의
근본원리이니만큼 우리는 그 의미를 가능한 한 명백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이 사티아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지는 우리말은 '참'이다. 참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사실과 일치하는 말을 뜻하는 '진실'의 의미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체에 일치하는
지식을 뜻하는 '진리'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티아는 경우에 따라
진실이라고도 진리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실은 사터아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 진실과 진리 이외에 선량, 정의, 구극적 실재와 신, 이런 모든 속성들의 참된 실체도
의미한다(Husain, p.12).
  간디는 온 우주에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이 미만하고 있는데,
이 힘이야말로 변화무상한 이 세계에 있어서 영구불변하는 유일한 실재라고 본다. 그리고
이 힘의 작용을 관찰한 결과 그 칩은 선을 위하는 힘이지 악을 위하는 힘은 아니라는
확신을 그는 가지게 되었다. 간디가 사티아 또는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힘을
말하는데, 그는 그 힘을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법, 즉 생명의 법, 자연의 법,
도덕률이라고 생각한다. 구극적 실재를 하나의 신비롭고 선한 힘이라고 생각하고, 우주
속에서 질서와 조화 및 도덕률의 지배를 보며, 이 도덕률에 대한 복종을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의 지도원리라고 간주하는 것은 간디의 기본적인 종교적 신조의 '으뜸가는'본질적
요소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믿는 이들뿐 아니라 어떠한 종교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그와 같은 본질적 요소를 지닌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다만 그 차이는, 종교를 믿는 이들은
도덕률과 일치한다고 보는 구극적 실재를 간디와 마찬가지로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것을 사랑이나 헌신을 통해서 깨달으려고 애쓰는 데 대하여,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은
그런 구극적 실재에 어떠한 이름도 붙이지 않고, 그것을 과학의 도움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
 @p86
  간디는 도덕적 이법을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무신론자임을 공언하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해서, 하나의 커다란 동포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만일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보다 더
도덕적이라면 간디는 전자가 더 종교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간디에 의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이 종교심도 사랑 내지 아힌사(비폭력)를 통하지
않고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 내지 아힌사는 간디 철학에서 진리에 다음
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애정, 동정,
자비, 관용, 봉사, 자기회생 등의 적극적인 의미와 아울러 비폭력, 불상해와 같은 소극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Husain, p.13). 그것도 역시 신을 사랑의 제 1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아힌사와 진리와의 관계는 어떠냐하면, 양자는 "꼰 새끼와도 같아서 나누기는
어렵지만 아힌사는 수단이며 진리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p.62) 또는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요,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는 칸트의 유명한 말에 따라 표현하면,
"진리 없는 사랑은 맹목이요, 사랑 없는 진리는 공허하다"고도 할 수 있다.
  간디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이 사랑도 세계의 존립 자체가 의거해 있는 보편적인 제
1원리라고 생각한다. 증오와 전쟁으로 인한 파괴 속에서도 인류생활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그런 파괴의 법보다 더 고차적인 법이 있기 때문인데, 그 법이
다름 아닌 친화와 평화의 법, 즉 사랑과 비폭력의 법이라고 간디는 생각한다. "아힌사
(비폭력)는 인류의 규범이요, 힌사(폭력)는 동물계의 법칙" (납산방랑, p.61)이거니와, 그런
고차적인 아힌사의 법의 작용을 관찰하려면, 인간의 미숙한 성질이 아니라 원숙한 성질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태까지 인류는 대체로 그렇다고 의식함이 없이 그 사랑 내지
비폭력의 법을 좇아왔지만 이제부터 인류는 의식적으로 이 법을 인정하고 준수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p87
  상술한 대로 사랑 내지 아힌사는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적극적인
면은, 인간이 가까운 관계를 가지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사랑을
적까지 포함하는 온 인류에게 확대시키는 일이요, 소극적인 면은 사리를 더욱 추구하거나
열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고의로 어떤 생물을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것을 삼가는 일이다.
  간디의 종교적 신조의 '버금가는' 본질적 요소는, 그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포괄적인 사회적
덕성이야말로 인생의 최고가치인 진리에의 관건이라는 점, 다시 말하면 신에의 길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상은 역시 세계의 모든
주요한 종교에 공통된다. 주요한 세계적 종교를 연구한 결과, 간디는 그런 종교들은 진리와
사랑에 대해서 한결같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는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따라서 명칭을 달리하는 종교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비친 이 하나의 위대한 근원적 종교의 영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즉
동일한 근본적인 경험이 모든 종교의 기초를 형성하지만, 그런 경험은 서로 다른 자연적,
사회적 및 지적 환경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해석되어오고 있을 따름이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견해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 견해는 신비론자의
유형에 속하는 모든 종교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간디가 이 원리를 가르친 그
논리적 일관성과 그가 원리를 실천에 옳긴 성실한 열정은 역사상 거의 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종교에 대한 동등한 숭경은 그의 종교 개념의 초점을 이루고 있다.(*)
  * : 간디는 1928년 1 월, 세계동포연맹에서 말했다. "오랜 시일에 걸친 연구와 경험의
결과, 나는 다음과 간은 결론에 도달했다. #1 모든 종교는 진리다. #2 모든 종교는 약간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 #3 모든 종교는 나에게는 힌두교와 거의 마찬가지로 친밀감이 있다.
다른 종교에 대한 나의 승경은 나 자신의 종교에 대한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개종이란
생각은 가질 수 없다." (Discovery, p.315)
 @p88
  요컨대 모든 종교들의 공통적인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간디의 도덕종교의 기본원리는,
#1 진리의 법과 사랑의 법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 #2 인류는 이런 법들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한다는 점, #3 모든 종교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라고 보고, 모든 종교들에
대해서 동등한 승경을 한다는 점 들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데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전인류에게 공통되는 하나의 종교란 하나의 추상적 이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런 공통적 종교는 여러
실제적 종교들의 형식을 스스로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하나의 참되고 완전한 종교는
인간적 매개를 거침에 따라 여럿으로 되는 것이다. 모든 개인은 그 어떤 특정 종교, 보통은
그 자신의 전통적 종교의 거울에 비춰진 것으로서만 진리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각
개인은 그런 종교를, 사랑과 진리라는 공통이상을 깨닫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오든 개인은 다른 종교들의 온갖 좋은 점은 섭취할 수 있고 또 섭취해야 한다.
  간디는 힌두교의 독실한 신자였다. 그러나 경전을 고집하는 학자는 아니다. 더구나 어떠한
전통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무비판적인 신앙가는 더욱 아니다. 그는 내적 도덕의식과
이성을 통해서 힌두교를 받아들였으므로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힌두교가 가지게 된
오류와 폐해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힌두교에 대한 나의 감정을 말하기는
어려운데 그것은 내 아내에 대한 감정을 말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 아내는 이
세상의 어느 여자보다도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렇다고 내 아내가 아무런 결함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내 눈에 띄는 것 이상의 결함을 내 아내는 가지고 있다고
단언해도 좋다. 그러나 아내와는 끊을 수 없는 연분을 느낀다. 그 온갖 결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힌두교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낀다.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단 두 권의
힌두교의 경전 [기타]와 툴시다스의 [라마야나] (Ramayana. 산스크리트의 서사시이며,
라마찬드라의 생애와 모험을 노래한 것. 툴시다스가 힌디어로 번역하였다)의 음악만큼 나를
고무하는 것은 없다.
 @p89
  나는 오늘날 힌두교의 대사원예서 벌어지는 폐습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입에 담기도
싫은 그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을 사랑한다. 나는 철저한 개혁자이지만, 나의
개혁의 열정도 결코 나로 하여금 힌두교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버리게 하지는
않는다."(Husain, p.19)
  그러면 그가 승인하고 있는 이 본질적 요소란 무엇인가? 간디는 1921년 10월 6일 [영
인디아]지에 게재한 논문에서 자기의 공적인 신앙개조를 열거하고 있다(Rolland, 일역본,
p.37).
  #1 나는 [베다](veda.인도 최고의 종교문학이며, 바라문교의 근본경전), [우파니샤드]
(Upanishad)(*) [푸라나] (Purana)(**) 그리고 힌두경전의 이름 아래 포함되는 모든
것을 믿는다. 따라서 아바타르(avatar: 화신)(주석3)와 푸나르잔마(punarjanma: 재생)를
믿는다.
  * : [베다] 성전의 일부를 이루는 철학적 논총으로 일신교적, 일원론적인 사상체계의
기초로 되었다. 베다의 최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베단타] (Vedanta)라고도 불린다.
  **: 고대전설을 취급한 서사시이며 편력의 음송시인 수타에 의해서 씌어지고,
[베다]보다도 서민적 성격이 강하다. 우주의 창조와 파괴와 재건, 여러 신 및 성인의 계보,
인조 마누에 지배되는 3억 년 이상의 기술, 일종 및 월종 외 왕조의 역사 등을 다루었다.
 ***: 힌두의 신앙에 의하면, 비시뉴(힌두교의 주신의 하나)는 때때로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온다. 열 하나의 이런 화신이 알려져 있으며, 그 최후의
화신이 불타이다.
 ****: 엄격하게 말하면 바르나와 아슈라마에 의거하는 제도이다. 바르나는 이른바 네 개의
카스트이며, 아슈라마는 힌두의 일생에 있어서의 네 개의 계단 내지 시기이다. 즉 힌두는
#1 단라호마차르야(학생의 생활). #2 그라하스티야(가장의 생활), #3 바나프라스타(은자의 생활),
#4 사니야스(탁발의 생활)를 거치면서 일생을 끝마친다. 바르나슈라마는 보통 카스트 제도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2 나는 바르나슈라마 다르마(varnashrama dharma)(주석4)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하게 [베다]에 나타나 있는 의미에서이지 현재의 속악한 의미에서는 아니다.
 #3 나는 통속적일 의미보다는 훨씬 넘은 의미에서 소의 보호를 믿는다.
 #4 나는 우상숭배를 불신하지는 않는다.
 @p90
  그러나 간디는 이런 것들을 다음과 같은 조건부로 믿었다. 우선 간디는 [베다]만이 신성을
가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바이블]도 [코란]도 [겐드 아베스타](Zend Avesta. 조로아스터교의
경전)도 [베다]만큼이나 신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힌두 경전의
오든 구절이 신의 영감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간디에 있어서는 힌두의 경전들은
성자와 현인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며, 그런 경험은 그것을 철저하게 흡수, 동화하여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화하게 하는 경우에만 진리추구의 지침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와 사랑, 브라흐마차르야(자기억제)와 아파리그라하(비소유)를
실천함으로써 스스로를 정화한 사람들의 경우에만 가능한 특정한 정신적 기풍과 종교적
심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힌두교에 대한 간디의 개념에 있어서는 상기한 네 개의
도덕원리가 제 1의적이고 절대적이며, 정전에 대한 신앙과 연구는 제 2의적이며 상대적임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교의에 대해서도 자기의 종교적 가치등급에 있어 제 2차적인
지위밖에 부여하지 않는다. 간디는 소의 보호는 모든 말 못하는 불쌍한 동물에 대한 애정의
상징이라고 보고, (*)우상숭배는 그것들이 나타내려고 한 신에 대한 숭경의 상징이라고
본다. 화신 (avatar)에 대한 신앙은 은유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이고,
바르나슈라마(varnashrama)는 그것이 고정된 카스트 제도가 아니라 분업에 의거하는
사회조직이었던 베다시대에 그것이 가지던 의미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 : 소의 보호는 힌두교의 특성이다. 옛부터 5용(Punchagavia), 즉 #1 우유는 음료로
된다. #2 소의 똥으로 주거의 벽을 만들고, 또 발라서 곽을 낸다. #3 소의 똥에서 황색 염료를
낸다(황색은 인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색으로 취급된다). #4 소의 똥은 비누의 원료로 된다.
#5 소의 똥은 퇴비로 된다고 하여 소는 인도인 생활에는 없어서는 안될 동물이었다.
그러므로 신의 사자로서 이 필요불가결한 소를 소중히 다루어오는 동안에 그만 소 자체가
신으로서 숭앙받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간디는 소에 대해서 인류진화의 최고긍정까지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소는 모든 생물의 상징이며 인간과 동물 사이의 동포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디는 이 온순한 동물에게서 자비심을 발견하는 한편 신이 만든 말
못하는 동물에 대한 연민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
 @p91
  물론 간디 이전에도 개화된 힌두 지도자들은 힌두교의 일반적인 신조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했지만, 이제 간디는 그의 권고와 시범 및 실제적인 개혁운동을 통해서
진보적인 견해를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바르나슈라마를 그릇되게
해석함으로써 생겨난 불가촉천민의 존재를 없애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간디의
해석의 각별한 특징은 힌두교의 종교적 가치에 대한 그의 재평가에 있었다. 힌두교의
방대한 전통 속에는, 아바타르, 푸나르잔마, 바르나슈라마, 우상숭배와 같은 독단적 교리와
사티아, 아힌사, 브라흐마차르야, 아파리그라하와 같은 도덕원리가 병존하고 있었다. 재래식
신조는 전자 즉 독단적 요소를 힌두교의 실체로 보고, 후자 즉 도덕적 요소를 대개
우유적인 것으로 보았다. 간디는 그 위치를 전도시켜 네 개의 도덕원리가 힌두교의
본질적인 핵심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찬가지로 힌두교도 사이에는 힌두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도 존중하는 심정이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간디는 그런 심정을 하나의 기본원리,
즉 모든 종교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힌두교도는 자신의 종교를 고수하는 반면에 다른
종교들도 똑같이 승경하며, 다른 종교들의 받아들일 수 있는 온갖 장점을 힌두교 안에
섭취해야 한다는 하나의 원리로 높였다.
 @p92
  그는 힌두교도가 아닌 사람들을 힌두교도로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비난했다. 비록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힌두교로 개종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간디는 그 사람을 설득하여 힌두교에서
발견한 온갖 장점을 그 자신의 종교속에서 섭취하도록 하게 하려고 애쓰곤 하였다. 간디는
이 넓은 아량이야말로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힌두교의 특징이라고 믿었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간디는 진리와 사랑은
기본적인 종교적 원리임을 발견했고, 또 여러 종교를 연구한 결과 모든 종교는 이 두
원리를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음을 간디가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힌두교는
그런 진리와 사랑에다 자기억제와 자기부인을 합쳐서 네 개를 기본적인 덕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힌두교에 대한 간디 자신의 해석을 통해서 이런 네 개의 도덕원리는 힌두교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보다 넓고, 보다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네 개의 도덕원리
이외에 그가 러스킨과 톨스토이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리고는 [바가바드
기타]에서 나중에 다시 발견했던 생각, 즉 만인은 자기 자신이 손수 일하여 자신의 생계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비착취와 비소유에 대한 필요한 보충으로서 간디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브레드 레이버 '(bread-labour)를 힌두교의 다섯번째의
기본원리로 삼게 되었다.
  우리는 다음에 간디의 종교적 신앙을 구성하는 위에 든 다섯 개의 원리들을 좀더 상세하게
검토하기로 하자.
  2) 기본적 신조
  (1) 사티아
 사티아라는 말은 간디의 저작에서는 네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Husain, p.22).
 #1 절대적 실재, 절대적 존재 내지 신. 사티아란 원래 사트(sat), 곧 '존재'에 연유하는
말로서, 간디에 의하면, 실재 이]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 내지 진리는 신의
가장 중요한 이름이지만, 신이 진리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진리야말로 신이라고 하늘편이
더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p93
 #2 진실과 일치하는 지식, 영원한 천복인 절대적, 지식. 진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참된
지식이 있고, 진실이 없는 곳에는 참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식이라는 말은
신의 이름과 관련되지만, 참된 지식 곧 신을 가지게 되면 온갖 고통에서 자유롭다. 왜냐하면
고통은 사실 무지, 불완전, 비 항구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고통에서의 완전한 자유는
'천복' (bliss)이라고 불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순수한 행복의 상태이다.
 #3 성실. 간디가 '언어와 사상에 있어서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그런 참된 것을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4 정의. 공정하고 정직한 것, 또는 간디의 말을 하면 '행동에 있어서의 진실'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간디가 '진리의 법 '이라고 부르는 전도덕률의 준수를 의미한다.
  간디가 종교와 도덕의 목적인 사티아의 추구와 실천에 관해 말할 때, 그는 '사티아'라는
말의 네 가지 뜻, 즉 구도자가 추1해야 할 실재와 실재에 일치하는 지식, 그리고 구도자가
실천해야 할 정실과 정의를 모두 생각하고 있다. 사티아라는 말로 간디가 표시하는 이런 네
가지 의미 중에서, 성실과 정의는 절대적 실재에 관한 지식 내지 인식이라는 최고목적을
우리가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그러면서 간디는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게끔, 수단과 목적을 함께 표시하는 데에 '사티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까?
간디는 수단과 목적은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를 같은 말로 부르고 있다.
수단과목적의 동일시는 그의 도덕론의 핵심이며, 그것은 신에, 관한 형이상학] 이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간디에 있어서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인 절대적 실재 내지 신은 두
개의 존재양식을 가진다. 하나의 양식은 자연의 세계와 인간 자신의 참된 본성과 부합되는
경우요, 다른 하나의 양식은 그것을 초월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성실과 정의를
준수할 때 그것은 신의 존재의 초월적인 측면을 인식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p94
  그러나 동시에 이 성실과 정의는 인간의 참된 본성의 표현이며, 신의 존재의 내재적인
측면의 한 표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간디는 도덕행위의 수단과 목적을 하나로 보며, 양자를
표시하는 데 '사티아'라는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간디의
도덕철학에서 수단의 순수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상 간디의
도덕철학에서는 수단과 목적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다. 간디는 목적을 일련의 수단의
맨 나중 것으로 본다. 즉 간디에 있어서는 목적을 향해 취해지는 하나하나의 단계는 그
목적의 부분적 실련이요, 그 최종단계는 목적이라고 부르고, 앞선 모든 단계는 수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관습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정당한 행위는 그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
목적인 진리의 부분적인 실현이다.
  (2) 아힌사
  그러나 진리를 깨닫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리 추구에 전심, 전력을 다하는
사람일지라도 부분적인 진리와 불완전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육신을 가짐으로써 감정과 욕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은 흐려져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진리는 우리에게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자기의 감정과 욕망을 억제하고 자신을 점차로 육신의 제약에서 해방시키는데 도움이
될 어떤 힘이 필요하다. 이 힘을 간디는 아힌사 속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외재적인 힘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는 칩으로, '파괴의 법'보다 더 강력한 '인류의 영원한 법'인데,
간디는 그 적극적인 측면을 '사랑의 법'이라 부르고, 그 소극적인 측면을 '비폭력의 법'이라
불렀다.
  K.R.크리팔라니는 "간디는 특히 아힌사의 사도이다. 아힌사는 후일 증오와 학살의
악몽에서 인간을 구출할 숨결인 동시에 그의 생명의 숨결이었다" (K.R. Kripalani, Gandhi,
Tagore and Nehru, 삼본달철, 일역본, p.42)고 말하고 있다.
 @p95
  사실 간디에 있어서는 아힌사란 '불상해 ' 비폭력'과 같은 부정적, 소극적인 면보다도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으로 대한다는 적극적인 면을 더 의미하고 있다. 이 점은 "비겁과 폭력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는 나는 폭력을 택하도록 권한다...그러나 나는
비폭력은 폭력보다도 월등히 나으며 용서는 처벌보다도 한층 더 떳떳함을 알고 있다"
(Rolland, 일역본, p.55-56)는 간디의 말에서 미루어 보다도 알 수 있다.
  간디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진리를 행동으로
추구하는 자가 만일 자기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허위와 부정의 세력인 적을 폭력으로
타도한다면, 그는 단지 외관상의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따름이요, 실은 그 싸움에 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정신적 성장은 억제당하고, 그의 진리추구는 쉬워지기보다는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자기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개인들은 사실 악한 세력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며, 진정한 적은 그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안에 많건 적건 깃들어 있는
폭력의 세력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과 싸우면서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진정한 적을 잊고 있다.
  * : 아힌사에 관해서 간디는 소년시절부터 뼈저린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15세 때 형의
팔찌에서 금을 조금 깎아냈지만, 양심의 가책을 이길 길이 없어 마침내 그 고백을 써서
부친에게 주었다. 그 속에는 고백과 아울러 그것에 대한 적당한 벌을 달라고 씌어 있었다.
부친은 당시 치질로 누워 있었다. 부친이 그것을 다 읽고 나자, 진주와 같은 눈물이 탐을
흘러 그 종이를 적시었다. 부친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그 종이를 찢었다. 나는
소리내어 울었다. 이 광경은 지금도 생생하게 마음에 남아 있다. 부친의 사랑의 눈물은 나의
마음을 정화하고 내 죄를 씻어주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아힌사에 대한 사실상의 교훈이었다.
당시 나는 이것을 부친의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순수한
아힌사였음을 알고있다. 그런 아힌사의 정신이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되면, 그것은 접하는
일체의 것을 변질시킨다. 그 힘에는 한계가 없다."(Autobiography, PP.27-28)
 @p96
  또한 그는 1902년 12월, 제 2차 귀국 후 남아프리카에 돌아갔을 때, 더반에 상륙하자,
그릇된 정보를 믿고 있던 백인들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도 그들을
용서해주라고 했고(같은 책, p.195) 또 1911년에서 1912년 무렵, 피닉스 농원에서 두 사람이
부도덕한 일을 했을 때, 간디는 그들을 벌하는 대신에 자기 스스로가 참회하기 위해 7일간
의 단식과 4개월 반의 기간에 걸쳐 1일 1식밖에 취하지 않았다(같은 책, p.342). 간디의
일생을 통해서 보면 이렇듯 아힌사를 실천에 옮긴 예는 허다하지만, 요컨대 그때마다
간디는 아힌사의 위력을 절감하고 점점 더 아힌사를 믿게 되었다.
  만일 그가 악한 세력의 회생자인 외부의 적을 동정과 사랑으로 대하는 한편, 내부의 적인
자기 자신의 사나운 격정과 싸우며 이에 이긴다면, 그의 인격은 평정을 얻고 그의 시각은
투명하게 되어 자기 앞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진리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힌사의 길이다. 구도자는 이 길을 통해서 진리에로 전진할 수 있는 동시에, 그의 인격의
매력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개심케 하여 자기와 보조를 맞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디는 이 아힌사의 놀라운 힘을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아힌사를 비단 개인을
개심시키는 데뿐 아니라, 사회적 부정과 싸우고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심지어는 외국의 침략에 대해 조국을 방위하는 데도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리의 추구를 방해하는 내부적인 적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것은 성욕과 소유욕인데,
그것들은 무한히 확대할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자비하게 억제하지 않는 한,
그것들은 인간의 온 인격을 지배하고 심적평정을 교란하고 판단을 그르치게 하며 생각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구도자는 브파흐마차르야와
아파리그라하를 준수함으로써 일반적으로는 사나운 격정을 누르고, 특수하게는 성욕과
소유욕을 억제하기 위하여 사랑의 침을 빌어야 한다는 것이다.
 @p97
  (3) 브라흐마차르야
  브라흐마차르야는 '순결'이며 경우에 따라 '자제' 또는 '자기정화'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단순히 '성욕의 억제'라고 이해되고 있지만, 이런 식의 이해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간디는 먼저 그런 오해를 일소하기를 원한다.
  브라흐마차르야는 문자 그대로는 "브라흐만(*) 곧 진리를 탐구하는 데 적합한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브라흐마차르야의 완전한 실행은 브라흐만의 실현을 의미한다."
(Autobiography, p.208) 그러므로 간디는 "브라흐마차르야는... 결코 간단히 달성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또한 단순히 육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브라흐마차르야는
육욕의 억제에서 시작되기는 하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Autobiography, p.317)
라고 술회하면서, 그것을 위해서는 "전감각기관의 통제, 더 나아가서 생각, 말, 행위의
일체의 통제 없이는 불가능하며" (옥성강사랑, 위의 책, p.370) 특히 미각의 통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Autobiography, p.209).
  * : 브라만교의 최고원리 또는 신이다. 신이나 최고존재를 의미하는 경우에는
비인격적이며 일체의 성격과 행동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말로는 범이라고
옳기고 있는데, 쉽게 말하면, 신 내지 진리라 해도 좋다.
  감각적으로 싫지 않은 것을 영원히 포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간디는 감각적 욕망은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목적에 이바지할 때에만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음식물은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고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서 취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성욕도 단지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수의 아기를 낳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성교는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p98
  브라흐마차르야를 완전히 달성하려는 사람은 육욕에 관한 것을 꿈도 꾸어서는 안되지만,
간디는 육체적인 행동이나 말을 통제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으나 생각에 관해서는 노력해야
할 점이 많으며, 깨어 있을 동안은 그래도 불순한 생각을 억제할 수 있으나 잠잘 동안은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부단히 노력은 하고 있으며,
살아 있는 동안에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는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생각의 통제에 의해서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안되고,
아무래도 신의 은총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생각, 말, 행위에 관한 전감각기관의 통제에 의해서 브라흐마차르야는 점차 그 실현의
방향으로 나가고, 이와 더불어 일종의 생명력이 체내에서 배양되게 된다. 만일 이 생명력이
올바른 목적을 위해 옳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최고단계의 창조적 에너지로 된다. 게다가
생각, 말, 행위 중에서 생각이 말과 행위의 근원이므로 완전히 통제된 생각은 그 자신
최고의 잠재력이며 따라서 최고의 자활력으로 될 수 있다.
  (4) 아파리그라하
  아파리그라하는 '비소유'이다. 여기서 소유란 '장래를 위한 준비 '(옥성강사랑, 위의 책,
p.374)를 의미한다. "조물주는 그날그날의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족하리만큼은
만들어내고 있으므로 만일 각자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하고 그 이상은 취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는 아사자는 없을 것이다." (Husain, p.30) 그러므로 아파리그라하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된다면, 그날그날의 식사로써 족하며, 그날그날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인간이 아니라 조물주의 임무이다. 그러나 비소유의 문제를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육체도 하나의 소유로 된다. 육체는 힌두 사상에 의하면 '카르마'(karma)(*)의 결과이며,
달리 말하면 향락에 대한 욕망의 결과이다. 그 때문에 모든 생물은 한결같이 생사유전의
윤회 속에 있게 마련이다. 만일 이 욕망이 없어진다면, 육체가 존재할 아무런 필요도 없게
되고, 우리 인간은 윤회에서 해방되어 우리의 정신은 자유독립의 존재를 얻을 수가 있다.
  * 카르마: 힌두교의 재생의 관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카르마의 법칙에 얽매어, 전생에
있어서의 그 행동의 결과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즉 전생에서 지은 선악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천세에서 응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과, 운명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없이라고 번역된다.
 @p99
  따라서 육체의 욕망을 포기하는 일이 비소유의 이상이다. 그러나 육체가 있는 한은, 이
육체를 사회봉사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단지 봉사를 위해서만 먹고
마시고 자며 깨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야말로 인간에게 실제적인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디의 말대로, 이 비소유의 이상은 달성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서,
현사회상태하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것을 달성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간디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이상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의
소유를 필요한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간디의 종교, 도덕 철학에 있어서의 브라흐마차르야와 아파리그라하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다음 두 가지 점을 명심해야 한다(Husain, p.28) .첫째로, 간디는 많은 교양 있는
힌두교도들처럼, 베단타(vedanta)파(*) 의 일원론을 믿고 있었다.
  * : 힌두 철학의 여섯 파 중 가장 중요한 일파이다. 우파니샤드를 근본으로 하는 우주의
일원론적인 철학이다.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 존재의 부분들을 이루고 있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당연한
귀결에 도달한다. 따라서 진정한 자아의 실현을 원하는 각 개인은 만인에게 좋은 일은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만인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 그러나 관능적
쾌락과 개인적 소유는 이성의 빛을 가리게 하며, 그런 욕망에 사로잡힌 개인은 무지와 이기주의
속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라는 위대한 진리를 잃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간디에 의하면 성욕과
세속적 소유를 버리는 일이야말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필요한 단계이다.
 @p100
  둘째로, 자기 삶의 방향을 전환시킨 간디의 근본적인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이 겪고
있는 고난은 이 세상에서 가장 뚜렷한 실재라고 확신케 했다. 그는 이 삶과 이 세상은
비실재적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반대하였다. 고통과 고난은 실재하고 있다는 이 어쩔 수
없는 의식 때문에 그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실재성을 이 세상에 부여했다. 환희나 행복은
허무하고 무상한 세상에서 한낱 꿈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동포가 겪고 있는 고난을
비실재적인 것이라고 하여 잊어버릴 수는 언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의 고난은
냉엄한 현실이라는 것이 간디의 주장이었다. 인간의 고난은 엄연한 현실이라고 느낀 것이
간디의 기본적인 경험이었지만, 그런 고난에 끝장을 내고야 말겠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결심이었다. 이런 결심이야말로 그의 온 마음을 지배하던 생각이요, 그의 온갖 행동의 밑에
깔려 있던 동기였다. 사실 그의 종교적 및 도덕적 가르침은 다름아닌 이런 내적 충동의
합리화 내지 지적 해석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동포에 대한 사랑과 봉사에 전심,
전력하도록 원했다.
  그런데 다음 세 가지 요인들 즉 #1 증오, 복수심 등과 같은 사나운 격정, #2 감각적 욕망,
특히 성욕, #3 취득욕과 소유욕이 그들로 하여금 전심,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한편 그는 아힌사, 브라흐마차르야, 아파리그라하를 통해서 위와 같은 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진리와 구원을 달성하는 유일한 수단인 사랑과 봉사의 힘을 발휘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전통적 종교가 강조하던 기도나 단식과 같은 다른 수단도 역시
중요하다고 간디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봉사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런 수단은 아무런
의미도 효과도 없다고 그는 믿었다.
  이런 관점에 서서 보아야만 성욕 억제에 대한 간디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사회적 본능이라고 보는 이 성욕이라는 본능은 간디의 견해에 의하면
비사회적 내지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랑을 한 사람에게만 배타적으로 주기 때문이다.
 @p101
  그러므로 간디는 사랑과 진리에 전심, 전력을 바치려는 사람에게는 결혼을 금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건부로 결혼을 허용한다. 즉 원하는 수의 아기를 낳으면, 부부관계는
동지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유에 관해서는, 간디는 자기의 직접적인 필요 이상의 소유는 만일 그것을 단순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보유한다면, 확실히 사랑과 봉사에의 길을 가로막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인의 이득을 위해 수탁자로서 자신의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므로 그는 소유를 무조건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자기의 소유를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전적으로 불법이며, 그것은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보았다.
  (5) 브레드 레이버
  '브레드 레이버' (bread-labour)란 "빵에 대한 권리를 얻기 위한 생산적인 손일"(Husain,
p.30)이다. 간디에 의하면, 자기 소유의 이기적 사용 이외에도 진리에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도둑질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손일에 의해서 무엇인가 생산함으로써
남에게 이바지하는 일은 하지 않고 단지 남의 노동의 성과만을 향유하는 일이다. 따라서
간디의 종교, 도덕률의 다섯 번째의 기본 원리는, 손일을 직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도
정기적으로 어느 정도의 브레드 레이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디가 장려한 물레질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이미 남아프리카 시절에 순전히 종교적 및 도덕적 원리로서 브레드 레이버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 돌아온 후 그는 브레드 레이버의 최선의 것으로서 물레질을
택하였다. 물론 이에는 정치적 및 경제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주동기는 여전히
종교적, 도덕적인 데 있었다. 간디 자신의 말대로, 그는 이 아이디어를 처음에는 러스킨과
톨스토이에게서 얻었고, 나중에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그의 신념을 한층 더 굳게 했다.
 @p102
  이 이외에도 간디는 사랑과 진리의 이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힌두교의 다른 두 교의에
관해서도 강조하였다. 하나는 도둑질과 착취를 하지 말라는 '아스테야'(asteya)이고, 다른
하나는 공포심을 갖지 말라는 '아브하야'(abhaya)이다. 간디는 특히 신 이외의 누구에
대해서도 공포심을 갖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공포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고상한
성품들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하다.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거나 진리를 소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Husain, p.31)고 역설하였다.
  * : 네루는 그의 [인도의 발견](p.311)에서 "개개인에게도, 민족 전체에게도 간디의
최대의 선물은... 아브하야, 즉 공포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S.H.루돌프도 인도에 대한 간디의 최대의 공헌은 인도 민중의 가슴속에서 공포심을
제거하여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민족자존을 위해 귈기케 한 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The
New Courage; An Essay on Gandhi's Psychology," World Politics vol.16, no. 1, Oct.
1963).
  이상으로 우리는 간디의 종교적 및 도덕적 사상-개인의 정신훈련에 관한 한-의 윤곽을
대강 살펴보았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간디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신비적이기보다는
예언자적이었으므로, 그는 단지 개인에 있어서 뿐 아니라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종교적 및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그의 종교와 도덕에 대한 개념은 아직 완전히
논해진 것은 아니므로 다음 항에서 사티아와 아힌사에 의거하는 그의 사회에 대한 사상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2. 사회적 이상
  1) 종교적 이념과 사회적 이상
  간디의 종교의식은 신비적이기보다는 예언자적이기 때문에, 그는 진리에의 길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직관의 명멸하는 섬광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도덕을 통해서 훈련된 이성의
한결같은 빛에 의거하였다. 그러나 간디에게 있어서는 도덕이란 고의 이른바 '지상명령처럼
비인격적인 엄격한 법칙은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나타나는 '사랑의 법'이었다.
그러므로 진리의 추구는 종교와 도덕의 길을 따라 그를 사회봉사의 영역으로 인도했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신의 실현이니만큼 인간의 온갖 사회적, 정치적 및 종교적 활동은
신을 본다는 궁극적 목적에 의해서 인도되지 않으면 안된다. 온 인류에 대한 직접적인
봉사가 인간의 노력의 불가결의 임무로 된다. 그 이유는 신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신을
그의 피조물 속에서 보고, 그것과 하나로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온 인류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Husain, p.32)고 간디는 말했다.
  그러나 간디는 온 인류 중에서도 우선 인도 국민에게 봉사하기로 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은 남을 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남을 구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먼저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같은 책, p. 12)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실로 인도 국민은 내적 불화와 도덕적 퇴폐 때문에 정치적으로
예속당하여 말할 수 없는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들을 도덕적, 경제적 및
정신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그중에서도 특히 억압당하고 낙후되고 있는
계층들에게, 자존심과 자기신뢰감을 주입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이것은 외국인이건
인도인이건간에 그들의 착취자에 대해서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권리를 위한
비폭력 투쟁을 수행하도록 격려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봉사와 사화개혁의 대의와 더불어 사회정의와 정치적 자유의 대의를 높이
쳐들어야만 했다. 그는 진리를, 즉 신을 추구하는 구도자였으나 신은 민중, 그것도 특히
억압당하고 있는 계층에 대한 봉사 없이는 찾을 수 없다고 믿었지만, 그런 계층에 대한
봉사는 정치에 참여하지는 불가능하므로 그는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p104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대한 간디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동기에 연유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 좋은 사회나 국가는 목적 자체는 아니고, 그의 이른바 진리 또는 신 혹은
구원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별로 강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그는 정치에 관여할 때에는 언제
나 전심, 전력을 다했다. 이는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도덕철학에서는
수단은 목적에 못지 않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논한 대로, 간디는 수단을 목적과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목적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간디에게
있어서는 진리와 비폭력에 의거하는 정치활동은 곧 진리 그 자체를 실현하는 한 단계였다
  그러므로 간디의 사회적 이상을 이해하려면, 그런 이상을 그의 종교적 배경하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의 앞날의 생애의 전과정을 결정했던 남아프리카에서의 근본적인
경험에 관해서 이미 살펴보았다.
  그가 단순히 인도인이기 때문에 당했던 모욕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그는 느꼈다. 이 사실은 자기의 중심적인 종교적 이념과 밀접히 관련되던 그의 기본적인
사회적 및 정치적 개념이 인간 인격의 위대성, 즉 인간 인격의 자유와 존엄의 신성성에
대한 개념이었음을 드러내준다. 그의 사회적 이상은 오든 개인에게, 약간의 육체적
안락에다가 개인 인격의 완성과, 신의 실현을 의미하는 자기표현 및 자아실현을 위한
최대의 자유와 기회를 마련하려는 일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완전한 지적, 도덕적, 정신적
발전은 오직 각 개인이 최대의 자유와 최대의 존엄성을 누리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므로 각개인 안에는 신의 신성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다 같이 존경받을 가치가 있으며, 개인에 대한 모욕은 모든 신의 피조물에 대한
모욕이 된다.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와 존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온갖 사회적 부정의와 경제적 착취가
없는-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없는-진리와 사랑의 터전 위에 인간사회를 세울 필요가 있다.
 @p105
  간디는 이런 사회가 어떠하리라는 데 대해서는 명백히 제시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을
그에게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사회적 흑은 정치적 이론가가 아니라 도덕적,
정신적 개혁가였다. 그가 스스로 열중한 과업은 이상사회에 관한 공들인 이론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으로 하여금 그런 이상사회에 대한 매혹적인 별견을 가지게 하여, 각
개인으로 하여금 그런 사회를 위해 자기정화와 자기수양을 통해서 준비케 하려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수단을 조심하면 목적은 자연히 스스로를 돌보리라"는 그의 원리에 따라, 간디는
여기저기서 자기가 그리는 이상사회의 특징에 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 정도로 그쳤다.
그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고자 비폭력투쟁을 위해서 인도와 다른 국민들을 훈련하기를
원하던 그 수단에 관해서는 보다 충분히, 보다 치밀하게 논하였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런 수단은 새 교육, '건설적 프로그램' 및 사티아그라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간디가 '라므라자' (Ramraja.신이 다스리는, 또는 순수한 도덕적 권위에 의거하는
이상사회)에 대해서 가끔 한 짤막짤막한 말들은 희미하나마 그의 이상사회의 윤곽을
드러내주고 있다.
  2) 라므라자
  간디가 그리던 이상사회인 라므라자의 윤곽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간디의 근대문명
비판과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간디에 의하면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영국인이 아니다. 철도, 전신, 전화 그리고
문명의 승리라고 일컫는 거의 모든 발명에 의한 근대문명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며,
"봄베이, 컬커타, 기타 인도의 주요 도시는 참으로 악덕의 중심지"이다. "비록 내일 영국의
지배가 근대적 방법에 의거하는 인도인의 지배로 대치된다 하더라도, 영국이 빼앗아가던
화폐를 약간 인도에 붙잡아둘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도인의 생활은 나아지지는
않으리라"고도 말하고 있다. 또한 의학은 "농축된 흑마술의 엑스(extract)"치며, 병원은
"악마가 그 왕국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해온 도구이며...
악덕, 불행, 퇴폐와 진정한 노예화를 영구화하는 것이다....만일 성병 또는 폐병을 고치는 병
원이 언었더 라면, 폐병 환자와 성적악덕은 훨씬 적었으리 라" (Namboodiripad, 일역본,
p.24)는 것이다. 그리고 "기계조직은 큰 죄악이다... 그것은 국민을 노예화한다. 또한 금전은
독이다. 성적인 악덕과 마찬가지로..."라는 것이다.
  요컨대 로맹 롤랑의 말대로 허위, 탐욕, 포악으로 차 있는 근대문명의 진상을 20년간에
걸친 남아프리카 체재를 통해서 간파한 간디에게는 "문명이란 단지 이름뿐이다. 힌두교의
표현을 빌면 바로 '암흑시대'이다. 그것은 물질상의 행복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은 조금도 영혼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럽인을 미치게 하여
그들을 금전의 노예로 만들고, 그들에게 평화와 내면생활마저 누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약자와 노동자계급에게는 지옥이다. 그것은 민족의 생활력을 소모시킨다. 이
악마문명은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리라. 영국인은 개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지만
문명병에 걸려 있다. 그러므로서 양문명이야 말로 인도의 진정한 적으로 보였다"(Rolland,
일역본, PP.46-47).인도의 구제는 그런 문명병에 걸리지 않는 데 있는 만큼 철도, 전신,
병원, 변호사, 의사 등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간디는 그런 것들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며, 자연적으로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음에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간디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간디의 기본적인
정치적 개념에 있어서는 개인이 사회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사회적
요인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도덕적 및 정신적 발전은 물론 최고의
정치적 가치를 가지나, 그러한 발전은 오직 통로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사회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의 자유는 최고로 신성한 것이나 아무런 한계도
없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자유와 복지에 의해서 제약되어야만 한다.
 @p107
  이는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이 전체사회의 복지를 위하여 사회적 억제에 순종하는 편이
개인과 그가 속해 있는 사회를 다같이 부유케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여러 가지 기본권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간디는 충분한
지적 및 도덕적 발전을 위한 권리라는 오직 하나의 기본권만을 믿고 있다. 그리고 간디에
의하면, 이와 같은 발전은 각 개인이 동포에 대한 봉사에 헌신할 때에만, 달리 말하면,
사회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의무를 다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한다. 만일 각 개인이
타인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 안
가서 누구도 그의 여러 권리를 요구할 필요가 없게 될-요구하지 않아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에-사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그들의 의무는 등한시하고, 그들의
권리만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 유리한 상태로 인도하지는 않을 것
이다.
  간디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는 개인이 자기의 도덕적 내지 정신적 바탕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을 저해하는 밖으로부터의
제약은 없고, 필요한 모든 억제는 자신의 양심이나 도덕의식에 의해서 안으로부터 핵해진다.
그런 사회는 협소한 자치단위들로 구성되는 지방분권화된 사회가 아니고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다. 광대한 중앙집권화된 사회나 국가는 폭력의 사용 없이 유지될 수 없을 터인데,
이는 비폭력이라는 간디의 이념과는 양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분권화된 사회 속의 한 작은 단위는 마치 한 가족과도 같아서, 그 안에서는 개인은
인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광대한 중앙집권화된 사회나 국가는 사랑의 명주실
대신에 법의 철제로써 개인을 묶어 매는 하나의 거대하고도 몰인정한 조직체이다. 따라서
간디는 어떠한 형태의 국가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는 서방제국에 현존하는 온갖 유형의
국가는 각각 그 국민의 체질에 적합한 것이므로 인도는 그런 국가를 본뜰 것이 아니라
인도에 적합한 라므라자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108
  그는 라므라자에 관한 완전한 구상을 제시한 바는 없으나 그래도 한가지 사실만은 꽤
분명하다. 즉 그의 라므라자는 완전한 무정부상태요, 인간성에 내재하는 도덕률 이외의
어떠한 법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고, 사랑의 침 이외의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 하나의 국가없는 사회이다.
  이와 같은 비폭력, 무국가 사회에서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에 족한 힘은 사티아그라하의
형태로 사용되는 사랑의 힘 또는 영혼의 힘이다. 사티아그라하는 한 개인이나 계급 또는
국가에 의한 각각 다른 개인이나 계급 또는 국가에 대한 억압이나 착취에 항거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간디는 생각하고 있었다. 사티아그라하의 영묘한 힘은 억압자의
마음속에 여태까지 잠재하고 있던 사랑의 감정을 깨우치게 하여 그 억압자는 아무런 외부적
압력 없이도 그자신의 보다 고상한 품성의 개발을 통해서 공정하게, 그리고 심지어는
관대하게 행동하려고 하게 된다. 많은 사색과 실험을 한 뒤에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의 온갖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이에 관해서는 다음 실천의 장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모든 개인이 똑같은 고유한 가치를 가지는 간디의 이상사회에서는, 정치적 평등뿐 아니라
사회적 평등도 자연히 있게 될 것이다. 그 사회에서는 출생이나 직업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고귀하다거나 우월하다고 보는 의미에서의 카스트나 계급의 구별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어받은 소질에 의거하는 여러 종류의 카스트(본래의 의미의)는 존속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분업의 건전한 원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한된 의미에서
카스트제도를 용인하던 간디는 계속 카스트의 사슬을 풀어 그것이 제약하거나 속박하는
힘으로는 되지 않도록 하려고 애썼다. 그는 비단 모든 카스트들 사이의 완전한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카스트에서 기질과 능력에 보다 적합한
다른 카스트에로의 이동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카스트제도는 결국, 모든
어린이는 각자의 세습적 직업을 위한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가 자기 안에서
다른 직업에 맞는 각별한 소질을 발견하지 않는 한, 자기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이론이
되고 만다.
 @p109
  만일 인도가 독립하여 세계의 선망의 대상이 될 모범적인 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의사,
변호사, 상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하루의 성실한 일에 대해서 똑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간디는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간디의 사회적 이념과 경제적 이념과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는 경제적 평등은 사회적 평등이라는 도덕원리의 필연적인 귀결로써 받아들인
듯하다. 경제에 대한 그의 기본적 태도는 정치에 대한 그것과 동일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가치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가치도 도덕적 가치에 종속된다.
따라서 도덕원리를 고려에 넣지 않은 경제학은 배척되어야 한다.
  경제학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최선의 방법을 발견하고자 하는 과학이다.
간디에 의하면, 이 방법은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참된 행복은 우리의
욕망을 무한히 증가시키고,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우리를
완전히 지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적당한 한계 안에 머무르게
하는데 있다. 적당하고 정당한 욕망의 기준은, 그런 욕망의 충족이 인류에 봉사하는 우리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간디는 물질적 안락을 그 자체가 악한 것으로 보고, 금욕 그 자체를 가르치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견해는 이렇다. 즉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정신적 발전에 있지만, 이는
오직 동포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 달성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아 물질적
안락이 우리를 돕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허용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물질적 안락이 나태를 낳고, 정신적 발전으로 인도하는 봉사의 길을 가로막게 되면, 그것은
확실히 악이 된다. 심지어 지적인 쾌락도 마땅히 이런 기준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간디는 경제적 가치를, 그리고 문화적 가치까지도 독립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도덕적 및 종교적 가치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p110
  그는 우리에게 적당한 물질적 및 지적 쾌락은 이를 허용하지만, 동시에 그는 육체적 및
지적 필요의 충족이 '관능적 쾌락 추구'에로 타락하지 않도록 경계하기를 원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관능적 쾌락'이란 우리가 인류에 봉사하는 것을 막는 쾌락을 의미한다. 그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자제이다.
  그러나 간디는 인간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제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속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억제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연구한 일은 없으면서도 간디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칩을 통해서, 단순한 억제는 신경을 과민하게 하고 정신적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러한 억제는 정신적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는 그릇된 자제이다. 참된 자제는 생의 보다 높은 목적에 대한 갈구가 심히 커서,
세속적인 쾌락은 그것에 대한 방해로 자발적으로 거부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면 간디가 단지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적절한
육신의 안락은 어느 정도의 것일까 ? 달리 말하면,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필요가 어떠한
경우에도 각 개인마다 충족되어야 할 근본적인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간디는
적빈이나 궁핍을 찬양하기는 커녕, 그것은 도덕적으로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린다고 하여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요컨대 인간의 기본적인 물질적 요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한, 마음의 평정이나 정신적 만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는 의, 식과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주를 포함한다.
간디에 의하면, 이와 같은 의식주의 기본적 필요를 만인에게 확실히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회는, 각 개인이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족할 만한 일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이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직접적 사용을 위해서 생산되는 사회이다.
물론 이와 같은 두 특징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지만, 국가나 정부가 존재할 여지가
없는 간디의 라므라자는 오늘의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심지어 경제면에서도
그것은 현존하는 사회주의 사회와는 아주 다르다.
 @p111
  나의 견해에 의하면, 인도와 세계의 경제조직은 그 조직하에 있는 누구도 의, 식의 결여로
고생해서는 안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누구도 의, 식의 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족한 일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상은 오직 기초적인 생활필수품의
생산수단이 대중의 수중에 들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보편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생산수단은 공기와 물처럼 만인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다른 이들의 착취를
위한 수단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어느 국가, 민족 또는 집단에 의한 생산수단의 독점은
부당하다. 이 간단한 원리를 등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단 이 불행한 나라에서 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역시 궁핍을 목격하고 있다. (Husain, p.42)
  간디의 이러한 견해를 만일 우리가 그의 종교적 및 도덕적 주장에 비추어 검토해 본다면
그와 같은 이상적 경제제도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는 제도임을 알게 된다.
 #1 각자가 손일을 통해서 자기 생계를 세울 기회를 갖는다. 간디의 경우에는 브레드
레이버는 하나의 중요한 종교적 원리이다. 그 원리는 각자가 자신의 손으로 토지를
경작함으로써 스스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을 때에만 엄격하게 준수될 수 있을
뿐이다.
 #2 식량과 기타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 토지는 어느 개인이나 개인들에 속하지는 않고,
'대중의 수중에'들어 있으므로, 대중은 그 토지를 '공기와 물처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대중의 수중에 들어 있다'는 것은 촌락내의 토지 전체가 촌락공동체의 소유물이어야
하며, 모든 촌락민은 집단적으로 또는 공동으로 토지를 경작해야 함을 의미한다.
아파리그라하의 원리에 반하는 토지의 개인소유는 간디의 라므라자에서는 허용될 수가 없다.
  게다가 만일 토지가 어느 개인 또는 개인들에 속한다면, 토지는 만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고, 또한 브레드 레이버의 원리가 보편적으로 준수될 수는 없다.
 @p112
 #3 식량과 의복은 직접사용을 위해서 생산되어야 하지 무역이나 상업을 위한 상품으로서
생산되어서는 안된다.
  분명히 이러한 조건들은 협소한 자급자족적인 촌락공동체들로 구성되는 지방분권화된
농촌경제에서만 충족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사회질서만이 국가와 정부, 군대와
경찰을 필요 없게 하는 엄격하게 비폭력적인 것으로 될 수 있다. 중앙집권과는 필연적으로
이런 온갖 폭력의 수단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협소한 자급자족적인 촌락공동체에 의거하는 지방분권화된 농촌경제야말로 간디가
생각하던 비폭력의 소극적인 조건과 아울러 적극적인 조건도 충족시 켜준다. 즉 그런
경제는 단지 사회에서 폭력을 필요 없게 할 뿐 아니라 사랑과 봉사도 장려해준다.
사회생활에 대한 간디의 견해에 따르면, 각 개인과 다른 사회성원과의 관계는 그와 그의
가족과의 관계에 못지 않게 친밀해야 한다. 그런 관계는 오직 협소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 비록 한 개인이 그의 사랑을 협소한 범위에 국한시킨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와 강도를 보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스와데시에 관한
간디의 교의 밑에 깔려 있는 생각인데, 스와데시야말로 그의 경제학의 도덕적 기초를
이룬다. 간디에 의하면 스와데시란 먼 곳은 그만두고 바로 이웃에 대한 봉사에 우리를
국한하려는 우리의 정신이다(Husain, p.43).
  그러나 우리의 바로 이웃에 대한 봉사는 온 인류에 대한 봉사정신과 융합되어야 한다.
그것은 목적 자체로서가 아니라, 온 인류의 복지라는 더 큰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비폭력적 사회는 필연적으로 지방분권화된 농촌경제를 의미하듯이,
농촌경제는 이번에는 수공업에 의거하는 소규모 공업을 암시하는데, 그 중에서 간디는
물레를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택하였다.
 @p113
  간디는 왜 대규모적인 기계공업을 싫어 했는가는 앞에서 논하였다. 인도교(초자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취지로 하는 종교)에서는 가장 고약한 죄악은 어떤
개인이나 국민이 다른 개인이나 국민을 억압, 착취하는 일이었다. 초는 국제긴장과
국제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선진 공업국가에 의한 후진국가의 착취에 있음을 관찰을 통해
발견하였다. 따라서 그는 현대공업과 그 수단인 기계를 온갖 불행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물론 기계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기계가 한 국민에 의한 다른 국민의 착취라는 이겨내기 어려운 유혹을 제공한다고
믿어 마지않았다. 순수한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기계는 기아와 빈곤을 몰아내고 모든
인간에게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으므로, 그것은 인류에게 하나의 큰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간디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및 도덕적인 것이다. 비록
간디가 산업화가 불가피하게 실업과 착취에로 이끌리라는 그의 신념이 잘못임을 설득당하여
기계가 만인의 복지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또 다른
도덕상의 이론이 여전히 남아 있다. 즉 만일 생산이 몇몇 산업중 심지에 집중되고, 그
분배를 위해 복잡하고 성가신 방법들이 채용된다면, 부정직한 사람들이 사기와 모리와
투기의 기회를 가지게 마련이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그런 것들은 모두, 각자가 자신의
용도나 바로 이웃에의 분배를 위해서 자기 손으로 물품을 생산하는 소규모의 자급자족적
단위로 구성되는 지방분권화된 농촌경제를 채택함으로써 비로소 제거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박하고 목가적인 경제질서를 인도에서 이룩하려는 것이 간디의 꿈이었다.
그는 모든 농촌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필요를 바로 충족하기에 족할 만큼은 생산하는
자급자족적인 단위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는 기계 자체에 반대한 것도 아니고, 현대식
기계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보던 이윤과 착취를 위한 생산에 반대하였다. 만일 그런 기계가
촌락 자체내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그것이 그 자급자족적인 경제를 방해함이 없이 사용될
수 있다면, 그는 결코 기계에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기계가 대규모의 산업화의
수단으로 된다면, 촌락은 착취와 파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촌락의 종말은 인도의
종말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국토는 자연적 실체로서 계속 존재할지는 모르나 그 온 성격은
타락하게 되어 그 수립이 인도의 사명인 비폭력적 사회에 대한 온갖 희망을 사라지게 하고 말
것이다.
 @p114
    3. 독립 후의 인도상
  1) 타협
  진리와 사랑은 간디에게 있어서는 도덕행위의 최고형태인 동시에 동일한 절대적 실재의 두
측면이다. 진리와 사랑의 완전한 실현은 그의 종교적 이상이었지만, 그런 이상을 사회생활에
적용하여 구상해낸 것이 그의 '라므라자'라는 사회의 이상이었다. 만일 그가 단순한
환상가요, 자기의 사회적 이상은 그 구상에 있어서 완전하다고 믿을 수 있었더라면, 그는
자기의 이상을 공들여 생각해내어, 그것을 가능한 한 최단시일 안에 실현시키도록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디는 '실제적인 이상주의자였다(holland, 일역본, p.53). 따라서 그는
진리와 사랑의 이념을 인간이 일찍이 생각해낼 수 있었던 그 어떤 사회적 이상으로 나타낼
수는 결코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회적 이상도 완전무결하거나
최종적일 수는 없다. 게다가 그는 이런 불완전한 이상마저 용이하게 또는 신속하게 실현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라므라자'는 사람들이 그것을 향해 나아가면
갈수록 점점 뒤로 물러서는 머나먼 하나의 목표였다. 그러나 [기타]에서 선언한 사심 없는
행위의 원리를 간디는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구도자가 진리를 추구하면서
내딛는 하나의 발걸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였다.
 @p115
  간디는 자기의 사회적 이상은 먼 저편에 있으므로, 가까운 장래에는 도달될 수 없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면 간디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에 의해서 대치될 때까지는 현사회질서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기를 원했을까? 그의 가르침도 그의 실천도 다 같이 환경과의
적절한 타협에 찬성하고 있다. 실제 타협은 간디의 도덕철학의 극히 중요한 원리이다. 그는
타협을 크게 강조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어떠한 사회적 이론이나 이상도 불완전하므로
누구도 자기는 절대로 정당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얼기 때문이다. 둘째로, 어떠한 이상도
달성하기는 어려우므로 일반적으로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틈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타협은 원리 원칙상에서가 아니고 세목에서만, 본질적인 것에서가 아니고
비본질적인 것에서만 허용된다. 네루는 "간디는 몇몇 원칙은 바위와도 간이 고집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 및 환경에다 순응시켜, 다른 사람들 특히 국민대중의
강약과 그들 대중이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어느 정도까지 실행할 수 있는가를
고려하는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Discovery, pp.390-91)고 말하고 있다.
  간디의 견해에 따르면, 세부의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사항에 있어서의 타협은 단지
허용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런 타협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이의 마음속에, 생명을 바치고라도 본질적인 것만은 견지하려는 의지를 강화해주기
때문이다. 간디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진리, 사랑,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는 하나라는
것 등이다. 이런 도덕원리에 대한 그의 신념은 절대적이며 확고부동하다. 이 신념을
약화시키거나 변질시키는 어떠한 타협도 그로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원리들을
실천에 옮김에 있어서는 그는 환경이나 인간성의 여러 약점과 기꺼이 타협을 한다.
그렇지만 타협은 그런 이상을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해보았으나 실패한 연후에 한하며, 또한
타협은 그 이상의 높은 수준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해져야만 한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 이상을 변질시키거나 그것을 자기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그때그때 부득이 타협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이상에 도달하려고 부단히 성의껏 노력해야만 한다.
 @p116
  개인들에 관한 한, 만일 그들이 확고한 신념과 굳은 결의를 가지는 경우에는, 그들은
역경에 처해서도 더 높은 도덕원리를 지킬 수가 있고, 또한 스스로 세운 개인적인 이상을
달성하는 데 간혹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적 이상은 그때그때의 환경에 훨씬 더
의존하고 있는데다가 그런 이상은 서로 다른 기질과 능력을 가지는 사람들의 일치된
공동행동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런 이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많은 요인들을
고려에 넣어야 하고, 또한 그때그때 타협을 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상이하며
때로는 상충하는 여러 견해들을 조화시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간디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라므라자의 꿈은 가까운 장래에는 실현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간디는 인도국민에게 권하던 머나먼 여행의 제한된 제 1단계를 간단히
말함으로써 타협을 지었던 것이다.
  2) 제1단계
  인도가 독립을 하게 되면, 간디는 자기의 이상인 전적으로 비폭력적인 사회에 이르는
하나의 준비단계로서 적절하게 비폭력적인 세속민주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과도기적 계획에 관해서 가끔 논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그가 자기의 궁극적인
사회적 이상에 관해서 논한 것들과 뒤섞여 있다. 그런데 S.A.후세인에 의하면, 부주의한
독자는 간디의 정치적 및 사회적 이념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고 오해하기 쉬우나, 그런
이념을 주의 깊게 검토해보면 그 이념들에는 두갈래의 뚜렷한 사상경향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한다. 즉 하나는 그가 정책과 방편은 고려에 넣지 않고 그 순수성을 고스란히
보전하려고 하던 완전히 비폭력적인 사회에 대한 이상에 관해서 논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현존하는 환경과의 합리적인 타협을 통해서 가까운 장래에 실현하기를 원하는 국민국가에
관한 실제적 계획에 대해서 논한 것이다. 이 두 경향을 혼합만 하지 않는다면, 간디의
사상에는 아무런 모순도 발견되지 않으리라고 한다 (Husain, p.50).
 @p117
  과도기를 위해서 일망정 어떤 형태의 국가를 용인했다는 이 사실 자체가 간디로서는
최대한의 타협이었다. 왜냐하면 국가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디는 만일 적절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민주국가 안에서는 폭력적인 요소는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민주주의의 정신은 밖에서 부가될 수는 없고, 그것은
안에서 나와야 하느니 만큼 민주주의는 강제(폭력)수단에 의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
(Jawaharlal Nehru, Toward Freedom: The Autobiography of Jawaharlal Hehru, p.189)고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디는 민주국가가 월등하게 비폭력적인 제도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런 민주국가를 인도에 세우려고 애썼다.
  또한 간디의 견해에 의하면 정부나 국가는 성격상 비종교적이어야 한다. 정부나 국가는
특정 종교를 신봉한다고 공언하거나 후원해서는 안되고, 모든 종교에게 신앙, 예배, 설교의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면서 모든 종교를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인도의 이런
국민국가를 위해서, 간디는 서방 민주제국에 현존하는 것과 같은 형의 대의정치를 약간
수정을 가해서 구상하고 있었다. 약간의 수정이란, 간디는 선거권을 직접 손으로 일하여
국가의 생산에 무엇인가 이바지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간디가 구상하던 인도의 스와라지는 국민국가로 되기로 되어 있었고, 그는 "나는 인도와
결혼했다" (Kripalani, 일역본, p.49)고 말할 정도로 인도 민족주의의 선봉이었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는 국제주의를 배제할 정도로 편협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종교는 지리적
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나의 종교에 대한 열렬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인도
자신에 대한 나의 사랑도 능가할 정도로 큰 것이다." "나에게는 애국심은 인류애와 동일한
것이다. 나는 인간이며 인간적이기 때문에 애국자이다. 나의 애국심은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인도에 봉사하기 위해 영국도 독일도 해치고 싶지는 않다." (Kripalani, 앞의
책, p.49) 이런 간디 자신의 말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해방의 사명은 전 인류를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 간디는 국제사회와 국제협조에 대한 최대의 창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가
세계의 모든 진보적 국민의 벗이요 동맹자로 되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인도의 주권의
일부를 양도하여 전세계연방에 가입한다는 생각도 고려해볼 아량까지 가지고 있었다.
 @p118
  "오늘날과 같이 신속한 상호교통과, 온 인류는 하나라는 의식이 날로 커가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우리의 민족주의는 진보적인 국제주의와 상반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인도는 고립해서는 살 수 없으며, 또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에 의해서 영향을 안 받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의 진보적 세력에 편들어야
한다." "세계의 보다 나은 지성은 오늘날, 상호간에 싸우는 절대적인 독립국가들이 아니라
사이좋게 상호의존하는 국가들의 연방을 바란다. 그런 연방의 완성은 까마득한 일일지
모른다.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굉장한 것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의존보다는 보편적인 상호의존을 위한 용의를 갖추고 있음을 표시한다고 해서 그것은
조금도 굉장하다거나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독립을 주장함이 없이
전적으로 상호의존적으로 될 수 있는 능력을 바란다."(Husain, pp.51- 52)
  간디의 국제주의에 대한 개념도 그의 모든 정치이념과 마찬가지로, 그의 기본적인 종교적
원리에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그의 국제주의는 정치인이나 정치철학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앞서 있어, 극소수의 위인을 제외하면 아직 생각해내지 못하던 보편적인 사랑과 형제애의
극치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는 비단 다른 국민들과의 우의와 협조라는 위대한 이상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서 인도의 전자원을 바치며, 필요하다면 인류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도의 생명까지도 회생시킨다는 훨씬 더 위대한 이상을 인도 앞에 제시하였다.
인도 국민국가의 이념과 국제주의의 이념과를 조화시키는 일은 간디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그에게 어려운 일은 국민국가건 다른 형태의 국가건간에 국가의 개념과 비폭력이라는
자기의 기본적 신조와를 조화시키는 일이었다.
 @p119
  인도 국민국가는 비폭력의 원리에 반대되는 경찰과 군대를 가져야만 하고, 또한 이런
국가를 수립하는 데 조력함으로써 그 자신이 어느 정도 완전한 비폭력이라는 길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점을 그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디는 민족독립을 위한
인도의 주장은 진리에 의거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 국민국가가 불가피하게
수반하게 될 폭력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자기가 책임지게 되리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진리의 부름에 응하는 일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의 폭력은 어떠한 국가도 피할
수 없다. 비폭력의 신봉자는 그가 국가 없는 사회를 수립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는 국가를 참아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는, 그는 만일 정부가
진리의 음성을 귀담아 들으려고만 한다면, 폭력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 아래 그 국민정부와 협력해야 한다.
  그래서 인도해방운동의 대다수의 지도자들은 비폭력을 하나의 신조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정책으로서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간디는, 그들의
해방운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하기로 하고, 인도가 독립한 후에는 국민정부와 협력하면서 이
정부를 설득하여 가능한 한 폭력의 사용을 삼가게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인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상무의 전통을 가지는 민족들은 비폭력을 믿지 않고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비폭력을 믿으면서 그런 이상을 애써 달성하려고 하는 집단이
있었고, 언제나 있으리라고 기대해 마지않았다.
  * : 네루는... 우리들에게도 국민회의파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비폭력의 방법이란 종교도
아니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신조도 교의도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정책이요 어떤 종류의 성과를 약속하는 방법일 따름이며 그 성과를 가지고 종국의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Nehru, Toward Freedom, p.82)고 말하고 있다.
 @p120
  군사력과 경찰의 설치를 그만두면, 간디는 인도 국민정부의 헌법과 행정은 정의에
의거하게 될 터이므로, 비폭력의 길에서 크게는 이탈하지 않으리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정의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인도는 공산주의 국가가 채택해오던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방책들을 채용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일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서, 인도가 영원히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 비폭력적 사회라는 꿈이
실현되지 못하게 될까봐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간디는 사유재산에 의거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제거하는 방책으로서 국가에의 권력집중보다는 그가 생각하던 신탁의
관념의 확장이 더 낫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유재산의 폭력은 그래도 국가의
폭력보다는 덜 해롭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그는
최소한와 국유화는 지지하였다.
  신탁의 이론은 간디의 경제사상에서는 각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도
국민정부를 위해 머리를 짜낸 경제정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이론에 관해서
간단히 생각해보기로 한다.
  우리는 먼저 간디의 궁극적 이상은 사유재산도, 정부도 없게 될 '라므라자'임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라므라자'에서는 협소한 촌락 공동체들이 모든 생활필수품의 생산과
균등한 분배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될 것이요, 각자는 자기의 생계를 세우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많은 노동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고찰하려는 것은 그의 '라므라자'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런
'라므라자'가 실현될 때까지 거쳐야 하는 장기간의 과도기를 위한 그의 타협안이다. 부의
균등한 분배라는 간디의 이상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수 없으므로, 그는 현재로서는
공정한 분배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현사회에서는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은 사람들의 마음을 몹시 강하게 사로잡고
있으며, 또한 사람들은 능력에 비례하는 임금을 원하고 있지만, 사람의 능력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자연 그들의 수입에는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공정한 분배보다 실제적 방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힘 닿는 데까지 많이 취득케 하나, 그들 자신을 위한 지출은 그 일부에
한정시키고 나머지는 사회 전체의 복지에 사용하도록 그들에게 신탁하는 방법이다.
 @p121
  만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 과격한 방법이 사용된다면, 그런 방법은 더 많이 취득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켜, 국가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도 적게
일하게 할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황금의 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식의 단견의 정책인
셈이다. 그러므로 신탁이라는 방법의 비폭력적인 길을 추구하는 편이 보다 낫다. 물론이
경우에는 수탁자가 정직하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만일 수탁자가 정직하지
않거나, 수탁자로 되기를 거절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간디는 월권이나 부정의 모든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 대해서도 절대로 틀림없는 광정책으로서 시민적 불복중, 비협력
또는 다른 형태의 '사티아그라하'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간디에 의하면 부자는 사회내의 인자의 협력 없이 부를 축적할 수가 없는데, 만일 이런
인식이 빈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다면, 그들 빈자는 강력하게 되어 그들을 기아선상에서
헤매게 하는 엄청난 불평등에서 비폭력의 수단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되리라는 것이다.
  간디는 이 일반원리를 인도가 직면하는 각별히 중대한 문제에 적용해야 했다. 인도는
외국지배하에 들어 있었으므로 외국의 자본가들은 수많은 인도인 앞잡이들의 도움을 얻어
인도를 착취하고 있었다. 경제적 불평등은 그 절정에 달해 있었고, 인도 민중의 대다수는
적빈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간디는 착취자들의 무감각해진 심정에 감동을 주어,
그들에게 수탁자의 정신을 환기시키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비폭력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는 단순한
설득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힌사의 원리는 그로 하여금 그들
착취자의 심정에 변화를 일으키게 해보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기의 노력이
합당한 기간내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국민회의파가 정치적 자유를 위해 수행하고
있던 것과 같은 노선에 따라 경제적 자유를 위해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p122
  간디에 의하면, 사티아그라하는 경제적 정의를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착취의 회생자인 가난한 사람들이 외국의 지배하에 있을 경우에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그들 자신의 수중에 넘어와 그들이 자신의 대표자들에 의해서
지배당하게 되면, 그들은 보다 단순한 방법, 즉 법을 통해서 그들의 온갖 불평을 제거케
하는 방법을 채택할 수 있다.
  간디는 부정의 시정이나 광정을 위한 온갖 방법은 일종의 폭력이라고 하여 비난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이는 물론 그가 입법을 순수한 아힌사의 정신에 배치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는 정당하며, 그의 이상사회에서는 입법의 여지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민주적 입법은 현사회에서도 있을 수 있는 상대적인 비폭력과 완전히
양립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간디는 국가의 권력을 최소한으로 줄이기를 원했고, 또한 일반적으로 국가로 하여금
개인생활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서 행해지고 있던 부정과
착취를 없애기 위하여, 그는 국민정부에게 기득권에 대한 최대한의 간섭과 그런 기득권에
의해 다른 국민층에 가해지는 해악을 시정하기 위한 지속적인 입법을 기대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입법의 수단이 채용되기 전에, 제안된 입법에 대한 기득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들 기득권의 정의감에 일단호소하기를 원하였다.
  사회정의를 확보하기 위한 입법과 관련하여 간디가 강조했던 것은 고액소득, 특히
대규모의 재산상속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고율의 세금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부의 불로취득은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불공정할 뿐 아니라 상속자 자신들에게도
도덕적으로 해롭기 때문이다.
 @p123
  이상에서, 간디는 비폭력, 무국가 사회를 열렬히 희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제적인
편의주의뿐 아니라 도덕적 원리에 입각하는 광범한 타협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간디로 하여금 불확정한 과도기에는 군대, 경찰, 입법 및 파세 등 온갖 속성을 가지는
국가를 수락하도록 했음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그로 하여금, 특정 조건하에서는 현대공업과
기계를 참아나가도록 만든 것도 위와 같은 타협의 정신이었다. 현 상황하에서는 기계는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경험을 통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기계사용을 허용하는 데는 일정한 조건을 붙였다. 그 조건이란 기계사용이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의 복지가 아니라 만인의 복지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간디가 반대하는 것은 기계 때문에 일어나는 해악이며 그러한 해악을 가져오는 기계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해악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인간에게서 일을 빼앗는 일이다. 물론
기계사용의 목적에는 노력의 절약, 시간의 절약 등이 있지만, 노력의 절약이라는 미명하에
실직당한 노동자와 그 가족을 길거리에서 헤매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보는 것이 간디의
견해이다. 따라서 인간한테서 일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을 덜어주는 소규모의
기계는 단지 허용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환영된다. 특히 사랑의 동기에서 사랑의
목적을 위해서 기계가 사용되는 데는 간디는 찬성이다. 가령 간디는 '싱거'미싱을 예로 든다.
싱거씨는 자기 아내의 바느질의 노고에 동정하여 미싱을 고안함으로써 아내의 불필요한
노동을 덜어주었다. 적어도 오늘날 싱거 미싱을 살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모두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그것은 좋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싱거 미싱을 만들려면 공장이 필요하고, 그 공장에서는 인간에게서 일을 빼앗는
기계가 사용될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간디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렇다. 그런 공장은 국유화되거나, 국가에 의해서 관리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점에서는
나는 사회주의자이다. 그런 공장은 가장 매력적이며 이상적인 조건, 즉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편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동기가 탐욕의
동기에 대치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노동조건의 개선이다. 이 미친 듯한 부의
추구는 그만두어야 하고, 노동자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임금뿐 아니라, 단순한 고역이
아닌 나날의 일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하에서는 기계는 그것을 소유-하는 국가나
개인에 못지 않게 그것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의 미친 듯한 부의
추구는 그만두게 될 것이요, 노동자는(내가 말한 대로) 매력적이며 이상적인 조건하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이것(즉 싱거 미싱)은 내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예의 하나에 불과하다.
싱거 미싱은 그 배후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 최대의 고려를 해야 하는 것은 개인이다.
개인의 노동절약이 목적으로 되어야 하고, 또한 탐욕이 아니라 성실한 인도주의적 고려가
동기로 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탐욕을 대치하라, 그러면 만사는 바로 될 것이다(Husain,
pp.61-2).
  이렇게 볼 때 간디는 대규모의 공장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충족할 때에만 비로소
허용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1 그것은 실업을 초래해서는 안된다.
 #2 그것은 국가에 의해서 소유되거나 제어도 관리된다
 #3 그것은 공공봉사의 정신에서 운영된다.
 #4 노동자의 일은 매력적이며 유쾌한 것으로 된다.
 #5 노동자에게는 합당한 임금이 지급된다.
  그러면 간디는 생계를 유지하기에 합당한 임금은 어느 정도라고 보고있는 것일까? 다시
말하면 국민대중을 위해서 간디는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을 원하고 있을까? 그의
이상사회에서는 그는 극히 소박한 생활을 그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사회에서는
각자는 간신히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을 충족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상사회에서가 아니라 독립한 후의 인도 사회에서 간디가 생각하던
생활수준이다.
 @p125
  이 정도라고 명확히 말할 수는 없으나 아무튼 그가 일반대중 특히 농민대중의
현생활수준에는 만족하고 있지 않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그들의 생활수준을
훨씬 높여,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문명의 온갖 쾌적한 생활-문명의 사치품은
아니라 하더라도-을 마련해주기를 원했다. 그의 꿈이던 스와라지는 가난한 이들의
스와라지였다. 따라서 부자에 못지 않게 가난한 이도 생활필수품은 물론이요, 문명의 온갖
쾌적한 생활도 누려야 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스와라지는 푸르나(완전한) 스와라지가 될
수 없다고 그는 믿었다.
  간디가 그리던 자유인도의 사회생활에 대한 미래상의 일부는 촌락자치 공동체에 관한
다음과 같은 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촌락 스와라지에 관한 나의 구상을 말하면, 그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이웃
촌락들에 의존하지 않으나, 의존이 필요한 기타 많은 사항에서는 상호의존적인 하나의
완전한 공화국이다. 따라서 각 촌락의 첫째 관심사는 스스로의 양식이 될 농작물과 옷감이
될 면화를 재배하는 일이다. 각 촌락에는 또한 가축과 오락시설 그리고 성인과 아동을 위한
운동장을 마련하기 위해서 보유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도 여분의 토지가 있다면, 담배와
아편 등과 같은 것을 제외한 돈이 될 만한 유용한 농작물을 재배할 것이다. 촌락은 극장,
학교, 공회당을 설립, 유지할 것이요, 또한 깨끗한 음료수를 공급하는 급수시설을 가질
것이다. 이는 잘 관리된 우물과 탱크를 통해서 행해질 수 있다. 가능한 한 각 사회에서는
모든 일이 협동적으로 처리되리라고 본다. 거기서는 불가촉천민제도를 가지는 오늘과 같은
카스트제도는 없어지리라. 사티아그라하의 기술을 가지는 비폭력과 비협력은 촌락공동체의
제재수단으로 될 줄 믿는다. 거기서는 촌락 자위대의 의무복역이 있게 될 터인데, 그들
자위대는 촌락이 보존하는 등록부에서 교대로 선출되리라고 본다. 촌락의 시정은 매년
최소한의 정해진 자격을 갖춘 성년남녀 촌락민에 의해서 선출되는 다섯 명의 촌회가 담당할
것인데, 이들은 필요한 모든 권한과 관할권을 가질 것이다.
 @p126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형벌제도는 없을 터이므로, 이 촌회는 1년 임기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구실을 다하리라고 본다... 나는 여기서의 이웃 촌락들,
그리고 만일 있다면 중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 나의 목적은
촌락정치의 윤곽을 제시하려는 데 있다. 거기서는 개인의 자유에 의거하는 환전한
민주주의가 행해진다. 개인은 그 자신의 정부의 건설자이며, 비폭력의 법은 그와 그의
정부를 규제한다. 그와 그의 정부는 이 세상의 권세는 무시할 줄로 아는데, 왜냐하면 각
촌락민을 지배하는 법은 그와 그의 촌락의 명예를 죽음을 걸고 지키려는 것이기
때문이다(Husain, pp.62-63).
  이와 같은 촌회들은 간디가 가까운 장래에 인도에 수립하기를 원하던 정치적, 사회적
질서의 기본단위들이었다. 그는 인도 국가의 완전한 모형을 만들기 위하여 이런 단위들을
상호간에 연결하고 또한 그런 단위들과 중앙당국과를 연결하는 어떠한 계획도 공들여
생각해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적 문제들은 그것들이 현실적으로 나타났을 때에
비로소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자유인도의 헌법을 제정할 시기가 왔을
때에는, 종파간의 폭동이 전국에서 일어나, 그는 평화와 응화를 회복하려는 일에 모든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는 생명까지도 바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간디는 독립 전에 구상하던
자유인도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에 관한 희미한 생각(*)을 한층 더 치밀하게 구체화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국민 교육의 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방법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만일 그가 인도 국민국가의 헌법에 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더라면, 그는
촌회에 온 관심을 집중시켰으리라고 보며, 중앙 및 주정부의 시정에 대한 그의 관심은
촌락공동체에 전면적인 자치를 허용하도록 그 권한을 제한했을 줄 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도시경제가 촌락의 착취에 의거하지 않으며 도시경제와 농촌경제가 상호보완하고
상호 지탱하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 : 간디는 자기가 그린 이상적 인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막연한 말을 하였다. "가장
가난한 사람도 그 건설에 유효한 발언권을 가지고, 그들이 자기의 나라라고 느낄, 인도 국민
사이에 상충계급도 하층계급도 없는 인도, 이러한 인도를 위해 나는 일하고 싶다...
불가촉천민제도라는 저주도, 술과 마약의 저주도 들어올 여지가 없는 인도... 여성도 남성도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이것이 내가 꿈꾸는 인도이다." (Discovery, p.315)
  간디는 촌락을 인도의 심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비폭력을 위해 농촌을
구출하려고 하였다. 심장이 건전한 한, 온 신체에는 희망이 있다고 그는 믿었다.

 @p129
    제 4장 간디의 실천
  영국 지배하에 정상적인 발전이 저해되어온 인도에서는 자본주의가 심한 사회적 폐해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1차대전을 계기로 크게 발전한 인도의 공업은 노동력의 흡수보다는
도리어 실업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방대한 이익배당으로 자본이 축적되는 반면에
실업은 증대되고 있었다.
  대중의 빈곤이 날로 증대되고 있다는 이 사실은 간디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는
빈부간의 엄청난 격차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소수의 부자와 가난한 대중간의 그러한
격차는 주로 대규모의 기계로 구현된 근대 유럽에 의거하는 외국의 지배와 착취 때문이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치적이며 자급자족적이었던 옛 촌락공동체 시대를
동경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생산, 분배, 소비 사이에 자동적인 균형이 잡혀 있었고, 정치력과
경제력은 분산되어 있었다. 거기서는 일종의 단순한 민주주의가 보급되어 있었으며,
빈부간의 격차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거기서는 대도시의 사악은 없었고, 사람들은 대지에
의거하며,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고 있었다.
  그는 이런 촌락공동체를 동경하여 '라므라자'라는 이상사회를 그렸지만,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국의 지배하에서 해방되어야 했다. 그런데 인도의 해방을 위해서는
빈부간의 격차를 제거하고 종파, 카스트 등 사이의 온갖 대립을 지양하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회복하는 한편, 특히 무감각한 대중을 각성시켜 민족해방운동에 동원해야 했다.
 @p130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을 독립투쟁에 귈기시킴으로써 간디는 인도의 민족운동으로
하여금 획기적인 진전을 보게 하였다.
  그는 대중의 언어로 말하고, 눈은 언제나 대중의 처참한 생활에 돌리고 있었다. 실로 그는
"대중, 그들의 생활, 그들의 문제, 감정, 원망에 공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다른 정치 지도자들과 크게 달랐다. "간디에게는 "정치란...박학한 정치가들이
고급의 토론을 하는 따위가 아니고, 대중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에 공감을 가지고 대중에
대해서 사심 없이 봉사한다는 문제였다. "(Namboodiripad, 일역본, p.38)
  간디는 인도의 대중, 특히 농민 대중에게는 다시 없는 지도자였다. 네루의 말을 빌면,
"그는 방대한 농민 대중의 이상적인 화신"(Nehru, Toward Freedom, p.190)이었다. 그는
물론 보통 농민과는 달라서 날카로운 지성과 자석처럼 사람을 끄는 매력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위대한 농민이어서 농민의 사정에 정통해 있었을 뿐 아니라, 농민의 입장에서
만사를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러나 자기들의 원망과 직접적 이익에 일치하는 특정한 이상이나 윤리적 가치를 주창한
위대한 인물을 간디에게서 발견한 이들은 농민 대중만이 아니었다. 국민의 다른 계층에
속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독자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던 인도의
노동자 계급은 간디에게서 노동자 계급의 이 익을 위해 싸우는 전사를 발견하였다.
중산계급의 지식인과 청년은, 무엇인가 위대하고도 고귀한 이상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귀한 이상을 위해 어떻게 싸우며, 필요하다면 어떻게 생명을
바쳐야 하는가를 그들에게 가르치며 고무하는 지도자를 간디에게서 발견했다. 대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상층계급의 사람들도 간디에게서 고귀한 이상을 위해 사심 없이 일하는
열렬한 애국자, 그리고 특히 군중을 엄중한 비폭력의 한계 안에 머물게 하는 인물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간디는 원망과 요구를 달러하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의 지도자로 되었다.
 @p131
  돌이켜보면, 인도는 현재의 어두운 불행에 짓눌리어, 안타까운 탄식과 과거와 미래의
막연한 꿈 속에서 구원을 얻어보려는 헛된 노력을 해왔으나, 간디는 등장하자마자 인도인의
마음에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지칠대로 지친 인도인의 몸에서 힘이 생겨나게 하였다. 그는
인도국민의 역사적인 근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한 옛 추억을
부활하여 인도인에게 스스로의 혼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그렇지만 네루의 말처럼, 간디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때로는 그의 말은
보통의 근대인에게는 거의 불가해했으니"(Nehru, Toward Freedom, p.72)만큼, 사회적,
철학적 사상에서 그와 일치하던 사람은 극히 적었음에 틀림이 없다. 정치운동에서의 그의
선배와 동료중의 많은 사람은 개인생활과 정치와 여러 사항에서 그와는 아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가 인도의 민족운동의 무대에 등장하자,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모두
매혹당하여, 그의 정치적 및 개인적 영향 아래 들어가 그의 권고와 지도를 자진해서 받게
되었다. 지성면에서 보면 그보다는 월등하던 사람들도 실제 상으로는 그의 지도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그는 몇 년 안 가서 인도의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 지도자로 되었다.
그가 인도 제 1의 가장 탁월한 지도자로 된 것은 그의 종교적 및 사회적 사상 때문은
아니다. 그는 자유를 쟁취하기로 결심한 인도의 상징이었다. 인도의 많은 사람들은 여러
문제에 관해서 그와 견해를 달리했다 하더라도, 또한 그들이 특정 문제에 관해서는 그를
비판하거나 심지어는 그와 결렬까지 했다 하더라도, 일단 인도의 자유 추구 문제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들은 다시금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그를 유일한 지도자로 받들곤 했다.
간디가 마치 온갖 계층의 사람들에게 마술이라도 건 듯이 온 국민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어 동일한 방향으로 이끌고 간 것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p132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품과 영도력 때문이었다. 먼저 네루의 표현을 빌어
그의 인품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몸집이 빈약한 이 작달막한 사나이는 자기 안에 무엇인가 강철과 같은 것, 아무리
강할지라도 물질적인 힘에는 굴복하지 않는, 무엇인가 암석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볼품없는 용모, 그의 허리만을 두른 반나체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왕자다운
위엄과 고귀함이 깃들어 있어서 남이 기꺼이 복종하고 싶은 심정을 갖게 했다. 일부러
온유하고 검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는 힘과 권위에 차 있었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그는 가끔 극히 엄격하게 명령을 내려 사람들을 복종시켰다. 그의 가라앉은 깊은
안광은 남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속까지 꿰뚫어 보았다. 그의 맑고 투명한 음성은 남의
마음에 스며들어 듣는 이를 감동시켰다. 그의 말은 듣는 이가 한 명이건 천명이건간에 그의
매력과 자력은 듣는 모든 이에게 퍼져나가, 한사람 한 사람을 그와의 깊은 공감 속에
끌어넣었다...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성실성과 인격이었다. 그는
안에 막대한 힘을 저장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Nehru, Toward Freedom, p.110)
  이와 같이 간디는 온화한 인품 속에 위대한 정신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그는
실제적인 영도력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간디는 본질적으로 행동의 인간이며 변전하는
정세에 극히 민감하였다. 그는 인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하면서도 널리
시국의 정보에 통하고 이를 주의 깊게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문제와 정세 속에서
비본질적인 것은 피하고 본질적인 것만을 추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견지에서 만사를 규정하면서 문제의 핵심을 확고하게 파악하는 한편,
앞날에 대한 올바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p133
  간디는 대중에게 봉사하려는 결의와 자세를 가지고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솔선수범하였다.
어디까지나 대중과 밀착하고 있던 간디는 대중의 비참한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추상적인
이념에 대해서보다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 전력을 기울였다. 루이스퍼셔의 말대로"그는
이념을 생각해내는 이론가가 아니라 자기의 이념을 실천에 옳긴 실천가" (Fischer,
p.59)였다. 그는 다음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자가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1. 세 가지 방법
  '실제적인 이상주의자'였던 간디는 독자적인 전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시적으로
환경과 타협을 짓곤 했으나, 형식과 정신 양면에서 타협을 존중하면서도 자기의 이상을
잃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환경 그 자체를 변혁함으로써 자기의 이상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인간성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자기가 마음에 그리던 완전히 비폭력적인
사회적 이상을 그대로 실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런 이상은 인간의 정신적 본성에서 나왔으며 그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중요성과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간디는 그의 시대적 환경과 타협하여, 국가 없는 사회 대신 민주적 국가를, 지방 분권화된
농촌경제 대신에 통제경제를, 비소유 대신에 신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교훈과 시범에
의해서 인도와 세계의 국민들이 이상사회와 이상적 경제를 위해 점차로 준비하는 방법을
조심스럽게 제시하였다. 그 방법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수 있다. 첫째로, 그는
비폭력적 사회를 위한 개인의 마음을 준비하려고 새 교육제도의 기초를 세웠다. 둘째로,
그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기가 생각하는 비폭력적 사회에 약간이라도 유사한 데가 있는
실제적인 사회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근대 공업문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어딘가 옛날의 소박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인도농촌에서 도덕적 및 경제적 부흥의
'건설적 프로그램 '(constructive programme)에 착수했다. 그리고 셋째로, 그는 폭력의
세력이 비폭력적 사회의 건설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티아그라하의
방법을 창안했다.
 @p134
  이런 세 가지 방법은 인간성을 바르게 가르치는 동시에 유리한 사회적 조건을
마련함으로써 비폭력적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어 마지않았다
  1) 새 교육
  모든 종교적 및 도덕적 교사들처럼 간디도 사회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효과적인
방법은 개인을 개심시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즉 그는 개인을 내면적으로 개량함으로써
외부환경을 변경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교육은 당초부터 그의 활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남아프리카 시절에 퍼닉스 농원과 톨스토이 농원에서 교육상의
실험에 착수했지만, 그의 교육철학의 대체의 윤곽은, 그의 일반적인 인생철학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 시대에 완성되고 있었다. 인도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교육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종교적 및 도덕적 견지에서 국민 교육에 관한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인도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도의 정신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간디는 인도가 유럽문명의 멍에를 벗기를 원하면서 참으로 인도적인 교육의 기초를
쌓으려고 애썼다. 이미 몇몇 대학교와 전문학교가 설립되어 거기서는 영국의 보호 아래에서
고대 아시아 문화가 약간 보존되고 있었으나 이런 학교들은 정부의 감독 밑에 있으며 정
부의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간디는 보다 순수한 아시아 문화의 본거지를 만들고자 1920년
11월에 구자라트대학교를 아흐메다바드에 세웠다. 이 대학교는 인도 통일의 이상에 입각한
것으로 그 종교적 양대 지주는 힌두교의 다르마와 회교의 이슬람이었다. 이 대학교는 인도
각지의 지방어를 찾고 그것을 국가갱생의 원천으로 삼으려고 했다. 즉 각 지방어의 거대한
보고를 발굴하여 풍요한 과거의 문화 위에 각 문화가 적절하게 종합, 조화된 새 문화를
건설하려고 했다.
 @p135
  모든 학생이 인도의 온갖 종교를 알아야 했지만 특히 힌두교도는 코란에 친숙하게 되고
회교도는 힌두경전에 친숙하게 되어야 했다. 이 대학교가 배제하는 것은 오직 배타적
정신밖에 없었다. 힌두어는 필수과목으로 되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국가적 방언이며,
산스크리트어, 힌디어, 페르시아어화한 우르드어 등이 혼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식계급은 직업 교육을 받고, 다른 이들은 학예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그는 계급간의
차이를 감소시키기를 원했다(Rolland, 일역본, PP.94-96).그리고 간디는 특히 아동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지만, 유럽식 교육이 아동의 지능만을 발달시키고, 전인 교육에 불가결한 '공작'
(craft)을 경시하는 데 반대했다. 간디에 의하면 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발달시키고 그의
인격을 도야하며 그들 사회의 건전한 성원이 되도록 훈련하는 일반교육은 단지 또는 주로
지성과 정서에 관한 교육은 아니고, 전인간-몸과 마음과 혼-의 교육인데, 몸과 마음과 정신,
을 다같이 가장 잘 발전시키는 교육은 지능의 사용에 국한되는 읽고 쓰기의 매개수단을
통해서는 행해질 수 없고, 손과 머리와 마음을 동시에 사용케 하는 모종의 유용한 '공작'을
과학적으로 가르침으로써 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동교육은 그것을 모종의 공작과 밀접하게 결부시키는 편이 좋다 함은 오늘날에는 통설로
되어 있거니와 평생을 통한 교사로서의 경험은 간디로 하여금, 공작을 과학적으로 가르치는
편이 읽고 쓰기를 가르치는 편보다 훨씬 더 빨리 아동들의 지능을 발전시킨다고 믿게
하였다. "지성은 오직 독서를 통해서만 발달될 수 있다는 전적으로 그릇된 견해는, 마음의
가장 빠른 발달은 과학적 방법으로 습득되는 기공의 일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진리에 자리를 비켜야 한다. 마음의 참된 발달은 도제가 왜 손이나 도구의 사용이
필요한가를 그때그때 배울 적에 곧 시작한다" (Husain, p.68)고 간디는 강조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간디가 아동 교육은 '공작'에 국한하고 읽고 쓰기는 불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책을 통한 교육은 지적 훈련뿐 아니라 실제 생활, 심지어는 정신적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함을 그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p136
  그러므로 그는 단지 유용한 공작뿐 아니라 일반교육의 교수요목에 포함되는 모든 과목을
가르치기를 원했다. 다만 그는 공작을 교과목의 중심에 두고 다른 과목들은 그것과 서로
관련시킴으로써 학식과 행동, 이론적 지식과 실제의 활동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교육
방법을 제시했을 따름이다. 공작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런 식의 아동교육의 주목적은
물론 교육적인 면에 있었으나, 간디는 그 경제적 측면도 간과하지는 않았다. 인도와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런 식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장차 직업을 갖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간디의 아동교육에 관한 이념을 실천에 옮긴 결과, 각처에 있는 국, 사립학교에서의 공작
중심 기초교육의 실험은 재래식 교육과는 달라, 모종의 도덕적 성품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즉 공작은 곧 아동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교사는 그리
애쓰지 않아도 학생들은 목적의식과 집중, 민첩, 인내의 성품을 발전시키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 이외에도 공작에는 '팀'으로서 일하게 하는 과정들이 있었으므로, 자연히
경쟁심 대신에 협조정신을 조성하고 있었다. 간디는 이런 모든 이점을 머리에 두고
있었음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교육제도 밑에서만 "혼이 가장 잘 발전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보다 깊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로, 간디에게는 '브레드 레이버 '가 정신적 발전의 불가결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브레드
레이버의 정신을 어린 시절부터 몸에 지니게 하기를 원했는데, 공작 중심의 교육은 다른
어떤 교육보다도 그런 목적에 기여한다는 정신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로, 간디는
농촌수공업을 아동교육의 불가결의 부분으로 만드는 일은 도시가 농촌을 착취하고 있는
현사회를 도시와 농촌이 건전한 관계를 가지는 새 사회로 전환시킨다는 위대한 정신적
목적에 이바지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p137
  오늘날 도시는 돈을 치르고 농촌에서 식량을 사고 있지만, 도시는 그 돈을 인도나 외국의
상품을 팜으로써 농촌에서 몽땅 거둬들이고 마니, 농촌은 자기 노동의 대가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농촌은 옷감을 비롯한 기타 생활필수품을 도시에 의존함으로써
스스로를 도시한테 착취당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간디는 온갖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농촌에서 생산하고 그 생산의 일부는 농촌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나머지는 도시에 파는
새로운 경제제도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리고 간디는 새 세대에게 새로운 정신 상태를
조성하는 기초교육을 새 결제 구조의 초석으로 삼기를 원했다. 즉 그는 그런 구실로 새
세대를 고무하며, 그들에게 농촌 공업을 부활하고, 농촌을 자립, 번영케 하는 건설의 노동의
자기 몫을 다하는 습관을 키우도록 하기를 원했다. 숭고한 목적에 바쳐진 사심 없는
사회봉사는 간디에게는 가장 위대한 정신적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아동들을 그런 봉사를
위해 훈련하는 기초교육은 그에게는 "가장 잘 정신을 발전시키는 일"의 매개수단이었다.
  2) 건설적 프로그램
  공작 중심의 기초교육이 지니는 정신적 중요성은 그것이 민중의 마음속에 노동의 존엄성을
가르쳐주고, 그들에게 유용한 손일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며 그것에 대한 능력을 가지게
하는 데 있다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몇몇 기본적인 농촌 수공업의 기술을 습득함으로써
그들은 농촌을 부흥시키고 농촌을 도시의 착취에서 보호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게 되어,
농촌은 사회적, 정신적 자유를 쟁취하고 라므라자의 이상적 구조의 초석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회혁명이라는 시일이 오래 걸릴 어려운 운동을 시작함에 있어서, 간디는
기초교육을 통하여 훈련된 새 세대가 사회에 등장할 때까지 그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사회적 이상에 대해 전폭적으로 찬동하던 그의 추종자들의 도움을
얻어, 그가 온건하게 "건설적 프로그램" (constructive programme)이라고 부르던 인도
농촌의 부흥을 위한 포괄적인 계획을 작성하여 가능한 한 이를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다.
 @p138
  그는 그런 '건설적 프로그램'이 언젠가는 자기가 그리던 완전한 비폭력적 자유사회로
인도하리라고 믿었다.
  간디에 의하면 그가 원하던 사회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사티아그라하의 극단형인 시민적 불복종이었다. 그러나 무력투쟁이 무기 사용의 훈련을
필요로 하듯이, 비폭력 투쟁 내지 사티아그라하는 자제, 자기 회생 및 사회봉사에 대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 훈련은 '건설적 프로그램 '을 통해서 민족의 일꾼에게 가장 잘
주어질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 '건설적 프로그램 '속에, 인도가 직면하고 있고,
또한 인도가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기 전에 해결해야만 했던 온갖 정신적'사회적 및
경제적 문제를 포함시키고 있었다. 그는 종파간의 융화를 도모하는 일을 첫째로 꼽았다.
그가 종파간의 조화를 가장 중시한 것은 단지 정치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동기에서였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이 그의 종교적 신조의
기본원리였다. 그는 이 원리가 인도에서 수락되어 정신적인 통일감이 모든 종교 신자들의
마음속에 조성되기까지는, 그는 수립하고자 하던 선하고 건전한 사회는 출현할 수 없다고
믿었다.
  간디의 공적 생활의 최대의 부분은 20세기 초 이래로 인도에서 일어나 인도의 혼을
말살하려 들고 있던 광신적인 종파주의의 재앙을 억제하려는 계속적인 노력에 바쳐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이 질환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것은
무한한 손상을 입은 뒤였다.
  다음은 붙가촉천민제의 해악에 대한 반대투쟁이었다. 간디의 사회철학은 전적으로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인식에 의거하고 있었다. 그의 생애의 진로를 바꾸게 했던, 그가 겪은
가장 중대한 첫 정신적 위기는 남아프리카에서 유색인들이 천대받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적 차별대우의 최악의 표본인 인도의 불가촉천민제는 그의 온
영혼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세계의 종교사를 통해서, 피압박계급에 대한 우리의 취급과
같은 것은 아마도 유래가 없는 일이다. 비록 인도인이 영제국의 불가촉천민계급으로 되고
말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의의 신에 의해서 우리에게 가해진 응보이다.
 @p139
  우리 인도인은 영국인을 향해서 피로 더럽혀진 손을 씻으라고 요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그와 같은 손을 씻어야 할 것이 아닐까. 불가촉천민제는 우리를 타락시켜,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서 우리 자신을 불가촉천민계급으로 만들고 말았다. 인도가
불가촉천민제를 그 종교의 일부로 삼고 있는 한, 스와라지의 달성은 불가능하다" (납산방랑,
p.25)고 간디는 역설하였다.
  그는 불타의 시대 이래 누구도 갖지 않던 불가촉천민의 심신상의 격리에 대한 뜨거운
동정을 가졌다. 그는 그들에게 '하리잔' (harijan.신의 아들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불가촉천민의 딸을 자기의 양녀로 삼았다. 불가촉천민제에 종지부를 찍고, 그들에게 이른바
상층계급이 누리고 있는 바와 같은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을 그의 '건설적 프로그램'의
불가결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사회의 자기정화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간디가 생각했던 셋째 것은 온갖 종류의 취하게
하는 물건 (술, 아편 따위 )을 버리는 일이었다. 이를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책은,
금지령을 공포하도록 설득될 수 있는 국민정부가 들어설 때에야 비로소 취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 이유와 아울러 도덕적 원칙은 그로 하여금 정부가
성공적으로 금지령을 시행할 수 있기 전에, '건설적 프로그램'의 일꾼이 그 금지를 위한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취하는 물건의 사용을 단념하도록 국민을 설득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케 하였다.
  위에 든 세 가지의 순수하게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개혁에 뒤이어서 '건설적 프로그램중
넷째 것은 '카디' (khadi.물레를 손으로 돌려 짠 옷감)운동의 추진이다. 이는 간디가 그리던
이상적 사회질서의 기초였던, 자급 자족적인 촌락공업경제의 이념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만일 농촌이 그 식량을 생산하듯이 스스로의 옷감을 생산할 수 있다면,
농촌은 그 기본적 필수품을 자급자족하게 되어 그 이상 도시한테 착취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간디가 그리던 사랑과 진리에 의거하는 순수하게 비폭력적인 사회의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p140
  그래서 간디는 '카디'를 인도의 국민적 통일과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라 보고,
'카디' 운동의 추진을 모든 애국적 인도인, 특히 '건설적 프로그램 '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의무로 삼게 하였다.
  간디는 어떤 과업에 착수하면, 극히 사소한 점까지 이를 계획해서 실행하곤 했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건설적 프로그램 속에 이 '카디'에 더하여, 제분, 비누 제조, 제지, 성냥 만들기,
기름 짜기 등과 같은 농민의 일상적 수요를 충족하는 여러 종류의 소규모 농촌 공업을
첨가했다. 이에다 코는 새로운 공업의 장려와 보호의 필요를 절실히 느낄 때마다 그것을
첨가해나갔지만, 그의 만년에는 거의 '카디'만큼이나 퇴비 만들기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화학비료는 토양에 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도 농촌경제에서 소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머니가 가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해당했으므로 '소의 보호' (go-seva)는 역시 '건설적 프로그램 '의 중요한 항목이었다. 촌락
위생, 기초교육과 성인교육, 자신의 권리 수호와 국가에 대한 붕사를 위한 부인, 노동자 및
학생의 조직도 '건설적 프로그램 리 다른 중요 항목들이었다. S.아비트 후세인이 요약하고
있다시피, '건설적 프로그램 '이란 요컨대 간디가 자유, 평등 및 사랑에 의거하는 새 사회
질서로 인도하는 하나의 조용한 사회혁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던 자발적인 사회봉사와
자조의 포괄적인 계획이었다(Husain, p.76). 간디는 인도에 돌아온 후에도 남아프리카
시절의 퍼닉스 농원이나 톨스토이 농원과 같은 '수도장'을 사바르마티, 세바그람 등지에
만들어 그 곳에서 '건설적 프로그램 '의 요원들을 훈련했다. 그들은 비단 '건설적
프로그램'에서 뿐 아니라, 사티아그라하 운동에서도 주동세력이 되었으므로, 이에 관해서는
다음 항목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3) 사티아그라하
  간디에 의하면 '건설적 프로그램 '은 자기의 사회적 이상을 달성하는 데 직접적으로
이바지한 동시에 다른 하나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도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즉 '건설적
프로그램 '은 그 일꾼들에게 봉사와 자기회생의 정신, 기율과 조직에 관한 의식, 근면과
인내의 능력을 육성함으로써 그 일꾼들을 사티아그라하를 위해 훈련했다는 것이다.
사티아그라하는 사회혁명의 전투를 감행하기 위한 간디의 사랑의 무기고에서 제일 강력한
무기였다.
 @p141
  간디는 허위와 부정에 항거하고 진리와 정의를 지지함에 있어서 사티아그라하라는 특이한
방법을 창안하여 그것을 공적 생활에서 전례 없는 규모로 사용했다. 이 방법의 본질은
상대방을 폭력으로 패배시키는 대신에 정신력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달리
말하면 자진하여 고난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인간적인 감정을 환
기시키는 데 있다. 우리는 앞에서 간디는 악한 세력과 악한 인간들과를 구별짓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악이나 부정과 싸우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진정한 적은 악이나 부정의
세력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적은 그들에게 해악과 부정을 감행하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간디는 주장했다. 간디에 의하면 인간은 단지 그런 악한 세력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악한 세력은 억압자나 피억압자 쌍방 안자, 억제되지 않은 사나운 격정이나
욕망의 형태가 아니면 공포나 비겁의 형태로 존재한다. 피억압자는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런 세력과 싸우고, 그러고 난 후에 억압자 안에 있는 그런 세력과 싸워야 한다.
피억압자가 적절한 훈련을 통하여 자기의 보다 훌륭한 인간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자신의
사나운 격정을 억제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자기 인격에다 조화와 기품, 그리고 하나의
잠재적 정신력인 이상한 매력을 지니게 하는 동정과 사랑의 감정을 발산하게 된다. 악과
부정에 항거함에 있어서 이 영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사티아코라하라고 부른다. 그것은
억압자의 마음의 금선을 울리게 할 수 있는 반면에, 피억압자의 분노, 증오 및 이기심을
억제하고 정의, 사랑 및 자기회생의 정신을 발휘시킨다.
 @p142
  1907년 남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사티아그라하의 실험을 간디는 1948년 1월 30일에 그
절정에 달하게 했다. 이 시기를 통해서 그는 수많은 인도인 애국자들과 더불어 그때까지는
세계에서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정부에 대한 비폭력 투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고난과 회생에
찬 이 시기를 거친 뒤에 그는 자기 조국을 해방하는 데 성공했고, 또한 스스로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자유인도의 기초를 확고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아는 한 이러한
실험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오랫동안 간디의 정략을 연구하고 그것이 가지던 효과를 주시한 결과 강력한
정치조직으로 뒷받침되면, 그것은 식민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K.Nkrumah, "Background to Independence, " The Ideolologies of the Developing Nations,
ed. by p.E.Sigmund Jr, p.184)는 가나의 엥크루마 수상의 술회를 빌 필요도 없이,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다분히 정책적인 의의도 가지고 있었다. 이점은 "스와라지가 민족의
목표이다. 비폭력이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도가 정복자의 폭력의 노예로 되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폭력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하는 것이다. 폭력은 인도를 해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스와라지는 인도의 독특한
무기인 영혼의 힘, 사랑의 무기, 진리의 힘 없이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납산방랑,
p.90)라는 간디의 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우세한 폭력에 대한 간디의 비 폭력투쟁은 지난날 식민지 피억압 민족의 해방 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은 오늘날에도 각국의 인종차별반대운동의 지도자들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구나 생각할 수 있는 폭력의 극한점에 달하여 자멸의 구렁텅이의
가장자리에서 헤매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직접적인 전쟁에 호소하지 않고, 종파간이나
민족간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의 방법은 여전히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다음에 사티아그라하의 원리와 수법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p143
  (1) 사티아그라하의 본질
  사티아그라하의 외모는 정치운동에서 가끔 사용되는 '수동적인 저항'(passive resistance)과
유사하므로 얼핏 보면 양자는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양자간에는 운니의 차가
있다.
  첫째로, 수동적 저항은 개인이나 집단이 모종의 악이나 부정에 대해서 자신을 방위하는 데
만족하는 소극적인 상태이다. 이와는 달리 사티아그라하는 억압당하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비폭력적 방법으로 억압자의 정서, 견해 및 기질, 또는 억압법이나 불공정한
정부형태를 시정하고자 애쓰는 적극적인 상태이다.
  둘째로, 수동적 저항의 동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인 데 반하여, 사티아그라하는 진리와
정의의 영원한 법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앙이다. 이 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당한 법이나
제도에 반대할 의무를 자각케 하고, 사람들에게 그것들에 항거할 용기를 준다.
  셋째로, 수동적 저항의 참된 목적은,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도 약간의 고통을 줄지는 모르나
주로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하여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 있다. 이에 반하여
사티아그라하는 자기 스스로가 조용히 기꺼운 마음으로 참을성 있게 고통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게 하려는 유일한 목적을 가진다. 따라서 수동적 저항에는
사랑에로 전개할 시야가 없지만, 사티아그라하에는 증오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으로
증오에 반대한다.
  넷째로, 수동적 저항은 부정적 내지 일시적인 것이나, 사티아그라하는 적까지도 포함하는
인류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표현이다.
  다섯째로, 수동적 저항은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관념이 붙어 다닌다. 이에 대하여
사티아그라하는 사랑에서 나왔으므로, 그것은 상대방에게 정중한 경의를 표하고 그의
견해를 존중하는 동시에, 그가 선의와 신의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그를 대하는 데도 예절
바르고 참을성 있게 하기를 사람들에게 권한다.
  여섯째로, 수동적 저항은 적당한 시기에는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으나,
사티아그라하에는 아무리 유리한 상황하에서도 그것은 금지되고있다 (Husain, pp.79-80;
옥성강도즉, p.368).
 @p144
  (2) 사티아그라하가 시도될 수 있는 목적
  사티아그라하는 깊은 도덕의식과 종교의식에서 나오는 하나의 정신력이다. 따라서 그것은
물리력이나 기계력과는 달라 그것이 사용되는 목적의 도덕적 성격과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의 대의가 정당하고도 공정하다고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을 때에만
사티아그라하를 효과적으로 시도할 수 있다.
  (3) 사티아그라하를 시도할 적격자
  대의만 정당하다면, 모든 사람이 어느 때라도 사티아그라하를 시도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어떤 지역의 민족이 억압당하고 있을 때, 그 이웃지역이나 세계의 다른 어떤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피 억압자의 대의를 지지하여 사티아그라하를 전개할 수 있을까? 간디에
의하면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오직 피억압 민족 자신에 의해서 전개될 때에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간디는 피억압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동정의 표시로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잘못이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사실상 비효과적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사티아그라하의 이상한 힘은 세
가지 방법으로 억압자 내지 가해자에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억압자나 가해자는 사티아그라하를 전개하고 있는 코들의 피억압자가 부정에
굴복함이 없이 조용히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그들의 존경을 산다.
둘째로, 억압받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들이 자신들의 온갖 고통에도 불구하고 억압자에
대해서 추호의 증오심도 품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억압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억압자의 마음속에 정의감과 아울러 잠재하고 있던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셋째로, 억압자는 그들이 하려던 부당한 짓은, 피억압자들이 어떠한 형태의 협력이건 이를
모두 거부한다면, 충분히 행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세 경우에 있어서
사티아그라하의 효과는 억압자에 대한 항거에 궐기하여 비폭력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피억압자 자신들에 달려 있다.
 @p145
  (4) 사티아그라하 운동자의 훈련
  사티아그라하는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행해질 수 있다. 개인의 사티아그라하는 보통
단식(*)이라는 수단으로 행해지나, 그것은 또한 드물기는 하지만 시민적 불복종의
형태로 행해지기도 한다. 집단적 사티아그라하 내지 대중 사티아그라하는 '하르탈'
(hartal.일의 중지와 철시), '다르나'(dharna.연좌항의), '피케팅'(Picketing.외래품 상점 감시),
납세거부 등을 통해서도 행해질 수 있으나, 그 가장 일반적 인 형태는 시민적 불복종과
비협력이다.
  * : 단식은 간디가 남아프리카 시절부터 사용한 그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에서 하나의
유력한 무기였지만, 그는 인도에 돌아온 후 실로 11 회의 단식을 감행하였다. 그 중세 번은
21일간의 장기간 단식이었다. 그런데 11회의 단식 중, 세 번은 회교와 힌두교 양교도의
화해를 위한 것이고, 두 번은 인도의 불가촉천민의 지위 향상을 위한 것이었다.
  그 어느 형태를 취하든 간에, 사티아그라하는 물리력이 아니라 '영력 '을 가지고 싸우는
하나의 기묘한 전쟁이다.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낡은 형태의 전쟁에서마저 공들인 훈련이
필요하다. 새로운 형의 전쟁인 사티아그라하를 위해서는 훨씬 더 공들이고 철저한 훈련이
요청된다. 비폭력 내지 사티아그라하의 정신상태는 비단 분노, 증오, 복수, 공포 등과 같은
강한 격정을 억제한다는 어려운 일뿐 아니라, 적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거의 초인적인
행동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로 이는, 마음은 난폭한 생각을 삼가고, 혀는 난폭한 말을
삼가고, 손은 난폭한 행동을 삼가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는 가장 엄격한 훈련과 가장 어려운
도덕적 갈등을 극복한 후에야 비로소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신상태를 갖지 못한, 단지
외면적인 비폭력은 심리적 및 정신적 불안을 빚어내기 쉽다. 이는 남에게도 사티아그라하
운동자에게도 다같이 위험하다.
 @p146
  간디에 의하면 사티아그라하는 이중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인간 사회의 모든
성원에 필요한 일반적인 종교적 및 도덕적 훈련이요, 다른 하나는 비폭력적인 사회혁명의
선봉인 사티아그라하 운동자에게 행해지는 특수한 훈련이다. 첫째 종류는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전개하기 전에 인도에서 세운 '수도장'에서
행해졌다. 이는 5대 기본덕성-진리, 비폭력, 절제, 비소유 및 브레드 레히버-과, 공포를 갖지
않는 일과 겸양과 같은 다른 위대한 도덕적 성품의 실천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둘째 종류의 훈련은 수도장의 수업을 마친 사티아그라하 운동자에게, 그들을 '건설적
프로그램'과 관련된 실제 운동을 하도록 농촌에 파견함으로써 행해졌다. 이는 그들에게
책임감, 시간엄수, 이해력, 솔선수범, 요령, 사려분별, 철저성 등을 발전시키는 보다 충분한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 : 훈련생은 네 살부터 들어갈 수 있다. 일단 수도장에 들어가면, 수업을 마칠 때까지
(수업 연한은 약 10년) 의무를 지닌다. 그들은 가정을 떠나야 하고 양친은 감독권을
전적으로 포기한다. 그들은 간소한 옷을 입고, 엄중한 채식주의에 의거하는 간단한 음식을
취한다. 보통 의미의 휴가는 없고, 단지 일 주일에 하루 반만은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이
허용될 뿐이고, 1년에 2개월간은 도보로 인도를 순유하는 데 바쳐진다. 힌디어와
드라비다어는 모든 학생의 필수과목이다. 그들은 또한 제 2 어 학으로서 영어와 인도의 5대
지방어의 문자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국어로 지리, 역사, 수학, 경제학, 산스크리트어를
배운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농업과 물레질에 종사한다. 종교정신이 교육 전체를 덮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교육은 일체 무료이다.
  개인적 사티아그라하를 위해서는 간디는 대중 사티아그라하보다도 더 철저한 훈련을
하도록 강조하였다. 개인적 사티아그라하 운 동자들은 만사를 그들 자신의 책임과 주관하에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술한 두 가지 훈련을 모두 철저하게 받은
사람들로써만 행해져야 한다고 간디는 주장하였다.
 @p147
  그러나 대중 사티아그라하에서는, 만일 지도자가 비폭력의 원리와 실제를 전수받고 있다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지도자는 비폭력을 신조로서가 아니라 단지 정책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데 불과한, 그리고 사티아그라하의 기술에 대한 훈련은 받지 않고 지도자와 지시하에
그 도덕적 원리에 따르고 있는 일군의 추종자들과도 같이 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만일 그
지도자가 이와 같은 정치적 사티아그라하 운동자 이외에, 사티아그라하에 철저한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충분한 훈련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운동은 보다
큰 힘을 갖게 된다. 이것이 즉 간디가 그 도움으로 인도의 자유를 위해 싸운 비폭력적
군대였다. 이 군대는 마침내 1947년에는 인도의 자유를 쟁취하고야 말았다.
  이 놀라운 성과에 비추어 볼 매, 만일 상당한 수효의 사람들이 비폭력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사티아그라하의 수법에 대해서 장기간에 걸쳐 철저하게 훈련된다면, 그들은 아무런
무기 없이도 쉽사리 외국군의 침략에 항거할 수 있다는 간디의 주장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만 볼 수도 없을 듯하다.
  (5) 사티아그라하의 수법
  사티아그라하의 수법에 관해서는 간디가 여러 기회에 상세하게 논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단지 그가 비폭력적 투쟁의 양면, 즉 전략, 전술적 기술과 도덕적 순수성을 똑같이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몇 개의 격언을 드는 데 그치기로 한다.
 #1 시민적 저항은 불편부당한 중재의 제의를 포함하는 기타의 온갖 명예로운 해결이 실패된
연후에 수행되어야 한다.
 #2 적절한 선전은 사티아그라하의 불가결한 부분이다.
 #3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는 주도권을 자기 수중에 장악해야 하고 그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된다.
 #4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는 자기 자신의 판단에 배치되는 방향으로 대중한테 이끌려서는
안된다.
 @p148
 #5 너무 큰 요구를 내세워서는 안되며, 그것은 진리와 정의에 부합되어야 한다. 능력 이상의
것을 노리다가는 우리는 모든 것을 잃기 쉽다.
 #6 사티아그라하는 그 성격에 있어서 진보적이어야 한다.
 #7 초조감, 조급증, 허세, 내적 약점을 감추려는 시도 등이 있어서는 안된다. 비협력은 허풍,
공갈 내지 허세의 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실성의 테스트이다. 그것은 조용한
그리고 확고한 자기회생을 요구한다.
#8 항상 명예로운 조건으로 적과 협력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비폭력 투쟁의 목적은 언제나
정의와 참된 인류복지의 주장에 의거하는 합의된 해결이다.
 #9 첩상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것을 양보해서는 안된다. 비본질적인 것을 희생시켜라.
본질적인 것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최대한의 고통올 당할 각오를 하라. 해결에 앞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Husain, pp.84-85).
  위에서 살펴온 간디의 세 가지 방법은 보기에 따라서는 E.M.S.남부디 리파드가 주장하고
있다시피, "인도 사회 내부에서 날로 커가고 있었고, 또한 인도의 민족 정치생활에서 점점
더 자기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던 하나의 계급(즉 중산계급)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것이었다"(Nam-boodiripad, p.31)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간디는 그의 특이한 도덕,
종교관과 사회, 정치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인도 자본주의의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새 교육으로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자주 독립의 인간을 만들어내려 했고, 건설적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도의 농촌을 부흥하여 민족자본의 칠의 공급원을 강화하는 한편,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국민적 통일을 기하려 했으며, 그리고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통해서
인도 민족자본의 궁극의 목표인 인도의 독립을 추구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간디가 인도 면없 최대의 자본가인 비를라가와 각별한 친교가
있었다는 사실은 단지 개인적 우호와 같은 우연적인 일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p149
  그러므로 한 일본인 연구가는 "간디가 종교적 베일을 씌워서 '진리'라고 부른 것은 영국의
농촌을 목장으로화 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방황자로 만든 원시적 축적에서 볼 수 있던
바와 같은 과격한 방법을 피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노동에 의해서 자본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발전의 길이야말로 인간의 길이며, 모든
인간이 이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간디의 유훈이리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일면적 타당성밖에 없는 견해이지만, 만일 이런 입장에 서서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간디는 어떻게 하면 금전의 노예로 되지 않고, 인간에 적합한 방법으로 돈을
모을 수가 있는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또한 그것을 위해 필요한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고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환경을 만드는 데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인도의 독립이었으므로, 다음에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인도의 민족해방운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제 1차 불복종운동
  1) 준비
  간디가 그의 비폭력이라는 교의를 인도에 가져온 이래로 그것은 줄곧 전 인도를
지배해왔다고 논한 후, 네루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인도의 정치적 및
사회적 생활에 커다란 역찰을 다하고, 또한 널리 세계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교의 그
자체는 물론 인간의 사상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지만, 그것을 대중적인 규모로 정치 및 사회
운동에 적용한 이는 아마도 간디가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은 개인에 관한
문제였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였다. 이 개인적인 이상을 사회적인
이상으로 높이려고 애썼다. 그것으로 정치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을 변경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중하게 이 목적을 머리에 두면서 비폭력의 방법을 광범한, 그리고 전혀 다른
영역에 적용하였다.
 @p150
  '인류의 조건과 그 환경에 대변혁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은 사회에 풍파를 일으키지
노고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데는 비폭력과 폭력의 두 방법밖에 없다. 폭력적
압력은 육체에 가해지지만, 그것은 피해자의 기력을 깎는 것과 간은 정도로 가해자를
타락시킨다. 그러나 비폭력적 압력은 단식이나 기타의 스스로의 고통을 통해서 전혀 다른
작용을 한다. 그것은 육체에 손을 대지 않고, 상대방의 도덕심에 작용하여 그것을
강화한다'고 간디는 말하고 있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이 배후에 있는 광범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도 막연하게 밖에 늘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저 믿고 그저 행동했던 것이다"(납산방랑, pp.65-66).또한 네루는
"인격은 포착하기 어려운 것으로 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상한 침이기도
하지만, 간디는 그것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서... 맡은 사람들을 매혹하고 있었다... 일보 또
일보 그는 자기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하여, 우리는 그의 철학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에게 보조를 맞추었다" (Nehru, Toward Freedom, p.191)고도
말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결단력이 없는 인도의 정치가 키운 무위의 긴 전통의 결과는 어떠한 행동도
환영을 받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윤리적 후광을 지닌 용감하고도 효과적인 간디의
행동은 지성에게도 감성에게도 물리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간디는 중산계급의 성장과 국민의 행동욕의 성숙이라는 유리한 객관적 여건을
배경으로 하여 위에 든 그의 실천력을 가지고 전인도를 휩쓴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전개했지만, 이에는 역시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공포, 탐욕 및
맹목적 격정을 제거하는 내적 투쟁과 외국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외적 투쟁으로
나누어지지만, 전자를 위한 준비는 이미 남아프리카 시절을 다를 때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인도에 돌아온후의 후자를 위한 준비만을 대충 훑어보기로 하겠다.
 @p151
  간디가 남아프리카를 떠나 영국을 경유하여 인도의 봄베이에 상륙한 것은 1915년 1월
9일이었는데, 이는 그 동안 두 차례의 짤막한 귀국을 제외하면 실로 22년 만의 귀국이었다.
이때부터 최초의 전인도적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전개한 1919년까지의 4, 5년간은
간디에게는 인도에서의 준비기간이었다. 간디는 두 차례의 귀국시에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의 실정을 고국의 인도인에게 선전, 계몽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또한 그 후의
남아프리카에서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통하여 인도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그는
귀국직후에는 정치운동에 뛰어들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스승격인 고칼레가 영도하던 '인도봉사협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그의 사상과
방법에 대하여 큰 거리를 느끼던 이 협회원들이 꺼려 하므로 이를 단념하고 1915년 5월,
자기보다 앞서 인도에 도착하여,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샨티니케탄' (평화학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퍼닉스 농원의 사티아그라하 동지들과 더불어 아흐메다바드 (1917년에 그
근교인 사바르마티에 옮김)에 수도장을 세웠다. 왜 아흐메다바드를 택했을까 ?
아흐메다바드 치민이 자진해서 건설 자금을 모금하고, 간디 등이 입주할 가옥까지를
마련하겠다는 제안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흐메다바드는 내가 특히 사랑하는
곳으로, 구자라트인인 나는 구자라트어를 통해서 가장 잘 국가에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음 이곳은 일찌기 면포수적업의 중심지였으며, 게다가 그곳은 수방적의
가내공업을 부활시키는 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춘 장소인 성 싶었다. 또한 이 도시는
구자라트의 수도이므로, 다른 어느 곳보다도 그 부유한 시민들한테서 자금의 후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Autobiography, p.395)고 간디는 그 이유를 들고 있다.
봄베이와 더불어 인도 제일의 민족 공업인 면공업의 발생지, 아흐메다바드를 간디가 최초의
수도장의 터전으로 택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간디는 장차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수도장을 만드는 한편, 고칼레의
충고에 따라 우선 약 1년 동안은 정치운동에 참가하지 않고, 간소한 옷차림으로 3등차와
도보로 인도의 각 지방을 순력하여 오랫동안 접촉을 잃은 인도 국민의 현황을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고 다녔다.
 @p152
  1916년에는 틸라크가 인도 자치연맹을 결성하고(4월 23일), 이어 베산트 여사가 마찬가지로
자치연맹을 결성하여(9월 1일) 전시하의 민족(자치요구)운동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으나,
그는 정치운동에는 뛰어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1916년 2월, 그는 베나레스에 있는 힌두대학교 중앙대학에서의 명사들과 학생들의
한 화려한 모임에서, "논문 발표만으로는 결코 우리에게 자치를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많은 연설이라도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치를 얻을 자격을 구비케 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치를 얻을 자격을 갖추게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행동뿐이다" (Filcher, p.54)고
강조했지만, 그는 주로 사회개혁문제에 몰두함으로써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귀국 당시 간디가 봄베이에 상륙하자 그곳에서는 성대한 환영회가 열리고, 이어서
구자라트인만의 회합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남들은 모두 영어로 연설을 한 데 반하여
참석자의 양해를 얻어 구자라트어로 말함으로써 '조그마한 사터아그라하'를 실천에 옳긴
간디 였다. 또한 피닉스 농원에서 온 동지들과 합류하기 위해 샨티니케탄에 가서는 그곳의
선생과 학생에게 육체적 훈련과 도덕적 견지에서 자취생활을 하도록 권하고 부엌의 개선을
역설하며, "이런 경험은 스와라지에의 관건이 된다"고 강조한 그였다. 뿐만이 아니다. (런던의
일류 상가인) "본드 가의 복장이나 봄베이의 멋진 옷차림을 한 지도자들이 어떻게 농민들의
마음과 통할수가 있겠는가" (Fischer, p.53)고 반문하면서 간소한 옷차림으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민들의 고정을 듣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던 그였다. 또한 귀국 직후
향리인 카티아와르에 들리는 길에, 중간역인 와드프완에서 사회활동가인 모틸랄로부터
비람감 역의 관세(통행세) 때문에 철도여객이 겪고 있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난데없이 "군은 감옥에 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라고 묻고, "당신이 우리를 지도해주신다는
조건부로 물론 우리도 감옥에 가겠다"(Namboodiripad, p.39)는 대답을 듣고는 곧 봄베이 주
정부와 서한을 교환하고 그 후 잠시 있다가 총독을 만난 기회에 그 관세를 폐지케 한
그였다.
 @p153
  그러던 중 1917년에는 간디가 인도에서 지도한 최초의 대중 사티아그라하 투쟁이요,
장차의 민족적 사티아그라하 투쟁의 무대 연습이라고 할 수 있는 참파란 사건이 일어났다.
회의파와 회교도 연맹의 협력이 실현된 데다가 회의파내의 온건파와 급진파가 화해하던
중대한 대회였던 1916년 12월 라크노에서 열린 회의파대회에, 당시 전국 각지를 순력하고
있던 간디가 참석했다. 그때 이 대회에 자기들의 비참한 처지를 호소하기 위하여
비하르주의 참파란 지방에서 온 남소작인 대표의 간청으로 간디는 다음해 참파란을
방문하게 되었다. 참파란에서는 간디에게 퇴각명령이 내렸으나, 간디는 이에 불응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그 날 밤 간디는 각지의 우인, 지기에게 전보를
치거나 편지를 쓰고, 게다가 법정에서 읽을 성명서도 기초했다.
  간디의 재판은 전례 없는 기묘한 재판이었다. 재판소 주변은 부근에서 모여든 수천의
농민들로 몹시 혼잡했다. 경찰의 요청에 따라 간디는 군중을 단속하는 데 협력한 후 재판이
열렸다. 검사의 논고를 들은 간디는 조금도 이에 항의를 하지 않고 퇴거명령에 불복했음을
자인했다. 그리고 허가를 얻고 읽은 그의 성명서에 의하면, 그는 "법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인간의 법인 양심의 소리에 복종하기 위하여"(Filcher, p.58) 참파란에서
물러갈 수 없으니 적절한 벌을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놀란 이는 그를 변호하려고 참파란에
달려온 그의 우인들뿐 아니라 그의 재판관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재판관은 결국 재판을
철회하고 말아 간디는 자유롭게 남농장의 실정을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간디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건의 경위는 이러하였다. 백만 이상의 인도 농민이 영국인의
토지를 소작하고 있었는데, 그들 소작인은 그들이 원하는 곡식을 심을 수 있었으나 농지의
15퍼센트만은 반드시 남을 재배하여 그것을 전농지에 대한 소작료로서 농장주들에게 바쳐야
했다.
 @p154
  그러던 것이 20세기 초에 이르자, 독일에서 화학염료공업이 발달하여 천연람은 불필요하게
되었으므로, 영국인 농장주들은 남의 재배를 금하고 그 대신 소작료를 인상하게 되었다.
이는 만일 농민이 남 재배를 하지 않으면 소작료를 인상할 수 있다는 지난날의 합의에
의거한 조처였다. 그러나 인도 농민들은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으므로 소작료 인상에
반대하였다. 이에 영국인 농장주들은 소작인을 구타하고 가옥이나 가축을 차압하는 등 강제
보복조치를 취하는 한편, 수천의 농민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소작료 인상에 동의하는 서명을
하게 했다. 이 쟁의는 1912년에 시작됐지만 은력한 농민들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간디와 그의 동지들은 2만 5천에 달하는 남소작인의 청취서를 작성하여 사실에 입각하는
정당한 요구를 소작인들의 강력한 후원하에 영국인 농장주들에게 제시하여 7개월에 걸친
투쟁 끝에 마침내 이를 관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간디는 '진실'에 충실한 방법, 즉
사티아그라하의 방법으로 참파란의 남소작인의 소작조건 개선에 성공했지만, 이 사건은
극히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것은 영국인 농장주에 대한 투쟁에서
성공했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것은 간디의 이름을 인도 민중간에 한층 더 높이는 동시에
인도에서의 활동에 필요한 유능한 지식인들을 그의 주위에 결집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참파란 사건 후 간디는 1918년 2월에서 3월에 걸쳐
아흐메다바드의 섬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간디가 노사쟁의에 그의 사티아그라하의 수법을
사용한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흐메다바드는 봄베이에 다음가는 섬유공업의 중심지였지만 전시의 물가고로 허덕이던
그곳의 섬유공장 노동자는 마침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단행하기로 하고, 그 지도를
간디 (그의 수도장은 아흐메다바드시에서 강 하나 건너 있는 사바르마티에 있었다)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p155
  간디는 면밀한 조사를 한 뒤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파업의 지도를 수락했다. 우선
사건을 조정에 부친다. 만일 조정이 잘 되지 않으면 정당한 욕구를 위해 단호히 투쟁한다.
그러나 조정의 기회가 있으면 언제라도 이에 응한다는 것 등이다. 먼저 간디는 조정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하여 공장주는 공장폐쇄를 선고하게 되었으므로 이에 파업이 시작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한, 또는 조정이 성립되지 않는 한 공장에
복귀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했다. 파업은 20여 일 계속되었다. 그간 간디는 연설과 글을
통해, 조직된 대중의 사기 앙양에 힘썼고, 또한 노동자들도 최초의 2주간은 총기와 자제심을
나타내어 매일 큰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드디어 노동자측은 맥이 풀리기 시작하여 매일
집회 참가자 수가 줄어들고, 집회 출석자의 얼굴에도 실망의 빛이 엿보이고 있었다. 이
정세를 보고 공장주측이 공장폐쇄를 철회한다고 선언하자, 노동자측은 분명히 동요하여
파업은 위기에 처하게 되고 말았다. "우리들에게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말하는 것은
간디에게는 그것으로 좋을지 모르나, 우리는 굶어죽고 만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불평의
요지였다. 어느날 아침엔, 노동자의 집회에서 간디는 "여러분의 서약을 지키기 위하여 나도
여러분과 함께 굶으면 되지 않겠는가" (Namboodiripad, p.42)고 말하였다. 간디의 단식은
공장주에 대해서가 아니라, 서약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노동자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었다.
간디가 단식에 호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남아프리카 시절에도 수도장의
동지가 부도덕한 짓을 했거나, 사티아그라하의 서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이를 경고하기 위한
단식을 몇 차례나 하여왔다. 그러나 투쟁하는 대중의 투지를 앙양하기 위하여 단식을
호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간디가 단식을 개시하자, 인도의 일각 아흐메다바드의
파업은 전인도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노동자의 사기는 다시 앙양되었고 공장주는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단식은 3 일, 노동자측의 사기가 왕성한 가운데, 조정자가 나타나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가 관철됨으로써 파업은 해결을 보았다.
 @p156
  분명히 간디의 지도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일은 아흐메다바드의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흐메다바드의 섬유노동자의 파업을 승리로 이끈 후 간디는 이어서 이 해
3월에 역시 향리에서 가까운 케다 지방의 소작쟁의를 지도하고, 여기서도 비폭력의 깃발을
내건 사티아그라하 투쟁으로 성공하였다. 비람감, 참파란, 아흐메다바드, 케다의
사티아그라하는 인도에서도 진지한 실험의 결과 분명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일부 국민충의 부분적인 요구에 관한 것이었다. 전국민의 기본적인 욕구, 즉 회의파와
회교도 연맹, 회의파내의 온건파와 급진파가 그것을 위해 라크노에서 결속했던 자치획득은
따로 있었다. 몇 차례의 실험을 통해서 전인도적인 전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간디는 이 민족적 요구를 획득하는 데도 그의 사티아그라하의 수법을 사용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스와라지를 획득하는 가장 용이하고도 가장 직접적인 길은 제국의
방위에 참가하는 일"(Namboodiripad, 일역본, p.44)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간디는 이때에
이르러서도 대영협력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대 영 전시협력을 위한 델리 회의에도
출석하고, 케다 지방에서는 인도인 모병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앞서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에 돌아오는 길에 영국에 들렀던 간디는 때마침 1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협력하는
인도인 야전위생대를 편성, 훈련하는 데 너무 열을 올렸기 때문에 늑막염에 걸렸다.
이번에도 너무 심한 활동 때문에 적리에 걸려 위독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이 병중에 간디는
산양의 젖을 마시는 법을 배웠고, 또한 병 회욕 운동의 하나로서 물레질을 배웠다. 이와
같이 전인도를 지도할 인물로서의 준비를 갖춘 간디는 1차대전 후의 영국의 배신을 계기로
인도 민족운동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p157
  2) 비폭력, 불복종, 비협력 운동
  (1) 시민적 불복종운동
  1차대전에 처하여 인도가 영국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자치를 획득하려던 간디와 기타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종전 후 영국은 인도의 자치요구를
인정하기는 커녕, 인도의 민족운동에 새로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통치법 개정을 위한
몬타규-첼므스포의 제안은 인도의 민족운동이 요구하며 싸우던 모든 것을 부인하는 성격의
것이므로, 가장 온건한 민족운동 지도자들까지도 그 제안에는 불만이었다. 게다가 외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온갖 저항을 분쇄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는 롤라트법안이 이
제안에 추가되었다. 실망과 분노, 영국의 배신에 대한 민족적 불만이 인도 민중의
가슴속에서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자존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복종할 수 없는 것"
(Autobiography, p.456)이라고 롤라트 법안에 대해서 생각했던 간디는 아직 병이 완쾌되지
않은 몸을 무릅쓰고, 총독에게 롤라트 법안을 재가 하지 말도록 간청했다. 이 진정도 예에
따라 무시되고 말았다. 간디는 정치운동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중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전개하려 했으나 국민회의파 지도자 중에 그의 견해에 반대할 이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국민회의파와는 별도로 자기의 세력을 조직하기로 했다.
  악평이 자자하던 롤라트 법안이 정부공보에 발표되자, 간디는 사바르마티에 있는 그의
수도장에서 회의를 열고 '사티아그라하의 서약'을 채택했다. 그 내용은 "이러한 법안이
법률로 될 경우, 그리고 그것이 철회될 때까지는, 우리는 그런 법률과, 금후 임명될
위원회가 악법이라고 간주하는 기타의 법률에 복종하는 것을 시민으로서 거부"하나 "이
투쟁에 있어서 우리는 진리에 충실히 따르며 생명, 개인 및 재산에 대한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확언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는 공공연히 또한 고의로 감옥에
들어가자는 것이다(Namboodiripad, p.46).
  간디는 또한 봄베이에서 사티아그라하 연맹(SatyagrahaSabha)을 조직하고,
'사티아그라하의 서약'에 대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제안을 신문지상에서 처음 읽었을
때 나의 감상은, 이젠 살았구나 하는 기분 이었다" (Nehru, Toward Freedom, p.48)고
네루는 회고하고 있다.
 @p158
  이 호소에 대해서는 벵골을 제외한 인도의 각지에서 반향이 있었고, 특히 남부의 반향은
예기한 것 이상이어서 불과 2주일 동안에 1, 200명이 이 연맹에 가담했다. 1919년 3월에 이
연맹이 발표한 하나의 서명은 "사티아그라하의 서약에서 예고한 위원회는 당분간 금지도서
및 신문 등록에 관한 법률에는 따르지 말도록 권고한다"는 것이었다. 위의 위원회는 금지의
법률을 무시하고 읽기를 권하던 금지 도서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그 속에는 [힌두 스와라지]
[사르보다야] [사티아그라하 이야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롤라트 법안에 대한 저항의 프로그램에 따라 간디는 '하르탈'을 제안했다. 하르탈이란
항의의 표시로서 일을 쉬고 문을 모두 닫는 일이다. 간디는 처음에 3월 30일, 후에 4월
6일을 하르탈의 날로 정했다. 이 날은 기도와 단식과 속죄 및 집회의 날로서 일을 쉬도록
간디는 지령했다. 3월 30일의 예정 일자가 4월 6일로 변경되었으나, 연락이 잘 안된
델리에서는 3월 30 일에 단식과 행진이 단행되었다.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관헌에 의한
발포 사건이 일어났다. 이틀째의 행진은 스와미 슈라다난다가 지휘했는데, 수명의 음정인
병사가 그를 사살한다고 위협했다.
  그는 가슴을 헤치고 총구 앞에 섬으로써, 위협은 이로써 끝났다. 그러나 델리 역에서는
마침내 난투가 벌어져 5명의 사망자를 내고 말았다. 예정일자인 4월 6일에는 봄베이,
마드라스, 비하르, 신드 등지에서 하르탈이 행해지면 우선 성공이라고 생각하던 당초의
예상을 뒤집고, 거의 전 인도가 하르탈을 단행했다. 전인도가 사티아그라하의 투쟁에 궐기한
셈이다. 하르탈은 성공했으나 아므리차르에서는 참사가 일어났다. 여기서는 하르탈에 뒤이어
민중의 사기가 크게 고양되고 있었으므로 관헌은 지도자를 체포하여 이에 탄압을 가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영국군의 다이어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4월 12일, 데모와
집회의 금지를 명하고 계엄령을 폈다. 이 조치는 민중에게 충분히 주지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의 대제일(대제일)인 다음날 13일 저녁, 군중들은 '잘리안왈라 바그'
(Jallianwala Bagh.아므리차르의 공원)에 모여 연설을 듣고 있었다.
 @p159
  그때 별안간 다이어 장군이 나타나 군중을 향하여 기총소사를 명령했다. 공원이라고는
하나 고충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이었으므로, 출구가 좁아 군중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사망자
379명에 부상자 1,200명. 다이어 장군은 이를 전펀잡 주에 대한 위협조치라고 하며, 추호의
동정이나 유감의 뜻도 표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탄 발포 1,650에 대해 사망자 379라는
명중률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였다. 이 사건이 다른 주에 샐까봐 펀잡 주에 계엄령을 펴고,
엄중한 비밀통제가 취해졌으나 점차 사건이 전해져 국민회의파는 그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고 후에 정착한 사실을 공포했다.
  이 무렵 인도의 회교도간에는 터키의 황제 (술탄)이며, 회교도의 군주인 킬라파(khilafa또는
caliph)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었다. 원래 1차대전은 인도의 회교도를 궁지에
몰아넣었는데, 즉 그들은 영제국에 대한 충성과 교주에 대한 성실과의 틈바구니에 끼게
되었다. 영국이 터키 황제인 킬라파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할 때까지는,
그들은 영국 원조의 결의를 하려 하지 않았다. 회교도의 여론은 유럽터키는 터키인에게
맡기고, 황제 (술탄)는 회교성지의 관리와 더불어, 회교학자들이 정한 대로 아라비아의
종주권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비령지를 보유할 것을 강요했다. 로이드
조지와 인도총독은 그렇게 할 것을 정식으로 공약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끝나자, 이
공약은 이행되지 않았다. 패전국 터키의 출탄은 폐지되었고, 킬라파의 앞날도 불투명하였다.
킬라파의 폐지 반대를 위해서 인도의 회교도간에 일어난 것이 바로 킬라파트운동이다.
형안을 가지고 있던 간디는 인도 통일을 이룩하는 가장 적절한 방편으로서 이 움직임을
재빠르게 포착하여 그들을 반영운동에 동원하였다. 20세기 초 이래 영국은, 회교, 힌두교
양교도간의 알력을 조장시켜 왔지만, 이미 남아프리카에서의 체험을 통해서 힌두교도도
회교도도 파르시교도도 모두 인도인으로서는 하나라는 철저한 인식을 갖고 있던 간디는 이
킬라파트운동을 통해서 인도의 회교도를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 끌어넣었다. 물론
회교도에게는 그들로 서의 '독자적인' 입장이 있고, 또 그러한 역사적 조건도 있었으므로,
간디는 그들에게 비폭력을 권하면서도 그들이 비폭력의 원칙을 채용하도록 강력히
주장하지는 않았다.
 @P160
  그와 같이 관대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양교도의 협력을 꾀하였다. 또한 간디는 이 해 1월에
델리에서 열린 회교도의 킬라파트회의에서 의장을 맡아보았다.
  한편 전인도의 하르탈이 성공리에 끝난 후 간디는 체포되었으나, 이때에는 3 일 후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간디는 최초의 전인도적 규모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에 폭력이
혼입되었다고 하여 이를 참회하는 의미에서 3일간의 단식도 하였다. 그렇다고 간디의
용기가 꺾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천 명, 아니 수천 명의 무고한 남녀가 학살당하는 것도
침착하게 숙시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각자는 교수형도 일상 다반사로
여기도록!... (holland, p.70)라고까지 간디는 말했다. 이는 인도 국민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 말일지도 모른다. 이 해에는 간디식 조직과 운동의 기관지로서
주간지 [영 인디아] (영문판)와 [나바지반] (Navajivan.구자라트어판)을 간행했는데, 여기에
매호 기고되는 간디의 주장은 점차 '인도의 소리 '로 되어갔다.
  (2) 비협력운동
  최초의 전인도적 불복종운동이 전개된 1919년에 뒤이어 1920년은 인도 민족운동에서 극히
중요한 해였다. 터키에 불리한 강화조건이 인도에서 알려지고, 아므리차르 대학살에 관한
정보가 발표되어 민심에 충격을 주었다. 간디는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을 생각해내어
그것을 이 해 5월에 베나레스에서 열린 회의파 전인도위원회에 제안했는데, 그것은 다음의
8항목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1 일체의 칭호 및 명예직을 반환한다.
 #2 법정의 보이코트, 즉 변호사 및 소송 당사자는 영국 재판소를 보이코트하고 사적 중재로
소송을 해결한다.
 @P161
 #3 정부의 학교에 대한 보이코트, 즉 각 주의 소, 중 대학교로부터 학생을 점차로 자퇴케
한다.
 #4 여러 참사회에의 불참가 및 지방 행정기관에 임명된 지위를 사직한다.
 #5 정부의 공식 접견, 접대에 출석을 거부한다.
 #6 군인, 교직자, 노동자 계급 층에서 군에 복무하기 위한 모병에 응하는 것을 거부한다.
 #7 외국 상품을 보이코트한다(스와데시).
 #8 국채의 응모를 거부한다(판본양송, pp.134-35).
  회의파 전인도위원회에서뿐 아니라, 같은 달에 열린 킬라파트 위원회에서도 그리고
다음달에 있은 힌두교도, 회교도 회의에서도 이를 지지하였다. 6월 30일에 지지 결의를 한
회교, 힌두교 양교도회의는 1개월간의 유예를 총독에게 주고, 또한 간디 자신이 총독에게
서신을 보냈지만, 반응이 없었으므로 7월 28일 간디는 '비협력'을 8월 1일 개시할 것을
전인도에 선언했다. 그 전날인 7월 31일을 기하여 단식과 기도에 의해 엄숙한 준비
하르탈을 하도록 그는 명했다. 1920년 8월 1 일, 비협력운동을 개시하기 위하여 간디가
봄베이에 도착한 바로 그 날 틸라크는 병몰했다. (고칼레는 이미 간디가 귀국 한직후인
1915년에 2월에 병사했었다.)그것은 마치 인도민족운동의 지도자 교체의 때를 고하는
듯했다.
  간디는 비협력을 실행하기 위해 자진해서 일체의 칭호와 훈장, 즉 남아프리카에서의 박애
행위 때문에 수여된 카이자 리 힌드 황금훈장, 보어전쟁 훈장, 줄루전쟁 훈장을 영국 정부에
반환했다. 이에 아므리차르 대학살에 항의하며 1919년 5월 30일에 이미 기사의 칭호를
포기했던 타고르는 새 민족운동 지도자로서의 간디에게 '마하트마'(위대한 혼)의 칭호를
보냈다. 수백의 관리가 사직하고 수천의 대학생이 자퇴했다. 비협력의 물결은 점차 전인도를
뒤덮게 되었다.
  9월 초에 캘커타에서 열린 회의파의 임시대회에서는 일부 유력한 회의파 지도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점진적인 비폭력, 비협력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11월에 있은
입법의회 선거는 보이코트되었다.
 @P162
  그런데 12'월에 나그푸르에서 열린 회의파 대회에서는 간디의 방침이 회의파의 많은 선배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거의 만장일치로 재확인되었다. 비폭력, 비협력이 스와라지 획득을
위한 회의파의 운동방침으로서 채택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대회는 승리를 얻기 위하여
국내의 모든 요소의 조화, 즉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협력과 빈부간의 접근을 역설하였다.
또한 이 대회는 현재의 비협력은 투쟁의 제 1단계에 불과함을 공언하고, 장차 시기를 보아
납세거부를 완전히 실행할 것을 예고하였다. 이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국민에게 준비를
시키기 위하여 영국화폐 보이코트를 확대하고 물레질을 장려하며 학생, 부형, 사법관에
대소하여 비협력을 더욱 철저히 실행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회의파가 과당헌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여 인도 각 지방 대표의 대의기관으로 되기로 결정한 것도 이 대회에서
였다.
  비협력투쟁을 통해서 간디는 자기 주변의 회의파 지도부의 유능한 인재를 모으게 되어
그의 지도력을 한층 더 강화해 갔지만, 반면 간디의 참가를 계기로 국민회의파 안에는 일대
구조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간디가 처음으로 국민회의파에 참가하자 당장 그 구성에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회의파를 민주화하고 대중의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전에도 회의파는 민주적이기는 했으나,
입당 자격에 제한이 있어, 상류계층에 국한되고 있었다. 이제는 농민이 다수 들어와, 그
모습이 새로워져 중산계급을 상당히 포함하는 커다란 농민조직의 양상을 지니기 시작했다.
이 농민적 성격은 점점 짙어갔다. 공업노동자도 또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들은
단체자격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서 들어왔다. " (The discovery, p.313)
  이와 같은 네루의 말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최초의 간디의 대회'였다는 1919년
12월 아므리차르에서 열린 회의파 대회의 상황을 보면, 3만 6천 명의 출석자 중 6천 명이
정규대표이고 1, 200명이 소작인 대표이며 나머지는 방청 자였다. 이 숫자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대회의 구성에는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p163
  여태까지의 중산계급의 상층부보다 훨씬 더 많은 중산계급 하층부와 소작인, 기타 학생과
청년층을 포함하는 대중이 회의파대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회의파 안에서 계속되어온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도 앞으로는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기반 위에서 전개되게 되는
것이다. 중산계급의 출쳔이 힌두교도에 비해 훨씬 뒤진 회교도사회에서도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회교도연맹과 회의파의 접근도 회교도 중산계급, 특히 그 하층부의 정치적
자각을 추진력으로 하는 것이었다. 간디의 참가는 단지 회의파의 구성상에 변화를 일으킨
것만은 아니다. 그는 또한 회의파 조직의 전국화도 꾀하였다. 즉 전술한 나그푸르
대회에서의 당헌 개정으로 회의파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조직의 최저의 기초는
촌락 회의파위원회에 두고, 그 위에 지구위, 시위, 분구위, 구의, 주위가 차례로 있고, 주는
언어별 단위로 나누어졌다. 이 위에 350명으로 구성되는 전인도회의파 위원회가 있고,
정점에 15명으로 구성되는 운영위원회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주민 5만 명에 1명씩의
위원을 선출하기로 하고, 전위원 6, 173명으로 구성되는 전인도 국민회의파대회는 매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1회씩 소집하기로 되었다.
  국민회의파의 이러한 조직은 촌락에 곧 농민에 기초를 둔 피라미드형의 조직이었다.
간디는 주로 (그가 회의파에 참가하고 있는 동안은 특히) 그와 같은 조직을 통해서
중산계급의 하층, 그 중에도 특히 농민대중을 장악하여 그 에너지를 반영운동에 동원하였다.
1919년에 시작된 시민적 불복종, 20년의 비협력운동을 통해서 인도민중의 정치적 활동은
크게 앙양되었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회의파의 활동에서는 볼 수 없던 전인도적으로 일어난
세찬 물결이었다. "자기 확신과 비상한 능력에 충만되고, 각 개인의 평등과 자유에
편들면서도 만사를 가장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는 놀라운 활력을 가진"
(Discovery, p.316) 간디는 인도의 대중을 매혹하여 그들을 무감각한 정지적 상태에서
깨어나 활동적이 되도록 만들었다.
 @p164
  그는 민족의 정신적 통일을 회복하고, 빈부간의 장벽을 타파하며, 낡은 것에서 생기 있는
요소를 발견하여 이를 육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네루는 "개개인에게도 민족 전체에게도
'간디'의 최대의 선물은 옛부터 가르쳐오고 있는 '아브하야' (abhaya) 즉 공포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육체적인 용기뿐 아니라 마음속에 공포를 깃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Discovery, p.311)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영국 치하의 인도에는
숨막힐 듯한 공포가 서리고 있었다. 원래 공포란 꼬리를 물고 환상을 낳아 실체 이상으로
공포심을 조성하게 마련이지만, 일단 그 실체가 분석되고 그 결과가 쾌히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공포는 반감되는 법이다. 간디는 침착하고 결의에 찬 말로 이렇듯 미만되고 있던
공포에 대하여 "두려워 하지 말랴"고 외쳤다. 왜냐하면 공포심을 갖고서는 진리도, 자유도
그 밖의 고귀한 아무것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심을 버리자 인도 민중에게는
심리적인 반작용이 일어났다. 그들을 모욕하고 타락시킨 외국의 지배에 그토록 오랫동안
굴종해온 것을 부끄러워하는 심정,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제부터는 결단코 굴종하지
않으려는 욕구가 그것이었다.
  비협력이란 본질적으로 "외국인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외국을 돕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관념"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감정은 안에서 나을 수밖에 없다. 그러길래
C.F.앤드루스는, "자기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안에서 발랄한 그 무엇이 용솟음칠 때에만
얻어진다. 그런 용솟음에 필요한 폭발력은 인도 자체의 혼 속에서 발동되지 않으면 안된다.
밖에서의 차관이나 증여, 기부나 양여 또는 선언을 가지고는 얻어질 수 없다. 그것은 안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안에서의 폭발력이 실제로 폭발한 것을 보았을
때에는, 견디기 어려운 부담에서 정신적으로 해방되었다는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
폭발력은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의 마음에 대해서 '자유로워라! 이 이상노예로되지 말라 !'고
외쳤을 때 폭발했다. 인도의 마음은 이에 응했다. 별안간 인도의 굴레는 늦추어지고
자유에의 길은 열렸다"(Nehru, Toward Freedom, p.67)고 말하고 있다.
 @p165
  간디를 매개로 하여 폭발한 인도의 잠재적인 힘이 비폭력운동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전인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게 되자, 비폭력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과열현상이
각처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 첫번째의 대규모적인 경우가 1921년 8월에 일어난 모플라의
반란이었다. 인도 서남마라비르 지대의 모플라(회교도 농민)간에는 영국인에 대한
비협력이라는 간디의 외침이 그들의 반지주적 요구와 하나로 되어 3만의 회교도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은 지주의 문서 소각, 등기사무소와 관청의 습격, 인민법정의 설치 등,
농민혁명적인 형태로 폭발했었다. 이미 12년 3훨 초부터 억압에 착수했던 정부는 이에
대하여 가차없이 탄압하였다. 즉 모플라 반란의 주모자 90명이 체포되어 11월 10일
밀폐화차로 수송 도중 61명이 질식해 죽고 말 정도였다.
  한편 이 비협력운동의 시기에 간디는 회교도인 알리 형제를 데리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백, 수천의 군중대회에 참석하여 그들을 격려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셔츠와
모자의 사용을 그만두고, 예의 인도의 흰 '로인 클로스'(loin cloth.허리를 두르는 간단한
옷)만을 착용하고 다니면서 인도통일을 위해 종교, 인종, 카스트의 결합을 강조하고,
스와데시와 물레질을 역설하였다. 이리하여 간디는 인도 민중의 벗으로 되는 동시에,
불복종, 비폭력 운동이 전인도 민중의 것으로 되어갔다.
  그런데 이때 간디와 타고르 사이에는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다. "타고르와 간디라는 두
위대한 정신 사이의 논쟁은 중요하다. 두 사람은 서로 찬양하고 존경하고 있었지만, 철인과
사도, 성 바울과 플라톤처럼 감정에 있어서는 운명적으로 상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편에는 새로운 인간성의 기초로 되려는 종교적 신앙과 자비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에는 모든 인간의 원망을 결합시키기를 원하는 자유롭고, 청징하며 광범한 이지가
있기 때문이다"(holland, p.125, Kripalani, 일역본, p.63)라고 로맹 롤랑은 말하고 있다.
 @p166
  아시아의 정신의 사절로 유럽에 가서 자기가, 샨티니케탄에 세우려고 하던 세계대학을
위해 유럽의 협력을 구하고 1921년 8월, 수년 만에 귀국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인심의
변화를 보고 놀랐다. 비협력은 그의 세계적인 지성과 충돌했던 것이다. 마치 괴테가
1813년에 프랑스의 문명과 문화를 배격하기를 거부했듯이, 타고르는 유럽 문명을
배척하기를 거부하였다. 간디의 가르침의 진의는 동서양간에 장벽을 쌓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인도의 애국열이 높아지면 간디의 가르침이 그릇 해석될까봐 타고르는 두려워했다.
그는 인도에서 정신상의 전제주의의 위협이 박두하고 있다고 보고, 1921년 10월의 [모던
리뷰]지에 [진리에의 호소] (The Call of Truth)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1907년에서
8년에 걸치는 초기의 인도 해방운동을 회상하며, 인도 정치운동의 지도자들이
직수입적이어서, 에드먼드 버크, 파마 글래드스턴, 마치니, 갈리발디 등을 모방하려고 했다고
비판한 후 인도 순력도상에 있는 간디를 절찬하는 말로 시작했다. "이때에 마하트마 간디가
나타났다. 그는 토지와 재산을 빼앗긴 수천의 사람들의 오막살이 앞에 섰다.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코들의 말로 얘기했다. 거기에는 진리가 있었다. 책에서 빌린 말은 아니었다...
모든 인도인은 살도 퍼도 같다는 것을 간디 이외에 누가 옳게 느꼈을까 ? 일단 진리에
부딪치자 억제되고 있던 혼의 힘이 나타났다. 참된 사랑이 인도의 문전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은 활짝 열렸다. 일체의 주저는 사라지고 말았다. 진리는 진리를 일깨웠다...진리의 힘을
드러낸 마하트마를 찬양하라!... 그 힘은 학문에, 예술에, 또한 부에까지 퍼져가고, 대양을
건너고 사막을 넘어서 갔다." (Rolland, 일역본, pp.136-37) 이렇듯 시인다운 찬사로 시작한
타고르의 논문은 급작스레 신랄한 비판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자유의 훈풍에 접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던 타고르는 당시 전인도를 뒤덮고 있던 압박감, 즉 모든
인도인으로 하여금 같은 언어로 말하며 같은 길을 걷게 하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성과 교양이 부인된 채, 있는 것은 오직 맹종밖에 없다고 본 타고르는 표면상의
자유의 이름 아래 진정한 자유를 분쇄하는 결과를 가져올까 두려워했었다.
 @p167
  간디의 비협력운동에 대한 타고르의 비판은 다음의 두 근거 위에 서 있었다. 하나는
원시생활에 대한 그 호소는 문명의 발달을 저지하게 되리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
운동이 전인류의 복지가 아니라 한 민족의 복지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부싯돌이 선조들의 무기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매달려 있는 민족은 나머지 인류한테
버림받게 될 것이요, 또한 "인도의 각성은 세계의 각성의 일부이며...이제부터는 어떠한
국민도 자기 나라의 고립된 견해를 끝내 취한다면 새 시대의 정신에 배치되게 되고,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이제부터는 각국이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열망은 세계의 복지를
포함하지 않으면 안된다" (Husain, p. xii)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응답에서 간디는 일찍이 보지 못한 열의를 나타냈다. 1921년 10월 13일자의 [영
인디아]지에, 간디는 [위대한 초병] (The Great Sentinel)이란 제목의 감동적인 답변을
실었다. 그는 먼저 약간의 위험에 관해서 미리 인도에 경고한 데 대하여 [위대한 초병]인
타고르에게 감사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은 자유로운 정신의 보전에 있다는
점에는 타고르에게 동의하였다. 타고르는 완미, 혼수, 불관용, 무기력 등으로 불리는 적의
내습을 알리는 훌륭한 초병이기는 하나, 간디는 타고르의 걱정이 정당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간디는 우리의 지성과 온갖 능력이 바쳐야 할 대상은 영혼의 발전이니 만큼,
강철시대가 부싯돌시대보다 전진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의심스럽다고 논하고는, "우리의
비협력은 영국인이나 서양인에 대한 것은 아니요, 영국인이 수립한 제도와 물질문명 및
이에 수반되는 탐욕과 약자의 착취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비협력은 영국 행정관들과
그들이 내세운 조건으로 협력하는 일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 우리의 조건으로
우리와 협력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도, 당신들과 세계에게도 좋으리라'고 그들에게
말한다. 인도의 민족주의는 배타적인 것도 침략적인 것도 파괴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건강을 중진시키는 것이요 종교적인 것이므로 따라서 인도주의적인 것이다. 인도는 인류를
위해 죽기를 열망할 수 있기 전에 사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Husain, p.12)고
역설하였다.
 @p168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고 있는 이 마당에 나에게 허용된 유일한
길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이다... 인도는 날로 가난해지고 있다. 그
수족에는 이미 피가 거의 돌지 않고 있다. 만일 우리가 보살펴주지 않는다면 인도는 금시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 굶주리고 나태한 민족에게 신의 모습이 나타나는 유일한 형식은
생산과 스스로 생계를 세울 수 있는 희망이다...이제는 동물보다도 못하며, 거의 빈사상태에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레야말로 수백만의 빈사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다. 인도에게 물레를 돌리게 하는 것은 기아이다... 먹기 위해서 일할
필요가 없는 나는 왜 물레질을 할까 하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내가 나에게 속해
있지 않는 것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료의 물건을 빼앗아서 살고 있다. 당신의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모든 화폐의 출처를
찾아보시라. 그러면 당신은 내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구도 물레질을 해야 한다!
타고르도 물레질을 하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외국제의 옷을
불태우는 것이 옳다!... 오늘날 그것은 의무이다. 내일의 일은 신이 염려해주신다.
[기타]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바를 일을 행하라!"(Rolland, p.143-45)
  "어둡고 침통한 말! 여기에 예술의 꿈 앞에 마주 서서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라 !'고
외치는 세계의 비참이 있다. 그 누가 간디의 불타는 듯 한 감격을 같이 나누지 않으리요 !
그렇지만 참으로 긍지가 높고 날카로운 이 답변 속에도 여전히 타고르의 염려를
뒷받침해주는 그 무엇이 있다. 시인은 침묵하고, 스와데시운동의 기율에 따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첫째 명령은 '물레질을 하라'이다" (holland, p.145)라고 로맹 롤랑은
논하고 있다.
 @p169
  "얼마나 슬프고 불필요한 논쟁이었던고 !"라고 K.R.크리팔라니 '는 말한다. "여기서는
시인은 자기가 그 출현을 대망하며 기원하고 있던 바로 그 사람에 대해서, 또한 그가
자기의 시와 연설과 희곡과 소설에서 예기하며 축복하던 바로 교 사람의 수단에 대해서
도전했다. 그리고 간디는 '위대한 초병'은 생계를 세우는 일 이상의 일을 갖고 있으며 그의
존재를 완성하기 위해서 물레질을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라고 논하면서 그는 안타까워 하고 있다.
  * : K.R. Kripalani, hndhi, Tagore and Neikru, 삼본달증, 일역본, p.69.크리팔라니에
의하면 간디가 그의 비폭력의 신앙과 신조의 가능성을 계획하기 전에, 타고르는 그러한
사도의 출현을 대망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1883년에 출판된 소설 [바우타크라니르의
모자]에 의거해서 적어지고 1909년에 나온 희곡 [속죄]와, 또 다른 희곡 [룰] (1922년
출판)에서, 그는 다난자이 바이라기라는 인물 속에 거의 간디의 원형을 창조했다. 여기 에는
온갖 재산을 내버리고 왕의 가혹한 세금에 대해 납세거부운동을 일으킨 일반민중의 지도를
맡은 인물이 있고, 여기에는 진리와 비폭력과 용기에 입각하는 대규모적 이며 기율 있는
사티아그라하가 있다고 한다(같은책, p.42).
  또한 일찍이 1904년의 스와데시 사마주에 관해서의 강연과 1908년 파브나에서의
벵골지방회의의 의장 연설에서 타고르가 국민에게 주장하고 설명한 국가활동의 계획은 후일
간디에 의해서 입안되고 조직화된 적극적인 활동계획과 너무나 유사하다고 한다. 비협력,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융화, 불가촉천민제 배척, 농촌개조, 수공업의 부흥, 손일에 의한 훈련을
강조하는 농촌교육, 농촌자치와 지원병의 편성, 이런 모든 것이 열렬하고도 성실한 말로 타고르에
의해서 제창되었다고 한다(같은 책, p.47).
  숭고한 정신을 가진 타고르는 침묵했다. 두 사람의 위대한 논쟁은 끝났다.
 @p170
  그간 정부의 탄압은 날로 심해져 1921년 12월과 1922년 1월 사이에 비협력운동과
관련되어 투옥된 사람이 3만 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되자 간디는 그가 사티아그라하 투쟁의
모델 지구로 정하고 여러 실험을 해온 봄베이 주의 바르돌리에 한정하여 대중에 의한
시민적 불복종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22년 2월, 우타르 프라데슈 주의
히말라야 산록에 있는 차우리 차우라라는 소도시에서 농민에 의한 경찰역습사건이 일어나
경관 22명이 불타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간디는 바르돌리에서 회의파 운영위원회를
열고, 2월 16 일 일체의 대중적인 시민적 불복종운동의 중지를 지령했다. 진리와 비폭력에
충실해야 할 운동에 폭력이 섞이게 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수단을 목적에 못지 않게
중요시하던 간디에 의하면 아무리 소량이라도 우유에 비소가 섞이면 그 우유는 마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지도자와 활동각 투옥당해 있으며, 그들은 운동의 고양을 열망하고 있던 때인만큼
간디의 급작스런 운동중지 명령은 실망과 분격을 샀다. 네루도 처음에는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고민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간디는 비록 경찰측의 대발행위가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폭력은 사티아그라하의 서약에 대한 위배이며 신(진리)에 대한 죄악이
라는 신념을 견지했다. 그러나 간디의 이 조치는 당시 큰 문제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간디
연구가에게는 문제가 되는 점이다. 이 조치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간디의 비폭력의 신념이
확고함을 찬양하는 자, 또는 단순히 간디의 비 폭력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자, 혹은 인도
민중운동의 미성숙에 돌리는 자 등 구구하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치던 간디가 이제 두려워하게 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간디는
폭력에서 현실의 정치악과 사회악을 보고, 비폭력에서 그보다 차원이 높은 질서를 보고
있었다. 불복종이란 양심의 질서에 따르기 위해 현실의 권력에는 복종하지 않는다는
운동이요, 비협력이란 보다 높은 질서의 확립에 협력하기 위해 현실의 권력에는 협력하지
않는다는 운동이다." 간디가 두려워한 것은 그러한 높은 질서의 붕괴였다.
 @p171
  그러나 이런 이상만으로써 간디의 그 조치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간디는
가끔 거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였다. 오랫동안 대중과 밀착하고 있었으므로 대중의 감정의
움직임을 찰지하는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런 대중의 감정에 반응을
나타내고 그것으로 행동을 기율하고 그 후 분격하고 있는 동지들을 위해 자기의 결정을
도리로 감싸고자 하곤 하였다. 당시 비협력운동은 표면상은 강력하며 그 열광은 고조되고
있었으나 사실 그것은 바로 와해에 직면하고 있었다. 일체의 조직과 규율은 상실되고,
유능한 동지는 거의 투옥되고 있었으며, 대중은 대중대로 자력으로 운동을 전개할 훈련을
받고 있지 못했다. 아무리 무명한 자라도 마음대로 회의파위원회를 주름잡을 수가 있었다.
사실 도발자도 포함하는 다수의 원치 않는 인물들이 정면에 나타나 지방의 회의파나
킬라파트운동을 좌우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진출을 막을 길은 전혀 없었다. 간디가 염려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이었다고 하겠다. 게다가 간디는 폭력으로써는 영국을 물리칠 수
없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현실주의자였다. 비폭력의 방법은 단지 정당할 뿐 아니라
목적달성에 가장 유효한 것이라고 믿고 있던 간디였다. 따라서 비폭력은 목적이라기보다는
인도의 독립쟁취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간디에 있어서는 목적과 수단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지만).그렇지 않으면 간디가 네 차례에 걸쳐 영국의 전쟁 (폭력)수행에
적극 협력한 일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더구나 불복종, 비협력운동에서 폭력이
혼입된 것은 이 차우리 차우라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와하를랄은 나의 정치적 후계자이다. 그는 나의 생존시에는 나와 견해를 달리 할는지
모르나 내가 죽으면 그도 나와 같은 말을 하리라" (Husain, p.163)고 예언하던 간디한테서
우리는 인도 국민의 운명을 양 어깨에 걸머진 영도자로서의 책임감과 현실적 제약성을
느끼지 않을 수없다.
  간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비협력운동에 급작스런 중지명령을 내린 얼마 후인 3월 10일에
체포되어 3월 18일 유명한 '최초의 심판'을 받았다.
 @p172
  그는 공술서에서, 1893년 남아프리카에서 자기의 공적 생활을 시작한 이래 어떻게 하여
영국에 대한 충실한 협력자에서 비타협적인 비협력자로 되었는가를 당당히 진술했다.
그리고 간디는 "재판장 및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이 취할 길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즉 여러분이 그 직을 내던지고 여러분이 집행하고 있는 법률이 악이며 실제로는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여 여러분 자신이 악에서 벗어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운영하고
있는 제도와 법률이 인도 국민에게 선이며, 따라서 내 행동이 공공의 안전에 유해하다고
하여 나에게 최고의 형을 내리는 것입니다" (판본섬송, p.150)고 첨부했다.
  재판장은 간디가 위대한 애국자이며 영도자임을 인정하면서, 재판의 전례를 고려하여
6년의 금고를 언도했다. 그 전례란 틸라크의 경우를 가리키며, 틸라크와 같은 형이 언도된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간디는 말하였다. 간디는 에라브다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병 때문에
1924년 2월 5일 석방되었다.
    3. 재준비
  1) 스와라지당과 '건설적 프로그램'
  일반적으로 1922년 차우리 차우라 사건에서 1928년의 12월 캘커타 회의파대회까지의
기간은 간디가 정치의 전면에서 후면으로 후퇴한 시기라고 논해지고 있다. 그러나 간디의
생애를 보면, 정치의 제 1선에서 인퇴한 듯이 보이면서도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줄로
회의파 및 인도의 민족운동과 연결되고 있었으므로, 결국은 다음 투쟁을 위한 준비기간에
불과하곤 했는데, 이번 경우도 그 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민적 불복종과 비협력운동을
지도한 간디의 사상은 인도적인 정신주의가 강했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은 당시의 인도
민중의 현실을 반영하고 그것을 통합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간디에 의한 민족운동의 돌연한
중지는 단지 민족운동의 후퇴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 후의 인도 민족운동의 노선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p173
  간디에 의한 그와 같은 일대운동의 급작스런 중지와 그의 체포는 한편으로는 롤라트법안
반대투쟁 이래로 그가 회의파 안에 이룩해놓은 통일을 깨어지게 하여 회의파 내부의
잠재적인 대립을 표면화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킬라파트운동으로 결합되었던 회교, 힌두교
양자간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어 종파적 분쟁을 노정시키게 되었다.
  우선 전자부터 살펴보기로 한다면, 간디는 비폭력을 역설함으로써 온건파를 만족시키고,
영제국주의에 대한 비협력을 호소함으로써 급진파를 분기시켜 온건, 급진 양파를 하나로
규합시킬 수 있었으나, 그와 같은 운동의 급작스런 중지와 뒤이은 그의 투옥은 회의파
내부에서 오래 전부터 꼬리를 끌어온 양파의 대립이 마침내 온건파에 의한 스와라지당의
결성과 이에 대해 불복종, 비협력의 방침 견지라는 '비변경파'(no-changer)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하였다.
  간디 주변의 주요한 지도자들 중에서도, 스와라지당에 속하는 사람들은 네루의 부친인
모틴랄 네루, 벵골의 지도자 데슈반드 다스와 수바스찬드라 보스, 펀잡의 랄라 라주파트
라이 등이고 비 변경파는 다 같이 간디 측근이라고 할, 봄베이의 발라브흐브하이 파텔,
마드라스의 라자고팔라차리, 비하르의 라겐드라 프라사드 등이었다. 스와라지당의 사람들은,
시민적 불복종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은 주입법참사회를 보이코트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이미 불복종운동이 중지된 지금에 와서는 그런 보이코트는 의미가 없으므로 그러한 기구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비변경파에 속하는 사람은 시민적 불복종, 비협력의
정신을 견지하여 주입법참사회의 보이코트를 계속하고자 하였다.
  1922년 12월 비하르 주의 가야에서 열린 회의파대회에서, 입법참사회 참가의 건은 찬성
890표 대 반대 1, 740표로 부결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비변경파의 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러나 남부디리파드의 말대로, "첫째는 수명의 가장 유명한 회의파의 최고
지도자가 스와라지스트의 지도를 담당하고 있었고, 둘째는 입법참사회에 참가하는 데
반대한 사람들은 아무런 대안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Namboodiripad, p.63)
스와라지스트는, 비록 소수파라고는 하더라도, 회의파 내부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p174
  1924년 2월에 병으로 석방된 간디는 자기가 투옥되고 있던 22개월 동안에 인도의
정치정세는 크게 후퇴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요약하여 "수많은 변호사들은
다시 개업했다. 그 일부는 폐업했던 일을 후회까지 했다... 관립학교를 자퇴했던 숱한 중,
대학생들은 지난날의 자기들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복교했다" (Fischer, p.74)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민중의 투지는 이완된 데다가, 스와라지파와 비변경파의 대립은 결정적인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대정부 비협력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간디는 회의파의 양익을
통일하고 그 틈을 메우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즉 입법참사회 참가가 이미 거의 확정된
사실이며, 또한 회의파 지도자간에 그처럼 날카롭게 견해가 대립되고 있는 문제는
다수결로써는 해결될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간디는 그와 견해를 달리하던
스와라지스트한테는 회의파 안에 머물러 있는 채 그들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걷도록 자유를
부여하는 한편, 자기와 견해를 같이하던 비변경파에 대해서는 스와라지스트의 계획에
반대함으로써가 아니라 입법부 밖에서 대중을 조직, 훈련하여 앞날의 대사업을
준비함으로써 그들의 전술이 보다 나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간디는 비변경파로 하여금 스와라지당이 회의파의 불가결의 구성요소임을 인정케 했을 뿐
아니라스와라지당을 회의파의 정치활동의 중심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동시에 그는 따로
'건설적 프로그램 '을 대중들 사이에 전개하도록 비변경파에 지령하고,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인 면에서의 건설적 행동을 통해서 정치적 에너지를 축적해갔다. 이때 간디가
상징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것을 고집했던 사실은 이 시기의 인도의
사회, 정치적 현실과 간디와의 밀착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p175
  간디는 이미 인도에서도 구식으로 된 '물레' (charkha)의 사용과 카디의 착용을 장려했다.
G.D.H.콜은 "간디가 추진한 자가제직물 수공업을 발전시키려는 운동은 과거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단순히 낭만적인 열정에서 나온 변덕이 아니라, 가난을 구제하고 농촌의 수준을
향상시키려는 실제적인 기도이다" (Discovery, p.355)고 평했지만, 이는 문제의 핵심을 찌른
평이었다. 간디가 물레와 농촌공업에 대한 계획을 전개한 것은 그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나왔다. 즉 막대한 수에 달하는 실업자와 반실업자를 당장에 구제하려고 한다면, 인도
전체에 걸쳐 대중을 마비시키고 있던 부패를 제거하려고 한다면, 농촌의 생활수준을
약간이나마 전체적으로 향상시키고자 한다면, 대중이 타인의 구제를 기다리는 대신에
자립하려는 정신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그러고 이 모든 일을 큰 자금 없이 행하려고 한다면
이 이외의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물레와 카디는 영국 제품을 배격하고 인도
자신의 것을 손으로 짜는 일을 가르치는 동시에 흑서 때문에 농한기가 긴 인도 농민에게
현금수입의 길을 열어주는 실질적인 방법이었다. 게다가 간디는 카디를 인도의 국민적
통일의 상징으로 보고 있었다 함은 전술한 바이거니와, 네루도 카디운동의 정신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것 (카디 운동)은 인도로 하여금 가난한 농민을 인간으로서
생각케 하고, 또한 몇몇 화려한 도시의 배후에는 비참과 궁정의 웅덩이가 가로놓여 있음을
깨닫고, 인도에서의 진보와 자유의 참된 척도는 약간의 백만장자와 부유한 변호사 등을
만들어 내는 데 있거나 무슨 회의나 위원회들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지위와 생활상태의 개선에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파악하도록 강요하였다. 영국인은
인도에 새로운 카스트 내지 계급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영어교육을 받은 계급이며 그들은
대중과는 유리되어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살며, 항의를 할 때마저 그들의 지배자의 눈치를
살피는 작자들이었다. 간디는 어느 정도 그 틈을 메워, 그들로 하여금 머리를 돌려 자국민의
편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Discovery, p.355)
  이와 같은 물레질과 카디착용 장려 이외에도, 간디는 스와데시 (외국제품 배격과
국산애용), 불가촉천민의 해방, 종파간의 화해, 부인해방, 힌디어의 보급, 공작교육, 금주,
공중위생 등의 건설적 프로그램'을 선전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걸어다녔다.
 @p176
  또한 비변경파에 속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열정을 가지고 이상과 같은 프로그램을 천에 옮겨
국민적 통일의식과 자립정신을 대중간에 찬기, 함양함으로써 앞날의 보다 큰 민족투쟁을
위해 국민을 계몽, 훈련했다. 간디가 인도 각지를 순력하면서 일반대중에게 얼마나 큰
감명을 주고 있었는가의 한 예로서 비협력운동 당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인도 부인운동의 지도자 두르가바이 데슈무크 여사의 회고담 중의 몇 귀절을 옮겨놓기로
한다.
  간디가 처음으로 우리가 살던 곳에 오신 것은 1922년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12세의
소녀였습니다... 그곳에서 열린 간디의 연설회에는 나도 참석했습니다만, 회합에는 문자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간단한 허리옷만을 입은 거의 나체에 가까운 간디는
우리를 격려하기도 하고, 우리들에게 신변의 사정들을 돌이켜 보게도 하면서, 우리들
모두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때 어찌된 영문인지 모릅니다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몹시 혼잡해 있었기 때문에, 간디가 있는 곳까지 가기는 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하는 짓이라 모두가 길을 비켜주었습니다. 자그마한
간디모가 사람들에게 돌려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연설을 할 때마다 그는 기부금을 모집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모인 돈은 결국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교육자금이라든지, 극빈자들을
위한 자금, 또는 불가촉천민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간디의 인품에 매혹당해서
내가 행한 최초의 행위는 몸에 지니고 있던 두세 개의 보석을 뽑아서 내 차례에 온 간디모
속에 집어넣은 일이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간디의 가르침을 지키고
열과 성을 다하여 그가 열어준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p177
  간디가 행한 인도 독립을 위한 작전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외국제
내복의 보이코트, 외국어의 보이코트, 모국어인 힌디어의 수득, 물레질, 또한 영락하고
낙후된 사회층의 구제 등 이었습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방침에 따라서 '건설사업'이
조직되었습니다. 그것이 인도의 사람들, 특히 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즉시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랭커셔와 맨체스터에서 수입된 외국제
옷감이었습니다. 나는 손으로 짠 거칠거칠한 카디로 바꿔 입었습니다. 이어서 나는 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국어는 힌디어 입니다. 또한 부락방문을 시작하여 농촌사람들과
접촉하며, 그들에게 말을 걸거나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기도 하고, 카디를
팔거나 농촌 특히 부인간에 물레질을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간디는 '건설적
프로그램 '을 통해서 국민을 각성시키고, 의식분자를 건설사업에, 동원하는 한편,
스와라지스트에게는 입법참사회 안에서 비변경파의 '건설적 프로그램'을 돕는 노선을
취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처럼 간디는 표면상은 비정치적인 '건설적 프로그램'과 스와라지스트의 공공연한
정치활동과를 교묘하게 결부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스와라지스트에게는 실제의 정치활동,
즉 온갖 이용할 수 있는 투쟁의 수단과 무기를 사용하여 정부의 내막을 폭로하며 정부와
싸우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라는 만족감을 주는 대신에, '건설적 프로그램 '의 활동가에게도
영국에 대한 장차의 불가피한 투쟁을 위해서 국민을 준비시키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라는
만족감을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간디는 회의파내의 스와라지스트와 '건설적 프로그램
'파라는 두 파의 고삐를 한 손에 쥐고, 회의파의 지도부와 하층부를 자기 밑에 통일시킬
수가 있었다.
  요컨대 남부디리파드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간디가 비협력운동 후의 시기에 점차
발전시진 전술은... 스와라지스트가 스와라지의 요구를 내세우고, 영국 정부와의 교섭개시를
위해 온갖 기회를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동시에, 몇 만이라는 사심 없는 '건설적
프로그램'파의 활동가의 에너지를 동원하여 조직망을 짜놓고, 교섭이 실패할 경우에는
다음의 비협력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국민을 준비시키는"(Naboodiripad, p.73-74)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p178
  2) 종파주의의 대두와 완전독립의 요구
  앞절에서 지적해두었다시피, 불복종, 비협력운동의 급작스런 중지는 일시 자취를 감추었던
종파주의를 다시 대두케 하였다. 이는 그런 운동의 중지에서 생긴 실망, 좌절의 감정과
정치적 혼란의 결과 등장한 현상이다. 네루는 "각종의 종파주의자들-그 대다수는 정치적
반동주의자이지만-은 비협력운동과 시민적 불복종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종적을 감출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그들은 그런 운동의 중지와 더불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Nehru, Toward Freedom, p.83)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나타난 종파주의자들은 킬라파직의 소멸로 인한 킬라파트위원회의 존재의의 상실과
종파별 의석배당, 종파별 관리임명 등의 정부의 회교, 힌두교분리정책에 편승하여 종파적
대립을 조장하게 되었다. 그들의 종파주의는 단순히 힌두교도, 회교도라는 종교적 대립이
아니라, '실제상의 정치적 대립 '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것은 영국 지배자한테서 탈취하려
하고 있는 권력의 분배를 에워싼 문제였다. 그와 같은 종파주의는 단지 양교도의
최상층부에서의 대립에 그치지를 않고, 인도의 전사회생활을 뒤덮게 되고 말았다. 소를
죽인다거나 회교사원 앞에서 음악을 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사소한 문제들이 극히 중대한
문제성을 띠게 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회교, 힌두교 양교도간에 충돌이 벌어지고 서로
살육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으나 실상은 악마의 앞잡이로 행동하고 있는 그들 종파주의자들이
범한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서 간디는 심히 마음 아프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간디는
1924년 9월 18일, 종파간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양교도간의 평화와 융화를 다시 가져오기
위하여 21일간의 단식을 단행하였다.
 @p179
  이것이 그가 종파간의 화해를 위해 행한 최초의 단식이었다. 예민한 현실주의자였던
간디는 일찍부터 인도의 장래는 회교, 힌두교 양교도간의 관계에 달려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종파간의 분열이 영국 정부에 의해서 이용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다.
 단식은 간디에게 남의 심령을 울려 서로 마음이 통하게 하는 방법이었으나, 그의 단식도
이미 돌처럼 굳어진 회교, 힌두교 양교도 사이의 적개심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물론
부분적인 그리고 일시적인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종파문제는 인도의 공적 생활에
그대로 살아 남아 간디 지도하에 회의파가 스와라지를 위한 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간디의 앞길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로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새 세력이 인도의 민족운동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급진적 반제국주의
세력이었다. 불복종, 비협력 운동의 급작스런 중지에 따르는 실망과 분격은 너무나 커서
회의파의 일부 당원들은 입법참사회 참가라는 스와라지스트의 방책에도, '건설적
프로그램'이라는 비변경파의 정책에도 다같이 불만이었다. 당시에는 해외에서 새로운
사상-아일랜드와 이집트에서는 전투적 반제국주의 사상, 터키에서는 급진적인 사회적,
문화적 변혁사상,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이 인도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새
사상은 환멸의 비애에 잠겨 있던 젊은 회의파당원의 마음속에 파고드는 동시에
인도사회내의 새 계층 내지 새 부분으로 하여금 공적 생활무대에 등장하게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 무렵에는 노동자계급이 무시 못할 세력으로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비협력운동을 전후하여 일어났던 파업운동은 점차노동조합운동으로 발전했지만, 그것은
1920년에는 인도 노동조합의 통합기관으로서 전인도노동조합회의(AITUC)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당초에는 위로부터 급작스레 조직된 것이었으나, 그 후 이를 구성하는
노동조합의 수가 증가되는 동시에 그런 노동조합은 점차로 노동자 자신의 것으로 되어갔다.
 @p180
  그 하나의 이유는 이런 노동조합의 대다수를 지도하던 젊은 민족주의자들이 서서히
노동자계급의 급진적인 반제국주의와 사회정의의 사상에 물들어 갔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운동에 적극 참가한 젊은 민족주의자들은 자연히 급진적 반제국주의, 사회적,
문화적 혁명,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위한 운동의 중핵으로 되었다. 봄베이, 캘커타
등지의 산업도시에서는 사회주의자, 심지어는 공산주의자의 그룹까지 출현하게 되었고,
1926년에는 인도 각지에 노동자농민 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를 앞에 두고,
1927년 영국의 인도사무상 버켄헤드 경은 인도의 실정을 조사하기 위한 사이몬위원회를
임명하고, "인도의 모든 부분이 수락할 수 있는 헌법을 기초하도록"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였다. 이는 종파적 대립에다 계급적 대립마저 겹친 인도의 내부적
분열은 회와파와 그 밖의 비종파적 민주주의자들이 제창하는 민족적, 민주적 요구를 완전히
괴멸시키리라는 악의에 찬 확신에 의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도측에서는 1928년 2월 회의파를 비롯한 회교도연맹, 국민자유연맹(*) 등
각파의 대표가 전 정당위원회를 설치, 헌법초안을 기초하고 그 구상을 보고했는데, 이
보고는 동위원회 의장 모틸랄 네루의 이름을 따 네루보고라 불린다. 이 보고의 골자는
'완전한 책임정치의 선에 따르는 명제국내에서의 자치령의 지위를 즉시 요구하는 것'이었다.
  * : 1919년의 몬타규 첼므스포드개혁에 찬성하여 바네르지 일파가회의파를 탈퇴하여
새로 결성한 것으로, 그 후 오랫동안 영국지배의 지지세력으로 남았다.
  그런데 이 자치령의 지위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모틸랄 네루를 비롯한
스와라지스트의 일파와 기타의 온건파의 인사들 사이에서 통일된 의견이었다. 자와하를랄
네루, 수바스 찬드라 보스 등 젊은 반제국주의 및 사회주의 사상의 선봉이었던 사람들은
이에 반대하고, 영제국에서의 완전한 분리, 독립을 의미하는 푸르나 스와라지의 깃발 아래
결집하게 되었다.
 @181
  이 푸르나 스와라지는 이미 1927년의 마드라스 회의파대회에서 회의파의 목표로서
채택되고 있었다. 즉 그 해 11월에 인도인 위원을 한명도 포함하지 않은 사이몬 위원회가
임명되었을 때, 급진, 온건을 불문하고 이에 분격을 금치 못하던 회의파는 푸르나
스와라지가 회의파의 목표임을 선언한 결의를 채택했었다.
  마드라스대회에 참석은 했으나, 정책수렵에는 참여하지 않은 간디는 "결의의 내용보다도
그 일반적인 경향과 견지 때문에"(Nehru, Toward Freedom, p.129) 이 결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자치령도 푸르나스 와라지도 아니고 다만 스와라지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도 민족운동의 선배 다다브하이 나오로지가 처음 사용한 이 스와라지라는 말은
"독립이라는 말보다도 무한히 크고, 게다가 독립도 포함하고 있다" (Namboodiripad, p.87)는
것이 간디의 견해였다. "회의파는 매년 자기로서도 실행 불가능함을 알고 있을 성질의
결의를 되풀이하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자신의
무능을 나타내고 비평가의 웃음거리로 되며, 적의 업신여김을 자초하고 있다"
(Namboodiripad, p.86)고 간디는 한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푸르나 스와라지를 추진하는
세력은 강했으며, 이 세력을 영도하는 자와하를랄 네루와 찬드라 보스 등은 인도
독립연맹을 결성했다. 이는 수천의 젊은 회의파 당원의 규합점으로 되어, 후일 회의파의
지도자 교체에까지 발전 될 소지를 닦게 된다.
  이런 추세를 보고 간디는 자치령의 지위파와 푼르나 스와라지파 사이의 타협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28년 12월의 캘커타 회의파대회에서는, #1 회의파는 푸르나 스와라지를
궁극적 목표로서 내건다. #2 그러나 1년 이내에 자치령의 지위가 인정되면 이를 수락한다.
#3 만일 이 기간내에 그것이 인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간디, 모틸랄 네루 등과 같은
지도자들도 회의파가 푸르나 스와라지를 약속한 것에 동의하고, 그것을 위해 비폭력, 비협력
투쟁을 조직한다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p182
  간디는 캘커타대회에 참석한 이외에는 여전히 정치에서 완전히 떠나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주로 카디운동의 선전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태의 진전에는 완전한 접촉을 가지면서 가끔 회의파 지도자들의 상담에
응하고 있었다. 그간 회의파의 지도부는 국민자유연맹의 중심 인물인 사프르 등과 협력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영국정부와 교섭을 꾀했으나 영국은 자치령의 지위가 아닌 제한된
지방자치 이상의 것은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1년간의 기한은 마침내 다되어 1929년
12월에 열린 라호르 회의파대회에서는 이 문제에 결판을 내야 하게 되었다. 회의파대회가
펀잡주에서 열린 것은 10년 만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10년 전의 일 즉 아므리차르 대학살,
계엄령, 아므리차르 회의파대회, 이에 뒤이은 비협력운동의 전개 등을 회상하였다. 그간
인도는 많이 변했으나 다시금 정치적 긴장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전인도적인 비폭력,
비협력의 직접행동이 불가피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으므로, 누구도 간디가 총지휘를
하리라고 예상하고 또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간디는 자신이 의장이 되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젊은 자와하를랄 네루를 마치 자기의 후계자인 양, 의장으로 추천했다.
이 조처에 관해서는 구구한 견해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 인도의 정정에
있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1928년과 29년은 격심한 노동공세의 시기요, 혁명적인 청년들의 테러리즘의
시기이며, 인도정부의 가혹한 탄압반격의 시기였다. 바로 이런 시기에 처하여 회의파는
좌파세력을 포섭하면서도 사태를 파국으로는 이끌지 않을 의장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간디가 우파인 파텔을 제쳐놓고 좌파인 네루를 추천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네루는
라호르대회 직전에 나그푸르에서 열린 전인도노동조합회의대회의 의장을 맡아보았다.
게다가 네루는 선견지명이 있는 급진파이며 겸손하고 실제적 이어서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고 간디는 믿고 있었다. 실제로 간디는 라호르대회의 수주일 전에 쓴 글에서... 나의
자치령의 지위라는 관념에는 만일 내가 원한다면 영국과의 결부를 언제라도 단절할 수 있는
힘을 포함한 것"이라고 말했다.
 @p183
  네루도 의장연설에서 ... 우리가 자유를 쟁취한 후에는 인도는...인도가 그 안에서 대등한
구성원인 보다 큰 그룹에 들어가기 위하여 자신의 독립의 일부를 포기하는 일에까지
동의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Namboodiripad, p.92-93)고 말하였다. 환언하면 간디는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푸르나 스와라지를 받아들였고, 네루는 독립을 쟁취한 후에는 독립에
모종의 제한을 고려할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전년의 캘커타대회 이래의
자치령파와 푸르나 스와라지파 사이에는 참된 타협이 성립된 셈이다. 그런데 두 파의
독립에 대한 해석 여하와는 상관없이, 민족의 요구를 영국에게 인정시키기 위해서는
대중투쟁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인식하에 그들은 푸르나 스와라지라는 캘커타대회의
결정을 실천에 옮기는 데 동의하고 투쟁의 준비에 적극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간디도 이 라호르대회에서 푸르나 스와라지는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목전의 목적이라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단계를 향해 한 걸음 더 힘차게 내디뎠던 것이다.
    4. 제 2차 불복종운동
  1) 소금 행진과 원탁의회
  1929년의 라호르 회의파대회는 '완전독립' (푸르나 스와라지 )을 결의 했을 뿐 아니라,
매년 1월 26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하고, 이 날에는 전인도에서 행사를 통하여 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기로 했다. 또한 이 대회는 전인도 회의파위원회에게 "언제라도 적당하다고
생각될 때"에 대중적 불복종운동을 개시할 권한을 부여했다. 독립을 쟁취하려는 인도
민중의 사기는 날로 고양되고 있었다. 이에는 계급적 자각을 갖기 시작한 노동자,
영제국주의와 인도인 지주의 이중적 수탈에 신음하던 농민, 사회주의를 민족운동 속에
도입하려던 네루, 그 밖의 지도자, 급진적인 민족주의 담당자로서의 청년과 학생, 그리고
영국 자본과 경합하던 인도 민족자본가 등 국민의 온갖 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정의의 관념이 뒤섞여서 날로 고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p184
  제 1회 '독립기념일'인 1930년 1월 26일은 마침내 찾아왔다. 회의파 운영위원회의 호소에
응하여 인도 각지에서는 시위집회를 열고, 독립 인도의 삼색기 아래서 '독립의 서약'을
엄숙히 낭독했다. '독립의 서약'이란 네루를 의장으로 하는 회의파 운영위원회가 발표한
단호한 내용의 문서이다. 그것은 "영국정부는... 인도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정신적으로
파괴하였다... 우리나라에 이런 4중의 불행을 가져온 영국의 지배에 이 이상 복종하는 것은
인간과 신에 대한 죄악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영국의 비인도적인 인도 통치를 힘차게
고발하는 한편, "그러나 자유를 획득하는 가장 유효한 길은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영국정부에 대한 우리의 임의적 협력을
철회하고, 납세거부 등을 포함하는 대중 불복종운동을 준비하려는 바" (Nehrur Toward
Freedom, pp.388-89)라고 부언하고는, 만난을 무릅쓰고 이를 실행할 수만 있다면 인도의
독립은 확실하다고 강조하는, 참으로 인도의 애국청년을 분기시키는 내용을 담은 문서였다.
도시도 농촌도 서로 다투어 이 역사적인 날을 축하했고, 각지의 대집회는 모두 평화리에
극히 인상적이며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이 축전은 간디에게 큰 자극을 주어 그는 행동을
일으킬 시기가 성숙했음을 감득했다.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간디는 '독립기념일' 4일 후인 1월 30일 어윈 총독에게
11개 항목의 최후의 요구를 제출했다. 총독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그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비폭력, 비협력의 입장에서 위의 11개 항목 요구 중의 하나인 '염세의 폐지 '를 들고
일어섰다. 그는 인도 민중의 일상생활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가진 소금을 영국정부의
전매사업으로 하기 위한 제염금지법에의 불복종을 몸소 수범하기 위하여, 1930년 3월 12일,
79명의 엄선된 문제를 데리고, 수도장이 있는 사바르마티에서 봄베이 근처의 단디 해안에
이르는 200마일의 이른바 [소금 행진]을 개시했다. 연도의 170개의 촌락에서는 사람들이
마치 마술에나 걸린 듯이 간디 일행에 가담했고, 인도의 민중은 이 순례행진대의 운명을
매일매일 지켜보는 가운데 점차 흥분이 고조되어갔다.
 @p185
  4월 5일 간디의 일행은 드디어 단디 해안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4월 6일은 국민주간의 제
1일이다. 국민주간이란 매년, '사티아그라하의 날'에서 자리안왈라 바그에 이르는 1919년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설정된 주간이었다. 이 날 아침 6시 반 간디는 먼저 해수로
목욕재계를 하고는 제염금지법을 무시하고 소금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자, 민중의 환호는
절정에 달했다. 3일 후인 4월 9일 간디는 전인도 민중에게 지령을 내렸다. 소금을 만들라!
암염이 있는 곳에선 암염을 파라! 바다도 멀고 암염도 없는 곳에서는 관립학교, 관직의
보이코트를 하라! 주점, 외국제 포목전의 피켓을 서라! 확실히 이러한 요구는 단순하고도
구체적이었다. 누구도 참가할 수 있었고, 전 인도에서 한꺼번에 행동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간디 영도 아래 제 2차불복종, 비협력 운동이 개시되었다. 회의파는 조직을
총동원하여 이 운동에 선봉섰고, 특히 부인들에 의한 가두 피케팅은 효과를 가장 잘
나타냈다. 예를 들면 랭카셔 면포의 수입은 1930년을 고비로 하여 종랙의 약 5분의 1로
격감했다.
  그러나 운동이 확대, 격화의 일로를 걷게 됨에 따라 다시금 비폭력의 한계를 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 4월 18일에는 벵골주의 치타공에서 경찰의 무기고가 습격되었는가
하면, 4월 23 일에는 인도와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도시인 페샤와르에서 데모 군중과 경찰
사이에 대대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특히 페샤와르에서는국경의 간디라고 불리던 회교도
지도자, 한아브둘 가화르 한의 '붉은 셔츠대'가 절기하여 공전의 대데모가 일어났다.
데모대를 위협하기 위해 동원된 장갑차가 불태워지자, 군중에 대한 대규모적인 발포가
감행되어 수백의 사망자를 냈다. 이때 힌두교도의 가르왈리보병대의 일부는 회교도 군중에
대한 발포를 거부했고 마침내 이 시는 10일간 인도에 의해서 지배되기에 이르렀다.
  '소금 행진'을 신호로 완전독립에의 시위가 전인도에 파급됨에 따라, 이렇듯 여기저기에서
폭력이 개재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간디도 중지의 지휘봉을 간단히 내릴 성싶지 않자,
영국 관헌은 간디에게는 인도 민중을 통제할 힘이 없다고 보았던지, 5월 5일 간디를
체포했다.
 @p186
  간디에 대신해서 탄압과 무력으로 이를 억압하려든 셈이었다. 그러나 간디 체포의 보도는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하르탈과 파업이, 그리고 조세불납운동이 각지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공직사퇴의 성명이 연달아 나왔다. 민중의 열광은 절정에 달하여 봄베이
주의 숄라프르에서는 민중이 1주일간 거리를 점령했다. 이런 종류의 행동은 현재의 동, 서
파키스탄의 각지에서 일어났다.
  영국은 군대, 비행기, 탱크, 소총 등 온갖 무기를 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한편,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자들을 체포하는 동시에 회의파를 불법화하고,
불법선동단속령, 신문단속령을 공포하는 등 강압책으로 나왔다. 정면에서 내리치는 이와
같은 '몽둥이' 정책과 병행하여 영국은 또한 상투수단인 '엿' 정책도 썼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원탁회의였다.
  영국에서는 1929년 봄의 총선거에서 맥도널드의 노동당이 제 1당으로 되었다.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노동당도 인도의 완전독립은 물론이요, 자치령의 지위까지도 명백히는 약속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인도의 헌법문제에 관해서 토의하기 위해 영국령 인도각주와 번왕국의
양자에서 선출된 대표를 모아 원탁회의를 열 작정이라고 했다. 회의파는 처음에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영국측의 저의, 즉 자치령의 지위까지도 당장에는 인정할
용의가 없음이 영국의회의 토의과정에서 명백해짐에 따라 회의파의 태도도 경화되어 그러한
원탁회의에는 대표를 보내지 않고 기정방침대로 '완전 독립'을 향해 매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1929년의 라호르대회, 이어 30년 3, 4월의 '소금 행진'에 뒤이어 제 2차
불복종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30년 6훨에 발표된 사이몬위원회의 보고에
입각하는 연방제로의 재조직 안을 토의하기 위하여 그 해 11월에 런던에서 제 1차
원탁회의를 열었다. 회의파는 처음부터 이를 보이코트하고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위의
재조직 안은 총독의 전제적인 권한에는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는 것이어서 회교도연맹
대표자한테서도 전면적인 동의는 얻지 못하고 단지 인도연방의 조직대강에 대해서만 결정을
본 데 불과했다.
 @p187
  그 때문에 영국의 맥도널드 수상은 대탄압으로 인하여 인도의 불복종운동이 고개를 수그린
틈을 타, 감금중인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석방하고는 그들과 타협을 모색하려 하게 되었다.
한편 언제나 우회를 하더라도 상대방과 회견하여 만사를 토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던
간디는 어윈 총독에게 회담을 요청하여 오랜 교섭 끝에 31년 3월 5일 마침내 간디와
어원간에 유명한 델리협정이 성립되었다. 이는 불복종운동에 관한 총독의 긴급령을
철폐하는 조건으로 운동의 중지를 약속한 점에서 확실히 하나의 타협이었다. 불복종운동에
관련돼서 체포된 모든 정치범의 즉시 석방, 운동의 과정에서 정부가 몰수한 재산, 토지
중에서 아직 매각처분을 하지 않은 것의 소유자에의 반환, 해안에서 일정 거리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무세제염의 총인, 주류, 아편, 외국제 의류품에 대한 평화적인 감시 인정
등 부수적으로 획득한 성과도 물론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민중의 열광이 고조되고
있는데다 희생이 컸던 만큼 이런 성과는 결코 충분치는 못하여 민중의 실망은 몹시 컸다.
네루도 이 협정체결에는 당황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간디의 대영 양보 내지
굴복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원래 간디를 먼저 석방하고(31년 1월), 델리협정을 체결한 그
자체가 제 1차 원탁회의의 실패로 난처한 입장에 빠진 영국은 인도 민중간에 차지하는
회의파 지도자, 특히 간디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증좌였다.
  이미 세계는 대공황에 쉽쓸리고 있었지만, 그 파동은 식민지 인도의 경제, 정치, 사회의 각
분야에 심각하게 미치고 있었다. 당초에는 영국화폐 보이코트로 이득을 보던 회의파 안의
민족자본가도 운동의 급진과를 두려워하여 원탁회의, 오타와회의 제안을 앞에 두고
동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이 보호관세의 이득을 노리고 인도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던 영국 자본과 점차 결탁하게 되자 그들은 투쟁의 장기화를 원치 않게 되었다. 또한
회의파운동의 후원자인 지주도 지대불납운동의 격화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p188
  이와 같은 회의파 안의 사정뿐 아니라 회교도와의 관계도 그리 신통치는 못했다. 앞서
간디의 호소에 대중데모로 응했던 서북 변경주의 회교도는 물론이요, 회교도연맹과의
통일행동도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기는 하나, 그들과의 제휴의 취약성은 여전히 영국한테
이용당할 제일 큰 약점이었다. 게다가 바가트 싱그가 지도하던 청년운동도 주로 테러수단에
호소함으로써 간디를 비롯한 회의파 지도자와 오히려 대립하고 있었다. 한편 28, 29년에
절정에 달했던 노동자의 투쟁은 31년에는 약간 침체상태에 빠졌고, 노동자를 비롯하여
회의파 안의 급진분자를 포함하는 진보세력은 아직 간디를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압력으로는
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온갖 요인을 고려에 넣은 간디는 국내의 여론과 운동의 역량을
재정비하여 본격적인 독립투쟁에 들어가려고 델리협정에서 불복종운동의 일시 중지를
약속하면서 제 2차 원탁회의에의 참가에 동의했다고 본다. 또한 위와 같은 사정 때문에
당시 민족운동을 지도하던 민족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회의파 지도자도 전선정비를 위해
일보 후퇴를 결의했던 성싶다.
  사실 델리협정 직후인 3월 말에 열린 회의파 카라치대회는 델리협정을 승인하고, 또한
원탁회의 참가도 그대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항의의 여파는 계속되어, 그것은
자연 회의파대회에 반영하게 되었다. 즉 '완전 독립'의 요구를 실질적으로 재확인하는 한편,
급진세력에 대한 무마책으로 노동자, 농민의 기본적 인권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에
노동조건의 개선과 지대의 인하, 그리고 노후, 질환, 실업에 대한 경제적 보장 등의 요구가
회의파의 강령에 삽입되었다. 그런가 하면, 온갖 폭력행위를 비난하면서도 바가트 싱그 등
혁명적 민족주의 청년들(*)의 총기와 자기 회생을 찬양하는 결의도 채택했다.
  * : 1928년 4월 8일, 텔리에서는 개회중인 입법의회에 두 청년지도자, 바가트 싱그와
B.K.다트가 두 개의 폭탄을 던졌다. 때마침 의회를 방문중이던 사이몬위원회외 사이몬
위원장은 의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을 면했다. 두 사람은 체포되어 종신형을
언도받았고, 그 후 바가트 싱그는 라호르 경관살해사건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카라치회의파대회 직전인 31년 3월 23일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의 체포에 뒤이어
인도 각지에서는 수많은 혁명적 청년들이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옥중에서 정치범의 대우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 중 자틴드라나트 다스라는 25세의 청년은 끝까지 단식을
계속하던 끝에 9횔 3일 단식 61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순교자의 죽음은 전인도에서
애도와 항의 속에 기념되었다. 그런데 수단은 목적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믿던 간디는
다스 청년의 순교에도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p189
  이렇게 함으로써 내부적 통일을 꾀한 회의파도 그 후 제 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회의파와 영국정부와는 현저한 견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요, 둘째로 인도 안의 사태가 원탁회의에의 참가를 방해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정부는 제 1차 원탁회의에서 합의된 특정 형태의 연방조직을 기정 사실로
하고, 제 2차 원탁회의에서는 그 세부점만을 토의하려는 데 대하여 회의파는 백지상태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또한 인도 안의, 특히 벵골, 연방주 및 변경주의 사태는
델리협정 후에도 여전히 긴장이 계속되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으므로, 만일 국내정세가
진전되면 정부와의 분쟁이 일어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큰 기대를 걸지 못한 채 간디는 회의파의 단독대표로서 31년 9월에 런던에서
열린 제 2차 원탁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강요된 주의제는 "제 1차 원탁회의에서
뒤로 미루어진, 연방으로의 재조직에 있어서 선거제도를 어떻게 하느냐"라는 가장 복잡한
종파적 문제였다. 영국은 '소수파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종파별 선거와 소수파를 위한
특별의석 보류를 미끼로 원탁회의에 출석한 비회의파 대표를 조종하여 간디를 고립시키는
술책을 썼으므로, 네루의 말처럼 "회의는 실패하도록 꾸며져 있었던" (Nehru, Toward
Freedom, p.209) 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은 인도에는 헌법개정이라는 극히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인도인 지도자들은 그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으니 영국정부 자신이 그 해결
즉 종파적 재정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인상을 세계에 줌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인도의
진정한 문제로부터 돌리는 데 성공하였다."
 @p190
  영국은 이렇듯 회의파를 원탁회의에 초청하여 회의파는 헌법개정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고는 회의파를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공황의 심화는 인도내의 경제투쟁의 격화와 결부된 반영운동의 고양, 조세불납운동의
확대로 되는 반면, 인도 시장의 확보에 더욱 광분하게된 영국의 인도에 대한 양보의
가능성을 적게 했다. 이제 '엿'의 정책을 쓸 여유를 잃은 영국은 델리협정을 파기하여
다시금 긴급령을 내리고 무자비한 검거와 탄압을 시작했던 것이다. 간디가 원탁회의를
끝내고 12월 6일에서 11 일까지 동양문화에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가지던 위대한 유럽의 지성
로맹 롤랑을 스위스의 레만 호반에 자리잡은 그의 저택으로 방문, 체재한 후 이탈리아를
거쳐 12월 28일에 귀국했을 때에는, 이미 우타르 프라데영, 서북 변경주 등의 주들은
총독령에 의한 통치 아래 들어가 있었고 네루를 비롯한 회의파의 몇몇 최고지도자도
투옥당하고 있었다. 총독과 교섭하여 분쟁문제를 처리하려는 자기의 온갖 노력이 실패하자,
간디는 32년 1훨 3일 불복종운동의 재개를 선언했으나 그 다음날 간디는 체포되고 또한
회의파도 재차 불법화되었다.
  한편 영국은 제 2차 원탁회의 당시, 선거제도 문제는 어디까지나 인도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나, 실제로 이를 해결 못하는 형편이므로 부득이 영국이 중재, 조정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끌었지만, 이에 따라 영국은 32년 8월에 이른바 맥도널드 재정 (또는 코뮤널
재정)을 행하였다. 이에 의하면, 카스트, 전투와 카스트 밖의 불가촉천민을 분리해서
선거를 하고, 또한 인도에서 유럽인, 영, 인 혼혈인, 기독교인과 더불어 회교도가 매우
우대받게 되었다. 이어 제 3차 원탁회의가 32년 11월 에서 12월에 걸쳐 이제는
비합법단체로 탄압당하고 있던 회의파의 대표가 출석하지 않은 채 런던에서 열렸지만,
그것은 영국측의 대강에 따라 세부를 완성하는 것으로 끝났다.
 @p191
  2) 하리잔운동
  앞에서 말한 맥도널드 재정에 의거하는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를 맥도널드 수상 자신이
서신을 통해 확인하자, 간디는 32년 9월 20일을 기하여 푸나의 에라브다 옥중에서 '죽을
때까지 단식'을 단행했다. 일찍이 1909년 회교, 힌두교 양교도 사이에 분리선거제를 채택케
함으로써 인도를 둘로 나눈 영국은 이번에는 불가촉천민에게 분리선거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카스트, 힌두에서 다시 분리시키려고 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원탁회의
석상에서, 다음에는 영국의 인도 사무상에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맥도널드 수상에게, 영국이
정말 자기가 이상으로 하는 '하나의 인도'에 역행하게 될 불가촉천민 분리선거제를
제정한다면, 간디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겠다던 자기의 언명을 이제 실천에 옮기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생사를 초월한 간디라 하더라도 죽음을 앞두고는 마음의 동요를 느꼈던지
그는 타고르에게 자기의 이번 행동에 대한 솔직한 평을 갈망하는 편지를 썼다. 막 편지를
끝내자 때마침 타고르한테서 전보가 왔다. 그것은 "인도의 통일과 인도 사회의 보전을
위해서는 값진 생명이라도 회생시킬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국가적 비극이 극도에
이르도록 무심하게 내버려두지 않기를 열망하는 바입니다"라는 격려의 전문이었다. 그래서
간디는 "선생의 사랑에 넘친 장엄한 전문에 감사합니다. 그 말씀은 내가 바야흐로
들어가려는 폭풍우 한가운데 서도 나를 붙들어줄 것입니다" (Filcher, p.117)는 말을 그
편지에 덧붙이고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날 정오에 단식에 들어갔다.
  이에 놀란 힌두 지도자와 불가촉천민의 지도자들은 급히 푸나로 달려와, 두 파 사이에
불가촉천민에 관한 맥도널드 재정을 수정하는 타협안인 푸나협정에 합의를 보고, 이 협정에
대한 영국정부의 확인을 얻게 됨으로써 간디의 비장한 단식은 1주일로 중지되었다. 간디의
이번 단식은 힌두교도 사이에 큰 충격을 주어 불가촉천민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많이
시정케 하였다.
 @p192
  또한 위 협정의 한 항목에는 불가촉천민제의 폐지와 최하층계급의 생활향상을 위한 전국적
대중운동이 들어 있었으므로, 간디는 옥중에서 이른바 하리잔운동을 전개하는 일이
허용되었다. 하리잔이란 '신의 아들'을 뜻하며,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이렇게 불렀다. 33년
초에 간디는 기관지 [영 인디아]를 [하리잔]이라고 개제하고, 불가촉천민제의 폐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옥중에서의 간디의 하리잔운동은 옥외에 있는 다수의 회의파
당원들의 시간과 정력을 불복종운동을 추진하는 일에서 하리잔의 복지사업을 추진하는 일로
돌리게 하였다.
  그러나 하리잔운동의 진전은 시원치 않았으므로, 어떤 젊은 미국부인이 그의 수도장에서
타락된 일을 저지른 것을 계기로, 간디는 자기정화의 수단으로서 33년 5월 8 일, 21 일간의
단식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먼젓번에 데난 영국정부가 단식 첫날에 간디를
석방했으므로, 그는 옥외에서 단식을 끝마쳤다. 5월에는 회의파 의장대리에 권하여
불복종운동을 중지시키고 7월에는 일체의 비밀활동도 정지케 하였다. 간디 자신 자기의
사바르마티 수도장을 해산하고 그곳을 어떤 천민단체에 넘겨 줄 정도였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정책은 좀처럼 완화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다시 개인적 사티아그라하를 권고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자 8월에 그는 다시 체포되었고, 이번에는 영국정부가 그의 하리잔운동의
전개마저 허용치 않았기 때문에 간디는 또다시 단식을 단행했으나, 위독상태로 인하여 5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에 간디는 남은 형기가 끝나는 34년 8월까지는 자기를 수인으로
간주하여 정치문제에는 침묵을 지킬 것을 성명했다. 그리고는 33년 11월부터 10개월 동안
하리잔운동을 위해 전국 각지를 여행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옥외에 있는 회의파
지도자들과 비공식으로 상의한 끝에 34년 4월에는 불복종운동을 완전히 정지하도록 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뒤이어 정부는 회의파의 비합법성을 실질적으로 해제하고 불복종운동을
정지하기 위한 전인도 회의파위원회 내지 회의파대회의 개최를 허용하게 되었다.
 @p193
  이리하여 5월에 전인도 회의파위원회가 열렸는데, 이 위원회에서는 불복종운동을
철회하는 간디의 성명이 승인되고, 또한 회의파는 각종 입법기관에의 선거, 그리고 앞으로
있을 중앙선거에의 참가를 결정했다. 그들은 의회투쟁을 전개하기로 정책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선에 패해서는 회의파 지도부는 거의 완전히 의견이 일치했으나,
회의파 전체로서는 결코 그렇지는 못했다. 원래 회의파 하부에서는 1932년 9월의 단식 이래
간디가 취해온 노선에 대해서 크게 반발하고 있었지만, 불복종운동 정지에 관한 간디의
성명을 옥에서 읽고, 그 정지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던 네루는 "오랜 세월에 걸쳐 나를 그
'간디 '에게 묶어오던 충성의 끈이 찌르는 듯한 아픔과 함께 툭 꿉어진 것처럼 느꼈다"
(Nehru, Toward Freedom, p.311)고 술회하고 있다. 회의파 지도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은
1933년에서 1934년 사이에는 전례없이 확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파 하부당원들의
불만은 의회투쟁 자체에 대한 봉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의회를 보이코트하고 불복종운동을
계속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기로서 의회투쟁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의회제도를 이용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즉
지도부가 생각하고 있듯이 의회제도는 영국측과 교섭을 재개하기 위한 통로로서 이용되어야
하느냐, 또는 반제국주의적 대중운동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이런 문제가 야기된 것은 당시 그들 사이에 침투하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1 차대전 후 인도에서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내거는 지식인과 노동자의
그룹이 생겨나고 있었다. 10월혁명과 소비에트의 건설은 여러 형태로 인도에 영향을 미쳤고,
1928년의 소련의 제 1차 5개년 계획의 개시는 인도의 각계각층에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1930년에는 타고르가 소련을 방문하고, 그 인류애적, 민족주의적
각도에서의 예찬은 많은 인도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p194
  1927년에 소련을 방문하고 또한 유럽에서의 견문을 통해 사회주의적 입장을 몸에 지니고
돌아온 네루는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인도의 민족운동에 도입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세계공황과 영국의 대탄압 아래서 절망과 분격을 금치 못하던 인도의 혁명적 청년들은
대공황으로 드러난 자본주의의 미증유의 위기, 소련의 제 1차 5개년계획의 성공적 수행,
독일에서의 나치즘의 대두 등 일련의 국제적 대사건에 영향받아 공산주의 사상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하에 1933년 말에 이르자 수많은 공산주의 그룹들이 합동하여
인도공산당을 결성했지만, 조직한 지 몇 개월 후에는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회의파 지도부에 불만을 품던 사회주의적인 젊은 당원들은 1934년 5월에 회의를
열고 회의파사회당을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회의파가 의회주의파와 사회주의
파로 갈라지자 간디는 34년 9월 회의파에서의 인퇴를 성명했다.
  이 해 10월 봄베이에서 열린 회의파대회에서는 간디에 대한 신뢰와, 1언제라도 필요할
때에는 그가 회의파에 권고와 지도를 한다고 약속했다는 사실을 명기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회의파의 제 1선을 물러난 간디는 하리잔의 문제를 비롯한 인도 민중의 일상생활과 밀착한
이른바 '건설적 프로그램'에 시간과 정력을 바치게 되었다. 코는 또한 기초교육에 대해서는
각별한 관심을 표시하여, 1937년에는 와르다(그는 35년에 인도의 지리적 중심인 와르다
부근의 세바그람이란 마을에 새로 수도장을 세웠다)에서 열린 교육회의에 자기의 교육만을
제출했는데, 그것을 약간 수정하여 성립된 것이 유명한 간디의 와르다 플랜이다. 그것은
첫째로 7개년의 무료 의무교육을 전인도에 실시한다, 둘째로 교수용어에는 모국어를
사용한다. 셋째로 이런 교육은 모종의 공작과 결부시켜야 한다는 것을 제창한 안이었다.
그런데 왜 간디는 불복종운동을 버리고 하리잔운동에 열중하고, 더 나아가서는 회의파에서
연회하여 '건설적 프로그램'에 몰두했을까?
 @p195
  찬드라보스는 "마치 전쟁이 한창일 때, 장군이 예하부대에 명하여 물이 부족한 촌락민을
구하기 위해 운하를 파게 하는 격" (판본덕송, p.215)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E.M.S.남부디리파드는 "1932년의 '간디 '의 단식과 그후의 명백한 사회문제인 하리잔의
향상을 위한 행동은, 현실의 정치정세에 대응할 목적을 가지고 주의깊게 계산된 전술의
중요한 일부였다" (Namboodiripad, p.115)고 논하고, 뒤이어 그것은 "회의파가 정부와
단교한 결과로 놓여온 곤경에서 회의파를 구출하기 위한... 영국측과의 접촉점을 발견하여,
개시된 채 제 2차 원탁회의에서 일시 중단되고 만 헌법개정에 관한 교섭을 추구하고,
그리하여 이 새로운 정세에 대응할 수 있도록 회의파를 개조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었다"
(Namboodiripad, p.118)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남부디리파드의 견해는
대체로 아래와 같다.
  우선 간디가 불복종운동을 정지시킨 이유는 이렇다. 즉 제 2차 원탁회의에서는 회의파를
대표한 간디와 영국정부 사이의 교섭이 결렬되었으므로, 간디와 회의파는 부득이
불복종운동을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회의파를 완전히 굴복시키고야 말려는
영국정부와 끝내 정면으로 대결하다가는 회의파는 물론이요, 인도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간디는 판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와 같은
정면대결을 지속하다간, 결국 영국정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의 인도헌법을 제정하고는, 그
헌법을 이용해서 먼저 비회의파 정당들로 하여금 회의파를 약화시키고, 그리고 나서는 그런
비회의파 정당들을 조종하여 인도의 민족적 요구를 부인케 하는 사태가 발생하리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간디는 그러한 사태의 발생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우선 불복종운동을
정지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회의파내에 의회주의(스와라지파)를 부활하여 의회활동을 통해
영국정부와 교섭케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남부디리파드에 의하면, 불가촉천민을 위한 분리선거에 반대하여 단행한
간디의 단식은 불복종운동을 중지시킬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요, 그 후 하리잔운동에의
열중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회의파 지도자와 상의하여 불복종운동을 일단 중지시키고, 그
후 영국정부와의 교섭을 원활하게 추진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p196
  또한 회의파에서의 인퇴는 회의파 안의 의회주의자에게도 좌익 사회주의자에게도 이른바
'도덕적 압력'을 가하지 않고 회의파에서의 '환전한 이탈'과 '절대적인 행동의 자유'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사실 간디는 조언을 통해 두 파의 정책에 영향을 주면서 두 파를 다같이
성장시켜 이를 통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네루도 1932년 9월의 간디의 "단식은 대중의식을 환기시켰지만, 그것은 주요 정치문제, 즉
불복종운동에서 그런 대중의식을 딴 데로 돌렸다" (Nehru, Toward Freedom, p.224)고
논하고 있지만, 간디의 동기는 어떻든, 그 단식은 결과적으로 불복종운동을 정지시키는
전기로 된 것은 사실이었다. 앞서 사티아그라하의 수법에서도 논했거니와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는 어디까지나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운동의 주도권이
완전히 영국정부측에 들어 있었으므로, 간디는 불복종 운동을 정지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 단식을 단행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디의 인퇴와 하리잔운동을 포함하는 건설적
프로그램 '에 몰두하게 된 동기에 관해서 S.A.후세인은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Husain,
p.15).
  간디의 사상의 본질은 정치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도덕적인데 있다고 보는
후세인의 견해는 간디가 회의파의 목표와 목적이라는 근본문제에 대해서 네루를 비롯한
기타 회의파 지도자와는 견해를 달리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후세인에 의하면
간디는 회의파를 주로 인도의 도덕적 및 정신적 갱생의 수단으로 만들고, 단지 부차적으로
인도의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발전의 수단으로 만들려고 한 데 대하여, 현대식 교육을 받은
네루와 기타 회의파 지도자들은 회의파의 활동을 주로 정치적 및 경제적 영역에
국한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간디는 회의파 지도자의 대부분이 그가 설정한 계획의
일부를 그들의 의사에 반해서 단순히 자기에 대한 개인적 사랑과 존경 때문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p197
  그 결과 간디는 점차 회의파와의 정식 관계를 끊고 마침내는 회의파에서 인퇴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간디가 회의파에 반대하게 되었다거나 회의파와의 온갖 협력을 완전히
중지했다거나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단지 간디가 이제는 회의파가 인도의
해방과 관련된 자기의 포괄적이며 보편적인 사명의 일부만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던 나머지 일을
위하여 간디는 회의파 밖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래서 간디는 필요한 때는
언제라도 원조와 조인을 주기로 약속하면서 회의파는 그들 지도자에게 맡기고, 자기 자신은
인도인의 정신적 및 도덕적 의식에 근본적 변혁을 가져오고, 그리하여 인도가 세계에
자기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진리와 비폭력에 의거하는 사회의 표본을
제시할 수 있게 할 '건설적 프로그램'에 나머지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입장과 관점에 따라 물론 평가는 다르겠지만, 간디는 정치의 제 1선에 섰건 제 1선에서
물러섰건간에, 그의 사상과 행동은 한시라도 인도 민중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5. 제 2차대전과 분할돌립
  1) 통일전선과 주의회 선거
  1935년에 영국은 새로운 통치법을 공포했는데, 이것은 사이몬위원회, 3차에 걸친 원탁회의,
맥도널드 재정 등 다년간의 연구, 조사를 거쳐,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한다는 전제에
서서 만들어진 이른바'35년 헌법'이다. 그 핵심은 #1 번왕국을 포함하는 연방제, #2 중앙의
연방정부는 총독과 인도 입법부와의 '양두정치', #3 지방의 주정부에는 책임자치의 도입,
#4 영국정부 인도사무상의 권한 축소, #5 인도에서의 버마분리 등이었다. 그런데 이 새
통치법은 총독과 주지사의 비상대권 (총독의 경우에는 비상사태 선언, 지사의 경우에는
특수 책임)이 인정되고 있었으므로, 일단 그것이 발동되는 날이면, '양두정치'도 '책임정치'도
단번에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도록 꾸며져 있었다.
 @p197
  따라서 그것은 1929년 이래 회의파와 인도 민중이 추구해오던 '완전 독립'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기는 이 새 통치 법으로 선거 유권자의 수가 일시에 수배로 늘어 약
3천만 명으로 확대된 데 대해서는 회의파내의 우파인 의회파가 적지 않게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와 같은 영국의 '엿'정책에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인도
민중의 정치의식이 전진해 있었고, 좌파세력도 신장하고 있었다. 특히 회의파 사회당과
회의파 밖의 노동자, 농민의 세력도 점차로 조직화되고 있었으므로, 이런 세력을 도저히
무시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새 통치법이란 형태를 취한 영국의 새로운 도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회의파내의 통일전선을 결성할 필요가 있었다. 즉 좌우
양파의 대립, 간디주의, 사회주의, 부르주아의회주의 사이의 알력, 사회적, 종교적 문제에
관한 갈등을 조정해야만 했다. 회의파 안에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은 네루밖에는
없었다. 비슷한 상황 아래 있던 1929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1936년에도 네루가 회의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이어서 1937년에도 재선되었다. 1936년 2월, 스위스의 사나토리움에서
애처 카말라 부인을 잃은 네루는 뼈저린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회의파의 좌우세력
통합을 위해 선두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네루는 사회주의 사상을 인도 민족운동에
도입하려고 그처럼 일찍부터 사회주의를 고취하면서 그런 사상이 특히 회의파 안의
인텔리와 노동자 사이에 퍼지기를 열망했으나, 막상 1934년에 회의파사회당이 결성될
때에는 이 당 결성의 기금은 갹출하면서도 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도의 독립을 갈망하던 네루가 민족독립을 위한 거대한 에너지 공급원으로서의 농촌과
농민이 따로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을 통한 유림에서의 견문은 네루를 한층 더 사회주의 편으로 기울어지게 했으나,
인도와 회의파의 실정은 그를 다시 현실정치에로 돌이켰다.
 @p199
  아닌게 아니라 1936년 4월, 라크노회의파대회의 의장 연설에서 네루는 먼저 자기는
사회주의의 신봉자이나 사회주의보다도 인도의 독립을 위해 더 노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독립이 사회적, 경제적 변혁을 위한 불가결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임을 밝히고 나서, "나는
회의파가 사회주의 조직으로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을 위해 싸우고 있는
세계의 다른 여러 세력과 서로 손을 잡고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회의파의
대다수는 오늘날 그들이 나타내고 있다시피 거기까지는 나아갈 총의가 언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판본극송, p.233)고 논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밝는 동시에 당시의 환경도 잘
드러냈었다.
  라므라자라는 막연한 이상사회를 꿈꾸던 간디에 비하면, 네루는 보다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사회적, 경제적 개혁의 필요를 알고 있었던 생이다. 그러나 간디 직계인 파텔과
프라사드 등 회의파 주류를 이루던 우파의 사람들은 사직주의의 '사'자도 싫어하였다. 좌우
양파의 틈바구니에 끼인 네루는 간디의 후원 아래 1935년 헌법에 반대하고 완전 독립을
추구하면서도 주의회 선거에는 참가한다는 양면작전과 농민, 노동자를 위한 급진적 강령을
채택함으로써 회의파의 양파를 조정할 수 있었다.
  한편 네루는 당시 세계에 퍼지고 있던 파시즘의 위협을 민감하게 감득하고 있었다. 1936년
7월에 스페인에서 내란이 발발하고 이어 인민통일전선이 결성되자, 마치 이에 호응이나
하듯, 네루는 인도 안의 진보세력의 통일전선을 제창하고, 1936년 말에서 1937년 초에 걸쳐
반제와 독립을 외치며 질풍과도 같이 전인도를 정력적으로 유세행각하였다. 이는 1937년
2월에 있을 주의회 선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급진적인 '선거강령' (#1 새 통치법 반대,
#2 완전독립, #3 인도의 민주화)과 '농업강령 '(토지개혁, 빈농의 보호, 소작료 인하등)은
대중의 지지를 얻어 회의파는 이 선거에서 압승하였다. 즉 회의파는 11개 주 중 실로 8개
주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선거투쟁을 통해서 새 통치법에 반대하고 오직 인도독립을 위해 싸워온
회의파에서는 주정부를 수립하느냐 않느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의 대립이 다시금
표면화하였다.
 @p200
  즉 좌파는 총독과 주지사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히 되지 않는한 주내각의 책임을
지는 일에 반대 하였다. 이번에도 간디가 인도정부와 회의파 사이에 들어 조정한 결과 그
점에 관한 애매한 보장을 얻어 결국 회의파는 6개 주에서 단독내각12개 주에서 연립내각을
수립하였다. 이리하여 회의파는 독립투쟁을 계속하는 반면에 주의회를 통해서 개혁을 위한
건설적인 조치를 취한다는 이른바 '2중정책 '을 택하게 되었다.
  한정된 범위 안에서 이긴 하지만, 통치당하는 자리에서 통치하는 자리로 입장을 바꾼
회의파는 다년간 내세워온 정책의 실현에 착수했다. 농민의 보호, 노동자의 대우개선
이외에도 간디의 '건설적 프로그램'의 하리잔의 구제, 수공업의 장려, 기초교육의 창시,
금주의 실행 등도 추구하였다 1938년에는 네루를 의장으로 하여, 주 및 번왕국의 대표와
산업가 노동운동 지도자, 경제학자 15명으로 구성되는 인도 경제개발을 위한
국가계획위원회 (그 설치는 1936년 대회에서 결정되고 있었다)를 설치하였다. 또한 여태까지
'내정불간섭'의 입장 때문에 회의파의 테두리 밖에 있던 번왕국내의 정치운동도 회의파가
지도하게 되었다. 그만큼 번왕국의 민중의 정치적 자각이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도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인도 농민운동의 조직적 발전이었다. 1936년에서 1937년까지의
선거투쟁에서 인도 농촌에 깊숙이 파고들어 갔던 네루는 농민에게 자신들의 촌락 단위로
생각하지 말고, 전체로서의 인도라는 국가적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강조하였다. 그 때문에
회의파 주정부의 성립은 그들에게 커다란 심리적 효과와 자극을 주었다.
  농민의 조직에 관해서 말하면, 1920년대에 각지에서 생겨나 있던 많은 농민조합은
1936년에 전인도 농민조합(kisan sabra)으로 통합되었고 1937년에는 그 제 1차 대회가
열렸다. 이것은 공산주의자와 회의파 좌파세력과의 통일전선 아래 추진된 것이었다. 이어
1938년의 회의파 하리푸라대회는 좌파인 보스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1 토지개혁, #2 지대,
소작료의 감면, #3 농가 부담의 감면, #4 임금, 노동 시간의 개선, #5 단결권, 단체교섭권의
확립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p201
  그 해 여름 네루는 휴양 겸 유럽에 여행했다. 스페인내란은 계속되고 있었고, 나치 독일의
노골적인 침략이 진행되고 있었다. 파시즘 세력의 진출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스페인
인민전선의 반파시즘투쟁을 공공연히 지지하던 네루는 '뮌헨협정'으로 명백히 드러난 영,
불의 대파시즘유화정책을 목격하고 환멸의 비애를 느끼면서 인도에 돌아왔다. 그 환멸이
얼마나 했는가는 자기의 자서전에서 네루가 "뮌헨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며, 또한 스페인의
비극은 나에게는 나 자신의 슬픔이었다"(Nehru, Toward Freedom, p.356)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한편 인도에서도 보수파와 대영협력파가 점차 반격으로 나왔다. 1939년 3월의 트리푸리
회의파대회에서는 보스 의장의 재선을 에워싸고 좌우 양파의 대립이 격화하여 간디를
포함하는 우파의 압력 아래 결국 보스는 의장을 사임하고 '전위 블럭 '을 결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네루는 보스와 결별하게 되었다. 그리고 회의파가 판결같이 발대왜온 1935년
헌법에 의거하는 번왕국과 인도 자치 주와의 연방제 실시는 그 해 4월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국제정세의 불안을 이유로 연기되었다. 또한 회의파 주내각은 우파의 압력 아래 점차
농민운동을 억압하게 되었는가 하면, 주선거에서 참패한 회교도연맹은 코 불만이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인도에서는 2차대전 전야에도 민족통일전선은
결성될 수 없었다.
  그간 회의파 주내각과 인도 정부 사이에는 가를 충돌이 일어났으나 그 때마다 영국은
양보하였다. 그러나 뮌헨헙정 후 국제긴장이 날로 격화되자 그런 정책은 일변하였다. 영국
정부는 전쟁발발에 대비하여 긴급시에는 주의 자치권을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다시 인도
총독에게 부여하려고 시도하게 되었다. 이는 회의파의 불만을 샀다. 회의파는 인도군의
해외파견에 반대하는 결의를 1939년 5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행하였다.
 @p202
  2) 2차대전과 인도의 정정
  1939년 9월 3일 영국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계기로 2차대전이 발발하자, 그 다음날
인도 총독은 헌법에 따라 인도는 주동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회의파의 제 1선에서 물러 섰다고는 하더라도 사실상 그 지도에 복귀하고 있던 간디는
2차대전에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
  이 전쟁에 대한 나(간디) 자신의 개인적 반응은, 일찍이 없었던 커다란 공포이다. 나는
지금처럼 어설픈 심정에 빠진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이 커다란 공포가 이번에는 저번
전쟁 때처럼 자진해서 모병하사관으로 되는 일을 방해하리라. 그러나 좀 이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나는 전적으로 연합국에 동정하고 있다. 좋건 언짢건 이 전쟁은 서방이 발전시킨
하나의 민주주의와 히틀러로 전형화된 전체주의와의 전쟁으로 되어가고 있다.
(Namboodiripad, p.156)
  2차대전에 직면하여, 파시즘과 싸우고 있는 영국에 동정적이었던 이는 비단 간디 개인만이
아니요, 회의파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간디나 회의파는 다년간 추구해온 기본적
목표인 독립달성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더구나 1차대전 때와는 달리 인도의 정세는
진전되어 있었고, 특히 인도측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인도를 '자동적 '으로 참전케 한 데
대한 반감은 전인도에 충만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의파는 1939년 9월 14일,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영국의 전쟁 목적이 무엇인가, 즉 민주주의의 옹호와 식민지의 해방에 있는가,
따라서 전후 인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여할 총의가 있는가 어떤가를 밝히기를
요구하였다. 네루는 "세심한 검토를 거쳐 발표된 이 성명은 인도와 영국 사이에 가로놓인,
1세기 반에 걸쳐 양국의 관개를 해쳐온 장벽을 제거하여 우리의 배후에 있는 국민의 정열을
가지고 이 세계적 투쟁에 참가하려는 열망과,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의 간절한 희망과를
조화시키는 길을 찾아내려는 시도였다" (Discovery, PP.375-76)고 말하고 있다.
 @p203
  그러나 이 성명에 대한 영국의 회답은 전쟁목적과 인도의 지위를 명백히 밝힘이 없이 다만
전후 인도의 각 파 세력과 협의할 용의가 있다는 데 불과했다. 또한 영국정부가 사용한
'협력 '이라는 말은 회의파가 생각하고 있는 '대등자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명령,
복종관계'를 의미하고 있었다. 실망과 분격을 금치 못한 회의파는 이에 대한 항의로써 이
해 10월 각주의 회의파내각이 총사직할 것을 성명했다. 그런데 이 조치를 기뻐한 것은
회의파연맹이었다. 1937념의 주의회선거에서 회의파한테 참패를 당하고 "힌두교도의
압정에서 회교도를 보호하라"고 외치던 모하메드 알리 진나 지도하의 회교도연맹은 40년
3월의 대회에서 파키스탄의 승인을 조건으로 영국의 전쟁수행에 협력할 용의가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세는 분명히 반전, 비협력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39년 10월 2일,
봄베이의 9만의 노동자는 전쟁반대를 위한 1일간의 파업을 단행했다. 39년 말에서 40년
초에 걸쳐 노동운동은 비상히 고조되어 전국의 조합은 반전 기치를 뚜렷이 내건 전인도
노동조합회의로 통합되어갔다. 또한 전인도 농민조합도 일찍부터 전쟁반대를 선언하고
지세불납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인도정부는 참전포고와 동시에 공포한 인도방위법을
광범하게 적용하여 노동운동 지도자와 전쟁반대자를 마구 체포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하에서 열린 1940년 3월의 라므가르 회의파대회(간디는 1934년 봄베이대회 이후로
처음으로 연설했다)에서는 시민적 불복종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결의했다. 그러나
회의파는 그때에도 적극적인 수단을 취하는 것을 피하고 국민에게 그 준비를 하도록
요청했을 뿐이다.
  유럽의 전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연합국측은 1940년 5월에서 6월에 걸쳐 나치 독일한테
참패를 거듭하여 서유럽 전체가 나치스의 군화에 의해 유린당하게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영국 자체의 운명도 크게 염려되던 무렵 내각이 바뀌어 처칠이 등장했다.
 @p204
  이와 같이 급변하는 사태에 처하여 회의파는 영국정부와 새로운 교섭을 시작하려고 했다.
앞서의 조건을 완화하여 회의파는 영국이 전후 인도에 자유와, 각 파의 협력하에
중앙에서의 국민정부 수립을 허용할 것을 약속한다면 인도는 전쟁수행에 전면적으로
협력한다는 안이었다. 간디는 이 안에 완강히 반대했다. 간디의 주장은 영국을 지지하려면
아무런 조건 없이 지지해야 하고, 또한 그 지지는 어디까지나 비폭력 지지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간디와 회의파 운영위원회 사이에는 결정적인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그
결과 운영위원회는 마침내 1940년 6월 "간디의 비폭력의 신조를 민족방위의 문제에까지
화장할 수는 없다"고 결의하게 되어 간디는 회의파에서 다시 인퇴하고 말았다.
  * : 간디와 회의파 주류 사이에는 비폭력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달랐다. 회의파 주류는
비폭력의 원리를 영국정부에 대한 투쟁에만 적용하고, 종파적 반란, 폭력주의, 외적의
침입에 대한 저항에 대처하는 데는 비폭력적 수단만을 채택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간디는
국내 질서 및 외적의 침입 등 온갖 문제는 아힌사(불살생, 비폭력)의 원리에 의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회의파는 7월에 전술한 내용의 '푸나제안'을 했으나 처칠의 영국정부는 '8월 제안'에서
이를 공공연히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회의파는 금후의 반영투쟁의 적극적 지도를
'간디에게 다시 한번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회의파의 지도를 재개하게 된 간디는 이 해
8월 개인적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 맨 먼저 선택된 사람이 후술하는 비노바
브하베이다. 뒤를 이어 간디가 선택한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들이 이 운동을 계속해나갔다. 이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개인마다 모종의 테스트를 받고 미리 허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이 운동에 선출된 사람은 그 어떤 공식명령을 일부러 위반하여
체포당하곤 했다. 시일이 경과됨에 따라 체포되는 사람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가까이의 남녀가 투옥당했다.
 @205
  간디가 지도한 이 운동은 인도가 전쟁에 끌려들어간 데 대한 민족의 항의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적인 투쟁에 불과했으나, 전체주의와 필사적인 투쟁을 계속하고 있던 영국의
인도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은 가혹하였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국제정세는 일변했고 이에
따라 국내사정도 격동하게 되었다. 1941년 6월 22일에는 독일의 소련침공이 시작되었다.
  7월에는 인도 총독이 행정참사회의 확대와 국가방위회의의 설치를 발표했다. 12월에는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반전활동을 해오던 공산당, 전인도 노동조합회의, 전인도 농민조합
등은 전쟁의 성격이 변했다고 하여 반영협력을 선언하고 파업과 납세거부운동의 정지를
호소했다.
  한편 1940년 9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평화주둔'을 단행함으로써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로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있단 일본은 마침내 41년 8월, 진주만공격을 계기로
미, 영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이토록 급진전을 하던 전쟁하에서 인도는 이미
전쟁을 대안의 불로만 바라볼 수는 없게 되었다. 인도 방위문제는 긴급한 현실문제로 되고
있었다.(*) 전쟁이 인도에 접근하기 시작하여 인도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되자
회의파는 이처럼 위험한 정세 아래서 무엇인가 효과적인 역할을 다하려는 욕망이
강해져갔다. 감옥에 들어가는 일은 이런 새로운 정세 아래서는 무의미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명예로운 협력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면, 또한 국민이 행동에 호소하기 위한
무엇인가 적극적인 정열을 느끼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이리하여
회의파는 강요당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인도 방위문제에 협력하려면 국민을 납득시킬
만한 국민정부를 수립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 영국과 다시금 교섭을 하려는 기운이
높아갔다.
  * : 영국의 진보적인 인도문제 전문가 팜 다트는, 영국의 세계전략은 인도지배를
선회축으로 하여 집중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제국에서 인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커져가고 있었다. 인도를 토대로 하여, 새로운
중동의 제국과 세력 체계가 성립했다"... 중동과 동남아시아라는 영 제국주의의 지배와 영향
아래에 있는 두 개의 요해지대사이에 있는 인도는 추요의 지역이며, 또한 영국정책의
견지에서 보아 불가결의 기지였다. "더구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독일이
카프카츠, 이 란 방면에서 인도에 진격해올 것을 상정하고, 일본 해군을 싱가포르에서
인도양으로 전진시켜 남하해오는 독 일군과의 공동작전을 실천함으로써 영제국을
붕괴시키려고 기도했다
  한편 진주만공격 전야에는 영국정부도 융화의 제스처를 시도하여 네루를 비롯한 다수의
회의파 지도자를 석방했다(12월 4일). 이렇게 되자 간디와 회의과 주류 사이에는 또다시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간디는 대외전쟁에서도 비폭력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원칙을 버릴
수가 없었다. 네루는 당시의 간디의 입장과 심정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전쟁의 접근 그 자체가 그(간디)에게는 도전이 되고 신념의 시련이 되었다. 만일 그가 이
어려운 국면에서 원칙을 끝내 지켜나갈 수 없다면, 비폭력은 그가 그러해야 한다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기본적인 행동의 원칙과 지침은 아니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가
그것을 버리거나 타협한다는 과오를 범하든가 둘 중의 어느 하나로 되고 만다. 그는 자기의
온갖 행동을 의거해온 평생의 신념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 비폭락의 필연적인
결과와 논리의 귀결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Discovery, PP.388-89)
  간디는 자기의 견해를 회의파에 강요하는 것을 피하고, 41년 12월 회의파에서 인퇴했다.
객관적 정세를 파악하는 데 각별히 명민한 정치적 현실주의자였던 간디는 회의파로 하여금
영국과 다시 한번 교섭을 해보도록 바랐는데, 비폭력을 내세우는 자기가 선두에 선다면,
교섭이 잘 안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41년 12월 23일, 바르돌리에서
열린 회의파 운영위원회는 인도가 국민정부하에 동원된다는 조건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추축국들에 대한무장저항의 원칙에 찬성한다고 선언했다.
 @p207
  그러나 전쟁수행을 위해 인도와 협력은 요구하지만, 그 대가는 가능한 적게 치르려고
생각하고 있던 영국은 대폭적인 자치를 인도에 즉시 허용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의 성격은 변하고 인도측의 태도가 많이 완화된데 다, 인도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게 하여 그 협력을 얻으려고 하던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중국의
압력이 강화됨에 따라 영국으로서도 종래의 정책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42년
2월 15일에는 싱가포르가, 이어 3월 8일에는 버마의 수도 랑군이 함락되어 일본군의 압력이
인도국경에도 밀어닥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3월 11 일 스타포드 크리프스 사절단을 인도에 파견하여 영국과 인도
사이의 관계 개선을 꾀할 것을 발표하고, 이 사절단은 3월에서 4월에 걸쳐 인도에서 절충을
벌였다. 그러나크리프스가 제시한 해결안은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하는 일은 전후에
예정되고, 전시에는 인도측의 의견을 어느 정도 반영시키는 형식을 취한다고는 하더라도
영국이 여전히 정권을 보유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인도측의 요구는 즉시 실권을
가지는 전시국민정부 수립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4월에 회담은 결렬되었다. 따라서
크리프스가 제시한 '연방안'-그것은 종파적 모순을 조장, 격화하는 것이었다-은 논의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반추축국을 위한 영, 인 협력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영국과의 교섭이 또다시 실패하자 회의파에게 남은 길은 간디의 지도아래 반영운동을
재개하는 길밖에 없었다. 다시금 간디와 회의파는 하나로 되었다. 그런데 이번의 교섭결렬을
계기로 인도의 정정은 한층 더 착잡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영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일체의
반영세력을 이용해야 한다는, 즉 일본의 침략을 인도의 해방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친일적인 소집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p208
  그들은 41년 1월에 인도를 탈출한 찬드라 보스의 방송에 감화를 받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과 안의 라자고팔라차리와 42년에 비합법화가 해제된 공산당에 의한
민족통일전선의 제창이 있었다.
  간디는 나치스 및 파시스트와 결탁한 일본 군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반대하였고, 또한 통일전선 제창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절박한 일본군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여, 회의파와 국민을 올바른 민족주의의 방향으로 결집 해나갔다. 그러는 동안에 점차
간디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염원한 나머지, 만일 인도가 자유국가로서의 구실을 다할 수
있다면, 회의파의 전쟁참가에 동의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간디를 가장 잘 알고 있던
네루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는 심한 고뇌와 고통을 수반하는 획기적이며 놀라운 변화였다. 그에게는
생명의 원천이요, 생존의 의의로까지 되고 있는 비폭력의 원칙과, 그에게는 마음을 지배하고
몸을 태워버릴 정도의 열망이었던 인도의 자유와의 상극에 있어서 저울은 후자에로
기울어졌다. 물론 이것은 그가 비폭력에 대한 신념을 약화시켰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전쟁에는 비폭력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회의파의 견해에 동의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음을 의미했다. 실제적인 정치가로서의 면이 비타협적인 예언자로서의 면을 이긴
것이었다. (Discovery, p.393)
  조국의 최대의 위기에 처하여 간디는 민족의 독립과 비폭력의 원칙 중에서 전자를 취한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다시피, 간디에 있어서는 비폭력은 어디까지나 민족독립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목적과 수단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이 시기는
간디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하겠다.
 @p209
  간디의 결의는 점점 굳어져갔다. 1942년 8월 7, 8일 양일 사이에 봄베이에서 열린 전인도
회의파위원회에서는 간디가 제창하는 영국의 인도철퇴 요구를 결의하였다. "영국의 인도
지배의 계속은, 인도의 퇴폐와 약체화를 초래하여 인도가 자국을 방위하고, 세계의 자유를
위해 공헌하는 능력을 날로 감퇴시키고 있으므로, 인도를 위해 또한 연합국의 목적 달성을
위해, 즉시 인도의 자유를 승인하고 인도에서 철퇴하라. 철퇴하면 인도의 주요 당파와
집단의 협력으로 인도 국민의 일체의 중요 계층을 대표하는 복합적인 임시정부를 세울
것이고, 그런 정부는 그 지배하에 있는 비폭력적 세력은 물론이요, 일체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연합국과 함께 인도를 방위하고 침략에 저항하는 일을 '제 1의 임무'로 삼게 될
것이다.
  만일 철퇴하지 않는다면, 간디의 한결같은 지도 아래 비폭력적인 대중투쟁을 전개한다"
(Discovery, pp.420-21)는 것이 그 요지였다. 이 결의가 통과되자 간디는 '행동이냐
죽음이냐' (Do or Die)의 슬로건을 써서 모든 자유투사는 가슴에 달도록 지시했다. 비장한
각오였다. 영국은 이 결의가 8일 심야에 통과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9일 새벽에 간디,
네루 이하 회의파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이에 민중의 항의운동이 폭발하여 회의파 및
그 영향 아래 있던 민중이 불복종, 비협력 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이 해 말까지에는 6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기간에는 군경과 민중 시위대는 자주 충돌했는데, 발포 회수가 538회에 달하며 940명이
사살되고 1, 630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은 당국이 발표한 '공식 ' 숫자이다. 실제로는 이
기간에 사살당한 자의 수는 무려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참으로 '행동이냐 죽음이냐'의
시기였다.
  이에 회의파는 거의 괴멸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 결과 회교도연맹과 공산당이 덕을 보아
각기 세력이 신장되었다. 회교도연맹은 회의파의 '인도 철퇴요구 결의'에 대항하여
"영국이여, 인도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하고 나가라"고 결의하고 있었지만, 이 기간에
회의파 안의 회교도는 대랑으로 회교도연맹측에 옮겨가, 회교도연맹의 구성원은
30-40만에서 200만(44년)으로 중대하여 파키스탄 건설계획을 점점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p210
  또한 회의파계의 지도자를 링은 노동조합, 농민조합에는 공산당이 진출하게 되었다. 상술한
대로, 공산당은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대전을 파시즘과 민주연합과의 대결이라고 보고 영국
지지를 표명하여 42년 이래 합법화를 획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파에 대해서는
민주연합에 반대하고 추축국에 편든다고 공격했는데, 이것이 영국에 의한 회의파 탄압의
구실로 이용되었다.
  그간 총독은 폭력개입의 책임을 간디에게 돌렸기 때문에 간디는 이에 항의하여 43년 2월
9일에서 3월 2일에 걸쳐 3주간의 단식을 결행했다. 당시 간디는 73세였다. 빈사상태에 빠진
간디의 용태는 전세계의 주시와 우려를 자아냈다. 그러나 영국은 냉정했다. 간디의 맥박을
정확히 재면서 폭력개입의 책임이 간디에게 있다는, 말도 취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감옥에서의 석방도 하지 않았다. 위독상태가 지속된 끝에 3주간의 단식은 끝났다. 간디는
단식에는 이겼지만 영국에는 이기지 못했다. 그것은 비장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남부디리파드는 이번의 단식도 1932년의 단식과 마찬가지로
  "표면상은 비정치적인 도덕문제에 관해서 행해졌으나"사실은 "영국과 정치문제에 관해
교섭을 개시한다는 정치활동의 출발점으로서, 이 비정치적인 도덕문제가 이용되었다"
(Namboodiripad, p.180)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간디는 '인도 철퇴요구 결의'후
빠지게 된 정치적 막바지를 타개하기 위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사실 영국은 회의파에 대한 강압책을 조금도 완화하지 않았고, 또한 회교도연맹에 대한
옹호책을 강화하고 있었으니 만큼, 그러한 정치적 고려가 이번의 단식의 동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영국은 간디에게 그런 계기를 만들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44년
2월 22일 간디는 카스투르바이 부인을 옥중에서 잃었다. 13살 때 결혼한 이래 평생을 통하여
좋은 반려였던 카스투르바이 부인은 간디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간디는 매달 22 일 아내를 위해 기념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 : 부인의 급성기관지염이 악화됐을 때에도, 간디는 페니실린 주사를 놓는 것을 끝내
거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간디 몰래 아들의 허가를 얻어 주사를 놓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줄을 모르고 간디는 아내의 죽음에 직면하여 페니실린 주사에 관해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간디에게는 그와 같은 풍부한 인간미가 있었다.
 @p211
  마침내 간디는 그 해(44년) 5월, 악화된 건강상태 때문에 석방되어 쇠약한 몸을 봄베이
근교에서 정양하게 되었다. 그 해에는 75세가 되었으므로, 70세 때처럼(*) 간디를 아는
세계의 저명인사들의 기고로 된 기념논문집이 발간되었다. 또한 전해 7월에 싱가포르에서
'인도 국민군' (일본군의 포로로 된 영국군의 인도인 병사들로 조직한 인도 해방의 군대)을
조직하고, 이어 10월에는 '자유인도가 정부'를 수립했던 찬드라 보스는 랑군에서 행한
'자유인도' 방송을 통해 '민족의 아버지 '인 간디에게 75회 탄생기념일 축복의 인사를
보냈다.
  * : 70세의 [탄생기념논문집]에는 간디의 남아프리카 시절의 정적 스마츠 장군도
기고했었다.
  그러나 전국은 추축국의 패색이 완연하여 전해 (43년)의 카이로, 테헤란 회담에 의해 전후
처리문제가 일정에 오르고, 이미 무솔리니는 실각, 일본은 사이판을 잃고 있었다. 대세는
이미 결정된 셈이었다.
  3) 간디와 분할독립
  1944년 5 월에 석방된 간디는 건강이 회복되자 다시 정치활동을 개시했다. 그가 계속
추구한 과제는, 하나는 "중앙의회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국민정부의 수립"이며, 또 하나는
힌두교도와 회교도와의 융화, 구체적으로는 회의파와 회교도연맹과의 교섭이었다. 그러나
국민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전쟁노력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겠다는 간디의 제안은, 그런
정부의 수립은 헌법개정을 필요로 하지만 헌법개정은 전쟁중에는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총독한테 거부당했고, 회교도연맹과의 교섭도 간디의 조건을 진나가 거부함으로써
실패하였다.
 @p212
  '하나의 인도'를 추구하는 간디의 염원에는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으나, 인도 내외의
정세는 급속히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미 유럽에서는 제 2전선이 결성되고 독일군은 소련에서 구축당했으며, 일본군도 패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1945년 5월에는 독일이 항복하고, 6월에는 오키나와가 함락됐다. 전국은
이미 결판이 난 거나 다름없었다. 이 해 6월에는 회의파의 네루와 회의파 사회당의
나라양등의 정치범이 석방되었다. 8월 15일 일본은 마침내 무조건항복을 했고, 인도국민군의
지도자 보스는 대북공항에서 비행기사고로 죽었다. 2차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대전중 일방적인 전쟁협력을 강요한 영국의 처사에 분개하여 대중적인 대영
비협력운동을 전개해온 인도에서는 종전과 더불어 대중적인 반영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과정을 훑어보기 전에 전쟁중에 일어난 인도 사회의 변모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인도는 전쟁발발과 동시에 영국의 군수품공급지로 되고, 일본의 참전 후에는 직접적인
군사기지로 되었다. 그 때문에 전쟁중에 인도의 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민족자본은 현저하게 성장하여, 특히 타타, 비를라 등의 독전자본은 그 힘을 크게 강화했다.
영국인의 경영은 대개 영, 인 합판의 경영으로 되었고, 또한 영국에 채무 (7억 4, 900만
파운드)를 지고 있던 인도는 도리어 전쟁중에 영국에 대한 채권국(10억 8천만 파운드)으로
변했다. 하기는 이 대영 채권은 런던에 재 영 파운드 자금의 축적이라는 형태로 실제로는
동결되고 주도권은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자본가를 영국에 결부시켜두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쟁의 회생은 주로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업자가 짊어졌다. 300만
명이 징병당하고 200만 명이 징용되었다. 물가는 공정가격으로 평균 2배 반, 암시세로 근
10배나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임금의 증가율은 평균 3할 미만이었다. 국내물가는 엄중한
가격통제를 받고, 공출제 등에 의해서 싼값으로 매입되고 해외물자는 비싼 값으로
할당되었다.
 @p213
  식량부족으로 500만 명이 굶어죽고, 주택난으로 봄베이의 노동자 30만 명은 가두에서 잤다.
전시중의 이와 같은 노동조건의 악화, 물가등귀, 식량부족 등의 생활고가 종전 직후,
인도사상 전례가 없는 격렬하고 대규모적인 대중적 반영운동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 계기를 이룬 것이 '인도 국민군'에 대한 군사재판이었다. 즉 영국 당국은 종전 직후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에 가담했다가 영 국군한테 다시 포로로 된 많은 인도인
장병을 반역 행위라는 이유로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의 판결을 내리려고 하였다. 보스를
비롯한 '인도 국민군'은 영 제국주의와 직접 투쟁함으로써 인도 민중 사이에 자존심과
애국심을 환기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므로 네루도 오래간만에 변호사복을 입고
법정에 서서, 밖에서 인도해방을 촉진하려던 보스 등의 '위대한 역할'을 변호, 찬양했다. 그
방법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이견을 가졌던 간디도, 보스의 '애국심'에는 존경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45년 9월, 이 재판에 항의하는 대중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영국은 인도네시아와 인도차이나의 민족해방운동을 저지할 목적으로 인도병을 그 나라들에
상륙시키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영국의 조치에 반대하는 운동도 전개되게 되었다. 이
두운동은 서로 결부되어 진전했는데, 11월에는 캘커타 시내에서 대규모적인 바리케이드전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날이 갈수록 정세는 긴박해가 반영운동은 드디어 군대 내부에도 파급하였다. 1946년 2월
18일, 봄베이 항에서 영국 군함에 타고 있던 인도해병이 동원해제, 대우개선, 인종적 차별
철폐의 요구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부대는 다음날인 19일에는 영국 국기를 내리고
회의파와 회교도연맹의 기를 게양하고는, '혁명만세' '영 제국주의 타도' '인도 국민군과
정치범의 석방' '인도군의 인도네시아 철수'등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들은
해군중앙파업위원회를 조직하여 그 지도하에 정연하게 행동했다. 봄베이 시와 30만의
노동자, 학생은 일제히 파업을 단행하여 이를 지지했고, 또한 진압을 위해 파견된 인도병은
발포를 거부했다. 마침내 영국군이 파견되어 2월 21일에는 7시간에 걸쳐 전투를 계속하였고,
23일에야 파텔의 간청으로 항복했다.
 @p214
  그러나 영국의 인도 지배의 도구요, 지주인 군대내 에서까지 반영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코 근저에서 뒤흔들리게 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봄베이의 해병반란의 좌절 후에도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인도 민중의 반영투쟁은
계속하여 고조되어갔다. 즉 노동자는 인도 각지에서 파업을 감행했는데, 46년 1월에서
10월까지에 1, 600건의 파업이 일어났다. 이는 37년에서 40년까지의 4년간의 그것을 합친
수에 해당한다. 또한 46년 말에서 48년에 걸쳐 마드라스 주, 트라반코르, 하이데라바드
번왕국 등 (여기서는 식량위기가 가장 심했다)에서는 대규모적인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영국이 전후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전술한 자본가의 성장, 노농운동의
격화, 전후 세계에 미만돼 있던 혁명적 기운 등을 머리에 두고 생각해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영국정부는 새로운 사태진전에 직면하여 종래의 방법으로는 통치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식민지의 권익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무슨 새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후에는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한다는 전시의 약속도 약속이려니와 각
종파의 옹호를 조건으로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인도를 영제국내에
붙잡아두는 편이 새로운 사태하에서 영국의 권익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46년 2월 19일, 그러니까 인도 해병의 반란이 일어난 바로 그 다음날 노동당의 애틀리
수상은 3명의 내각사절단을 인도에 파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어 3월에는 '전시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선언하고, 앞서 약속한 내각사절단(일명 견리프스 사절단이라고도
한다)을 인도에 파견하여 '완전한 자치의 조기실현'을 꾀하게 하였다. 인도의 국내는
소연하였다. 노동자, 농민의 운동은 그만두고라도, 회의파와 회교도연맹과의 교섭은 간디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회의파와 회교도연맹을 주축으로
하는 연방을 구성하려던 전기 내각사절단의 기도는 결국 46년 5월 16 일에 좌절되고
말았다.
 @p215
  그러나 와벨총독은 양측을 조정한 끝에 임시 연방정부를 수립키로 하여 8월 12일 네루에게
조각을 위촉했다. 이 정부에의 입각을 거부한 진나는 8월 16일을 '직접 행동의 날'로
정했다. 4일간 캘커타에서는 최초의 종파적 폭동이 일어나 약 5천 명이 죽고 1만 5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폭동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번져나갔다.
  이러한 가운데서 46년 9월 2일 회의파와 일부 회교도연맹을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회의파 6명, 회교도 2명, 기독교, 시크, 파르시교도 각 1명)를 수립하고 네루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진나는 끝내 이런 임시조치에 반대하고 파키스탄 건국을 추구했다. 그 해 11월
말 런던에서 열린 네루, 진나회담도 실패하였고, 전 인도에서는 힌두교도와 회교도 사이에
미친 듯한 원한과 분노의 불길이 타올라 각처에서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간디는 종파적 충돌이 가장 심하던 벵골 주의 노아칼리 지방에서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설득을 위한 순례를 하고 있었다. 간디는 49개의 마을을 방문하고, 가난한
회교도들의 오막살이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제발 힌두교도와 친구가 돼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비록 거절당하더라도 다음 집에서 똑같은 부탁을 되풀이하곤 했다. 이런
식으로 간디의 노아칼리 순례행은 46년 11월 7일에서 47년 3월 2일까지 계속되었다. 간디는
이미 77회의 탄생일을 지나고 있어 보행도 수월치는 않았다. '마누'라는 하리잔 출신
양손너와 '아바'라는 종손녀를 데리고 맨발로 걸어다니는 간디의 앞길에는 반대파의
사람들이 깨진 유리조각이나 가시덤불 또는 오물 등을 뿌려놓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형극의 길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간디의 숭고한 정신에 공명하여
마을사람들의 불명을 깨우치고자 단식으로 간디를 지지해준 여성도 있었다.
  종교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따라서 국가종교라는 것을 믿지 않던 간디는 종교를 달리
하더라도 하나의 인도국민으로서 사이좋게 같이 살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p216
  간디는 비폭력과 회교, 힌두교의 화해에 의한 '하나의 인도'를 설교하며 47년 3월부터는
회교, 힌두교 소동의 지역인 비하르 주에서 유세행각을 계속하고, 3월 말에서 4월 초에 걸쳐
뉴델리에서 진나 및 마운트 바텐 총독과 회견하고,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융화를 위한
최후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회교도의 분리에 의한 파키스탄 건국을 끝까지 반대했으나
회교도연맹과의 타협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영국 노동당내각의 출현과 더불어 인도 독립이
목전에 다가옴에 따라 전시에 강대화된 회교도연맹은 간디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독립을 앞두게 되자 간디의 고원한 이상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 것은 단지
회교도연맹만은 아니었다. 회의파도 마찬가지였다. 1947년 6월 15일, 전인도 회의파위원회는
드디어 153대 29로 분할독립에 찬성했다. 회의파도 간디를 버린 셈이다. 1947년 8월 15일
결국 인도는 파키스탄과 분리해서 독립했다. 번왕국은 인도연방과 파키스탄의 어느 한쪽에
참가하는가는 그 자유선택에 맡긴다는 조건으로 형식상은 독립된 주권을 가지나 양국은
다같이 영 제국내의 자치령으로서 남게 되었다. (50년 1월 26일, 자치령 인도는 영연방의
수장으로서 영왕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치령의 지위를 벗어나 인도 공화국이 되었고,
파키스탄은 53년 3월에 공화국이 되었다.)
  루이스 피셔는 인도의 분할독립의 책임을 주로 진나의 퍼스낼리티에 돌리고 있다. 자기
밀에서 일하던 간디와 네루한테 능가당함으로써 자존심을 상하게 된 진나는 맹수로 화하여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파키스탄의 분할독립을 끝까지 고집했다는 것이다(Fischer, p.151).
물론 그런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비교적 공평한 입장에서
최후 순간에는 회교, 힌두교 양교의 타협에 의한 통일 인도를 이룩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하면, 인도의 분할독립은 근본적으로 영국의 분할통치의
소산이며, 또한 그것은 영국의 권익온존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회의파의 지도자들은 인도의 독립을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사건으로서 자랑한다.
 @p217
  회의파 의장 크리팔라니는 인도가 독립하던 8월 15일, '국민에의 메시지'에서 '수억의
남녀의 운명을 변경시키고 있는 이토록 위대한 사건이, 그토록 적은 폭력과 유혈로써
성취되었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며, 그것은 "마하트마 간디의 영감을 받은
지도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간디를 "인도 민족의 아버지" (Namboodiripad, p.196)라고
불렀다. 그러나 인도 독립의 최대의 은인이요, "인도 민족의 아버지"인 간디는 분열된
조국을 앞에 놓고 환멸을 느낀 나머지 독립축하식전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간디가 슬퍼한
것은 단지 조국의 분열만은 아니다. 분열과 동시에 인도연방의 힌두교도가 회교도에 대해서,
또한 파키스탄의 회교가 힌두교도에 대해서 가하고 있던 사상 회유의 피의 참극이 그를
참을 수 없는 비탄 속에 몰아넣었다. 피로써 피를 씻는 참극 속에서 감행되던 1, 500만 명의
민족이동으로 피난민을 운반하는 기차, 버스, 마차는 모두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문자 그대로
수라장이었다.
  분할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간디는 1947년 6월
9일의 [하리잔]지상에 극히 비관적인 감상문을 실은 바 있었다.
  현재의 인도에는 나는 이미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나는 125살까지 사는 것을
단념한다. 나는 1, 2년 더 살지는 모르나 그것은 별 문제이다. 만일 인도가 이제부터 하려고
하는 내란의 큰 물결 속에 휩쓸려 들어간다면, 나는 이제 살맛이 없다. 인도는 지금 세계의
웃음거리로 되려 하고 있다. 비 폭력운동으로 독립에까지 온 것이 아닌가. 하기는 금후
인도는 제 1급의 병력을 가지고 고도의 공업국으로 될지는 모르나 나는 비폭력주의의
상징인 수직공업이 아마도 장래에는 없어지지나 않을까 슬퍼한다. (납산방랑, p.28)
  간디는 금욕과 절제로 125살까지 장수하여 인도의 독립을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인도의 독립, 그 독립식전에 메시지 하나 보내지 않고,
간디는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융화를 위해 설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p218
  그는 이제 정당간의 조정보다도 일반 대중간의 화해에 더 기대를 걸고, 종파간의 충돌을
중지시키려고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8 월 31 일 밤에는 회교도한테 타살당한
힌두교도의 한 시체를 앞세우고, 흥분한 힌두교도들이 간디의 숙소를 습격하였다. 비통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던 간디는 9월 1 일 죽기까지의 단식을 단행했다. 민중의 흥분은
가라앉고, 캘커타시에는 다시 평화가 깃들게 되었다. 이에 3일로 단식을 중단한 간디는 9월
7일, 마지막에는 서부 파키스탄에 갈 예정으로 펀잡 주를 향해 캘커타를 떠났다. 10월 2일,
간디의 78회 탄생 일에는, 회의파 주최로 [바가바드 기타]의 주신인 시리 크리슈나의
탄생지라고 전해오고, 또한 세포이의 반란의 중심지였던 연합주의 미 루트에서 대대적인
탄생축하행사가 벌어졌다.
  자기의 탄생축하를 외면하던 간디는 "나는 온 생명을 바쳐 신에게 빈다. 회교도와
힌두교의 싸움의 불길을 끌 수 있는 힘을 나에게 주시든가 그렇지 않으면 나를 이 세상에서
떠나게 해주십사고. 생명을 걸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 매진해온 나는 더 살아서 인도의
파멸을 보고 싶지 않다" (납산방랑, p.73)고 호소하면서 회교도, 힌두교 화해행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디는 완전히 회의파에서 손을 떼고 있은 것은 아니다. 그 동안에도 회의파
지도자들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간디를 찾아와 조언을 듣곤 했지만, 그는
회의파의 진로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틀려고 애썼다.
  11월 15일 회의파 의장의 선거가 있었다. 새 정부의 수뇌인 네루와 파텔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의장 크리팔라니는 전인도 회의파위원회에서 사의를 표명했던 것이다. 이 날은 자기의
'침묵의 날'이었으므로, 간디는 종이쪽지에 의장의 이름을 써서 내밀었다. 거기에는 회의파
사회당의 지도자인 나렌드라 데바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네루도 데바를 지지했다.
 @p219
  물론 회의파 주류의 사람들은 모두 반대하여 프라사드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정권을
장악하자 이권과 지위획득에 혈안이 되어 있는 회의파우파에 실망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간디는 좌파에 의장을 맡기려고 했었다.
  그 후 간디는 급속히 부패 해가던 회의파를 순전히 국민에 대한 봉사에만 헌신하는
비정치적인 조직으로 개조하려고 했다. 이는 새삼스러운 생각은 아니었다. 네루는 1931년의
어느날 회의파의 장래에 관해서 간디와 주고받은 말을 아래와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네루)는 현재의 회의파는 자유의 도래와 더불어 자연히 소멸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간디는 회의파가 하나의 조건부로 존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조건이란
모든 당원은 국가의 유급관직에는 오르지 않는다. 만일 국가 관직에 오르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누구도 회의파를 탈퇴재야 없다는 것을 규정하는 자제적 법령을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이 밑에 깔려 있는 온 사상은 회의파가 초연한 태도를 취하고 아무런 딴 생각도
갖지 않음으로써 정부의 행정부문과 기타 부문에 커다란 도덕적 압력을 가하여 정도를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Nehru, Toward Freedom, pp.188-89)
  그러나 회의파를 이와 같은 비정치적 조직으로 개편하려는 간디의 구상은 회의파의
지도자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래서 간디는 12월 전반에는 정부 밖에 있는 그가 신임하던
동지들과 일련의 회의를 열고, 끝내 정치에 가담하지 말고 계속 '건설적 프로그램'을
추진함으로써 정부에 도덕적 압력을 가하며 정부를 편달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를
원했다.
  화해행각중 간디가 델리에 도착한 것은 1948년 1월 초였다. 당시 델리는 극히 소란스러워
험악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날마나 파키스탄에서의 피난민이 시내로 몰려들어 왔다.
폭도한데 습격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처자를 잃은 원통한 이야기가 친족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은 대회교사원을 점령해서 합숙하고 광장이란
광장은 피난민으로 가득찼다.
 @p220
  종파적 대립은 심상치 않았다. 예에 따라 비를라가에 머물고 있던 간디는 민중의 진무에
온갖 노력을 다하던 끝에 1월 13일 종파간의 화해를 위하여 죽기까지의 단식을 시작했다.
그는 단식 중에도 저녁 기도회는 꼭 가졌다. 각 파의 지도자들이 간디 앞에서 화해를
서약했기 때문에 간디의 단식은 닷새로 끝났다. 그러나 1월 20일의 '저녁 기도회'때에는
폭음이 들렸다. 담 밖에서 간디에게 수제폭탄을 던졌던 것이다. 간디는 놀라지 않았다.
당황해 하는 청중 (그는 아직도 단식으로 인한 쇠약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여 실내에서
확성기를 통해 뒤뜰에 모인 청중에게 설교하고 있었다)에게 놀라지 말고 주의해서 내 말을
들으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간디는 회교, 힌두교 양교도의 융화 이외에도 네루와 과텔을
화재시키는 일을 따로 가졌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네루, '강철 같은 사나이 '라고 하며
국수파에 가까운 파텔, 네루는 주로 독립 인도의 외교를 지도하고, 파텔은 주로 내정을
주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간디는 1월 30일 오후 4시 파텔을
부르고 있었다. 저녁 기도회전에 파텔과 만나고, 5시의 기도회가 끝난 뒤에 네루와 아자드를
불러서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간소한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파텔과 말을 주고받았다.
  시간을 엄수하던 간디는 시간이 약간 늦은 것을 걱정하며 종손녀 '아바'와 양손녀
'마누'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조금 서둘러 뒷뜰에 나갔다. 약 500명의 남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디가 기도를 하는 약간 톤은 단에 발을 올려놓을 때 돌연 한 힌두
청년이 앞으로 나와 합장을 하고 인사하는 듯한 자세로 3발의 총탄을 간디에게 퍼부었다.
"라므, 라므"라는 희미한 말과 함께 간디는 맥없이 쓰러겼다. '라므'란 간디가 숭경해
마지않던 신의 이름이다. 아하! 비폭력의 사도는 폭력에 쓰러졌다. 더구나 독립한 후에
인도인 청년에 의해서 너무나도 비극적인 최후였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한 힌두 극우파 비밀결사의 단원이었다.
 @p221
  "간디의 존재는 유해하다. 그를 죽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고 범인은 말하여 암살이
개인적 동기에 있지 않음을 비추었던 만큼 간디의 암살은 인도의 앞날이 밝지만 않을 것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은 광적인 종파적 폭동과 더불어 세계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p223
    제 5장 간디 사후의 간디주의
  우리는 이상에서 간디가 인도 민족운동 무대에 등장하기까지의 역사적 배경, 그의 특이한
사상의 형성과정과 그 내용, 그런 사상을 실천에 옳기는 방법과 그 구체적인 실천과정을
고찰해왔다. 이제 우리는 이른바 '간디주의'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고 그 유산을 검토해볼
차례에 이르렀다.
  인도의 분할독립과 간디의 순교는 인간을 개조함으로써 사회를 변혁하려던 그의 평생을
통한-사티아그라하투쟁이 결국 실패하고 말았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난 30년간에 걸쳐
우리가 해온 것은 비폭력의 저항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동적 저항이었다. 수동적 저항은
약자만이 하는 짓이다. 왜냐하면 약자는 무력저항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비폭력저항의 수법을 실천할 수 있었다면-그것은 견인불발의
용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우리는 양분된 인도 대신에 그와는 전혀 다른 자유인도의
모습을 세계에 나타냈을 것이다. 인도는 둘로 분할되고 게다가 서로 몹시 의심하고 있다.
분할된 인도는 서로 심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린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의,
식을 마련해줄 생각을 못하고 있다. 헐벗고 굶주린 수백만의 사람들은 생활필수품의 형태로
그들 앞에 자태를 나타내는 신의 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모른다. (Namboodiripad,
p.198-99)
 @p224
  나는 민중에게 나의 비폭력주의를 가르치고 실행시켰다. 그 때문에 인도는 자유를 쟁취한
것으로 나는 최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이 이상 자기기만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나의 신념의 승리도 아무것도 아니다. (납산방랑, p.195)
  독립을 계기로 편견과 사리에 사로잡히게 된 사람들의 저열한 모습을 쓸쓸한 심정으로
지켜보며 간디가 쓰디쓰게 내뱉은 이런 술회야말로, 간디주의는 "영국인에 대한투쟁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의 전략과 전술로서"는 '승리'했으나, "새로운 사회철학, 인간을
재생시키는 새로운 방법으로서"는 '완전히 실패'했음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남부디리파드는 평하고 있다(Namboodiripad, p.210).
  간디는 인도의 현실, 특히 농민대중과 밀착하면서 특이한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이상을
악착같이 고수하던 '실제적 이상주의자'였다. 그런데 남부디리파드에 의하면 간디의
이상주의는 강점과 약점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지만, 강점은 요컨대 반재반봉건투쟁에
대중을 궐기시키고 그들을 조직한 데 있으며, 약점은 비폭력주의를 엄격히 고집함으로써
제국주의, 봉건주의, 자본주의의 삼중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노동자, 농민대중을 사실상
억제하는 결과로 되었다는 데 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반제반봉건을 위해 인도의
민중을 궐기시키고 조직하기를 원하면서도 대중의 행동과 투쟁이 엄격히 제어되기를 원하던
부르주아지의 요구와 일치했다는 것이다. 물론 전민족의 이익을 수호하고 추구하던
간디에게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특히 옹호하려는 동기는 추호도 없었으나, 간디의
실제활동은 결국 그와 같은 결과로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는 남부디리파드는 만년의 간디의 처지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반제국주의 투쟁의 시기에, 그가 고집하던 이상주의가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있어서 실제로
유효한 정치적 무기로 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간디는 '민족의 아버지'로 되었다.
 @p225
  또한 그의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 많건 적건 부르주아지한테서 고립당한 것은 그의
이상주의가 독립 후의 시기에는 부르주아지의 이기적 이익에 대한 하나의 장애로 되었기
때문이다" (Namboodiripad, p.223)라고 보기에 따라서는 간디의 생애는 인도자본주의의
배양과 발전을 위해 바쳐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는 인도 민족자본의
은인이었다. 그러므로 사티아그라하 투쟁과 '건설적 프로그램'의 덕택으로 성장, 발전한
인도 민족자본은 독립을 쟁취하자 간디의 은혜를 잊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간디는
위대한 정치지도자였다. 따라서 정치적인 면에 국한해서 보면 상술한 남부디리파드의
견해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간디의 이상주의는 부르주아지에게 이용당한 데 불과했을까? 간디주의는 인간을
개조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을까? 인간을 개조하려는 간디주의가 당장에는 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실_패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일이요, 또한
독립 후 부르주아지가 간디의 이상주의에 반대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부르주아지를
위하는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언다. 그리고 간디가 악착같이 고집하던 비폭력주의는
부르주아지한테 이용당한 것은 사실일는지 모르나, 비폭력주의에 대한 남부디리파드의
비판은 당시의 환경의 제약을 무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간디의 종교적 신앙을
너무 경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순수한 정치적 비판은 간디의 비정치적인 면 특히 인간적,
종교적인 면을 소홀히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간디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인도의 종교심을 대표했다. 그는 자신의
이성과 도덕의식을 통해서 과거의 유산을 재검토하였고, 현대 서구의 지적 및 사회적
운동과 접촉함으로써 현대 서구사상을 필요에 따라 받아들여 이를 동화하였다.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인도의 종교심은 단일한 궁극적 가치-절대적 진리의 실현을 통한
구원-를 믿는다. 아름다움, 사랑, 지식과 같은 가치는 위에 든 하나의 위대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단순한 수단이라고 본다.
 @p226
  물질적인 쾌락은 정신적 발전에 대한 장애라고 비난되거나, 기껏해야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한도 안에서 허용되는 데 불과하다. 인생 그 자체도 특정 단계에서는 내버려야 할,
진리를 가리는 하나의 베일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간디의 인생철학은 그가 개인적인 정신적 경험을 통해서 재발견하고 재평가한 인도의
종교심으로 주로 구성되고 있다. 인도의 종교심을 재평가하는 데 주요한 특징은 그가
아힌사 (사랑 내지 비폭력 )를 진리의 실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아힌사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와 거의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데 있다. 동시에 그는
아무런 주저 없이 현대 서구사상에 자기의 기본적인 인생철학과 조화되는 많은 이념을
섭취, 동화함으로써 그것을 자기의 인생철학의 불가결의 부분으로 만들었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개념은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이었으나 그가 특히 그것을 강조한 것은 19세기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영향 받은 바 컸었고, 그의 국가 없는 사회는 자유주의의 극단형이었다.
그의 간소한 생활은 러스킨한테, 브레드 레이버와 사티아그라하는 톨스토이한테 영향받았다.
그의 인생철학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아힌사도 단순히 고대 인도의 전통의 일부로서
받아들인 종교적 이념에 그치지 않고, 우애, 평등, 합리성, 관용 등과 같은 서구의 민주주의
정신에 영향받은 어딘가 새로운 것이었기도 하다.
  그러나 크리팔라니의 말대로, "간디는 인도의 눈을 가지고 서양을 보았다." 그는 "거의
인도 그 자체일 정도로 인도적"이었지만, "그가 서양에서 얻은 것은 당장에 그의 수중에서
인도화되었다." "그는 인도의 정신과 매우 잘 조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중세주의는
네루의 현대주의보다도 더 근대적이 되는 수가 있었다. 그것은 보다 유효하게 인도의
필요에 응하고 또한 인도도 즉시 감응했다." (Kripalani, p.81-82) 간디는 유럽 중세의
카톨릭의 성자다운 면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도의 농민과 언제나 밀착하고 있던 실제적인
지도자였다.
 @p227
  그러니까 네루도 "간디는 사상적으로는 때로 시대에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행동에서는
근대 인도의 가장 위대한 혁명가였다" (판본덕송, p, 213)고 평하고 있다.
  실로 간디는 많은 면에서 인도에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했다. 종교의 영역에서 그는
전통주의와 권위에 대한 맹종에 반항함으로써 개인적 탐구와 합리적 사고의 길을 열었다.
정치면에서 그는 인도 민중에게 어떤 형태의 폭정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싸우라고
가르치고, 자유를 위한 비폭력적 투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티아그라하의 새 무기를
고안해냈다. 사회생활에서는 그는 불가촉천민제, 카스트간의 불평등, 부인의 예속과 격리, 그
밖의 온갖 사회적 폐해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경제생활에서는 그는 신탁과 비소유의
교의를 가르침으로써 사유재산제도의 토대를 흔들리게 하였다.
  그러나 간디는 무엇보다도 종교적 인간이었다. 그는 사터아와 아힌사의 사도였다. 그는
사티아에로 인도하는 아힌사의 길을 스스로 발견하고 남에게 가르쳤다. 개혁, 진보, 혁명을
위한 그의 온갖 노력은 아힌사의 법에 의해서 지배됐었다. 따라서 그는 사회, 경제생활의
낡은 주형을 외부의 힘으로 파괴하는 데 반대했다. 그런 낡은 외형이 자동적으로 새로운
형으로 바뀌게 하기 위하여, 그는 정신의 내적 변화를 일으키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그는
보수적으로, 그리고 낡은 생활형을 일격에 파괴해버리려는 조급한 우상파괴주의자에게는
반동적으로 보였다. 남부디리파드가 간디의 비 폭력주의를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요, 네루가 고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네루는 "패배자에 대한 그 (간디)의 뜨거운
사랑과 동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필연적으로 이런 패배자를 낳고 그것을 짓밟는 제도를
지지할까, 또한 그는 그처럼 비폭력에 대한 정열을 가졌으면서도, 왜 전적으로 폭력과
강제에 의거하는 정치적, 사회적 조직을 지지하는 것일까" (Nehru, Toward Freedom,
p.318)라고 다년간 고민했다.
  그러나 네루도 부언하고 있다시피, 간디는 현존 질서의 지지자는 아니었다.
 @p228
  자기가 그리는 이상사회인 라므라자의 실현은 까마득한 일이므로 그는 현존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폭력에 의해서 현존 질서를 변혁하는 대신에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실현 가능한 이상적 목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상적 목적은 고대
인도에 존재했던 식의 자치적이며 자급자족적인 촌락을 이룩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러한
촌락이 자유와 아힌사의 성장발전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의 촌락경제는 자기가 생각하는 아힌사에 실제로 의거하고 있었다는 환상은 갖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한 아힌사는 오직 그러한 소박하고 지방분권화된 사회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만 개인은 절대적 진리의 추구에 진심으로 몸을
바쳐 가장 가까운 길로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간디의 궁극적 이상은 순수한 아힌사에 입각하는 국가 없는 사회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사회를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으므로, 필요한 준비를 하기 위한 과도기에는
현실과 타협을 했다. 그 결과 간디는 가장 적게 통치하며 가장 많이 자유를 부여하는
민주국가를 수락하고, 그런 민주국가 안에서 상술한 소박하고 지방분권화된 사회를
이룩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이룩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통해
인도의 독립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면 과연 독립 후의 회의파 정부는 이런 사회를 이룩하려고 하고 있을까? 간디가
서거한 후 회의파 정부를 지도한 네루는 수상으로 시정함에 있어서, "간디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의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위선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간디의 말을
하면서 일보일보 그를 속여왔다. 이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현실이
우리에게 특수한 방법을 취하게 한다"(판본덕송, p.267)고 말하였다.
  일찍이 1922년 차우리 차우라 사건으로 제 1차 불복종, 비협력 운동이 급작스레 중지
당했을 때, 네루는 옥중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고 분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도 회의파의 모든 사람에게도 비폭력의 방법은 종교도, 이론의 여지 없는 신조나
교의도 아니었고, 그렇게 될 수도 얼었다. 그것은 정책이요, 모종의 성과를 약속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은 그 성과를 가지고 종국적인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개인으로서는 그것을 하나의 종교 흑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신조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나 정치단체로서는 그 단체가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Nehru,
Toward Freedom, p.28)
 @p229
  그 이래로 네루는 이데올로기상으로는 몇 번이나 간디를 뛰어넘고, 정치운동의
실천면에서도 몇 차례나 간디가 취한 조치에 분개하여 그를 심하게 비판하면서도, 배가
항구에 되돌아가듯 간디의 옆을 영영 떠나지 못하고 가장 충실한 신봉자로 남았다. 그
이유는 간디가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는 인도의 현실 특히 인도의 농민, 농촌 때문이었다.
그는 간디에 대해서 의심이 생길 때마다, "우리가 간디보다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간디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인도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거대한 헌신과 충성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은 대중의 욕구와 열망에 통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같은 책,
p.19)고 생각하면서 간디로 부터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4년에 이르자 네루는 간디에 대한불만이 점점 높아졌다.
  "돌연 알리포르감옥의 독방에서 나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함을 느꼈다... 쌔가 경험한 많은
어려운 교훈 중에서 가장 어렵고 제일 고통스런 문제에 지금 직면하고 있다. 즉 그 어떤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에서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는 없다. 인간은 인생을 홀로 여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남에게 의지하면 비탄을 초래한다" (Nehru, Toward Freedom, p.312)고
생각하게 된 네루는 언젠가는 간디와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지만 네루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이상으로 네루를 알고 있던 간디는 네루의
실제적인 협력을 가장 중시하며,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이론상의 차이에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간디의 제자요 동지인 네루-비폭력을 하나의 정책이라고 보던-는 언젠가는 비록
진리에로 인도하는 사랑의 법으로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진정한 평화에로 인도하는
인간성의 법으로서 비폭력을 믿게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p230
  즉 간디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네루는 자기와 견해를 달리할지 모르나, 자기가
죽고 나서 전적인 책임을 두 어깨에 결어지게 되면 네루도 점차 자기와 같은 견해를 갖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것이 곧 많은 유능한 지도자 가운데에서 간디가 자기의 정치적
후계자로 네루를 택한 이유였다.
  서양을 먼저 알고 나서 인도를 발견한 네루, "귀족적인 민중주의자요,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혼혈아"(이것이 존 간서의 평이다. 납산방랑, P.141)라던 네루, 간디와는 다른 형의
이상주의자요, 간디에 못지 않게 현실주의자였던 네루, 그는 인도의 세속심을 대표하고
있었다. 간디가 "안에서 인도를 변혁했다"면, 네루는 "밖에서 인도에 영량을 미쳤다"
(Kripalani, p.81).
  정권을 장악한 네루는 우선 번왕국의 귀속문제를 에워싸고 파키스탄과 싸우는 한편,
국내의 좌우파 세력과 싸워야 했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중도적인 민주사회주의, 밖으로는
중립주의의 노선을 지향하면서, 간디가 그리던 중세적인 지방분권적 사회가 아니라
현대적인 사회주의형의 사회를 이룩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네루에 대한
간디의 예언이 어느 정도 적중되어갔다. 앞에서 말한 대로 간디는 인도국민을 영도하는
책임이 자기한테서 네루에게로 넘어가고 네루가 인도와 세계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그도
비폭력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즉 절박해 있는 파멸에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비폭력을 하나의 정책으로 채택하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고,
그것을 하나의 신조로서 수락하여 전세계에 전파해야 함을 깨닫게 되리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물론 미시적 내지 현상적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지만, 거시적 내지 본질적으로 보면,
네루는 비폭력을 그의 대내외정책의 초석으로 만들고, 평화의 메시지를 간디가 사용한
말들을 세속적인 말로 옮겨서 전세계에 전파했다고 할 수 있다. 하기는 중국과의 국경분쟁
(1962)으로 차질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네루의 뒤를 이은 샤스트리(1964-66)도 기본적으로는
네루의 노선을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p231
  게다가 회의파의 분열, 인-파전쟁, 식량위기, 그리고 비상사태선언 등 숨가쁜 정국의 변전
속에서 인디라 간디는 때로는 무력에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친소정책을 쓰기도 했으나,
철저한 치안유지대책과 사회개혁으로 내정위기를 극복, 대내적 안정을 되찾자
비동맹중립외교로 돌아갔으니, 그녀도 긴 눈으로 보면 부친인 네루의 노선에서 크게 이탈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간디의 비폭력의 유훈을 충실하게 지킨 이는 네루보다도 비노바
브하베(VinobaBhave)였다. 수백만에 달하는 농촌의 토지 없는 농민에게 토지의 소유권
혹은 사용권을 부여하게 될 토지의 공정한 재분배나 집단적이고 협동적인 농장의 도입은
인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만일 인도가 유혈적인 폭력혁명을 피하려면, 가능한 한 단시일 안에 해결되지
않으면 안된다. 간디의 정신에 합치되는 이상적인 해결책은 토지소유자를 설득하여 토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하기 위하여 그들의 토지의 일부를 양도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
촌락에 있는 모든 토지를 전촌락민의 집단적 소유로 만드는 일이라고 하겠다. 이는 매우
단순하게 생각될는지는 모르나, 재산에 대한 관념은 몹시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고
있는데다가, 특히 토지에 대한 애착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수백만에 달하는 대소 지주한테서 그들의 살과도 같이 생각하고
있는 토지의 일부를 폭력을 사용함이 없이 양도받는 일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기적이다.
자와하를랄 네루의 정부도 이러한 기적은 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간디가 서거한 후, 순수한
비폭력의 길을 걷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지도자인 비노바 브하베는 이 일을 했다.
  비노바 브하베는 간디의 생존시에는 다른 많은 지도자들만큼 일반민중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못했다. 간디의 충실한 제자로서의 그의 이름이 전인도에 알려지게 된 단 한 번의
기회는 1940년 간디가 최초의 개인적 사티아그라하 운동자로서 그를 택했을 메였다.
그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그가 간디의 충실하고도 헌신적인 제자이며, 간디가 그것을 위해
싸워온 이상과 원리를 선전하고 실천하는 과묵, 무사한 활동가임을 알게 되었다.
 @p232
  이 사건이 있은 후 10년이 더 지나, 그의 이름이 다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1951년에 그가 시작한 '부단운동' (Boodan yajna)은, 자유인도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토지문제에 간디의 원리를 바로 적용한 것이라고 하여 크게 환영받았다. 그것은 또한
지주에게 강제로 그 토지를 내놓게 하여 그것을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고통 많은 방법에
대신하는 것으로 대환영을 받았다. 즉 테렌가나(*) 에서처럼 공산당의 지도하에 농민이
채용했던 토지의 혁명적 점거의 방법을 배척하는 동시에 회의파 정부가 채용한 입법에 의한
토지개혁방법도 배척하고, 그 대신에 그는 토지소유자가 자발적으로 토지를 내놓는 방법을
제창했다. "누구도 토지를 갖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소유지의 6분의 1을 내놓는다"는
비노바 브하베의 슬로건 아래 전국을 돌아다니며 토지를 기증받아 농민에게 분배하는 일이
곧 부단운동이다.
  * : 1943년 하이데라바드 번왕국의 테렌가나지구에서 농민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자연발생적 성격의 것이었으나 46년이 되자농민위원회와 파르티잔부대가 조직되고
있었다. 조직의 선두에 서 있었던 것은 인도 공산당과 지방민의 조직인 얀든라
마하사바였다. 1948년에는 500만의 농민, 3천의 농촌을 포함하는 테렌가나 지방의 대부분에
인민권력이 수립되고 지주의 토지는 몰수되어 빈농과 농업노동자에게 분배되었다. 1948년
인도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번왕국을 점령하고 49년, 8명의 공산당원을 교살하고, 4천 명의
농민을 투옥하여 봉기를 진압하였다. 이런 사태 진전에 충격을 받아 비노바 브하베는
부단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부단운동은 여러 단계를 거쳐 그람단(Gramdan)운동으로 발전했다. 비노바는 이번에는
지주들의 소유지의 6분의 1의 양도로서는 만족하지 않고 각자가 전재산을 양도하는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즉 모든 토지는 촌락공동체 전체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각하여
촌락 전체의 토지를 기부하는 운동으로 진전되었다. 중앙정부와 주정부는 이 운동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비노바를 정신적으로 지지하고 물질적으로 후원하였다.
 @233
  그리하여 인도정부의 5개년계획에서는 촌락개발계획과 그람단운동의 밀접한 협력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비노바의 경우에도 간디의 경우와 꼭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지적 능력이나 기타의
자질에서는 훨씬 그를 능가하고 있는 많은 인사들이 그를 찾아와서 그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간디 생존시, 정치권력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건설적 프로그램에 헌신,
봉사하던 이들이 이부단-그람단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비노바 브하베의
부단-그람단운동은 단지 토지개혁의 운동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촌락민
자신의 주도하에 인도 농촌의 도덕적 및 문화적 재건을 위한 하나의 사회운동이었다.
그것은 무사봉사를 통해 촌락민에게 자주정신과 자조능력을 키우는 하나의 종교적 사명을
다하였다. 그것은 5개년계획과의 관련하에 시작된 촌락개발계획의 정신적 보완물이었다.
만일 촌락민한테서 자발적인 열성이 일어나고, 그들의 주도하에 정부가 협력한다고 하면,
그것은 10-20년 안에 인도의 전모를 실제로 변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인격적이며
융통성도 혼도 없는 정부-비록 국민정부라 하더라도-의 기구를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비노바는 부단-그람단운동을 통해 이런 충동과 열광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그것은
단지 주는 이와 받는 이뿐 아니라 주는 이에게 주도록 설득하는 운동원에게도 새로운
열정을 일으켰다. 이런 열정은 진보를 위한 정부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그 무엇을
주었다. 그런 열정은 부단-그람단 운동을 진정한 비폭력혁명의 수단으로 만들어, 촌락과
촌락민에 대해 간디가 생각했고 비노바가 생각한 자유를 보장했으며, 비록 비노바의 노쇠로
인하여 1972년 이후에는 이 부단-그람단운동이 실질적으로 중단상태에 있으나, 그 정신은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길이 살아남아 있는것이다.
  오늘날 인도의 독립을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우던 사람들은 여러파로 분열되고 있다.
간디의 사상과 네루의 이념에 만족하지 못하던 일부의 사람들은 일찍이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p234
  이 정당의 중력은 인도 밖에 있으니 만큼 그것은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논의의 범위 밖에
있다. 원래는 네루를 따르며, 회의파 안에 머물면서 회의파를 민주사회주의로 전환시키려던
하나의 집단, 즉 회의파 사회당은 독립 후 회의파 정부의 정책에 크게 실망하고 독립된
정당인 사회당을 만들었다. 이것은 후에 인민사회당으로 발전했다. 이 당은 네루가 제시한
길을 따를 것을 요구하며, 네루 자신은 그 길에서 멀어졌다고 주장한다. 회의파의 진실로
주요한 부분인 둘째 집단은 네루와 그를 뒤이은 샤스트리 그리고 인디라 간디 영도하의
여당으로 되었다. 셋째 집단은 비노바와 기타의 간디의 동지들을 따르는 정통파 간디주의의
'건설적 프로그램'운동자들이다. 이 세 그룹은 때로는 합류하는 듯하면서도 결코 실제로
합치지는 못하는 평행선을 걷고 있다. 간디가 만일 살아 있었다면, 이런 사태를 보고
실망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간디주의가 완전히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위에서 살펴본 그대로이다.
  그러면 간디주의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 물론 간디주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무엇-가령 사티아그라하냐, 정치, 경제력의 분산이냐, 또는 종교의 정치화 내지 정치의
종교화냐-이라고 보는가에 따라 그 평가는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반디오파드야야가
결론을 내리고 있다시피, 간디주의는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점에서는 그 가치가 인정돼야 할
것 같다 (J. Bandyopadhyaya, "An Assessment of Gandhism, " Quest 37, spring, 1963,
pp.20-21).
  첫째로, 비록 인도에는 비폭력의 오랜 전통이 있었고, 또한 간디는 톨스토이와 소로한테서
영감을 받았다고는 하더라도, 비폭력적 저항을 조직하는 하나의 기술로서의 사티아그라하는
인간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이론과 방법에 대한 간디의 독창적인 공헌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티아끄라하의 일반적 이론에는 논리적 난점이 있고, 또한 현재의
인간사회에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신기한 기술이며
특정 상황 아래에서는 다른 방법과 병행하여 전세계에 걸쳐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p235
  둘째로, 간디는 비록 신약성서와 서구사상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더라도 그의
사티아그라하의 이론과, 기본적으로 인도의 전통에서 끄집어낸 고도로 지방분권화된 정치,
경제체제를 통한 인도 국민의 스와라지에 관한 이론은 거의 불모상태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는 이 방면의 현대 인도사상에서 독창성을 나타낸 극소수의 예의 하나이다.
  셋째로, 수천년간에 걸쳐서 성도, 화신, 도덕적 개혁가들이 숭고한 인간적
이상을 설교하면서도 좀처럼 현실과 대결하여 사회제도를 재조직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의 철학적, 도덕적 전통의 고상한 요소와 인도사회의 현실적 구조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간디는 비단 인도뿐 아니라 온 인류역사에서 자기의
생활주변의 사소한 일들과 관련하여 사회를 구체적으로 개조하려고 노력한 회귀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간디주의에는 도덕적 가치를 중핵으로 하는 사회조직을 이룩하려는
고상한 기도가 있다.
  넷째로, 간디주의에는 그것이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하는 많은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 즉
영원한 진리추구, 성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낙오한 자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대하는
고독한 순례자의 겸양, 단호한 결심, 용기, 자기신뢰를 가지고 적대세계에 도전하는 떳떳한
태도 등이 그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실일로의 생애를 통해 간디가 나타낸 민중에 대한 희생과 봉사의 정신,
그리고 지도자로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는 오늘날 인도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정신적인
지주로 되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원래 간디가 생각하던 민주주의란 수라든가 다수, 또는 보통 의미에서의 대표라든가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것은 봉사와 회생에 의거하는 것이며 도덕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인류의 극빈자들과 완전히 일체감을 가지고 그들보다 나은 생활을
바라지 않으며, 가능한 한 그들의 생활수준에 접근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만일 민주주의자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면, 나는 생래의 민주주의자" (Nehru, Toward
Freedom, p.189)라고 간디는 말하였다.
 @p236
  이는 물론 서구식 민주주의 개념과 다르다. 그러나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치중해서 보면
간디 이상의 민주주의자는 있기 어려울 것이다. 간디 자신이 민주주의자에 그친 것은
아니다. 그는 인도에서 민주주의의 터전을 닦는 데 실제로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인도는
간디의 새 교육, '건설적 프로그램 ', 사티아그라하 투쟁의 덕분으로 자주독립의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과 중산계급의 발전 등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을 많이 갖추게 되었지만, 특히
그의 영도하에 이룩된 회의파의 구조개혁과 조직확대는 결정적인 의의를 가진다. 인도가
독립 후 비교적 순조롭게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회의파가 전국적
규모로 일반대중에 파고듦으로써 얻게 된 자치능력과 주정부에 참여함으로써 갖게 된
행정관리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간디가 키운 '건설적 프로그램' 운동자들은 정부
밖에서 정부에 도덕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인도의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렇듯 간디의 정신은 여전히 인도에 살아 남아 있지만, 그러나 그의 정신은 인도에
국한되지 않고 널리 세계에 퍼져, 현재에도 식민지해방투쟁과 인종차별반대투쟁을 고무하며
그 지침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일찍이 로맹 롤랑은 간디야말로 "3억의 민중을 궐기시켜
대형제국을 진감시키고, 거의 2천 년 이래 인류의 정치에 제일 강력한 운동을 도입한 인물"
(Rolland, p.34)이라고 평했지만, 최근에도 아놀드 토인비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간디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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